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과 냉전의 해체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냉전은 2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어쩌면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냉전을 공식화한 것은 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이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은 두 가지 생활양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적극 개입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그리스는 2차 세계대전 중 좌•우 두 세력 모두 독일과 투쟁하다가, 독일이 물러가면서 좌•우가 본격적으로 대립하였다. 여기에 영국과 미국,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그리스 내전은 전후 최초의 이념전쟁 혹은 냉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6.25전쟁과 비슷하게 그리스 내전은 국토의 파괴와 대량살상 뿐 아니라 민족 간의 이념 갈등이라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미국의 개입으로 그리스와 터키는 공산화 되지 않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25>
소련은 연방수립 이후 경제개발 계획을 통해 빠르게 성장하였고, 주변 국가들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이 동유럽 지역의 독일군을 몰아내면서 동유럽은 소련의 세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당 일당 독재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하였고, 소련은 원조를 빌미로 동유럽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두려워 한 미국은 서유럽의 경제를 부흥시켜 사회주의 세력이 확산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트루먼 독트린 이후 곧바로 미국은 경제 원조 정책인 ‘마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사회주의 세력은 코메콘과 코민포름을 결성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그 결과 동유럽과 서유럽은 ‘철의 장막’에 의해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로 나뉘게 되었다. 각 진영은 독자적인 군사기구도 마련하여 대립을 첨예화하였다. 자본주의 진영은 NATO, 즉 북대서양조약기구(녹색)를, 사회주의 진영은 WTO 즉 바르샤바조약기구(적색)를 결성하였다.
『역사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마셜 플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조금 읽어보자.
「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는 한마디로 미합중국의 패권이 관철되고,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구조가 전면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해야 할 것은 마셜 플랜(유럽 부흥 계획)입니다. 미합중국은 돈을 써서 패권을 장악했고 그 출발점이 바로 마셜 플랜이었습니다. 미합중국은 1947년 7월부터 4년에 걸쳐 130억 달러를 유럽에 제공한 대가로 유럽 국가 간의 관세 철폐를 요구하고 -이것이 유럽 경제 통합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들어 전후 경제체제를 성립시켰습니다.
마셜 플랜은 복지의 차원에서 실시한 것이 아닙니다. 미합중국은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유럽 정부에 노동운동 저지를 요구했습니다. 미합중국과 유럽을 하나로 묶어서 중심부 블록을 형성하고 그 안에 있는 개별 국가의 정치 경제 시스템을 재구조화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국가 공권력이 기업과 노조의 이해관계를 조정하였습니다. 또한 유럽 국가들은 완전고용 시행과 사회보장 확대를 추진하는 이른바 유럽형 복지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발맞춰 노동운동은 사회혁명을 포기하고 노조의 지위를 법률상으로 인정받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계급은 일정한 배당금을 받는 대가로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협력했고, 자본가계급의 동반자의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코포라티즘 즉 담합주의라고 합니다. p464~5 」
마셜플랜을 대가로 미국이 수립한 경제체제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한다. 1945~1973년 사이를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브레튼우즈 체제와 혼합경제 체제가 황금기를 이끈 주요 요소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차 대전을 치르며 쌓인 기술들과 재건 사업도 주요 요소 중 하나이다.
「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서 회동한 2차 대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 금융 시스템을 주도할 두 개의 중요한 기관을 설립했다. ‘브레튼우즈 기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두기관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더 잘 알려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다.
IMF는 국제 수지 위기를 겪는 국가들에게 단기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 수지 위기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받는 돈보다 그들에게 지급할 돈 이 훨씬 많아 아무도 더 이상 그 나라에 돈을 빌려 주지 않을 때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보통 금융 공황이 닥치고 심각한 불황이 뒤를 잇는다. 이런 나라들에 비상 대출을 해 줌으로써, IMF는 위기에 봉착한 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프로젝트 대출’을 위해 만들어졌다. 댐 건설 등의 특정 프로젝트에 쓸 돈을 빌려 주고, 민간 부문 은행보다 더 긴 상환 기간 혹은 더 낮은 이자율을 제공하기 때문에 세계은행에 돈을 빌리는 나라들은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다.
전후 경제 체제의 세 번째 버팀목은 1947년 서명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었다. 1947년에서 1967년 사이 GATT는 ‘라운드’라고도 부르는 협상을 여섯 차례 주도해 주로 부자 나라들의 관세를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 관세를 삭감하자 시장이 더 넓어지고, 그 결과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생산성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 (......)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의 원인에 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설명은 경제 정책과 제도를 개혁해 혼합 경제 체제를 탄생시키고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섞었다는 의미이다.
대공황 이후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고,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결함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실시되었던 경제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을 목격한 후 정부 개입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또 많은 유럽 국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좌파 성향의 당들이 선거에 승리해 복지 국가와 노동권 보장을 더 강화했다. p86~8」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정치체제는 물론 경제체제, 군비체제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일삼았고 세계 곳곳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격전장이 되어갔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2차 대전의 패배로 연합국에 의해 분리점령 당한 독일, 특히 베를린은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에 이어, 동독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까지 했다. 대한민국의 6.25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동서 진영의 열전, 냉전이 폭발해 열전으로 바뀐 전쟁이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10>
1962년 쿠바 미사일위기는 세계를 핵전쟁에 휘말리게 할 아찔한 순간이었다. 소련이 미국의 앞마당인 쿠바에 비밀리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고 있었고, 이를 감지한 미국이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쿠바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기는 소련의 흐루시초프와 미국의 케네디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슬기롭게 해결되었다.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을 철수했고 케네디는 승리를 주장하는 어떤 발표도 하지 못하도록 하여 소련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또한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한 철수 명령도 내렸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48>
미국과 소련의 평화로운 해결을 이끌어 낸 것은 ‘두려움’ 이었다. 수백만 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문명 자체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잃어버린 대의를 위하여』에는 흐루시초프가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는데, 왜 흐루시초프가 철수 결정을 했는지 알아 볼 수 있다.
「10월 27일 전신에서 당신은 우리가 적의 영토를 향한 최초의 핵공격에 착수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물론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세계적인 핵전쟁의 시작일 것이다. 친애하는 피델 카스트로 동지, 비록 나는 당신의 동기는 이해하지만 당신의 제안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핵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순간을 살고 있다. 확실히 그 경우 미국은 엄청난 시련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진영 역시 막대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쿠바가 문제인 한,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기는 어렵다. 의심할 여지없이 쿠바 인민들은 용감하게 싸울 것이며 영웅적으로 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기 위해서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가능성들을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 속에서 좀 덜 상실하고 극복 속에서 좀 더 많이 얻어서 공산주의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p326 」
그러나 인류절멸이 아닌 한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절멸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던 것일까? 베트남은 통일의 목전에서 미국의 개입에 의해 길고 끔찍한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53>
1954년 베트남은 프랑스를 물리치고 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끼어들어 공산당이 지배하는 북베트남과 친미 정권이 지배하는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남베트남에서는 친미 정권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이 벌어졌고, 미국은 북베트남이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북베트남에 폭격을 퍼부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우리나라도 끌려들어갔다. 미국의 요청에 의해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대가로 베트남에 파병을 하였다. 국제사회는 국군을 미국의 용병으로 인식하였다. 명분 없는 전쟁은 명분이 있는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1976년 베트남에는 통일된 ‘사회주의 베트남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냉전의 완화는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69년 7월 닉슨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미국은 세 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도 끝이 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 그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 군사개입의 축소와 함께 전 세계적 데탕트를 의미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1969년에는 미•소 사이에 전략무기 제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1972년에는 소련과 적대적이던 중국이 고립을 피하기 위해 미국과 화해, 1979년에 미•중 수교가 체결되었다. 1972년에는 우리나라도 북한과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남북 모두 데탕트 분위기에 밀려 평화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제로는 독재체제 강화에 이용했을 뿐 통일을 위한 노력에는 관심이 없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1>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 세력의 붕괴는 1985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1950년대 흐루시초프 시대부터 개혁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고르바초프는 ‘더 많은 사회주의를, 더 많은 민주주의를!’ 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당 독재를 완화하고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글라스노스트(개방)는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불신을 더 깊게 만들었고 개혁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깊어갔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6>
1991년 소련 공산당은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러시아 공화국 옐친은 민중을 이끌고 공산당의 쿠데타를 막아내었다. 공산당은 해산되었고 옐친 대통령의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여러 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탈퇴하고 따로 독립 국가 연합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1922년 탄생한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이 7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2>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전후로 동유럽의 국가들도 소련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동독은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서독과의 통일에 조인하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달인 1989년 12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고 냉전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몰타 선언을 발표하였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77>
냉전이 끝났다고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냉전의 종식은 그 동안 억눌려 왔던 종족 간 종교 간 갈등을 폭발시켰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분쟁은 보스니아, 코소보 등에서 ‘인종 청소’의 비극을 일으켰다.
다극화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양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쟁 기간 중 독립을 약속하고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를 이용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독립을 외면하거나 도리어 탄압을 가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고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소 양 체제로 나뉘어 아시아•아프리카 나라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줄 세우려 들었다.
여기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 인도와 중국이었다. 인도의 네루와 중국의 저우언라이는 이념을 초월해 인류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1954년의 콜롬보 회의는 평화 5원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55년에는 아시아•아프리카의 29개국 대표가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만나 평화 10원칙을 발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하여 아시아•아프리카는 서로 연대하기로 합의하였고,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아시아•아프리카에서는 독립의 열기가 분출하였다. 아시아•아프리카의 이런 자각은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질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36>
비동맹 운동에 관한 공부를 통해 새롭게 알았던 사실은 우리나라가 제3 세계 국가가 아니라 제1 세계 국가라는 사실이다. 이제껏 무심하게 혹은 무식하게 나는 우리나라를 제3 세계 국가라고 표현해 왔는데, 우리나라가 제1 세계라니!!! 그리고 제1 세계가 선진 자본주의를 뜻하는 말도 아니었다. 나는 제3 세계는 가난한 개발도상국인 줄로만 알았다. 제1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패거리를 의미하는데, 우리나라는 말하자면 미국의 꼬붕인 셈이다. -.-.;; 제2 세계는 소련과 그 패거리들이고. 사실 우리나라는 6.25 전쟁 이후 한-미-일 삼각 체제 안에 꼭 묶여있다.
냉전체제라고 해서 자본주의 국가는 모두 미국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소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것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이념을 지키면서도 미•소의 패권으로부터 자주적 자립을 추구한 국가들도 있다. 티토가 이끈 유고슬라비아의 독자노선이 그렇고, 프랑스의 드골 정부가 그랬다. 한편 중•소 분쟁으로 사회주의 강대국 간에 대립이 심각하기도 했다.
여하튼 냉전 체제 아래에서도 다극화와 지역화의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이것은 세계각지의 독립운동과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45>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고 해서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포기하지 못해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알제리와 아시아의 베트남에서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짓밟았지만 독립에의 강력한 열망 앞에서 끝내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집트와 알제리의 저항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1960년대 중반에는 아프리카 대부분이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하였다.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반둥 회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비동맹과 중립 노선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시련은 또 다른 측면에서 이어졌다. 아프리카의 국경선이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그어졌고, 이 국경선을 기초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했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도 여러 종족들이 섞여 있었다. 독립 이후에 이 종족 간 민족 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학살과 인종청소 그리고 난민 문제 들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아직도 이 문제는 진행형이며, 이것이 요즘 한창 이슈가 되는 난민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255>
미국의 앞마당 노릇을 하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823년 먼로 선언 이후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종주국을 자임했으며, 직접적 식민 지배를 하지는 않았지만 라틴아메리카를 정치•경제적으로 종속시켰다.
2차 세계대전 후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사회주의가 확산되었고, 민주화와 개혁의 기운이 높아졌다. 그러나 미국이 보수 세력과 군부를 노골적으로 지원하여 쿠데타를 통한 군사 독재 정권들이 수립되었다.
1959년 완료된 쿠바혁명은 친미 정권을 무너뜨리며 라틴아메리카 각지의 혁명을 촉발하였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은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선거를 통해 수립된 사회주의 정부였으나 미국의 지원을 업은 피노체트에 의해 붕괴되었다. 라틴아메리카는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는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