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이라는 단어는 볼 때마다 이상하다. 근대면 근대, 현대면 현대지, 왜 단어 하나를 두고 때로는 근대로 때로는 현대로 사용하는 걸까?
“모던(modern)이라는 말은 ‘근대’로 번역되기도 하고, ‘현대’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 ‘모던’이라는 말이 15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세계를 구조적 틀의 측면에서 가리킬 때에는 ‘근대’라고 옮기면 적절합니다. ... 그런데 15세기부터 오늘날까지를 역사적으로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선 시기는 15세기부터 과학혁명, 계몽주의 등을 거쳐 19세기 중반까지이고, 이어지는 시기는 19세기 중반부터 오늘날까지입니다. 저는 앞의 시기를 ‘근대’라 하고 이어지는 시기를 ‘현대’라 합니다. 근대적 패러다임 안에 역사적 시기로서의 근대와 현대가 있는 것입니다. p445 <인문 고전 강의>”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
근대는 곧 현대이기도 하다. 근대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의 틀을 만든 시대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 근대로 진입하였다.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가 그 진군의 발판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유럽은 30년 전쟁을 겪으면서 과학에 대한 의존도가 급속히 높아졌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신중심의 세계관도 무너지고, 미래는 불확실해 졌다. 신을 잃고 불안한 사람들에게 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은 과학이었다.
갈릴레이(1564~1642)는 우주의 작동원리가 성서의 계시가 아니라 수학을 통해서 서술될 수 있다고 믿었다. 갈릴레이는 수학이야말로 학문의 언어라고 했는데, 갈릴레이를 이어받은 사람이 데카르트, 뉴턴 등이었다.
데카르트(1596~1650)는 세계를 기계장치처럼 생각했다.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와 작동방식만 알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데카르트는 인간 사유 이외의 모든 것을 대상화함으로써 세계를 사고의 주체와 객체로 양분했다. 이른바 사유(res cogitans)와 연장(res extensa)이다. 데카르트의 이분법은 근대 사고의 초석인 동시에 파국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17세기 과학혁명은 뉴턴(1642~1727)에 와서 완성되었다. 뉴턴 과학은 과학뿐만 아니라 18세기 유럽 사상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구 과학자와 기술자 또는 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던 사고방식 전반을 뉴턴주의라고 하는데, 뉴턴주의에는 수학적, 형이상학적, 실험적 주장이 섞여 있다. 뉴턴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자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전파했다.
근대과학자들은 ‘세계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주인은 나’ 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종교나 철학보다 과학을 더 신뢰한다고 할 수 있다. 병이 나면 병원을 먼저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근대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해 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계몽주의는 영어로 enlightenment, 독어로 Aufclärung이다. 빛을 비추다, 명확하게 한다는 뜻이다.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통해 과학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방법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하면, 인간의 지식이 점차 확대하여, 행복한 미래를 맞을 것이라 믿었다. 과학적 이성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완전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컸다. 그러니 ‘이성의 권위에 대한 계몽의 신앙’이라는 후세의 빈정거림이 지나치다고 할 수도 없다. 오늘날 인간의 완전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몽의 기획은 실패한 것일까?
“17세기 과학혁명의 시대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공통으로 ‘이성의 시대’ 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의 이성이 자연의 제 1원리를 탐구하는 과학적 이성이었다면, 18세기 계몽주의의 이성은 사회적 처방을 내놓은 ‘사회 운동의 원리로서의 이성’ 이었습니다. p286 <역사 고전 강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세계사 선생님들은 참 힘들 것 같다. 세계사뿐만 아니라 한국사도 그런데,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인류 탄생 이래의 모든 것을 공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철학이나 과학 등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물론 깊이 있는 설명이 불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하기도 하다. 학생들이 이해하기 힘들뿐더러 역사 선생님이 철학자나 과학자는 아니니까.
홉스, 로크, 루소의 철학 혹은 정치사상을 도식화한 이 표도 한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인다. 강유원의 <인문고전강의>에 나오는 홉스와 로크로 살짝 보충해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이 글의 대부분이 강유원이 쓴 두 권의 ‘강의’를 짜깁기한 것이기는 하지만 ^^ ;;
절대왕정은 중세 봉건제가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에 나타난 정치체제이다. 절대왕정을 뒷받침한 사상은 왕권신수설이다. 강력한 왕권의 정당성을 신으로부터 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시민 사회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은 이 왕권신수설에 대한 부정이다. 왕의 권한이 막강하던 미약하던 간에 그 권한은 신이 아니라 사회적 계약에 따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약 이전의 인간은 어떤 자연 상태에 있었던 것일까? 자연 상태, 자연권, 자연법 등등에 대한 설명은 사상가들마다 다르다.
<위키 백과사전: 리바이어던>
홉스(1588~1679)하면 떠올리는 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이다. 홉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권이다. 그런데 자연권과 자연권이 충돌하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가 되고 인간 세계는 곧 파멸할 것이다. 그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계약이다.
사회계약의 핵심은 자연권의 일부를 절대주권에게 양도하는 것이다. 절대주권은 공권력을 가지고, 계약을 어긴 자에게 제제를 가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죽기 싫으면 자연권을 약간 포기하고 평화를 사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상징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지만 그가 제시한 것은 평화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홉스는 절대왕정을 지지했다. 잉글랜드 내전을 고스란히 겪었던 홉스는 절대군주만이 사회계약을 수호하고 평화를 지킬 힘이 있다고 믿었다.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절대군주의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는 안정된 사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로크(1632~1704)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17세기 신흥 상업 부르주아 계급의 당파성을 충실히 대변한 사상가’ 라 할 수 있다. 로크의 사상이 ‘소유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크가 주장하는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은 무엇인가?
로크는 “자신의 소유물과 인신을 처분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유물 즉 소유권의 근거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세계를 공유물로 주었고, 그것에 노동을 보태면 자신의 소유가 된다. 즉 신이 주신 선물에 나의 노동을 더하면 내 것이다.
서부개척 영화를 보면 주인 없는 땅에(사실은 주인이 있지만 백인들의 눈에는 하느님이 준 공유물일 뿐이다.) 울타리를 치고 깃발을 꽂으면 자기 땅이 된다. 실제 벤자민 플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 빈 땅을 발견하거나, 원주민이 살고 있더라도 그들을 쫓아내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로크가 미국 건국 이념의 아버지라는 말이 실감 난다. 플랭클린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여하튼 이런 생각을 학문적 용어로 말하면 ‘노동가치설’ 이다. 노동가치설이라고 하면 보통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사실 노동가치설의 원조는 잉글랜드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다.
로크의 자연 상태의 핵심은 소유권이다. 사회계약이 필요한 이유는 소유권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서부영화처럼 내가 애써 울타리를 쳐놓은 땅에 다른 놈이 나타나 총을 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서 법과 국가가 필요해 진다. 소유는 법적 승인을 받아야 한다. 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진다. 국가의 역할은 소유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폭력으로부터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소유권 보호를 최고의 임무로 삼는 이른바 경찰국가가 로크주의적 국가인 것이다.
로크의 대표작 <통치론>은 영국혁명에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다지 선생님은 로크의 <통치론>이 영국혁명 이후에 출간되어 영국혁명을 사후에 옹호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최근 로크 연구가들은 <통치론>이 명예혁명 이전에 초고가 완성되었다는 데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래슬릿은 <통치론>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래슬릿은 <통치론>이 배척위기의 와중에서 사실상 혁명에 대한 요구와 선동으로서 집필된 것이지, 이미 일어난 혁명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집필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p396 <인문고전강의>”
잉글랜드 내전은 표면적으로는 왕당파와 의회파의 싸움이었지만 내적으로는 대토지 소유귀족과 신흥 상업 부르주아의 싸움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통치론>은 새로 등장하는 부르주아의 당파성을 대변하는 텍스트입니다. 17세기 잉글랜드의 경제적 상황에서 주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인클로저 운동입니다. 토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경제적 이익의 즐거움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고 로크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법을 시도했고 그것을 관철했습니다. 이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자유주의 국가입니다.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상업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은 경제력을 앞세워 의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아가 왕권을 제한하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하는 입법을 시도하고 관철했던 것입니다. 자유주의 국가의 목표는 자산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p394 <인문고전강의>”
로크가 전제왕정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이 <통치론>이다. 지상의 통치자는 그들의 통치권을 신으로부터가 아닌 인간에 의해 체결된 계약으로부터 끌어낸다는 것과 인민은 계약을 위반한 통치자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논증했다.
루소(1712~1778)는 강유원의 책에 몇 줄만 나오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삶보다 전통적, 도덕적 삶을 추구하는 삶이 더 훌륭한 삶이라는 것이 루소의 메시지입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가 되어서야 분열된 세계 속에 살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루소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그의 이야기가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이미 사람들이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p366 <인문고전강의>”
17세기를 풍미한 데카르트의 이분법과 낙관적 뉴턴주의가 18세기에 와서 벌써 비판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과학적 수학적 확실성의 세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기도 하다.
여하튼 18세기 인물인 루소는 영국혁명과 관련이 없다. 루소에 대해서는 그가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프랑스혁명을 공부할 떄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영국 혁명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은 의회가 일찍 발달한 사회였다. 13세기에 이미 parliament 라는 단어가 쓰였다. 물론 귀족들의 협의체였지만, 왕에 대항해 성직자와 귀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구로 성장하였다. 의회가 다루는 주요 안건 중 하나는 과세문제였다. 왕은 전쟁 등의 이유로 자금이 필요할 때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영국은 1688년 조용히 시민혁명을 완수했다. 100년 뒤의 프랑스 혁명과 비교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명예로운 혁명이었지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보다는 오랜 투쟁과 적지 않은 피의 대가이기도 했다. 영국혁명의 시작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으로 거슬러 간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처녀왕으로 후계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 속해있지 않았다.) 튜더왕조가 끝나고 스튜어드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제임스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영국의 의회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고 종교 문제에서도 의회와 충돌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로부터 ‘권리청원’을 받아냈으나 찰스 1세는 이후 11년 동안 한 번도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640년에서야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의원들은 찰스 1세를 비난하며 탄핵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찰스 1세가 강경 대응을 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영국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1642~1651)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은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약 10년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초기 열세였던 의회파는 크롬웰이 이끄는 철기군이 옥스퍼드를 함락시키면서 승기를 잡았다. 3차에 걸쳐 일어난 내전은 1651년 우스터 전투를 마지막으로 의회파가 승리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공화정(1649~1658)을 선포했다. 영국역사상 전무후무한 짧은 기간의 공화정이다. 1649년 크롬웰을 호국경으로 추대하여 출발한 공화국은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붕괴하였다. 크롬웰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광을 되찾으려 노력하였으나 엄격한 금욕정치로 인해 독재자로 낙인찍혔다.
크롬웰 사후 왕정이 복고되어 찰스 2세, 제임스 2세가 연이어 재위하였으나, 이 왕들 역시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전철을 밟았다. 특히 제임스 2세는 친 가톨릭 정책으로 의회를 불안하게 하였다.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윌리엄을 왕으로 추대하며 제임스 2세를 몰아냈다. 딸과 사위가 아버지를 몰아내는데 가담한 것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무혈혁명인 명예혁명(1688)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여하튼 메리와 윌리엄은 의회가 제시한 ‘권리장전’에 승인함으로 절대왕정을 끝내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다.
스튜어드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여왕 때 영국은 소위 그레이트 브리튼이 된다.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공식적으로 병합한 것이다. 약 100년 뒤인 1801년, 그레이트 브리튼은 다시 아일랜드를 병합하며 덩치를 키웠다. 아일랜드의 남쪽지역은 오랜 독립투쟁 끝에 1921년 남아일랜드로 분리 독립하게 된다.
여하튼 앤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자, 1714년 독일 출신의 조지 1세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며 하노버 왕조를 열었다. 조지 1세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정치적 실권은 총리와 내각이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국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영국은 지금까지 이 전통에 따라 의원내각제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근대가 시작되다 :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장
1절. 자본가와 노동자가 등장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이 가장 먼저 산업혁명(1770)에 성공한 것은 제일 먼저 여건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무역이란 이름으로 식민지를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하고(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기반으로 성장한 신흥 상업 부르주아들이 시민혁명의 주역이 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획득하였다. 16세기부터 유행한 인클로저 운동은 노동자를 대량 양산하였다. 영국에는 석탄과 철광 같은 천연자원도 풍부하였다.
2절. 산업 혁명이 시작되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인클로저 운동은 영국의 모직물 산업 때문에 시작되었다. 모직물의 인기가 치솟자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쫓아내고 그 땅에 울타리를 쳐서 양들을 길렀다. 1516년에 출간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미 “영국에서는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차 인클로저가 목적한 바는 아니었지만,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대거 도시로 몰려들었고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초기의 산업은 매뉴팩처 즉 공장제 수공업의 형태였다. 가내 수공업이 선대제 수공업으로 발달했고 다시 매뉴팩처로 진화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은 왜 하필 방직산업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 궁금증은 2015년에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바다의 제국> 3부를 보면 풀리는데, 산업혁명이라는 눈부신 성과 뒤에는 융성했던 한 나라의 처절한 몰락이 있었다.
영국은 16세기만 해도 모직물이 최고의 산업이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 인도에서 수입된 면직물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면직물로 된 드레스를 입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에서야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를 들여왔다. 그런데 인도는 기원전 3000년경에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도의 면직물은 수 천 년의 노하우가 축적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면직물이었다. 영국은 인도산 면직물 (캘리코) 때문에 모직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양의 은이 유출되어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영국의회는 캘리코 수입 금지 등의 입법 조치를 취하였으나, 면직물 유행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영국은 인도의 뱅골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고, 인도의 면직물을 공짜나 다름없이 들여오기 시작했다.
영국의 욕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직접 면직물을 생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영국은 인도처럼 숙련된 면직물 기술자들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대신할 기계를 개발했다. 17세기에 발달한 과학기술과 영국의 풍부한 천연자원 등에 힘입어 마침내 방적기와 방직기를 발명했다. 1764년 제니 방적기를 시작으로 1785년에는 카트라이트 방직기가 개발되었다. 연표에는 보통 영국 산업혁명의 시작을 1770년으로 표기하고 있다.
19세기 중반 면직물이 대량 생산되자 영국은 거꾸로 인도에 면직물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수출을 위해 영국은 인도의 면방직 산업을 철저히 파괴했다. 공장을 부수고 숙련공들의 손가락을 자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1835년 당시 동인도 회사 총독 벤팅크 경은 “면방직 장인들의 뼈가 인도의 대지를 하얗게 덮었다.”라고 말했다. 식민지였던 인도는 영국산 면제품으로부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할 힘도, 자국민을 지킬 힘도 없었다. 인도는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세계 최고의 면방직 산업을 빼앗기고, 영국에 목화를 제공하는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였다.
면직물은 영국 산업을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기계가 널리 사용되자 동력의 개량도 필요해졌다. 와트(1736~1819)의 증기 기관이 문제를 해결했다.
기계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값싸고 질 좋은 철이 필요했는데 마침 영국에는 철도 많았다. 증기기관과 철! 연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거대한 쇳덩이들은 산업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증기와 쇳덩이가 결합한 최고의 발명품인 기차가 탄생했다. 1825년에 스티븐슨의 증기 기관차가 객차를 끄는 데 성공하였다.
1830년 운행을 시작한 최초의 근대식 철도는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이었다. 맨체스터 등의 공업지대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리버풀까지 기차로 운반되어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었고, 해가지지 않는 식민지는 거대한 시장이었다.
영국의 면직물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무관세로 들어온 영국산 면직물이 조선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가내수공업을 짓밟았다. 일본이 영국산 면직물을 들여와 다시 우리나라로 수출한 것이다. 쌀과 면직물을 맞바꾼 미면米綿무역으로 곡물가격은 치솟고 가내수공업은 몰락했다. 개항이 경제 파탄을 가져왔던 것이다.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구식군인뿐 아니라 도시의 빈민들이 대거 합세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운동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류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먹고 살만해지면 오히려 빈부격차가 심해진다는 사실이다. 청동기시대에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계급이 발생했고, 조선 후기에 생산력이 증대되자 농민층이 부농과 임노동자로 분화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의 현실은 가혹하다 못해 지옥과 같았다. 공장의 중심은 기계가 차지하게 되었고 노동자들은 기계에 딸린 존재가 되었다. 숙련공이나 힘센 남성이 필요 없어진 공장에서는 임금이 싼 아동과 여성을 고용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들은 병에 걸려 어린나이에 죽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맨체스터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17세였다. 서기 1000년 노르만 정복 당시 영국 전체의 평균 수명 24세보다 30%가 감소한 수치이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흑인을 사냥해 노예로 만들고, 면방직 산업의 메카 인도를 박살내고....산업혁명이란 세계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분노와 피땀 위에 이룩한 빛나는 성과가 아니던가? 그 달콤한 열매는 어디로 갔기에 영국의 노동자마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것일까? 산업혁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반자본주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1810년대 기계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의 숙련 방직공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다. 기계만 없다면 예전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보려는 러다이트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산업은 더욱 발달했고, 노동자들의 의식도 향상되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필요하고, 그 법을 제정하는 국회의원을 자신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837년 영국에서 시작된 차티스트 운동이 바로 노동자들의 선거권 투쟁이다. 영국 정부는 지도자를 체포하고 운동을 탄압하였지만 조금씩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땅이나 공장 같은 생산 수단을 사회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운동이었다.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초기 오언과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를 거쳐 후기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역사가 보여주었듯이 소련과 중국 등에서 실현되기도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3장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그때 가서 상세히 알아보도록 해야겠다.
고전주의 경제학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0~31>
노르만의 침략이 끝난 11세기 이후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가 탄생하였다. 부르주아들은 처음에는 영주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자치권을 획득하며 성장하였다. 13~14세기 유럽 각지에 등장한 신분제 의회에는 영주와 고위 성직자 이외에도 도시의 대표인 부르주아들이 참여하였다. 부르주아들은 국왕에게 중앙집권 국가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보장받거나 정부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부르주아는 한 단계 더 도약하였다. 대서양 무역과 식민지 경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축적된 자본은 산업에 재투자하였고 생산된 상품은 해외 식민지를 통해 판매했다. 투자와 생산의 선순환 과정이 거듭되다 마침내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5>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부르주아의 위상도 급상승했다. 농민 출신의 부르주아가 하원 의원에 진출하고 총리도 되었다. 부르주아들은 자기 계급의 이해에 맞는 정책을 요구하고 대지주 귀족들과 대립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1846년 영국의 곡물법 논쟁이다. 곡물법이란 지주를 보호하기 위해 값싼 외국산 곡물 수입을 금지하는 법이다. 부르주아들은 곡물법에 반대하였다. 값싼 곡식은 낮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유 무역’을 명분으로 곡물법을 폐지시켰다. 곡물법 폐지는 부르주아가 명실상부한 지배 계급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9세기에 서유럽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자유 무역’ 덕분이라는 견해가 많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 시장, 자유 무역을 채택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앞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영국은 보호주의의 선구자였다.
“헨리 7세(1485~1509)부터 시작해서 튜더 왕조 군주들은 정부 개입을 통해 모방직 산업을 장려했다. 당시 모방직은 유럽의 첨단 산업이었고 플랜더즈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저지대 국가들에서 발달한 상태였다. 영국 정부는 관세를 통해 저지대 국가에서 생산되는 더 양질의 상품으로부터 영국 생산자들을 보호했고, 선진 방직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 숙련공들을 스카우트하는 작전의 뒤를 봐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플랜더스, 플래밍 같은 성은 당시 스카우트된 플랜더스 숙련 방직공들의 자손들이다. 이 같은 정책은 튜더 왕조 후에도 계속되어 18세기 무렵에는 모방직 제품이 영국 수출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수출 소득이 없었다면 영국은 산업 혁명에 필요한 식량과 원자재를 들여오지 못했을 것이다. 1721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총리로 임명된 로버트 월폴은 광범위하고 야심 찬 산업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정부 개입의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에 대한 관세 보호와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 약진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월폴의 이 산업 장려책 덕분이었다. 애담 스미스가 영국 생산자들을 돕기 위한 보호주의나 기타 정부 개입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 것도, 1770년대 영국이 다른 나라들 보다 너무도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이 완전히 자유 무역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국부론>이 나오고도 거의 1세기가 지난 1860년이었다. 바야흐로 산업 최강국으로서의 입지가 확고부동해진 다음이다. p67~68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로 유명해진 경제사經濟史학자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은 후진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신자유주의나 신고전주의는 선진국들의 ‘사다리 걷어차기’다. 일치감치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간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없애 버린 후에 공정하게 경쟁하자고 꼬드기는 것이 신자유주의인데 이것은 사기라는 것이다. 어른이 아이를 데리고 링 위에 올라가 대등한 경쟁을 운운하는 꼴이다.
자유무역이 자본주의가 성장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무역이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유 무역 협정이 맺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 무역의 확산은 대부분 중남미와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다.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무역이라면? 그렇다.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자유무역은 바로 강화도 조약과 같은 불평등 조약을 말한다. 대포를 실은 배를 끌고 와 무역이냐 전쟁이냐를 강요하며 강제로 통상을 맺던 그 자유무역 말이다. 여기서 자유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한 아시아 국가들의 관세 자주권 상실을 의미한다. 우리도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무관세, 무제한 곡물 유출, 무항세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유무역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확산되었던 것이다. 가장 악명 높은 불평등 조약은 아편전쟁 후에 영국과 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6>
‘자유 시장’에 대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고전주의 학파이다. “시장은 경쟁을 통해 모든 생산자를 감시하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두면 된다.” 장하준이 한 줄로 요약한 고전주의 학파의 핵심 주장이다. 고전주의 경제학파는 18세기 말에 시작되어 19세기 말까지 경제학의 주류를 이끌었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애덤 스미스 (1723~1790) 이다. 고전주의 학파를 발전시킨 학자는 리카도(1772~1823), 세(1767~1832), 맬서스(1776~1834) 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p36 : 아담 스미스 (1723~1790)>
“고전주의 학파는 경제 주체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국부의 극대화라는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역설적인 결과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경쟁의 힘 덕분에 가능하다. 생산자들은 이윤을 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싸고 더 나은 제품을 만들게 되고, 궁극적으로 최저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국민 경제의 생산량을 최대화 한다.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경제학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비유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스미스 자신은 <국부론>에서 이 개념을 한 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론을 설명할 때 그다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p120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세(1767~1832)의 법칙은 일단 공급이 있으면 수요는 자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수요 부족에 의한 공급 과잉은 없고 따라서 시장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한다는 이론으로, 이 법칙에 근거해서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공급 중심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실업 문제에 있어서도 이 원칙을 고수했는데, 전체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노동의 초과 공급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실업자는 결국 다른 일자리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실업은 분업과 생산성 향상에 의해 구조적으로 야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세의 법칙을 고수하며 모든 실업자는 ‘자발적 실업자’일 뿐이라고 했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고 익숙하고 돈을 많이 주는 곳만 고집하니까 실업상태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오늘 들어도 참으로 귀에 익은 주장이다.
고전주의 학파는 정부가 보호주의나 규제 등 어떤 형태로든 시장을 제한하는 것에 반대했다. 리카도(1772~1823)는 비교 우위론을 만들어 자유 무역 논리를 더욱 강화했다.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나는데 비교 우위론에 대한 예시를 수치로 계산하여 입증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무척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비교 우위론의 함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비교 우위론에 의하면 후진국은 선진국이 만들지 않는 것만을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이 만드는 물건을 만들려고 하다간 비교 우위를 확보할 수가 없다. 선진국은 부가 가치가 높은 상품만을, 후진국은 선진국이 내버린 노동집약적 저 부가가치 상품만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 결국 후진국은 결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 참으로 합리적인 이론이다!
맬서스((1776~1834)가 고전주의 경제학자라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 어쩌고 하는 말은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말의 배경이 그렇게 냉혹한 이론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몰랐다.
“ 맬서스는 구빈법이 빈곤을 장려(혹은 심지어 빈곤을 만들어 내기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인구에 대한 그의 일반적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구빈법은 아이들을 부양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그의 관점에서 식량 공급은 상대적으로 비탄력적이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나면 식량 가격이 상승하고, 이는 고용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낮춰서 더 많은 빈곤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맬서스는 구빈법이 출생률을 상승시키고, 균형적인 실질임금을 낮추며, 영아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p79 <아담의 오류>”
언뜻 보기에는 200년 전이니까 통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지만, <아담의 오류> 의 저자 던컨 폴리에 따르면 최근에도 미국에서 이와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연방 복지 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복지가 실제로 빈곤을 만들어 내거나 최소한 빈곤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의 충고 하나를 새기고 싶다. 경제학은 가치 중립적인 혹은 객관적인 학문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 경제학은 정치경제학이었다.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떼어 낸 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었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장하준의 정치경제학 강의 p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