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세계사를 공부할 때는 무엇보다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사실 한무제가 장건을 대월지에 보냈다는 둥, 도편추방제를 클레이스 테네스가 했다는 둥 하는 것들은 지엽적인 것이다.  

4대 문명에서 시작한 인간의 역사가 지역별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서로 어떤 관련을 갖고 있는지,

그것들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 왔는지를

큰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역사 공부의 첫 걸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세계 각 지역의 생소한 이름들과

이것이 저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은 왕조들의 난립을

한참 공부하고 나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버린다.

 

오늘은 머리에 든 것을 정리하며 새로운 연표를 만들어 보았다.

그려놓고 나니 단순해 보이는데, 꽤나 끙끙거리며

책과 자료들을 앞뒤로 뒤적이며 완성했다.

약간 뿌듯하기도 하다. ^^;;

 

 

 

 

크게 중국과 유럽 그리고 서아시아와 인도로 나누어 그려보았다.

연도를 모두 외우는 것은 매우 힘들뿐 아니라 어쩌면 멍청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나라의 장안에서 이백이 양귀비를 칭송하는 시를 짓고 있을 때 바그다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유럽은 어떤 시대를 맞고 있었는지 정도는 머리에 넣어두어야  세계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위 아래로 각 지역을 맞춰 볼 수 있게 가능하면 연대를 맞추어 그리려고 했다.

 

각 지역마다 역사의 발전 모습은 다르다.

 

중국은 비록 한족과 유목민족이 번갈아 가며 왕조를 세우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대체로 왕조의 교체에 연속성이 있고 한 시대에 한 왕조가  중국을 다스렸다. (송나라 때 요에 이어 금과 공존한 경우도 있지만) 우리와 비슷하기 때문에 아주 익숙한 형태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을 기점으로 다른 지역의 왕조나 사건을 기억하면 매우 편리하다.

 

인도에서는 드넓은 대륙을 통치하는 강력한 통일 왕조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100~200년 정도 한 왕조가 장악하고 나면 분열기가 와서 여러 왕조가 난립하다가, 또 다시 강력한 왕조가 100여년 정도 지배하고, 또  분열기가 오고, 하는 식이다. 거의 16세기가 될 때까지 이런 패턴이 지속되다가 1526년 무굴 제국이 통치하면서 근대까지 이어진다. 근대는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했듯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통치를 겪는 과정이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하였다. 

 

서아시아는 아주 역동적이다. 7세기까지는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계가  연이어 제국을 세웠고, 7세기 중반부터는 이슬람세력이 서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처음에는 아랍인들이 세운 이슬람 왕조가 이어졌으나,  11세기부터는 현재 터키의 조상인 튀르크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슬람 왕조를 이어나갔다. 대제국을 경영하고 유럽을 위협했던 오스만제국(오스만 튀르크)도 근대에 이르러 유럽에 의해 쇠퇴하다가 1차 세계 대전 이후 여러 민족들이 독립해 나가고 현재의 터키로 재탄생하였다.

 

유럽은 그리스-헬레니즘-로마를 거치면서 동서로 쪼개졌다. 서로마제국은 현재의 서유럽으로 발전하고 동로마제국은 현재 동유럽과 그리스 지역 등에서 중세 천년을 지속하였다. 서유럽은 이후 여러 국가로 분화되어가며 현재 유럽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콜럼부스로 대표되는 신항로개척의 시대를 맞아 그때까지 아시아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낙후되었던 유럽이 드디어 세계 역사를 주도하게 되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이루고 제국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서유럽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하였으며 식민지 쟁탈전의 와중에 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양차 대전후 유럽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갔으나 서구 문명은 현대 사회의 사상적, 물질적 토대가 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첨부 : 예전에 그려 올린 적이 있는 동아시아 연표도 한번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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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과 냉전의 해체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냉전은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어쩌면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냉전을 공식화한 것은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은 두 가지 생활양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적극 개입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 중 좌•우 두 세력 모두 독일과 투쟁하다가, 독일이 물러가면서 좌•우가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여기에 영국과 미국,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그리스 내전은 전후 최초의 이념전쟁 혹은 냉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6.25전쟁과 비슷하게 그리스 내전은 국토의 파괴와 대량살상 뿐 아니라 민족 간의 이념 갈등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국의 개입으로 그리스와 터키는 공산화 되지 않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25>

 

 

소련은 연방수립 이후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였고, 주변 국가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이 동유럽 지역의 독일군을 몰아내면서 동유럽은 소련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당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였고, 소련은 원조를 빌미로 동유럽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두려워 한 미국은 서유럽의 경제를 부흥시켜 사회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트루먼 독트린 이후 곧바로 미국은 경제 원조 정책인 ‘마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사회주의 세력은 코메콘과 코민포름을 결성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 결과 동유럽과 서유럽은 ‘철의 장막’에 의해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로 나뉘게 되었다. 각 진영은 독자적인 군사기구도 마련하여 대립을 첨예화하였다. 자본주의 진영은 NATO, 즉 북대서양조약기구(녹색)를, 사회주의 진영은 WTO 즉 바르샤바조약기구(적색)를 결성하였다.

 

『역사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마셜 플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읽어보자.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한마디로 미합중국의 패권이 관철되고,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것은 마셜 플랜(유럽 부흥 계획)입니다. 미합중국은 돈을 써서 패권을 장악했고 그 출발점이 바로 마셜 플랜이었습니다. 미합중국은 1947년 7월부터 4년에 걸쳐 130억 달러를 유럽에 제공한 대가로 유럽 국가 간의 관세 철폐를 요구하고 -이것이 유럽 경제 통합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들어 전후 경제체제를 성립시켰습니다.

   마셜 플랜은 복지의 차원에서 실시한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은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유럽 정부에 노동운동 저지를 요구했습니다. 미합중국과 유럽을 하나로 묶어서 중심부 블록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있는 개별 국가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재구조화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기업과 노조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였습니다. 또한 유럽 국가들은 완전고용 시행과 사회보장 확대를 추진하는 이른바 유럽형 복지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발맞춰 노동운동은 사회혁명을 포기하고 노조의 지위를 법률상으로 인정받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계급은 일정한 배당금을 받는 대가로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협력했고, 자본가계급의 동반자의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코포라티즘 즉 담합주의라고 합니다. p464~5 」

 

마셜플랜을 대가로 미국이 수립한 경제체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한다. 1945~1973년 사이를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브레튼우즈 체제와 혼합경제 체제가 황금기를 이끈 주요 요소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차 대전을 치르며 쌓인 기술들과 재건 사업도 주요 요소 중 하나이다.

 

「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회동한 2차 대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 금융 시스템을 주도할 두 개의 중요한 기관을 설립했다. ‘브레튼우즈 기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두기관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더 잘 알려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다.

   IMF는 국제 수지 위기를 겪는 국가들에게 단기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 수지 위기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받는 돈보다 그들에게 지급할 돈 이 훨씬 많아 아무도 더 이상 그 나라에 돈을 빌려 주지 않을 때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보통 금융 공황이 닥치고 심각한 불황이 뒤를 잇는다. 이런 나라들에 비상 대출을 해 줌으로써, IMF는 위기에 봉착한 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프로젝트 대출’을 위해 만들어졌다. 댐 건설 등의 특정 프로젝트에 쓸 돈을 빌려 주고, 민간 부문 은행보다 더 긴 상환 기간 혹은 더 낮은 이자율을 제공하기 때문에 세계은행에 돈을 빌리는 나라들은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다.

   전후 경제 체제의 세 번째 버팀목은 1947년 서명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었다. 1947년에서 1967년 사이 GATT는 ‘라운드’라고도 부르는 협상을 여섯 차례 주도해 주로 부자 나라들의 관세를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 관세를 삭감하자 시장이 더 넓어지고, 그 결과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생산성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 (......)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의 원인에 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설명은 경제 정책과 제도를 개혁해 혼합 경제 체제를 탄생시키고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섞었다는 의미이다.

   대공황 이후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고,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결함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실시되었던 경제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을 목격한 후 정부 개입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또 많은 유럽 국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좌파 성향의 당들이 선거에 승리해 복지 국가와 노동권 보장을 더 강화했다. p86~8」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체제는 물론 경제체제, 군비체제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일삼았고 세계 곳곳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격전장이 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2차 대전의 패배로 연합국에 의해 분리점령 당한 독일, 특히 베를린은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에 이어, 동독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대한민국의 6.25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동서 진영의 열전, 냉전이 폭발해 열전으로 바뀐 전쟁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10>

 

  

1962년 쿠바 미사일위기는 세계를 핵전쟁에 휘말리게 할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련이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비밀리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고 있었고, 이를 감지한 미국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쿠바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기는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미국의 케네디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슬기롭게 해결되었다.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을 철수했고 케네디는 승리를 주장하는 어떤 발표도 하지 못하도록 하여 소련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또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한 철수 명령도 내렸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48>

 

 

미국과 소련의 평화로운 해결을 이끌어 낸 것은 ‘두려움’ 이었다. 수백만 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문명 자체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위하여』에는 흐루시초프가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왜 흐루시초프가 철수 결정을 했는지 알아 볼 수 있다.

 

「10월 27일 전신에서 당신은 우리가 적의 영토를 향한 최초의 핵공격에 착수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물론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세계적인 핵전쟁의 시작일 것이다. 친애하는 피델 카스트로 동지, 비록 나는 당신의 동기는 이해하지만 당신의 제안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을 살고 있다. 확실히 그 경우 미국은 엄청난 시련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진영 역시 막대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쿠바가 문제인 한,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기는 어렵다. 의심할 여지없이 쿠바 인민들은 용감하게 싸울 것이며 영웅적으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기 위해서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가능성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 속에서 좀 덜 상실하고 극복 속에서 좀 더 많이 얻어서 공산주의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p326 」

 

그러나 인류절멸이 아닌 한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절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던 것일까? 베트남은 통일의 목전에서 미국의 개입에 의해 길고 끔찍한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53>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를 물리치고 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끼어들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베트남과 친미 정권이 지배하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남베트남에서는 친미 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이 벌어졌고, 미국은 북베트남이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우리나라도 끌려들어갔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베트남에 파병을 하였다. 국제사회는 국군을 미국의 용병으로 인식하였다. 명분 없는 전쟁은 명분이 있는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1976년 베트남에는 통일된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냉전의 완화는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69년 7월 닉슨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 군사개입의 축소와 함께 전 세계적 데탕트를 의미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1969년에는 미•소 사이에 전략무기 제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1972년에는 소련과 적대적이던 중국이 고립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 1979년에 미•중 수교가 체결되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도 북한과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북 모두 데탕트 분위기에 밀려 평화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제로는 독재체제 강화에 이용했을 뿐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1>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세력의 붕괴는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1950년대 흐루시초프 시대부터 개혁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고르바초프는 ‘더 많은 사회주의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당 독재를 완화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만들었고 개혁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깊어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6>

 

 

1991년 소련 공산당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러시아 공화국 옐친은 민중을 이끌고 공산당의 쿠데타를 막아내었다. 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2>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전후로 동유럽의 국가들도 소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동독은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서독과의 통일에 조인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달인 1989년 12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냉전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몰타 선언을 발표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7>

 

 

냉전이 끝났다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냉전의 종식은 그 동안 억눌려 왔던 종족 간 종교 간 갈등을 폭발시켰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분쟁은 보스니아, 코소보 등에서 ‘인종 청소’의 비극을 일으켰다.

 

 

 

 

 

다극화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양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쟁 기간 중 독립을 약속하고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를 이용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독립을 외면하거나 도리어 탄압을 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고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소 양 체제로 나뉘어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줄 세우려 들었다.

 

여기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 인도와 중국이었다. 인도의 네루와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이념을 초월해 인류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1954년의 콜롬보 회의는 평화 5원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에는 아시아•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가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만나 평화 10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시아•아프리카는 서로 연대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아시아•아프리카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분출하였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이런 자각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질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36>

 

 

비동맹 운동에 관한 공부를 통해 새롭게 알았던 사실은 우리나라가 제3 세계 국가가 아니라 제1 세계 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제껏 무심하게 혹은 무식하게 나는 우리나라를 제3 세계 국가라고 표현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제1 세계라니!!! 그리고 제1 세계가 선진 자본주의를 뜻하는 말도 아니었다. 나는 제3 세계는 가난한 개발도상국인 줄로만 알았다. 제1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패거리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는 말하자면 미국의 꼬붕인 셈이다. -.-.;; 제2 세계는 소련과 그 패거리들이고. 사실 우리나라는 6.25 전쟁 이후 한-미-일 삼각 체제 안에 꼭 묶여있다.

 

 

냉전체제라고 해서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미국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소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것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면서도 미•소의 패권으로부터 자주적 자립을 추구한 국가들도 있다. 티토가 이끈 유고슬라비아의 독자노선이 그렇고, 프랑스의 드골 정부가 그랬다. 한편 중•소 분쟁으로 사회주의 강대국 간에 대립이 심각하기도 했다.

 

 

여하튼 냉전 체제 아래에서도 다극화와 지역화의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이것은 세계각지의 독립운동과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45>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고 해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지 못해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알제리와 아시아의 베트남에서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짓밟았지만 독립에의 강력한 열망 앞에서 끝내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와 알제리의 저항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1960년대 중반에는 아프리카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하였다.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반둥 회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비동맹과 중립 노선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시련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어졌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그어졌고, 이 국경선을 기초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했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도 여러 종족들이 섞여 있었다. 독립 이후에 이 종족 간 민족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학살과 인종청소 그리고 난민 문제 들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이 문제는 진행형이며, 이것이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난민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55>

 

 

미국의 앞마당 노릇을 하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823년 먼로 선언 이후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종주국을 자임했으며, 직접적 식민 지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라틴아메리카를 정치•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2차 세계대전 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사회주의가 확산되었고, 민주화와 개혁의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미국이 보수 세력과 군부를 노골적으로 지원하여 쿠데타를 통한 군사 독재 정권들이 수립되었다.

 

1959년 완료된 쿠바혁명은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며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혁명을 촉발하였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은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사회주의 정부였으나 미국의 지원을 업은 피노체트에 의해 붕괴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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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전체주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 국민과 모든 물자를 동원한 ‘국가의 등장’과 ‘국가에 의한 총력전’입니다. 부르주아 시대의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허구이고 개인은 실체이므로 각자 열심히 살면 사회는 알아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19세기 부르주아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p439 <역사고전강의>”

 

홉스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통치론에 바탕을 둔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경찰국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 즉 사적 소유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함께 국가의 역할이 급부상했다. 국가의 가치는 국민 개개인의 총합 보다 더 크며, 이제 국민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 그 전간기戰間는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시대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경제적 위기와 관련이 있다. 19세기말부터 불황과 호황을 거듭하던 자본주의 경제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을 겪고도 여전히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베르사유 체제는 미봉책에 불과 했으므로, 제2차 세계대전은 이미 예견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0월 24일 아침, 뉴욕 월스트리트 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 즉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던 미국은 각각 자국과 식민지를 묶어 블록을 형성했다.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에 자국 상품을 독점적으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공황의 원인은 단순했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던 것이다. 팔리지 않은 상품은 재고가 되었고, 재고가 넘치자 더 이상 생산이 필요 없게 된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고, 구매력을 상실한 실직자가 넘쳐 나자 생산은 더욱 더 위축되었다. 악순환이었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파산이었다. 이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이 상처와 함께 자유방임주의 원칙에 대한 거부감이 널리 퍼지고,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고개를 들었다. p83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실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렸지만 수정주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을 적극 도입하여 수정 자본주의를 시도하였다. 국가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를 보호하고 최저 임금제도를 도입하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쥐어짜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만 하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순환이고, 이 순환의 중요 고리는 소비자이다.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가 없다면 상품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소비자의 구매력은 곧 노동자의 임금에서 비롯된다. 적정한 수준의 임금이 상품의 구매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하는 지출은 곧 다른 사람의 소득” 이라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축만 하면 경제는 급격히 위축될 것이다. ‘찌그러진 냄비’는 버려야하고, 무조건 가격을 깎을 것이 아니라 적정한 수준의 가격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 나의 일자리와 임금을 보장할 수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문제는 개입하려 해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국가들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거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한 국가들에게 가장 손쉬운 선택은 전쟁이었다.

 

전쟁, 즉 침략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경제공황이 발생하기 전에 유럽에는 이미 파시즘이 등장했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의 삼국협상 측 일원이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이 없었다.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를 지출했지만 식민지를 얻지 못한 이탈리아의 경제는 악화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무솔리니는 이런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국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였다. 1922년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로마로 진군하였다. 검은 셔츠단을 앞세운 이 쿠데타로 무솔리니는 군부, 자본가, 그리고 우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나치당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집권한 것은 대공황 이후였다.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라는 뜻의 나치는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극단적인 반사회주의, 반노동자 정당이었다. 나치즘은 파시즘에 인종주의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193>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허덕이던 독일 경제를 붕괴시켰다. 실업자가 증가할수록 나치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성찰 없이 이 어려운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단숨에 해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중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포퓰리즘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문제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해결은 언제나 어렵고, 누군가에게 문제의 책임을 돌리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악화될수록 일베나 왕따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포퓰리즘의 전략은 적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나치즘에서 적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유대인이다. 나치는 독일인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이 유대인 때문이라고 선동했다. 고통의 원인이 대공황에 있고, 대공황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의 결과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엉뚱한 적을 향한 분노를 유도했다.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역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형식적인 차원에서 물신은 전이의 제스처를 함축한다. 그것은 표준적인 전이 공식의 역전으로 기능한다. 물신이 구현하는 것은 정확히 앎에 대한 부인, 내가 아는 것에 대한 주관적 인정의 거절이다. 거기에 물신과 증상의 차이가 있다. 증상은 억압된 지식, 주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에 대한 진실을 구현한다. p423~4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앎에 대한 거절’은 ‘사유의 부재’ 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쓴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너무도 평범한 한 사람의 관료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렌트가 파악한 이 ‘평범한 악’의 원인은 사유의 부재였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효율적으로 업무를 집행했을 뿐이다. 파시즘뿐 아니라 모든 포퓰리즘의 토양은 사유의 부재인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적 성격을 띤 것이 에스파냐 내전이었다. 1936년 에스파냐에서는 선거를 통해 반파시즘 연합인 인민 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에스파냐는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장이 되었다. 프랑코를 지원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인민전선정부를 위해 달려 온 것은 세계 각지의 50여개 나라에서 스스로 무기를 들고 달려온 총 4만여 명의 ‘국제 여단’ 이었다. 내전은 4년 간 지속되었고 프랑코의 파시즘 세력이 승리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에스파냐의 게르니카는 독일군 폭격기의 대규모 공습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참혹하게 죽은 마을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 에스파냐 내전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헤밍웨이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

 

 

1938년부터 독일은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펼쳐 나갔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주데텐란트)을 요구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요구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을 체결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이 소련을 봉쇄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렇게 세력을 확장하던 나치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곧바로 폴란드를 점령해 버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깊은 원인은 이른바 ‘독일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21세기인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입니다. 유럽 문제는 곧 독일의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가 신문에서 접하는 유럽의 여러 문제들에서는 항상 독일이 핵심적인 행위자입니다. 독일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인구는 6천5백만 명, 프랑스는 4천만 명이었습니다. 또한 석탄과 철 같은 경제적 자원이 풍부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여러 제약을 이겨내고 다시 강대국으로 올라 설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을 견제했던 유럽의 세력균형이 무너진 것도 ‘독일 문제’를 키우는데 한몫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독일 동부의 러시아 제국과 남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했으며, 서부의 프랑스는 국력이 완전히 쇠퇴했고 영국 역시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의 지위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간 원인’은 독일 문제와 관련한 ‘배상 문제’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점령했던 땅을 회수하고 독일 군대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요구한 배상 문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배상금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배상 금액은 독일의 반발을 우려해서 매년 하향 조정되었고 독일 경제에 미친 영향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당시 독일 여론과는 달리 1923년 물가 폭등, 1929년 대공황은 배상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인들에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열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단치히’ 문제입니다. 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의 옛 지명인 단치히 자유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립을 선포하고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독일인이 많이 사는 이 도시를 돌려받는다는 구실로 제2차 대전 발발일인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당시 독일과 폴란드가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 이 문제를 놓고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상황이어서 한쪽이 발을 내딛으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단치히 침공을 밀어 붙였고 허를 찔린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뒤인 9월 3일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p461~2 <역사 고전 강의>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나치 독일은 단숨에 프랑스까지 점령하였고 영국의 하늘은 폭격을 위하여 출격한 독일의 전투기로 뒤덮였다. 유럽은 이제 파시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1941년 여름,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하였다. 독일의 기습으로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서 손을 잡게 되었다. 소련은 결사적으로 나치에 맞서 모스크바를 방어하고 1942에서 1943년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유럽과 태평양 두 곳에서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은 일본이 촉발한 것이었다. 일본도 이탈리아와 독일과 마찬가지로 대공황의 위기를 침략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에 이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였다. 1941년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였다. 명실 공히 이제 전쟁은 세계대전이 된 것이다. 미국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승기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흔히 추축국이라고 불린다. 세 나라는 방공동맹을 맺고 파시즘 국가 간의 협력 관계를 과시하였다. 이 중 제일 먼저 항복한 것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대의회가 무솔리니를 불신임하였다. 이탈리아는 1943년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하고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나치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결국 1945년에 다시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연합군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파리를 해방시켰다. 1945년 4월에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였다. 히틀러는 자살하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1945년 8월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는 5,000만 명에 이르렀고 그 중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희생자의 2배가 넘었다. 세계 인구의 20%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연거푸 끔찍한 전쟁을 치른 인류는 평화를 열망하면서 국제연합을 탄생시켰다. 전범 처리를 위해 국제 군사 재판소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위협이 다가왔다. 파시즘에 대항해 손을 잡았던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노골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곧바로 냉전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일단 분명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영국이 이중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에게는 아랍의 국가를,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의 국가를 각각 약속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팔레스타인 땅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지만,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1947년 팔레인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정리한 글이 있어 링크를 걸어 둔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팔레스타인인 영토는 점점 줄어들어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들 땅에서 이스라엘의 포로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겨우 한 뼘 남은 땅마저 이스라엘의 것으로 강제 수용하기 위해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현대사는 왜 이렇게 형극의 길을 걷게 된 걸까?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정리해 놓은 글이 있어 내용은 링크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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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현대’를 1차 세계 대전부터 보는지 1,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보는지 잘 모르겠지만, 전례 없던 양차 대전이 세계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은 것은 확실하다. 규모의 면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이 더 컸지만, 충격과 영향의 면에서 1차 세계 대전이야말로 ‘Great War'로 불리는 대 사건이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식민지 쟁탈전이 불러온 필연적 파국이었다. 그 중심에는 신생 제국 독일이 있었다. 1871년 독일 제국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펼쳤다.

 

“세력균형 정책을 펼친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과 이른바 삼제동맹을 맺어 독일 서쪽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했습니다. 독일은 유럽 한가운데에 있어서 전쟁이 나면 전선이 동부와 서부로 나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부와 동부 어느 한 쪽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것입니다. 세력균형 정책 이전 시기를 포함하여 1815년에서 1870년까지는 전반적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느슨한 다극 체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을 갱신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재보장 조약을 맺지 않았고 이것은 독일이 러시아에 적대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독일이 ‘엉뚱한 신호’를 보낸 결과,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와 연합했고(삼국협상),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삼국동맹) 느슨한 다극 체제가 1890~1914년 사이에 양극 체제로 바뀌면서 전쟁의 긴장이 높아지게 된 것입니다. p437 <역사 고전 강의>”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독일과 영국은 각각 3B정책과 3C정책으로 식민지 확장을 위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과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두 차례나 부딪히며 일촉즉발의 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더 큰 문제는 발칸반도였다. 오스만제국이 쇠퇴하면서 발칸반도 곳곳에서 민족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반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을 모아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표방하며 세르비아를 지원하였다. 오스트리아는 1908년 오스만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를 합병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범게르만주의를 지향하는 오스트리아를 독일이 전적으로 지원하였다. 1912년과 1913년 두 차례에 걸쳐 발칸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양한 민족들의 오스만으로부터의 독립과 이를 둘러싼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대립 등 워낙 복잡한 양상이므로 자세히 알기는 어렵고, 이 전쟁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져 갔다는 것만 알아두자.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61>

 

 

세계 제1차 대전의 총성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울렸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 청년이 쏘아 죽였다. 발칸의 화약고가 '콰쾅' 터졌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나섰다. 곧 동맹관계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었다. 유럽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헷갈리지 말 것은, 이탈리아가 줄을 바꿔 섰다는 점이다. 1882년 삼국동맹에 가입했던 이탈리아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삼국협상에 가담했다. 일본도 삼국협상 측에 붙어 승전국으로서 열매를 따냈다. 우리로서는 가슴 아프지만... 여하튼 이탈리아가 빠져나간 자리를 운 나쁘게도 오스만이 메웠다. 오스만은 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하여 영토 대부분을 잃고 가까스로 터키 공화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세계 대전은 인류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끔찍한 전쟁이었다. 기관총, 대포, 전차 같은 현대식 무기는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과시했다. 참호전이라는 무제한 버티기 작전은 전선을 고정시키고 전쟁을 장기전으로 빠져들게 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끔찍한 전쟁에서 먼저 빠져 나간 것은 러시아였다. 1917년 러시아는 ‘빵과 평화’를 외치는 혁명에 휩싸이게 되었다. 대신 전쟁에 참여한 것은 미국이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자국민을 잃은 미국이 1917년 전격적으로 참전을 선언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전황은 급격히 기울었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이 먼저 항복하였다. 독일도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1918년 킬 군항에서 독일 해군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민중들이 가세하여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가고 독일은 새로이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독일 공화국은 1918년 11월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였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다. 이런 끔찍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1차 세계 대전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탐욕스러운 식민지 확장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선악의 구도로 발생한 전쟁이, 물론 그런 것이 있다면, 아니었다. 연합국의 승리가 사필귀정도 정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없었다.  

 

파리 강화 회의 이후 승전국들과 독일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는 승전국들의 회담이었고, 승전국들은 패전한 각 국가들과 개별적인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독일과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한마디로 보복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승전국은 식민지 문제를 외면하고 또다시 세계 분할에 열을 올렸다. 미국의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도 패전국 식민지를 처리하는 원칙으로나 이용되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들은 한껏 고무되었던 독립에의 꿈을 잃고, 제국주의의 맨얼굴에 다시 한 번 이를 갈아야 했다. 여기 저기 남발한, 전쟁을 도우면 독립을 시켜주겠다던 영국의 약속도 거짓이었다.

 

전쟁의 모든 책임은 독일이 져야 했고, 막대한 배상금도 독일이 물어야 했다. 독일인의 불만이 커져가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더 참혹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베르사유조약 후의 국제 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싸우지 말고 착하게(?) 살자 라는 취지로 평화조약과 군비축소를 결의하기도 했다. 국제적 분쟁을 평화적으로 조절하기 위한 국제연맹도 창설되었다. 그러나 실권이 없어 별 기능을 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72>

 

 

어쨌거나 전쟁이란 필연적으로 사회변혁을 가져온다. 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의 민주주의도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독일과 오스만,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패전국인 오스만과 오스트리아의 식민지들도 독립하여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제 공화정은 유럽에서 보편적인 정치 체제가 되었다.

 

여성의 참정권도 확대되었다. 총력전으로 전개된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사회적 발언권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시민혁명의 대명사 프랑스도 194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21세 이상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혁명은 참으로 끝나지 않는 길고도 긴 과정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전쟁이 끝나고도 독립되지 못한 나라들은 독립운동을 다시 이어나갔다. 인도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참전해서 열심히 싸웠으나 영국은 독립은커녕 탄압을 강화하였다. 인도국민회의를 이끌던 간디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통해 자치를 획득하려 하였고, 간디의 뒤를 이은 네루는 자치가 아니라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베트남 역시 프랑스로부터부터 독립하기 위해 다시 싸워야 했다. 호치민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결성하고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이슬람교가 우세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교 중심의 독립단체들이 네덜란드에 맞서 해방 투쟁을 벌여 나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중국에서는 베이징 대학생을 중심으로 5.4 운동이 일어났다. 삼국협상 측에 줄을 서서 승전국이 된 일본은 독일이 중국에 가졌던 이권을 포함한 21개조 요구 항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만주군벌이 일본과 야합하여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대대적인 반일-반군벌 운동이 일어났다. 5.4운동에 도시 노동자와 상인뿐 아니라 농민들까지 참여하자 베이징의 군벌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하지 못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2 P177>

 

 

노혁명가 쑨원은 5.4운동에 고무되어 인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국민당을 조직했다. 한편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북쪽에는 군벌들이, 난징 중심의 남쪽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군벌에 반대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1차 국공합작을 하고 함께 군벌을 몰아내기 위해 싸웠다.

 

북벌이 마무리될 즈음 국민당을 이끌고 있던 장제스는 공산당을 공격하였다. 국공 합작은 깨어지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고난의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숙명의 라이벌,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2차 국공합작을 하고 일본에 투쟁하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 즉시 국공내전에 돌입했지만.

 

 

 

 

 

 

러시아 혁명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식민지 확장을 위해 여기저기 끼어들었으나, 속은 곪아 들고 있었다. 시민혁명(혹은 시민) 없이 근대를 시작했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지식인 중심으로 전개된 자유주의 운동들은 실패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를 해방하였으나 나로드니키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후 차르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면서 전제정치를 강화했다. 나로드니키의 브나로드 운동 또한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실패했다. 러시아는 위로부터의 개혁도, 아래로부터의 개혁도 이루지 못하고 20세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917년 11월, 레닌이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까지 러시아는 몇 단계의 혁명 과정을 거쳤다. 그 시작은 1905년 ‘피의 일요일’ 이었다.

 

1905년 러시아는 러•일 전쟁 중이었다. 전쟁은 패색이 짙고 경제는 어려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차르에게 심각한 경제상황을 호소하려고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했으나 그들에게 날아든 것은 차르의 무자비한 총탄이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화로 1905년의 혁명이 일어났다. 뚜렷한 지도부도 일치된 목적도 없이 혁명은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일종의 의회) 등 개혁을 약속했지만 혁명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 차르는 절대 권력을 내두르며 혁명을 탄압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혁명 열기가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고 판단한 니콜라이 2세는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내의 문제를 외부와의 전쟁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패전이 거듭되자 노동자, 농민 그리고 병사들조차 전쟁에 반대하며 ‘빵과 평화, 토지와 자유’를 외치며 봉기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7년 3월(러시아 구력으로는 2월) 러시아 민중들이 왕궁으로 몰려들었고,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나며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자유주의 시민 즉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하는 (카렌스키) 임시정부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3월 혁명의 기층 세력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였다. 성격상 소비에트와 임시정부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민중들의 염원과는 달리 토지 문제에 미온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의 부르주아들은 제국주의 전쟁인 1차 세계 대전에 승리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까?

 

독일의 은밀한 지원 아래 러시아로 돌아온 레닌은 임시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레닌은 권력은 소비에트가 가져야하며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의 지도 아래 1917년 11월(러시아 구력으로는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최초의 노동자•농민의 정부인 소비에트 정부,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즉각 전쟁 중단을 선언하고 독일 등 삼국동맹 측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의 많은 땅을 삼국동맹 측에 내어주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내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때 내준 지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대부분 다시 소련에 병합된다.

 

혁명의 불꽃은 한순간에 붙을 수 있지만 그 불길을 지켜 끝내 혁명을 완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반혁명 세력이 결집하여 혁명정부는 곧바로 내전에 돌입해야만 했다. 적군과 백군이 여기에서 나온 용어인데, 적군은 혁명군을, 백군은 혁명에 반대하는 귀족과 지주와 자본가들로 구성된 반혁명군을 말한다. 사회주의 혁명이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유럽의 열강들도 백군을 지원하였다. 러시아 내전 혹은 적백내전의 주요 전투는 11월 혁명직후인 1917년 11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완전히 끝난 1922년 마침내 ‘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방(소련)’이 수립되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에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예 등 3개국이 가입하여 연방을 이루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레닌은 1919년 각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을 연결하는 코민테른을 건설하여 혁명의 세계화에도 나섰다.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세계 각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25년 우리나라에도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은 조선 공산당이 결성되었고, 사회주의 사상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베트남, 중국, 인도네시아 등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닌이 죽고 난 뒤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중공업 중심의 강력한 계획 경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반대파를 숙청하여 독재 체제 강화에도 힘썼다.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에서 러시아혁명의 발발 배경에 관해 조금 알아보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떻게 마르크스의 이론과 정반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인데, 여기에 레닌의 판단과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레닌이 1917년 ‘4월 테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을 때, 당 동지들의 대부분은 귀 기울이지 않았거나 혹은 그를 경멸했다. 그의 4월 테제를 정신병자의 착란증이라 비난한 사람도 있었고, 그의 아내는 레닌이 미친 것 같아 걱정이라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레닌은 어떻게 볼셰비키 혁명을 이루었을까?

 

1917년 2월 레닌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망명자로서 취리히에 처박혀 지냈다. 그는 러시아와 신뢰할 만한 접촉도 없이, 사건을 스위스 언론을 통해 주로 접할 뿐이었다. 그러나 10월에 그는 최초의 성공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2월에 레닌은 유일무이하고도 우발적인 상황의 결과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즉각 인식했고, 지금 이 순간을 놓친다면 혁명의 가능성은 아마도 수십 년 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즉 혁명을 되풀이해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할 때 레닌은 외톨박이였고, 당의 대다수 중앙위원회 위원들에게 조롱당했다.

    그러나 아무리 레닌이라는 개인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더라도, 10월 혁명 전체의 역사를 방향성 없는 대중과 대결하면서 점차 자신의 비전을 제시한 고독한 천재의 이야기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레닌의 주장이 당 관료들을 피해가는 대신 혁명적 미시정치학이라 불릴 만한 곳에서,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의 놀랄만한 확장과 러시아의 대도시마다 땅에서 솟아나듯 조직되어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면서 ‘합법’ 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지역위원회의 호응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10월 혁명의 숨겨진 역사이고, 소수 그룹의 냉혹한 혁명가들이 쿠데타를 이루어낸 신화의 이면이다. p28~9“

 

 

레닌의 주장들 받아들인 것은 당 중앙위원회 즉 당 관료들이 아니라 각 지역의 소비에트와 민중들이었다. 왜? 부르주아들이 주도권을 쥔 임시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명의 관건은 언제나 “morning after", 즉 그 다음날 아침이다. 광란의 열정에 도취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면 부스스한 얼굴과 메스꺼운 속, 더럽고 어지러운 난장판이 초췌하게 드러난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던 ‘순간으로서의 혁명’은 오히려 쉽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파괴 위에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작업은 더디고 힘들고 반동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역사에서 봉기는 수없이 일어나도 혁명은 그처럼 드문 까닭이 여기에 있다.

 

1917년의 2월 혁명도 마찬가지의 어려움에 봉착했다. 혁명의 열정은 민중들의 것이었지만 그 다음 날 아침 권력을 손에 넣은 것은 부르주아 임시 정부였다. 여기서 레닌은 혁명이 한 번 더 반복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쟁 중단과 토지분배라는 요구를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는 길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고, 마르크스도 러시아와 같은 봉건적 국가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설적이게도 레닌은 마르크스를 배반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혁명은 반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상황의 패러독스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차르 정권을 전복시킨 2월 혁명이 끝난 1917년 봄, 러시아는 전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고 예측할 수 없는 규모의 대중 동원, 조직의 자유, 그리고 출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유는 오히려 상황을 불투명하고 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어갔다. 만약 두 혁명 시기, 그리고 그 사이에 쓰인 레닌의 텍스트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실마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정당들과 정치적 주체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에 의한 ‘명시된’ 공식적인 정세를 현실적인 사회적 이해관계(즉각적인 평화, 토지분배, 그리고 물론 ‘소비에트에 모든 권력을’, 즉 기존의 국가기구들을 해체하고 이를 새로운 코뮌 같은 사회적 관리 형태로 대체하는 것)에서 떼어놓은 간극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간극은 열광 속에서의 자유의 상상적인 분출이자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때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연대의 마술과도 같은 ‘순간으로서의’ 혁명과, 이 열정적인 폭발이 사회 체계 내부에 흔적을 남길 경우에나 실행되는, 사회를 재구성하는 힘든 ‘작업으로서’의 혁명 사이에 존재한다.

   이 간극이야말로 -1789년과 1793년 사이 프랑스 혁명에서 간극이 반복되듯- 레닌의 유일무이한 개입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지점이다. 혁명적 유물론의 근본적 교훈은, 혁명이 자체의 기본적 본성 때문에 두 번에 걸쳐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p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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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30여 년 간의 강건성세를 이루던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 중국 근대를 알리는 신호탄은 영국 함대의 포성 소리였던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아편전쟁부터 신해혁명까지, 청나라는 세계열강의 침략 아래, 아래로부터는 물론 위로부터도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보수 세력의 반발과 열강의 내정 간섭으로 모두 실패하고, 1912년 멸망하였다. 1616년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지 꼭 300년을 눈앞에 두고서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과 청의 초기 무역은 일방적인 형태 즉 편무역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청은 영국으로부터 사들일 것이 없었던 반면, 영국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 그리고 특히 차에 열광하고 있었다. 영국이 아메리카의 식민지로부터 착취한 막대한 양의 은은 청으로 흘러들어갔다.

 

광저우는 명나라 때 개방한 항구인데 청 역시 광저우 한 곳만 개방한 채 공행이라는 허가 상인에게만 무역의 권한을 주었다. 영국 등 서양열강은 공행무역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영국이 새롭게 찾은 해법은 아편이었다. 17~8세기 대서양 무역을 위해 고안한 삼각무역의 아시아판이라고나 할까. 새로운 삼각무역의 희생자는 청나라의 민중들이었다. 무수한 청나라 사람들이 아편쟁이가 된 대가로 영국은 은을 유출하지 않고도 차와 비단을 가져올 수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40년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더러운 전쟁을 앞두고 의회에서 찬반 토론을 했다고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언제 한번이라도 참다운 명분이 있었단 말인가. 아메리카는, 인도는 침략당할 만해서 당했다는 말인가. 여하튼 영국이 손쉽게 승리하고 1842년 난징조약이 맺어졌다. 이때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1856년 2차 아편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청의 수도 베이징까지 불바다를 만들었다. 1858년 텐진조약, 이어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청은 중재국인 러시아에 연해주를 떼어주고, 베이징에는 외국 공사관이 주재하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의 근대 부분은 학교에서 매우 상세하게 가르치는 것 같다. EBS 강의에는 조약 하나하나의 내용까지 들어있다. 강의 화면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의 근대사도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자세히 가르치니 그렇다. 1차 아편전쟁과 2차 아편전쟁 사이에는 태평천국 운동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태평천국 운동은 1851년에 시작해서 1864년에 끝나니, 2차 아편전쟁은 태평천국 운동의 와중에 시작되어 끝났다. 그런 이유로 아편전쟁이 끝난 후 외국군대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 지방의 한족들이 서양무기의 위력을 실감했고, 이것이 양무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은 청의 지배에 가장 고통 받던 한족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였다. 1차 아편전쟁의 결과 청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배상금은 결국 농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크리스트교의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멸만흥한’의 구호를 내세운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에 한족 농민들이 열광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한 후 중국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 채 14년간이나 청과 힘을 겨루었다.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것은 청나라에서도 여전히 지배신분을 인정받고 있던 한족 신사 출신의 관료들이었다. 향용이라는 군대를 만들어 서양군대와 함께 태평천국을 진압했다. 이때 활약했던 리홍장 같은 인물이 급부상하여 양무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양무운동은 한국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화 모델이라고 배웠기에 매우 익숙하다. 양무운동의 중체서용과 조선의 동도서기는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근본은 그대로 둔 채 겉모습만 바꾼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리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때 익히 보았던 서양 무기의 위력에 매료되어 기기국을 세우고 각종 무기 생산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청•프 전쟁, 청•일 전쟁의 패배가 그 결과를 말해주었다.

 

특히 청•일 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개화를 진행한 청과 일본의 근대화 성적을 판가름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대결에서 외양뿐 아니라 정신까지 철저히 서양식 근대화를 추구한 일본이 승리하였다. 자그마한 일본에게 완패한 청을 보고 놀란 것은 서양 열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까지 잠자던 호랑이로 생각했던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함을 알고 나자 거침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청은 이제 제국주의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되어 갔다.

 

물론 양무운동이 실패한 데에는 보수주의자들의 방해와 양무운동 세력 내의 분열이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빼돌리기도 하고, 전쟁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양무운동의 실패로 청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캉유웨이 등이 황제를 설득하여 일본식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다.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 등을 기본으로 하는 ‘변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는 유폐되고, 변법자강 운동은 100일 만에 끝났다.

 

 

개혁의 실패와 거듭된 혼란 속에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은 더욱 심해지고, 민중들의 삶도 더욱 피폐해 졌다. 성난 민중들은 서양의 모든 것에 격렬한 증오를 드러냈다. 교회와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고, 서양인들을 죽였다. 의화단 사건이다. 민중들은 청을 도와서라도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청멸양의 기치 아래 민중들이 몰려들었으나, 8개국 연합군이 이들을 물리치고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의화단 사건의 결과로 맺게 된 신축조약에서는 서양인들의 피해를 구실로 베이징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제 청의 보수파들도 더 이상 개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광서신정은 서태후 등이 변법자강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청을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 없이 흉내만 내려 했던 광서신정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광서신정의 명목 아래 청 정부는 더욱 많은 세금을 수탈하려 하였다. 재정이 궁핍했던 청 정부는 민간 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담보로 외국에서 차관을 얻으려 하였다. 민간 철도는 중국 민중들이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려 건설한 것이었으므로, 차관을 대가로 철도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것은 주권을 넘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민간 철도 국유화는 청나라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없애버렸다. 민중들은 보로운동을 통해 정부에 대항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 혁명군은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난징에서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제 베이징의 청나라와 난징의 중화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중국이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질 위기였다. 청이 진압군으로 내려 보낸 위안스카이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설득하여 임시 대총통 자리를 대가로 연합하여 청나라를 멸망시켰다.

 

중국 분열의 위기는 막았지만 위안스카이는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 역사의 배신의 아이콘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6년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철회되었고, 그해 위안스카이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던 군벌 세력들이 할거하게 되면서 중국은 다시 한 번 혼란기에 들어섰다. 북쪽은 군벌 세력들이 남쪽은 반 군벌 세력이 차지하였다. 특히 반 군벌 세력은 민족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으로 대립하면서 중국의 현대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중국 현대사의 시작은 군벌을 몰아내기 위한 1차 국공합작,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2차 국공 합작, 그리고 마지막 국공 내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최종 승리자는 공산당이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현대사는 다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

 

 

 

 

 

 

 

일본 제국주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일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정리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근대 부분만 다시 정리해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일본의 근대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으로 시작된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이라는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일본의 문을 열었다. 뒤이어 1858년 본격 조약인 미•일 통상 장정을 맺는데, 조약을 결정한 것은 에도막부였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이후 약 700 년간 천황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정치는 쇼군이 담당했고 천황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이후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자 에도막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천황의 존재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지방의 몇몇 번을 중심으로 막부타도 운동이 일어나면서 존왕양이의 기치가 올랐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위력을 맛본 일본은 양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존왕양이 운동은 존왕 운동으로 변형되었다. 에도막부는 이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는 대정봉환을 행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다. 폐번치현을 필두로 근대화 과정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민중의 커져 가는 자유 민권 운동도 받아 안아 1889년 메이지헌법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메이지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천명했지만, 일본의 입헌군주제는 서양의 그것과는 다르게 천황의 무한한 권력을 보장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이 주창한 문명개화가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일본은 서양을 따라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려 하였다.

 

 

1894년 그 기회가 왔다.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과 일본이 맞붙게 된 것이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각각 군사력을 키워왔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그러나 아직 새끼 제국주의자에 불과한 일본은 열강의 견제로 다 삼킨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설욕전은 딱 10년 뒤인 1904년에 이루어졌다. 청나라 의화단을 진압하러 들어간 8개국 연합군 중 러시아가 철수하지 않고 만주에 군대를 잔류시켰다. 러시아를 경계하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였다. 1904년 영미의 대리전이라고도 하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조선은 이제 일본의 손아귀 안에 완전히 갇혔고 일본은 제국주의의 선두 대열에 합류하였다.

 

 

일본은 첫 희생양인 조선을 발판으로 제국주의적 본성을 펼쳐갔다. 1929년 대공황을 기화로 드넓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5년 종말을 맞았다. 원자폭탄 두 발이 떨어진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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