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별 보기가 힘들어진 시절이다. '요즘'이라고 쓰려했으나 그 기간이 아주 오래된 것 같기에 '시절'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 한동안 품었던 의심이 하나 있었다. 늘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로 인해 이렇게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혹시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자본주의에서 발현된 제국주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식욕과 모든 것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가 오로지 자기만이 완결된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즉,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밤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낭만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매개물로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선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가능성의 상징인 것이다. 체제의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이 체제의 외곽에서, 그렇게 바깥에서 다시금 그 체제를 돌이켜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로서의 '별들'이다. 고개만 올려 보면 늘 거기 있는 별들은 가장 손쉽게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하나의 '객체'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건 '민족주의'를 만들면서까지 체제내의 노동력과 그로부터의 이윤을 끝없이 빨아들여야했을 자본주의로서는 그 '손쉬움' 때문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흡혈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의 사람들이 오로지 이 체제가 '종국적인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 '워터십 타운의 열 한마리의 토끼'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처럼 그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늘 토끼들을 식재료로 쓸 수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아마도, 어쩌면 틀림없이, 자본주의는 도시의 빛으로 장벽을 쳐서 별들의 존재를 가려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도록. 그렇게 자신의 삶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오로지 이 체제의 규율만이, 그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의 전부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제 자연적으로 이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졌다. 도시는 끊임없이 빛으로, 콘크리트로 그러한 사유를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존재들을 퇴출시키고 있다.  해서 우리는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 처럼 활자를 통해 '그 너머' 혹은 '여기의 바깥'을 사유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다른 가능한 방법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별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깥'을 사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내부'에서만 가지고는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내가 속한 이 내부란 것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태어난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위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은 특정한 의도에 따라서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엔 그 의도에 봉사토록 하는 이데올로기가 은밀하지만 필연적으로 끼어든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그 내부에서 나 자신을 보려해도 이미 작동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밖에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누가 내게 씌워준 누군가의 시력에 맞춘 안경을 가지고 사물을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가지고 있는 욕망 등등은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을 우리는 어쩌면 오로지 남(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와도 같은)의 욕망을 채우려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에 '바깥'의 사유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진정한 모습은 '안'과 '바깥'을 모조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온전히 파악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이것은 다만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혹시 우리가 리처드 애덤스 소설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  

   해서, 어쩌면 절박한 심정으로 그 사유의 계기를 찾고 싶은 요즘, 불현듯 한 권의 책이 '역병'처럼 번지둣 내게로 왔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사유의 악보'이다. 이 책은 인문서로 나왔지만 스스로 인문서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저자 자신의 서문이라 할 만한 서곡을 읽어보면 널리 이해되는 것도 거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유일하게 이해할 '소수'를 위해 메뉴얼, 그렇게 그들을 위한 '악보'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악보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로 표현된 범위 안에서 모든 주관적인 해석들을 허용한다. 그건은 마치 정해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갯수를 가지고 무수한 글자들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여기 내가 몇 개의 악보들처럼 기보하는 이러한 '사유'의 조각들은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여 새롭게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펼쳐져있고 흩뿌려져 있다.(p.8)

   그렇게 이 책은 널리 다양한 해석을 권장하고 새롭게 다양하게 창출된 의미들이 널리 창궐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종국엔 보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는 것일까? 이건 다음의 글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 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으로 실천적인 질문으로 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p.7) 

    여기에서 보듯이 이 책 자체가 그러한 사유의 강요로 부터 이탈하기 위한 실천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근원이 이러했으니, 어떻게 독자에게 그러한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 책은 스스로,관람되기를 원하는 일종의 유물전시장에 그치기를 원한다. 그저 관람객들이 와서 살펴보고 개인적 감상만을 가지고 갈 뿐인 그런 전시장. 그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볼 수 있도록 늘어놓을 뿐. 혹 개안이라도 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진심으로 행복해 하면서...  나는 여기서 일부러 '유물전시장'이란 비유를 썼는데 그것은 다음의 말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그 새로운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유의 가동'으로부터 출발된다는, 일견 신선해보이지만 또한 지극히 오래된 어떤 믿음, 내가 나의 글쓰기로써 도전하고 도발하고 싶었던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 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p.8)

   그렇게 이 책은 일부러 과거의 잔재들을 훑는다. 왜냐하면 이 책이 의문시하는 것은 과거와 새로움을 나누는 그 '사고' 자체이기 때문이다. '3악장,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 알튀세르가 했던 것, 혹은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분배' 나 바디우의 '비미학'에서 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게 혹은 전형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사유의 체계들을 의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책이 일관된 논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통념에도 반대한다. 그렇게 스스로 마땅히 기형과 잡종의 파편이 된다. 

   이 책은 조각난 육체들이다. 그렇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무런 접점을 만들지 않는다.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에서 종곡, 중독에의 권유까지, 그렇게 저자 자신의 말대로 이 책은 그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리 만큼  내용적으로 독립적이다. 게다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글쓰기가 변주되고 있다. 특히나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경우 '거리에 붙어 있던 한 벽보: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겨 적기'에서의 뛰어쓰기의 실종이나 '발전기를 돌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밤: 헤어스탈일에 관한 자기 성찰의 단상'의 마침표의 생략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그렇게 이 책들은 '자고로, 책은, 글은 이래 저래야 한다는'등의 통념들을 한없이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그래서 얼른 이 책들은 아이 앞에 무수히 쏟아져 있는 레고 블럭과도 같아 보인다. 아마도 아이는 그 무수한 조각들 앞에서 당황할 터이지만 언젠가는 - 왜냐면 아무리 무수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조각을 이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힘드므로. '테트리스'게임이 정확히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듯이 우리 인간이란 아무래도 혼돈 보다는 질서를 좋아하므로 - 하나하나 조각을 이어붙이고 연결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결국은 나도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물론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오독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어차피 오독의 가능성을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상관없지 않을까. 

   내가 짓고 있는 혹은 연주하고 있는 어떤 조형이나 선율의 바탕은 하나의 느낌인데 이 책만큼 집요하게 그 어디서든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책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혼돈 보다는 질서를 원하는데, 이 책은 오히려 계속적으로 질서에다 균열을 만들고 가능성의 영역을 불가능성의 구멍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블랙홀'.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와 2악장 '페티시즘과 불가능성의 윤리'에서는 윤리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3악장,'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는 알튀세의 연극 비평을 중심으로 미학 역시 그 진정성은 불가능성의 영역 위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에서는 야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중심으로 책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해 이사만루 상황에서 무타무주로 끝내는 방법의 불가능성을 지나 근대비평에의 불가능성에로까지 나아간다. 이 뒤로도 우리는 그 어디서든 끊임없이 불가능성의 영역들을 볼 수 있는데, 스스로 기형과 잡종의 조각들로 자처하는 이 책이 왜 이다지도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호기심이 나 스스로 블록 짓기를 감행하게 했는데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은 이 불가능성이 내포하고 있는 저의가 혹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 자신이 언급했던 것 처럼, 혹시  모조리 전복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1악장에서 그가 바타유를 끌어와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 때 우리가 모든 사회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았듯이 그렇게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기 위해서였고 2악장에서 굳이 페티시즘을 이끌고 오는 것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모든 가치들 역시도 사실은 우리가 그 가치들을 맹목적인 페티시즘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바타유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소통이란 타자를 우리의 입장에 맞도로 바꾸는 폭력적 훼손에 다름 아니며 2악장에서 윤리의 가능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페티시즘적 부인도 사실은 우리가 이미 긍정하고 있는 가치들이 관념적인 것들임을 겨냥하고 직립보행이나 바타유의 '유물론'에서 이끌어나온 새로인 유물론적 윤리들을 정초하기 위한 희생물로써 쏘는 총알인 것이다.(즉, 여기서 페티시즘 부인이 기능하는 것은 지금 이 책이 서론처럼 제시한 유물론적 윤리학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불가능성'으로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혹은 긍정하고 있는 것을 의문시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 불가능성이 진정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가능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을 최대한 가능성의 범주에 넣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어떤 새로운 출발점을 찾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고정된 한 점이 아닌 우연히 발견된 한 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뭔가 하나를 쥔 것 같더라도 어느새 아래로 새어버리는 모래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불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끊임없이 독자를 헤엄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 파도를 일으킨다. 사유의 헤엄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익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해답자'이기 보다는 영원히 '질문자'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에 뭔가 하나의 고정된 해답이란 사유의 죽음과도 같다. 불가능성을 늘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저 원시시대 번갯불만 번쩍여도 신에게 기도하던 원시인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서의 겸손이란 어떤 권위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든 추구할 뿐...'이라는 정도의 겸손이다.  근데 이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문득 나는 '번역자인 그'를 느끼게 된다. 

    불가능성과 더불어 번역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다. 여기서 번역은 굳이 다른 나라말을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 말을 자기네 말로 바꾸는 것이 번역인 것처럼 다른 이의 사유를 자기의 사유로 소화하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 역시도 그 모두가 아주 많은 책들에 대한 독서 기록인 셈이며 그 많은 책들을 저자가 서로 합종연횡시켜여 재창출한 사유의 전시장인 셈이다. 그렇게 번역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한 글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음미하는 9악장,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게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p.368)

     이 '진심을 다하는 것'. 이것이 항상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자의 겸손이지 않을까. 

   아마도 이 겸손 때문에 그렇게 그 진심을 다하기 때문에 그의 문체는 상당히 길고 때로는 무수한 반문들이 부기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는 특이하리만큼 길다. 길게 길게 이어지는 문체들은 '악보'라는 제목에다 '작곡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어쩐지 선율로 들릴 지경이다. 내게는 문장이라기 보다는 글의 흐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단정적이어도 좋을 문장에 굳이 길게 길게 그 사유의 흔적들을 보태는 것일까? 거기다 보통의 인문서들은 스스로 객관적이기 위해 저자를 굳이 감추려 드는데 그는 자주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주 '일독을 권한다.'라는 말을 보게 된다. 서곡에서 이 책이 역병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들을 감염시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왜 이렇게 드러내는가?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가? (...) 소설가와 비평가라는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편화에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숙명에 있어서는 저 두 정체성이 각기 자신만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진실성의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 소설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며 반면 비평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인 것, 말하자면 이것이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이다. (p.483)

    나는 이 말을 과연 저자가 부정적으로 했는지 긍정적으로 했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알려고 몇번을 읽었는데도 정확한 의도를 짚어낼 수 없었다. 아무튼 아마도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서 보듯이 근대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반발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 반발만을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결국 이것이 저술에 대한 일종의 한 태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에서 글렌 굴드에게서 보여지듯이 말이다.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를 실현하려면'이라는 구절이다. (...) 그는 결국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피아노로 '실연'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p.195)

   아마도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 역시도 글렌 굴드가 그랬던 것 처럼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사유를 실연했던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결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하는 그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그래서 문체는 끊임없이 자문과 질문이 혼용되어 이어지고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그토록 이채로운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재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음으로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유들은 내가 확실히 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고 궁극에 가서는 허물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나가 아니고 내가 딛고 서 있던 것으로 구성되어진 인위적인 인격체라고 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그 가상현실을 빠져나오려고 자발적으로 빨간약을 먹었듯이 그 인위적으로 조합된 환경과 인격이라는 '나'에서 빠져나와 '근원의 나', '바깥의 나', 그렇게 '부재하는 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을까? 사실 부재란 것도 알고보면 그저 부재인 것 만은 아니다. 부재는 오히려 바깥에서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재의 성격은 오히려 음악에서 더 두드러진다. 사실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음과 음 사이의 '부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악보에 음표와 음표 사이 비어있는 공간이 있듯이. 때문에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존재 그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바로 이런 사유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책이다. 적극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안고 가려는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 많은 불가능성의 현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앞서도 말했듯 이제 새로이 자신만의 사유를 이어가기 위한 단초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유의 연주는 오로지 독자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더하여 여기서는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렵고 난해하지만 꾸준히 숙독을 하면 길고 불가하해하고 파편적인 맥락들 위로 이 모든 사유를 이어감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고 있는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 역시 이 책을 통해 하나의 연주를 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나는 기나긴 그의 문장들이 일종의 선율 같았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음대 교수가 강의실에 들아와 베토벤의 소나타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왜 마돈나의 노래가 더 신나게 들리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리듬. 팝과는 달리 클래식에는 리듬이 없기 때문에 난해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그처럼 아마도 이렇게 긴 선율로만 이루어진 연주이기에 난해하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클래식도 처음만 어렵지 자주 듣고 또 공부도 하면 언젠가는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이 애저녁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어떨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클래식 CD를 듣듯이 펼쳐보는 것도. 아니 읽기가 어렵다면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이 책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웅변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특히 직립보행이나 '자코토의 고유명' 그리고 '파국의 해석학'은 너무도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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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는 내내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저는 헤르메스님의 이 글 덕분에 한 사람의 저자로서 온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혹은,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불가능성을 넘어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의 어떤 다른 '가능성', 다른 변주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과 의의를 이렇게 잘 정리하고 평가한 글은, 제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저는 사실 제 책에 대한 일종의 '매뉴얼'적인 성격의 작은 글을 하나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헤르메스님께서 가장 훌륭한 '매뉴얼'을, 그것도 가장 훌륭한 또 다른 변주곡을 써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는 내내 매 문단들마다 소리 내어 감탄사를 연발했고,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잔잔한 흥분과 감동이 몰려 왔습니다. 그 점에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저 소설가와 비평가의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제 개인적 정리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 안에는 어떤 부정성의 느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저로서는 그 자체가 자기고백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그러므로 그러한 정리 안에는 긍정적인 단정의 요소가 다분히 내재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관한 헤르메스님의 분석을 읽었을 때 저는 제가 피분석자가 된 진료실에서 제 무의식의 일단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온전히 이해되었다는' 느낌(비록 이것이 하나의 '환상'일지라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제게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어떤 행복 같은 경험이었음을, 역시나 자기고백적으로, 그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을 따라 읽어주신 섬세한 분석에, 때로는 그 결이 담고 있는 것 이상을 추출하면서 새롭게 내주신 독해의 길에, 새삼 깊이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ICE-9 2011-05-0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자이신 람혼님께서 이렇게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거기다 부족한 글에 이렇게 과분한 칭찬까지 해주셔서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제가 의문으로 가졌던 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람혼님의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깨닫게 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인문학 읽기에 대한 열망도 생겨났구요. 오히려 이런 각성의 기회를 주신 람혼님께 제가 되려 감사를 드려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로 더더욱 많이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