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르는듯 하다.  

   신간평가단 시작을 바로 엊그제한 것만 같은데 벌써 두번째 신간 추천이 돌아왔다. 

   거기다 벌써 내일이 추천 마감일이다. 얼른 밀린 리뷰 올리고 4월 신간들을 검색한다. 

   이번엔 제법 읽고 싶은 책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것도 손에 들어보고 저것도 손에 들어보고 

   하다가 결국 이 다섯 권을 선택했다. 

    

   그, 첫번째는 

    

  콜럼 토빈의 '브루클린'이다. 

  콜럼 토빈 하면 역시 헨리 제임스의 전기 형식을 띤 소설  '거 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실제 헨리 제임스가 썼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그의 내면을 정말 훌륭하게 복원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작품이다. 그만큼 콜럼 토빈은 심리적 통찰에 있어서 대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브루클린'은 이민자를 다룬다. 이민자라면 무엇보다도 낯선 언어와 낯선 곳 그리고 낯선 문화에 대한 심리적 방황이 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민자의 내면을 그리는 데 있어 콜럼 토빈 만큼 제격인 작가는 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정말 기대가 된다. 숀탠이 그림책 '도착'에서 기형적인 문양과 그림으로서 이민자의 내면 풍경을 그려냈듯이 콜럼 토빈은 어떤 언어로서 그 내면의 풍경을 펼쳐보일지 정말 기대가 된다.

 

 

  

  하인라인의 이 소설은 사실 아주 옛날에 해문 SF 문고로 한번 출간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제목이 '우주방랑도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새로운 별로 떠난 우주 이민 선단이 그만 세월이 너무도 오래 흘러 이제 거기 사람들중 아무도 자기가 있는 곳이 우주선인 줄 알지 못하고 그저 하나의 세계인양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그들은 고향도 목적도 잊은 우주의 고아가 된 것이다. 최근에 나왔던 SF 영화 '팬도럼'도 공식적으로 밝혔는지는 모르겠는데 사실은 여기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이다. 발간 당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영화 '팬도럼'에서 보듯이 최근 서서히 그 영향력을 미쳐가고 있다. 어린 시절 추억속의 책이기도 하여 추천해 본다.

 

 

 

 1987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작품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었는데 드디어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종군기자이며 역사가였던 한 여성의 임종 직전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렇게 생애를 돌아보는 그녀의 회고담으로 채워져있다. 사실을 발굴하는 역사가의 글쓰기와 허구를 재현하는 소설가로서의 글쓰기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얼기설기 엮어지는 가운데 한 여성의 질곡스런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나온다. 모던라이브러리편집부가 20세기 여성소설 100선 중의 하나로 꼽은 작품이기도 해서 더욱 더 읽고 싶은 작품이다.

 

 

 

 

 

  레미제라블을 읽은 이후로 프랑스 대혁명에 관한 소설들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나톨 프랑스의 이 소설도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한 영혼이 혁명과정중에서 점점 비정한 냉혈한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인간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지독한 회의주의자 아나톨 프랑스가 신분을 넘어 인간의 가치를 널리 부르짖었던 프랑스 대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지 정말 궁금하다.

 

 

 

 

                  

   경향신문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보았을 때 부터 읽고 싶었던 소설이다. '제노비스 신드롬'을 낳았던 그 제노비스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라니 호기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점점 방관자들이 많아져만 가는 듯한 요즘을 생각하면 더더욱 읽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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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제목 '헤븐'은 소설 속에서 고지마가 '헤븐'을 보여주겠다며 주인공을 데리고 간 미술관에서 고지마가 보여주는 그림의 제목이다. 사실 그림의 진짜 제목은 아니고(진짜 제목은 나오지 않는다.) 그 제목이 너무 밋밋하다며 고지마가 멋대로 붙인 제목이지만. 아무튼 그 그림 '헤븐'을 묘사한 걸 읽고 보니 그 그림이 진짜는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 샤갈의 1915년작 '생일'이라는 그림이었다.

  

    1915년 당시 샤갈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벨라와 결혼했고 그 기쁨 때문인지 계속해서 결혼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내어놓고 있었다. 이 그림은 당시는 연인 관계였던 벨라가 샤갈의 생일날 서프라이즈를 위해 찾아갔을 때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 연인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뜻하지 않은 연인의 축하를 받은 샤갈은 그야말로 더 높이 붕붕 떠다닌다. 

     이 그림을 두고 고지마는 이렇게 말한다.

   그 연인들에게는 말이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어. 아주 슬픈 일이 있었거든. 굉장히. 그렇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은 최고의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야. 둘이 극복하고 도달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방이 사실은 헤븐인거야. (P.62)

     진짜 그림이 어떻게 해서 그려졌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고지마는 자기식대로 그림을 해석한다. 그녀가 이러는 것은 이 그림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공해'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등으로 발길질마저 예사로 당하는 등, 온갖 괴롭힘을 다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고통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이겨나가면 언젠가는 저 그림 처럼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그림 '헤븐'은 고지마에게 고통의 이유이자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고지마와 같이 그림을 보고 있는 주인공 역시도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날마다 뒤통수를 세게 맞거나 학교를 결석하기만 해도 책상 서랍이 오물로 가득찬다거나 분필을 억지로 삼키거나 걸레를 입에 물거나 청소도구함에 갇히거나 하는 온갖 괴롭힘을 날마다 당하고 있다. 주인공 역시도 고지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고지마와는 달리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어서 이 모든 괴롭힘들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고지마와 주인공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은 바로 고통의 원인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고통을 당하는 건 태어날 때 부터 사시였기 때문이다. 즉, 그건 자기와 상관없이 주어진 제약 때문에 받게 된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지마는 엄마가 버린 아빠를 잊지 않으려고 초라하고 궁색하게 사는 아빠의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즉 고지마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차이, 즉 고통의 원인이 외부로 부터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초래한 것인지의 차이에 따라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소설 '헤븐'은 그렇게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러한 소설의 모습이 그리 생경한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 인간들은 주어진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다. 아마도 그것이 잘 드러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의 '욥기'라 할 것이다. '욥기'는 그야말로 이유없이 주어지는 고통에 대해 그 까닭을 알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중세 이후로 고통은 철학과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사유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었던 중세인들에게 고통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고통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니 '악'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주재하지는 이 세계에 그런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요한 의문이었다. 성경에서도 중세인들에게서도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도 고통은 세상의 주권자라는 하나님과 어긋나는 모순된 존재였다. 그래서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고통의 존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일련의 흐름들을 '변신론'이라고 불렀다. 즉, 고통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변호하는 논의들이라는 것이다. 

    변신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둘 있는데 하나는 라이프니츠고 다른 하나는 칸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또 소설 속의 주인공과 고지마의 입장과도 겹친다. 라이프니츠는 고통은 이 세상이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고통은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 따르는 잔여이고 오히려 고통이 없다면 존재는 제대로 존재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그저 현상되는 고통을 긍정하고 그저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과 유사하다. 이에 반해 칸트는 '요청론'을 끌어들인다. 즉 우리가 고통의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견디면 언젠가는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는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의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통 끝에 도달하는 천국을 그것에 보상을 주는 신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그림 '헤븐'을 보며 보상의 희망 속에 고통을 인내하는 고지마와 겹친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은 유신론이라는 가정하에서 내려진 것이다. 신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고통 역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내려진 견해들이다. 그렇다면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무신론이라면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는 무신론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무신론 아래에선 모든 사물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도 그 어떤 의도도 이유도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고통 역시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당하는 존재는 하필이면 그 공간 그 시간에 우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과 겹친다. 우리는 이 무신론적 입장을 바로 '모모세'에게서 보게 될 것이다.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모세에게 주인공은 왜 자기를 그토록 괴롭히냐고? 그러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모모세는 주인공이 당하는 고통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물론 양심의 가책 또한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고지마로 부터 고양되었던 고통에 대한 의미에 대해 기울어져 있는 주인공은 모모세에게 그야말로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면 그 때 주인공은 인간 축구공이 되어 무수한 발길질을 당하는 학대를 경험한 후 그 인내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이상 무의미하게 쏟아지는 폭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한 편 이 모든 고통에 이유가 있다는 고지마를 믿고 싶어했다. 그건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을 만큼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모모세는 그 모든 게 다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하게 고지마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그는 정확히 모모세의 세계와 고지마의 세계 중간에 있게 된다. 

     우연한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소설은 고통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입장을 한 인물에 대입하여 하나하나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적 형상화'를 통해서 우리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들을 좀 더 가깝게 살펴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는... 

     주인공과 고지마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점 뿐만아니고 그 가족관계마저 어쩐지 유사하다. 주인공은 엄마가 없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 새엄마다. 한 편 고지마는 아빠가 새아빠다. 둘 다 어느 한  쪽이 부재한다. 이에 더하여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얼마든지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후에 사시가 수술 가능한 것임을 알고 놀란다. 그것도 너무도 손쉽게. 고지마는 언제든지 스스로 몸을 씻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 고통이 숙명적이 아니라는 것이 똑같다. 이 둘의 이러한 비슷함은 가와카미 미에코가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입장과는 또달리 고통을 대하는 어떤 자세 같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둘은 아주 비슷한데도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만큼은 또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껴안으려 하지만 주인공은 어떡하든 그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그 둘의 관계는 눈 수술로 파국을 맞는다. 고지마와 주인공이 마지막 만나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고지마는 주인공에게 고통을 당하는 의미에 말하면서 사실은 그들이 주인공과 고지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옳았음을 스스로 주인공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지메란 다름이 아니라 무리에 들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폭력이라는 걸 이 장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결국 고지마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괴물이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못한다. 고지마 처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이지메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애초에는 포기했던 가능성이 조금 빛을 발하자마자 얼른 그것을 부여잡는다. 그렇게 그에겐 오로지 회피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와카미 미에코가 손을 들어주는 것은 '모모세'쪽이다. 그토록 무겁게 고통을 천착해왔던 것과는 달리 결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낙관적으로 끝맺는다. 주인공은 눈수술을 감행했고 결국 제대로 된 시야로 보는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수술 전 의사와의  상담에서 의사는 수술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냥 조금 바꾸는 정도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사실 주인공은 그 전에도 수술을 받았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돌팔이가 그 수술을 맡았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돌팔이의 말로 더이상의 수술을 불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계속 고통의 굴레를 둘러써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만일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났더라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거라고... 이런 생각은 모든 건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며 고통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모모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니 가볍게 생각하라고. 모든 건 언제든지 변한다. 내일엔 내일의 바람이 부니까... 이런 속삭임이 저절로 들려오는 듯한 이 소설의 결말은 어쩌면 가와카미 미에코가 그래도 어떤 희망적인 것을 가지게 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지 싶다. 

       하지만 그 눈부신 세상 속 어딘가 고지마가 분명 존재한다. 아빠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통의 굴레를 둘러쓰고 살아가는 존재가. 생각해보면 주인공에게 '사시'의 존재도 그랬다. 그것은 엄마로 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가 눈수술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엄마와 단절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지마는 아빠를 간직하기 위해 고통을 껴안았지만 주인공은 엄마와 단절하면서까지 고통을 회피했다. 고집스럽게 껴안으려는 자와 바람처럼 가볍게 떠나버리는 자가, 절대로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고지마의 고집과 별로 정든 사이도 아니지만 새엄마 곁에 있으려는 변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뚜렷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걸 '고집과 변화의 문제'로 풀어 변화를 택하는 쪽으로 조금은 성급하게 결론내린 것 같지만 과연 그런 정도로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고지마의 존재다. 그 눈부시도록 환한 세상에 끝끝내 하나의 검은 얼룩으로 남으려는 고지마의 존재다. 이걸 어떻게 대해야할까? 끝없이 우리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존재를 어떻게 붙들어야할까? 여전히 그렇게 책을 덮은 후에도 의문은 계속된다. 지금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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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아저씨 제르맹
마리 사빈 로제 지음, 이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맞아, 책 뒤에 있는 말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네. 그러면 어떤 책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설책 뒤에 적힌 말들은 정말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인지 외려 반문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같은 사람들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 게다가 내가 집어든 책 중 그 어떤 것도 쉽게 쓰여진 것은 없었다. "사랑과 모험, 그게 아니면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끝." 이렇게 말이다. (P.268)

    이 소설의 주인공 제르맹은 마흔 다섯살의 중년이지만  글도 모르고 이해력이 아주 많이 떨어지는 그래서 소위 '모자란다'는 취급을 받는 그런 남자다. 그렇게 이 소설의 원제(La Tete en Friche)의 뜻 그대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미개발 상태'인 남자다. 인용한 말은 그가 누군가를 위해 책을 읽어주려고 생애 처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가 어떤 책이 좋은지 알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데, 문득 앞에 있는 꼬마 하나가 책 뒤에 쓰여진 말들을 읽고 고르는 것을 보고 따라하다가 하게 된 생각이다. 책 뒤의 문구가 내용의 전달과는 아무 상관없는 오로지 현혹을 위한 과장과 칭찬 일색임을 비웃는 일종의 풍자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왠지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내개는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혹 내 리뷰도 제르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그런 것이지 않을까 언뜻 드는 두려움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리뷰라는 것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 책 뒤에 쓰여져 있는 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혹시 내 리뷰도 타인에게 잘 소화되지도 않을 말들을 억지로 씹어먹게 만드는 자기도취적인 글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인다. 얼른 떠오른 건 글을 쓸 때 늘 저렇게 제르맹 같은 이들을 위한 배려도 되도록 잊지말아야겠다는 결심이지만, '되도록'이란 말이 그렇듯이 언제 도래할 지 모르는 배신의 가능성을 다분히 상정한 결심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보다 많이 알면서도 늘 모르는 제르맹을 배려해주었던 마리게리트 할머니가 더 대단해 보인다. 아무튼 결심한 지금 이 순간, 그 노력의 흔적이라도 내보이기 위해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쓸까 한다. 되도록 알기 쉽게 간단히... 

  '이제까지 생각없이 살아온 한 중년의 남자가 우연히 한 할머니를 만나 책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가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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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 부분은 이런 정도의 글로는 만족하시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붙여놓은 글이다. 

천성이 남의 글을 파헤치기 좋아하는 나인지라 아무래도 저 글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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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게 말한다면 '바보아저씨 제르맹'의 핵심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책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모두 네 권의 소설들이 나온다. 그 소설 하나하나가 다 그대로 주인공 제르맹으로 하여금 새삼 자신을 일깨우고 확장하도록 만드는 그런 하나의 계기들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리뷰도 그렇게 네 권의 책을 중심으로 써 보려한다. 

 

    1. 알베르 까뮈 '페스트'  

   

    까뮈의 '페스트'는 제르맹이 공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 마르게 리트로 부터 처음 듣게되는 책이다. 마르게리트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의 앞에서 페스트의 시작 부분을 낭독하게 되는데 그 전까지 책이라고는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제르맹은 마르게리트가 낭독하는 '페스트'에 바로 매료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 때문에 예전의 한 사건을 떠올린다. 그건 자신의 이웃집에 살던 한 아버지가 아이들도 학교가서 홀로 집에 있는 사이 권총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 아버지는 혹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볼까 봐, 일부러 문 밖에 '시장에 갔음'이란 푯말을 걸어놓았으나 그것이 거꾸로 문 앞에서 기다리기 싫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문을 열고자 창문으로 기어들어간 아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 꼴이 되어 결국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고만다. 제르맹이 떠올린 이 사건은 사실 제르맹의 세계와도 유사하다. 그 역시 아버지란 존재가 없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낳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그의 존재가 늘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원망하면서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댔다. 그에겐 단 한번도 애정을 느껴본 순간들이 없었다. 컴컴한 바닥 위로 무참히 머리가 파열된 채로 쓰러져 있던 아버지가 있었던 거실. 그것이 그의 세계였고 그 아들이 정신병자가 되었듯이 그도 뒤떨어지는 지능으로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마르게리크가 읽어주었던 까뮈의 페스트는 그래서 제르맹에게 그의 세계의 현재 모습과 그 원인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2.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아시다시피 이 소설은 로맹 가리의 자전적 요소가 깊이 배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소설이다. 제르맹 역시도 마르게리트로 부터 이 소설을 들으면서 지금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 소설은 제르맹에게 '페스트'로 촉발되었던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모습과 원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현재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 '카라반'으로 상징된다. 그 카라반은 어머니가 있는 집의 마당에 있다. 그렇게 그는 어머니로 둘러싼 세계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 카라반이라는 공간을 설정에 거리를 둔다. 그건 그대로 한 편으론 어머니로 부터 달아나고 싶은 만큼 욕망의 표현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대로 어머니의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는 더 은밀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카라반이 그곳에 있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눌러앉은 남자에게 매맞는 제르맹을  보호해주려고 나선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라반은 제르맹의 독립에의 열망과 어머니의 보호속에 머무르고 싶다는 바램의, 상반된 이중의 욕망이 표현된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된 욕망이 중첩된 공간은 그야말로 제르맹 현재의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카라반과 완전히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는 물건 하나를 제르맹은 마리게리트로 부터 선물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전이다. 마리게리트는 사전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사전은 여행을 하게 해 준답니다. (...) 

  제르맹 사전은 말이에요.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에요. 그건 미궁이에요. 행복에 젖어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미궁이지요. (P. 198 ~ 199) 

   마당 한 구석의 좁아 터진 카라반과 영원히 헤메일지도 모르는 미궁으로서의 사전. 이렇게 둘은 공간적으로도 구분되지만 머무름과 여행이라는 움직임에 있어서도 구분된다. 그렇게 사전은 여러모로 카라반과 대조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그의 현재가 가진 불완전한 모습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하나의 출구이자 구원으로서 자리잡는다. 아니나다를까 제르맹은 점점 '말'을 익히게 된다. 말을 익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캉의 말처럼 우리가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우리 외부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바깥 그렇게 타자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은유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것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말을 익혀나가는 제르맹은 자신이 관계맺고 있는 타인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진다. 그렇게 타인을 받아들여간다.  이렇게 '새벽의 약속'은 제르맹이 현재 자신의 삶과 거기서 맺고 있는 타인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3.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제르멩의 꿈이 하나 있다면 그건 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르게리트에게 인디언이 나오는 소설을 하나 읽어줄 것을 원했고 그렇게 그녀가 읽어주었던 소설이 바로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었다. 제르맹은 바로 이 책을 통하여 삶이 지닌 막연한 동경과 현실과의 괴리를 깨닫는다. 그렇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통해 제르맹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새벽의 약속'을 통해 타인에게 나아갔던 그의 사유는 이제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통해 '삶 자체'에게로 나아간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던져주는 삶의 유한성. 그렇게 늙어버림에 따라 마리게리트에게 떨어져버린 점점 잃어가는 시력은 그에게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게 그는 속절없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만드는 노년과 죽음을 선사하는 삶이 지닌 비극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한다. 십계명에 대한 제르맹의 비난은 아마도 그러한 사유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삶을 더 알기위해 스스로 책을 찾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넘어 삶 자체를 사유하려 한다. 그건 오로지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려진 마리게리트에게 닥쳐올 실명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자신의 유한성의 자각은 타인의 받아들임과 같이 온다. 어쩌면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면 할 수록 그만큼 더 깊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의 말 그대로 사유란 바로 타자를 받아들임 자체일지도 모른다. 

 

   4. 쥘 쉬페르비엘 '난바다의 아이' 

 

 

  마치 이러한 아렌트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제르맹은 이제 마리게리트를 스스로 도우려한다. 곧 언제 실명할지 모르는 마리게리트를 위하여 스스로 책을 읽어주려는 것이다. 환상문학의 걸작이기도 한 쥘 쉬페리비엘의 '난바다의 아이'는 그것을 위해 그가 가장 먼저 선택한 책이다.(물론 의도는 아니고 그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것이지만...)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 자신이 아닌 타인, 마리게리트를 이해한다.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줄 몰랐던 제르맹이 이제는 타인마저 이해하는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소녀가 점점 마리게리트를 닮아갈수록 그러니까 마지막 부분을 읽을 즈음 나는 점점 목구멍이 조여드는 듯 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마치 살아 있는 것 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괴로워하는 존재를, 축축한 고독 속에서 영원히 불우하게 사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P. 275)

 

  작가 마리 사빈 로제는 제르맹이 마리게리트에게 읽어주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을 주의깊게 인용함으로써 결국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은밀히 드러낸다.(그는 일부러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바로 거기서 낭독을 끝맺기까지 한다.)  

  난바다의 아이는 멀고도 먼 이 나라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샤를이나 스틴부르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P.283)

    네 권의 책을 통해 제르맹의 사유가 점차 자신에서 타자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왜 우리가 새삼 책을 필요로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는 일부러 문맹에다 아는게 거의 없는 주인공을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작가가 책을 소재로 한 것은 그저 하나의 소통을 위한 매개물에 지나지 않았고 보다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우리가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확인되는 건, 우리가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삶에 있어서 지극히 무지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가가 마지막 인용한 소설의 주인공 처럼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의 눈에 압도적 크기로 달려드는 거대한 바다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의 깊이로 가득하다. 그 바다가 바로 삶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삶 앞에서 지극히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마리게리트를 만나 책을 알기 전의 제르맹과 사실 별 반 다를바 없다. 그 때의 제르맹은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리게리트는 제르맹을 넘어 실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재밌게도 작가 마리 사빈 로제는 제르맹과 마리게리트가 가지는 현격한 키의 차이를 통해 이것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거구의 제르맹에 비해 마리게리트는 겨우 아이 정도의 키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쩐지 제르맹과 마리게리트의 관계는 몸과 머리 그렇게 육체와 의식의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제 홀로 있어서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관계들이다. 상호 보조를 맞춰주어야만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관계들. 그렇게 마리 사빈 로제는 시각적으로까지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책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같은 프랑스 소설중의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경험하기 힘든 낭독의 경험을 통해서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천착해서 이 소설 또한 마리 사빈 로제 처럼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했었다.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도 있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죄다 프랑스 소설들이다. 고다르를 비롯해서 프랑스 영화들을 보면 언제나 등장인물들이 책을 벗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토록 책을 가까이하는 나라 사람들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르맹'은 늘 책을 벗하면서도 책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한번쯤 책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르맹의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이 소설은 제르맹 자신이 단순 솔직한 성격이기에 문장 역시도 그를 닮아 단순하고 쉽고 그래서 빠르게 읽힌다. 더구나 위트까지 풍부해서 재밌게 읽힌다. 그래서 '사유의 기회'라는 다소 부담되는 어휘를 썼지만 실은 편안하고 재밌게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이 책을 통해 책을 가지고 하는 얘기가 좋아졌다면 앞서 언급한 레몽 장과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까지 내처 읽으면 더욱 더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되도록이면 여행 갈 때 집으면 좋을 것 같다. 왠지 덜컹거리는 기차 좌석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간혹 흘깃거리면서 읽어야 더욱 더 제맛일 것 같은 생각이 읽으면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그 경고를 위해 일부러 '되도록'이란 말을 써 놓았음을 간과하지 마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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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우코와의 대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153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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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죠? 

   문득 눈을 들어보니 나는 낯선 곳에 있었다. 그 곳은 어느 퇴락한 객실 같았다. 창문은 모조리 깨어졌고 바람이 몰려와 낡은 커튼을 쉴 새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내가 누워있던 곳은 소파였는데 그 역시 낡을대로 낡아 있었다. 엉덩이를 움직이다 튀어나온 스프링자국에 찔리기도 했다. 벽지는 위로부터 서서히 벗겨져 아래로 내려오고 의자 하나는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자욱한 먼지는 이 방이 오래전부터 죽어있는 공간임을 내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에 유령처럼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네가 만나고 싶어하던 사람... 

   그의 목소리는 바로 맞은 편이 아니라 저 먼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 했다. 실루엣 같은 그의 형상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짜 유령인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로 무섭지 않았다. 모든게 그저 꿈결 같았기 때문이다. 이 방, 맞은 편의 남자, 그 목소리 모두가 현실감이 없었다.

   자네는 내 책을 읽었네. 내가 자살할 때 내 곁에 있었던 책이지... 

  또다시 먼 뱃고동 소리 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근데, 그 목소리는 내게 한 인물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야. 몰랐겠지만 난 내 책을 읽은 사람을 종종 이렇게 초대하곤 한다네. 물론 초대받은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아, 그럼 이건 꿈인가요? 

   정확한 의미에선 꿈은 아니지. 자네는 나와 실제로 만나고 있는 것이니까. 유령과의 만남이라고 해도 좋겠지. 어쨌거나 난 아무 상관이 없네. 난 다만 내 책을 읽은 자네와 얘기가 하고 싶은 뿐이니까. 

   그랬군요. 하지만 제가 얘기할 게 있는 지 잘 모르겠네요. 아시다시피 그 소설은 정말 난해하니까요. 그 수많은 대화들이 무얼 의미하고 있는지 어떤 땐 알 것 같다가도 어떤 땐 도통 모르겠다니까요. 

   그래도 뭔가 대략적이더라도 찾은게 있지 않았나? 

   그것이 일종의 여행 같다는 정도죠. 뭐랄까 사유의 여행?... 

   흥미로운 견해로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지? 

   뭐랄까요? 선생님은...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내키는대로 하게나. 난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명확한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그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의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들 처럼 그 대화들이 스케치되듯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확한 하나의 의도라? 혹시 내가 말한 '삶은 피곤한 노동'이라는 말 때문인가? 

   그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선생님의 책을 번역한 역자가 말한 불멸과 필멸의 관계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의 존재인 신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합할 때 마다 겪는 비극이 빠짐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필멸은 스스로 불멸과 연합하여 불멸이 되려하지만 필멸의 존재성을 도저히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한 번 필멸인 존재는 어떡하든 영원히 필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헤라를 겁탈하려 했던 익시온은 결국 반인반마 켄타우르스를 낳았고 그건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나신을 보고 죽은 것과 같죠. 하이킨토스는 아폴로의 연인이었으나 결국 그가 던진 원반에 예기치않게 맞아 죽었고 아르테미스와 사랑했던 엔디미온은 죽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영원의 잠을 자야했지요. 이 예를 더 이어가야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그런데, 자네는 오딧세우스를 잊고 있군. 

    아, 그런가요? 

    오딧세우스는 여신인 키르케와 잠자리를 같이 했지만 파멸하지 않았잖나? 

    하지만 그 여신 키르케는 오래전에 서열에서 제외된 자가 아니었습니까?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흐음, 그럴수도 있겠군. 하지만 어쨌든 자네의 말은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군.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뭔가 잡았다 싶으면 또 여지없이 미끄러져 버린다고... 선생님의 그 모든 대화들은 정말 하나로 얽매이지 않아요.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제가 머리에 떠올렸던 가장 최종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건 필멸의 존재인 우리들이 어떻게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그 모든 대화들은 각자가 다 달리 그 불멸을 받아들이는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의 죽음을 생각할 때 나올 수 있는 다양한 생각들과 겹쳐질 지도 모릅니다. 모두 27개의 대화에서 변주되고 있는 필멸에 대한 반응들은 그야말로 하나하나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지요. 하지만 선생님을 그러면서도 어느 하나로 모으지 않습니다.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모을 수 없듯이. 그래서 선생님의 소설은 그야말로 사유의 여행인 셈이죠.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네. 다만 자네의 이야기만 듣고 싶을 뿐이야. 

     초대란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던가요? 상당히 불공평한 대우로군요. 

    그것이 유령과 인간의 관계인 것이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햄릿과 그의 아버지를 생각해보게. 

    그렇게 당신은 불멸이 되었군요. 스스로 필멸을 이룸으로서... 그래, 어떤가요? 불멸의 존재가 된 기분이... 

    자네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하는군. 유령은 듣기 위한 존재라고 이미 말했지 않나? 

    네, 뭔가 불공평한 것 같지만 계속 이어가도록 하죠. 저는 이 모호한 대화들의 편린이 과연 무엇일까? 왜 선생님이 이렇게 저를 사유의 여정으로 이끄는가가 궁금했습니다. 다양한 반응의 변주를 보여줌으로서 궁극적으로 선생님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말이죠. 거기엔 모든 의도의 실패가 있고 신보다 더 강한 운명이 있습니다. 불멸에의 동경이 있는가 하면 필멸에의 찬양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 유한성 때문에 신들 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도 있지요. 저는 이러한 이어지지 않는 편린들을 보면서 얼른 놀이동산에 있는 거울의 미로가 떠올랐습니다. 사방이 거울의 벽으로 되어있는 미로가 말이죠. 거기는 자꾸만 반사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얼른 자기가 어디있는지 알기가 어렵죠.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확인하고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선생님의 소설이 저에겐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 모든 대화의 편린에서 보여지는 건 언젠가 제가 했었던 사유의 조각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모든 이야기는 핵심을 추려보면 어떤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였지요. 그런데 그 사유의 조각들에 점점 집중하다 보니 제가 가진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그 수많은 대화들을 읽으면서 내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무엇이었나 기억하기가 힘들어져 졌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알듯 말듯 모를 대화들에 어느샌가 매혹된 것이죠. 거기엔 본래의 내 생각을 포멧하고 다시금 언젠가 향유했던 사유의 조각들을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습니다. 유려한 그들의 말투는 정말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상징과 암시가 가미된 문장들은 미스터리 소설에 나오는 암호문 처럼 해독의 열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선생님의 소설이 얼마나 수많은 밤을 저와 함께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저는 여전히 거울의 미로에 갇혀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저는 잠깐 불면의 밤이 이어진다 싶으면 불멸의 존재들과 필멸의 존재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주 짧은 대화편이라 언제 어느때고 부담없이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렇게 또 필멸을 사유하고 운명과 자유에 관해 생각하고 그랬습니다. 선생님의 궁극의 목적은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출출할 때 먹는 야식 처럼 문득 영혼의 빈곤이 느껴질 때 손쉽게 들 수 있는 사유의 단초를 제공해 주는 것? 그래서 혹시 선생님이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곁에서 머물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유령이 된 내게 더이상 물질로 요구되는 기호 같은 건 소용이 없다네. 있는 건 다만 포용뿐이야. 그래서 유령은 듣기만 하는거지. 자네의 생각에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말일세. 더구나 자네의 말대로 내가 그런 사유를 지속할 의도로 썼다면 더우기 그래서는 안될 일이지. 그러니 자네는 내게 해답을 구해선 안되네. 행여 내가 대답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자네가 어찌 알겠나? 그리고 사람은 또 세월에 따라 생각이 변하는 법이니 오늘의 대답이 궁극적 대답이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겠나? 사람들은 작가의 말이 일종의 해답 같은 것이라고 섣불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건 사람에게 항상 고정불변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네. 그건 오늘의 대답일 순 있어도 궁극의 대답은 될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궁극의 대답이 아닌가? 그런데 궁극의 대답이 어디에 있는가? 시간이란 편의상 지속의 개념으로 만들어졌을뿐 과거와 현재 미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네. 즉 지속이란 것은 우리의 환상에 불과하고 있는 것은 다만 '영원한 현재'일 뿐이야. 과거와 미래 어디로든 이어지지 않는. 자네는 그저 순간속에 존재하는 거지. 그 무한의 순간 속에서 끊임없이 또한 변하고 있는 게 자네라네. 그러니 내게서도 어디서도 해답 같은 것을 구하지 말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알고 있나? 그 고양이 같은 거라네. 상자를 열기 까지는 그 반반의 확률로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 열어봐야 고양이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말은 고양이의 생사를 결정하는게 자네에게 달렸다는 말이야. 이 영원한 현재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선 오로지 모든 것이 자네의 손에 달려있네. 질문에 자네만이 답해줄 수 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게. 

 

     마지막 그의 목소리는 아련하게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렇게 그것은 내가 그 객실을 빠져나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뜻했다. 그의 모습은 여전히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다. 내가 나올 때 그와 악수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했으면 좋으련만. 유령의 감촉이 어떤지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혹시 만졌는데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가 말했던 대로. 그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레우코와의 대화를 흉내낸 이 대화들은 사실일까? 아니면 그저 어렴풋한 기억만이 남은 상태에서 그냥 내가 작위적으로 채워넣은 픽션일까? 아, 알 수 없다. 나 역시 지금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혀버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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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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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보기가 힘들어진 시절이다. '요즘'이라고 쓰려했으나 그 기간이 아주 오래된 것 같기에 '시절'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 한동안 품었던 의심이 하나 있었다. 늘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로 인해 이렇게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혹시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자본주의에서 발현된 제국주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식욕과 모든 것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가 오로지 자기만이 완결된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즉,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밤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낭만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매개물로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선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가능성의 상징인 것이다. 체제의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이 체제의 외곽에서, 그렇게 바깥에서 다시금 그 체제를 돌이켜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로서의 '별들'이다. 고개만 올려 보면 늘 거기 있는 별들은 가장 손쉽게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하나의 '객체'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건 '민족주의'를 만들면서까지 체제내의 노동력과 그로부터의 이윤을 끝없이 빨아들여야했을 자본주의로서는 그 '손쉬움' 때문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흡혈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의 사람들이 오로지 이 체제가 '종국적인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 '워터십 타운의 열 한마리의 토끼'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처럼 그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늘 토끼들을 식재료로 쓸 수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아마도, 어쩌면 틀림없이, 자본주의는 도시의 빛으로 장벽을 쳐서 별들의 존재를 가려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도록. 그렇게 자신의 삶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오로지 이 체제의 규율만이, 그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의 전부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제 자연적으로 이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졌다. 도시는 끊임없이 빛으로, 콘크리트로 그러한 사유를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존재들을 퇴출시키고 있다.  해서 우리는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 처럼 활자를 통해 '그 너머' 혹은 '여기의 바깥'을 사유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다른 가능한 방법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별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깥'을 사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내부'에서만 가지고는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내가 속한 이 내부란 것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태어난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위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은 특정한 의도에 따라서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엔 그 의도에 봉사토록 하는 이데올로기가 은밀하지만 필연적으로 끼어든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그 내부에서 나 자신을 보려해도 이미 작동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밖에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누가 내게 씌워준 누군가의 시력에 맞춘 안경을 가지고 사물을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가지고 있는 욕망 등등은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을 우리는 어쩌면 오로지 남(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와도 같은)의 욕망을 채우려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에 '바깥'의 사유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진정한 모습은 '안'과 '바깥'을 모조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온전히 파악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이것은 다만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혹시 우리가 리처드 애덤스 소설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  

   해서, 어쩌면 절박한 심정으로 그 사유의 계기를 찾고 싶은 요즘, 불현듯 한 권의 책이 '역병'처럼 번지둣 내게로 왔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사유의 악보'이다. 이 책은 인문서로 나왔지만 스스로 인문서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저자 자신의 서문이라 할 만한 서곡을 읽어보면 널리 이해되는 것도 거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유일하게 이해할 '소수'를 위해 메뉴얼, 그렇게 그들을 위한 '악보'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악보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로 표현된 범위 안에서 모든 주관적인 해석들을 허용한다. 그건은 마치 정해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갯수를 가지고 무수한 글자들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여기 내가 몇 개의 악보들처럼 기보하는 이러한 '사유'의 조각들은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여 새롭게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펼쳐져있고 흩뿌려져 있다.(p.8)

   그렇게 이 책은 널리 다양한 해석을 권장하고 새롭게 다양하게 창출된 의미들이 널리 창궐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종국엔 보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는 것일까? 이건 다음의 글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 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으로 실천적인 질문으로 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p.7) 

    여기에서 보듯이 이 책 자체가 그러한 사유의 강요로 부터 이탈하기 위한 실천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근원이 이러했으니, 어떻게 독자에게 그러한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 책은 스스로,관람되기를 원하는 일종의 유물전시장에 그치기를 원한다. 그저 관람객들이 와서 살펴보고 개인적 감상만을 가지고 갈 뿐인 그런 전시장. 그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볼 수 있도록 늘어놓을 뿐. 혹 개안이라도 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진심으로 행복해 하면서...  나는 여기서 일부러 '유물전시장'이란 비유를 썼는데 그것은 다음의 말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그 새로운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유의 가동'으로부터 출발된다는, 일견 신선해보이지만 또한 지극히 오래된 어떤 믿음, 내가 나의 글쓰기로써 도전하고 도발하고 싶었던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 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p.8)

   그렇게 이 책은 일부러 과거의 잔재들을 훑는다. 왜냐하면 이 책이 의문시하는 것은 과거와 새로움을 나누는 그 '사고' 자체이기 때문이다. '3악장,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 알튀세르가 했던 것, 혹은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분배' 나 바디우의 '비미학'에서 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게 혹은 전형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사유의 체계들을 의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책이 일관된 논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통념에도 반대한다. 그렇게 스스로 마땅히 기형과 잡종의 파편이 된다. 

   이 책은 조각난 육체들이다. 그렇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무런 접점을 만들지 않는다.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에서 종곡, 중독에의 권유까지, 그렇게 저자 자신의 말대로 이 책은 그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리 만큼  내용적으로 독립적이다. 게다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글쓰기가 변주되고 있다. 특히나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경우 '거리에 붙어 있던 한 벽보: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겨 적기'에서의 뛰어쓰기의 실종이나 '발전기를 돌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밤: 헤어스탈일에 관한 자기 성찰의 단상'의 마침표의 생략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그렇게 이 책들은 '자고로, 책은, 글은 이래 저래야 한다는'등의 통념들을 한없이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그래서 얼른 이 책들은 아이 앞에 무수히 쏟아져 있는 레고 블럭과도 같아 보인다. 아마도 아이는 그 무수한 조각들 앞에서 당황할 터이지만 언젠가는 - 왜냐면 아무리 무수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조각을 이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힘드므로. '테트리스'게임이 정확히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듯이 우리 인간이란 아무래도 혼돈 보다는 질서를 좋아하므로 - 하나하나 조각을 이어붙이고 연결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결국은 나도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물론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오독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어차피 오독의 가능성을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상관없지 않을까. 

   내가 짓고 있는 혹은 연주하고 있는 어떤 조형이나 선율의 바탕은 하나의 느낌인데 이 책만큼 집요하게 그 어디서든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책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혼돈 보다는 질서를 원하는데, 이 책은 오히려 계속적으로 질서에다 균열을 만들고 가능성의 영역을 불가능성의 구멍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블랙홀'.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와 2악장 '페티시즘과 불가능성의 윤리'에서는 윤리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3악장,'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는 알튀세의 연극 비평을 중심으로 미학 역시 그 진정성은 불가능성의 영역 위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에서는 야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중심으로 책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해 이사만루 상황에서 무타무주로 끝내는 방법의 불가능성을 지나 근대비평에의 불가능성에로까지 나아간다. 이 뒤로도 우리는 그 어디서든 끊임없이 불가능성의 영역들을 볼 수 있는데, 스스로 기형과 잡종의 조각들로 자처하는 이 책이 왜 이다지도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호기심이 나 스스로 블록 짓기를 감행하게 했는데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은 이 불가능성이 내포하고 있는 저의가 혹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 자신이 언급했던 것 처럼, 혹시  모조리 전복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1악장에서 그가 바타유를 끌어와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 때 우리가 모든 사회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았듯이 그렇게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기 위해서였고 2악장에서 굳이 페티시즘을 이끌고 오는 것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모든 가치들 역시도 사실은 우리가 그 가치들을 맹목적인 페티시즘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바타유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소통이란 타자를 우리의 입장에 맞도로 바꾸는 폭력적 훼손에 다름 아니며 2악장에서 윤리의 가능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페티시즘적 부인도 사실은 우리가 이미 긍정하고 있는 가치들이 관념적인 것들임을 겨냥하고 직립보행이나 바타유의 '유물론'에서 이끌어나온 새로인 유물론적 윤리들을 정초하기 위한 희생물로써 쏘는 총알인 것이다.(즉, 여기서 페티시즘 부인이 기능하는 것은 지금 이 책이 서론처럼 제시한 유물론적 윤리학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불가능성'으로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혹은 긍정하고 있는 것을 의문시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 불가능성이 진정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가능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을 최대한 가능성의 범주에 넣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어떤 새로운 출발점을 찾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고정된 한 점이 아닌 우연히 발견된 한 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뭔가 하나를 쥔 것 같더라도 어느새 아래로 새어버리는 모래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불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끊임없이 독자를 헤엄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 파도를 일으킨다. 사유의 헤엄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익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해답자'이기 보다는 영원히 '질문자'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에 뭔가 하나의 고정된 해답이란 사유의 죽음과도 같다. 불가능성을 늘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저 원시시대 번갯불만 번쩍여도 신에게 기도하던 원시인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서의 겸손이란 어떤 권위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든 추구할 뿐...'이라는 정도의 겸손이다.  근데 이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문득 나는 '번역자인 그'를 느끼게 된다. 

    불가능성과 더불어 번역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다. 여기서 번역은 굳이 다른 나라말을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 말을 자기네 말로 바꾸는 것이 번역인 것처럼 다른 이의 사유를 자기의 사유로 소화하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 역시도 그 모두가 아주 많은 책들에 대한 독서 기록인 셈이며 그 많은 책들을 저자가 서로 합종연횡시켜여 재창출한 사유의 전시장인 셈이다. 그렇게 번역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한 글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음미하는 9악장,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게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p.368)

     이 '진심을 다하는 것'. 이것이 항상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자의 겸손이지 않을까. 

   아마도 이 겸손 때문에 그렇게 그 진심을 다하기 때문에 그의 문체는 상당히 길고 때로는 무수한 반문들이 부기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는 특이하리만큼 길다. 길게 길게 이어지는 문체들은 '악보'라는 제목에다 '작곡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어쩐지 선율로 들릴 지경이다. 내게는 문장이라기 보다는 글의 흐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단정적이어도 좋을 문장에 굳이 길게 길게 그 사유의 흔적들을 보태는 것일까? 거기다 보통의 인문서들은 스스로 객관적이기 위해 저자를 굳이 감추려 드는데 그는 자주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주 '일독을 권한다.'라는 말을 보게 된다. 서곡에서 이 책이 역병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들을 감염시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왜 이렇게 드러내는가?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가? (...) 소설가와 비평가라는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편화에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숙명에 있어서는 저 두 정체성이 각기 자신만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진실성의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 소설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며 반면 비평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인 것, 말하자면 이것이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이다. (p.483)

    나는 이 말을 과연 저자가 부정적으로 했는지 긍정적으로 했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알려고 몇번을 읽었는데도 정확한 의도를 짚어낼 수 없었다. 아무튼 아마도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서 보듯이 근대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반발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 반발만을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결국 이것이 저술에 대한 일종의 한 태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에서 글렌 굴드에게서 보여지듯이 말이다.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를 실현하려면'이라는 구절이다. (...) 그는 결국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피아노로 '실연'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p.195)

   아마도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 역시도 글렌 굴드가 그랬던 것 처럼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사유를 실연했던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결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하는 그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그래서 문체는 끊임없이 자문과 질문이 혼용되어 이어지고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그토록 이채로운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재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음으로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유들은 내가 확실히 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고 궁극에 가서는 허물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나가 아니고 내가 딛고 서 있던 것으로 구성되어진 인위적인 인격체라고 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그 가상현실을 빠져나오려고 자발적으로 빨간약을 먹었듯이 그 인위적으로 조합된 환경과 인격이라는 '나'에서 빠져나와 '근원의 나', '바깥의 나', 그렇게 '부재하는 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을까? 사실 부재란 것도 알고보면 그저 부재인 것 만은 아니다. 부재는 오히려 바깥에서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재의 성격은 오히려 음악에서 더 두드러진다. 사실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음과 음 사이의 '부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악보에 음표와 음표 사이 비어있는 공간이 있듯이. 때문에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존재 그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바로 이런 사유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책이다. 적극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안고 가려는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 많은 불가능성의 현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앞서도 말했듯 이제 새로이 자신만의 사유를 이어가기 위한 단초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유의 연주는 오로지 독자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더하여 여기서는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렵고 난해하지만 꾸준히 숙독을 하면 길고 불가하해하고 파편적인 맥락들 위로 이 모든 사유를 이어감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고 있는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 역시 이 책을 통해 하나의 연주를 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나는 기나긴 그의 문장들이 일종의 선율 같았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음대 교수가 강의실에 들아와 베토벤의 소나타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왜 마돈나의 노래가 더 신나게 들리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리듬. 팝과는 달리 클래식에는 리듬이 없기 때문에 난해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그처럼 아마도 이렇게 긴 선율로만 이루어진 연주이기에 난해하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클래식도 처음만 어렵지 자주 듣고 또 공부도 하면 언젠가는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이 애저녁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어떨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클래식 CD를 듣듯이 펼쳐보는 것도. 아니 읽기가 어렵다면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이 책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웅변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특히 직립보행이나 '자코토의 고유명' 그리고 '파국의 해석학'은 너무도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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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는 내내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저는 헤르메스님의 이 글 덕분에 한 사람의 저자로서 온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혹은,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불가능성을 넘어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의 어떤 다른 '가능성', 다른 변주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과 의의를 이렇게 잘 정리하고 평가한 글은, 제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저는 사실 제 책에 대한 일종의 '매뉴얼'적인 성격의 작은 글을 하나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헤르메스님께서 가장 훌륭한 '매뉴얼'을, 그것도 가장 훌륭한 또 다른 변주곡을 써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는 내내 매 문단들마다 소리 내어 감탄사를 연발했고,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잔잔한 흥분과 감동이 몰려 왔습니다. 그 점에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저 소설가와 비평가의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제 개인적 정리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 안에는 어떤 부정성의 느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저로서는 그 자체가 자기고백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그러므로 그러한 정리 안에는 긍정적인 단정의 요소가 다분히 내재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관한 헤르메스님의 분석을 읽었을 때 저는 제가 피분석자가 된 진료실에서 제 무의식의 일단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온전히 이해되었다는' 느낌(비록 이것이 하나의 '환상'일지라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제게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어떤 행복 같은 경험이었음을, 역시나 자기고백적으로, 그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을 따라 읽어주신 섬세한 분석에, 때로는 그 결이 담고 있는 것 이상을 추출하면서 새롭게 내주신 독해의 길에, 새삼 깊이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ICE-9 2011-05-0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자이신 람혼님께서 이렇게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거기다 부족한 글에 이렇게 과분한 칭찬까지 해주셔서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제가 의문으로 가졌던 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람혼님의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깨닫게 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인문학 읽기에 대한 열망도 생겨났구요. 오히려 이런 각성의 기회를 주신 람혼님께 제가 되려 감사를 드려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로 더더욱 많이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