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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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돈... 

  읽고나서 처음엔 어떻게 이 소설을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이제는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의 괴물을 마주할 준비가... 더구나 이 소설은 우리를 그  괴물의 내면으로까지 데리고 간다. 난처하다. 당신이 이끄는 손길은. 거부하고 싶었다. 뿌리치고 싶었다.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그 괴물의 모습을. 그의 눈으로는 더더욱... 

  왜냐면 난 이미 그 시선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임철우의 소설 '붉은 방'을 통해서... 그 소설에도 고문기술자의 시선이 나온다. 그의 시선일 때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그도 그저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구나' 하는 모습이다. 노모를 걱정하고 자식을 염려하는 보통의 가장... 단지 한국전쟁 때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살해당했던 기억 때문에 '빨갱이'에게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이 맺혔고 그래서 이성 보다는 감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의 고문이란, 그러한 응어리진 한을 푸는 그래서 어쩌면 인간적으로 이해할만한 폭력이라는 동정... 그도 결국 온전한 폭력의 주체는 아니며 다만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인식 등등... 하지만 이러한 소설 속 제안들은 오히려 날 미치게 만들었다. 작고하신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심정과 같았다. 실제 피해자인 자신이 개입할 여지도 없이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을 보며 그렇게 용서의 기회마저 박탈당하여 절망 끝에 결국은 자살한 여주인공 처럼, 나 역시 끔찍하게 자행되는 고문에 대한 분노를 '그래, 당신도 피해자였어...'라는 소설의 시선 때문에 어디다 풀어야 할지 몰라 온 영혼이 비틀거렸다. 

  나는 솔직히 가해자를 동정하고 싶지 않다. 가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여기에서 만큼은 절대적 이분법을 선호한다. 악은 악일뿐. 그건 전혀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그는 가둬져야 한다. 소설 속 공간 '다락방'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고 굳게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영원히 봉인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붉은 방'이 나온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누군가가 그 문을 열어 젖히고 그 괴물을 소환한다. 

  그가 천운영이고 그렇게 괴물은 다시 나타나 그의 내면 안으로 또다시 우리를 포획한다.  돌연 햄릿 앞에 나타나 숙부가 자신을 죽였음을 말하는 아버지 유령과도 같이... 

  세월이 흘렀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이... 그 괴물 조차 이제는 개과선천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하던가... 세월마다 켜켜이 퇴적되는 망각에 힘입어 괴물의 존재가 거의 지워져버린 지금 어쩌자고 작가는 다시 그 괴물을 소환하여 우리에게 마주보기를 원하는 것일까? 그 시선을 거부하면서도 한 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운영. 솔직히 나는 이 작가를 처음 만난다. 그래서 이 작가의 세계관을 알 길이 없다. 해서 들어야 했다. 그 이유를. 그녀의 말로 직접! 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어봐도 알 수는 없었다. 단 하나의 대답이 있긴 했었다. "써야하니까!" 헐~ 어쩌라는것인지?... 

  다만 알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이 괴물을 소환한 계기였다. 그건 다락방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괴물이 잡히기 전에 10년간이나 다락방에 은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다락방... 다락방이라면 나도 추억이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은 그리움과 공포를 동시에 수반한 것이다. 숨바꼭질 할 때 가끔 다락방에 숨곤 했다. 그건 그리움이다. 가끔 들창으로 햇살이 빠꼼이 비쳐들때면 만화책을 읽다가 졸기도 했다. 그것 역시 그리움이다. 하지만 화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다락방에서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렇게 광란의 매타작을 당하는 날이면 다락방의 문을 쳐다보는 것 조차 무서웠었다. 낭만과 공포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애증의 공간. 그것이 '나의 다락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 소설 '생강' 자체가 어쩐지 '나의 다락방'과도 비슷한 것 같다.  

  나의 다락방에 대한 상반된 감정은 시간을 두고 서로 분리된다. 햇살이 들이치는 낮의 다락방은 온전히 그리움의 공간이다. 하지만 주로 밤에 끌려 올려가 매타작을 당한 탓에, 밤의 다락방은 그야말로 공포의 공간이다. 그렇게 나에겐 다락방이 낮과 밤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각각 그리움과 공포로 명확히 대응되고 있다. 이 소설 '생강'의 세계도 그렇게 나뉜다. '밤'이라는 고문기술자 '안'의 세계와 '낮'이라는 그의 딸 '선'의 세계... 소설의 초반부 두 세계의 명암의 대비는 극명하다. 어둠의 고문방에서 '안'은 오로지 파괴와 종말만을 가져다 준다. 거기엔 빛 조차 파멸을 위한 무기이다. 반면 '낮'의 '선'은 이제 꿈꾸던 대학생활이라는 희망으로 눈부시다. 거기엔 다락방의 백열 전구 조차 따스함과 정겨움을 담는다. 결국 세상이 바뀌고 '안'은 도피하게 되는데 그 바깥에서의 도피의 여정 또한 여전히 밤이다. 여러 공간을 전전하지만 결국 '밤'이라는 기차에서 이 객차에서 저 객차로 건너가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점점 좁아져만 간다. 이러한 두 세계의 대조적인 모습은 외연을 확장한다면, 마치 내 다락방이 시간적 차이를 두고 서로 다른 인상을 불러 일으켰듯이,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안'의 세계는 80년대를. 그리고 '선'의 세계는 지금 우리들의 시대를 말이다. 그렇게 이 소설을 '선'의 세계가 상징하는 지금의 우리들이 ''안'의 세계'에서 묘사된 80년대를 바라보고 그것을 껴안아 가는 과정으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나왔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 대립적이었다. '생강'의 두 시선들은 모두 한 쪽에 위치한다. '부녀지간'이란 혈연 관계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선'은 아버지의 행위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단지 그의 딸이라는 이유로 몰려가게 된다. 그 계기를 만든 사람은 '낯선 남자'이다. 이 남자는 '안'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이다. 말하자면 천운영은 '붉은 방'에서 시선의 주체였던 피해자를 이제는 바라보기의 대상인 '객체'로 만든 것이다. 그 자는 처음엔 '안'과 '선'을 분리시키지만 나중엔 다시 맺게해주는 이중의 역할을 맡는다.이 묘한 관계의 변화, 혹은 수십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뒤틀림. 천운영은 왜 이런 관계를 설정했을까? 이 호기심이 결국은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 소설을 독해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겐 그 낯선 남자의 존재가 여간 흥미롭지가 않다. 그는 내게 예전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서의 바로 그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에서 괴물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그 괴물을 다시금 우리를 80년대로 인도하는 존재라고 느꼈다. 분명히 존재했엇지만 서서히 지워져버린 역사. 그렇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문득 떠 올리는 이별한 연인의 얼굴 처럼 생생했던 그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다만 아련한 실루엣으로만 남아있는 80년대, 그 암흑의 현장 속으로 다시금 우리를 데려가 그것의 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존재라고... 

  그렇게 소설 '생강'에서 '선' 앞에 나타난 낯선 남자의 존재도 영화 속 괴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낯선 남자는 '선'에게 아버지의 참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그렇게 그때까지만 해도 '선'이 자신의 삶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던 역사의 어둠이 사실은 자신의 존재와 아주 단단하게 결부된 것임을 일깨워준다.  동시에 우리들에겐 우리 역시 '선'처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그 시절 80년대의 어둠을 마주하게 만든다. 그렇게 그는 '선'과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80년대에로의 초대장 같은 것이다. 이러한 변형된, 그러니까 객체화된 '낯선 남자'의 존재는 앞에서 말했던, 우리가 바라보는 그 괴물의 내면이 사실은 바로 80년대를 독해하고 있는 것이라는 가정을 더욱 더 신빙성있게 만든다.  

  아무튼 초반부 '선'의 세계는 '안'의 세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선'은 자신의 세계에 그러한 '안'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임철우의 '붉은 방'에서도, 고문을 당했던 자는 TV 속에 나오는 고문이니 시국선언이니 하는 모든 정치적 사건들을 자신과 전혀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그러한 '붉은 방'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설마 자신이 그러한 붉은 방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리라고는 더더욱 말이다. 이건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 독재정권으로 정의되는 70년대 80년대의 관계와도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생채기도 시간이 흐르면 딱지가 안고 결국은 그 딱지 마저 떨어져 나가 버리듯이, 아무리 그 시간들이 고통과 공포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흐르는 시간 속에 그 아픔들과 두려움은 희석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느새 우리도 그것들을 그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한 때의 전설로 여겼다. 어쩌다 듣게되는 독재의 무시무시한 폭압은 그저 과거의 한 때에 일어난 불쾌한 추억 같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에 곳곳에서 확인되는 현상은 그게 단지 과거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 '선'에게도 '붉은 방'의 피해자에게도 결국은 현실이었듯이, 낯선 남자에게 끌려가 바라보는, 천운영이 이 소설에서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 풀어놓는 그 시절의 어둠 역시도 언제 어느 때 또다시 반복될지 모르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다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다락방에 숨겨져 있을 뿐... 

  그래서 섣불리 외면하거나 망각할수가 없다. 그건 지금 우리들을 상징하는 '선과  그 시대의 어둠을 의미하는 '안'이 혈연으로 맺어진 '부녀관계'라는 점과 다락방의 문 하나를 두고 공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그 시절이 어둠은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 쉽게 잘라내어 버릴 수 없는 역사이다. '선'이 다락방에 숨은 '안'과 함께 살면서 그를 양육하듯이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 존재에 단단하게 고착된 역사란 인식이 가장 인상깊게 드러난 장면이 개인적으론 '안'과 그 가족이 백숙을 먹다가 갑자기 경찰이 들어오는 바람에 '안'이 다락방으로 숨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안'은 서둘러 숨느라 그만 다락방 문을 닫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 때 '선'은 이미 아버지로 인해 가장 친한 친구인 '진'과 짝사랑하던 '민'에게 버림받은 후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일대로 쌓여 있었다.  그는 선에게 제발 문을 닫아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래 착하지. 이제 문만 조용히 닫으면 끝나. 문을 잡고 선 딸애의 얼굴. 아무 표정이 없다. 넋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문을 붙들고 선 채 꼼짝도 않는다. 텅 빈 눈. 아무것도 담지 않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동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 침묵의 눈. 침묵 조차도 숨겨버리는 절대적인 암묵의 구멍 (P.155) 
 

  하지만 선은 문을 닫지고 그렇다고 경찰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문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안은 경찰이 물러간 뒤 내려와 딸애를 본다.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기 내 아내와 딸애가 있다. 문득 딸애의 눈빛이 뇌리를 스친다. 딸애의 눈에 순간적으로 감아돌던 밫은 아버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딸애는 버러지를 보고 있었다. 발정난 개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경멸과 혐오, 절망과 증오, 복수와 처벌을 다짐하는 결의의 눈빛(P.159) 
 

  '안'도 이렇게 느낄 만큼 '선'의 원망은 컸다. 그런데도 왜 대관절 그녀는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것일까? '부녀지간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겐 좀 다르게 읽혔다. '선'이 만일 경찰에게 그대로 알렸다면 아버지는 체포되고 아버지는 배신감에 부녀지간은 어쩌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러한 '선'의 행위는 불가사리의 다리를 잘라내듯이 그 역사를 그대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할 터이다. 그렇게 완전히 망각해버리는 것을. 하지만 '선'은 계속 열려진 다락방 문을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갈등을 하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겠지만 내게 이 모습은 왠지 우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렇게 완전히 우리에게 달라붙어 함께 안고 가야할 역사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다. 닫을 수도 활짝 열수도 없는... 그렇게 혐오와 포용을 함께 안고 짊어지고 가야하는 절대로 도려내질 수 없는 불치의 환부 같은 것이라고... 

  그래, 환부이다. 불치의 환부...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안고가야 하는 환부... 

  고통스럽다면 왜 안고가야 하는가?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안고가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은 역설적이다. 우리가 안고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니까 그것을 안고가야 하는 것이다. '생강'에서 '선'은 일상에서 문득 문득 아버지의 어둠이 엄습해 올 때 마다 반드시 고통을 느낀다. 민가협의 시위 현장에서도 대학을 그만두고 일하던 미용실에서 '진'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렇다. 고통을 받는 건 기억하기 위해서다. 고통이 그 시절의 기억을 육체에 새겨주기 때문이다.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껴 안아야 한다. '안'은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린 계집에게 자기 몸에다 채찍질을 하라고 한다. 낯선 남자는 자신의 육체에 고문받을 때 들었던 라디오 방송이 생생히 새겨져 있다고 호소한다.  

  '생강'에서 모든 고통은 육체에 잔인하게 각인된다. 그렇게 되어,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고통은 현상되는 순간, 우리에게 바로 그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  '생강'의 후반으로 갈수록 기억한다'는 건 아주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선'은 끊임없이 다락방에 숨은 아버지에게 그가 한 일이 기록된 신문 기사를 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스크랩한다. 

  당신은 장물이었다. 담벼락에 숨겨둔 스티커 쎄트 처럼, 내가 직접 훔친 것은 아니지만 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께림칙한 장물이었다. (...) 당신을 잊고 싶었다. 무시하고 외면하고 아주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잊을 만하면 신문에 당신의 이름이 실릴 때나 연례행사처럼 미용실을 찾아오는 기자들을 마주할 때면, 그제야 그들이 지목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그렇게 당신은 유령이 되었다. 다락방의 유령.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가끔씩 자신의 존재를 어떤 신호나 징후로 보여주는, 한밤중에 다락 바닥에 덧댄 나무합판을 들썩이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당신은 다락방의 유령이었다. (P.255) 

   기억하는 건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더이상의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다.  

  낯선 남자는 고문 받을 때 자신이 허위 진술한 대가로 희생당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세상에 '붉은 방'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선량한 가족이었지만 결국은 모두가 정권유지를 위해 희생당해 버린 가족의 이야기를.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으로 자신의 육체에 각인해 놓고 있었다. 잊지 않기 위해서.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날 미용실을 찾아온 다른 낯선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잘못된 과거를 그냥 숨겨두고 묻어두면, 언젠가는 그게 다시 유령처럼 튀어나와서 똑같은 과올르 저지르게 되어있거든. 난들 그 때의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니? 내가 내뱉은 이름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서 희생되어야만 했던 사람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인걸. 그러니까 역사는 말이야, 그런 과거의 유령들 때문에... 그래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 예전에 안이 나를 도왔던 것처럼." (P.254)  

  '선'은 이 남자의 이야기를, '낯선 남자'의 이야기를, '안'의 이야기를 듣고 모으고 또다시 우리에게 들려준다. 다시는 이러한 어둠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선'이 지금 시대의 우리를 대표하는 존재라면 이로써 천운영이 왜 하필 지금 그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고통스런 경험을 하게 만드는가는 보다 분명해진다. 그건 비단 그 '괴물'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운영이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바라보게 하는 건, 그 괴물의 내면이 아니라 사실은 그 괴물을 탄생시켰고 활개치게 만들었던 그 '시대' 자체인 것이다. 그 '시대'가 어떠한 시대였는지, 그것이 간직한 어둠이 얼마나 깊었는지 또한 얼마나 편협한 눈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생생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왜? 인용한 한 남자의 말에 잘 나와있듯이, 또 다시 그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시절이 어떠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부분은 더더욱 우리가 기억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슬금 슬금 그 괴물이 다시금 나오려고 한다는 걸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뭣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 또한 분명하게 그 괴물들이 날뛰었던 시대로 역행하고 있다는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생강'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은 '선'이 미용실의 점심 시간 우연히 엿듣게된 동료들의 대화에서이다. 그 중 한 여자가 김치를 먹다가 생강을 씹었다고 말한다. 어쩌다 씹게 되는 생강의 맛... 행여 당신이 이 소설을 읽게된다면 그렇게 이 소설 역시도 당신이 우연히 씹게된 생강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강은 모든 음식에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중의 하나다. 사실 우리가 그 맛을 인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매일 어디서고 우리는 생강을 삼키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단단히 결부된 그 어둠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도 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삼키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그 맛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생강이 아주 잘게 썰어있기 때문이다. 그 어둠의 역사가 생강의 맛과 같다고 한다면 우리가 그 맛을 잘 못 느끼는 이유도 이와 같지 않을까? 누군가 우리 전에 미리 그 생강을 덩어리째 삼키고 잘게 빻아놓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 또한  다시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기억하기 위해서 스스로 생강을 덩어리째 삼켜왔던 사람들 덕분이라고... 때문에 더더욱 비록 괴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혐오나 공포를 무릎쓰고서라도 이 소설을 삼킬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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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만의 비밀스러운 삶
아틀레 네스 지음, 박진희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혹시 그런 때가 있지 않은지? 문득 길을 걷다가 절반 정도 왔는데 생각해 보니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구나 분명 제대로 목적지로 가는 길로 왔는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걸으면 걸을 수록 자꾸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들 때가...  어쩌면 이것은 비단 길을 걸을 때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도 불현듯 엄습해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내게 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때가... 

    바로, 노르웨이 작가 아틀레 네스가 그려내고 있는 소설 '리만의 비밀스러운 삶'의 주인공 역시도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수학자이고 '소수'란 것에 매료된 나머지 수학자로서의 인생을 조금의 의심도 없이 현재까지 이어온 사람이다. 그는 교수이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까지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문득 자신이 제대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꿈꾸던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 즉 꿈을 실현한 내 모습에 끌렸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젊은이로 여겼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잘 모르겠다.(P.14~15) 

  그가 이렇게 느끼게 된 것은 나이 때문이다. 

 마흔살이 된다는 것은 현대 수학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다. 죽은 알프레드 노벨은 유언을 작성할 때 수학자인 우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우리 수학자에게 노벨상 같은 큰 영광이라고 한다면 필즈상이다. 물론 아벨상도 영예롭기는 하지만,  사 년 마다 주는 필즈 메달이야 말로 가장 명예로운 상이다. 어떻게 보면 올림픽의 금메달과도 같다. 그러나 이 상에는 특별한 추가 조항이 있다. 바로 나이 제한이다. 마흔 살 이전의 수학자에게만 수여되는 것이다. 나는 최종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없고, 올림피아드 승자도 아니며 국내 대회 결승에도 진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꿈은 항상 수학 올림피아드의 금메달이었다. 나는 금메달을 손에 쥐는 모습을 그리며 정말 열심히 연구했지만 이제 마흔세 살이 되었기 때문에 소용없게 되었다. 대신 나는 리만의 평전을 쓰면서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P.42~43)

  이렇게 나이로 인해 더 이상 의미있는 수학적 업적을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려 한다. 그것은 바로 곡면기하학으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감을 주었고 아직까지도 증명되지 못하여 영원한 미제로 남아있는 가설 때문에 불멸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수학자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이다. 그 평전이 그에게 그만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리만이 40세라는 짧은 인생을 산 데다가 남긴 논문도 몇 편 안 되어 그의 삶이 그가 수학에 미친 영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밖에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만의 삶은 짧고 특색이 없다. 그러나 그의 발견은 영원성을 지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가난하고 의기소침하며 서툰 왼손잡이에 폐병까지 걸린 사람이 쓴 가설이 후세에 미칠 영향력과 파급력이 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설은 완벽한 증명없이 오로지 그의 직관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P.111)

  리만의 영원히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풀기위해서라도 그는 리만의 삶이 제대로 세세하게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그는 석 달이 지나도록 하나의 문장 밖에는 쓰지 못했고 여기에서마저 한계에 봉착한 그는 아무래도 글 쓰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되어 작문 교실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 여인 잉빌드를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실종된 상태로 나타난다. 그의 딸은 혹시 그를 찾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의 컴퓨터에서 찾아낸 일기를 경찰에게 건네준다. 바로 이 일기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독자는 처음부터 하나의 호기심 - 그는 왜 사라진 것일까? -을 가지고 그의 일기를 읽게 된다. 미스터리를 푸는 것은 사람이 가진 근원적 욕망중의 하나라서 그의 일기에 나온 모든 문장은 그래서 무심히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일기는 어떤 일기인가? 

 그것은 바로 그가 스스로 필생의 프로젝트로 여기는 리만의 평전을 써가는 동안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일기이다. 그렇게 모든 일기가 그렇듯이 아주 개인적인 내밀한 고백까지 다 담겨져 있다. 평전의 일부인 리만의 삶의 모습 뿐만이 아니라 그 평전을 쓰면서 느끼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이나 잉발드를 만나 새롭게 사랑의 기쁨을 느껴가는 과정까지 다 담겨져 있는 r것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보다 분명한 목적, 주인공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읽기에 이 모든 내밀한 고백들이 언젠가는 우리 앞에 그 이유를 제시해 줄 것으로 믿지만 당신은 아마도 수백년동안 수많은 수학자들이 덤벼들었으나 풀어내지 못한 리만 가설 처럼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분명, 이 소설 역시 영원히 당신에게 '리만 가설'로 남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읽기 보다는 처음에도 말했듯이, 문득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 남자의, 그렇게 불현듯 가야할 방향을 상실한 자가 느끼는 갈등을 오롯이 건져낸 자기 고백적인 글로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물론 여기서의 갈등은 새로운 길을 걸으려 할 때 늘 따르게 마련인, 늘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감과 그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들었을 때 늘 따라다니게 될 불안감 사이의 갈등을 말한다. 쉽게 말해 늘 우리에서 살아온 동물이 갑자기 그 우리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 자기 앞에 놓여진 그 광막한 초원 앞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그 불안감 때문에 더 유혹적으로 다가오는 우리 안에서의 안정된 삶 사이의 그런 갈등이다. 이렇게 보면 이 소설은 단순히 말해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세계란 각각 아내인 키라로 대표되는 늘 유지해 온 삶의 궤도를 따르는 안정된 세계와 잉발드로 대표되는 이전의 삶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세계를 말한다. 

  정확히 주인공은 언제나 그 두 세계 사이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가 리만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도 아마도 사실은 그러한 욕망,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욕망에서 발현되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리만은 그 당시까지 정설로 내려오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로써 새로이 '곡면기하학'이라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정초해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해 유클리드 기하학이 '평행한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면 리만의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아무리 평행한 직선도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리만의 기하학은 완전히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벗어났고 그렇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전복시켰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으로서 뉴튼의 기계론적 물리학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리만의 기하학이 가진 전복적인 힘을 생각한다면 당연해 보인다. 아마도 이렇게 리만이 당시의 통념으로 부터 벗어난 완전히 자유로운 사유를 하는 수학자였다는 것이 주인공 역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자'라는 점에서 유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리만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왕정을 선택했을 때 그렇게 실망을 느꼇던 것이고 리만이 다시 히노버의 자유로운 체제 아래에서 괴팅겐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렇게 믿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나는 리만이 사고의 자유를 부르짖는 하노버의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사상 때문에 괴팅겐으로 돌아왔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P.122) 

  하지만 그렇다고 리만이 전혀 자유로운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가난했고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늘 자신의 가족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했다. 일상속에서 그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수학'에서 뿐이었다. 이것은 지금 주인공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언제나 가정의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 아이들 때문에 근심이 끊이지 않고 아내 카린은 그에게 늘 정신이 딴 데 가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그가 유일하게 자유로움을 느낄 때는 언제나 잉빌드와 함께 할 때 뿐이다. 그렇게 리만이 수학을 통해 자유로웠듯이 주인공은 잉빌드를 통해 자유를 얻는다. 따라서 사실은 이 소설에서 리만은 그대로 주인공의 도플갱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자유엔 늘 불안이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아틀레 네스는 바로 이러한 불안감을 소설에서는 불륜으로 인한 불안감으로 치환해서 보여준다. 주인공과 잉빌드는 서로 거세게 끌리지만 서로가 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기에 늘 극도로 조심하고 주위 상황에 예민하게 대응한다. 사실 이러한 불안감은 소설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아마도 안정과 자유 사이에서 주인공이 늘 갈등하고 있음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리만의 평전과 새롭게 사랑을 엮어가는 과정으로서의 이 소설은 본래는 다시 새로운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자의 내면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네스는 이러한 내면을 충실히 복원만 할 뿐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대로 '과정으로서의' 소설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고 작가 역시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주인공의 실종이 그 어떤 대답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실종은 그저 단순한 사라짐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같다. 소설이 끝났을 때 모든 등장인물이 사라지듯이... 그런 정도의 의미 밖에는 없는 단순한 사라짐... 그렇게 이 소설엔 그 어떤 결말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나면, 이 소설에 지속적으로 나오는, 주인공 역시 매혹시켰던 '소수'의 존재 때문이다. 

  골드바흐는 이미 삼백년 전에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추측을 발표했다. 이 명제는 소소한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마치 수학선생님이 수업시간 끝나기 십 분 전에 새로운 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골드바흐의 추측은 오늘날까지 완벽하게 증명되지 못했다. 이처럼 소수를 공식으로 증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수는 모든 규칙을 벗어나 안전한 보호막 속에 있기 때문에 연구 가치가 있다.(P. 14)   

   여기서 보듯이 소수란 단적으로 말해 불규칙적인, 다시 말 해 규칙에서 벗어난 '얼룩' 같은 존재이다. 소수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이 모든 규정하려는 것으로 부터 탈피한다. 어떤 것을 공식화하려는 순간 불현듯 뛰쳐 나와 그 공식을 전복시켜 버리는 존재. 그것이 바로 소수인 것이다. 그렇게 소수는 모든 불확실성으로 열려진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 있다. 누구도 소수를 공식화 할 수 없듯이, 삶이 무엇인지 정의내릴 수 없다. 우리는 늘 '왜 사는가?'하는 의문을 입버릇 처럼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일쑤이지 않는가? 소수가 모든 규정성을 벗어나듯이 우리네 삶 또한 그렇게 모든 규정성으로 부터 벗어난다. 그 어떤 결말도 내지 않고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버린 결말은 어쩌면 작가 자신이 문학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작가는 왜 굳이 자신의 소설을 '소수'적인 것으로 구현하려 한 것일까? 바로 이 소설 말미에 나오는 리만 자신의 미발표 논문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소수가 어떻게 사라지지도 않고 영원히 무한의 길을 가는지 그 이유에 대해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가는 길 중간에는 소수가 전혀 없거나 기나긴 구간이 있었다. 이 숫자들은 예언 시대 이전인 태고적부터 존재해왔다. 우리는 이 수를 잡지 못하고 선회하면서 모호한 중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신은 만물의 모습을 통해 현현하신다. 소수는 특별한 방법으로 그가 남긴 족적이자 신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실재한다는 흔적이다. 우리가 수학을 신의 위치인 고차원에서 바라보면, 의심할 바 없이 n차원 공간에서 소수가 신의 규칙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숫자가 어떻게 흥미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P.271)

   소수는 인생의 신비를 구현하고 있다. 소수의 비밀을 아는 것은 리만의 고백에서 보듯이 우리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 것과 같다. 신의 규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로 네스는 자신의 소설을 굳이 '소수'적인 것으로 만드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는 소수가 영원히 무규정적이듯이 그렇게 일부러 결말을 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이는 아틀레 네스의 이전작들을 생각하면 보다 명확해진다. 그의 이전작들 대부분은 모두 한 개인의 삶을 충실히 복원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작품에서 주로 한 인간의 삶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많은 삶의 모습을 세밀히 바라보았던 그였던 만큼 소설이 인생을 어떻게 구현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분명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소설 역시도 그러한 고민 끝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동안 타인의 삶에 천착해서 충실히 복원해왔던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이렇게 '과정으로서' 그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작가의 진실한 태도라고 여긴다. 그것은 인생이 가진 신비 앞에서 작가는 겸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리만이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평생 소수에 집착했던 그토록 가우스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었던 리만 마저 소수가 가진 신비 앞에 스스로를 낮추었다면 작가 역시도 소수를 닮은 인생의 깊이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그는 그 어떤 선택도 주인공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그냥 그대로 '공백'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라 여긴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기로에 선 존재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그려가는지 충실히 담아내는 것만이 전부라고... 

    혹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고 다른 길에로의 유혹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이 소설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여기엔 그 어떤 해답도 없지만 어떤 고민들은 굳이 해답을 구하지 않고 다만 천착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행이 이 책은 작고 가벼워서 어디서든 들고 읽을 수도 있으니, 문득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 한 조각이 괜스레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운다면 자판기 커피를 마시듯 홀짝여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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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절대 화장실에선 읽지 말 것. 너무 오래 있게 되어 민폐를 끼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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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4-20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분은 화장실에서 읽기를 권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였군요. 물론 저는 화장실에서 책 읽지는 않지만요^^

ICE-9 2011-04-22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거 제 경험담이에요. 화장실에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너무 오래동안 있어서 불평을 좀 들었거든요^ ^;
 
<소설>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9기의 신간평가단이 되었다. 

 "내가 내딛는 것은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로서는 커다란 발걸음이다."라고 달에 자신의 발을 내딛으며 

 닐 암스트롱이 했던 이런 정도의 말을 나 역시 당당히 말하며 

 이 첫 시작을 해보고 싶지만... 뒷감당이 두려워 못 할 것 같다. 

 그저 작지만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할 것 같다.

 아무튼 신간평가단 초보의 얼렁뚱땅  엉기성기한 주목 신간 

 그 첫 발걸음을 이렇게 내딛는다. 

    

    나의 신간평가단 첫 주목 신간 그 역사적인 시작은... 

   당연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류 작가중 하나인 조이스 캐롤 오츠의 '블론드'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특히 한 개인사를 다루는 데 아주 뛰어나다. 그녀는 소설에서 복원하고자 하는 개인의 역사를 마치 그녀 자신이 그 개인이 된 양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가장 가느다란 감정의 선까지 다 놓치지 않고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 그러면 아주 지루할 것 같지만 그런데도 신기하기도 하지 꽤나 재미있다. '멀베니이 가족' 같은 경우 그 어느 소설 보다 읽히는 속도가 빠르다. 그만큼 그녀의 소설은 깊이와 재미 모두에 있어 만족을 준다. 마를린 먼로의 일생을 다루는 '블론드'는 특히나 그녀의 장기가 발휘되는 개인사라서 더욱 기대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그녀의 최고 걸작중 하나라고 평가받고 있는 것 같다. 3권 분량의 소설이라 이 소설이 선택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매력을 느꼈으면 해서 추천해 본다. 

 

 

 

  이 22개의 단편집에 나오는 슈퍼히어로들을 보면 왠지 소오강호에서 초야에 묻혀사는 독고구검을 구사하는 절대 고수 풍청양이 생각난다. 

 우연히 그를 만나 영호충이 왜 그런 실력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이런 초야에 짐승처럼 은둔해 사시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절대 고수라도 인간인게야... 그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적이 가족이나 연인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으면 질 수 밖에 없지... 그래서 나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를 지우기로 했다네...라고. 

 결국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졌다 하더라도 아무리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것이다. 지구를 구하는 능력이 있어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기엔 한없이 나약한게 인간이다. 그런데 그 모순은 한계일까 아님 오히려 매력일까? 이 소설을 통해 한 번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처음 '시인'을 읽었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이 가져다주는 재미에 놀랐다. 두번째 해리 보슈의 작품을 만났을 때는 가지고 있는 깊이에 놀랐다. 

 마이클 코넬리는 마치 휴지에 물기가 스며들듯 그렇게 서서히 사람을 침잠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다. '링컨 차를 모는 변호사'의 미키 할러 같은 닳고 닳은 변호사라 해도 왠지 그가 'LIVE AND DIE IN L.A'를 들으며 홀로 잠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

지옥도를 그렸던 히에로니 보슈의 이름을 따온 보슈, 그렇게 그가 거니는 세상 역시 그대로 지옥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 지옥같은 세상을 함께 살고 있기에 오히려 보슈는 연민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희망을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범죄는 지옥의 확인이자 더 나음을 향한 반면교사가 된다. 언제나 신뢰를 주었던 보슈의 여정을 이번에도 함께했으면 싶다. 

 

 내가 주목하는 신간은 이 세가지 이다. 첫 시작이니 만큼 조금은 특별하게 뭔가 엑기스한 것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 많이 주목하는 '넘버 3'만... 이건 그 만큼 무지무지 이 책들을 읽고 싶다는 내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과연 어떤 책이 선정되어 내게 올지 모르겠으나 첫 신간평가단으로 받은 책이니 만큼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오늘 4월의 봄볕이 아주 따스했다. 만나게 될 책에 대한 두근거림도 그렇게 한동안 내 일상을 채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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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인베이젼 - World Invasion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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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이상 지구상에는 미국의 적이 없어서 그런지 최근 헐리우드 영화에서 다시금 예전의 50년대 처럼 외계인 침공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자주 눈에 띈다. 

 물론 이 영화 '월드 인베이젼'도 그러한 영화들 중 하나이다. 

 '월드 인베이젼'이란 제목과 외계인 침공이란 소재 때문에 2005년에 나왔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War of the Worlds)이 자주 연상되어 떠오른다. 제목과 소재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화는 그러나 참 다른 영화들이다. 물론 '월드 인베이젼'은 군인의 입장에서 '우주전쟁'은 민간인의 입장에서 다룬 영화들이긴 하지만 이 차이는 그러나 그리 본질적이지는 않다. 왜냐면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신분적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이 두 인물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두 인물은 모두 주류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월드 인베이젼'의 주인공 낸츠 하사는 아프간에서 있었던 일로 젊은 병사들로 부터 고립되어 있다. 첫 장면에서 영화는 낸츠가 해변의 구보에서 나이 어린 병사들에게 자꾸 뒤처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병사들은 그를 한물간 노땅으로 취급한다. 낸츠 하사도 자신이 이미 무력해졌음을 알고 퇴역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우주전쟁'의 주인공 역시 가족들로 부터 버림받은 신세다. 자기 멋대로이고 무책임한 성격 덕분에 그는 진작에 아내로 부터 이혼 당했고 아이들 마저 이미 재혼한 아내에게 다 빼앗겨버린 상태다. 정기적으로 자식들과 만나지만 자식들은 아무도 제대로 아버지로 대해주지 않는다. 그는 늘 소통하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들로 부터의 냉담한 반응 뿐이다. 

 이렇게 둘은 사실상 비슷한 처지이다. 그런데 그들 앞에 갑자기 외계인이 침공해 오기 시작한다. 낸츠 상사는 하필이면 퇴역 하루 전날, '우주전쟁'에서는 하필이면 아이들을 맡게 된 날이다. 

 '하필이면'이다. 외계인은 왜 하필 그 때 침공해 오는가?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고 여기엔 침공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즉, 이 영화들에서 침공은 주인공들이 다시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한 일종의 '계기의 촉발'이자 영웅에게 흔히 주어지는 시련 처럼 '통과의례'라는 것을 뜻한다. '통과의례'라는 것은 결국 영웅을 보다 더 영웅답게 만들어주기 위한 '연단'의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통과의례'는 겉으로는 시련이라는 외피를 둘러쓰고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영웅의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영화에서 집단적 비극으로 겪는 전쟁은 주인공 개인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이뤄가는 과정으로 전이 된다. '월드 인베이젼'에서 낸츠 하사는 퇴물 취급이나 받는 노땅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만 병사가 우러러 보는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나고 '우주전쟁'에서는 전쟁을 경험하면서 가족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진짜 아버지가 된다.  

그런데 이 두 영화는 각기 현 시대의 미국이 처한 위기에서 촉발되어 나왔다. '월드 인베이젼'은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의 급속한 몰락과 점차 커지는 중국으로 인해 점점 그 패권적 위치를 잃어가는 현재의 미국에 대한 위기에서 비롯되었고  2005년에 개봉된 '우주전쟁'은 2004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001년의 그 끔찍한 9/11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초래했던 부시가  다시 당선된 것에 대한 미국인들의 당혹과 충격, 그 정신적 공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미국이 겪고있는 위기로 부터 비롯되었지만 계기는 이렇게 달랐다. '월드 인베이젼'은 그 위기가 외부적이었고 '우주전쟁'은 내부적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월드 인베이젼'의 주인공은 신분이 군인이고 '우주전쟁'은 민간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앞서도 말했듯이 주인공들의 신분적 차이는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각 영화들이 위기의 계기를 어디에서 상정하느냐에 따라 두 영화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데 있다.  

  헐리우드영화에서 전쟁을 소재로 할 경우 주제는 크게 잡아서 대략 두 개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하나는 올리버 스톤의 '플래툰' 처럼 전쟁을 치뤘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적'인 영화들이고 다른 하나는 '람보' 같이 특히 패전한 전쟁의 기억을 불러와 그것을 영화를 통해 보복함으로서 미국이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영화들이다. 
 [주) 프로파간다(propaganda)'라고 하며, '어떠한 사상을 강요하거나 주입하기 위한 목적의 선전, 교육 등의 활동 ]  

 그렇게, 오로지 위기의 계기를 외부적인 것에만 찾고 있는 '월드 인베이젼'은 프로파간다로의 길을 걷는다. 반면 내부적인 것에서 그 계기를 찾는 '우주전쟁'은 성찰적인 길을 걷는다. 

 '월드 인베이젼'에 대한 글이므로 거기에 국한시켜서 보려한다. 

  하면, 어째서 이 영화가 프로파간다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보자면 영화의 도입부 그러니까 주인공이 해변에서 구보하고 있는 장면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옆으로 패닝하면서 뛰어가는 일단의 군인들을 잡는다. 거기서 화면은 Zoom In 해 들어가 뒤처지는 주인공 낸츠 하사를 보여준다. 그는 나이 어린 병사들이 자기를 마구 앞질러가자 곤혹스러워한다. Zoom In 해 들어간 화면은 낸츠 하사를 앞질러가는 병사들을 보여준다. 거기엔 흑인 동양인 히스패닉계 등등으로 아주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다. 이 장면이 뜻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 인종 모두는 각각의 국가들을 뜻하며 그들이 하나 둘 미국을 앞질러 어느새 미국은 뒤쳐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낸츠는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는다. 이게 지금 모든 국가가 생각하는 현재 미국의 위치이기도 하다. 그의 고립은 바로 미국의 고립이다.

 

 

 

 

 

 

 

 

 

 

 

 그런데 그런 낸츠의 자리가 확인된 순간 갑자기 외계인의 전면적인 공습을 받게 된다.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 때 퇴역 신청을 내고 물러나 있던 낸츠 하사는 다시 전장으로 투입될 것을 명 받는다. 여기서도 이 영화의 프로파간다적 의도가 명백하다. 영화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봐라! 미국이 뒤로 물러나 있으니까 이렇게 침공을 받지 않나. 너희들이 미국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았을텐데 말이야."하고... 더 경악스러운 것은 히스패닉 소대장이 낸츠 하사가 속한 소대를 이끌고, 각 대원들이 낸츠 하사 보다는 소대장을 더 믿고 따를 때 소대원들이 마구 죽어나간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전면 침공의 모습과 더불어 소대원들의 계속된 죽음은 낸츠 하사에게 제대로 된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은 탓 때문이라는 걸 영화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해서, 당연히 세상을 이렇게 만든 그 책임의 대표자로서 히스패닉계 소대장은 죽고 낸츠가 그 뒤를 이어받게 된다. 그 뒤 부터는 일사천리로 승리의 행진을 계속한다. 급기야 그는 구조한 한 가족의 아버지로 부터 아버지라는 자리마저 물러받음으로서 더욱 더 리더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진다. 군인들이야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를 수 있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민간인들마저 '아버지' 자리를 양도하겠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의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암묵적 의사표시이기 때문이다.(아버지가 히스패닉계라는 설정은 왠지 현재 미국과 베네수엘라의 관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낸츠 하사가 완전히 확고한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자 마자 이제 더이상 외계인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다양다종한 인종들로 구성된 그야말로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한 소대는 이제 미국 낸츠 하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오로지 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덕분에 모든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마구 학살당하는 것은 외계인들 뿐이다. 

 그 거대한 외계의 함선이 무너질 때 최종적으로 영화는 이렇게 선언하는 것 같다. 

 "보라! 미국을 중심으로 이렇게 뭉치니 세계는 결국 구원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현재 미국의 위기를 온전히 남탓으로 여긴다. 그들이 미국을 믿지 않아서 그들이 미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현재 미국의 위기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세계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호소는 오로지 미국 국민들에게 향하고 있다.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BATTLE IN LA'이다. 가상전쟁을 다룬 영화에서 이렇게 미국의 고유 영토명이 나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중의 하나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바로 이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지금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위기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전쟁의 원인이 바로 모든 나라들이 예전처럼 미국을 믿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자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미국 국민들이 겪고 느끼고 있는 모든 위기는 모든 국가들이, 병사들이 그렇게 낸츠 하사를 믿고 따랐던 것 처럼 미국을 믿고 따라와 주기만 하면 깨끗이 해결될 것이라 설파한다. 그러니 자국민들이여 더욱 더 미국을 위해 뭉쳐라! 정말로 노골적인 프로파간다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럼, 같은 위기를 내부에서 찾았던 '우주전쟁'은 어째서 성찰적이라고 하는 것인가? 

 간단히 살펴본다. 낸츠 하사처럼 이 영화의 주인공도 역시 가족들로 부터 소외되고 아버지라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영화는 바로 그 이유가 주인공 자신에게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 인물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못 믿을 인물인지 또한 아버지로서 모자라는지 보여준다. 그 뒤에 외계인의 침공이 일어난다. 외계인의 첫 공격 대상이 교회라는 건 참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부시의 재선에 결정적으로 공을 세웠던 세력이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그 영화에서 외계인들은 차례로 미국인들을 안전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을 부셔간다. 어느새 미국인들은 학살의 위기에 노출된다. 영화는 그 위기가 바로 아버지가 제대로 아버지가 되지 못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준다. 중반에 스필버그는 2차대전의 유태인 학살의 기억까지 가져옴으로서 그 아버지 답지 못함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주인공이 전쟁을 통해 겪는 여정은 그야말로 진정한 아버지가 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진정한 아버지가 된 때 외계인은 느닷없이 종말을 맞이한다. 

  

 스필버그는 미국의 위기를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미국인들 자체에 그 위기의 원인이 있다고 영화를 통해서 말한다. 모두가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끔찍한 부시의 재선이 일어났다고 말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이란 어떤 이해 타산에도 굴복하지 않고 미국의 건국 이념이 되었던 숭고한 정신적 원칙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우주전쟁'의 가장 마지막 가족들이 진정으로 해후하는 장소가 '하필이면' 미국 건국의 중심 '보스턴'이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005년 스필버그는 이렇게 위기의 원인과 그 해답을 내부에서 찾았건만 2011년의 지금 미국은 어찌하여 남탓만 하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마도 서브 프라임 이후 그 정신적 충격 탓으로 스필버그가 진단한 그대로 아직도 미국인들이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프로파간다가 성행하는 것은 국민들이 정신적 공황을 느끼고 있을 때이다. 그렇게 지금 이 영화 '월드 인베이젼' 이 프로파간다로서 기능을 한다는 것은 현재 미국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지 보여주는 징후라고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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