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Ⅱ
나폴레옹의 몰락 후 메테르니히가 이끄는 빈체제는 유럽을 프랑스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려 하였다. 하지만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의 의식과 열망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빈체제에 대한 저항은 거세게 번져갔다.
빈체제는 프랑스에 부르봉 왕가를 복권시켰다. 루이18세의 즉위에 이어 샤를10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프랑스의 정치체제는 1789년 혁명 이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다시 왕정으로 바뀌었다.
루이18세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샤를10세는 왕권신수설에 기반 한 절대왕정을 부활시키려 했다. 망명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혁명기간 상실한 귀족의 재산을 보상하는 등 노골적인 반동정책을 폈다. 분노한 시민들은 1830년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반 국왕 파를 당선시켰다. 샤를 10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시민의 참정권 대부분을 빼앗고 언론․출판을 탄압하였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28일 파리는 다시 혁명의 불길로 타올랐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학생,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샤를10세를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혁명의 열매를 가져간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부르주아들은 공화주의가 너무 과격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다. 7월 혁명으로 2000여명이 죽었으나 프랑스는 또 한명의 왕을 추대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선에서 혁명을 마무리 지었다.
루이 필리프는 처음 ‘시민의 왕’으로 불렸지만, 그의 ‘7월 왕정’은 대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점점 더 보수화되었다. 급진 공화주의자들은 7월 왕정의 입헌군주제, 제한선거(유산계급), 자유방임 경제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7월 왕정은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하고 공화주의 협회를 불법화하며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금지시켰다.
1846년 선거법을 보면 투표권이 성년 남자의 3%에게만 주어져있다. 3%에 속하는 사람들은 은행가, 대상인, 교수, 법률가와 자유주의적 귀족들이었다. 투표권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수상 기조는 투표권을 얻고 싶으면 부자가 되라고 했다. 참으로 부르주아적 자유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투표권은 누구나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기만 한다면.
소수 부르주아 중심의 지배세력과 노동자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자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30년 직후부터 공화주의자들은 7월 혁명을 탈취 당했다고 생각했고, 1832년 6월에 군주제를 폐지하기 위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었다.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가 숭고하게 묘사하고 있는 바리케이드 전투가 바로 1832년의 6월 봉기이다. 소설 속의 6월 봉기는 민중의 외면 속에 실패로 끝났다. 실제로도 6월 봉기는 실패였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의 패배는 페르시아 군대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전멸한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라이 전투에 비유되기도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48년 2월 혁명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총 결집하였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증가해온 노동자들, 도시 빈민들, 이들과 연대한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부르주아지들도 혁명에 참가하였다. 나폴레옹 시대를 그리워하는 낭만주의자들, 유럽에서의 프랑스 패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국수적 민족주의자들까지 합세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5>
프랑스 2월 혁명이 성공하자 전 유럽이 혁명의 불길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봉기와 투쟁이 일어났고, 빈 회의를 주도했던 메테르니히가 쫓겨났다. 1814년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유럽을 구체제로 되돌리려했던 빈체제가 2월 혁명으로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혁명세력들은 공화정 수립에 합의했지만 주도권을 놓고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가 격렬히 대립하였다.
1848년 4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온건파가 대거 당선되었다. 권력은 또 다시 부르주아지에게로 돌아갔다. 6월, 불만에 찬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정부가 잔인한 진압에 나섬으로써, 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약 3천 명이 살해되었다. 6월 폭동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해체되고 사회주의 신문 발행이 금지되었다.
1848년 2월 혁명은 1789년에 시작한 프랑스 혁명의 최종 승리자가 제3계급 부르주아임을 명백히 확인시켜 주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함께 손을 잡았던 제3계급과 제4계급은 혁명의 긴 여정 속에 연대와 대립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혁명의 총구를 서로에게 겨누고 수 천 명의 희생자를 낸 2월 혁명은 제3계급과 제4계급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를 만들었다.
부르주아 중심의 제헌의회는 보통선거를 도입했다. 보통선거로 대거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은 농민이었다. 당시까지 정치적, 경제적으로 소외되어있던 농민들은 184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선택하였다. 루이가 선택된 이유는 딱 하나, 그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루이가 삼촌 나폴레옹 1세처럼 프랑스에 영광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전통은 프랑스 농민들에게 나폴레옹이라 불리는 한 남자가 그들에게 모든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어떤 자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나폴레옹으로 칭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p141”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세기를 다룬 세 권의 시대 시리즈를 썼다. 1789년 대혁명의 시작부터 1848년 2월 혁명까지는 <혁명의 시대>, 2월 혁명 이후부터 1875년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까지가 <자본의 시대> 이다. 홉스봄의 분류는 2월 혁명의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시대는 곧 부르주아의 시대이다. 2월 혁명으로 유럽 각지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들도 금세 사그러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는 유래 없는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홉스봄이 자본의 시대로 분류한 이 시기는 대호황 Great Boom 이었다. 부르주아는 정치, 경제적으로 완벽히 승리했던 것이다.
자본의 시대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한 시기이다. 그는 프랑스 제2 공화정의 대통령(1848~1852)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 제 2 제정의 황제(1852~1870)가 되려고 했고 성공했다. 제 2공화정의 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 단임으로 규정하고 있어 루이 보나파르트는 중임할 수 없었다. 합법적 개헌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루이 보나파르트가 선택한 것은 쿠데타였다.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고 프랑스 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었다. 나폴레옹 1세를 계승하여 나폴레옹 3세에 즉위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역사는 또 한 번 거꾸로 돌았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
루이 보나파르트의 군사 쿠데타는 파리의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친위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 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농지를 개혁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농민들의 향수 때문이었다. 사실 보나파르트 왕조가 대변하는 것은 혁명적 농민이 아니라 보수적 농민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농민은 나폴레옹의 유령을 열렬히 지지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정치이념은 애매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등이 혼합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모호성이 다양한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였다. 나폴레옹 3세라는 텅 빈 이름 속에 각 계층은 자신들의 이상을 투영하였다. 여기서 보나파르트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보나파르트주의란,
“넓은 정의에서는,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을 옹호하고 포퓰리즘적 레토릭으로 철권 통치자 또는 군사 독재자를 지지하는 것을 말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 혁명과 반동, 공화정과 황제가 기괴하게 뒤섞인 키메라라고 할 수 있다.”
제정 초기 나폴레옹 3세의 정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 포퓰리즘을 통해 지지를 확보하고, 크림전쟁에 승리하여 유럽 내 프랑스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제정 후기로 갈수록 인기가 떨어졌다. 경제 불황과 외교 정책의 실패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독일은 1871년 통일되었다. 10세기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은 이후 이 지역은 신성로마제국으로 분류되었다.(신성로마제국의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다.) 그러나 제국은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를 거쳐 일곱명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황금봉투 시대 등 통일된 제국으로서의 성격을 거의 갖지 못했다. 특히 1618년에 시작된 30년 전쟁으로 영토가 유린된 이후에는 거의 껍데기만 남아 200여 개의 영방 국가가 난립한 상태였다. 그나마 나폴레옹이 원정 당시 공식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선언해 버렸다.
이런상태에서 유럽 다른 나라의 절대왕정과 시민혁명을 보면서 독일 지역에도 강력한 통일국가에 대한 염원이 커져갔다. 독일 지역의 절대 강자는 오랜 전통의 오스트리아와 새롭게 부상한 프로이센 이었다.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7주간의 전쟁을 벌인 끝에 프로이센이 승리하였다. 이제 독일 통일에 가장 걸림돌로 남은 것은 프랑스였다.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를 자극해 전쟁을 유발했다. 1870년에 시작해 1871년에 끝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의 포로로 잡혔다. 프로이센은 파리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파리에서는 나폴레옹 3세를 폐위시키고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프로이센과의 전쟁 도중에 프랑스의 정체가 다시 한 번 뒤바뀐 것이다. 1870년 제2 제정이 폐지되고 제3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파리가 프로이센에 포위당하자 임시 정부는 파리를 방어하는데 주력하였지만 극심한 굶주림 끝에 민중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에 항복하였다. 프랑스는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로이센에 넘겼다.
1871년 1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마침내 독일이라는 하나의 통일 국가가 세계사에 등장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이 탄생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일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감정은 처음부터 극에 달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6>
굴욕적인 강화조약과 빌헬름 1세의 베르사유 궁 즉위에 분노한 파리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스스로 총칼을 들고 프로이센에 맞섰다. 이들은 최초의 노동자 권력인 코뮌 정부(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동맹)를 구성하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두 달간 자치정부를 수립했던 파리코뮌은 프랑스 임시정부와 국제 연합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다.
“파리코뮌은 처음에는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성격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자 부르주아의 대응도 달라졌습니다.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불과 두 달간 유지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완전한 의미에서 자치 정부가 수립되었고 10시간 노동, 야간 노동 철폐, 정교 분리, 여성 참정권 보장 등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요구를 내놓았습니다. 몽마르트 언덕을 최후의 거점으로 삼은 코뮌 군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군, 독일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벨기에 군, 영국군이 나섰습니다. 프랑스 정부군만으로 진압하기 어려워 국제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장악한 모든 나라가 참전함으로써 ‘국제적 연대를 통한 폭력적 응징’이라는 상징적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p408 <역사 고전 강의>”
파리코뮌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후 유럽의 부르주아들은 소위 민주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폭력진압의 한계를 깨달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에게도 참정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계급 갈등을 완화해 보려 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가난한 자들이 지배하는 정치라는 뜻으로 통용되었다. 부르주아가 선호하는 체제는 보통선거 없는 정치 시스템으로서의 자유주의였다. 그런데 더 이상 노동자들을 배제하기 힘들어지자 부르주아들은 헤게모니를 유지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미국의 상원 제도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노동자 농민이 계급적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사상적 회유도 시작하였는데, 그 방법이 소위 포퓰리즘이다.
프랑스 혁명의 100년은 제 3계급과 제 4계급이 함께 구체제를 무너뜨린 후, 그 성과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대립한 끝에, 결국 제 3계급이 승리하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그러나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 제 3계급만큼이나 제 4계급도 성장하였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고 노동자들도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등장
부르주아는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이라는 이중의 혁명을 통해 마침내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다. 앙시앵 레짐은 무너지고 자유주의에 기반 한 근대 민족국가가 수립되었다. 프랑스 시민혁명의 이상은 자유와 평등이었지만, 부르주아지가 원한 자유는 사적 소유의 자유였고, 그들이 원한 평등은 구체제의 특권계급과 부르주아 사이에서의 평등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운 민중들, 재산이 없는 제4계급은 자유와 평등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자신의 몸을 팔아 노동을 할 자유와 굶어죽을 자유 사이에서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권선언이 명시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진다.”는 이념은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일 수는 없었다. 제 4계급은 끊임없이 자신들에게도 자유와 평등의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1792년의 국민공회, 1832년의 6월 봉기, 1848의 6월 반란, 1871년의 파리코뮌 등은 제 4계급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자신들의 정부를 세우려 했던 실패한(혹은 잠시 성공한) 봉기들이다. 이때마다 부르주아지는 민중들을 철저히 탄압했고 마침내 그들이 원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국가를 확고히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 즉 자본이 발전하는 것만큼 프롤레타리아트, 현대 노동계급도 발전한다.” 공장제 기계공업은 다수의 노동자를 필요로 했고, 인클로저와 기계제 농업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어와 저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부랑자가 되었다. 자본의 발전은 노동자를 양산했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64>
도시는 몰려드는 노동자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도시는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삶의 공간이었다.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의 화려한 불빛이, 한편에서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이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공간이기도 했다. 청년 엥겔스(1820~1895)는 산업혁명의 도시 맨체스터를 관찰하여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썼다. 맨체스터의 노동자는 19세기 서구 노동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맨체스터의 공간 배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간 배치와 계급 구조는 서로 대응합니다. 노동자 계급은 화려한 상점 뒤편에, 중간계급은 도심과 교외 중간에, 상층 계급은 교외 지역에 삽니다. 간선도로는 상층계급이 사는 교외를 도심과 곧바로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의 사업 지역이 왼편과 오른편에 숨어 있는 냉혹한 비참함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된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항상 나의 계급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나의 계급적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사는 것이 근대인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대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계급적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외부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사는 곳’입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337 ”
10여 년 전에 유행했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는 광고가 생각난다. 역겨운 광고였지만 현대사회가 여전히 근대사회의 자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엥겔스가 맨체스터에서 보았던 것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사회의 살인’ 행위이다. 굶주림, 불결한 위생, 질병 등으로 노동자들은 실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고 일찍 죽었다.
“리버풀에서 1840년에 상층계급, 젠트리, 전문인들의 평균수명은 35세였으며 사업가나 좋은 직장을 가진 수공업자의 경우는 32세, 기능공, 막노동자, 서비스 노동자의 경우는 15세였습니다. 노동자계급의 사망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주로 노동자계급 자녀들의 높은 사망률 때문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349 ”
도시 노동자 자녀들의 사망률은 농촌 지역의 사망률보다 높았다. 5세가 되기 이전에 죽는 비율은 농촌이 32%인데 맨체스터가 54%였다. 산업의 발달로 농촌에서 부랑자로 떠돌던 이들이 도시로 와서 도시빈민이 되고 노동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들었다.
엥겔스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총 봉기하여 부르주아지가 타도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까닭은 부르주아지가 충분히 강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 계몽주의,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등 최소한 300년 이상의 발전과정을 거치며 부르주아지는 19세기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자본주의시대를 대표하는 심성구조는 경쟁이다. 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부르주아지 역시 경쟁과 불안에 시달린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불안도 늘어난다.
“부르주아계급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주인인 체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19세기 말에 나타난 세기말적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끊임없는 혁명은 불안을 낳아 놓습니다. <역사고전강의> p396 ”
“화폐를 매개로 한 노동시장이 형성되면서 노동자의 삶은 한마디로 불안정해졌습니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에서 경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했습니다. 언제 해고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정성이 노동자들의 심성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역사고전강의> p404 ”
매년 바뀌는 스마트폰, 가전제품들, 인턴제, 비정규직, 기간제 ... 등등,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았던 시대와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경쟁과 그로 인한 불안과 우울은 근대로부터 계속되어온 현대인의 만성 질환이다. 'Modern Times'는 하나의 시대임이 틀림없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57>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와 비참한 노동 현실은 평등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열망을 낳았다. 억눌린 노동자들의 불만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을 탄생시켰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해 역사적 필연에 의해 부르주아지는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에 일어난 혁명을 계기로 나온 선언문입니다. 1848년 2월 28일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곧이어 3월 2일에는 남서부 독일, 3월 16일에는 바이에른, 3월 11일에는 베를린, 3월 12일에는 빈, 3월 18일에는 밀라노에서 연쇄적으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공산당 선언>은 이러한 혁명의 영향을 받은 20대 후반의 열혈 청년들이 쓴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국을 제외한 유럽 전역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혁명은 금세 수그러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1848년부터 1875년까지는 유래 없는 호황기였기 때문입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대호황 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로 경제는 불황과 호황을 반복하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최저점을 찍습니다. <역사고전강의> p309 ”
<공산당 선언> 자체는 1848년에 그다지 한 역할이 없다. 혁명이 금세 잦아들었고 경제적 호황이 계속되었으며, 1848년 6월 파리 봉기가 실패한 이후 공산주의자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부터였다. 이때부터 공산당 선언의 정식들은 노동운동의 창출을 뒷받침했고 수 많은 정치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그런데 <공산당 선언>의 예언이 빗나가고, 지구상에 실질적인 사회주의가 거의 종식된 오늘날에도 <공산당 선언>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 왜냐하면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짧은, 그러나 아직 누구도 능가하지 못한 묘사 때문에라도 고전으로 남을 것” 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 그런 것처럼 <공산당 선언> 역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 때문에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로 남아있다.
“마르크스는 근대 경제의 무제한적인 힘과 지구적인 확장력을 처음으로 환기했다. 그는 세계시장의 등장과 근대산업의 비할 데 없는 생산력의 해방이 채 한 세기도 못 되는 시간에 낳은 놀라운 변화를 처음으로 그렸다. 또한 하나의 현상으로서 근대 자본주의가 지닌,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고 부단히 들떠 있는 미완의 성격을 묘사했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가 새로운 욕구와 그 충족 수단을 발명한다는 것, 물려받은 모든 문화적 관습과 믿음을 전복한다는 것, 신성한 것이건 세속적인 것이건 모든 경계를 무시한다는 것,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계이건 남성과 여성의 위계이건 부모와 자식의 위계이건 신성시 되는 모든 위계를 흔든다는 것, 모든 것을 판매 대상으로 전환한다는 것 등을 강조했다. <공산당 선언> 서설 p12”
자본주의가 모든 위계를 흔들고 새롭게 확립한 위계는 단 하나이다. 資本. 돈이 중심이 되는 세계이다.
“부르주아지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고 경건한 외경심으로 올려보던 모든 직업에서 그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들을 자신이 지불하는 임금노동자로 바꾸었다. <공산당 선언> p231”
“일련의 예스럽고 유서 깊은 편견과 의견으로 무장한 경직되고 얼어붙은 관계들은 모두 쓸려나가고, 모든 새로운 형태의 관계들은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고 만다.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모든 신성한 것은 더럽혀지며,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생활 조건에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냉정히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산당 선언> p232”
모든 견고한 것은 대기 속으로 녹아버리고.... 우리 역시 의미도 모르면서 2G, 3G, 4G 등등 자고나면 바뀌는 세상을 쫓아 살아야 한다.
지난 것만 잘 맞춘다는 유명 점쟁이들처럼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실상을 적확하게 표현해 준 것에 지나지 않을까?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른 레닌-스탈린주의는 70여 년 정도의 실험 끝에 실패했다. 그러나 답이 틀렸다고 문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분명 200년 전에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남겨진 과제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해법을 찾는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노동자계급의 지위도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과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찾는 과정에서 꾸준히 향상되어 왔다. 영국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이후 1차로 선거법을 개정하고 도시 상공인 층에게도 선거권을 주었다. 그래보았자 전체 인구의 4.5%에 지나지 않았지만. 1837년에는 영국의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요구하며 차티스트운동을 벌였다.
<EBS중학 필독 중학 세계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탄원서에 서명하였지만 영국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탄압하였다. 차티스트운동은 실패했지만, 계속적인 노동자 투쟁을 이끌어내었다. 2차 선거법 개정은 1867년에 이루어졌다. 선거권이 대다수의 도시 노동자와 소시민 계층에까지 확대되어 유권자는 전체 인구의 9%가 되었다. 영국의 선거법이 21세 이상의 남녀 누구에게나 투표권을 준 것은 1928년에나 와서 이다. 선거권의 확대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자 ‘위험한 계급’인 노동자들을 국가 체제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노동자 자녀들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제공하고, 무료 진료소를 설치하고, 노동조합 활동도 점차 합법화하였다. 이런 변화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져온 성과인 동시에 계급 갈등을 완화하려는 국가 정책이기도 하였다. 이런 양보가 가능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막대한 이윤이 들어오기 때문이었으며 그 이윤은 식민지 민중들의 피와 땀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검색을 해보면 이런 질문이 많다. 나도 궁금한데 읽어봐도 별 명쾌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개레스 스테드먼 존스 교수가 펭귄 클래식 판의 <공산당 선언> 서설에서 공산주의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정리해 놓았는데, 그 글을 기준으로 대략 살펴보려 한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국민공회는 급진적 공화주의를 추구했다. 공화주의의 최우선 가치는 평등이다. 부르주아들이 사적 소유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은데 비해 공화주의는 평등주의적 자유를 추구했다. 평등과 자유! 한 쌍의 부부처럼 찰싹 붙여 사용하지만 평등과 자유는 근본적으로 양립하기 힘든 개념이다. 자유를 추구하다보면 평등을 침해하기 마련이고, 평등을 주장하다보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프랑스 혁명이념이라 배웠지만, 부르주아지는 자유를 프롤레타리아트는 평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며 치열하게 투쟁했던 것이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급진 자코뱅이 몰락하고, 왕정복고와 제정, 입헌군주정을 겪으며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평등은 밀려나고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중요시되었다. 그런데 1830년 7월 혁명 때 급진공화주의자들이 다시 등장했다. 평등주의 공화국의 지지자들, 특히 인권협회 구성원들은 루이 필리프의 7월 왕정을 혁명에의 배신으로 간주했다. 학생들과 불만을 품은 장인들로 이루어진, 주로 파리에 기반 한 이 급진 공화주의 협회들은 계속적으로 반란을 시도했고, 정부는 점점 더 억압적으로 대응했다. 결국 1835년 공화주의 협회가 불법화되었고 이후부터는 공화국에 대한 옹호도 금지되었다.
정부의 탄압을 피해 공화주의 반정부세력의 일부는 지하로 내려갔고, 다른 일부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1830년대 말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금지된 개념에 대한 평화적이고 비정치적인 대체물로서 ‘공산주의’를 제시했다. 지금은 완전히 거꾸로 사용되지만, 당시만 해도 공화주의는 위험한 이미지를 가진데 비해 공산주의는 온건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1840년대 초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합류하기 시작했다. 1830년대 말 전에는 이 두 입장 사이에는 공동 기반이 크지 않았다.
“공산주의는 정치적이었다. 공산주의는 혁명적 공화주의 전통의 부활을 뜻했고, 평등이라는 대의를 특권의 파괴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총공격으로 확대하는 것을 뜻했다. 반대로 사회주의 -생시몽과 푸리에가 영감을 준 일련의 교조들 - 는 혁명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정치 형태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평등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국가보다는 교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보다 장기적으로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회과학에 의해 가능해진 조화의 출현을 지향했고, 그 중간 과정에서 사회생활 및 경제에서의 경쟁과 ‘이기주의’에 의해 발생되는 ‘적대’의 용매로서 '결사‘나 ’협동‘을 지향했다. <공산당 선언> p38”
단적으로 공산주의는 정치적 평등을, 사회주의는 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회주의를 공화주의 혹은 공산주의와 통합시키려는 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이 여기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가 ‘평등의 열망’과 결부되는 공화주의적 뿌리와 분리되어 ‘사회문제’의 일부로 다시 자리매김 되면서 발생기에 있는 정치 외적 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되었다. 따라서 1841년 5월 보수주의 <프러시아 국가신문>은 공산주의를 ”현대사회의 산업적 궁핍“과 연결시켰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행하고 광기에 찬 계급의 비통한 외침“으로 정의했다. <공산당 선언> p39”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공산주의는 공화주의와 분리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관되었다는 것인데, 당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말하자면 슬럼가의 빈민, 부랑자, 하층계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은 궁핍, 빈곤, 범죄와 연결되었다.
“슈타인의 설명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한데 묶여, 둘 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조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형성에 대한 응답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주의는 노동문제에 대한 과학적 응답이 되었고, 이는 사회주의와 국가의 분열을 종식시킬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본능적이고 파괴적인 짝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속에 체현되어 있으니,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지와 재산의 결여에 내몰려 실현 불가능한 항구적 재분배를 추구하고 부정의 순환 속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었다. <공산당 선언> p39”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 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 밀정이 이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1840년대에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유재산에 적대를 가진 극히 위험한 계급으로 인식되었다, 마치 유령처럼. 공산주의는 이런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의미였다.
그런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제시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의 산물이며, 그들에게 고용을 제공하는 공장들과 그들이 모이는 도시들에 의해 단련되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바이틀링이 불러냈던 것과 같은 대도시의 궁핍하고 뿌리 없는 빈민과 더 이상 함께 묶이지 않았다. 이 도시 빈민은 전적으로 별개의 부정적인 도덕적 범주에 처해져, 범죄적이며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고 정의되는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분류되었다. <공산당 선언> p44”
<공산당 선언>으로 새롭게 탄생한 프롤레타리아들은 부르주아지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될 운명이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이 잃을 것이라고는 그들의 쇠사슬밖에 없다. 그들이 얻을 것은 세계 전체이다. 만국의 노동자들이며,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p2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