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의 원․명 교체기는 우리나라의 여말․선초와 맞물린다. 명을 세운 주원장은 조선 건국의 주도세력인 정도전과 대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 왕업을 유지해 나가는 동안 명나라는 만주족인 청나라에게 대륙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멸망했다.
명이 쇠퇴하고 후금(청)이 성장하는 배경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있다.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를 요구하며 조선을 침략했다.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을 경우 순망치한의 위기에 빠질 것을 염려한 명은 조선에 원군을 파병했다. 16세기 말, 한반도에서 동아시아 삼국이 맞붙은 것이다. 전쟁은 승자 없이 애매한 상태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쇠퇴기에 있던 명은 임진왜란으로 재정 위기가 더욱 심해졌고, 이 틈을 타서 만주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다시 한 번 북방의 이민족이 한족을 누르고 중국 대륙을 정복한 것이다. 청나라는 강건 성세를 구가하며 번창했지만, 19세기 중엽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열강의 침략으로 쇠퇴를 거듭했다. 19세기는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서양 열강의 식민체제 아래 재편되는 시기였다.
1. 명나라가 이끄는 동아시아
이름 속에 ‘원 주살’을 다짐했던 주원장은 1368년 원나라를 북방으로 몰아내고 난징에 명나라를 세웠다. 명나라는 3대 영락제 때 정점을 찍고, 임진왜란을 겪으며 급속히 쇠퇴하다, 1644년 이자성의 난에 의해 망했다. 300년을 채 채우지 못한 한족의 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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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제(주원장)는 한족의 지배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아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를 부활했다. 관료와 학생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계층을 형성했는데 이들 신사가 지배 계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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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는 조선의 세조와 비슷하게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랐다. 정난의 변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등극했지만, 명나라 최고의 치세를 펴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오늘날 베이징 여행의 상징이 된 자금성을 지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81>
영락제는 무엇보다 조공․책봉 관계를 통한 국제 질서 확립에 힘을 쏟았는데, 이를 위해 환관들을 각지에 파견하였다. 그 중 환관 정화가 이끈 선단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하였다. 정화의 선단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만약 명나라가 막강한 해상력을 계속 유지했다면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나라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7차례 원정후 중지했다. 여하튼 ‘정화의 원정’에 동행한 중국인들이 세계 각지에 정착하면서 화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신종은 조선 후기의 사대부들이 가장 숭상하던 명나라 황제이다. 그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병한 만력제이기 때문이다. 신종은 장거정의 개혁을 통해 쇠퇴하던 명나라를 일으켜 보려 하였으나, 임진왜란 파병 이후 악화된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방의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청나라의 등장이었다. 이로써 명나라가 이끌던 동아시아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2. 임진년, 전쟁에 휩싸이고
한국사와 겹치므로 통과.
3.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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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을 세운 만주족은 우리나라와 얽힌 역사가 깊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후금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만주족은 금을 건국한 적이 있다.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낸 유목민족이 여진족 즉 만주족이다. 윤관이 별무반을 만들어 여진족을 무찌르고 동북9성을 쌓았을 때만 해도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을 약속하며 동북9성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고려 문벌귀족들이 수성이 어렵고 귀찮다는 이유로 동북9성을 돌려주었는데 여진족은 이를 바탕으로 세력을 키워 금나라를 건국하고 거꾸로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 왔다. 이때도 고려의 문벌귀족은 사대를 받아들였다. 인종 때 잇달아 발생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의 중심에는 금에 대한 귀족세력들의 대립이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남쪽으로 쫓겨 간 송의 귀족들이 세운 남송과 대립하며, 몽골족이 유라시아를 휩쓸기 전까지 금-남송-고려의 삼각균형 체제를 형성하였다. 여진족은 고대까지만 해도 말갈족이라고 불렸다. 고구려와 발해의 피지배민에 말갈족이 속해 있었다. 이들은 숙신, 읍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말갈족 - 여진족 -만주족이라고 이름을 바꾸며 이 북방 유목민족은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천년이 넘도록 우리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2대 황제가 된 홍타이지는 명나라 공격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략했다.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한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쫓겨나자 조선은 친명배금으로 돌아섰다. 친명배금이라는 구호 외에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조선은 두 차례 모두 패배하고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며 항복했다. 조선은 오랑캐라 얕보던 청과 사대 관계를 맺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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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세 명의 황제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이다. 강건 성세라고 불리는 이 130 여년 동안 청나라는 닭 모양 같은 오늘날의 중국 국경선을 대부분 완성했다. 내몽골, 신강, 서장, 타이완, 티베트 등이 중국의 영토가 된 것이 이때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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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요, 금, 원에 이은 정복왕조이다. 다수의 한족을 통치하면서도 유목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강압정책과 회유책을 병용하였는데, 역대 정복왕조 중 가장 효율적으로 한족을 통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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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에게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면서도 만주족과 똑같이 관료에 등용하였으며, 한족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였다. 과거제를 유지하고 명대부터 지배계층으로 군림했던 신사의 특권도 보장하였다. 한족 신사계층을 청나라 통치의 지지층으로 육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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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대는 명대에 이어 경제도 발전하였다. 아메리카의 고구마, 옥수수, 감자 등이 서양을 통해 수입되었고, 양쯔강 하류는 이런 상품화폐작물을 재배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에서 보듯이 주변국들과 조공무역에 힘쓴 반면, 청나라는 통상을 요청하는 서양 세력에 맞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광저우에서만 공행이라는 관허 상인에게 서양과의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비단, 차, 도자기 등은 서구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유럽의 ‘시누아즈리 Chinoiserie (중국양식)'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청나라로부터 수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서구열강은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까지 서슴지 않았다. 영국이 자국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아편을 청나라에 밀매한 것이다. 이른바 아편전쟁은 이런 부도덕한 국제무역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실제 주인공인 앨리스 리델 자매이다. 19세기 영국사회의 중국양식 유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쓰인1865년 중국은 이미 1,2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서구열강의 반식민지 상태로 떨어지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도 중세를 지나 근세로 접어들면서 서민 경제가 발달하고 덩달아 서민 문화도 발전하였다. 서양열강은 경제적 침탈과 함께 선교에도 열을 올렸는데, 특히 종교전쟁 이후 서구 세계 내에서 세력이 약해진 가톨릭은 예수회를 조직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선교 활동에 나섰다. 명나라 말기의 마테리오 리치와 청나라 초기의 아담 샬도 예수회 선교사이다. 아담 샬은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와도 교류가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10년간 볼모생활을 하였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천주교에 눈을 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명나라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지만, 현실과 유리된 채 철학적 사유에만 몰두한 성리학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도 했다. 성리학은 유학에 대한 주희의 해석학이다. 명나라의 왕양명은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여 지행합일을 강조한 양명학을 발전시켰다. 성리학에 대한 또 다른 반성은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한 실학이다. 양명학과 실학은 조선에도 도입되어 조선 후기 사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조선의 주류세력인 교조적 성리학자들에 의해 배척되었다.
청나라는 한족의 문화를 존중했지만, ‘문자의 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학문의 검열이 심했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학자들은 개인적 의견이나 가치관을 주장하기 보다는 옛 문헌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 실증적으로 경서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고증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청나라의 고증학이 탈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데 반해, 조선의 실학은 사회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경세치용의 학’ 으로 기능했다.
4. 일본과 청나라로 향한 조선
한국사와 겹치므로 통과.
추기 : 중국 전근대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