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계몽주의

 

 

18세기 프랑스는 유럽의 사회적· 정신적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어가 전 유럽의 궁정과 교양인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발전의 배경에는 영국이 있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상과 이념이 루이14세 사후(1715)에 프랑스로 밀려들어와, 전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영국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도 프랑스를 통해 전 유럽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 매개자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이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하다. 삼권분립은 그의 대표작, <법의 정신>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원칙이다. 삼권분립의 목적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

 

권력분립에 대한 이론적 구상은 몽테스키외의 창안이 아니라 로크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로크는 국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엄격히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명예혁명의 승리자(휘그당)다운 주장이다. 군주는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회가 결의한 법의 구속을 받아야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국가권력의 임의적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여기에 사법권을 추가했다. 사법권의 핵심은 독립성이다. 입법권은 계급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매일 싸우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만, ‘싸움’은 입법권의 본질이다. 근대국가는 계층(급)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에서는 국민 ‘화합’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지지하고 반대 정당을 헐뜯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대국가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p441 <인문고전강의>”

 

하지만 사법권은 속성상 특정 계급이나 직업이 독차지해서는 안 되며, 계급이익의 충돌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재판관이 입법자나 집행관이 되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가 위태로워지며 재판관은 압제자가 될 것이다.

 

 

볼테르(1694~1778)는 소설 <캉디드>의 저자이며, 계몽주의의 걸작 <백과전서>의 편찬자 중 한사람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축이 된 백과전서파는 학문과 이성을 무기로 구시대로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해방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종교와 철학의 시대는 과학의 세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백과전서>는 루소 및 볼테르의 저작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싹틀 틔운 가장 중요한 온상이었다.

 

볼테르는 역사철학의 창시자기도 하다.

 

“나의 목적은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지, 하찮은 사실을 무수히 열거하거나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인간이 어떤 단계를 거쳐 야만에서 문명 상태로 진보해 왔는가를 알고자 한다. p561 <세계 철학사>”

 

 

프랑스 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루소(1712~1778)는 ‘자연 상태’를 참된 낙원이라 생각했다. 루소는 성찰을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기형적 존재로 보았다. 예술과 학문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였다.

 

루소는,

“누군가 어느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땅’ 이라고 주장해 볼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 때 말뚝을 뽑아 버리고, 토지 둘레의 도랑을 다시 메우고는,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과실은 모두의 것이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은 파멸할 것이오!'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인류는 무수한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p573 <세계철학사>” 고 썼다.

 

소유, 정부, 권력은 자연을 떠남으로서 인간이 받게 된 재앙이다. 루소는 <사회 계약론>을 통해 탈출구를 제시하려 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국가가 발생하면서 권력이 창출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지배적 권력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발적인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적법한 지배의 기초는 오직 합의, 즉 자발적 동의뿐이다. 이러한 합의가 바로 사회계약이다. 여기서 개개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것을 내놓고 공동재산으로 간주하여 최상위의 지시체인 일반의지에 종속시킨다. 이렇게 해서 공적 인격이자 정신적 총합체인 국민이 발생한다. 국민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p575 <세계철학사>

 

개개인의 동의로서 구성된 권력은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권력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의지’이다. 그런데 일반의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투표이다.

 

투표의 결과는 곧 일반의지이므로 개개인은 투표에 의해 합의된 모든 법에 동의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채택된 법에도 복종해야 한다. 모든 국가 구성원의 의지가 곧 일반의지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아니라 반대의견이 채택되었다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투표는 내가 일반의지로 여겼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 뿐이다.

 

루소에게 사회계약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의지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루소의 요구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는 사회계약의 목적과 모순된 것이 아닐까? 루소의 영향아래 폭발한 프랑스혁명의 전개 과정은 사실 이런 모순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자유와 평등은 공포정치를 불러일으켰다. 일반의지는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강조했던 인민의 의지처럼 외설적으로 전도되었다.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절대권위를 지녔다. 일반의지는 개개인 모두의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복종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정이 되었고, 불복종자는 반동으로 낙인찍혔다.

 

"혁명을 불러 낸 것은 다름아닌 그의 정신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내적 모순 역시 이미 루소의 사상에 예비되어 있었다. 절대적 개인주의에 대한 루소의 요구는 -루소의 확신과는 달리- 《사회계약론》 제2부에서 제기되는 요구, 즉 일반의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요구와 끝내 해소되지 않는 모순 관계에 있다. 루소는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국가 종교에 대한 일체의 위반 행위가 죽음이나 추방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러한 복종을 강조했다."  p579 <세계철학사>

 

어쨌거나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것은 자연적으로 부여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제1조는 루소의 천부인권사상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1조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0>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을 동경한 루소가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자라는 사실이 사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상당히 인공적인 성격의 자연 즉 이성과 거의 동일시되는 자연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루소의 자연상태가 원시 자연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이런 특성은 그를, 18세기 정신에 반발하여 나타난 19세기 모든 정신운동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질풍노도와 낭만주의, 다양한 종교적 개혁은 모두 루소를 원조로 하고 있다.

 

루소는 독일의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마지막 수호신인 동시에 지극히 신랄한 비판자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단적으로 말하면 근대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특히 프랑스혁명)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이중의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계급은 ‘19세기의 주인공’ 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10년, 25년, 100년 단위로 살펴볼 수 있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1789년 5월 삼부회 소집부터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의 군사 쿠데타까지이다.

 

프랑스혁명을 25년으로 볼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는 1815년까지이다.

 

혁명을 100년의 긴 호흡으로 말할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고 제3 공화정이 들어선 1870년대 까지를 가리킨다.

  

 

 

프랑스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혁명과 반동,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며 공화정 - 제정 - 왕정 - 공화정 - 제정 - 공화정의 긴 역사를 걸어왔다.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은커녕 고통과 혼란만 보았을 수도 있고, 반동과 퇴보에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전진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혁명의 발단은 언제나 세금이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을 보면 유럽은 항상적 전쟁상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1453년부터 현재까지 패권투쟁의 역사’ 이다. 루이14세가 잦은 전쟁과 사치로 재정의 곤란을 겪었다지만, 18세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는 7년 전쟁(1756~1763) 패배 이후에도 미국의 독립전쟁(약 1775~1781 )을 지원하며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다. 국가재정은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루이 16세는 1787년에 귀족과 성직자를 대상으로 명사회를 소집했다. 농민이 세금을 내는 능력에 한계가 왔음을 알리고 특권신분에도 과세하는 안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789년 5월에 삼부회가 소집됐다. 1계급은 성직자, 2계급은 귀족, 3계급은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제3계급에 속하는 평민은 주로 부르주아들이었다. 관료, 은행가, 금융업자, 법률가, 기업가 등 신분으로는 평민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도 제3계급에 속했다. 제3계급은 반귀족적이거나 급진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지배계급으로 편입하고 싶어 했다. 제3계급은 세금을 내는 조건에 동의하는 대가로 평등한 투표권을 요구했다.(머릿수별 투표)  세금을 내는 대신 정치적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제1계급과 제2계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 평등은 특권의 폐지이고 그것은 신분제가 폐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삼부회의가 소집되는 과정에서 제3계급이 주도권을 잡았다. 제3계급은 특권계급과의 연대가 무산되자 제4계급과 결합했다. 교과서에서는 흔히 세 계급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네 개의 계급이 있었다. 유산자인 제3계급에 비해 평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제4계급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무산자였다. 당시 상퀼로트라고 불리던 제4계급은 독자적 조직력과 군중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투표권 문제로 1,2계급과 대립하던 3계급은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고 국민의회라고 칭했다. 국왕이 국민의회의 회의장을 폐쇄하자 이들은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테니스코트 서약이다. 이에 당황한 국왕파는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파리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 공격은 제4계급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혁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제3계급이었다. 삼부회의 이후 만들어진 국민의회도 제3계급이 이끌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국민의회는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제3계급은 가난한 민중들은(제4계급) 무식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이16세는 국민의회가 공포한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파리의 여자들이 대대적으로 베르사이유로 행진하여 국왕 일가를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이송한 이후에 인권선언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국왕 일가는 끊임없이 혁명에 반하여 오스트리아 등과 접촉을 시도했다. 마침내 1791년 6월에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향했지만 국경 근처에서 잡혔다. 바렌느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왕 탈출 사건은 남아있던 국왕에 대한 우호적 민심마저 이반시키고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한편 1791년 9월에 입헌군주정과 제한 선거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의해 구성된 입법의회에는 국왕을 지지하는 입헌군주파와 공화파인 지롱드와 산악파(협의의 자코뱅)가 서로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연합하여 입법의회를 압박하였고 입법의회는 혁명전쟁을 선포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을 지키려는 부르주아와 민중은 의용군을 만들어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반혁명 동맹군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 의용군이 전쟁에서 거듭 패배하며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16세 일가가 오스트리아에 프랑스 정보를 빼돌린다는 의심이 확산되자 1792년 8월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루이16세의 모든 가족들을 탕플탑에 유폐하였다. 

 

1792년 9월 발미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대한 반격에 성공했다. 혁명전쟁의 진행과 더불어 전투에 기여도가 높은 제 4계급(상퀼로트)의 정치적 권한이 강해졌다. 제4계급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 이끄는 산악파를 지지하였다. 1792년 9월,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산악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민공회를 구성하였다.  1793년 1월 루이16세가, 뒤이어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가 처형되었다.  

 

제1 공화정은 자코뱅(광의의 자코뱅)의 한 분파인 산악파(협의의 자코뱅)와 제4계급이 결합하여 탄생했다. 국민공회의 핵심인물은 로베스피에르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마라, 당통과 함께 제3계급 출신의 산악파였다. 세계 역사에서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어도 지도자는 부르주아지나 지식인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체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철학과 지식에 접근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굳건한 연대만이 혁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의 각종 세력 중 로베스피에르 파가 가장 민중과 가까이 있으며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부르주아지들은 평등은 외면하고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민중이 요구한 것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자유였다.

 

국민공회는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인민주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제1 공화정은 공포정치의 시대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 백 명이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공포정치를 로베스피에르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공포정치의 가장 큰 원인은 주변의 왕정 국가들이 연대를 강화하며 프랑스를 고립시킨 것이다. 유럽 열강이 반혁명 연대를 맺자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결속할 수밖에 없었고 반혁명 혐의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무장한 예언자로 등장하면서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격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옹립했던 혁명적 군중은 국내에서는 제3계급이 중심이 된 온건파와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국외에서는 유럽의 왕정국가와 적대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고립되었고, 그 결과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절멸시키겠다는 의지와 혁명이 원하는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이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아주 강력한 내부 결집을 시도했습니다. p366~7 <역사고전강의>”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몽상가’가 아니라 ‘혁명적 집단 심성의 체현자’였다. 르페브르는 “그의 권력은 파리 대중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파리 대중의 공포정치”였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민중들이 그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체포되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7월이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떨던 반대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공안위원회의 반 로베스피에르 파가 주도했지만 이미 민중들의 마음도 로베스피에르를 떠나있었다. 파리시민이 그를 버렸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의 주도권은 다시 부르주아지에게 넘어갔다.

 

 

 

 

나폴레옹과 빈체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등장한 총재정부는 무능했고 혁명은 혼란에 빠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기 쉬운 것이 군부세력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전쟁 초기부터 발군의 전투 실력을 뽐내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지친 민중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나폴레옹은 재빨리 이 기회를 낚아챘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수호자일까? 반혁명 독재자일까? 지리멸렬했지만 1799년 당시 프랑스는 공화정 체제에 있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공화정 체제를 존속한 채 제1 통령에 올랐으나, 사실상의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마침내 1804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프랑스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박정희의 유신헌법이 그러했듯이 형식적 행위에 불과했다. 프랑스 제정은 혁명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자 퇴행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1789년부터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까지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이 혁명의 수호자, 혁명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현대 ‘민법전’의 효시인 ‘나폴레옹 법전(1804)’은 인민주권을 확고하게 법률화했습니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은 이념과 연줄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만큼 강력하게 혁명의 과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 관료제, 상비군, 경찰제도 등이 정착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했습니다. 이 체제는 급진파의 인민주권론, 초보적인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주의가 서로 어우러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라는 국민의식,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주권 의식, 국민들 각자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라는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근대정신의 주요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p365 <역사고전강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6>

 

나폴레옹은 체제를 역행시키기는 했지만, 혁명의 가치를 그대로 계승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선언했다.

 

“혁명은 모든 특권의 폐지, 즉 영주의 재판권 폐지, 낡은 농노제의 폐지, 봉건적 의무의 폐지를 뜻하며, 동시에 국가가 전 시민, 전 재산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 법전에 따르면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의 부르주아들뿐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나폴레옹은 혁명군의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 원정을 나섰다. 유럽의 부르주아와 민중들도 처음에 나폴레옹의 군대를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은 “나는 나의 법전을 받아들이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를 뿌리려 한다.”며 정복지에서 신분제와 농노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에는 혁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혁명의 파괴자로서의 나폴레옹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나폴레옹은 계속되는 전쟁을 통해 국내 정책과 위성국가들의 정책을 다듬어 나갔다. 1790년대 혁명파들은 구체제 시절 잃었던 프랑스의 대외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효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귀족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모든 동맹국에 봉건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했다. ( .....) 1808년 3월, 나폴레옹은 관직에 따라 직책이 정해지고 대를 이어 인계할 수 있는 귀족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귀족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후대에 국가에 큰 공헌을 하지 못하는 가문은 귀족에서 제외시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새 귀족들에게 분배해줄 영지로는 이탈리아와 저지대 지역, 그리고 독일 영토를 활용키로 했다. p274<Europe>”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군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서유럽 대부분을 프랑스의 손아래 넣었다. 그는 유럽 전역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갈수록 혁명군이 아니라 정복군, 학살자의 행태를 보였다. 점령지 주민들은 나폴레옹군에 격렬히 저항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 패배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1806년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원정에 나섰다가 패하였다.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가 깨어지자마자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해 일어났고, 나폴레옹은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패배한 후 1814년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하여 다시 유럽을 긴장시켰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유럽 전역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이다. 나폴레옹은 정복지의 농노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퍼뜨렸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나폴레옹에 대항해 형성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약탈자로 돌변하자 정복지의 주민들은 프랑스에 대항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초기 프랑스혁명군이 만들어졌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프랑스혁명군은 유럽의 반혁명연대에 맞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프랑스혁명 전만 해도 유럽은 별다른 민족의식이 없었다. 혁명 초기의 프랑스나 나폴레옹 원정 이후의 유럽 각국이나 모두,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촉발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7>

 

1814년 나폴레옹이 추방되자 승전국들이 빈으로 모였다. 2년에 걸친 빈회의에서 유럽의 왕정국가들은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기로 합의했다. 빈회의 이후로 성립된 유럽의 새로운 국제질서라고 해서 이것을 빈체제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다. 4국 동맹 혹은 신성동맹이 주축이 된 빈체제는 보수반동 체제로서 프랑스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려 하였다. 프랑스는 빈체제에 의해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복위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 역사의 흐름도 거꾸로 돌리기는 어렵다. 빈체제는 곧바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자유민족주의자들은 빈체제를 비난하며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스와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에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의 3장과 4장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 내가 읽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들

 

1. 두도시 이야기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58531

2. 고리오 영감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81872

3. 공산당 선언 http://blog.aladin.co.kr/753199155/7287110

4.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http://blog.aladin.co.kr/753199155/644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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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이라는 단어는 볼 때마다 이상하다. 근대면 근대, 현대면 현대지, 왜 단어 하나를 두고 때로는 근대로 때로는 현대로 사용하는 걸까?

 

  “모던(modern)이라는 말은 ‘근대’로 번역되기도 하고, ‘현대’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 ‘모던’이라는 말이 15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에는 ‘근대’라고 옮기면 적절합니다. ... 그런데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역사적으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선 시기는 15세기부터 과학혁명, 계몽주의 등을 거쳐 19세기 중반까지이고, 이어지는 시기는 19세기 중반부터 오늘날까지입니다. 저는 앞의 시기를 ‘근대’라 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현대’라 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와 현대가 있는 것입니다. p445 <인문 고전 강의>”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

 

근대는 곧 현대이기도 하다. 근대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틀을 만든 시대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 근대로 진입하였다.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가 그 진군의 발판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유럽은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히 높아졌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신중심의 세계관도 무너지고, 미래는 불확실해 졌다. 신을 잃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은 과학이었다.

 

갈릴레이(1564~1642)는 우주의 작동원리가 성서의 계시가 아니라 수학을 통해서 서술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갈릴레이는 수학이야말로 학문의 언어라고 했는데, 갈릴레이를 이어받은 사람이 데카르트, 뉴턴 등이었다.

  

 

데카르트(1596~1650)는 세계를 기계장치처럼 생각했다.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와 작동방식만 알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인간 사유 이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함으로써 세계를 사고의 주체와 객체로 양분했다. 이른바 사유(res cogitans)와 연장(res extensa)이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근대 사고의 초석인 동시에 파국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뉴턴(1642~1727)에 와서 완성되었다. 뉴턴 과학은 과학뿐만 아니라 18세기 유럽 사상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구 과학자와 기술자 또는 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사고방식 전반을 뉴턴주의라고 하는데, 뉴턴주의에는 수학적, 형이상학적, 실험적 주장이 섞여 있다. 뉴턴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자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전파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계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주인은 나’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종교나 철학보다 과학을 더 신뢰한다고 할 수 있다. 병이 나면 병원을 먼저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해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계몽주의는 영어로 enlightenment, 독어로 Aufclärung이다. 빛을 비추다, 명확하게 한다는 뜻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방법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면, 인간의 지식이 점차 확대하여, 행복한 미래를 맞을 것이라 믿었다. 과학적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완전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컸다. 그러니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라는 후세의 빈정거림이 지나치다고 할 수도 없다. 오늘날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몽의 기획은 실패한 것일까?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공통으로 ‘이성의 시대’ 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의 이성이 자연의 제 1원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이성이었다면, 18세기 계몽주의의 이성은 사회적 처방을 내놓은 ‘사회 운동의 원리로서의 이성’ 이었습니다. p286 <역사 고전 강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세계사 선생님들은 참 힘들 것 같다. 세계사뿐만 아니라 한국사도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인류 탄생 이래의 모든 것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철학이나 과학 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물론 깊이 있는 설명이 불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학생들이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역사 선생님이 철학자나 과학자는 아니니까.

 

홉스, 로크, 루소의 철학 혹은 정치사상을 도식화한 이 표도 한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에 나오는 홉스와 로크로 살짝 보충해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이 글의 대부분이 강유원이 쓴 두 권의 ‘강의’를 짜깁기한 것이기는 하지만 ^^ ;;

 

절대왕정은 중세 봉건제가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에 나타난 정치체제이다. 절대왕정을 뒷받침한 사상은 왕권신수설이다. 강력한 왕권의 정당성을 신으로부터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은 이 왕권신수설에 대한 부정이다. 왕의 권한이 막강하던 미약하던 간에 그 권한은 신이 아니라 사회적 계약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약 이전의 인간은 어떤 자연 상태에 있었던 것일까? 자연 상태, 자연권, 자연법 등등에 대한 설명은 사상가들마다 다르다.

  

  <위키 백과사전: 리바이어던>

 

홉스(1588~1679)하면 떠올리는 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이다. 홉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권이다. 그런데 자연권과 자연권이 충돌하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가 되고 인간 세계는 곧 파멸할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의 핵심은 자연권의 일부를 절대주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절대주권은 공권력을 가지고, 계약을 어긴 자에게 제제를 가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죽기 싫으면 자연권을 약간 포기하고 평화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상징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지만 그가 제시한 것은 평화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홉스는 절대왕정을 지지했다. 잉글랜드 내전을 고스란히 겪었던 홉스는 절대군주만이 사회계약을 수호하고 평화를 지킬 힘이 있다고 믿었다.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절대군주의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크(1632~1704)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17세기 신흥 상업 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한 사상가’ 라 할 수 있다. 로크의 사상이 ‘소유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크가 주장하는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은 무엇인가?

 

로크는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유물 즉 소유권의 근거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었고, 그것에 노동을 보태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 즉 신이 주신 선물에 나의 노동을 더하면 내 것이다. 

 

서부개척 영화를 보면 주인 없는 땅에(사실은 주인이 있지만 백인들의 눈에는 하느님이 준 공유물일 뿐이다.) 울타리를 치고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 된다. 실제 벤자민 플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빈 땅을 발견하거나, 원주민이 살고 있더라도 그들을 쫓아내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로크가 미국 건국 이념의 아버지라는 말이 실감 난다. 플랭클린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여하튼 이런 생각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노동가치설’ 이다. 노동가치설이라고 하면 보통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사실 노동가치설의 원조는 잉글랜드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다.

 

로크의 자연 상태의 핵심은 소유권이다. 사회계약이 필요한 이유는 소유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서부영화처럼 내가 애써 울타리를 쳐놓은 땅에 다른 놈이 나타나 총을 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법과 국가가 필요해 진다. 소유는 법적 승인을 받아야 한다. 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 국가의 역할은 소유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폭력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소유권 보호를 최고의 임무로 삼는 이른바 경찰국가가 로크주의적 국가인 것이다.

 

로크의 대표작 <통치론>은 영국혁명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다지 선생님은 로크의 <통치론>이 영국혁명 이후에 출간되어 영국혁명을 사후에 옹호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최근 로크 연구가들은 <통치론>이 명예혁명 이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래슬릿은  <통치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래슬릿은 <통치론>이 배척위기의 와중에서 사실상 혁명에 대한 요구와 선동으로서 집필된 것이지, 이미 일어난 혁명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집필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p396 <인문고전강의>”

 

잉글랜드 내전은 표면적으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이었지만 내적으로는 대토지 소유귀족과 신흥 상업 부르주아의 싸움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통치론>은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의 당파성을 대변하는 텍스트입니다. 17세기 잉글랜드의 경제적 상황에서 주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인클로저 운동입니다. 토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경제적 이익의 즐거움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고 로크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법을 시도했고 그것을 관철했습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자유주의 국가입니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상업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은 경제력을 앞세워 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아가 왕권을 제한하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하는 입법을 시도하고 관철했던 것입니다.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는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p394 <인문고전강의>”

 

로크가 전제왕정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이 <통치론>이다. 지상의 통치자는 그들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에 의해 체결된 계약으로부터 끌어낸다는 것과 인민은 계약을 위반한 통치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루소(1712~1778)는 강유원의 책에 몇 줄만 나오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삶보다 전통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삶이 더 훌륭한 삶이라는 것이 루소의 메시지입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가 되어서야 분열된 세계 속에 살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루소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이미 사람들이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366 <인문고전강의>”

 

17세기를 풍미한 데카르트의 이분법과 낙관적 뉴턴주의가 18세기에 와서 벌써 비판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의 세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기도 하다.

 

여하튼 18세기 인물인 루소는 영국혁명과 관련이 없다. 루소에 대해서는 그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프랑스혁명을 공부할 떄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영국 혁명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은 의회가 일찍 발달한 사회였다. 13세기에 이미 parliament 라는 단어가 쓰였다. 물론 귀족들의 협의체였지만, 왕에 대항해 성직자와 귀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로 성장하였다. 의회가 다루는 주요 안건 중 하나는 과세문제였다. 왕은 전쟁 등의 이유로 자금이 필요할 때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영국은 1688년 조용히 시민혁명을 완수했다. 100년 뒤의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명예로운 혁명이었지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는 오랜 투쟁과 적지 않은 피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국혁명의 시작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으로 거슬러 간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왕으로 후계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속해있지 않았다.) 튜더왕조가 끝나고 스튜어드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영국의 의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종교 문제에서도 의회와 충돌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로부터 ‘권리청원’을 받아냈으나 찰스 1세는 이후 11년 동안 한 번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640년에서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찰스 1세를 비난하며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찰스 1세가 강경 대응을 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영국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1642~1651)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약 10년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초기 열세였던 의회파는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옥스퍼드를 함락시키면서 승기를 잡았다. 3차에 걸쳐 일어난 내전은 1651년 우스터 전투를 마지막으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1649~1658)을 선포했다. 영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짧은 기간의 공화정이다. 1649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추대하여 출발한 공화국은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붕괴하였다. 크롬웰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광을 되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엄격한 금욕정치로 인해 독재자로 낙인찍혔다.

 

크롬웰 사후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 제임스 2세가 연이어 재위하였으나, 이 왕들 역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전철을 밟았다. 특히 제임스 2세는 친 가톨릭 정책으로 의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윌리엄을 왕으로 추대하며 제임스 2세를 몰아냈다. 딸과 사위가 아버지를 몰아내는데 가담한 것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무혈혁명인 명예혁명(1688)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여하튼 메리와 윌리엄은 의회가 제시한 ‘권리장전’에 승인함으로 절대왕정을 끝내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스튜어드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여왕 때 영국은 소위 그레이트 브리튼이 된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 병합한 것이다. 약 100년 뒤인 1801년, 그레이트 브리튼은 다시 아일랜드를 병합하며 덩치를 키웠다. 아일랜드의 남쪽지역은 오랜 독립투쟁 끝에 1921년 남아일랜드로 분리 독립하게 된다.  

 

여하튼 앤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자, 1714년 독일 출신의 조지 1세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며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조지 1세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정치적 실권은 총리와 내각이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영국은 지금까지 이 통에 따라 의원내각제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되다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장

 

1절. 자본가와 노동자가 등장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이 가장 먼저 산업혁명(1770)에 성공한 것은 제일 먼저 여건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무역이란 이름으로 식민지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고(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신흥 상업 부르주아들이 시민혁명의 주역이 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획득하였다. 16세기부터 유행한 인클로저 운동은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였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광 같은 천연자원도 풍부하였다.

 

 

2절. 산업 혁명이 시작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의 모직물 산업 때문에 시작되었다. 모직물의 인기가 치솟자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그 땅에 울타리를 쳐서 양들을 길렀다. 1516년에 출간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미 “영국에서는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차 인클로저가 목적한 바는 아니었지만,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고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초기의 산업은 매뉴팩처 즉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였다. 가내 수공업이 선대제 수공업으로 발달했고 다시 매뉴팩처로 진화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왜 하필 방직산업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 궁금증은 2015년에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바다의 제국> 3부를 보면 풀리는데, 산업혁명이라는 눈부신 성과 뒤에는 융성했던 한 나라의 처절한 몰락이 있었다.

 

영국은 16세기만 해도 모직물이 최고의 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 인도에서 수입된 면직물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면직물로 된 드레스를 입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에서야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를 들여왔다. 그런데 인도는 기원전 3000년경에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면직물은 수 천 년의 노하우가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면직물이었다.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 때문에 모직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양의 은이 유출되어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영국의회는 캘리코 수입 금지 등의 입법 조치를 취하였으나, 면직물 유행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영국은 인도의 뱅골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인도의 면직물을 공짜나 다름없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욕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직접 면직물을 생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영국은 인도처럼 숙련된 면직물 기술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대신할 기계를 개발했다. 17세기에 발달한 과학기술과 영국의 풍부한 천연자원 등에 힘입어 마침내 방적기와 방직기를 발명했다. 1764년 제니 방적기를 시작으로 1785년에는 카트라이트 방직기가 개발되었다. 연표에는 보통 영국 산업혁명의 시작을 1770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면직물이 대량 생산되자 영국은 거꾸로 인도에 면직물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수출을 위해 영국은 인도의 면방직 산업을 철저히 파괴했다. 공장을 부수고 숙련공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1835년 당시 동인도 회사 총독 벤팅크 경은 “면방직 장인들의 뼈가 인도의 대지를 하얗게 덮었다.”라고 말했다. 식민지였던 인도는 영국산 면제품으로부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할 힘도, 자국민을 지킬 힘도 없었다. 인도는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세계 최고의 면방직 산업을 빼앗기고, 영국에 목화를 제공하는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였다.

 

면직물은 영국 산업을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계가 널리 사용되자 동력의 개량도 필요해졌다. 와트(1736~1819)의 증기 기관이 문제를 해결했다.

 

기계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값싸고 질 좋은 철이 필요했는데 마침 영국에는 철도 많았다. 증기기관과 철!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이들은 산업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증기와 쇳덩이가 결합한 최고의 발명품인 기차가 탄생했다. 1825년에 스티븐슨의 증기 기관차가 객차를 끄는 데 성공하였다.

 

1830년 운행을 시작한 최초의 근대식 철도는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이었다. 맨체스터 등의 공업지대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리버풀까지 기차로 운반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었고, 해가지지 않는 식민지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영국의 면직물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무관세로 들어온 영국산 면직물이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가내수공업을 짓밟았다. 일본이 영국산 면직물을 들여와 다시 우리나라로 수출한 것이다. 쌀과 면직물을 맞바꾼 미면米綿무역으로 곡물가격은 치솟고 가내수공업은 몰락했다. 개항이 경제 파탄을 가져왔던 것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구식군인뿐 아니라 도시의 빈민들이 대거 합세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류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먹고 살만해지면 오히려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청동기시대에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계급이 발생했고, 조선 후기에 생산력이 증대되자 농민층이 부농과 임노동자로 분화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현실은 가혹하다 못해 지옥과 같았다. 공장의 중심은 기계가 차지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기계에 딸린 존재가 되었다. 숙련공이나 힘센 남성이 필요 없어진 공장에서는 임금이 싼 아동과 여성을 고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들은 병에 걸려 어린나이에 죽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맨체스터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17세였다. 서기 1000년 노르만 정복 당시 영국 전체의 평균 수명 24세보다 30%가 감소한 수치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사냥해 노예로 만들고, 면방직 산업의 메카 인도를 박살내고....산업혁명이란 세계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분노와 피땀 위에 이룩한 빛나는 성과가 아니던가?  그 달콤한 열매는 어디로 갔기에 영국의 노동자마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것일까? 산업혁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반자본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1810년대 기계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의 숙련 방직공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기계만 없다면 예전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보려는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산업은 더욱 발달했고, 노동자들의 의식도 향상되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필요하고, 그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을 자신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837년 영국에서 시작된 차티스트 운동이 바로 노동자들의 선거권 투쟁이다. 영국 정부는 지도자를 체포하고 운동을 탄압하였지만 조금씩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땅이나 공장 같은 생산 수단을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초기 오언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를 거쳐 후기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소련과 중국 등에서 실현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3장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그때 가서 상세히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고전주의 경제학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0~31>

 

노르만의 침략이 끝난 11세기 이후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가 탄생하였다. 부르주아들은 처음에는 영주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자치권을 획득하며 성장하였다. 13~14세기 유럽 각지에 등장한 신분제 의회에는 영주와 고위 성직자 이외에도 도시의 대표인 부르주아들이 참여하였다. 부르주아들은 국왕에게 중앙집권 국가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보장받거나 정부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부르주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였다. 대서양 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축적된 자본은 산업에 재투자하였고 생산된 상품은 해외 식민지를 통해 판매했다. 투자와 생산의 선순환 과정이 거듭되다 마침내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5>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부르주아의 위상도 급상승했다. 농민 출신의 부르주아가 하원 의원에 진출하고 총리도 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자기 계급의 이해에 맞는 정책을 요구하고 대지주 귀족들과 대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846년 영국의 곡물법 논쟁이다. 곡물법이란 지주를 보호하기 위해 값싼 외국산 곡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이다. 부르주아들은 곡물법에 반대하였다. 값싼 곡식은 낮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곡물법을 폐지시켰다. 곡물법 폐지는 부르주아가 명실상부한 지배 계급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9세기에 서유럽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자유 무역’ 덕분이라는 견해가 많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 시장, 자유 무역을 채택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앞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영국은 보호주의의 선구자였다. 

 

“헨리 7세(1485~1509)부터 시작해서 튜더 왕조 군주들은 정부 개입을 통해 모방직 산업을 장려했다. 당시 모방직은 유럽의 첨단 산업이었고 플랜더즈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저지대 국가들에서 발달한 상태였다. 영국 정부는 관세를 통해 저지대 국가에서 생산되는 더 양질의 상품으로부터 영국 생산자들을 보호했고, 선진 방직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 숙련공들을 스카우트하는 작전의 뒤를 봐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플랜더스, 플래밍 같은 성은 당시 스카우트된 플랜더스 숙련 방직공들의 자손들이다. 이 같은 정책은 튜더 왕조 후에도 계속되어 18세기 무렵에는 모방직 제품이 영국 수출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수출 소득이 없었다면 영국은 산업 혁명에 필요한 식량과 원자재를 들여오지 못했을 것이다.   1721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총리로 임명된 로버트 월폴은 광범위하고 야심 찬 산업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정부 개입의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에 대한 관세 보호와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 약진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월폴의 이 산업 장려책 덕분이었다. 애담 스미스가 영국 생산자들을 돕기 위한 보호주의나 기타 정부 개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 것도, 1770년대 영국이 다른 나라들 보다 너무도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이 완전히 자유 무역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국부론>이 나오고도 거의 1세기가 지난 1860년이었다. 바야흐로 산업 최강국으로서의 입지가 확고부동해진 다음이다. p67~68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로 유명해진 경제사經濟史학자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후진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나 신고전주의는 선진국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다. 일치감치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간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없애 버린 후에 공정하게 경쟁하자고 꼬드기는 것이 신자유주의인데 이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링 위에 올라가 대등한 경쟁을 운운하는 꼴이다.

 

자유무역이 자본주의가 성장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무역이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유 무역 협정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 무역의 확산은 대부분 중남미와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다.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무역이라면? 그렇다.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자유무역은 바로 강화도 조약과 같은 불평등 조약을 말한다. 대포를 실은 배를 끌고 와 무역이냐 전쟁이냐를 강요하며 강제로 통상을 맺던 그 자유무역 말이다. 여기서 자유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 국가들의 관세 자주권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도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무관세, 무제한 곡물 유출, 무항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유무역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확산되었던 것이다. 가장 악명 높은 불평등 조약은 아편전쟁 후에 영국과 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6>

 

‘자유 시장’에 대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고전주의 학파이다. “시장은 경쟁을 통해 모든 생산자를 감시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 장하준이 한 줄로 요약한 고전주의 학파의 핵심 주장이다. 고전주의 경제학파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19세기 말까지 경제학의 주류를 이끌었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애덤 스미스 (1723~1790) 이다. 고전주의 학파를 발전시킨 학자는 리카도(1772~1823), 세(1767~1832), 맬서스(1776~1834) 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6 : 아담 스미스 (1723~1790)>

 

“고전주의 학파는 경제 주체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국부의 극대화라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역설적인 결과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힘 덕분에 가능하다. 생산자들은 이윤을 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싸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게 되고, 궁극적으로 최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민 경제의 생산량을 최대화 한다.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비유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스미스 자신은 <국부론>에서 이 개념을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그다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p120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세(1767~1832)의 법칙은 일단 공급이 있으면 수요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수요 부족에 의한 공급 과잉은 없고 따라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론으로, 이 법칙에 근거해서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심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실업 문제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고수했는데, 전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노동의 초과 공급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업자는 결국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실업은 분업과 생산성 향상에 의해 구조적으로 야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세의 법칙을 고수하며 모든 실업자는 ‘자발적 실업자’일 뿐이라고 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고 익숙하고 돈을 많이 주는 곳만 고집하니까 실업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오늘 들어도 참으로 귀에 익은 주장이다.

 

고전주의 학파는 정부가 보호주의나 규제 등 어떤 형태로든 시장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했다. 리카도(1772~1823)는 비교 우위론을 만들어 자유 무역 논리를 더욱 강화했다.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나는데 비교 우위론에 대한 예시를 수치로 계산하여 입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척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비교 우위론의 함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비교 우위론에 의하면 후진국은 선진국이 만들지 않는 것만을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이 만드는 물건을 만들려고 하다간 비교 우위를 확보할 수가 없다. 선진국은 부가 가치가 높은 상품만을, 후진국은 선진국이 내버린 노동집약적 저 부가가치 상품만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결국 후진국은 결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 참으로 합리적인 이론이다!

 

맬서스((1776~1834)가 고전주의 경제학자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 어쩌고 하는 말은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말의 배경이 그렇게 냉혹한 이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몰랐다.

 

“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곤을 장려(혹은 심지어 빈곤을 만들어 내기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구빈법은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그의 관점에서 식량 공급은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춰서 더 많은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맬서스는 구빈법이 출생률을 상승시키고, 균형적인 실질임금을 낮추며, 영아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79 <아담의 오류>”

 

언뜻 보기에는 200년 전이니까 통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지만, <아담의 오류> 의 저자 던컨 폴리에 따르면 최근에도 미국에서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연방 복지 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실제로 빈곤을 만들어 내거나 최소한 빈곤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의 충고 하나를 새기고 싶다. 경제학은 가치 중립적인 혹은 객관적인 학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떼어 낸 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었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장하준의 정치경제학 강의 p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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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다로 나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한국학 중앙 연구원>

 

조선 태종 때 그린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원나라의 지도를 들여와 우리나라와 일본을 덧붙여 그린 것인데, 동양에서 그린 세계지도 중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중국이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 중화사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지도가 영토의 크기로는 엉터리지만 (그럼에도 세계지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발견하기 80여 년 전에 바다로 둘러싸인 아프리카 남단을 그렸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 문화와 경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15세기 초 세계의 중심은 중국과 이슬람, 인도 등 아시아였다. 서양은 동양의 문물에 열광하고 있었다. 유럽 귀족들은 동양의 향신료를 권력의 상징으로 향유했고, 유럽 상인들은 동양과의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유럽 상인들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것은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향신료였다.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동방 끝에 있다고 생각한 파라다이스로부터 강을 따라 흘러내려온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15,000원 정도로 살 수 있는 후추가 당시 유럽에서는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상인들의 욕망이 이해될 만도 하다. 향신료 무역으로 유럽 상인들은 수십 배에서 수백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53>

 

지중해는 동양의 문물이 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역사 이래 동서양의 교역로를 차지하려는 싸움은 끊임없었는데,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차지한데다 프레베자 해전에 승리함으로써, 지중해는 완전히 오스만제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스만제국은 베네치아에 교역 독점권을 주고 지중해를 엄격히 통제했다. 유럽 상인들은 검은 황금, 후추를 얻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더욱 더 혈안이 되었다.  

 

   

 

15~6세기는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 라고 부르는 시기다. 첫 항해를 시작한 것은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00년 가까운 항해 끝에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의 주요 길목에 요새를 세워,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독점하려 애썼다.

 

두 번째 주자는 이제 막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중앙집권 국가를 세운 에스파냐 왕국이었다.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 항로가 막히자 새로운 항로가 필요했는데,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도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신반의하면서 콜럼버스를 지원한 에스파냐는 뜻하지 않게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고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여 단숨에 유럽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였으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한 것은 30년 뒤의 마젤란 일행이었다. 3년의 항해 끝에 마젤란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마젤란 일행은 에스파냐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첫 세계 일주였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향신료에 대한 욕망만으로 그 험한 바닷길을 개척할 수는 없다. 송나라의 발명품인 나침반, 화약 등이 원나라를 통해 전해졌고, 유럽은 과학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상선에 대포를 싣고 동양을 향해 원거리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이슬람 상인과 아시아 상인이 평화롭게 오가던 바다는 이제 화염과 포성에 휩싸였다. 교역이 아니면 죽음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로 인해 대재앙을 당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이슬람, 인도, 중국이 버티고 있는 아시아는 당시 세계 경제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강국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 각지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내륙으로 침범하지는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아스텍과 잉카제국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했고 절멸했다. 여전히 청동기 문명권 아래 있던 원주민들은 불과 수백 명의 침략자들에 의해 패배했다. 총칼 보다 더 큰 재앙은 에스파냐인들과 함께 도착한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이었다.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에스파냐 침략 100여년 만에 원주민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하였다. 문명과 함께 종족 자체가 사라져 갔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거대한 비극은 바다 건너 또 다른 대륙의 비극을 잉태하였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플랜테이션 사업을 벌이게 되는 유럽 각국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오기 시작했다. 90%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라져 간 곳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채워 넣기로 한 것이다.

 

 

 

 

2. 유럽의 새 강자, 영국과 프랑스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유럽 각국은 앞 다투어 항해에 올랐다. 해상 무역의 패권과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유럽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0>

 

16세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은광을 차지한 에스파냐가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17세기 전반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의 부르주아들이 이끌어 갔다. 네덜란드는 일종의 화물 운송업을 통해 유럽 최대의 해운국으로 부상했다. 기술혁신으로 저가의 상선을 건조하고 유럽 어느 나라의 배보다 싼 운송료로 대서양을 오가는 화물을 독점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부터 눈부시게 성장한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꺾고, 17세기에는 항해법으로 네덜란드를 견제하면서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을 구축한 프랑스와 영국이 각축전을 벌였다. 18세기에 영국은 7년 전쟁의 와중에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대서양의 주인이 되었다. 대서양을 통한 삼각무역은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부르주아들과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는 국왕이 서로 협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유럽은 절대왕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절대왕정 체제는 중세 봉건 체제와 근대 국민국가 체제 사이에 성립한 일종의 과도기 체제입니다. 절대왕정 체제를 규정하는 요소는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관료와 상비군이고, 둘째는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인 왕권신수설, 그리고 셋째는 넓은 의미의 경제정책인 중상주의입니다. <역사 고전 강의> p311"

 

영국의 절대왕정 시기는 헨리7세(1485~1509)에서 찰스1세(1625~1649) 까지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때 절대왕정 체제가 절정을 이루었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끝났다.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100년 가까이 뒤늦은데, 독일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성립해서 19세기까지, 러시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 절대왕정 체제가 이어졌다.

 

절대왕정의 꽃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로 알려져 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일갈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진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듯한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귀족과 성직자를 억누르고 부르주아를 지원하고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막강한 군대를 육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왕정 체제는 18세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모체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영국의 절대왕정 체제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 고전 강의>를 통해 영국 절대 왕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절대 왕정 시대를 연 헨리 7세는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철폐하고 귀족들을 관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관료와 상비군이라는 절대왕정 체제의 첫째 요소가 여기서 발견됩니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은 관료와 군대의 장교가 되었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귀족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직접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왕의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정은, 왕이 지방의 지사를 임명해서 파견했던 프랑스처럼 강력하지 않아서 귀족의 지배력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귀족에 맞설 세력을 키웠는데, 이들을 ‘젠트리gentry'라고 부릅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젠트리는 평민 출신이면서 땅을 가진 부농입니다. 헨리 8세는 이들 중에서 치안 판사를 임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는 잉글랜드의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행된 정책 기조가 중상주의입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상징적인 사건이 1600년에 동인도 회사 설립입니다. 이후 잉글랜드의 절대왕정 체제는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과정에서 처형당한 찰스 1세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런 다음 잉글랜드는 입헌왕정 국가로 전환됩니다. p312”

 

이 과정에서 농노가 해방되고 독립 자영농이 생겨났다. 그 외에도 귀족의 직영지를 임대해서 경작하는 부유한 농민, 즉 차지농이 있었다. 귀족은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해서 독립 자영농의 토지를 탈취하고 그 땅을 차지농에게 임대해서 돈을 벌었다. 땅을 뺏긴 독립 자영농은 부랑자가 되거나 젠트리 밑으로 들어가 농업 노동자가 되었다. 이 과정은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면서 가속화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서유럽의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왕들이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에스파냐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영국 해적을 이용하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였다. 이 승부의 결과 에스파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흔히 말하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을 구가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때이지만, 지금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왕은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라고 한다. 이 시기 영국은 셰익스피어(1564~1616)를 배출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유럽 절대왕정의 상징이다. 엘리자베스1세 시대보다 약 100년 뒤에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프랑스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화, 상공업 보호와 군대 육성’을 특징으로 하는 절대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을 계속하면서 재정이 악화되고, 루이14세의 대표적 실정으로 꼽히는 낭트칙령 폐지로 인해 위그노 부르주아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프랑스 경제는 급격히 기울었다.  

 

 

 

 

3. 서유럽을 따르는 중 ․ 동부 유럽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동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옛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이란 이미지만 어렴풋이 있지 역사뿐 아니라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한마디로 서유럽에 비하면 변방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다지 선생님의 강의에는 동유럽에 러시아를 포함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속해 있다.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대체로 늦은 시기에 절대왕정을 확립하기 시작했으며, 그 주체도 다르다. 서유럽의 경우, 대서양 무역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와 절대왕권을 추구하던 국왕이 손을 잡고 귀족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며 절대왕정 체제를 수립했다면,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내륙에 자리 잡고 있던 동유럽은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지 못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계몽군주가 귀족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으며,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 등을 확립해야 했기 때문에 서유럽과 달리 귀족의 특권이 지속되었고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시민계층이 성장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4.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16세기 이후 유럽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6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은과 17~18세기 삼각무역은 유럽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서유럽이 이루어낸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은 대서양 무역이 가져다 준 경제적 성과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식민지의 희생 없이는 서유럽의 근대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70>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로의 2차 항해 때 사탕수수 등의 열대작물을 가지고 갔다. 처가가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도제도가 사탕수수 재배에 매우 좋은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남미 최초의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토시를 비롯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에스파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인 것은 영국이다.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에 영국은 수많은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하였다. 유럽은 설탕의 단맛에 푹 빠졌고 설탕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났다.

 

설탕 생산의 최대 문제점은 노동력이었다. 사탕수수 재배부터 설탕 제조 공정까지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침략한지 100년 만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10% 이하로 급감했다. 90% 이상이 학살당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유럽인들은 놀랍게도(?) 혹은 당연한 발상이었을까? ...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종을 뒤바꿔 버린 것이다. 설탕이라는 상품이 새로운 상품인 노예를 만들어냈다.

 

유럽의 강국들은 너도나도 노예 무역에 뛰어들었다. 설탕과 노예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가 하나의 무역권을 형성하였다. 이른바 삼각무역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각무역은 쌍방향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상품이 이동한다. 총 등의 공산품을 싣고 유럽에서 출발한 상선은 아프리카에 도착해 총을 주고 노예를 사들였다. 노예를 싣고 아메리카로 향한 상선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팔고 설탕과 은을 싣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유럽의 별 쓸모없는 공산품은 삼각무역을 통해 설탕과 은으로 교환되어 유럽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18세기까지 유럽의 은이 최종적으로 흘러들어간 곳은 아시아였다.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향신료나 차를 사들이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부터 착취한 은을 지불하였다. 아시아의 상품들이 유럽에서 인기를 끌면 끌수록 상인들은 돈을 벌어도 유럽 경제는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다. 명․ 청 시기 중국에 은이 흘러넘친 것은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은 때문이었다.

 

1840년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런 배경 아래였다. 청과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팔고 그 수익으로 차 등을 수입했던 것이다. 청이 아편 거래를 금지하고 강력 대응하자 영국은 대포로 응수했다. 1,2차 아편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고 이때부터 청은 서양열강의 ‘밥’으로 전락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각무역으로 유럽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은이 대량으로 유입하면서 물가가 치솟았고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서양 무역에 많은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주식제도가 만들어지고, 항해의 위험성에 대비해 보험이 탄생했다.

 

영국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리버풀은 대규모 노예 무역항으로 성장했고, 인근의 맨체스터 등이 공업 도시로서 호황을 누렸다. 리버풀은 인근 도시에서 생산한 총, 모직물 등을 삼각 무역에 연결하였고, 여기서 얻은 이익을 다시 이 도시의 공장에 투자하였다.

 

이런 과정 끝에 드디어 맨체스터의 방직기계가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눈부신 산업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땀과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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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의 원․명 교체기는 우리나라의 여말․선초와 맞물린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인 정도전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 왕업을 유지해 나가는 동안 명나라는 만주족인 청나라에게 대륙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멸망했다.

 

명이 쇠퇴하고 후금(청)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을 경우 순망치한의 위기에 빠질 것을 염려한 명은 조선에 원군을 파병했다.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삼국이 맞붙은 것이다. 전쟁은 승자 없이 애매한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쇠퇴기에 있던 명은 임진왜란으로 재정 위기가 더욱 심해졌고, 이 틈을 타서 만주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다시 한 번 북방의 이민족이 한족을 누르고 중국 대륙을 정복한 것이다. 청나라는 강건 성세를 구가하며 번창했지만, 19세기 중엽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쇠퇴를 거듭했다. 19세기는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서양 열강의 식민체제 아래 재편되는 시기였다.

 

 

 

 

1. 명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

 

이름 속에 ‘원 주살’을 다짐했던 주원장은 1368년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난징에 명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는 3대 영락제 때 정점을 찍고, 임진왜란을 겪으며 급속히 쇠퇴하다, 1644년 이자성의 난에 의해 망했다. 300년을 채 채우지 못한 한족의 왕조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홍무제(주원장)는 한족의 지배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아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를 부활했다. 관료와 학생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계층을 형성했는데 이들 신사가 지배 계층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락제는 조선의 세조와 비슷하게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다. 정난의 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등극했지만, 명나라 최고의 치세를 펴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오늘날 베이징 여행의 상징이 된 자금성을 지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81>

 

영락제는 무엇보다 조공․책봉 관계를 통한 국제 질서 확립에 힘을 쏟았는데, 이를 위해 환관들을 각지에 파견하였다. 그 중 환관 정화가 이끈 선단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하였다. 정화의 선단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만약 명나라가 막강한 해상력을 계속 유지했다면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나라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7차례 원정후 중지했다. 여하튼 ‘정화의 원정’에 동행한 중국인들이 세계 각지에 정착하면서 화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종은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이 가장 숭상하던 명나라 황제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한 만력제이기 때문이다. 신종은 장거정의 개혁을 통해 쇠퇴하던 명나라를 일으켜 보려 하였으나, 임진왜란 파병 이후 악화된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방의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청나라의 등장이었다. 이로써 명나라가 이끌던 동아시아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2. 임진년, 전쟁에 휩싸이고

 

한국사와 겹치므로 통과.

 

 

3.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청나라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후금을 세운 만주족은 우리나라와 얽힌 역사가 깊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후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만주족은 금을 건국한 적이 있다.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낸 유목민족이 여진족 즉 만주족이다. 윤관이 별무반을 만들어 여진족을 무찌르고 동북9성을 쌓았을 때만 해도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을 약속하며 동북9성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려 문벌귀족들이 수성이 어렵고 귀찮다는 이유로 동북9성을 돌려주었는데 여진족은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꾸로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 왔다. 이때도 고려의  문벌귀족은 사대를 받아들였다. 인종 때 잇달아 발생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의 중심에는 금에 대한 귀족세력들의 대립이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쫓겨 간 송의 귀족들이 세운 남송과 대립하며, 몽골족이 유라시아를 휩쓸기 전까지 금-남송-고려의 삼각균형 체제를 형성하였다. 여진족은 고대까지만 해도 말갈족이라고 불렸다.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민에 말갈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숙신, 읍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말갈족 - 여진족 -만주족이라고 이름을 바꾸며 이 북방 유목민족은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천년이 넘도록 우리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명나라 공격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자 조선은 친명배금으로 돌아섰다. 친명배금이라는 구호 외에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조선은 두 차례 모두 패배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항복했다. 조선은 오랑캐라 얕보던 청과 사대 관계를 맺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세 명의 황제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이다. 강건 성세라고 불리는 이 130 여년 동안 청나라는 닭 모양 같은 오늘날의 중국 국경선을 대부분 완성했다. 내몽골, 신강, 서장, 타이완, 티베트 등이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이 이때부터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청나라는 요, 금, 원에 이은 정복왕조이다. 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면서도 유목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강압정책과 회유책을 병용하였는데, 역대 정복왕조 중 가장 효율적으로 한족을 통치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한족에게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면서도 만주족과 똑같이 관료에 등용하였으며,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였다. 과거제를 유지하고 명대부터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던 신사의 특권도 보장하였다. 한족 신사계층을 청나라 통치의 지지층으로 육성한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청대는 명대에 이어 경제도 발전하였다. 아메리카의 고구마, 옥수수, 감자 등이 서양을 통해 수입되었고, 양쯔강 하류는 이런 상품화폐작물을 재배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에서 보듯이 주변국들과 조공무역에 힘쓴 반면, 청나라는 통상을 요청하는 서양 세력에 맞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광저우에서만 공행이라는 관허 상인에게 서양과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은 서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유럽의 ‘시누아즈리 Chinoiserie (중국양식)'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청나라로부터 수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서구열강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까지 서슴지 않았다. 영국이 자국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한 것이다. 이른바 아편전쟁은 이런 부도덕한 국제무역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실제 주인공인 앨리스 리델 자매이다. 19세기 영국사회의 중국양식 유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쓰인1865년 중국은 이미 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서구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도 중세를 지나 근세로 접어들면서 서민 경제가 발달하고 덩달아 서민 문화도 발전하였다. 서양열강은 경제적 침탈과 함께 선교에도 열을 올렸는데, 특히 종교전쟁 이후 서구 세계 내에서 세력이 약해진 가톨릭은 예수회를 조직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 활동에 나섰다. 명나라 말기의 마테리오 리치와 청나라 초기의 아담 샬도 예수회 선교사이다. 아담 샬은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10년간 볼모생활을 하였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에 눈을 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명나라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지만, 현실과 유리된 채 철학적 사유에만 몰두한 성리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리학은 유학에 대한 주희의 해석학이다. 명나라의 왕양명은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성리학에 대한 또 다른 반성은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한 실학이다. 양명학과 실학은 조선에도 도입되어 조선 후기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주류세력인 교조적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되었다.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문자의 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문의 검열이 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학자들은 개인적 의견이나 가치관을 주장하기 보다는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실증적으로 경서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고증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청나라의 고증학이 탈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사회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세치용의 학’ 으로 기능했다.

 

 

 

4.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한국사와 겹치므로 통과.

 

 

추기 : 중국 전근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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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세계를 누빈 나라들

  

 

정통 칼리프 시대(642)에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린 이슬람 세력은 20세기 초까지 서아시아 지역을 지배하였다. 다양한 민족의 여러 왕조가 명멸했으나, 신기하게도 이들은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 세계를 이어갔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세우고 정복활동을 시작한 무함마드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정통 칼리프 시대,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까지는 아랍인들이 이슬람세계의 주인이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055년 토그릴 베그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주인은 튀르크족으로 바뀌었다. 튀르크는 6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제국을 세운 돌궐족이다. 돌궐족은 7세기 동아시아 십자외교의 한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돌궐-고구려-백제-왜가 세로축을 수․당-신라가 가로축을 형성하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나당연합군이 승리하자 돌궐은 당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다. 11세기에 이 돌궐족의 한부족인 셀주크 튀르크가 이슬람 세계의 주인이 된 것이다. 셀주크 튀르크는 토그릴 베그의 할아버지인 셀주크 때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름뿐인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칭기즈 칸의 자손인 훌라구가 이슬람 세계를 재패하고 일한국을 세웠다. 일한국은 7대 칸인 마흐무드 가잔 시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228>

 

몽골이 물러간 이후 이슬람 세계는 다양한 세력이 등장하였다. 13세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가, 14세기에는 오스만 튀르크가, 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이 지배하였다. 16세기에 일어난 사파비 왕조는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였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티무르는 일한국이 무너진 후 옛 몽골의 터전을 누비며 15세기 중앙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다, 몽골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는 몽골제국의 부흥을 꿈꾸며 대규모 정복활동에 나섰다.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하나로 연결하여 페르시아-이슬람 문화를 발달시켰다.

 

15세기 말 티무르 제국이 무너지면서 이 지역이 튀르크인과 페르시아인 지역으로 나뉘자, 이스마일 1세가 이 틈을 비집고 사파비 왕조를 일으켰다.(1502) 이스마일 1세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아케메네스 왕조와 파르티아, 사산왕조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살리려 하였다.

 

 

 

 

 

2. 세 대륙에 걸친 나라, 오스만 제국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오스만 1세는 튀르크계 이슬람이다. 13세기 셀주크 튀르크가 몽골과의 싸움에서 패하면서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질 때, 비잔티움 제국과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작은 나라를 이루었다. 발칸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하던 바예지드 1세는 14세기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티무르를 공격하다 앙카라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혀가 죽었다.

 

  

 

잠시 주춤했던 오스만제국은 무함마드 2세 때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크리스트교의 천년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다.

 

셀림 1세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를 꺾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집트에 있던 칼리프로부터 칼리프를 물려받아 술탄-칼리프가 되었다. 셀주크 튀르크 이래 술탄과 칼리프가 분리되었던 체제에서 다시 정교일체의 체제를 갖추고 명실상부 이슬람의 종주권을 장악했다.

 

오스만제국의 전성기는 술레이만 대제 시절이다. 유럽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프레베자 해전을 통해 지중해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술레이만은 정복뿐만 아니라 법전을 만들고 체제를 정비하는 등 오스만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절정에 달하였다. 지중해를 둘러싼 세 대륙이 오스만의 깃발 아래 놓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비서구권 국가가 그러했듯 서양제국주의의 침탈 아래 찢겼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오스만 제국은 세 대륙, 20개 민족, 육천만 명의 인구를 거느리며, 이슬람의 정신으로 페르시아의 전통과 튀르크의 기질, 아라비아의 솜씨를 버무려 거대한 문화를 발달시켰다.

 

대제국이 대부분 그러하듯 관용의 정신으로 여러 민족을 아울렀다. 자치권과 종교적 자유를 허용하는 밀레트 제도가 대표적이다. 특징적인 군대조직으로는 예니체리가 있다.

 

동서무역로와 지중해를 장악하여 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커피가 널리 퍼져 나간 것도 오스만제국 때이다. 그들이 커피를 즐겨 마시던 카웨가 유럽으로 전파되어 카페가 되었다. 서유럽의 카페는 자유로운 토론과 모임의 장소로 이후 시민 혁명에도 영향을 끼쳤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며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1922년 멸망했다. 현재 터키 공화국이 튀르크족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3. 인도의 새로운 전통, 무굴 제국

 

 

 

 

인도 왕조를 특징짓는 핵심어는 종교이다. 철기시대 아리아인들은 다수의 원주민을 지배하기 위해 카스트제도에 바탕을 둔 브라만교를 신봉하였다. 인도를 처음으로 통일한 마우리아 왕조는 BC6세기 석가모니가 만든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쿠샨 왕조 때는 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상좌부 불교 보다는 중생 구원을 주장한 대승 불교가 성행하였다. 인도 고대국가를 완성한 굽타 왕조 때는 마침내 힌두교가 탄생하였다. 힌두는 신드라는 지역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신드가 힌두로, 힌두가 인도로 전해지며, 힌두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즉 힌두교는 인도의 종교라는 뜻이 된다.

 

인도의 중세는 이슬람교가 들어온 시기이다. 10세기 말부터 이슬람 세력의 침입이 본격화되고, 1206년에 인도 최초의 이슬람 왕조가 탄생하였다.

 

인도의 마지막 왕조인 무굴 제국은 또 하나의 이슬람 왕조이지만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종교 뿐 아니라 언어, 예술 등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융합한 힌두-이슬람 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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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를 휩쓸 때도 델리술탄 왕조는 살아남았다.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천연 요새 덕분인지 몽골로서는 별 가치가 없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몽골제국이 거의 궤멸 된 16세기가 되어서 인도 땅에 새로운 ‘몽골 제국’이 수립되었다. 바부르의 ‘무굴 제국’이다. 무굴은 페르시아어로 몽골을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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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르는 부계로는 티무르의 5대손, 모계로는 칭기즈 칸의 15대손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스스로 몽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바부르가 인도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인도는 몽골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인데, 이 몽골인은 이슬람교를 믿었다.

 

무굴제국의 전성기는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때이다. 영토를 확장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을 뿐 아니라, 힌두교를 관용하는 한편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융합하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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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제국을 특징짓는 요소는 힌두-이슬람 융합 문화이다. 현재도 파키스탄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우르두어는 이슬람 지배자들이 인도 용병을 부리기 위해 만든 언어이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장점을 통합하여 만든 시크교도 지금까지 인도 인구의 2~3%가 믿고 있는 종교이다. 어디 있는지, 어느 시대인지는 몰라도 누구나 한번은 들어보고 사진으로 보았을 타지마할 역시 무굴제국이 만든 힌두-이슬람 문화의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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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아우랑제브는 무굴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였으나 이슬람 제일주의를 지향하면서 무굴제국의 쇠퇴를 촉발하였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 등 비이슬람교도의 반란이 일어났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 지방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제국은 델리와 그 주변을 다스리는 작은 왕국으로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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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제국은 1858년 명목상의 마지막 황제가 폐위되고, 영국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면서 공식 멸망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서구열강들이 인도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은 15~6세기부터이다.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서남 해안의 캘리컷에 도착한 이후 포르투갈이 인도양 향료무역에 끼어들었다.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사후 영국과 프랑스가 해안으로 침투하여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인도의 지방 정권을 하나씩 격파하였다. 인도는 이렇게 ‘영국의 젖소’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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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의 동서무역로를 따라가면 믈라카 해협이라는 지름길이 나타난다. 무역풍까지 불어 해상무역에는 더없는 요충지이다. 믈라카는 원래 인도 출신 이주민들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슬람 상인들과 손을 잡고 동남아시아 최초의 이슬람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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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의 식민지로 다시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을 겪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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