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계몽주의

 

 

18세기 프랑스는 유럽의 사회적· 정신적 발전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프랑스어가 전 유럽의 궁정과 교양인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이런 발전의 배경에는 영국이 있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상과 이념이 루이14세 사후(1715)에 프랑스로 밀려들어와, 전체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영국에서 시작된 계몽주의도 프랑스를 통해 전 유럽의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 매개자는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이다.

 

  

 

몽테스키외(1689~1755)는 삼권분립으로 유명하다. 삼권분립은 그의 대표작, <법의 정신>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원칙이다. 삼권분립의 목적은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호하는 데 있다.

 

권력분립에 대한 이론적 구상은 몽테스키외의 창안이 아니라 로크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로크는 국가 행정권과 입법권을 엄격히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명예혁명의 승리자(휘그당)다운 주장이다. 군주는 법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회가 결의한 법의 구속을 받아야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자유와 재산이 국가권력의 임의적 간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여기에 사법권을 추가했다. 사법권의 핵심은 독립성이다. 입법권은 계급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국회에서 여당과 야당이 매일 싸우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도 많지만, ‘싸움’은 입법권의 본질이다. 근대국가는 계층(급)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국가에서는 국민 ‘화합’이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지지하고 반대 정당을 헐뜯는 게 당연합니다. 이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대국가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p441 <인문고전강의>”

 

하지만 사법권은 속성상 특정 계급이나 직업이 독차지해서는 안 되며, 계급이익의 충돌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어야 한다. 재판관이 입법자나 집행관이 되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가 위태로워지며 재판관은 압제자가 될 것이다.

 

 

볼테르(1694~1778)는 소설 <캉디드>의 저자이며, 계몽주의의 걸작 <백과전서>의 편찬자 중 한사람이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주축이 된 백과전서파는 학문과 이성을 무기로 구시대로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해방하려 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종교와 철학의 시대는 과학의 세기에 자리를 내주었다!"

 

<백과전서>는 루소 및 볼테르의 저작과 더불어 프랑스혁명의 싹틀 틔운 가장 중요한 온상이었다.

 

볼테르는 역사철학의 창시자기도 하다.

 

“나의 목적은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지, 하찮은 사실을 무수히 열거하거나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 나는 인간이 어떤 단계를 거쳐 야만에서 문명 상태로 진보해 왔는가를 알고자 한다. p561 <세계 철학사>”

 

 

프랑스 혁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루소(1712~1778)는 ‘자연 상태’를 참된 낙원이라 생각했다. 루소는 성찰을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기형적 존재로 보았다. 예술과 학문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였다.

 

루소는,

“누군가 어느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땅’ 이라고 주장해 볼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말을 믿을 만큼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 때 말뚝을 뽑아 버리고, 토지 둘레의 도랑을 다시 메우고는, 이웃들에게 '저 사기꾼의 말을 믿지 마시오! 과실은 모두의 것이고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는다면 당신은 파멸할 것이오!' 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인류는 무수한 범죄와 전쟁, 살인, 비참함과 잔혹함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p573 <세계철학사>” 고 썼다.

 

소유, 정부, 권력은 자연을 떠남으로서 인간이 받게 된 재앙이다. 루소는 <사회 계약론>을 통해 탈출구를 제시하려 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런데 국가가 발생하면서 권력이 창출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적 자유와 지배적 권력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유로운 인간들이 자발적인 권력을 만드는 것이다.

 

"적법한 지배의 기초는 오직 합의, 즉 자발적 동의뿐이다. 이러한 합의가 바로 사회계약이다. 여기서 개개 구성원은 자신의 인격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것을 내놓고 공동재산으로 간주하여 최상위의 지시체인 일반의지에 종속시킨다. 이렇게 해서 공적 인격이자 정신적 총합체인 국민이 발생한다. 국민은 주권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p575 <세계철학사>

 

개개인의 동의로서 구성된 권력은 개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권력의 의지가 곧 나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의지’이다. 그런데 일반의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투표이다.

 

투표의 결과는 곧 일반의지이므로 개개인은 투표에 의해 합의된 모든 법에 동의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채택된 법에도 복종해야 한다. 모든 국가 구성원의 의지가 곧 일반의지이기 때문이다. 내 의견이 아니라 반대의견이 채택되었다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투표는 내가 일반의지로 여겼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 뿐이다.

 

루소에게 사회계약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의지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루소의 요구는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려는 사회계약의 목적과 모순된 것이 아닐까? 루소의 영향아래 폭발한 프랑스혁명의 전개 과정은 사실 이런 모순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자유와 평등은 공포정치를 불러일으켰다. 일반의지는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이 강조했던 인민의 의지처럼 외설적으로 전도되었다. 일반의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절대권위를 지녔다. 일반의지는 개개인 모두의 자유의지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복종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부정이 되었고, 불복종자는 반동으로 낙인찍혔다.

 

"혁명을 불러 낸 것은 다름아닌 그의 정신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내적 모순 역시 이미 루소의 사상에 예비되어 있었다. 절대적 개인주의에 대한 루소의 요구는 -루소의 확신과는 달리- 《사회계약론》 제2부에서 제기되는 요구, 즉 일반의지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이라는 요구와 끝내 해소되지 않는 모순 관계에 있다. 루소는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국가 종교에 대한 일체의 위반 행위가 죽음이나 추방으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러한 복종을 강조했다."  p579 <세계철학사>

 

어쨌거나 프랑스 역사상 중요한 것은 자연적으로 부여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인권선언의 제1조는 루소의 천부인권사상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선언 제 1조 :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0>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을 동경한 루소가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자라는 사실이 사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한다. 그런데 루소가 말하는 자연은 상당히 인공적인 성격의 자연 즉 이성과 거의 동일시되는 자연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루소의 자연상태가 원시 자연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이런 특성은 그를, 18세기 정신에 반발하여 나타난 19세기 모든 정신운동의 선구자로 만들었다. 질풍노도와 낭만주의, 다양한 종교적 개혁은 모두 루소를 원조로 하고 있다.

 

루소는 독일의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마지막 수호신인 동시에 지극히 신랄한 비판자였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단적으로 말하면 근대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특히 프랑스혁명)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이중의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계급은 ‘19세기의 주인공’ 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은 10년, 25년, 100년 단위로 살펴볼 수 있다. 흔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1789년 5월 삼부회 소집부터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의 군사 쿠데타까지이다.

 

프랑스혁명을 25년으로 볼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는 1815년까지이다.

 

혁명을 100년의 긴 호흡으로 말할 때는 1789년 삼부회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고 제3 공화정이 들어선 1870년대 까지를 가리킨다.

  

 

 

프랑스혁명은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혁명과 반동,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며 공화정 - 제정 - 왕정 - 공화정 - 제정 - 공화정의 긴 역사를 걸어왔다.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은커녕 고통과 혼란만 보았을 수도 있고, 반동과 퇴보에 좌절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스혁명의 역사는 전진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혁명의 발단은 언제나 세금이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을 보면 유럽은 항상적 전쟁상태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는 ‘1453년부터 현재까지 패권투쟁의 역사’ 이다. 루이14세가 잦은 전쟁과 사치로 재정의 곤란을 겪었다지만, 18세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는 7년 전쟁(1756~1763) 패배 이후에도 미국의 독립전쟁(약 1775~1781 )을 지원하며 막대한 재정을 소모했다. 국가재정은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루이 16세는 1787년에 귀족과 성직자를 대상으로 명사회를 소집했다. 농민이 세금을 내는 능력에 한계가 왔음을 알리고 특권신분에도 과세하는 안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1789년 5월에 삼부회가 소집됐다. 1계급은 성직자, 2계급은 귀족, 3계급은 평민으로 구성되었다.

 

제3계급에 속하는 평민은 주로 부르주아들이었다. 관료, 은행가, 금융업자, 법률가, 기업가 등 신분으로는 평민이지만 사회적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몽주의자들도 제3계급에 속했다. 제3계급은 반귀족적이거나 급진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지배계급으로 편입하고 싶어 했다. 제3계급은 세금을 내는 조건에 동의하는 대가로 평등한 투표권을 요구했다.(머릿수별 투표)  세금을 내는 대신 정치적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제1계급과 제2계급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 평등은 특권의 폐지이고 그것은 신분제가 폐지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삼부회의가 소집되는 과정에서 제3계급이 주도권을 잡았다. 제3계급은 특권계급과의 연대가 무산되자 제4계급과 결합했다. 교과서에서는 흔히 세 계급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네 개의 계급이 있었다. 유산자인 제3계급에 비해 평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제4계급은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무산자였다. 당시 상퀼로트라고 불리던 제4계급은 독자적 조직력과 군중 동원력을 갖추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투표권 문제로 1,2계급과 대립하던 3계급은 별도의 의회를 구성하고 국민의회라고 칭했다. 국왕이 국민의회의 회의장을 폐쇄하자 이들은 테니스코트에서 새로운 헌법이 만들어질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테니스코트 서약이다. 이에 당황한 국왕파는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회를 해산하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파리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 공격은 제4계급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혁명의 지도자들은 모두 제3계급이었다. 삼부회의 이후 만들어진 국민의회도 제3계급이 이끌었다.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국민의회는 재산에 따라 투표권을 주는 제한 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재산이 있는 사람만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제3계급은 가난한 민중들은(제4계급) 무식해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이16세는 국민의회가 공포한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파리의 여자들이 대대적으로 베르사이유로 행진하여 국왕 일가를 파리의 튈르리궁으로 이송한 이후에 인권선언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국왕 일가는 끊임없이 혁명에 반하여 오스트리아 등과 접촉을 시도했다. 마침내 1791년 6월에 파리를 탈출하여 오스트리아로 향했지만 국경 근처에서 잡혔다. 바렌느 사건이라고 불리는 국왕 탈출 사건은 남아있던 국왕에 대한 우호적 민심마저 이반시키고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한편 1791년 9월에 입헌군주정과 제한 선거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에 의해 구성된 입법의회에는 국왕을 지지하는 입헌군주파와 공화파인 지롱드와 산악파(협의의 자코뱅)가 서로 대립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연합하여 입법의회를 압박하였고 입법의회는 혁명전쟁을 선포했다. 1792년 4월 혁명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을 지키려는 부르주아와 민중은 의용군을 만들어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반혁명 동맹군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 의용군이 전쟁에서 거듭 패배하며 민심이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16세 일가가 오스트리아에 프랑스 정보를 빼돌린다는 의심이 확산되자 1792년 8월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루이16세의 모든 가족들을 탕플탑에 유폐하였다. 

 

1792년 9월 발미전투를 계기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대한 반격에 성공했다. 혁명전쟁의 진행과 더불어 전투에 기여도가 높은 제 4계급(상퀼로트)의 정치적 권한이 강해졌다. 제4계급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 이끄는 산악파를 지지하였다. 1792년 9월,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산악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국민공회를 구성하였다.  1793년 1월 루이16세가, 뒤이어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가 처형되었다.  

 

제1 공화정은 자코뱅(광의의 자코뱅)의 한 분파인 산악파(협의의 자코뱅)와 제4계급이 결합하여 탄생했다. 국민공회의 핵심인물은 로베스피에르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마라, 당통과 함께 제3계급 출신의 산악파였다. 세계 역사에서 혁명의 주체는 민중이어도 지도자는 부르주아지나 지식인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체계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철학과 지식에 접근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중과의 굳건한 연대만이 혁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의 각종 세력 중 로베스피에르 파가 가장 민중과 가까이 있으며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부르주아지들은 평등은 외면하고 사적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체제를 수립하려 하였다. 민중이 요구한 것은 부르주아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자유였다.

 

국민공회는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제를 도입하였다. 인민주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제1 공화정은 공포정치의 시대기도 했다. 하루에도 수 백 명이 기요틴 아래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공포정치를 로베스피에르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공포정치의 가장 큰 원인은 주변의 왕정 국가들이 연대를 강화하며 프랑스를 고립시킨 것이다. 유럽 열강이 반혁명 연대를 맺자 프랑스는 내부적으로 결속할 수밖에 없었고 반혁명 혐의자를 강력하게 처벌해야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무장한 예언자로 등장하면서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의 시대로 들어섰습니다. 이는 단순히 과격한 시도가 아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를 옹립했던 혁명적 군중은 국내에서는 제3계급이 중심이 된 온건파와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국외에서는 유럽의 왕정국가와 적대관계를 형성함에 따라 고립되었고, 그 결과 불안과 의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상대를 절멸시키겠다는 의지와 혁명이 원하는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이 유토피아를 지키기 위해 아주 강력한 내부 결집을 시도했습니다. p366~7 <역사고전강의>”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몽상가’가 아니라 ‘혁명적 집단 심성의 체현자’였다. 르페브르는 “그의 권력은 파리 대중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파리 대중의 공포정치”였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민중들이 그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체포되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력으로 7월이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떨던 반대파들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공안위원회의 반 로베스피에르 파가 주도했지만 이미 민중들의 마음도 로베스피에르를 떠나있었다. 파리시민이 그를 버렸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 올랐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의 주도권은 다시 부르주아지에게 넘어갔다.

 

 

 

 

나폴레옹과 빈체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등장한 총재정부는 무능했고 혁명은 혼란에 빠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기 쉬운 것이 군부세력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전쟁 초기부터 발군의 전투 실력을 뽐내며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지친 민중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나폴레옹은 재빨리 이 기회를 낚아챘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수호자일까? 반혁명 독재자일까? 지리멸렬했지만 1799년 당시 프랑스는 공화정 체제에 있었다.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공화정 체제를 존속한 채 제1 통령에 올랐으나, 사실상의 일인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마침내 1804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프랑스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진 변화였지만, 박정희의 유신헌법이 그러했듯이 형식적 행위에 불과했다. 프랑스 제정은 혁명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자 퇴행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1789년부터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1799년까지로 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이 혁명의 수호자, 혁명의 전파자로 인식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눈부신 업적을 남겼습니다. 현대 ‘민법전’의 효시인 ‘나폴레옹 법전(1804)’은 인민주권을 확고하게 법률화했습니다. 코르시카 섬 출신의 나폴레옹은 이념과 연줄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만큼 강력하게 혁명의 과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직업 관료제, 상비군, 경찰제도 등이 정착되었고, 그 결과 중앙집권적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했습니다. 이 체제는 급진파의 인민주권론, 초보적인 의미의 사회주의, 국가주의가 서로 어우러진 것이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의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이라는 국민의식,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주권 의식, 국민들 각자가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체라는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근대정신의 주요한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p365 <역사고전강의>”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6>

 

나폴레옹은 체제를 역행시키기는 했지만, 혁명의 가치를 그대로 계승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선언했다.

 

“혁명은 모든 특권의 폐지, 즉 영주의 재판권 폐지, 낡은 농노제의 폐지, 봉건적 의무의 폐지를 뜻하며, 동시에 국가가 전 시민, 전 재산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폴레옹 법전에 따르면 법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극소수의 부르주아들뿐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나폴레옹은 혁명군의 이름으로 유럽 전역에 원정을 나섰다. 유럽의 부르주아와 민중들도 처음에 나폴레옹의 군대를 환영하였다. 나폴레옹은 “나는 나의 법전을 받아들이는 모든 곳에 자유의 씨를 뿌리려 한다.”며 정복지에서 신분제와 농노제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브랜든 심스의 <Europe>에는 혁명의 수호자가 아니라 혁명의 파괴자로서의 나폴레옹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나폴레옹은 계속되는 전쟁을 통해 국내 정책과 위성국가들의 정책을 다듬어 나갔다. 1790년대 혁명파들은 구체제 시절 잃었던 프랑스의 대외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효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지만,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귀족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는 물론 모든 동맹국에 봉건제도를 다시 도입하려고 했다. ( .....) 1808년 3월, 나폴레옹은 관직에 따라 직책이 정해지고 대를 이어 인계할 수 있는 귀족제도를 전면 도입했다. 귀족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후대에 국가에 큰 공헌을 하지 못하는 가문은 귀족에서 제외시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새 귀족들에게 분배해줄 영지로는 이탈리아와 저지대 지역, 그리고 독일 영토를 활용키로 했다. p274<Europe>”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군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서유럽 대부분을 프랑스의 손아래 넣었다. 그는 유럽 전역을 하나의 체제로 통합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갈수록 혁명군이 아니라 정복군, 학살자의 행태를 보였다. 점령지 주민들은 나폴레옹군에 격렬히 저항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5>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 패배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한 나폴레옹은 1806년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령을 내렸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원정에 나섰다가 패하였다. 나폴레옹의 불패 신화가 깨어지자마자 유럽 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해 일어났고, 나폴레옹은 1813년 라이프찌히 전투에서 동맹군에게 패배한 후 1814년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하여 다시 유럽을 긴장시켰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원정이 유럽 전역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이다. 나폴레옹은 정복지의 농노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퍼뜨렸다. 민족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나폴레옹에 대항해 형성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약탈자로 돌변하자 정복지의 주민들은 프랑스에 대항해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 초기 프랑스혁명군이 만들어졌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프랑스혁명군은 유럽의 반혁명연대에 맞서 혁명을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다. 프랑스혁명 전만 해도 유럽은 별다른 민족의식이 없었다. 혁명 초기의 프랑스나 나폴레옹 원정 이후의 유럽 각국이나 모두, 민족주의는 외세에 대항해 스스로를 지키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단결을 촉발한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47>

 

1814년 나폴레옹이 추방되자 승전국들이 빈으로 모였다. 2년에 걸친 빈회의에서 유럽의 왕정국가들은 유럽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기로 합의했다. 빈회의 이후로 성립된 유럽의 새로운 국제질서라고 해서 이것을 빈체제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다. 4국 동맹 혹은 신성동맹이 주축이 된 빈체제는 보수반동 체제로서 프랑스혁명이 불러일으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려 하였다. 프랑스는 빈체제에 의해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복위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 역사의 흐름도 거꾸로 돌리기는 어렵다. 빈체제는 곧바로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자유민족주의자들은 빈체제를 비난하며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스와 라틴아메리카는 독립에 성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의 3장과 4장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 내가 읽은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들

 

1. 두도시 이야기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58531

2. 고리오 영감 http://blog.aladin.co.kr/753199155/7181872

3. 공산당 선언 http://blog.aladin.co.kr/753199155/7287110

4.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http://blog.aladin.co.kr/753199155/644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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