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30여 년 간의 강건성세를 이루던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함께 몰락하기 시작했다. 중국 근대를 알리는 신호탄은 영국 함대의 포성 소리였던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차 아편전쟁부터 신해혁명까지, 청나라는 세계열강의 침략 아래, 아래로부터는 물론 위로부터도 끊임없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보수 세력의 반발과 열강의 내정 간섭으로 모두 실패하고, 1912년 멸망하였다. 1616년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지 꼭 300년을 눈앞에 두고서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영국과 청의 초기 무역은 일방적인 형태 즉 편무역이었다. 물자가 풍부한 청은 영국으로부터 사들일 것이 없었던 반면, 영국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 그리고 특히 차에 열광하고 있었다. 영국이 아메리카의 식민지로부터 착취한 막대한 양의 은은 청으로 흘러들어갔다.

 

광저우는 명나라 때 개방한 항구인데 청 역시 광저우 한 곳만 개방한 채 공행이라는 허가 상인에게만 무역의 권한을 주었다. 영국 등 서양열강은 공행무역에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영국이 새롭게 찾은 해법은 아편이었다. 17~8세기 대서양 무역을 위해 고안한 삼각무역의 아시아판이라고나 할까. 새로운 삼각무역의 희생자는 청나라의 민중들이었다. 무수한 청나라 사람들이 아편쟁이가 된 대가로 영국은 은을 유출하지 않고도 차와 비단을 가져올 수 있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1840년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은 이 더러운 전쟁을 앞두고 의회에서 찬반 토론을 했다고 하지만, 웃기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주의적 침략에 언제 한번이라도 참다운 명분이 있었단 말인가. 아메리카는, 인도는 침략당할 만해서 당했다는 말인가. 여하튼 영국이 손쉽게 승리하고 1842년 난징조약이 맺어졌다. 이때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1856년 2차 아편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손을 잡고 청의 수도 베이징까지 불바다를 만들었다. 1858년 텐진조약, 이어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었다. 청은 중재국인 러시아에 연해주를 떼어주고, 베이징에는 외국 공사관이 주재하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중국의 근대 부분은 학교에서 매우 상세하게 가르치는 것 같다. EBS 강의에는 조약 하나하나의 내용까지 들어있다. 강의 화면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의 근대사도 흐름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자세히 가르치니 그렇다. 1차 아편전쟁과 2차 아편전쟁 사이에는 태평천국 운동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태평천국 운동은 1851년에 시작해서 1864년에 끝나니, 2차 아편전쟁은 태평천국 운동의 와중에 시작되어 끝났다. 그런 이유로 아편전쟁이 끝난 후 외국군대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 지방의 한족들이 서양무기의 위력을 실감했고, 이것이 양무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태평천국 운동은 청의 지배에 가장 고통 받던 한족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였다. 1차 아편전쟁의 결과 청이 지불해야 했던 막대한 배상금은 결국 농민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었다. 크리스트교의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멸만흥한’의 구호를 내세운 홍수전의 태평천국 운동에 한족 농민들이 열광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점령한 후 중국 영토의 절반을 차지한 채 14년간이나 청과 힘을 겨루었다.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한 것은 청나라에서도 여전히 지배신분을 인정받고 있던 한족 신사 출신의 관료들이었다. 향용이라는 군대를 만들어 서양군대와 함께 태평천국을 진압했다. 이때 활약했던 리홍장 같은 인물이 급부상하여 양무운동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양무운동은 한국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근대화 모델이라고 배웠기에 매우 익숙하다. 양무운동의 중체서용과 조선의 동도서기는 같은 개념이다. 그러나 근본은 그대로 둔 채 겉모습만 바꾼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리홍장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때 익히 보았던 서양 무기의 위력에 매료되어 기기국을 세우고 각종 무기 생산에 열을 올렸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청•프 전쟁, 청•일 전쟁의 패배가 그 결과를 말해주었다.

 

특히 청•일 전쟁은 비슷한 시기에 개화를 진행한 청과 일본의 근대화 성적을 판가름하는 전쟁이기도 했다.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대결에서 외양뿐 아니라 정신까지 철저히 서양식 근대화를 추구한 일본이 승리하였다. 자그마한 일본에게 완패한 청을 보고 놀란 것은 서양 열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제까지 잠자던 호랑이로 생각했던 청나라가 종이호랑이에 불과함을 알고 나자 거침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청은 이제 제국주의 열강들의 반식민지가 되어 갔다.

 

물론 양무운동이 실패한 데에는 보수주의자들의 방해와 양무운동 세력 내의 분열이 커다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필요한 군자금을 빼돌리기도 하고, 전쟁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양무운동의 실패로 청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캉유웨이 등이 황제를 설득하여 일본식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변법자강운동을 이끌었다. 입헌군주제와 의회 설립 등을 기본으로 하는 ‘변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서태후 등 보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는 유폐되고, 변법자강 운동은 100일 만에 끝났다.

 

 

개혁의 실패와 거듭된 혼란 속에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은 더욱 심해지고, 민중들의 삶도 더욱 피폐해 졌다. 성난 민중들은 서양의 모든 것에 격렬한 증오를 드러냈다. 교회와 외국 공사관을 공격하고, 서양인들을 죽였다. 의화단 사건이다. 민중들은 청을 도와서라도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청멸양의 기치 아래 민중들이 몰려들었으나, 8개국 연합군이 이들을 물리치고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의화단 사건의 결과로 맺게 된 신축조약에서는 서양인들의 피해를 구실로 베이징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게 되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제 청의 보수파들도 더 이상 개혁을 외면할 수 없었다. 광서신정은 서태후 등이 변법자강을 거의 그대로 가져와 청을 개혁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 없이 흉내만 내려 했던 광서신정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광서신정의 명목 아래 청 정부는 더욱 많은 세금을 수탈하려 하였다. 재정이 궁핍했던 청 정부는 민간 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담보로 외국에서 차관을 얻으려 하였다. 민간 철도는 중국 민중들이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려 건설한 것이었으므로, 차관을 대가로 철도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것은 주권을 넘기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민간 철도 국유화는 청나라 정부에 대한 민중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 없애버렸다. 민중들은 보로운동을 통해 정부에 대항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았다. 혁명군은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선출하고, 난징에서 중화민국의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제 베이징의 청나라와 난징의 중화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중국이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질 위기였다. 청이 진압군으로 내려 보낸 위안스카이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쑨원은 위안스카이를 설득하여 임시 대총통 자리를 대가로 연합하여 청나라를 멸망시켰다.

 

중국 분열의 위기는 막았지만 위안스카이는 새 시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 역사의 배신의 아이콘이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916년 위안스카이는 공화정을 지키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였다.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철회되었고, 그해 위안스카이가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를 지지하던 군벌 세력들이 할거하게 되면서 중국은 다시 한 번 혼란기에 들어섰다. 북쪽은 군벌 세력들이 남쪽은 반 군벌 세력이 차지하였다. 특히 반 군벌 세력은 민족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으로 대립하면서 중국의 현대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중국 현대사의 시작은 군벌을 몰아내기 위한 1차 국공합작,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2차 국공 합작, 그리고 마지막 국공 내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최종 승리자는 공산당이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현대사는 다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

 

 

 

 

 

 

 

일본 제국주의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일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정리해 본 적이 있다. 더 이상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근대 부분만 다시 정리해 본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일본의 근대는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으로 시작된다.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이라는 함선을 이끌고 와서 일본의 문을 열었다. 뒤이어 1858년 본격 조약인 미•일 통상 장정을 맺는데, 조약을 결정한 것은 에도막부였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 이후 약 700 년간 천황의 존재가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정치는 쇼군이 담당했고 천황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항이후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자 에도막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천황의 존재가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지방의 몇몇 번을 중심으로 막부타도 운동이 일어나면서 존왕양이의 기치가 올랐다. 이 과정에서 서양 무기의 위력을 맛본 일본은 양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을 따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존왕양이 운동은 존왕 운동으로 변형되었다. 에도막부는 이런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권력을 천황에게 이양하는 대정봉환을 행하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단행되었다. 폐번치현을 필두로 근대화 과정이 착착 진행되어 갔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민중의 커져 가는 자유 민권 운동도 받아 안아 1889년 메이지헌법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메이지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천명했지만, 일본의 입헌군주제는 서양의 그것과는 다르게 천황의 무한한 권력을 보장하고 있다. 메이지 유신이 주창한 문명개화가 어느 정도 성공하자, 일본은 서양을 따라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하려 하였다.

 

 

1894년 그 기회가 왔다.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과 일본이 맞붙게 된 것이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으로,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각각 군사력을 키워왔다.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그러나 아직 새끼 제국주의자에 불과한 일본은 열강의 견제로 다 삼킨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야 했다. 설욕전은 딱 10년 뒤인 1904년에 이루어졌다. 청나라 의화단을 진압하러 들어간 8개국 연합군 중 러시아가 철수하지 않고 만주에 군대를 잔류시켰다. 러시아를 경계하던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지원하였다. 1904년 영미의 대리전이라고도 하는 러•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조선은 이제 일본의 손아귀 안에 완전히 갇혔고 일본은 제국주의의 선두 대열에 합류하였다.

 

 

일본은 첫 희생양인 조선을 발판으로 제국주의적 본성을 펼쳐갔다. 1929년 대공황을 기화로 드넓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 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945년 종말을 맞았다. 원자폭탄 두 발이 떨어진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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