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아저씨 제르맹
마리 사빈 로제 지음, 이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맞아, 책 뒤에 있는 말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네. 그러면 어떤 책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설책 뒤에 적힌 말들은 정말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인지 외려 반문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나같은 사람들을 위한 말은 아니었다. (...) 게다가 내가 집어든 책 중 그 어떤 것도 쉽게 쓰여진 것은 없었다. "사랑과 모험, 그게 아니면 인디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끝." 이렇게 말이다. (P.268)

    이 소설의 주인공 제르맹은 마흔 다섯살의 중년이지만  글도 모르고 이해력이 아주 많이 떨어지는 그래서 소위 '모자란다'는 취급을 받는 그런 남자다. 그렇게 이 소설의 원제(La Tete en Friche)의 뜻 그대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미개발 상태'인 남자다. 인용한 말은 그가 누군가를 위해 책을 읽어주려고 생애 처음으로 도서관을 찾았다가 어떤 책이 좋은지 알 수 없어 당황하고 있는데, 문득 앞에 있는 꼬마 하나가 책 뒤에 쓰여진 말들을 읽고 고르는 것을 보고 따라하다가 하게 된 생각이다. 책 뒤의 문구가 내용의 전달과는 아무 상관없는 오로지 현혹을 위한 과장과 칭찬 일색임을 비웃는 일종의 풍자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왠지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내개는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혹 내 리뷰도 제르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그런 것이지 않을까 언뜻 드는 두려움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리뷰라는 것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 책 뒤에 쓰여져 있는 말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렇게 혹시 내 리뷰도 타인에게 잘 소화되지도 않을 말들을 억지로 씹어먹게 만드는 자기도취적인 글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인다. 얼른 떠오른 건 글을 쓸 때 늘 저렇게 제르맹 같은 이들을 위한 배려도 되도록 잊지말아야겠다는 결심이지만, '되도록'이란 말이 그렇듯이 언제 도래할 지 모르는 배신의 가능성을 다분히 상정한 결심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보다 많이 알면서도 늘 모르는 제르맹을 배려해주었던 마리게리트 할머니가 더 대단해 보인다. 아무튼 결심한 지금 이 순간, 그 노력의 흔적이라도 내보이기 위해서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쓸까 한다. 되도록 알기 쉽게 간단히... 

  '이제까지 생각없이 살아온 한 중년의 남자가 우연히 한 할머니를 만나 책을 통해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가는 그런 이야기 입니다.'

     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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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 부분은 이런 정도의 글로는 만족하시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붙여놓은 글이다. 

천성이 남의 글을 파헤치기 좋아하는 나인지라 아무래도 저 글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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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하게 말한다면 '바보아저씨 제르맹'의 핵심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책이 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모두 네 권의 소설들이 나온다. 그 소설 하나하나가 다 그대로 주인공 제르맹으로 하여금 새삼 자신을 일깨우고 확장하도록 만드는 그런 하나의 계기들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리뷰도 그렇게 네 권의 책을 중심으로 써 보려한다. 

 

    1. 알베르 까뮈 '페스트'  

   

    까뮈의 '페스트'는 제르맹이 공연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 마르게 리트로 부터 처음 듣게되는 책이다. 마르게리트는 양해를 구하면서 그의 앞에서 페스트의 시작 부분을 낭독하게 되는데 그 전까지 책이라고는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제르맹은 마르게리트가 낭독하는 '페스트'에 바로 매료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는 이 소설 때문에 예전의 한 사건을 떠올린다. 그건 자신의 이웃집에 살던 한 아버지가 아이들도 학교가서 홀로 집에 있는 사이 권총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 아버지는 혹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볼까 봐, 일부러 문 밖에 '시장에 갔음'이란 푯말을 걸어놓았으나 그것이 거꾸로 문 앞에서 기다리기 싫어 아무 생각없이 그저 문을 열고자 창문으로 기어들어간 아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 꼴이 되어 결국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고만다. 제르맹이 떠올린 이 사건은 사실 제르맹의 세계와도 유사하다. 그 역시 아버지란 존재가 없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낳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그의 존재가 늘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원망하면서 걸핏하면 손찌검을 해댔다. 그에겐 단 한번도 애정을 느껴본 순간들이 없었다. 컴컴한 바닥 위로 무참히 머리가 파열된 채로 쓰러져 있던 아버지가 있었던 거실. 그것이 그의 세계였고 그 아들이 정신병자가 되었듯이 그도 뒤떨어지는 지능으로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없었다. 마르게리크가 읽어주었던 까뮈의 페스트는 그래서 제르맹에게 그의 세계의 현재 모습과 그 원인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2.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아시다시피 이 소설은 로맹 가리의 자전적 요소가 깊이 배인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소설이다. 제르맹 역시도 마르게리트로 부터 이 소설을 들으면서 지금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렇게 이 소설은 제르맹에게 '페스트'로 촉발되었던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모습과 원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재 자신의 삶을 반추해보는 계기로 작동한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현재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공간이 '카라반'으로 상징된다. 그 카라반은 어머니가 있는 집의 마당에 있다. 그렇게 그는 어머니로 둘러싼 세계에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 카라반이라는 공간을 설정에 거리를 둔다. 그건 그대로 한 편으론 어머니로 부터 달아나고 싶은 만큼 욕망의 표현이지만 다른 한 편으론 그대로 어머니의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는 더 은밀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카라반이 그곳에 있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눌러앉은 남자에게 매맞는 제르맹을  보호해주려고 나선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라반은 제르맹의 독립에의 열망과 어머니의 보호속에 머무르고 싶다는 바램의, 상반된 이중의 욕망이 표현된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모순된 욕망이 중첩된 공간은 그야말로 제르맹 현재의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카라반과 완전히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는 물건 하나를 제르맹은 마리게리트로 부터 선물받게 된다. 그것이 바로 사전이다. 마리게리트는 사전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사전은 여행을 하게 해 준답니다. (...) 

  제르맹 사전은 말이에요. 단순한 책이 아닙니다. 그 이상이에요. 그건 미궁이에요. 행복에 젖어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미궁이지요. (P. 198 ~ 199) 

   마당 한 구석의 좁아 터진 카라반과 영원히 헤메일지도 모르는 미궁으로서의 사전. 이렇게 둘은 공간적으로도 구분되지만 머무름과 여행이라는 움직임에 있어서도 구분된다. 그렇게 사전은 여러모로 카라반과 대조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그의 현재가 가진 불완전한 모습을 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하나의 출구이자 구원으로서 자리잡는다. 아니나다를까 제르맹은 점점 '말'을 익히게 된다. 말을 익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라캉의 말처럼 우리가 언어를 습득함으로써 우리 외부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바깥 그렇게 타자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은유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것을 방증하기라도 하듯, 말을 익혀나가는 제르맹은 자신이 관계맺고 있는 타인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진다. 그렇게 타인을 받아들여간다.  이렇게 '새벽의 약속'은 제르맹이 현재 자신의 삶과 거기서 맺고 있는 타인들을 살펴보는 계기가 된다. 

 

   3.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제르멩의 꿈이 하나 있다면 그건 인디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르게리트에게 인디언이 나오는 소설을 하나 읽어줄 것을 원했고 그렇게 그녀가 읽어주었던 소설이 바로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었다. 제르맹은 바로 이 책을 통하여 삶이 지닌 막연한 동경과 현실과의 괴리를 깨닫는다. 그렇게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통해 제르맹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새벽의 약속'을 통해 타인에게 나아갔던 그의 사유는 이제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통해 '삶 자체'에게로 나아간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던져주는 삶의 유한성. 그렇게 늙어버림에 따라 마리게리트에게 떨어져버린 점점 잃어가는 시력은 그에게 새삼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게 그는 속절없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만드는 노년과 죽음을 선사하는 삶이 지닌 비극성을 적극적으로 사유한다. 십계명에 대한 제르맹의 비난은 아마도 그러한 사유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삶을 더 알기위해 스스로 책을 찾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넘어 삶 자체를 사유하려 한다. 그건 오로지 자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내려진 마리게리트에게 닥쳐올 실명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삶에 대한 자신의 유한성의 자각은 타인의 받아들임과 같이 온다. 어쩌면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면 할 수록 그만큼 더 깊이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나 아렌트의 말 그대로 사유란 바로 타자를 받아들임 자체일지도 모른다. 

 

   4. 쥘 쉬페르비엘 '난바다의 아이' 

 

 

  마치 이러한 아렌트의 말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제르맹은 이제 마리게리트를 스스로 도우려한다. 곧 언제 실명할지 모르는 마리게리트를 위하여 스스로 책을 읽어주려는 것이다. 환상문학의 걸작이기도 한 쥘 쉬페리비엘의 '난바다의 아이'는 그것을 위해 그가 가장 먼저 선택한 책이다.(물론 의도는 아니고 그저 우연에 의해 선택된 것이지만...) 

  그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제 자신이 아닌 타인, 마리게리트를 이해한다. 자신조차도 제대로 이해할 줄 몰랐던 제르맹이 이제는 타인마저 이해하는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소녀가 점점 마리게리트를 닮아갈수록 그러니까 마지막 부분을 읽을 즈음 나는 점점 목구멍이 조여드는 듯 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마치 살아 있는 것 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둔 것처럼 괴로워하는 존재를, 축축한 고독 속에서 영원히 불우하게 사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P. 275)

 

  작가 마리 사빈 로제는 제르맹이 마리게리트에게 읽어주는 이 소설의 한 부분을 주의깊게 인용함으로써 결국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은밀히 드러낸다.(그는 일부러 그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바로 거기서 낭독을 끝맺기까지 한다.)  

  난바다의 아이는 멀고도 먼 이 나라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샤를이나 스틴부르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P.283)

    네 권의 책을 통해 제르맹의 사유가 점차 자신에서 타자로 확장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이 소설에서 '왜 우리가 새삼 책을 필요로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된다. 아마도 이 때문에 작가는 일부러 문맹에다 아는게 거의 없는 주인공을 설정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작가가 책을 소재로 한 것은 그저 하나의 소통을 위한 매개물에 지나지 않았고 보다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우리가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확인되는 건, 우리가 타인과 소통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삶에 있어서 지극히 무지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가가 마지막 인용한 소설의 주인공 처럼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의 눈에 압도적 크기로 달려드는 거대한 바다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신비의 깊이로 가득하다. 그 바다가 바로 삶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삶 앞에서 지극히 유한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마리게리트를 만나 책을 알기 전의 제르맹과 사실 별 반 다를바 없다. 그 때의 제르맹은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리게리트는 제르맹을 넘어 실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재밌게도 작가 마리 사빈 로제는 제르맹과 마리게리트가 가지는 현격한 키의 차이를 통해 이것을 강조해서 보여준다. 거구의 제르맹에 비해 마리게리트는 겨우 아이 정도의 키 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쩐지 제르맹과 마리게리트의 관계는 몸과 머리 그렇게 육체와 의식의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제 홀로 있어서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관계들이다. 상호 보조를 맞춰주어야만 제대로 존재할 수 있는 관계들. 그렇게 마리 사빈 로제는 시각적으로까지 소통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책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은 물론 이 소설이 처음이 아니다. 같은 프랑스 소설중의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도 있었다. 지금은 거의 경험하기 힘든 낭독의 경험을 통해서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천착해서 이 소설 또한 마리 사빈 로제 처럼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했었다.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도 있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죄다 프랑스 소설들이다. 고다르를 비롯해서 프랑스 영화들을 보면 언제나 등장인물들이 책을 벗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토록 책을 가까이하는 나라 사람들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제르맹'은 늘 책을 벗하면서도 책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한번쯤 책 자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제르맹의 독백으로만 채워지는 이 소설은 제르맹 자신이 단순 솔직한 성격이기에 문장 역시도 그를 닮아 단순하고 쉽고 그래서 빠르게 읽힌다. 더구나 위트까지 풍부해서 재밌게 읽힌다. 그래서 '사유의 기회'라는 다소 부담되는 어휘를 썼지만 실은 편안하고 재밌게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소설이다.  이 책을 통해 책을 가지고 하는 얘기가 좋아졌다면 앞서 언급한 레몽 장과 카롤린 봉그랑의 소설까지 내처 읽으면 더욱 더 풍요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되도록이면 여행 갈 때 집으면 좋을 것 같다. 왠지 덜컹거리는 기차 좌석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을 간혹 흘깃거리면서 읽어야 더욱 더 제맛일 것 같은 생각이 읽으면서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그 경고를 위해 일부러 '되도록'이란 말을 써 놓았음을 간과하지 마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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