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로 나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한국학 중앙 연구원>

 

조선 태종 때 그린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원나라의 지도를 들여와 우리나라와 일본을 덧붙여 그린 것인데, 동양에서 그린 세계지도 중 남아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중국이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양이 중화사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지도가 영토의 크기로는 엉터리지만 (그럼에도 세계지도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발견하기 80여 년 전에 바다로 둘러싸인 아프리카 남단을 그렸다는 점에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 문화와 경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15세기 초 세계의 중심은 중국과 이슬람, 인도 등 아시아였다. 서양은 동양의 문물에 열광하고 있었다. 유럽 귀족들은 동양의 향신료를 권력의 상징으로 향유했고, 유럽 상인들은 동양과의 교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했다.

 

유럽 상인들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것은 후추, 정향, 육두구 등의 향신료였다.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동방 끝에 있다고 생각한 파라다이스로부터 강을 따라 흘러내려온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15,000원 정도로 살 수 있는 후추가 당시 유럽에서는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상인들의 욕망이 이해될 만도 하다. 향신료 무역으로 유럽 상인들은 수십 배에서 수백 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53>

 

지중해는 동양의 문물이 서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역사 이래 동서양의 교역로를 차지하려는 싸움은 끊임없었는데, 오스만제국이 비잔티움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차지한데다 프레베자 해전에 승리함으로써, 지중해는 완전히 오스만제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스만제국은 베네치아에 교역 독점권을 주고 지중해를 엄격히 통제했다. 유럽 상인들은 검은 황금, 후추를 얻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 데 더욱 더 혈안이 되었다.  

 

   

 

15~6세기는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 라고 부르는 시기다. 첫 항해를 시작한 것은 유럽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은 100년 가까운 항해 끝에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의 주요 길목에 요새를 세워,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독점하려 애썼다.

 

두 번째 주자는 이제 막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중앙집권 국가를 세운 에스파냐 왕국이었다. 포르투갈에 의해 인도 항로가 막히자 새로운 항로가 필요했는데,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도 인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신반의하면서 콜럼버스를 지원한 에스파냐는 뜻하지 않게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고 막대한 금은을 채굴하여 단숨에 유럽 최대의 강대국이 되었다.

 

콜럼버스가 도착한 곳은 아메리카의 서인도 제도였으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한 것은 30년 뒤의 마젤란 일행이었다. 3년의 항해 끝에 마젤란은 죽었지만 살아남은 마젤란 일행은 에스파냐에 돌아 올 수 있었다. 첫 세계 일주였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향신료에 대한 욕망만으로 그 험한 바닷길을 개척할 수는 없다. 송나라의 발명품인 나침반, 화약 등이 원나라를 통해 전해졌고, 유럽은 과학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상선에 대포를 싣고 동양을 향해 원거리 항해에 나설 수 있었다. 이슬람 상인과 아시아 상인이 평화롭게 오가던 바다는 이제 화염과 포성에 휩싸였다. 교역이 아니면 죽음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버스로 인해 대재앙을 당한 곳은 아시아가 아니라 아메리카였다. 이슬람, 인도, 중국이 버티고 있는 아시아는 당시 세계 경제의 70~80%를 차지하고 있는 강국이었다. 포르투갈은 인도 각지에 거점을 마련했지만 내륙으로 침범하지는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아스텍과 잉카제국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했고 절멸했다. 여전히 청동기 문명권 아래 있던 원주민들은 불과 수백 명의 침략자들에 의해 패배했다. 총칼 보다 더 큰 재앙은 에스파냐인들과 함께 도착한 천연두, 홍역 등의 전염병이었다. 면역력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고, 에스파냐 침략 100여년 만에 원주민 인구의 90% 이상이 사망하였다. 문명과 함께 종족 자체가 사라져 갔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거대한 비극은 바다 건너 또 다른 대륙의 비극을 잉태하였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플랜테이션 사업을 벌이게 되는 유럽 각국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오기 시작했다. 90%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라져 간 곳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채워 넣기로 한 것이다.

 

 

 

 

2. 유럽의 새 강자, 영국과 프랑스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유럽 각국은 앞 다투어 항해에 올랐다. 해상 무역의 패권과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유럽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60>

 

16세기는 라틴아메리카의 은광을 차지한 에스파냐가 패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고, 17세기 전반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의 부르주아들이 이끌어 갔다. 네덜란드는 일종의 화물 운송업을 통해 유럽 최대의 해운국으로 부상했다. 기술혁신으로 저가의 상선을 건조하고 유럽 어느 나라의 배보다 싼 운송료로 대서양을 오가는 화물을 독점했다. 하지만 16세기 중반부터 눈부시게 성장한 영국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꺾고, 17세기에는 항해법으로 네덜란드를 견제하면서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절대왕정을 구축한 프랑스와 영국이 각축전을 벌였다. 18세기에 영국은 7년 전쟁의 와중에 인도와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에 승리함으로써 대서양의 주인이 되었다. 대서양을 통한 삼각무역은 18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해상 무역으로 성장한 부르주아들과 중앙집권화를 추구하는 국왕이 서로 협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유럽은 절대왕정 체제를 수립하였다.

 

“절대왕정 체제는 중세 봉건 체제와 근대 국민국가 체제 사이에 성립한 일종의 과도기 체제입니다. 절대왕정 체제를 규정하는 요소는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관료와 상비군이고, 둘째는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인 왕권신수설, 그리고 셋째는 넓은 의미의 경제정책인 중상주의입니다. <역사 고전 강의> p311"

 

영국의 절대왕정 시기는 헨리7세(1485~1509)에서 찰스1세(1625~1649) 까지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때 절대왕정 체제가 절정을 이루었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끝났다.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100년 가까이 뒤늦은데, 독일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성립해서 19세기까지, 러시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까지 절대왕정 체제가 이어졌다.

 

절대왕정의 꽃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로 알려져 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일갈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진짜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듯한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귀족과 성직자를 억누르고 부르주아를 지원하고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고 막강한 군대를 육성하였다.

 

그러나 절대왕정 체제는 18세기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모체로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영국의 절대왕정 체제에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역사 고전 강의>를 통해 영국 절대 왕정의 구체적인 모습을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절대 왕정 시대를 연 헨리 7세는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철폐하고 귀족들을 관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관료와 상비군이라는 절대왕정 체제의 첫째 요소가 여기서 발견됩니다. 이 과정에서 귀족들은 관료와 군대의 장교가 되었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귀족들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직접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왕의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정은, 왕이 지방의 지사를 임명해서 파견했던 프랑스처럼 강력하지 않아서 귀족의 지배력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귀족에 맞설 세력을 키웠는데, 이들을 ‘젠트리gentry'라고 부릅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젠트리는 평민 출신이면서 땅을 가진 부농입니다. 헨리 8세는 이들 중에서 치안 판사를 임명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는 잉글랜드의 황금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적극적으로 시행된 정책 기조가 중상주의입니다.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는데, 상징적인 사건이 1600년에 동인도 회사 설립입니다. 이후 잉글랜드의 절대왕정 체제는 잉글랜드 내전(청교도 혁명) 과정에서 처형당한 찰스 1세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런 다음 잉글랜드는 입헌왕정 국가로 전환됩니다. p312”

 

이 과정에서 농노가 해방되고 독립 자영농이 생겨났다. 그 외에도 귀족의 직영지를 임대해서 경작하는 부유한 농민, 즉 차지농이 있었다. 귀족은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해서 독립 자영농의 토지를 탈취하고 그 땅을 차지농에게 임대해서 돈을 벌었다. 땅을 뺏긴 독립 자영농은 부랑자가 되거나 젠트리 밑으로 들어가 농업 노동자가 되었다. 이 과정은 인클로저 운동이 일어나면서 가속화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서유럽의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왕들이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유럽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에스파냐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을 지원하고, 영국 해적을 이용하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였다. 이 승부의 결과 에스파냐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흔히 말하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영광을 구가한 것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때이지만, 지금도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왕은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라고 한다. 이 시기 영국은 셰익스피어(1564~1616)를 배출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유럽 절대왕정의 상징이다. 엘리자베스1세 시대보다 약 100년 뒤에 프랑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프랑스는 ‘국왕 중심의 강력한 중앙 집권화, 상공업 보호와 군대 육성’을 특징으로 하는 절대주의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무리한 전쟁을 계속하면서 재정이 악화되고, 루이14세의 대표적 실정으로 꼽히는 낭트칙령 폐지로 인해 위그노 부르주아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프랑스 경제는 급격히 기울었다.  

 

 

 

 

3. 서유럽을 따르는 중 ․ 동부 유럽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동유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옛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이란 이미지만 어렴풋이 있지 역사뿐 아니라 현재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한마디로 서유럽에 비하면 변방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다지 선생님의 강의에는 동유럽에 러시아를 포함해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속해 있다. 동유럽은 서유럽에 비해 대체로 늦은 시기에 절대왕정을 확립하기 시작했으며, 그 주체도 다르다. 서유럽의 경우, 대서양 무역으로 부상한 부르주아와 절대왕권을 추구하던 국왕이 손을 잡고 귀족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며 절대왕정 체제를 수립했다면,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내륙에 자리 잡고 있던 동유럽은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지 못했다. 동유럽 국가들은 계몽군주가 귀족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으며, 관료제와 상비군 체제 등을 확립해야 했기 때문에 서유럽과 달리 귀족의 특권이 지속되었고 농노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시민계층이 성장하지 못함으로 인해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도 그만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4.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16세기 이후 유럽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16세기 라틴아메리카의 은과 17~18세기 삼각무역은 유럽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서유럽이 이루어낸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은 대서양 무역이 가져다 준 경제적 성과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식민지의 희생 없이는 서유럽의 근대화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 p270>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로의 2차 항해 때 사탕수수 등의 열대작물을 가지고 갔다. 처가가 아프리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도제도가 사탕수수 재배에 매우 좋은 기후와 토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남미 최초의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토시를 비롯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에스파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인 것은 영국이다. 바베이도스를 비롯한 카리브해 지역에 영국은 수많은 사탕수수 농장을 건설하였다. 유럽은 설탕의 단맛에 푹 빠졌고 설탕의 수요는 급격히 늘어났다.

 

설탕 생산의 최대 문제점은 노동력이었다. 사탕수수 재배부터 설탕 제조 공정까지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침략한지 100년 만에 아메리카 원주민의 인구는 10% 이하로 급감했다. 90% 이상이 학살당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유럽인들은 놀랍게도(?) 혹은 당연한 발상이었을까? ...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냥해서 노예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종을 뒤바꿔 버린 것이다. 설탕이라는 상품이 새로운 상품인 노예를 만들어냈다.

 

유럽의 강국들은 너도나도 노예 무역에 뛰어들었다. 설탕과 노예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가 하나의 무역권을 형성하였다. 이른바 삼각무역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각무역은 쌍방향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 상품이 이동한다. 총 등의 공산품을 싣고 유럽에서 출발한 상선은 아프리카에 도착해 총을 주고 노예를 사들였다. 노예를 싣고 아메리카로 향한 상선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노예를 팔고 설탕과 은을 싣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유럽의 별 쓸모없는 공산품은 삼각무역을 통해 설탕과 은으로 교환되어 유럽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18세기까지 유럽의 은이 최종적으로 흘러들어간 곳은 아시아였다.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향신료나 차를 사들이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로부터 착취한 은을 지불하였다. 아시아의 상품들이 유럽에서 인기를 끌면 끌수록 상인들은 돈을 벌어도 유럽 경제는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다. 명․ 청 시기 중국에 은이 흘러넘친 것은 유럽과의 교역을 통해 들어온 은 때문이었다.

 

1840년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런 배경 아래였다. 청과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팔고 그 수익으로 차 등을 수입했던 것이다. 청이 아편 거래를 금지하고 강력 대응하자 영국은 대포로 응수했다. 1,2차 아편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돌아가고 이때부터 청은 서양열강의 ‘밥’으로 전락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삼각무역으로 유럽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은이 대량으로 유입하면서 물가가 치솟았고 상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대서양 무역에 많은 투자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주식제도가 만들어지고, 항해의 위험성에 대비해 보험이 탄생했다.

 

영국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리버풀은 대규모 노예 무역항으로 성장했고, 인근의 맨체스터 등이 공업 도시로서 호황을 누렸다. 리버풀은 인근 도시에서 생산한 총, 모직물 등을 삼각 무역에 연결하였고, 여기서 얻은 이익을 다시 이 도시의 공장에 투자하였다.

 

이런 과정 끝에 드디어 맨체스터의 방직기계가 면직물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다. 영국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눈부신 산업혁명의 종자돈은 바로 아프리카 흑인들의 피땀과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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