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 80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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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굉장히 짧습니다.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으로 45쪽 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이 책 자체는 꽤 두껍습니다.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라는 정치학자가 쓴 서설이 200쪽 가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서설 중 ‘공산주의’ 의 개념에 관한 내용을 조금 옮겨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라는 말로 변형되어 일상용어처럼 쓰이지만, 이 말을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쓰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합니다.

 

『공산당 선언』의 너무나도 유명한 첫 문장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입니다. 다음은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로 이어집니다.

 

유럽의 구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사적으로 쫓아내려 하는 이 유령, 공산주의는 무엇일까요? 공산주의의 어원 자체는 중세 말 기독교에 반기를 든 수도원 결사체들 중 급진파들이 처음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존스의 서설에서는 범위를 좁혀 이 용어가 현재의 의미를 획득해 나가는 과정을 프랑스 혁명기부터 살피고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발표됩니다. 선언 자체는 1848년 전 유럽으로 번진 혁명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묻혀 버립니다. 그렇다 해도 ‘공산주의’는 당시 유럽사회에 널리 퍼진 골칫거리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백과사전인 『국가사전』1846년 ‘보유’편에는 이런 기술이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지난 몇 년간 온통 공산주의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는 누군가가 두려워하고 또 누군가가 두려움을 불어넣기 위해 이용하는 위협적인 유령이 되었다.” 우리가 놀라운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는 당시에는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진부한 수식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12년 전 인 1834년 『국가사전』초판에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실리지도 않았습니다. 공산주의가 유럽사회에 두드러진 위치로 떠오르는 과정은 놀랍도록 급속했던 것입니다.

 

공산주의라는 말은 1840년대 초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의 1830년 7월 혁명 때 재등장한 공화주의 운동의 초급진적 분파를 묘사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재등장한 공화주의’ 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이들이 대혁명 당시의 급진 자코뱅이 주장한 공화주의를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자코뱅적 공화주의의 핵심은 ‘평등’입니다. 혁명 당시 생존자(테르미도르 반동이후)의 회상에 의하면 “자신들을 ‘평등파’라 부르는 혁명 공모자들은 불평등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인민 주권과 고덕한 공화국은 결코 보장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부패한 테르미도르 정부는 2년 전 공포정치를 주재한 공안위원회와 유사한 ‘현자들’의 비상 ‘독재’에 의해 타도되고 대체되어야 했다. 이 기구는 부자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토지를 몰수하고, 재화의 공유를 수립한 연후에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공화국에 참여할 인민에게 권력을 돌려줄 생각이었다.”

 

이 사상이 1830년 7월 혁명으로 형성된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에서 재등장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7월 혁명의 결과로 세워진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은 배신이었습니다. 루이 필립은 의회 군주정, 유산계급 참정권, 자유방임 경제를 실행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의 권력이 강화된 것입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평등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부르주아들이 중시한 것은 개인의 자유, 그 중에서도 사적 소유의 권리와 자유입니다. 자본주의의 단짝은 자유주의입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거의 100년을 끌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주요 배경인 1832년 6월 봉기가 발생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ABC 회원들이라는 학생들이 마지막 바리케이드 전투에서 전멸합니다. 급진 공화주의 협회는 주로 학생들과 불만을 품은 장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이 계속 반란을 시도하자 결국 1835년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었으며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자, 합법을 선호하는 일부 급진 공화주의자들이 1830년대 말 ‘평등주의 공화국’ 대신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대체물로 제시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입니다. 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온건한 이미지로 살아남고, 공산주의는 독재와 폭력의 이미지로 점철되어 패퇴했습니다. 물론 공화주의는 지금도 양쪽 모두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북한의 공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입니다. 우리나라의 영문 표기는 ‘Republic of Korea’입니다.

 

공산주의는 1840년 공적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합류합니다. 정치 지형이 변화되면서, 평등에 집중하는 급진 공화주의와 노동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서 결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새로운 사회주의가 합류했던 것입니다. 정치적 차원의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공산주의가, 사회공동체와 경제적 협동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만났습니다. 노동 문제에 직면하여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후 공산주의는 새로운 자리매김을 해나갑니다. 공화주의적 뿌리와 분리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됩니다. 1841년 보수주의 프러시아 국가신문은 공산주의를 “현대사회의 산업적 궁핍”과 연결시켰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행하고 광기에 찬 계급의 비통한 외침”으로 정의했습니다. 1840년대 독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현대 산업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궁핍, 빈곤, 범죄와 연결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는 ‘하층계급’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빈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빈곤화된 사람들이며 .... 사회의 대대적인 해체에서 귀결되는 대중들”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노동자 계급이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산업화의 내부에 포함된 노동자가 아니라 산업화 밖에 내팽겨진 빈민입니다.

 

이 프롤레타리아트가 공산주의와 결부되자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었습니다. 『공산당 선언』의 첫 문단에서 언급된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은 직조공 반란, 농민봉기, 영국의 새 구빈법 등 모든 것의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불만의 천둥을 뒤따르는 번개의 섬광 속에서 공산주의의 창백한 유령이 드러났다.” 당시 공산주의가 갖게 된 이미지입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궁핍과 분노를 언어로 표현했다는 두려움, 공산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1840년대에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험한 계급, 사유재산에 대한 약탈적 적대와 동일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빈부 사이의 전쟁의 징후였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가 제시됩니다. 더 이상 궁핍하고 뿌리 없는 빈민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의 산물이며, 공장들과 그들이 모이는 도시들에 의해 단련됩니다. 범죄적이며 부정적인 하층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따로 분류됩니다. 이것은 엥겔스가 발전시킨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재산에 대한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현존하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의 폭력적 타도”를 강조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선고를 실행하는 집행자가 되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폭력과 소위 ‘절도 욕구’와 연결하는 것은 부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은 변증법적 진보로 바뀌었습니다. 진보의 최고 단계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공산주의 목표의 성취입니다.

 

『공산당 선언』이 당장의 효과를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이 선언의 효과는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두렵게 했습니다. 한 세대 후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독일에 등장했을 때, 공산주의라는 말은 기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모태는 공화주의, 공화주의의 가치는 평등입니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함께 출발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경제 체제로서의 대척점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추적해 본 공산주의는 정치적 개념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마르크스 이후 공산주의는 생산관계의 역사적 최종 단계로 규정되면서 경제적 개념에 밀착됩니다.

 

조금 웃기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스스로를 공화주의 체제로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자유와 평등은 궁극적으로 양립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적 소유의 자유가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가 평등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와 어느 한도까지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여기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추가하면 상황은 훨씬 복잡해집니다. 민주주의는 民, People이 주인인 체제입니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은 인민, People을 공식 명칭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 역시 민주주의체제임을 역설합니다. 돈이 근본인 자본資本주의와 民이 주인인 민주주의民本 는 또 어디까지 양립할 수 있을까요? 資本과 民本은 1원1표와 1인1표에서 그 차이를 극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주인인 경제체제에 살고 있으면서 국민이 주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혹은 국민이 주인인 정치제제에 살고 있으면서 돈을 주인으로 모십니다. 공산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민을 주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모든 권력은 당의 지도자가 가집니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들을 조합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 최고의 조합은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삐걱 대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뉴스들만 보아도 우리가 이 국가의 주인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로 가입한 독서 카페의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이 글은 카페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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