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이름 모중석 스릴러 클럽 27
루스 뉴먼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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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각해보면, 나도 저 먼 기억 어딘가 그렇게 초록 무성한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누워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한여름의 주말 교정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내 비워진 시간을 그렇게 오롯이 응시로만 채우던 때가 있었다. 
특별히 외롭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내내 얼굴 위로 내리쬐는 뙤약볕이 귀찮았을 뿐...
그나마 너른 광장을 꽉 채워 불어오는 바람이 없었다면 그렇게 구름을 바라보다 일사병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누워서 시간이 하늘에다 점점이 찍어내는 맑고도 투명한 발자국을 바라보면서 문득 삶이 날 얼마나 피로하게 만드는가를 느꼈고 이대로 시간이 흙으로 퇴적되어 날 묻어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스 뉴먼의 ‘일곱 번째 이름’을 읽으면서 문득 기억났던 건 바로 그 여름의 시간이었다. 이 소설이 영국의 유명한 대학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이 소설은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한 스릴러이지만 소설의 꽤 많은 부분이 등장인물들이 대학에서 보내는 일상으로 채워져 있어 비슷한 시기의 어느 여름날 그렇게 온종일 내내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던 그 순간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연상작용이란 얼마나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뻗어나가는 것인지...

봄이라는 계절에 너무도 어울릴만한 화사한 샛노란 표지를 넘기면 그 표지에서 받았던 인상을 완전히 전복시키듯 한 밤 기숙사의 살해 현장으로 우리는 바로 인도된다. 거기 한 여자가 온통 피로 물들어있고 또 한 사람의 남자는 살해된 여자가 쏟아낸 내장을 주워 담고 있다. 표지에서 받았던 인상과는 너무도 다른 잔혹한 현장... 급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에 우리의 뇌리는 잠시 이것을 어떻게 봉합을 해야 하는지 혼돈을 겪게 된다.

 표지와 첫 장면의 뚜렷한 ‘대조’와 그것의 ‘봉합’은 사실 이 소설 전체를 특징짓는 것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 ‘일곱 번째 이름’의 세계 역시도 한여름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죽음을 떠올리는 것처럼 그렇게 대조적인 두 개의 세계 - 계급적으로 차이가 있고 인기의 중심인 한 남자를 향한 소녀의 애틋한 로맨스라는 말하자면 ‘꽃보다 남자’의 세계와 젊은 여대생만을 골라 무참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마의 세계 - 가 봉합되어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설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라고나 할까... 

 
 그렇게 화사한 샛노란 표지가 연상시키는 말랑말랑하면서도 달콤한 그러면서도 언제 그 사랑을 잃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사랑에 서투른 한 소녀의 연애이야기라는 ‘지킬 박사’의 이면에 앞에서는 우정을 말하던 그 친구들이 사실은 뒤에서 배신을 하고 또한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살인마에게 무참하게 살해되는 그러한 감춰진 ‘하이드씨’의 세계가 봉합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정한 규칙 같은 것이 없이 ‘무작위적’으로 드러나기에 읽는 이로 하여금 어느 정도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소설은 글자의 모습(고딕체와 명조체)을 달리하여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회상과 고백의 내용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완전히 혼란을 잠재우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봉합은 ‘문득 떠올린 죽음’ 만큼이나 갑작스럽고 그래서 서툴러 보인다. 그런에 이 거칠고 성긴 봉합은 그대로 이 봉합의 중심에 있다고 여겨지는 주인공 소녀 올리비아 역시도 마찬가지다.

 올리비아는 다중인격자이다. 제목인 ‘일곱 번째 이름’은 바로 올리비아가 가지는 일곱 개의 인격을 말한다. 그녀는 친부모로부터 성적으로 학대당한 끔찍한 과거가 있다. 올리비아는 그러한 학대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일곱 개의 인격을 스스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소설은 이 올리비아가 가진 인격들이 교대로 말을 해 나가는 듯하게 전개된다. 첫 시작에 피로 온통 물들어 있었던 여자가 바로 올리비아였다. 그리고 내장을 집어넣고 있었던 남자는 바로 그가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그녀의 남자 친구 ‘닉’이었다. 출동한 경찰에 둘은 주요한 용의자로서 체포된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인 매튜가 그녀를 담당해 기억을 복원하려 한다. 바로 이 복원의 과정이 주요한 소설의 내용이 된다.

 소설의 대부분은 올리비아가 들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여러모로 부정확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한 올리비아의 부정확하고 때로는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로 봉합하는 역할이 그것을 듣는 ‘매튜’의 역할이다. 그는 올리비아의 고백을 봉합해야 할 뿐 아니라 일곱 개의 인격으로 흩어진 그녀의 영혼 역시 하나로 봉합해야 한다. 그렇게 매튜는 이 소설에서 이중의 역할을 떠안는다. 바로 복원과 봉합의 역할이다.

 여기서 ‘올리비아와 매튜의 관계’는 그대로 ‘일곱 번째 이름’이라는 소설과 그것을 읽는 우리 독자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올리비아가 들려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일곱 번째 이름’이 펼쳐보이는 세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조적이고 파편적인 세계를 우리는 ‘매튜’처럼 하나로 복원하고 봉합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세계는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녀는 다중인격자이고 과거를 감추려들고 기억도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또 온갖 것들이, 왜 이게 소설에 나오는 것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이를테면 타로 점을 보는 장면이나 강신술 장면처럼 별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장면들까지 마구 나오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소설은 아이 앞에 무수하게 쏟아진 레고 블럭 조각 같은 것이다. 매튜는 아이가 그렇게 블록을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듯이 하나의 이야기로 봉합해 나간다. 하지만 정해진 설명서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봉합은 매튜 혼자만의 임의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진실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왜냐면 매튜가 원하는 대로, 오로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욕망에 따라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매튜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의 봉합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매튜의 친구 스티븐 역시도 그가 올리비아에 대해 딴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지속적으로 다그치지 않는가. 그렇게 매튜의 봉합은 그가 보고 싶어 했고 믿고 싶어 했던 올리비아의 모습만을 투영시켜 만들어진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실제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지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엔 이러한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환영이 실재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들이 참 많이도 나온다. 올리비아가 가졌던 닉에 대한 환영, 폴라가 가졌던 닉에 대한 환영, 사람들이 가졌던 롭 맥노튼의 환영(스테로이드 덩어리, 그렇게 아주 마초적인 남자로 여겼던 그는 결국 게이였음이 밝혀진다.), 시네이드가 가졌던 올리비아의 가족에 대한 환영 등등... 거기다 주 무대가 되는 에이리얼 칼리지 자체마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즉, 이들은 환영의 공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이 짙게 투영된 서로에 대한 가상의 환영들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유일하게 해석의 주체, 봉합의 주체 매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대로 매튜의 역할을 이어받는 우리 독자도 역시...  



 환영이 가득한 세계에서 진리란 그저 수사에 불과하다. 

 그렇게 반전이란 것도 사실은 독자가 만들어왔던 해석과 전혀 다른 해석 역시도 가능함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다. 반전은 뒤집어진 사실 자체로 독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는다. 독자들이 진짜 반전에서 충격을 얻는 때는 거기서 나타난 완전히 뒤집어진 해석이 독자 스스로 작품을 차근히 되짚어보니 이미 그것이 작품 속에 나와 있었고 그것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전이란 설득 가능한 또 하나의 해석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석이란 또 무엇인가? 결국은 매튜가 했었던 대로 자신의 욕망을 은밀히 투영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반전이란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그 가능성이 거울이 되어 내 욕망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 구체적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독자는 그 전지적 입장에서 자기가 읽고 있는 텍스트의 세계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그런데 반전은 독자 역시도 그 세계에서 완전한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참여자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발언을 독자가 투영해왔던 자신의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행한다. 반전이 충격적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반전은 그리 강하지 않다. 그것은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세계가 너무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너무 산만하기 때문이다. 반전의 충격은 언제나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세계의 밀도와 관련이 깊다. 그 밀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세계는 구체성을 띄게 되고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독자의 느낌은 더욱 더 배가 된다. 그는 작품을 해석해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더 커진 지배력만큼 아낌없이 투여한다. 이걸 몰입도라고 할 수 있다. 몰입도란 작품 속 세계가 독자 자신의 자의대로 움직이고 있음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게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한 순간에 다른 얼굴을 하면서 자신을 내치기 시작한다. 따라서 독자 자신이 쏟아 부었던 욕망의 크기만큼 아무래도 그 좌절에서 오는 충격은 클 수 밖에 없다. 

 
 펼쳐보이는 세계가 파편화되고 산만하다면 세계에 투여되는 독자의 욕망 역시 그 파편만큼 흩어지기 쉽다. 더구나 매튜가 그랬듯이 봉합의 과정 역시 얼기설기 서투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반전이 주는 충격 역시 그만큼 적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 소설은 다중인격이란 익숙한 소재마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은 나름의 전개도를 몇 개정도 가지고 읽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품이 그 전개도 중 하나와 맞아버리면 식상한 것이 되고 만다. 솔직히 이 소설은 이런 약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토록 산만한 전개에 맞춰 생각해보면, 이 소설은 그야말로 독자가 작품에 대해 행하는 봉합 다른 말로 구성적 해석이 얼마나 자의적일 수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산만할수록 자의의 여지는 넓어지고 그것은 곧 작품이 내놓은 결말마저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나 역시 소설의 결말이 진짜 결말이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환영의 놀이인 셈이고, 놀이의 술래는 자기가 잡고 싶은 대상을 잡을 권리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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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절망이 잉태한 소설....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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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1 - 외부에서...

 1967년... 

 그 해, 미국은 인구가 2억명을 넘었고 비틀즈가 미국을 휩쓸었으며... 

 새로운 세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와 마이클 니콜스 감독의 영화 '졸업'이 개봉되었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 있어 1967년은 바람의 방향이 새롭게 바뀌는 시점이었다. 

 폴 오스터의 신작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이 196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애덤 워커는 그 해 컬럼비아 대학 2학년생이었고 베트남 전쟁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과 그러한 가운데서도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으로 67년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67년은 미국이 그러했듯 개인인 애덤 워커에게도 완전히 삶의 방향을 바꾸는 한 해가 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쓴 폴 오스터도 그 해 대학 2학년이었다. 그리고 워커 처럼 컬럼비아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애덤 워커는 바로 폴 오스터 자신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같은 생각은 그의 전작 '기록실로의 여행' 때문에 더욱 확고해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기록실로의 여행'은 바로 폴 오스터가 자신의 창작적 여정을 회고하는 자전적 성격이 강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 작품에서 부터 폴 오스터의 자전적 성격이 강해지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바로 뒤이은 '어둠 속의 남자' 역시 9.11 이후에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자문자답하는 느낌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 '보이지 않는'도 역시 그러한 흐름에 있는 작품이라 생각된다. '어둠속의 남자' 처럼 스스로가 어떤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 나가는 그런 작품 말이다. 그럼,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어떤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앞서 '기록실로의 여행'에서 부터 그의 자전적 성격이 강해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소설 속에 자신의 모습이 짙게 투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어둠속의 남자'도 '9.11 사태에 직면한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의미'라는 지극히 작가의 개인적인 의문에서 출발한 작품이라고 볼 때 역시 그러한 의미 -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고 있다 - 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 '보이지 않는'은 바로 여기에 질문을 던진다. 즉, 이렇게 작가가 글에 투영되고 있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말해 소설 속에서 화자라는 주체가 드러나야 하는지 감춰져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은 이전의 두 작품에서 스스로를 반영시켜왔던 것에 대한 일종의 성찰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화자라는 주체는, 작가라는 주체는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 자체는 사실 그리 녹록치 않은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본질이 허구 위에 정초되어지는 소설이 가지는 '리얼리티'가 과연 무엇이냐하고도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흔히, 근대 초기의 소설들은 H.G 웰즈의 우주전쟁 같이 수기의 형식을 취하거나 서간문의 형식을 많이 취하곤 했는데 모두 독자로 하여금 지금 읽고 있는 그 글이  진짜 있었던 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소설은 허구를 말하지만 독자에게만은 그것을 진짜로 여기도록 노력해 왔다. 가라타니 고진 같은 학자도 근대문학(그에게 있어 근대문학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의 특성을 리얼리티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 근대의 소설들은 3인칭 객관적 시점을 유지했다고 한다. 고진이 여기서 특별히 화자(시점)를 언급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진실이라 여기게 만드는 데 있어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3인칭 객관적 시점을 근대 소설들이 주로 썼던 이유가 '화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화자가 떡하니 보이게 하면 아무래도 '고정된 한 점이 아니라서 현전성이랄까 깊이 같은 것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말이다. 

 고정된 한 점의 존재가 그런데 어떻게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것일까? 그것은 회화에 있어서 투시도법을 생각하면 간단하다. 시점을 한 곳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림을 그리면 원근법이 생기게 되고 그것은 내가 실제 풍경을 바라볼 때와 비슷해 지고 따라서 마치 내가 진짜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그림은 '사실적'이 된다. 소설이 근대의 발명품이었듯이 이 투시도법 또한 근대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이후의 '주체의 발명'과 더불어 나타났다. 가라타니 고진 역시 근대 소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는 주체의 생산에 있었다고 한다. 

 좀 성긴 논의의 전개이긴 하지만 아무튼 여기에서 어떤 화자를 택한다는 것은 리얼리티와 주체의 문제가 다 연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화자'에다 작가 자신마저 대입시키고 있다. 즉 이 소설에서 어떤 화자를 택한다는 것은, 다른 건 다 차지하고, 작품과 작가가 가지는 거리감이 어느정도인지 나타내는 척도가 된다. 여기서 거리감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정도인데... 소설에선 직접적으로 이렇게 나오고 있다. 제목인 '보이지 않는'이라는 말이 유일하게 나오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것은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고민을 토로한 주인공 워커의 편지를 보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는 작가 친구의 독백하는 부분이다. 

'...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 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2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되었고 이런 자그마한 시점 변화에 따른 거리 덕분에 나는 그 책을 끝낼 수가 있었다.(p.95 ~ 96) 

  이 독백은 워커가 1부에 해당하는 소설 부분을 끝내고 나서 2부를 진행하는 데 있어 맞딱뜨린 글쓰기에 대한 저항과 공포 때문에 못쓰고 있다는 고백으로 나온 것이었다. 워커가 왜 '저항과 공포'를 느꼈는지는 2부를 읽어보면 선명하게 이해된다. 때문에 작가인 친구 '짐'의 '나 자신으로 부터 떨어트릴 필요'와 '공간'을 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짐의 충고는 소설에 작가를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카메라가 온전히 찍고자 하는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 피사체와의 거리두기, PRAXIS가 필요한 것 처럼 작가 역시 적절하게 작품과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짐은 1인칭 시점을 쓰면 내가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왜 1인칭을 쓰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일단 이 의문을 작품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먼저 풀어보려 한다. 

 폴 오스터의 소설 '보이지 않는'은 모두 네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세 부분은 워커가 쓰고 있는 '1967년'이라는 소설이 중심이 되어 각각 계절 '봄'에서 시작해서 '여름'으로 건너가고 결국 '가을'에서 끝난다. 나머지 4장은 일종의 에필로그로, 워커의 친구인 짐이 풀리지 않는 의문을 스스로 풀어가면서 얻게된, 워커가 파리에 있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세실 쥐앵의 일기'로 이 소설은 완전히 끝이 난다. 특이한 것은 워커의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봄, 여름, 가을 모두 시점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봄은 1인칭 여름은 2인칭 가을은 3인칭 이렇게 말이다. 물론 이것은 글쓰기의 저항과 공포를 느끼게 된 워커가 짐의 충고를 따른 결과이기도 하고 그 자신 생명이 다하고 있음을 느꼈기에 일어난 변화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유야 어쨌든 워커의 소설에서 나타난 것만을 가지고 보자면 약간 기묘한 점이 눈에 띈다. 

앞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언급하면서 그가 근대소설이 리얼리티의 확보를 위해서 3인칭 시점을 만들었다고 했는데(물론 그 뒤에 그는 이것의 허구성을 공박한다.) 폴 오스터는 오히려 완전히 정반대의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봄'이 가장 객관적으로 진행되고 2인칭에서 3인칭으로 갈수록 점점 더 주관적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3인칭 시점인 '가을'에 이르면 자의적인 생략과 비약 마저 일어난다. 그건 '문학적 형상화'에서도 역시 그러한데, 1인칭 시점인 '봄'이 가장 전통적 의미의 '소설'에 가깝다면 시점이 멀어질수록 그렇게 작가가 거리를 두면 둘수록, 점점 덜 소설적이 되어가는 게 느껴지고 그렇게 3인칭인 '가을'에 이르면 일종의 '초안'의 형태를 띠기에 이른다. 더우기 소설의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건 세실 쥐앵의 아주 개인적인 '일기'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묘하게도 작가의 개입 정도와 작품이 가지는 자의적인 정도가 일종의 반비례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즉, 작가가 가장 많이 개입하는, 그렇게 완전히 화자가 작가의 아바타가 되어 움직이는 '봄'은 가장 객관적인 묘사를 하는데 작가가 거리를 두면 둘수록, 그렇게 점점 더 시점이 객관화되어 갈수록 오히려 작가의 자의적 개입이 더욱 더 두드러짐을 보게되는 것이다. 즉, 1인칭 시점에선 작가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데 3인칭에 이르면 작가가 화자를 완전히 압도하고 그의 의도대로 소설이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혹시 이것이 바로 짐이 말한, 1인칭 시점을 쓰면 '나는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라는 것의 이유가 아닐까 싶어진다. 즉, 여기서 질식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는 건 그것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짐은 그 뒤에 그렇게 되니까 자신이 찾는 것을 찾지 못한다고 했다. 이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소설과 연관시켜 보면 짐이 찾고자 했던 것이 일종의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워커가 자전적 고백이라며 쓰고 있는 소설 '1967년'이 과연 진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하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름'의 경우 워커의 친누나 그윈은 그것이 꾸며낸 것이라고 말을 한다. 또한 친구인 짐이 결국 파리까지 가게 되는 것도 바로 워커가 소설에 쓴 내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짐은 고백하기를 거리를 떨어뜨리면 떨어뜨릴수록 진실을 더 찾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그것을 묘하게 비튼다. 보른의 소년 윌리엄스의 살인이라는 사실에만 국한해서 말하자면 오히려 1인칭 시점일 때가 가장 진실이고 2인칭, 3인칭으로 갈수록 그 진위가 의심받게끔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의 워커는 보른의 변명을 듣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 진실인지 의심하게 된다. 그는 짐의 충고대로 3인칭의 거리를 두었지만 여전히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더구나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행동마저 결국은 추방이라는 파국으로 돌아온다. 

 오히려 모든 진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가장 마지막의 '세실 쥐앵의 일기 부분'이다. 쥐앵은 거기서 그 때까지 미궁으로 남아 있었던 자신의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원인이 바로 보른임을 알게된다. 따라서 짐의 말과는 다르게 '보이지 않는' 소설에서는 시점과 진실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여기서 2장에서 부터 마치 간주처럼 삽입되는 짐이 화자가 되는 부분이 모두 '나'라는 1인칭이 되는 것도 주목을 끈다. 소설에서 짐의 부분은 워커의 소설 바깥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독자에게는 모두 진실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들이 작품 내에서 정형화 또는 단일화된 형태로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러두어야겠다. '시점과 작가의 자의성의 정도'이든, '시점과 진리의 관계'이든 그 내부적으로는 또 그것과 정반대의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봄'에서의 워커는 '보른과 마고의 관계'를, 보른이 왜 자신에게 동업 제의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소설은 그래서 스스로 내부에 부정적인 것을 간직하고 있는 소설이다. 그것은 '봄'에서 워커가 자기 이름의 유래를 말하는 것에서 우회적으로 나타나듯이 어떤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혹시 시점의 변화와 다양한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는 역시도 어쩌면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은 이러한 다양한 형식적인 장치를 통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문시 한다. 짐이 워커의 소설을 읽고 그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끊임없이 의문을 가졌던 것 처럼... 폴 오스터는 소설 자체에다 그러한 부정적 계기, 불완전한 진실들을 드리움으로써 의문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윤리적이 된다. 라작은 윤리라는 것이, 개인이 외부로 부터 눈을 돌려 자기 자신에게로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고 한 바 있다. 이렇게 소설 '보이지 않는'이 불확정적인 모호함을 띄는 것은 바로 그러한 외부로 부터의 규정적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고 그렇게 스스로의 정체를 끊임없이 미끌어가도록 만들어 오히려 라작이 말했던 대로 '자기 고유의 본질, 자기 고유의 방법, 자기 고유의 목적이 되도록'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게로 시선을 두기 위함이다. 

 그럼, 왜 폴 오스터는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내부에게로 시선을 던지려 하는가?  그걸 내부에서 바라봄으로서 살펴보려 한다.

    

 PART 2 - 내부에서...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소 형식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는 좀 더 본질적인 부분, 그러니까 폴 오스터는 왜 여기서 작가의 개입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에 대해 생각해 보려한다. 

 

 애시당초 이런 개입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왜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전작 '어둠속의 남자'를 탄생시켰던 9.11 사태 때문인 듯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 

 분명, 폴 오스터는 그 사태를 일으켰던 원인 같은 것을 찾았지 싶다. 모든 고통은 그 원인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과 미국의 역사가 '전환기'라는 점에서 공통으로 교차하는 '1967'년을 기점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가 되기 위한 순수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그렇게 순수한 영혼으로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타협없이 밀고나가는 그러한 청춘의 시절이 폴 오스터에게도 있었을 것이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그는 변해버린 현재의 모습을 생각하며 왜 이렇게 변해버렸나를 반추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와 똑같이 오스터는 미국을 생각했고 1967년의 새로운 바람이 불었던 미국이 어떻게 그 바람이 불기를 그치고 결국은 현재의 비참한 미국이 변해버렸나를 반추해 본다. 

 그렇게 소설 '보이지 않는'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 시절의 순수했던 영혼을, 그렇게 순수했던 역사의 움직임을 포착해보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해서 '보이지 않게' 되었나를 추적해 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현재의 작가(워커의 친구 작가)와 워커가 등장하는 점이 이해된다. 

 그러니까 현재의 작가는 지금의 폴 오스터이고 워커는 1967년의 폴 오스터인 것이다. 사실은 다른 인물로 제시된 짐과 워커는 모두 폴 오스터의 분신인 것이며 짐이 워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변해버린 모습과 그 이유를 반추하는 포착과 추적의 과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던 역사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그 중심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미국의 뉴욕과 프랑스의 파리가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워커는 1967년 대대적으로 불었던 베트남 반전 세대를, 파리의 세실은 1968년 파리의 혁명세대를 상징한다. 워커와 세실은 모두 기성세대에 대한 반란이라는 점에서 묶이는데 그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보른이다. 

 생각해 보면 보른은 그들의 '성'에로의 인도자였고(보른은 워커에게 마고를 세실에게는 워커를 건네준다.) 그의 '살인'으로 워커와 세실을 그의 세계에서 추방한다. 그들은 한 때 보른의 우주에서 일종의 선망을 가지고 섞여들지만 그의 살인과 함께 그 우주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며 결국은 그와 맞써서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된다.(세실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실의 경우 보른의 살인은 그녀가 중년을 훨씬 넘어서 알게된 아버지의 살인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살인의 대상은 바로 워커다. 바로 세실 앞에서 워커가 사라진 것이다. 워커의 사라짐은 결국 워커를 추방한 것이 보른이었다는 걸 볼 때, 세실 입장에서 보자면 워커가 보른에 의해 살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워커는 재입국이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른의 살인이 의미하는 것은 흑인 소년인 윌리엄스를 보른이 살해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베트남 전쟁을 말한다. 따라서 그 살인을 비난하고 그 죗값을 묻기 위한 워커의 행동은 그대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세실 역시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여기에 뚜렷하게 계기가 주어지지 않은 것은 68혁명의 다른 이름이 '상상력 혁명'이라는 말도 있듯이 전쟁이라는 뚜렷한 외부적 계기 없이 자발적으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반발해서 일어난 혁명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성세대인 보른과 그에 반발하는 세대인 워커와 세실은 이렇게 헤겔의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한다. 워커와 세실은 보른에 반대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자의식을 형성하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의해 보른은 언제나 그들에게 쫓겨난다. 하지만 이렇게 보른을 쫓아내는 것은 언제나 '워커' 뿐이다.(파리에서는 다르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워커의 고백으로 인해 보른은 자기가 원했던 여자를 떠나게 된다. 따라서 워커는 결정적으로 보른을 쫓아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건 왜 그럴까? 그건 어쩌면 폴 오스터가 바라본 베트남 반전 세대와 68혁명 세대의 차이 때문은 아닐까? 보른을 쫓아내는 것이 늘 워커라는 점에서 오스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베트남 반전 세대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일까? 그렇게 68혁명이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여기서 68혁명의 한계를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으므로 오스터의 판단 대로 68혁명이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고 넘어가야겠다. 그렇다고 베트남 반전 세대가 68혁명 세대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제대로 파리에서 보른에게 전면전을 불사했던 워커는 결국 보른의 권력에 의해 파리에서 추방당한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는 세실과 그녀의 엄마가 그를 믿지못했기 때문이다. 그건 그의 전략이 너무 치밀하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그는 그저 옳은 것은 어떻게든 승리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추방당한다. 이는 오스터가 가지고 있는 베트남 반전 세대에 대한 시각이 투영된 것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당시 반전 세대가 내세웠던 가치가 오늘날 미국에서 전혀 살아남지 못했으므로(결국 이것이 이 소설을 쓴 동기가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실패로 여긴다.그리고 그 이유를 워커가 보른에게 했던 것 처럼 너무 순진하게 마음만 앞섰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어떤 체계적인 계획이나 대안을 세우지 못했다. 그 반전 세대가 내세울 가치가 지속적으로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도록 자양분을 공급할 그 어떤 것도 마련해 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를 드러내듯이, 워커의 소설 '가을'의 마지막은 추방으로 끝난다. 

 그렇게 해서 W의 골족들이 사는 땅에서의 체류는 끝이 났다. 추방당하고 모욕당하고 평생 재입국할 수 없는 채로. 그는 되돌아 갈 수 없을 것이고, 그들 중 누구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P.257) 

 이 말은 그대로 베트남 반전 세대가 주장했던 가치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사멸해 버렸음을 의미한다. 뒤이어 워커는 이렇게 쓴다. 

 안녕, 마고. 안녕, 세실. 안녕, 엘렌. (이 이름들은 모두다 워커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40년 후, 그들은 이제 유령만큼이나 실체가 없다. 그들은 이제 유령이고 W는 곧 그들 사이에서 거닐게 될 것이다. 

 이렇게 폴 오스터가 바라보는 베트남 반전 세대의 한계는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유령이 되었다. 

 미국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을 그 가치들은... 

 폴 오스터는 9.11의 비극은 바로 그 '1967년의 정신'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이 실체를 가졌다면 부시 정권도 없었을 것이고 9.11의 비극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제 그것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었다. 그 어디서도 그것을 볼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폴 오스터를 상징하는 작가 짐은 워커를 만나지 못한다. 그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죽어버린 뒤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오늘의 비극을 견뎌내기 위해 일종의 레퀴엠으로서 1967년을 다시 불러오고 싶었던 폴 오스터에게 그야말로 절망의 재확인 밖에는 없는 작품이 된다. 

 그는 어쩌면 다시 살아보려(세실이 보른을 다시 만나려 그 섬까지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1967년을 다시 반추하지만 이제 그것은 영원히 사라졌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씁쓸한 체감 뿐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그것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폴 오스터에게는 당연히 그 생각이 일어난다. 소설의 앞 세부분이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1967년을 반추하는 내용이었다면, 마지막 네번째 부분은 바로 그 이유를 추척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특별히 그윈이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다. 

 1967년 뉴욕의 여름, 그윈은 분명 워커와 같은 배를 타고 있었다. 그 둘은 막내의 죽음으로 하나였고(이 막내의 존재는 워커가 그들 부모에게 반항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살해당한 월리엄스와 같다. 소설 '보이지 않는'의 주제 중의 하나는 그 '보이지 않는' 존재가 보이는 존재 보다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윌리엄스가 워커의 일생을 바꾸었듯이 막내 역시 워커를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막내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워커와 그윈은 동일하게 베트남 반전 세대임을 의미한다.)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었다. 그런데 워커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내밀한 고백이 공개된 지금 그윈은 워커의 고백을 부인한다. 

 왜 부인하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워커의 고백이 가진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윈의 현재 모습 때문이다. 우리는 그윈의 고백에서 그녀가 아주 성공적인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게 우리고 보게 되는 것은 그윈이 1967년 그녀가 반발했던 그 기성세대와 똑같은 모습을 가진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워커의 고백은 다시 그 시절로 그녀를 소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그래서 그것을 거부한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을 위한 그녀의 전략이다. 그녀는 짐에게 익명화를 요구한다. 그렇게 해서 그 누구의 역사가 아닌 그저 그런 역사중의 하나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 역사의 '고유치'를 박탈함으로써 보편적 역사로 만드려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그것이 지금의 1967년이 가지는 의미라고 본다. 고유의 얼굴이 사라진 익명의 역사. 그저 묘비만 있는 무덤 처럼 남은 건 다만 기록 뿐 사멸해버린 역사... 현재의 폴 오스터를 상징하는 짐 역시 그윈의 의도대로 워커의 소설을 익명화 해버린다. 이건 오스터의 자포자기적 체념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폴 오스터가 짐작하는 이유가 드러난다. 

 그윈이 변화한 이유... 그것은 그윈이 스스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받아들였고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1967년 뉴욕 시절 부터 그윈은 심정적으로 부모님과 같이 있었다. 그녀는 워커 처럼 완전히 기성세대로 부터 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워커의 파리 이주(워커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의 극대화)이후, 그렇게 워커와 멀어지자마자 그녀는 바로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포섭되어 버린다. 

 짐에게 그윈은 그녀가 워커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같이 있는 것을 자주 보았냐고 묻는다. 짐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그윈은 워커에게서 떠났다. 워커에서 떠난다는 것은 보른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의 세계안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현재의 그윈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그녀의 진입은 성공적이었고 그래서 이제는 워커의 고백을 부담스러하게까지 되었다. 짐도 마찬가지다. 짐이 그윈이 워커의 고백이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 역시 지금 '성공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짐의 얘기는 잘 드러나지 않으나 여러 모로 워커의 삶 보다는 부유하고 안정적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여기서 짐작되는 것은 '보른'과 '짐'과의 유사성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짐은 현재의 폴 오스터다. 그는 자신이 순수했던 젊은 시절 '1967년의 워커'를 통해 이 비극으로 부터 빠져나갈 힘을 얻고자 한다. 때문에 짐은 파리까지 날아가서 워커의 얘기가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할 필요를 느낀다. 워커의 진실을 향한 순수한 투쟁은 오직 진실이라야 그 가치를 가질 수 있고 그래야 짐이 그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짐이 워커를 흡혈귀처럼 착취한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른 역시 짐과 유사한 행위를 보여준다. 즉 소설 '봄'에서는 순수한 젊은 영혼인 워커의 지성을 돈으로 착취하려고 하고 마찬가지로 '세실 쥐앵의 일기'에서의 그녀의 육체를 결혼으로 착취하려 한다.(섬에서 세실을 다시 만난 보른은 중년이 되어버린 세실에게 실망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더이상 젊지 않았기 때문에 그 청춘의 피를 착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짐이든 보른이든 그 근저에 깔려진 욕망은 똑같다. 젊은 영혼으로 부터 피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윈과 짐은 보른과 더불어 하나로 묶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들은 그대로 현재의 폴 오스터를 반영한다. 

 

 그런데 폴 오스터는 마지막에 '세실 쥐앵의 일기'를 덧붙인다. 

 과연 그는 왜 이 일기를 반추이자 추적의 끝부분에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불인 것일까? 이 일기는 소설의 시작인 워커의 '봄'처럼 1인칭이다. 소설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공통점은 이 두 글들을 나란히 놓고 바라보게끔 만든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반추와 추적에 맞추어 보자면, 워커의 '봄'은 1967년의 원초적인 순수를 세실의 일기는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변해버린 순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래서 이것은 1967년의 워커로 부터 변해버린 현재의 폴 오스터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기의 시작 부터 세실은 이미 변해버린 상태에 있다는데 있다. 68혁명 세대인 그녀 역시 짐 처럼 성공적으로 기성 세대로 진입했다. 오스터는 그녀가 짐을 만나고 싶었던 주된 목적이 워커의 이야기 보다 오히려 짐에 대한 설문 조사에 있는게 아닐까 느껴지게끔 서술한다. 이것은 그녀가 워커를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녀는 그런대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워커 뿐이다.)  

 이 세실의 모습은 지금 현재의 폴 오스터의 모습과도 같다. 

 그런데 그녀는 불현듯 보른의 초청을 받는다. 짐이 워커의 소설을 받았듯이... 

 그녀는 보른과 만날 결심을 한다. 이것은 그윈에게 워커의 소설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 과거 순수했던 그 때로의 소환인 것이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응하기로 한다. 그녀는 보른이 상징하는 67년의 그녀에게로 날아간다. 그런데 결국 거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워커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며 보른이 자신의 아버지까지 그 꼴로 만들었다는 확인이다. 그녀는 기겁하며 당장 섬을 떠나려 한다. 마치 쫓겨나듯 짐조차 가지지 못하고 홀로 공항까지의 먼 길을 내려가는 동안에 그녀는 채석장의 돌 깨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일기의 주된 내용이다. 오스터는 왜 이것으로 소설을 끝냈던 것일까? 

 우리가 마지막의 보른의 고백, 그러니까 보른이 세실의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에 주목해 본다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보른의 고백은 바로 9.11 사태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세실은 그 고백을 통해 워커의 말이 진짜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워커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고 살아온, 그렇게 보른의 말이 참이라고 믿고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이 모조리 거짓이라는 것 역시 깨닫는 것이다.(세실은 67년, 워커를 만날 당시에 카산드라시를 번역하려 했던 적이 있다.  카산드라는 아폴로 덕택에 미래에 대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었지만 또한 아폴로의 저주 때문에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사람들이 전혀 믿어주지 않는 예언자다. 아이러니하게도 카산드라를 번역하려까지 했으면서도 세실은 진실을 말하는 워커를 믿지 못한다. 이 역시 68 혁명 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아마도 폴 오스터에게 9.11이 그러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폴 오스터는 미국 전체에게 있어 9.11 사태가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 일기는 현재 폴 오스터의 마음으로 부터의 고백에 다름아니다. 이건 일종의 고해성사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진지하게 회개하는... 

 세실은 고통 속에서 그 긴 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불현듯이 어떤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불모의 땅에서 50~60명의 인부가 돌을 깨고 있는 소리였다. 그들은 스스로 치열하게 돌을 깨고 있었다. 세실은 장엄하기까지한 그 묵묵한 노동의 현장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소설도 끝난다. 

.. 그 소리는 앞으로 나와 늘 함께 있을 것이다. 내 여생동안,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그 소리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있을 것이다.(P.326) 

 대관절 이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한 개인이 묵묵히 이루어나가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소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불모의 땅'이란 말에서 연상되어지는 것은 바로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된 '그라운드 제로'이다. 그 폐허 위에서 다시금 역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망치를 들고 돌을 깨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휘두르는 망치 하나하나가... 

 그들이 치열한 노동의 흔적으로 흘리는 땀방울 하나하나가... 

 그렇게 돌을 깰 때마다 울려퍼지는 소리 하나하나가 다 새로이 역사를 이루는 과정이 될 것이다. 

 세실의 마지막은 이 새로이 쓰여지는 역사적 현장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67년의 그 자신에게로... 그것을 상징하는 워커에게로 다시금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된다. 물론 67년의 그 순수했던 영혼의 모습, 변화를 일으키던 바람은 사라졌다. 그래서 소설의 끝은 재현이 아니라 다시금 불모의 땅을 개간하는 것이 된다. 완전한 무에서 다시 그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소설 '보이지 않는'은 아마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반영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어둠속의 남자'에서 비롯되어진) 9.11 사태로 대표되어지는 현재의 비극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거의 순수했던 그 영혼을, 순간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고백처럼 이미 그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유령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 시도는 또한 그대로 부재의 확인이며 그로 인한 비통의 기록이다.(워커의 얘기를 다시 들은 세실의 울음이 바로 폴 오스터가 이 소설을 쓰면서 보였을 가장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이리라...) 하지만 그 비통 속에서 그는 진심어린 회개를 한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그는 새로운 의지를 되찾는다. 이제 그는 그 의지로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건지려 한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재건의 현장을 통해... 

 그 없음에서 만들어가는 순수한 노동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것을 애도하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망치를 들고 희망을 정초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또한 오늘의 미국을 위한 진혼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이 제목 '보이지 않는' 처럼 이 소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예외가 되는 한 가지를 이 소설에서 틀림없이 보게된다. 그것은 변화를 갈구하는 애처로운 한 영혼임과 동시에 회개를 호소하는 한 영혼의 모습이다. 그리고 다시금 앙다문 입으로 바닥부터 희망을 다져가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는 한 영혼의 모습이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기필코 이 소설에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다 뒤섞인 폴 오스터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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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웃 2011-06-10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의 보이지 않는 리뷰 넘 좋네요. 폴 오스터 작품은 첨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맘에 들었거든요. 이렇게 리뷰 읽으니깐 정리도 되고 제가 미쳐 깨닫지 못한 부분도 알 수 있었고요. 넷상에서도 정독하게 만드는 리뷰! ^^

ICE-9 2013-05-30 13:35   좋아요 0 | URL
아, 노다웃님 정말 감사합니다. 무려 2년도 넘은 댓글이지만 이렇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제가 아무런 말을 안 남길 수가 없네요. 진작 봤으면 좋았을 것을. 언제고 이 댓글을 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제가 감사했음을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시학 펭귄클래식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한식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아리스토텔레시의 '시학'을 읽었다. 

 하지만 '시학'은 제목처럼 시에 대한 학문을 논하는 책은 아니다. 원래의 그리스어 제목은 'POIETIKE'로 가장 뒤의 'KE'는 이른바 기술이라는 뜻의 'TECHNE'의 어미로 원래 제목에 충실하자면 시 제작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모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의 유일한 판본으로 인정받는 BEKKER 판본에 따르면 이 '시학'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BEKKER 판본(이 책 역시 이 판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역시 그러한 체계에 따라 배열되었는데 가장 처음엔 학문을 하는 방법인 'ORGANON'에 속하는 원론적인 논리학적인 작품들이 나오고 그 뒤 자연철학, 생물학 이라든지 형이상학에 관한 이론학에 해당하는 부분이 나오고 그 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같은 실천학에 해당하는 작품이 나온다. 그 뒤 마지막으로 제작기술에 관한 작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 '시학'이다. 

 따라서 그리스 제목이나 BEKKER 판본의 체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학은 시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시를 제작하는 기술에 대한 작품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상한 것 하나를 느끼게 된다. 시에 대한 제작 기술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것은 오로지 서사시와 비극에 관한 것일 뿐, 어쩐일인지 서정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에 서정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7~6세기에 정확히 서정시가 널리 존재했었던 것이다. 당시는 '귀족정'과 평민 사이에 계급적 갈등이 있었던 시기로 따라서 '귀족정'에서 널리 유행하던 서사시는 평민이 각성을 하고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자 점점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는 서정시에게 그 지배적인 위치를 서서히 내어주게 된다. 그 뒤 기원전 5세기 민주정 시대에 와서 비로소 비극이 탄생하게 되는데 그렇게 서정시는 서사시와 비극을 가교하는 역할까지 맡기도 했다.

 이렇게 분명히 서정시는 존재했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것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 바로 이것에서 이 책이 번역본으로 삼고있는 프랑스 역자 뒤퐁록과 랄로는 그래서 사실은 이 아리스토텔레시의 시학이 시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미메시스, 즉 '재현'에 관한 기술만을 다루고 있다고 말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 즉, 서정시는 재현적인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시학의 '전망'속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재현에 의한 거리만이 정화된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는데 우발적으로 그리고 특이한 순간에 포착된 시인의 자아에 초점을 맞추는 서정성은 그러한 거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요컨대 헤로도토스의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서정시에는 허구를 통한 물러섬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학은 서정시를 무시한 것이다. 서정시에는 재현이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p. 30)" 

 이렇게 뒤퐁록과 랄로가 명확히 언급하고 있듯이 시학은 오로지 재현에 관한 것이며 서정시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연대기가 시학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현적인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한 마디로 재현에 관한 것이며 그 방법론에 관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총 26장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제목이 따로 붙여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은 '에소테리카'라고 해서 일종의 강의안 초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 아니라 그가 세운 뤼케이온 학원에서 강의하기 위해 쓴 것이다.(p.578) 따라서 챕터의 구별만 있을 뿐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제목이나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리뷰를 일종의 메뉴얼로 삼아 혹시 뒤에 읽으실 분들이 참고 가능할 수 있도록 그 각 장이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 대략 여기서 정리해 볼까 한다.(물론 뒤퐁록과 랄로는 서문 p.22 에 도표로 이것을 정리해 놓았다. 그것을 참조해도 좋을 것이다.) 

 1장 - 재현을 다루는 예술을 구분한다. 크게 서사시와 비극으로 구분한다. 

 2장, 3장 - 재현의 수단과 대상 그리고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서사시와 비극 그리고 희극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그것들이 어떻게 시작되고 나뉘어졌는지 얘기한다. 

 4장 부터 본격적으로 재현에 대한 얘기가 이루어지고  6장은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챕터중 하나로 드디어 비극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그 비극에 대한 정의와 그 비극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을 소개한다. 그 요소들은 줄거리, 성격, 표현, 사상, 볼거리, 노래 등이다. 7장에서는 그 근본적인 요소들중 뮈토스(줄거리)에 대한 얘기를 한다. 줄거리는 사건들의 조작이며 가장 처음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줄거리는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데 이 기준을 인물로 둘 것이냐 아니면 행위에 둘 것이냐에 의문이 생기는데 그 대답을 이어 8장에서 이야기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현의 동일성은 바로 대상의 동일성이며 행동의 재현인 줄거리는 그래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단일한 행위를 기준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뒤이어 9장에서 그 행위를 중심으로 어떻게 통합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 기준으로서 개연성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바로 그것이 연대기와 '시'의 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학에서 서정시가 제외된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보여주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말이 나온다. 

 "시인이 시인인 것은 재현하기 때문이며 또 재현하는 것이 행동인 만큼 운율 보다는 줄거리를 만들어내는 시인이어야 한다(p.197)" 

 즉, 이 말로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정시를 아예 시로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더하여 개연성과 필연성 외에 재현의 효과적인 측면에서 또 다른 특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장에선 단순한 줄거리와 복잡한 줄거리로 줄거리의 유형화를 시도하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다음장인 11장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인 '급전'과 '발견'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11장이 주로 설명하는 '급전'과 '발견'은 모두 반전에 속하는 것으로 급전은 뒤에 가서 행동의 효과가 완전히 뒤집히는 것을 말하고 발견은 무지에서 앎으로 옮겨가는 행동을 말한다. 10장의 줄거리의 유형화와 관련지어 말해본다면 이 급전과 발견이 존재하는 줄거리가 바로 복잡한 줄거리이고 이런 것이 없는 줄거리는 단순한 줄거리이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는 복잡한 줄거리가 훨씬 고상하고 우월한 줄거리이다. 그런데 복잡한 줄거리에는 또 하나의 요소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격정적 효과이다. 이것은 파괴와 고통을 야기하는 행동을 말한다. 

 11장 까지가 비극이 가지고 있는 내부적인 요소들에 대해 얘기했다면 12장은 바로 비극의 외부적 형식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랄까 연극의 순서 같은 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비극의 외부적 형식은 도입부(프롤로그) - 삽화(에피소드) - 퇴장(엑소더스) -합창(코러스) 이런 순서로 이루어진다. 13장에서는 다시 내부적 요소로 돌아가 두려움과 연민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피해야 할 것들에 대해 말하고 14장에서는 두려움과 연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긍정적 줄거리 구성에 대해 말한다. 

 15장에서는 비극의 다음 요소인 성격 

 16장에서는 발견을 그러다 다시 17장에서는 줄거리에 최대한 일관성을 부여하는 기술적인 방법에 대해 말하다가 18장에서는 그 일관성을 부여하는 대표적 방법 중 하나로 분규와 해결을 들고(모든 비극은 분규와 해결로 이루어져 있다(P.340) 비극에 있어 일관성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서사시와 비교하여 얘기한다. 

 19장에선 개인적으로 가장 난해하다고 여겼던 표현과 사상을 

 그리고 정말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인지 의심받고 있다는 20장과 22장까지에서는 그 표현에 있어서의 구성부분을 문법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23장과 24장은 재현의 또다른 형식인 서사시에 대한 얘기를 하고 25장에서는 시를 짓는 기술에 대하여 가능한 반론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며 마지막인 26장에서는 서사시의 재현과 비극의 재현중 어느 것이 더 고귀한가에 대해서 논한다(플라톤은 서사시의 재현을 더 고귀한 것으로 보았다.) 그의 대답은 많은 제한을 가하면서 비극이 적어도 서사시 보다 열등하지는 않다고 한다.(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싫어했으므로 민주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비극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면 그의 이러한 평가는(비록 많은 제한을 두긴 했지만) 굉장히 호의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시학을 챕터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23장 이후 재현의 또다른 형식인 서사시에 대한 얘기는 나오는데 또 다른 하나의 형식으로 들었던 희극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서사시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면 아마 이 뒤에 희극에 대한 얘기도 있지 않았을까 해서 후에 가상의 '시학 2권'을 소재로 삼아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개인적 생각으론 희극에 관한 논의는 아예 없었을 것 같다. '시학'에 보면 희극과 비극을 나누는 기준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저속하게 재현하느냐 고상하게 재현하느냐'를 들고 있는데 희극은 인간을 저속하게 재현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뒤에 가서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피해야 할 것으로 '저속화'를 든다. 또한 뒷부분에 가면 줄거리 구성에 있어서 두려움과 연민의 효과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희극은 그런 것을 주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이유들로 희극을 굳이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하지만, '시학'은 어디까지나 강의 초안 같은 것이므로 뒷 말은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다. 늘 그렇듯이 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을 것이다.) 

 아무튼 위에서도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철저하게 미메시스, 재현에 초점을 맞추어 시학을 기술하고 있다. 흔히 모방으로 알려졌던 미메시스를 특별히 이 책에서 재현으로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미메시스가 단순한 따라하기가 아니라 거기에 능동적인 해석이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모사가 아니라 또 하나의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재현'적 측면에서 시학을 새롭게 해석했던 학자가 2005년에 애석하게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리쾨르이다. 그의 주저이기도 한 '시간과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와 미메시스가 가진 새로운 해석학적 지평을 열어보이고 있는 책이다.  시학을 번역하신 김한식님이 바로 이 시간과 이야기도 번역하셨는데 자신도 시간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시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 책까지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비슷한 동기로 시학을 읽게 되었고 사실은 리쾨르의 시간적 통합으로서의 뮈토스와 능동적인 해석적 간섭과 그 순환으로서의 미메시스를 중심으로 시학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김한식 교수님이 옮긴이 해제에서 너무도 잘 설명해 두었으므로 따로 쓸 것은 없는 것 같다.(리쾨르에 대한 부분은 꼭 읽어보셨으면 한다.) 

 고전은 늘 새롭기 때문에 고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학도 그런 의미에서 정말 고전이라고 할수 있다. 리쾨르가 '시간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모르고 있었던 시학의 지평들을 밝혀내었듯이 또 어느 누군가가 이 시학을 잃고 놀라운 의미의 지평을 또다시 새롭게 펼쳐 보일지 모른다. 뭣보다 이 책에 딸려있는 엄청난 양의 주해가 그것을 증명한다. 주해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해석들은 읽다보면 그것들 하나 하나가 모두 시학이 가지고 있을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들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 책을 번역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김헌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모두 세 가지의 방식이 지금까지 있어왔는데 하나는 '체계정합적'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사적' 맥락이고 마지막이 바로 '문제제기적' 해석이라고 한다. 물론 이 세가지의 방법론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소테리카로서 시학이 가지는 한계 즉, 논의에 있어서 상충되는 지점들이 있고 19장 후반에서 22장의 존재와 같이 같은 시학 저작으로 보기에는 좀 무리가 따르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두고 이루어져온 방법론이다. 다시 말해 모두 작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나름의 해결방법인 셈이다. 이 책, 뒤퐁록과 랄로는 마지막 문제제기적 입장이다. 즉, 상충하는 지점, 어긋나는 지점들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새로운 문제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소테리카로서의 이 시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완결되지 않은 사유의 흐름을 담고 있는 그릇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는 시학을 두 가지 의미로 바라볼 수 있을 듯 하다. 첫째는 이것이 오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과정이라면 우리는 마치 이것을 소크라테스가 하듯이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와 나누는 대화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통해 밝혀내려 했던 해답은 언제나 그 상대에게 있었듯이, 우리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으며 그렇게 그와 대화를 하면서 뮈토스와 미메시스를 비롯한 재현 전반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우리의 생각들을 가다듬을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바로 그 기회와 연결되는 것인데 이것이 정형화되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의 과정이라면 아직도 이 책에는 하나로 모이지 않은 혹은 오히려 반대를 지향하는 등의 많은 사유의 지류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다듬으면서 그 지류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담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된다. 즉, 나를 새롭게 함과 동시에 작품을 새롭게하는 양면적 효과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이런 생각은 그래서 이 책을 묘하게 유혹적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아직은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사유의 지류들은 없을까 하고 찾아보고픈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게 만드는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우리는 리쾨르가 말했던 미메시스3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이 아닐런지...) 어쩌면 리쾨르도 바로 그러한 가운데 새로운 지류를 찾아낸 것은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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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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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듯, 본질로서의 독재를 포착하려 하다. 

 

 '염소의 축제'는 '독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정확히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30여년 동안 지배했던 트루히요 독재 정권을 다룬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우리가 흔히 '독재를 소재로 한 소설'이란 말을 들었을 때 얼른 떠올릴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생생한 기록을 통한 고발이나 독재에 대한 상상적 심판 같은 것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소설은 '트루히요 정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관심이 어떤 특정 독재 정권에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소설의 관심은 그 특정 독재를 넘어서 독재 일반이 가지는 어떤 성향이랄까 아무튼 보다 본질적 차원에서의 독재,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독재적 현상'을 다루는데 있다. 여기서 현상은 보통 어떤 실체를 둘러싼 외부적 상태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훗설적 의미에서 '현상'을 가리킨다. 훗설은 '현상'을 사물이 처해 있는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 인식 안에 들어온 것을 '현상'이라 불렀다. 그런데 그 현상은 우리가 얼른 인지하기는 힘들지만 사태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그 본질을 바라보기 위해 훗설은 특별히 '현상학적 방법'을 고안했는데, 말하자면 이 방법은 주위 상황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순수한 직관의 힘으로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얼른 이해하기 힘들다면 폴 세잔이 정물화를 그리는 방식을 떠올리면 쉬울 것이다. 폴 세잔은 오랜 시간을 들여 정물을 그리길 좋아했다. 그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사물이 시시각각 드러내는 변화하는 존재의 가상적인 측면들을 지워내어 그 사물의 변하지 않는 핵심 즉, 본질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감히 말하자면 이 소설 '염소의 축제'도 바로 그러한 세잔이 정물을 그리면서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이 소설을 통해 특정 체제로서의 독재를 넘어 그 모든 가상적인 것을 제외하고 불변하는 독재가 가지고 있는 본질을 포착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요사가 포착한 그 본질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2. 호르헤 살라메아의  소설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를 매개로 살펴보는 독재의 본질.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일단 그것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보다 먼저 독재자에 대한 소설을 썼으며 요사 처럼 특정 독재가 아닌 독재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호르헤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를 통해 먼저 그 가능한 모습을 실루엣이나마 가늠해 보려 한다. 이것은 살라메아의 소설이 독재의 본질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있어 요사의 소설과 공통된 부분이 있으므로 일종의 이해를 위한 매개체로 삼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 호르헤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는 '위대한 독재자 브룬둔 부룬다'의 장례식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브룬둔 부룬다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독재자이다. 그러니까 살라메아는 역시적 실체로서의 독재가 아니라 그 원형으로서의 독재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그는 이 소설을 하나의 우화처럼 썼는데, 우화가 시대와 지역을 통해 두루 공감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에서 그가 묘사하는 독재 역시 그것의 원형이라 볼 수 있고 그렇게  살라메아에게 있어서 모든 독재는  사실상 하나의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독재의 모습들이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더라도 그건 그저 모사할 때의 붓 터치의 차이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만큼 독재는 많은 부분에서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건 이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다. 소설 속 트루히요의 독재의 많은 모습들이 바로 우리나라의 독재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어쩐지 등장인물들만 다를뿐 똑같은 상황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살라메아의 '위대한 독재자 브룬둔 부룬다'는 사실 모든 독재자들의  이데아이고, 거기 우화로 씌여진 상황은 그대로 모든 독재 국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살라메아는 이 소설에서 독재의 원형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가? 여기서는 두 가지 점에서나름의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소설이 주로 다루는 것이 독재자의 장례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 중반에 나오듯이 소설속의 독재자가 특히 중요시했던 것이 '말의 압살'이었다는 것을 통해서이다. 

 '장례식'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하나의 의례이며 거기엔 단 하나의 시간만 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유일하게 존재하는 시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살라메아는 장례식의 처음 부터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묘사한다. 그리고 그 묘사의 대부분은 장례식 행렬에 있어서의 행진하는 단체들의 순서에 따른다. 

 이 소설이 그 순서를 충실히 따른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소설에는 유일한 하나의 시간만 흐르고 있다는 걸 나타내는데, 이 소설이 독재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자면 바로 이 '유일한' 시간이라는 자체가 독재의 본질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장례식이란 특정 한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의례이므로 당연히 그 시간의 주인공은 지금 장례식의 주인공인 지배자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 소설은 독재엔 언제나 단 하나의 '지배자의 시간'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두번째, '말의 압살'을 보자. 소설은 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부룬둔은 인간들의 찢어지는 가난과 그로 인한 고민과 반발이 언어 행위를 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온 인류의  기억에 남을 만한 부룬둔의 지혜로운 업적이었다.  결국 그는 자기의 통치를 받는  대다수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누가, 어느 시대에, 다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있을 것인가? 

                                   호르헤 살라메아 '위대한 독재자는 죽었습니다.'중에서 (p.77) 

 그렇게 그는 자신의 말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말을 죽인다. 완전히 압살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독재가 가진 본질의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즉, 독재엔 오로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살라메아의 소설에서 보듯, 독재 체제란 하나의 지배자의 시간과 그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것은 바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는 특히 트루히요의 마지막 날을 보여주는 '독재자의 시간'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3. 다시 읽기를 권하는 '우라니아의 고백'이라는 폐제(foredosure).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됨에 따라서 달라지는 텍스트의 의미들 

    

 하지만 요사가 살라메아와 독재의 본질적 측면에 있어 공유하는 게 있더라도 그는 좀 더 시야를 넓힌다. 그러니까 살라메아가 오로지 독재자 하나에 맞춰 그 시간성과 목소리를 탐색했다면, 요사는 독재자의 시간을 하나의 부분으로 만들고 거기에 독재자에게 절망을 가져다 준 존재이자 그에게 박해를 당했던 한 영혼의 시간과 그 독재자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암살자들의 시간까지 더해서 시간성과 목소리에 있어 다층적인 차원을 부여하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 소설이 독재의 본질이라는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분명히 '반(anti)독재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여러 개의 겹처진 시간과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독재자가 하나의 시간과 목소리만을 가진다는 것에서 비추어 볼 때, 분명 소설 전체적으로 '독재적인 것'에 대해 저항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저항은 내가 볼 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듯 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반(anti)독재적'임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서 앞에서 내가 말했던 것, 즉 '독재'라는 것을 하나의 관찰가능한 대상으로서의 '현상'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라깡이 말한 바 있었던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하나의 시간과 목소리만을 갖는 독재자의 이야기는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지배자 담론'이라 할 수 있다. 'I AM WHAT I SAY!' 로 정의되어지는 '지배자 담론'은 주체의 발화내용과 발화행위가 완전히 일치하는 단독자의 담론이므로 더이상 타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사는 이 독재자 트루히요의 담론을 첫번째 우라니아의 담론과 세번째 암살자들의 담론 사이에 끼워넣었다. 이 두 담론들은 트루히요가 최종적으로 죽음으로서 사라질 때 까지 포위하고 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독재자의 목소리를 그에게 굴욕과 죽음을 안겨주었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박해를 받았던 피해자로서의 다층적인 목소리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트루히요가 붙였던 별명을 가진자가 아무도 없다. 트루히요의 권력층엔 모두 트루히요 자신이 붙인 별명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우라니아와 암살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별명을 붙인다는 것은 의미를 정의하는 권력의 힘을 말한다. 그래서 그가 부여한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이들이 권력자가 부여한 기표들을 거부한 주체들이며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내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사실 그들의 다차원적인 시간과 목소리들은 바로 이 주체들의 드러냄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위로부터의 권력을 거부하는 저항의 목소리들을 통칭 라깡은 '히스테리 담론'이라 부른다. 히스테리 담론은 저항과 분열이 핵심인 담론이다. 그만큼 타자의 개입 여지가 지배자 담론 보다는 많아진다. 

 사회적 이상으로 추앙받는 사회적 문화적 지배기표들에 도전하고 그것을 심문하려 들 때 히스테리 담론의 구조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 '기호 주체 욕망' 박찬부 중에서 (p. 118) - 

 따라서 이런 식으로 요사는 담론의 배치를 통해 독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독재'라는 현상을 보다 접근 가능하고 임상가능한 환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살라메아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독재의 본질이 그 시간성과 목소리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도 이를 충실히 따른다. 하지만 그는 이 소설에서 그것을 약간 구조적으로 비튼다. 거기에 다층적 차원의 시간성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요사는 살라메아 소설에서는 그저 수동적 관찰자로서 밖에만 머물 수 없었던 독자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좀 더 깊숙이 개입하도록 적극적 참여자로까지 유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요사가 원하는 대로 작품으로 드러난 환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세밀히 살펴보려 한다. 

 앞 서 얘기했듯이 이 소설에는 크게 세 가지 시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바로 우라니아의 시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독재자 트루히요의 시간(이 시간은 단일한 독재자의 시간으로 그의 마지막 날 하루를 시간순서대로 담아내고 있다. 살라메아의 소설적 시간 그대로이다)이다. 마지막 시간은 그를 암살한 사람들의 시간이다. 마지막 시간만 여러가지 인물이 등장하고 따라서 다양한 시간과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간들이 개별적 층위에서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 연쇄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이 모든 관계가 연쇄적이라는 것을 독자는 소설이 끝날 때 가서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우라니아의 고백을 통해서다.(두번째 시간과 세번째 시간은 소설의 후반에서 서로 포개어진다.) 사실 이 소설의 제목 '염소의 축제'는 바로 그 마지막 부분을 집약해 놓은 것이기도 할 만큼 그 고백은 중요하며 소설 속 모든 시간들은 그 고백을 통해 일종의 연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시간은 될 수 없다. 요사는 그러한 독재의 시간을 거부하므로 우라니아가 고백하는 시간을 현재속의 '과거'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현재와 과거라는 '층위'에서 단절을 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요사는 그렇게 독재의 시간을 거부하면서도 소설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었던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맨 마지막에 우라니아를 통해 드러나는 우라니아의 상처의 근원이자 트루히요에게 있어서는 소설속 자신의 시간 내내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있는 굴욕을 안겨줬던 그 시간이 왜 하필이면 첫번째 시간의 끝과 두번째 시간의 처음과 만나는 접점으로 만들었는지 말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를 쉽게 얘기하자면 요사는 우리에게 트루히요의 시간을 두 번 읽게 만드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우라니아의 상처와 트루히요의 굴욕을 보게된다. 하지만 처음 소설을 읽는 독자는 트루히요의 시간 초반 부터 등장하는 한 계집 아이에 대한 트루히요의 분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요사는 독자가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지점들을 그냥 무시하고 진행시킨다. 왜 어젯밤 만난 계집 아이를 미워하는지 또 침대 위의 얼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트루히요의 시간은 지배자의 담론이니까 우리가 아무리 궁금해도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I AM WHAT I SAY!'로 진행되는 이 시간에서 우리는 궁금해도 말해주기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처음에 이 소설적 경험을 완전히 수동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 초라한 독재자의 진실이 드러난다. 우리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라는 상징으로 계속 남아있었던 계집아이에 대한 분노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 권력자가 도저히 지울 수 없었던 흔적의 확인은 이제 독자에게 하나의 틈을 만든다. 그리고 그 틈은 지배자 담론에서 수동적 주체밖에 될 수 없던 우리에게 균열을 일으켜 능동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이제 모든 것을 파악한 독자가 다시 트루히요의 시간을 읽는다. 그 시간은 더이상 독자에게 지배자의 담론으로 기능할 수 없다. 독자는 처음 읽었을 때는 파악할 수 없었던 균열들이 담론 곳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독자에게 담론은 그 영향력을 잃고 해석 가능한 텍스트가 된다. 그렇게 그 담론은 이제 독자에게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된다. 말하자면 이것이 요사가 일부러 그렇게(처음의 시간 끝부분과 두번째 시간의 처음 부분이 만나도록)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읽는 독자에게도 우라니아와 트루히요의 암살자들 처럼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변화하는 것을 직접 체험시키기 위하여 말이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요사가 이 구조를 통하여 드러내고 싶었던 것 한 가지를 더 얘기하도록 하자. 그것은 '폐제(foredosure)'에 관해서이다. 페제란, 그 개념을 주창한 아니카 르메르에 따르면 이렇다.

 

억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억압은 아직도 수선의 여지가 있는 어떤 찢어짐(rent or tear)으로 드러난다면   '폐제(foredosure)'는 피륙을 짜는 과정에서 갈라진 틈새, 즉 다시는 그 실체를 발견할 수 없는 근원적 구멍(primal hole)을 뜻한다. 

                                                              - '기호 주체 욕망' 박찬부 중에서 (p. 300) - 

 쉽게 말해서 폐제란 뜨개질로 짠 스웨터에서 보이는 틈 같은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다. 메우려고 푼다면 사라질테고 다시 뜨개질을 해도 그것은 구멍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두번째 읽는 트루히요의 시간은 이제 이런 '폐제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 시간을 '재앙이 닥쳤다는 느낌을 받으며' 시작한다. 그가 그렇게 느꼈던 이유는 바로 우라니아의 고백에서 드러난 남자로서의 굴욕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하나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지병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요실금이다. 독재자는 무엇이든 다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절대권력의 속성인데 그러나 요실금은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언제 어느때 흘러나올지 알 수 없어서 그를 괴롭게 만든다. 이것과 관련해 다시 읽어보면 유난히 이 문장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는 침대 시트를 꼼꼼히 살폈다. 꼴사나운 우중충한 얼룩이 하얀 리넨을 더럽히고 있었다. 또다시 새어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분노가 치밀어 '마호가니 집'에서 있었던 씁쓸하고 불쾌한 기억마저 밀어냈다. 빌어먹을! 제기랄!... 이것은 그의 내부에, 그의 살 속과 그의 핏속에 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과 기운이 필요한 이 때, 바로 그를 파괴시키고 있었다. 그 비쩍 마른 계집애가 그에게 불행을 가져왔던 것이다. (P.33) 

 여기에서 보듯 통제력 상실을 의미하는 요실금은 계집애에 대한 분노와 같이 있다. 라캉에 따르면 히스테리 담론에서는 그 벌어진 틈으로 인한 주체의 분열은 결국 육체적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와 똑같이 요사도 요실금을 '마호가니 집'에서 굴욕을 당한 것에 대한 일종의 신경증적 반응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결국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그에게 있어 이 둘은 동일한 의미이며 모두 그가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존재한다. 소설에서 그가 내내 신경쓰는 것은 '마호가니 집'에서 그 계집아이에게 맛보았던 굴욕을 지워버리는 일이다. 그는 그 계집애가 벌써 도미니카를 떠나버렸다는 것을 알고 또 굴욕감을 맛본다. 그는 결국 대신할 것을 찾아 그 구멍을 메우려 한다. 그러니까 그녀와 아주 닮은 아이로서 상상적으로 그 구멍을 메우려는 것이다. 그의 뚜쟁이인 마누엘 알폰소가 그녀와 아주 닮은 아이를 구했다고 알려온다. 그는 기뻐하며 다시 한 번 '마호가니 집'에서 닮은 그녀를 안음으로써 그 구멍을 메우려 하지만 결국 가는 도중 암살당하고 만다. 결국 다시 읽게 되는 히스테리 담론으로서의 '트루히요의 시간'은 그야말로 폐제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문제는 이 '폐제의 시간'이 각 단위 시간들에서 또 하나의 시간들을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처음 읽었을 때는 그토록 막강하던 권력의 모습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곳곳에 갈라진 균열들과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이 드러나는 것처럼, 권력이 강화되는 시간 위에 그대로 바로 이 폐제의 시간이 겹쳐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에서 시간들은 수평적으로 분열되기도 하지만 수직적으로 분열된다. 그러니까 트루히요의 시간은,  

조니 아베스 -> 주정뱅이 입헌의원 -> 사이먼 지틀맨과의 만찬장 -> 대통령 발라게르와의 만남 -> 푸포 로만의 처벌 

 이렇게 이어지는데, 이 시간의 진행과정이 가지는 의미가 첫번째 읽었을 때와 두번째 읽었을 때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즉, 지배자의 담론으로 읽었던 시간에서는 권력이 강화되어가는 과정이었지만(그것은 사성장군 푸포로만의 처벌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두번재 히스테리 담론으로 읽는 시간에서는 그야말로 이 모든 시간은 점점 더 커져만가는 구멍들만을 드러내는 (미국, 반정부 지식인 카톨릭, 아들 람세스 등등) 폐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결국 권력이 최고로 강화된 것을 보여주었던 푸포 로만의 처벌이 바로 트루히요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폐제의 시간'에서라야 이해가능해진다.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더 넓혀진 구멍이 결국은 그를 삼켜버린 것이다.)  요사가 교묘히 겹쳐놓은 시간의 다층적 차원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세번째 시간은 암살자들의 시간이다. 요사는 이 시간을 암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 가질 수 있도록 할애한다. 이 시간은 이렇게 진행된다. 

 아마디토 -> 안토니오 델라 마사 -> 임베르트 -> 사트알라 -> 페드로 리비오. 

 각각이 주체가 되는 시간에서 요사는 그들이 어떤 동기로 트루히요의 암살에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첫번째 그러니까 트루히요의 시간이 지배자 담론이 되었을 때 이들의 시간은 그야말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기다림은 억압받는 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그들은 그들이 어떻게 트루히요에게 고통을 받았는가를 담담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히스테리 담론의 시간 아래서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그저 고통을 받고 기다리기만 했던 시간이 이제는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으로 옮겨가는 주체화의 시간으로 바껴지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마호가니 집'에서의 굴욕으로 생겨난 구멍과 얼룩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세번째 시간도 이중의 시간적 층위가 드러난다. 여기서 이 세번째 시간에 참여하는 각 인물들의 동기를 보면 점점 그 동기가 더 큰 차원으로 마치 파문을 그리듯 넓혀져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마디토에서 사드알라까지 그 동기는 개인 -> 가족 -> 사회 -> 종교로 넓혀진다. 특히나 페드라 리비오에 이르면 계급적인 차원에 까지 넓혀진다. 요사가 이렇게 마치 단계별로 확장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세번째 시간이 바로 도미니카 국민 전체의 시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이 과정이 헤겔이 말했던 정신의 구현 단계(가족 -> 시민사회 -> 국가)와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주체의 확장 과정이라 할 만한데 그렇다면 결국 요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결국 도미니카 국민 전체가 지배자 담론하에서는 고통을 겪으며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 히스테리 담론으로 바껴진 지금, 점점 더 많이 스스로 자기의 시간을 살며 목소리를 내는 주체로 바뀌어져가고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느껴진다. 

 

 

 4. '우라니아의 시간의 결여'라는 폐제가 소설 구조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 

 

 하지만 기이하게도 암살의 성공으로 활짝 피어나야 했을 주체의 해방은 그 사후처리의 미숙으로 주요 참가자들 중 임베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게된다. 요사는 이들의 죽음을 잔인하리만치 조금의 동정의 여지도 가지지 않고 서술하고 있는데 결국 이들은 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일까?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 그래서라는 대답은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보인다. 왜냐하면 그 대답은 지금까지 요사가 해 온 모든 것이 그저 무의미한 유희에 불과했다는 꼬리표를 붙이는데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대답은 지금까지 요사가 해 온 바탕위에서 이들의 죽음을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 때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19장에서 23장까지 우라니아의 시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라니아의 시간이 소멸하는 전조는 이미 18장에서 배태되고 있다. 18장이 더욱 기묘한것은 사실 우라니아의 시간이 나와야 하는데 거기 트루히요의 시간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거기서 부터 우라니아의 시간은 구조적으로 구멍으로 자리한다. 그런데 18장, 결정적으로 우라니아가 구멍이 되는 자리가 시작되는 그 지점에서 트루히요는 최후를 맞는다는 사실은 꽤 시사적이다. 이후 23장까지 오래도록 우라니아의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암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들 역시 트루히요와 똑같이 최후를 맞이한다. 마치 그녀의 구멍 자체가 그들 모두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그런 구조이다.

 우리는 이 구조에 주목해 봄으로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최후를 맞게되는 이유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트루히요와 우라니아의 관계가 여기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트루히요에게 '폐제의 시간'을 선사했던 우라니아가 그와 똑같이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에게도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라니아가 그렇게 트루히요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었듯이 이들에게도 역시나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이 최후를 맞는 동안 우라니아의 시간은 말 그대로 사라져, 구멍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다가오는 방식에선 차이가 있다. 우라니아의 구멍은 트루히요에겐 '체험'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말 그대로 '구조상의 결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트루히요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오로지 '체험'을 통해서일 뿐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지배자 담론'에서 그는 오로지 '규정하는 자'(그가 각 참모들에게 별명을 지어주는 것에서 드러나듯이)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어떤 타인도 개입할 수 없다. 그러니 자기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어디서도 '폐제'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은 다르다. 그들이 진정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히스테리 담론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요사는 그 참여자들의 동기를 통해 도미니카 전체가 주체로 되어가는 과정까지 은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주체화 과정에서 우라니아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서 라캉이 말했던 주체화의 과정을 한 번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라깡에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언어 질서에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하지만 요사의 소설에서 이 의미는 약간 변형되어 여기서는 독재 체제가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언어 질서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즉, 주체란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했던 독재 체제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소리들의 개체들이 온전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말하는 '아버지라는 기표'의 의미이다. 그는 상징질서를 구현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의 매개로 인해 언어 질서에 뛰어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주체가 된다. 그런데 독재 체제에서는 문제가 있다. 그 아버지가 참된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만 강요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개체들로서는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게 도와주는 아버지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라니아의 시간이 결정적으로 비어있듯이, 아무데서도 그 아버지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는 비어있다. 그것은 참여자들에게 구조적 결함, 구멍, 얼룩 폐제로 자리잡는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한다. 

  '폐제'는 바로 이렇게 '아버지의 기표'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상적인 주체화 과정을 겪기 위해서 꼭 필요한 아버지의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폐제의 존재 앞에서 개체들은 온전한 주체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라깡 스스로 사례로 보여주었던 슈레버 케이스 처럼 궁극적으로는 파괴된다. 구조적 결함이 바로 온전한 주체가 되지 못한 개체의 사멸을 이끄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제 왜 요사가 하필이면 우라니아의 자리가 비워져 버렸을 때 트루히요를 비롯한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시간 안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소설의 구조적 형식을 통해서 아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두번째 시간과 세번째 시간이 그야말로 화해하는 장면인 사면된 임베르트와 그를 환대하는 발라게르 대통령이 만나는 장면 바로 뒤이어 우라니아의 고백이 나온다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그 환대의 장면으로 도미니카가 이제 독재로 부터 해방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다. 요사는 교묘하게도 그 바로 뒤이어 우라니아의 고백을 위치지음으로써 그렇게 그 들이 서로 환대를 했다해도 그들의 관계는 우라니아의 폐제를 가진 관계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결국은 그 환대로 이루어진 관계 조차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이로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 우라니아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수 있다. 

 

 

 5. 우라니아, 그 영원한 불규정성만이 우리를 진정한 주체로 만든다

     다시금 새로이 드러나는 성(Sexuality)의 층위 

 

 그녀는 첫번째 시간의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과연 그녀가 이 소설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우리는 첫번째 독서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마지막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을때라야 소설에서 그녀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트루히요와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요사의 진정한 의도에 충실하자면 도미니카 국민 전체)에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그들 모두에게 '메울 수 없는 구멍으로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으로 자리한다. 우리는 요사가 왜 하필 우라니아를 그러한 폐제의 존재로 만들었을까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한 가지 사실은 우라니아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첫번째 시간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두번째와 세번째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남으로서만 나타난다. 첫번째 시간이 이 두 시간 모두에게 폐제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털장갑에 존재하는 구멍은 털장갑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까. 요사는 이 '폐제'의 구멍이 어떤 것인지 첫번째 시간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소설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층위인 '성(sexuality)'이 드러난다. 이 '성(sexuality)'의 층위는 오로지 첫번째 시간의 진정한 의미가 체득될 때 드러나는 새로이 겹쳐지는 층위이다. 바로 이것이 우라니아가 여성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요사가 이렇게 새로이 '성(sexuality)'의 층위를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그들이 찾지못했던 진정한 아버지가 어떤 것인지 알아봄으로써 비어있는 자리를 메우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독재 체제에서 신음하는 개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알아보려는 탐색이다. 여기서 모두에게 '폐제의 시간'을 선사하는 우라니아가 바로 여성이라는 것은 그 '여성'이라는 것이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요사의 대답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여기에 유의하면 트루히요 체제 아래에서 특히 트루히요 측근들, 그 남자들에 대한 묘사가 눈길을 끈다.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자신이 내키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의 측근들의 아내나 딸들과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보게된다. 이것은 트루히요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지를 나타내지만 새로이 드러난 '성(sexuality)'의 층위에서 보자면 다른 의미로 읽힌다. 그러니까 트루히요는 그들의 아내나 딸을 마음대로 가져감으로써 그들에게서 남성적 자부심을 뺏고 '여성적' 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트루히요의 측근들 - 조니 아베스, 헨리 치리노스, 카브랄, 호아킨 발라게르, 푸포 로만 - 모두가 성적관계가 전혀 없거나 남성성의 특징들이 전혀 표출되지 않는 '여성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이 '여성적'인물의 공통점은 아무도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렇게 주체가 되지 못한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라는 데 있다. 이 '여성적'인 것은 그러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트루히요에 의해서 부여된 인위적인 여성성이다. 그리고 이 부여된 '인위적 여성성'의 본질은 그들의 공통적 특징에서 드러나듯이 '온전한 수동성'에 있다. 이것은 오로지 여성성이라는 것에서 부정적인 특질만을 모아서 규정한 그러한 여성성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성(sexuality)'의 층위에서 새로운 대립항이 태어난다. 바로 우라니아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러한데, 우라니아가 의미하는 '진정한 여성성' 대 트루히요가 부여한 '인위적 여성성'의 대립항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볼 인물은 바로 푸포 로만이다. 그는 세번째 시간에서의 참여자들이 암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결정적으로 실패하게 만든 인물이다. 요사 스스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인물로 사실 이 소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한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 인물은 중요해지는데, 결정적으로 이 인물이 그 모든 성공으로 이끌 기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게 되는 건 이 사람이 트루히요 곁에 31년 동안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트루히요가 부여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하게 내면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오래도록 길들여진 '여성성' 때문에 트루히요가 죽었어도 그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던 나머지 자신의 파멸마저 초래한 것이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세번째 참여자들의 주체가 되려는 시도가 결정적으로 실패에 이르도록 만든 것이 트루히요가 부여한 '인위적 여성성'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우라니아와의 대항적 관계가 선명해지면서 우라니아가 가진 진정한 여성성이야 말로 요사가 그 아버지의 자리에 앉히고 싶은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이 보다 명확해진다.  

 그럼 여기서 우라니아라는 이름을 살펴보자. 우라니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천문학을 주관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이것이 우라니아의 시간에서 별빛의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는 보통 거북이(고대에서 거북이는 우주를 바치고 있는 존재로 흔히 묘사된다)의 등을 밟고 지구의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녀는 별들의 위치를 보고 미래를 예언할 수 있으며 우주적 사랑과 성령의 상징이며 철학과 하늘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특히 사랑하는 여신이다. 우라니아가 소설의 가장 처음 부분에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고독한 행성을 떠올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신 우라니아는 지구의를 가지고 있음에서 드러나듯 지구 자체를 초월한 탈영토화된 존재다. 그녀는 그렇게 우주라는 텅 빈 여백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폐제로서의 역할을 하는 우라니아가 이 여신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우라니아는 그 이름처럼 탈영토화된, 규정되지 않은 여성이다. 그녀는 카브랄 박사, 우라니아, 우라니타 등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이 '도미니카 여자답지 않다'라고 생각하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아울러 아무런 인간관계 조차 맺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완벽하게 지구의 바깥, 타자(the other)자리에 차지한다.

 그런데 한편 우리는 우라니아의 시간을 통해서 그녀 자신의 내부에도 타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러니까 우라니아가 어떤 생각을 할 때 거기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반문을 하는 또 하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다는 걸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에서 유독 우라니아에게만 나타나는 특유한 것이다. 여타 다른 등장인물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끊임없이 의문을 품지 않는다. 우라니아는 존재 자체도 완전히 타자의 영역에 있지만 그 스스로도 타자적이다. 이것은 그녀가 영원히 불가해한 그 어떤 외부로 부터도 규정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좌표축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라 구토마저 일으킬 혼란에 처한 신체로 부터 구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상 속에서 계속 전장을 사고한다는 것은 새로운 신체의 구축과 새로운 좌표를 희구하는 것이다. 기억은 담론이 아니라 무엇보다 신체와 실천을 구성하는 일인 것이다.  

                                                                - 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중에서 - 

 따라서 이것은 그대로 트루히요에서 규정된 인위적 여성성과 대립적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일종의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독재는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다. 거기서 목소리는 바로 규정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그렇게 독재는 오로지 하나의 규정하는 권력에 의해 모든 것들이 다 규정되어진다. 트루히요는 그렇게 국가와 도시, 시민들 그리고 측근들에게 새로운 이름과 별명을 부여함으로써 새롭게 그들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들의 아내와 딸을 가져감으로써 그들을 여성의 부정적 특징들만을 총합한 '여성적' 자아로 만든다. 따라서 규정될 수 있는 것은 독재의 권력에 언제든 포섭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폐제의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 건 영원한 불규정성 뿐이다. 이렇게 요사는 그 대립적 관계를 통해 우라니아처럼 '절대적으로 불규정성의 여성성'만이 오로지 개체가 온전한 주체로 될 수 있도록 만드는 진정한 아버지의 자리에 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이 파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새로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새로운 성의 층위가 밝혀지기 까지는 그것이 오로지 폐제로 인한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성(sexuality)'의 층위에서는 그들이 폐제를 가지게 된 이유가 좀 더 명확해진다. 그러니까 그들이 결국 폐제를 가지게 된 것은 바로 특히 안토니오 델라 마사에서 드러나듯이 그들 자신이 복수와 폭력으로 묶어지는 남성성에 너무 과도하게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남성성은 어떤 남성성인가? 그것은 트루히요에 의해서 새로이 규정된 남성성인 것이다. 독재는 모든 것을 새로이 규정한다. 트루히요가 여성성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규정했듯이 남성성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을 떠올려 보면 이것은 더 분명해진다. 박정희 독재 시절 그들은 남성성을  주로 '산업전사'나 '산업역군' 같은 호명을 통해 마초적인 것으로 재정의했다. 그 호명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같이 주어짐으로써 모든 국민을 그렇게 '남성-되기'에 참여시켰다. 이 '남성-되기'는 사실상 남성성이 가지고 있는 생산자로서의 기표를 과장시켜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모두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박정희의 독재로 부터 받는 억압을 희석화시기키 위함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자신은 국가의 아버지라는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체제로 국가를 재편했다. 그러한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은 새로이 규정된 왜곡된 남성성과 여성성을 새로이 내면화시켜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트루히요 독재 체제 아래에서도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체제 아래서 30년 넘게 살아온 세번째 시간의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성이라는 게 트루히요 체제 아래에서 새로이 규정된 남성성이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따라서 그들은 그대로 비규정적인 새로운 여성성인 '우라니아'를 영원한 폐제로 가질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편, 역시 도미니카 공화국의 트루히요 독재 체제의 상흔을 다루고 있는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도 이와 비슷한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그 소설에서 화자는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이 트루히요 이래로 대대로 가지고 있는 '푸쿠'에 대해 얘기한다. 거기서 '푸쿠'란 바로 저주의 일종으로 고통의 근원 같은 것을 말한다. 즉, 트루히요 체제 이래로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것은 트루히요가 걸어놓은 푸쿠 때문이고 그 푸쿠란 건 다름아닌 트루히요가 규정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은 오랜 트루히요 체제를 거치는 동안 그들 스스로 내면화한 정체성 때문인 것이다. 역시나 화자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그래서 그는 과도한 남성성의 집착을 보인다. 때문에 화자의 눈에 소설의 중심 인물인 오스카 와오는 더없이 찌질이로 보이는데 그는 그야말로 규정된 남성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트루히요의 푸쿠를 끊어버리는 자가 된다. 여기서 오스카 와오의 규정성을 초월(오스카 와오가 특히 집착하는 것이 SF와 판타지 와 같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격이 유추될 수 있다.)하는 타자적 특성이 우라니아와 만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렇게 세대가 다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주노 디아스가 공히 그러한 규정성을 초월해 영원히 비규정적인 영역에 머무는 타자적 존재를 온전한 주체로 만드는 하나의 구원 가능성으로 상정하는 것은 흥미롭다. 

  더하여 그 참여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이가 임베르트(그 외 또 한 사람 '루이스 아마미아'가 있으나 그는 1권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자가 아니므로 논의에서 배제시킨다.)뿐이라는 것 역시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가 이 암살에 참여한 진짜 이유는 그 자신 미라발 자매를 흠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고 그렇게 그녀가 내보이는 여성성에 유일하게 매혹된 사람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결국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요사가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다. '진정한 여성성, 그 모든 것으로 부터 규정당하지 않고 영원히 타자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는 여성성만이 우리를 자신의 시간과 목소리를 가진 온전한 주체로 만들어줄 것이다.'라는 것이다. 

 

 6. CODA... 

 

 마리오 바르가사 요사의 '염소의 축제'는 쉬운 소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단순히 그것을 고발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설 전체로써 - 내용 뿐만이 아니라 구조적 형식 그 자체로서도 - 독재적인 것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간과 하나의 목소리만을 갖는 독재적인 것에 저항해 이 소설은 다자(多者)적인 시간과 목소리를 도입하고 여기에 시간의 배치를 통해 하나의 폐제를 구조 자체에다 만듦으로써 독자에게 두 번 읽기를 요구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두 번의 읽음에서 라깡식의 '지배자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의 전이를 통해 요사가 진정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온전히 드러나는 아주 신비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시간들에서도 그 위에 또 포개어지는 새로운 의미의 층들이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의 지점들이 생성되고 있기까지 하다. 이 소설이 가진 모든 신비한 측면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우라니아 같이 불규정성의 여성성만이 온전한 주체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의 논지에 맞도록 이 소설 자체를 어떤 하나의 의미로 절대로 규정되지 않는 영원한 불규정성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래도 꽤 길게 세세하게 요사가 깃들여놓은 의미들을 파헤치려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미답의 불모지가 남아있을 것 같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의 이 소설에 대한 독해가 궁금하다. 그 누군가의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을 바로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보다 더 많은 목소리가 이 책을 통해 창출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또 요사가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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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미 2011-08-07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퍼가겠습니다.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 안된다 하시면 댓글달아주세요~
 
미다스의 노예들 바벨의 도서관 9
잭 런던 지음, 김훈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솔직히 나는 이 단편집에 대해 먼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이 단편집이 아니었다면 잭 런던이 이토록 단편에도 뛰어난 작가였다는 것을 영영 모르고 지냈을 뻔 했다. 보르헤스가 200여편에 이르는 잭 런던의 단편들에서 선별한 이 단편집은 그야말로 주옥같은 작품들로 가득한 종합선물상자이자 내가 알기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만나볼 수 있는 잭 런던의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의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나이 40에 의문의 죽음(병사인지 자살인지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다.)을 맞아버린 잭 런던이 좀 더 오래 그의 창작 활동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이 그렇게 아쉽게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 만큼 아주 매력적인 단편들이다. 게다가 그는 우리 나라와도 인연이 있다. 1904년 그의 나이 28세 때, 그는 러일전쟁때 종군기자로 우리 나라(당시 조선)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때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엮어 '조선사람 엿보기'란 제목으로 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도 있고 하니 작가가 좀 더 각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엔 2005년에 국내에도 발간된 '암살주식회사'의 원형이 되는 걸작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까지 있으니 굳이 보르헤스의 추천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픈 단편집이다. 

<- 잭 런던 , 조선사람 엿보기(La coree en feu)의 표지 

    옆에 서 있는 외국인이 바로 잭 런던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 단편집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 단편집은 무엇보다도 보르헤스가 선집한 단편집이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그가 무슨 이유로 특별히 이 다섯 편을 골랐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다섯 편은 이렇다.  

  마푸히의 집
  삶의 법칙
  잃어버린 체면
  미다스의 노예들
  그림자와 섬광 

 첫번째 단편 '마푸히의 집'은 자기가 캐온 거대한 진주를 가지고 프랑스 풍의 집을 얻으려는 히쿠에루 환초에 사는 마푸이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남태평양 바다를 건너 목자재를 들여오기가 쉽지 않은지라 거래는 잘 성사되지 않고 결국은 협잡꾼에게 걸려 그 진주를 강탈당하다시피 한다. 그렇게 마푸이가 진주를 뺏기는가 싶더니 그 날 유사이래로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이 그 섬에 몰아닥친다. 두번째 단편, '삶의 법칙'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 영화에서 가족들이 겨울철 굶어죽지 않으려고 할머니를 고려장시키듯이 이 단편의 주인공 코스쿠시 노인의 운명도 같은 길을 걷는다. 이 단편은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내버려진 코스쿠시 노인이 그들이 떠나는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거기서 그는  생명력 넘쳤던 젊은 날과 또 그렇게 자신 역시 생존을 위해 아버지를 버렸음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기억나는 건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큰 사슴의 최후이다. 결국 집요한 늑대의 추적으로 최후를 맞이했던 큰 사슴 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될 것을 알고 늑대들이 몰려들었을 때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맡기게 된다. '나라야마 부시코'의 할머니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아들에게 오히려 추우니 빨리 돌아가라고 손을 내젖는 것 처럼 자신의 죽음을 자연의 섭리라 여기는 것이다. 

 세번째 단편 '잃어버린 체면'은 문명의 정복과 야만의 복수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물결에 휘말리는 바람에 죽을 운명에 처해진 수비엔코프가 주인공이다. 그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원주민들이 가하는 끔찍한 고문만은 피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선택권은 그에게 있지 않으니 곧 다가올 자신의 차례를 거부할 수가 없다. 끝내 그는 기지를 발휘해 단번에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게 만든다. 대신 그 기지에 휘둘린 원주민의 추장은 그에게 놀아난 댓가를 평생 치욕으로 짊어지게 된다. 네번째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은 한 자본가에 보내진 협박장이 중심이 된다. 그 협박장은 '미다스의 노예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자들이 보낸 것으로 자본가의 전재산을 기부하지 않으면 그 댓가로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뺏겠다고 한다.  

 "선생도 곧 아시게 되겠지만 우리는 하나의 사업을 제안한 데 불과합니다. 선생은 윗멧돌이고 우리는 밑멧돌입니다. 그 두 개의 멧돌이 돌아갈 때 그 노동자 목숨은 갈려버릴겁니다."(p.115) 

 그저 질나쁜 농담으로 여기고 무시했으나 곧 그들이 정한 시간에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뺏겼다는 것을 알게된다. 계속 날아드는 협박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희생되는 사람은 늘어가고 급기야 그들은 이제 익명이 아닌 구체적으로 희생당하는 사람의 인적사항까지 알려주며 그 죄책감을 떠안겨주려 한다.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던 자본가는 자신의 어마어마한 돈과 연줄로 어떻게든 이들의 정체를 파헤치려하지만 사회 곳곳에 점조직으로 스며들어있는 이들이 존재는 여간해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쌓이는 시체에 죄책감만 더해갈 뿐이다. 다섯째 단편 '그림자와 섬광'은 라이벌 관계에 빠져 경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두 사람에 대한 얘기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결국 그 어리석은 경쟁은 그들의 모두 목숨을 잃고서야 끝나게 된다. 

 간단히 다섯 편의 내용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왜 보르헤스가 하필이면 이 다섯 편을 선정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차례다. 분명 이 다섯 편엔 공통점이 있다. 아마, 다섯 편을 직접 읽어보면 그게 분명히 느껴지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이 다섯 편이 모두 인간의 연약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첫째 단편을 보자 거대한 진주로 집과 교환하려 했던 마푸히는 인간적 노력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한다. 그렇게 라울도 교활한 장사꾼 토리키와 레비도 비열한 방법이지만 인간적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 하지만 그 날 그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의 보복이 개시된다. 그 압도적인 허리케인 앞에서 인간이 했던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간다. 

  그는 이미 공포의 감정을 넘어서 있었다. 그 다음에 밀려온 파도가 그 땅을 휩쓸면서 당연히 그 인간 잔해들까지도 깨끗이 쓸어갔다. 그가 이제까지 본 어떤 파도보다도 더 거대한 세 번째 파도가 닥쳐와 그 교회당을 호수 속으로 쓸어 넣었다. 반쯤 물에 잠긴 채 바람 부는 쪽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그 교회를 멍하니 보고 있자니 대홍수에 쓸려가는 노아의 방주가 떠올랐다.(p.38) 

그리고 마푸히가 빼앗겼던 진주는 자신이 돌아와야 할 곳을 스스로 찾아 온다. 여기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잭 런던은 인간의 간교한 노력을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자연의 심판을 허리케인을 통해 드러낸다. '노아의 방주'가 생각났다는 라울의 고백에도 나오듯이 런던은 그것을 신의 의지로 승격시킨다. 신의 의지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한낱 개미에 불과하다. 이것이 이 단편을 통해 런던이 말하려던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거대한 진주 역시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계책을 비웃듯이 홀연히 스스로 자신의 있을 곳을 찾아 돌아오지 않는가! 바로 이 첫번째 단편에서 왜 보르헤스가 유독 이 다섯 편을 선정했는지 그 이유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 다섯 단편이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편 역시 그토록 생명력이 넘쳤던 젊음이 지나고 노쇠해지자 족장이었던 그는 이제 가족의 거치적거리는 짐이 될 뿐이다. 그는 어릴 적 보았던 거대한 수사슴의 최후를 떠올린다. 그토록 집요한 늑대의 추적을 피해 살려고 발버둥 쳤었지만 결국은 늑대들에게 먹혀버린 사슴처럼 그 역시 사멸의 운명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는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의지를 초월하는 삶의 법칙이니까. 세번째 단편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최후의 순간만 남았다"로 시작하는 단편답게, 스스로 죽을 방법을 결정할 수 없는 수비엔코프는 기껏해야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네번째 단편 '미다스의 노예들'은 자연이 아니라 이제 인간이 만든 사회 자체도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임금 노예'라 부른다. 그들이 자본가에게 전재산을 요구하는 이유는 지식인들이 말한대로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자본가 계급 때문이고 자본이 없는 이상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없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계급이고 그래서 개인이 가질수 있는 도덕관이나 사회윤리관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단체의 의지는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의미없는 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과 상식마저 초월하여 스스로 괴물이 되려한다.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산업적 사회적 악의 정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해 낸 사회와 맞서고 있습니다.우리는 이 시대의 성공적인 실패작들이요 타락한 문명이 가져다준 재앙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사회적 선택이 빚어낸 존재들입니다.(p.130) 

 이들의 탄생도 활동도 모두 개인의 의지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잭 런던의 면모가 많이 드러나 있는 이 단편에 이어 다섯번째 단편은 이번엔 '미다스의 노예들'의 표적이 되었던 '자본주의적 인간'들을 다룬다. 바로 자본주의의 동력의 핵심이라 할 '경쟁'을 조명하는 것이다. 잭 런던은 이 단편을 통해 자본주의가 미덕의 하나로 간주했던 경쟁 마저도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를 넘어서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렇게 경쟁에 완전히 지배당해 버렸던 두 남자는 결국 존재가 보이지 않거나 찰라의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림자와 섬광'은 그렇게 그 두 남자의 경쟁으로 변해버린 존재를 의미하고 이 단편은 경쟁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지워나가는지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르헤스가 특별히 뽑은 잭 런던의 다섯 단편들은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의 섭리와도 같은 거대한 자연의 심판이나 속절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 뿐만 아니라 계급이나 경쟁 같이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산물 마저도 이제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미다스의 노예들'에서 웨이드 애츨러가 했던 고백을 되풀이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일세. 난 불가피한 필연에 맞서 싸울 수 없어.(p.131) 

 잭 런던의 이런 세계관은 사실 보르헤스의 세계관과도 이어진다. 아마도 그러니까 보르헤스가 특별히 선택했을 것이다. 보르헤스 역시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한다. '원형의 폐허들'에서 처럼 인간은 어느 것이 환상이고 진실인지를 파악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마저 과연 실체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부족함'의 존재이다. 그래서 세계는 거대한 '바벨의 도서관' 처럼 인간을 초월해 있으며 인간은 영원히 전설의 책을 찾아 그 혼돈의 도서관을 방황할 수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잭 런던과 보르헤스는 이렇게 만난다. 이 단편집의 다섯 단편은 바로 그 접점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접점'은 언제나 맛닿은 양 쪽을 모두 다 살펴볼 수 있다는 잇점을 갖는다. 그렇게 이 단편집은 우리로 하여금 잭 런던과 보르헤스 양쪽을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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