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과 전체주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 국민과 모든 물자를 동원한 ‘국가의 등장’과 ‘국가에 의한 총력전’입니다. 부르주아 시대의 자유주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허구이고 개인은 실체이므로 각자 열심히 살면 사회는 알아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끝났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19세기 부르주아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p439 <역사고전강의>”
홉스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통치론에 바탕을 둔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경찰국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생명과 재산 즉 사적 소유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함께 국가의 역할이 급부상했다. 국가의 가치는 국민 개개인의 총합 보다 더 크며, 이제 국민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사이, 그 전간기戰間期 는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시대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는 모두 경제적 위기와 관련이 있다. 19세기말부터 불황과 호황을 거듭하던 자본주의 경제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을 겪고도 여전히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베르사유 체제는 미봉책에 불과 했으므로, 제2차 세계대전은 이미 예견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1929년 10월 24일 아침, 뉴욕 월스트리트 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세계 경제는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 즉 식민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던 미국은 각각 자국과 식민지를 묶어 블록을 형성했다.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식민지에 자국 상품을 독점적으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공황의 원인은 단순했다. 대량 생산으로 인해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던 것이다. 팔리지 않은 상품은 재고가 되었고, 재고가 넘치자 더 이상 생산이 필요 없게 된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할 수밖에 없었고, 구매력을 상실한 실직자가 넘쳐 나자 생산은 더욱 더 위축되었다. 악순환이었다.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파산이었다. 이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이 상처와 함께 자유방임주의 원칙에 대한 거부감이 널리 퍼지고, 자본주의를 개혁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고개를 들었다. p83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실시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회주의자라는 공격에 시달렸지만 수정주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이론을 적극 도입하여 수정 자본주의를 시도하였다. 국가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 일자리를 만들고, 노동자를 보호하고 최저 임금제도를 도입하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쥐어짜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만 하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순환이고, 이 순환의 중요 고리는 소비자이다. 구매력이 있는 소비자가 없다면 상품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소비자의 구매력은 곧 노동자의 임금에서 비롯된다. 적정한 수준의 임금이 상품의 구매력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이 하는 지출은 곧 다른 사람의 소득” 이라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축만 하면 경제는 급격히 위축될 것이다. ‘찌그러진 냄비’는 버려야하고, 무조건 가격을 깎을 것이 아니라 적정한 수준의 가격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 나의 일자리와 임금을 보장할 수 있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문제는 개입하려 해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국가들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거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한 국가들에게 가장 손쉬운 선택은 전쟁이었다.
전쟁, 즉 침략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경제공황이 발생하기 전에 유럽에는 이미 파시즘이 등장했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의 삼국협상 측 일원이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얻은 것이 없었다. 전쟁으로 막대한 군비를 지출했지만 식민지를 얻지 못한 이탈리아의 경제는 악화되었고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무솔리니는 이런 군중 심리를 이용하여 ‘국가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였다. 1922년 무솔리니와 국가 파시스트당은 로마로 진군하였다. 검은 셔츠단을 앞세운 이 쿠데타로 무솔리니는 군부, 자본가, 그리고 우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총리가 되었다.
독일의 나치당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집권한 것은 대공황 이후였다.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이라는 뜻의 나치는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극단적인 반사회주의, 반노동자 정당이었다. 나치즘은 파시즘에 인종주의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2 p193>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허덕이던 독일 경제를 붕괴시켰다. 실업자가 증가할수록 나치에 대한 지지율은 상승했다. 독일인들은 아무런 성찰 없이 이 어려운 상황이 누군가에 의해 단숨에 해결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중은 상황이 어려울수록 포퓰리즘에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문제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해결은 언제나 어렵고, 누군가에게 문제의 책임을 돌리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악화될수록 일베나 왕따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포퓰리즘의 전략은 적을 만들어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나치즘에서 적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 유대인이다. 나치는 독일인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통이 유대인 때문이라고 선동했다. 고통의 원인이 대공황에 있고, 대공황은 자유방임적 시장경제의 결과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엉뚱한 적을 향한 분노를 유도했다.
「포퓰리즘은 궁극적으로 항상 평범한 인민의 좌절과 격분에 의해,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몰라. 내가 아는 것은 단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거야. 이대로 계속될 수는 없어. 멈춰야 해!'에 의해 지속된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이해에 대한 거절, 복잡성에 대한 격분,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진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확신에 의해 포퓰리즘은 지속된다. 현상적 장면 뒤에서 그것을 설명해 줄 어떤 행역자가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거기에, 이 앎에 대한 거절에, 포퓰리즘의 고유하게 물신주의적인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형식적인 차원에서 물신은 전이의 제스처를 함축한다. 그것은 표준적인 전이 공식의 역전으로 기능한다. 물신이 구현하는 것은 정확히 앎에 대한 부인, 내가 아는 것에 대한 주관적 인정의 거절이다. 거기에 물신과 증상의 차이가 있다. 증상은 억압된 지식, 주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체에 대한 진실을 구현한다. p423~4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앎에 대한 거절’은 ‘사유의 부재’ 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을 쓴 한나 아렌트는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너무도 평범한 한 사람의 관료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아렌트가 파악한 이 ‘평범한 악’의 원인은 사유의 부재였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명령에 대해 스스로 사유하기를 포기하고 다만 효율적으로 업무를 집행했을 뿐이다. 파시즘뿐 아니라 모든 포퓰리즘의 토양은 사유의 부재인 것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적 성격을 띤 것이 에스파냐 내전이었다. 1936년 에스파냐에서는 선거를 통해 반파시즘 연합인 인민 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에스파냐는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장이 되었다. 프랑코를 지원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인민전선정부를 위해 달려 온 것은 세계 각지의 50여개 나라에서 스스로 무기를 들고 달려온 총 4만여 명의 ‘국제 여단’ 이었다. 내전은 4년 간 지속되었고 프랑코의 파시즘 세력이 승리하였다.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에스파냐의 게르니카는 독일군 폭격기의 대규모 공습으로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참혹하게 죽은 마을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참상을 그림으로 그려 에스파냐 내전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헤밍웨이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
1938년부터 독일은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펼쳐 나갔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주데텐란트)을 요구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요구에 굴복하여 뮌헨 협정을 체결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치 독일이 소련을 봉쇄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EBSi 세계사 개념 다지기>
이렇게 세력을 확장하던 나치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곧바로 폴란드를 점령해 버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깊은 원인은 이른바 ‘독일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21세기인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문제입니다. 유럽 문제는 곧 독일의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가 신문에서 접하는 유럽의 여러 문제들에서는 항상 독일이 핵심적인 행위자입니다. 독일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유럽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유럽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인구는 6천5백만 명, 프랑스는 4천만 명이었습니다. 또한 석탄과 철 같은 경제적 자원이 풍부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이 부과한 여러 제약을 이겨내고 다시 강대국으로 올라 설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독일을 견제했던 유럽의 세력균형이 무너진 것도 ‘독일 문제’를 키우는데 한몫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독일 동부의 러시아 제국과 남부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했으며, 서부의 프랑스는 국력이 완전히 쇠퇴했고 영국 역시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의 지위에서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중간 원인’은 독일 문제와 관련한 ‘배상 문제’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이 점령했던 땅을 회수하고 독일 군대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독일에 전쟁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요구한 배상 문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모든 경제적 어려움을 배상금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배상 금액은 독일의 반발을 우려해서 매년 하향 조정되었고 독일 경제에 미친 영향도 그리 크지 않았지만 -당시 독일 여론과는 달리 1923년 물가 폭등, 1929년 대공황은 배상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인들에게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열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단치히’ 문제입니다. 오늘날 폴란드 그단스크의 옛 지명인 단치히 자유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중립을 선포하고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독일인이 많이 사는 이 도시를 돌려받는다는 구실로 제2차 대전 발발일인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당시 독일과 폴란드가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 이 문제를 놓고 영국,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 상황이어서 한쪽이 발을 내딛으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히틀러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면 도저히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단치히 침공을 밀어 붙였고 허를 찔린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뒤인 9월 3일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p461~2 <역사 고전 강의> 」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나치 독일은 단숨에 프랑스까지 점령하였고 영국의 하늘은 폭격을 위하여 출격한 독일의 전투기로 뒤덮였다. 유럽은 이제 파시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1941년 여름,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략하였다. 독일의 기습으로 소련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서 손을 잡게 되었다. 소련은 결사적으로 나치에 맞서 모스크바를 방어하고 1942에서 1943년에 걸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EBSi 이다지의 세계사>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유럽과 태평양 두 곳에서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쟁은 일본이 촉발한 것이었다. 일본도 이탈리아와 독일과 마찬가지로 대공황의 위기를 침략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에 이은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였다. 1941년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함으로써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끌어들였다. 명실 공히 이제 전쟁은 세계대전이 된 것이다. 미국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승기를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은 흔히 추축국이라고 불린다. 세 나라는 방공동맹을 맺고 파시즘 국가 간의 협력 관계를 과시하였다. 이 중 제일 먼저 항복한 것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대의회가 무솔리니를 불신임하였다. 이탈리아는 1943년 국가 파시스트당을 해산하고 연합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나치에 의해 구출되었지만, 결국 1945년에 다시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연합군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파리를 해방시켰다. 1945년 4월에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점령하였다. 히틀러는 자살하고 독일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1945년 8월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는 5,000만 명에 이르렀고 그 중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희생자의 2배가 넘었다. 세계 인구의 20%가 전쟁에 동원되었다. 연거푸 끔찍한 전쟁을 치른 인류는 평화를 열망하면서 국제연합을 탄생시켰다. 전범 처리를 위해 국제 군사 재판소도 설치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의 위협이 다가왔다. 파시즘에 대항해 손을 잡았던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노골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곧바로 냉전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팔레스타인

<EBS중학 필독중학세계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일단 분명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며 영국이 이중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에게는 아랍의 국가를,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의 국가를 각각 약속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팔레스타인 땅은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 놓였지만,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1947년 팔레인스타인 문제를 UN에 위임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정리한 글이 있어 링크를 걸어 둔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팔레스타인인 영토는 점점 줄어들어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은 자기들 땅에서 이스라엘의 포로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겨우 한 뼘 남은 땅마저 이스라엘의 것으로 강제 수용하기 위해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현대사는 왜 이렇게 형극의 길을 걷게 된 걸까?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정리해 놓은 글이 있어 내용은 링크로 대신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