일곱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오붓해지고 있습니다. ^^

공무원 시험 과정은 한번 훑어 보는 것만도 쉬운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2016년 통계로 공시족이 25만 7천명이라는데, 해마다 이 정도의 인원이 이렇게 열심히 한국사를 공부하면 얼마 안가 우리 국민 모두가 참으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갖겠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이라는 것이 암기 위주로 되어 있어 지식의 총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지혜도 그만큼 늘어날는지, 어떤 역사관을 갖게 될런지에 대해서는 추측하기가 힘듭니다. 공무원을 꼭 이렇게 뽑아야 하는지, 단순히 시험방식의 문제가 아님은 알지만 우리 모두가 되돌아보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 침탈 상황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진도는 천천히 나갔지만 워낙 내용이 세세하여 연도와 단체 등을 외우는 것은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All in One 2.0> 

 

<전한길 한국사 All in One 2.0>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국내외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시기별로 통치 방법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1910년대는 무단 통치기로 일제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하여 경제적 침탈을 자행하였습니다. 1920년대는 문화 통치기로 산미증식 계획을 입안하여 곡물을 수탈하고 농촌 경제를 파괴하였습니다. 중일 전쟁 이후 즉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민족말살 통치로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하여 우리 민족을 전쟁에 강제 동원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All in One 2.0>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의 실상은 민족 분열책과 기만정책입니다.  1919년에 부임한 총독 사이토는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친일파를 육성하였습니다. 총독부는 1921년 이광수를 회유하여 중국에서 귀국시키고, 같은 해 3.1운동으로 복역 중이던 최린과 최남선을 가출옥시켜 문화운동을 담당하게 합니다.  1920년대부터 대거 양성된 친일파 지식인들은 1938년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지자 각계 분야에서 인적 물적 수탈의 앞잡이로 나서 동족을 압박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All in One 2.0> 

 

1936년에 부임한 총독 미나미는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내선일체, 일선동조를 주장하였습니다. 일선동조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조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으로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All in One 2.0>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방응모, 경성방직 사장과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김성수,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활란, 이광수,최남선, 모윤숙등은 1938년 친일단체인 국민 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참여하여 징용등 전쟁 참여와 정신대 지원 등을 독려하였습니다. 국민 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은 1940년에 관변단체인 국민 총력 조선연맹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식민지 청년을 징병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반란 등의 염려가 있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일제는 철저히 민족정신을 말살하여 내선일체를 완전히 이룬 후 1950년대부터 징병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병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1943년 학도병제, 1944년 징병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All in One 2.0>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역사는 이미 일어난 사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끊임없이 뒤바꾸는 역설적인 학문입니다.  사관에 따라 역사는 끊임없이 재배치, 재서술, 재평가됩니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사실이 분명 존재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민족 대다수는 착취당하고 고통받았습니다. 삶은 피폐해지고, 이름을 뺏기고, 우리말조차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소수의 친일파들 이외에 그 누구도 일제의 강압적 통치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3.1만세 운동이 그 뚜렷한 징표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주는 3.1운동과 임시정부를 중점적으로 공부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 노트>

p 107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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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명이 함께 개항기를 끝냈습니다.

다음주부터는 강점기입니다.

복잡한 내용에 비슷한 이름의 많은 단체들이 나올텐데요.

강점기를 마음에 새기면 불평없이 공부하게 되겠지요. 

 

<전한길의 합격생 필기 노트>

p 103 ~ 106

 

 

아래 사진은 근대 대표 건출물들입니다.

출처는 <전한길의 한국사 2.0 all in on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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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덞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개항기 정치 부분을 끝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독도는 우리땅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무슨 근거로 독도에 대한 야심을 부리기 시작한 걸까요? 독도를 울릉도와 구분하여 표기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라고 합니다. 중종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5세기~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도총도라는 지도가 실려있습니다. 팔도총도는 울릉도와 독도가 표기된 최초의 지도입니다. 17세기말 숙종 때는 민간인 안용복이 직접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이후 일본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가지 못하도록 도해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900년 10월 중앙 관보에 게재된 대한 제국 칙령 제 41호는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승격하고 독도를 관할하게 한다고 명기하였습니다. 칙령 제 41호에 의해 국제법 체계에서도 독도가 대한 제국 영토임이 확인되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일본도 오래전부터 여러 문헌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확인해왔습니다. 1785년에 일본이 편찬한 삼국접양지도에 분명히 독도를 조선땅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870년 일본 외무성 고관들이 조선 정세를 몰래 살펴보고 돌아가 작성한 <조선국 교제시말 내탐서>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정밀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기 위해 자국 관리들에게 내려보낸 지령문(1877년 태정관 지령)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는 조선 영토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 남아 있는 많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05년 2월 러·일전쟁 중에  시네마 현 고시를 통해 독도를 자국 영토로 일방 편입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1년 뒤 시네마 현의 사무관이 독도 조사를 마치고 울릉도 군수에게 통고하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상실된 상태에서 우리 정부는 항의할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 최고 사령관은 각서에서 일본의 영토가 4개 섬과 인근 작은 섬들로 제한 될 것이며, 독도 (리앙쿠르 락)가 일본 영토에서 제외됨을 명시하였습니다.  1951년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연합군 사령부의 지령이 유효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명문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강화조약에 우리나라 모든 섬을 열거할 수 없으며, 일본이 강화 조약 직후 독도가 일본의 관할 구역에서 제외되었음을 확인하였다고 반박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다음주는 개항기 경제, 사회, 문화를 공부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95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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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오늘 복잡하게 전개된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을미 개혁, 대한제국과 독립협회에 대해 공부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1894년 1월 고부민란으로 촉발된 동학 농민 운동은 6월 발발한 청·일 전쟁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고종은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끌어들입니다. 10년 전 체결된 텐진조약을 명분으로 일본군도 제물포에 상륙합니다. 전주의 동학 농민군과 정부군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급히 전주화약을 체결하지만 청과 전쟁 할 꼬투리만 찾고 있던 일본군은 경복군을 점령하고 청을 선제 공격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청·일 전쟁과 동시에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개혁은 갑오년과 을미년을 거치며 3차까지 진행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진압된 후 1차 갑오 개혁을 주도했던 군국기무처는 해산되고 친일 성향이 강화된 2차 갑오 개혁이 실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시모노세키 조약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위세가 약해지자 명성왕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을 견제합니다. 위기를 느낀 일본이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합니다.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고종을 감금한 상태에서 일본은 다시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3차 을미개혁을 실시합니다. 1896년 고종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고종의 초청으로 입국한 서재필 (필립 제이슨)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합니다. 초기 독립협회는 관민공동 단체였으나 독립협회가 민중을 조직하여 정치 운동을 전개하자 고종은 독립협회를 탄압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활발히 활동하던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갖습니다. 대한제국과 독립협회가 손을 잡고 외세에 대항하여 자주적 근대적 개혁을 실시했다면 역사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고종은 1898년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한 이후 1899년 대한국국제를 선포하고 본격적인 광무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민중에게 등을 돌린 대한제국은 얼마 못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됩니다.

 

  <전한길 한국사  2.0 all in one>

 

 

다음주에는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 등을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합격생 노트>

  p 95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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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첫 시간이었습니다.

여덟명이 참석했습니다.

두명이 더 하차하여 총인원은 아홉명입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all in one 2.0> 

 

우리나라 근대사의 기점은 고종이 즉위한 1863년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을 대신하여 10년간 섭정을 합니다. 정조가 죽은 뒤 순조-헌종-철종으로 이어진 3대 60여년 간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어느 정도의 성과도 이루었습니다.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과한 호포법은 대표적인 개혁 정책입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all in one 2.0>

 

대원군의 대외정책은 통상수교 거부 정책입니다. 19세기 초부터 한반도 앞바다에 이양선들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1860년에는 러시아가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합니다. 연해주로 인해 조선은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세력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함포를 앞세워 개항과 통상을 강요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주전척화의 기치를 높이고 통상수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발생하였습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all in one 2.0>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은 친정을 시작합니다. 대원군은 실각하고 명성왕후의 친정인 민씨들이 권력을 잡습니다. 민씨정권은 온건개화파들과 손을 잡고 근대화를 추진합니다. 1876년 일본과의 수교를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와 연이어 조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들 조약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고 경제적 침략을 내포한 불평등조약입니다. 개항이후 백성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지고,  수탈이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불만이 폭등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임오군란은 조선에 청군과 일본군이 주둔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더욱 위태로운 처지에 놓입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all in one 2.0> 

 

임오군란 후에 청과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청나라 상인들이 실질적으로 조선 내지에서 자유로운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상권을 선점했던 일본이 경쟁적으로 무역규칙을 개정하고, 조선이라는 시장을 놓고 청과 본격적인 경제전쟁을 벌여나갔습니다. 조선의 상인들도 나름대로 대처해 나갔지만 1883년부터 1894년까지 10여년에 걸쳐 청과 일본이 빠른 속도로 조선의 경제를 잠식하였습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all in one 2.0>

 

경제침탈은 경제적 압박과 병행하였습니다.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은 모두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자 조선은 러시아를 통해 청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1884년에 청의 알선 없이 독자적으로 조러 통상조약을 맺고 갑신정변 직후에는 조러비밀협약도 추진하였습니다. 청의 간섭으로 비밀협약이 실패하고 세상에 알려지자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영국은 1885년부터 2년간 거문도를 점령하고 헤밀턴이라고 불렀습니다. 청, 일본, 영국, 러시아가 조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인 부들러와 유길준은 중립화 제안을 했지만 고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주는 1894년에 중첩되어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중심으로 공부하겠습니다.

 

<전한길의 한국사 합격생 노트>

 p 91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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