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 중에서 가장 힘들지는 않지만 가장 이해하기는 어려운 공부를 하였습니다.

성리학 내부의 사상 논쟁입니다.

16세기 사단칠정 논쟁, 이기논쟁, 18세기 호락논쟁을 조금 이해해보려 하였습니다.

열 명이 함께했고요.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공자를 원류로 삼은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공자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둔 (志學) 이후, 15년간 공부를 하였습니다.

30세에 배움에 자신을 얻어 세상에 나가게 됩니다 (而立). 

무엇인가 조금 알게되자 자기 뜻을 펼쳐보려 한 것입니다.

이무렵 제나라의 경공과 안영이 찾아와 공자에게 진나라 목공이 패자가 된 원인을 물었습니다.

패자가 되고 싶었던 경공이 부국강병책을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답이 공자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공식적 발언입니다.

사마천은 『사기』의 <공자세가> 편에 이 내용을 기록함으로써 공자 사상의 기본이 정치라는 것을 밝혀주었습니다.

공자는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를 평생동안 묻고 답했던 것입니다.

춘추전국의 난세에 만발했던 제자백가는 이런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 사상이 주를 이룹니다.

유학을 국가에서 공식 이념으로 받아들인 한나라 때에도 유학은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 수, 당을 거치며 유학이 쇠퇴했습니다.

이 시기에 철학적 사색을 주로하는 불교, 도교 등이 유행했습니다.

송대에 다시 부상한 유학은 이런 영향을 받아 철학적, 사변적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사조를 신유학 혹은 이학, 도학이라고 합니다.

신유학을 주희가 집대성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부르지만, 성리학은 주희의 독자적 사상은 아닙니다.

협의로 볼 때만 주자학이 성리학과 일치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성리학은 13세기 말 충렬왕 때 안향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정착된 성리학은 16세기에 꽃을 피웁니다.

16세기 성리학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 주제는 이기론理氣論 이었습니다.

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 기氣를 중심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주리론主理論은 이언적에서 이황으로 이어져 영남학파가, 주기론主氣論은 서경덕에서 기대승, 이이로 계승되어 기호학파가 주장하였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이들의 논쟁 중 치열했던 것이 사단칠정론입니다.

사단칠정론(사칠논변)은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 8년간이나 지속 되었던 논쟁입니다.

이이는 이 논쟁에서 기대승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사단칠정론은 양대 학파를 중심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내노라하는 대학자들이 수백년을 이어 이 까다로운 논쟁을 그치지 않았으니, 누가 옳은지 우리로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성리학 자체를 학문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여기서 이가 무엇이고 기氣가 무엇이고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당치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다만 주리론主理論은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주기론主氣論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주장했다는 사실만 옮겨놓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기논쟁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단서가 아닐까 싶기 때문입니다.

주리론의 입장은 이와 기氣는 서로 섞일 수 없고, 각각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기호발설, 이기이원론)

주기론은 이와 기氣는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발현되는 것은 오로지 기氣이고 이는 기氣에 올라탄다고 합니다. (기발이승일도설, 일원론적 이기이원론,이통기국론)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은 형상(이데아)과 사물은 분리되어 각각 다른 세계에 있다는 두 세계 이론을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고 형상은 사물 안에 있다는 형상 내재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불상잡과 불상리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理(원리,법칙)는 서양 철학의 형상(본질, 원리)에 해당하고, 기氣는 사물과는 다르지만 여하튼 유형의 것이라 할 수 있으니 대응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양란 이후 성리학은 교조화, 절대화하였습니다.

성리학적 통치이념 위에 세워진 조선은 양란으로 국토가 철저히 유린되고 백성들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져야할 왕조도 지배층도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땅에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워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 지배층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실패한 성리학을 절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자도 신격화 하였고, 집권 서인-노론을 이끌었던 송시열도 송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습니다.

성리학은 유학에 대한 주자의 해석입니다.

유학에 대한 하나의 주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양란은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자의 시각을 벗어나 초기 유학을 스스로 해석하여 당대의 모순을 해결하려 했던 이들 비판적 학자들은 서인-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매도당합니다.

사문斯文 즉 이 문화란 원래는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를 가리켜 썼던 용어입니다.

논어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문왕의 사후 문화 전통은 내 몸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이 문화를 멸망시키려고 한다면 나를 이곳에서 죽게 하여 후세 사람들이 문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화를 보존하려고 한다면 광인들이 나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집권층은 주자학을 사문으로 규정하여 주자학이 아닌 모든 유학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았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새로운 유학에 대한 요구가 조선 전기부터 있었습니다.

중종 때 소개된 양명학이 그것입니다.

서경덕 학파에 의해 수용되었는데, 이황에 의해 배척되었습니다.

이황은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이 쓴 『전습록』을 비판한  『전습록변』을 지었습니다.

서경덕 학파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반면 이황은 문묘에 종사되는 등 조선 후기 사림의 한 축으로 군림했기 때문에 양명학은 주류 학계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황이 양명학을 거칠게 비판한 이유는 양명학이 내포한 평등사상이 성리학의 대의명분론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명분名分이란 이름과 신분에 걸맞게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양반은 양반답게, 서민은 서민답게 지켜야 할 도리가 달리 있습니다.

명분은 신분에 따른 명확한 구분과 신분 차별 사회의 논리로 기능한 것입니다.

명분론을 뒷받침하는 성리학의 중심사상은 격물치지格物致知입니다.

『대학』에 나오는 구절인데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뒷받침하는 논거로 해석되었습니다.

앎은 물物에 대한 깊은 탐구(格) 끝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해야 이치와 도리를 알 수 있고, 이치와 도리를 알아야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선지후행先知後行 입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공부 할 수 있는 계층은 양반뿐입니다.

양반만이 올바른 앎과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입니다.

 

양명학의 핵심은 양지良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이미 올바른 앎을 갖고 있습니다.

보편적, 선험적 앎은 행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앎과 행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치되어 있습니다.

지행합일知行合一 입니다.

지배계층만이 아니라 누구나 올바른 행위를 통해 이치와 도리를 깨닫고 실행할 수 있습니다.

양명학에 내포된 사상은 평등입니다.

조선후기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킨 강화학파는 신분제도의 폐지를 주장합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성리학을 교조화하고 그외의 학문을 모두 사문난적으로 내모는데 앞장선 인물은 단연 송시열입니다.

효종, 현종, 숙종까지 세명의 왕을 모시면서  서인-노론의 영수로 군림한 송시열은 기사환국의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약을 받았습니다.

송시열이 죽을 때 제자 권상하에게 유언하여 지은 것이 만동묘입니다.

만동묘는 후에 노론의 소굴이 되어 많은 폐해를 끼치는데,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습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18세기에 집권 노론 내부에서 일어난 논쟁이 호락논쟁입니다.

송시열의 제자인 권상하의 제자들 사이에서 호락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호락논쟁의 핵심은 인물성동이논쟁입니다.

충청 노론인 호론파는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조선과 오랑캐인 청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청의 문물이 아무리 발전했다 하더라도 오랑캐, 짐승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경기,서울 노론인 낙론파는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주장하며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호론은 위정척사파로, 낙론은 북학파로 계승됩니다.

 

 

다음주는 전근대 마지막 시간입니다.

 

<전한길 한국사 합격생 필기노트>

  p 83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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