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의 제목 '헤븐'은 소설 속에서 고지마가 '헤븐'을 보여주겠다며 주인공을 데리고 간 미술관에서 고지마가 보여주는 그림의 제목이다. 사실 그림의 진짜 제목은 아니고(진짜 제목은 나오지 않는다.) 그 제목이 너무 밋밋하다며 고지마가 멋대로 붙인 제목이지만. 아무튼 그 그림 '헤븐'을 묘사한 걸 읽고 보니 그 그림이 진짜는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 샤갈의 1915년작 '생일'이라는 그림이었다.

  

    1915년 당시 샤갈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벨라와 결혼했고 그 기쁨 때문인지 계속해서 결혼을 주제로 한 연작을 내어놓고 있었다. 이 그림은 당시는 연인 관계였던 벨라가 샤갈의 생일날 서프라이즈를 위해 찾아갔을 때의 정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중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두 연인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뜻하지 않은 연인의 축하를 받은 샤갈은 그야말로 더 높이 붕붕 떠다닌다. 

     이 그림을 두고 고지마는 이렇게 말한다.

   그 연인들에게는 말이야, 아주 힘든 일이 있었어. 아주 슬픈 일이 있었거든. 굉장히. 그렇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은 최고의 행복 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야. 둘이 극복하고 도달한,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 방이 사실은 헤븐인거야. (P.62)

     진짜 그림이 어떻게 해서 그려졌나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고지마는 자기식대로 그림을 해석한다. 그녀가 이러는 것은 이 그림 속에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현재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 '공해' 같은 별명으로 불리며 등으로 발길질마저 예사로 당하는 등, 온갖 괴롭힘을 다 당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 모든 고통들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잘 이겨나가면 언젠가는 저 그림 처럼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그림 '헤븐'은 고지마에게 고통의 이유이자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런 고지마와 같이 그림을 보고 있는 주인공 역시도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날마다 뒤통수를 세게 맞거나 학교를 결석하기만 해도 책상 서랍이 오물로 가득찬다거나 분필을 억지로 삼키거나 걸레를 입에 물거나 청소도구함에 갇히거나 하는 온갖 괴롭힘을 날마다 당하고 있다. 주인공 역시도 고지마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주인공은 고지마와는 달리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 그냥 어서 이 모든 괴롭힘들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고지마와 주인공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은 바로 고통의 원인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고통을 당하는 건 태어날 때 부터 사시였기 때문이다. 즉, 그건 자기와 상관없이 주어진 제약 때문에 받게 된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지마는 엄마가 버린 아빠를 잊지 않으려고 초라하고 궁색하게 사는 아빠의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즉 고지마가 현재 당하고 있는 고통은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이 차이, 즉 고통의 원인이 외부로 부터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초래한 것인지의 차이에 따라 고통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소설 '헤븐'은 그렇게 고통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이다.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이러한 소설의 모습이 그리 생경한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우리 인간들은 주어진 고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다. 아마도 그것이 잘 드러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의 '욥기'라 할 것이다. '욥기'는 그야말로 이유없이 주어지는 고통에 대해 그 까닭을 알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중세 이후로 고통은 철학과 신학 전반을 아우르는 사유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었던 중세인들에게 고통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고통은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니 '악'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주재하지는 이 세계에 그런 '악'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요한 의문이었다. 성경에서도 중세인들에게서도 그리고 근대에 있어서도 고통은 세상의 주권자라는 하나님과 어긋나는 모순된 존재였다. 그래서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하나님과 고통의 존재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일련의 흐름들을 '변신론'이라고 불렀다. 즉, 고통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변호하는 논의들이라는 것이다. 

    변신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가 둘 있는데 하나는 라이프니츠고 다른 하나는 칸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또 소설 속의 주인공과 고지마의 입장과도 겹친다. 라이프니츠는 고통은 이 세상이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고통이 악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고통은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 따르는 잔여이고 오히려 고통이 없다면 존재는 제대로 존재할 수 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그저 현상되는 고통을 긍정하고 그저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과 유사하다. 이에 반해 칸트는 '요청론'을 끌어들인다. 즉 우리가 고통의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견디면 언젠가는 보상이 따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칸트는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의 진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통 끝에 도달하는 천국을 그것에 보상을 주는 신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그림 '헤븐'을 보며 보상의 희망 속에 고통을 인내하는 고지마와 겹친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은 유신론이라는 가정하에서 내려진 것이다. 신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에 고통 역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에서 내려진 견해들이다. 그렇다면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무신론이라면 어떨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는 무신론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고 모든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무신론 아래에선 모든 사물은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도 그 어떤 의도도 이유도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따라서 고통 역시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당하는 존재는 하필이면 그 공간 그 시간에 우연히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장과 겹친다. 우리는 이 무신론적 입장을 바로 '모모세'에게서 보게 될 것이다.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모모세에게 주인공은 왜 자기를 그토록 괴롭히냐고? 그러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느냐고 묻는다. 모모세는 주인공이 당하는 고통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며 물론 양심의 가책 또한 전혀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고지마로 부터 고양되었던 고통에 대한 의미에 대해 기울어져 있는 주인공은 모모세에게 그야말로 굉장한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면 그 때 주인공은 인간 축구공이 되어 무수한 발길질을 당하는 학대를 경험한 후 그 인내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이상 무의미하게 쏟아지는 폭력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한 편 이 모든 고통에 이유가 있다는 고지마를 믿고 싶어했다. 그건 오히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을 만큼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모모세는 그 모든 게 다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또 묘하게 고지마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그는 정확히 모모세의 세계와 고지마의 세계 중간에 있게 된다. 

     우연한 일치인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소설은 고통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세 가지 입장을 한 인물에 대입하여 하나하나 보여준다. 이러한 '인물적 형상화'를 통해서 우리는 고통의 의미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들을 좀 더 가깝게 살펴볼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이 소설의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하는... 

     주인공과 고지마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는 점 뿐만아니고 그 가족관계마저 어쩐지 유사하다. 주인공은 엄마가 없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건 새엄마다. 한 편 고지마는 아빠가 새아빠다. 둘 다 어느 한  쪽이 부재한다. 이에 더하여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 얼마든지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것도 비슷하다. 주인공은 후에 사시가 수술 가능한 것임을 알고 놀란다. 그것도 너무도 손쉽게. 고지마는 언제든지 스스로 몸을 씻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그들 모두에게 고통이 숙명적이 아니라는 것이 똑같다. 이 둘의 이러한 비슷함은 가와카미 미에코가 고통의 의미에 대한 입장과는 또달리 고통을 대하는 어떤 자세 같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둘은 아주 비슷한데도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만큼은 또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적극적으로 고통을 껴안으려 하지만 주인공은 어떡하든 그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그 둘의 관계는 눈 수술로 파국을 맞는다. 고지마와 주인공이 마지막 만나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고지마는 주인공에게 고통을 당하는 의미에 말하면서 사실은 그들이 주인공과 고지마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옳았음을 스스로 주인공에게 보여준다. 그렇게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지메란 다름이 아니라 무리에 들지 않으려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폭력이라는 걸 이 장면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결국 고지마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스스로 괴물이 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러지 못한다. 고지마 처럼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지마는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이지메로 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은 애초에는 포기했던 가능성이 조금 빛을 발하자마자 얼른 그것을 부여잡는다. 그렇게 그에겐 오로지 회피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가와카미 미에코가 손을 들어주는 것은 '모모세'쪽이다. 그토록 무겁게 고통을 천착해왔던 것과는 달리 결말은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로 낙관적으로 끝맺는다. 주인공은 눈수술을 감행했고 결국 제대로 된 시야로 보는 세상은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수술 전 의사와의  상담에서 의사는 수술을 가볍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냥 조금 바꾸는 정도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사실 주인공은 그 전에도 수술을 받았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돌팔이가 그 수술을 맡았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고 그 돌팔이의 말로 더이상의 수술을 불가능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 계속 고통의 굴레를 둘러써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는 생각한다. 만일 제대로 된 의사를 만났더라면 지금까지의 고통은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거라고... 이런 생각은 모든 건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일 뿐이며 고통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모모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니 가볍게 생각하라고. 모든 건 언제든지 변한다. 내일엔 내일의 바람이 부니까... 이런 속삭임이 저절로 들려오는 듯한 이 소설의 결말은 어쩌면 가와카미 미에코가 그래도 어떤 희망적인 것을 가지게 해 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지 싶다. 

       하지만 그 눈부신 세상 속 어딘가 고지마가 분명 존재한다. 아빠를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통의 굴레를 둘러쓰고 살아가는 존재가. 생각해보면 주인공에게 '사시'의 존재도 그랬다. 그것은 엄마로 부터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가 눈수술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엄마와 단절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지마는 아빠를 간직하기 위해 고통을 껴안았지만 주인공은 엄마와 단절하면서까지 고통을 회피했다. 고집스럽게 껴안으려는 자와 바람처럼 가볍게 떠나버리는 자가, 절대로 엄마를 용서할 수 없는 고지마의 고집과 별로 정든 사이도 아니지만 새엄마 곁에 있으려는 변화의 주인공이, 그렇게 뚜렷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이걸 '고집과 변화의 문제'로 풀어 변화를 택하는 쪽으로 조금은 성급하게 결론내린 것 같지만 과연 그런 정도로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일 것이다. 문제는 고지마의 존재다. 그 눈부시도록 환한 세상에 끝끝내 하나의 검은 얼룩으로 남으려는 고지마의 존재다. 이걸 어떻게 대해야할까? 끝없이 우리의 시선 속에서 스스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존재를 어떻게 붙들어야할까? 여전히 그렇게 책을 덮은 후에도 의문은 계속된다. 지금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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