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의 함정 동서 미스터리 북스 119
세바스티앙 자프리조 지음, 지정숙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존 말코비치 되기'의 스파이크 존즈가 감독하고 역시 같은 영화의 각본가이자 '이터널 션사인'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찰리 카우프만이 함께 만들었던 '어댑테이션' 이란 영화가 있다. 거기서 분명 찰리 카우프만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동생 니콜라스 케이지가 자신에게 기막힌 아이디어가 있다면서 형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단 이건 스릴러인데, 사건이 일어나면 형사가 범죄자를 쫓지. 그런데 결국 형사와 범죄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게 밝혀져. 형사는 사실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 쫓고 있었던 거지..." 라는.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슬그머니 그 초짜 시나리오 지망생인 동생에게 이렇게 비웃고 싶어진다. 

 "이봐요, 몽상가 양반. 꿈도 야무지시군.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아이디어라고 내밀다니. 당신보다 훨씬 이전에 한 프랑스 작가는 범죄자와 탐정 뿐만이 아니라 증인과 피해자 역할까지 모두 한 사람이 하는, 그야말로 1인 4역이라는 전무후무한 미스테리 소설을 이미 써 버렸단 말입니다." 하고. 

1인 4역? 

 범죄자와 형사 뿐만 아니라 증인과 피해자까지 모두 한 사람일 수 있는 게 과연 가능할까?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다. '뭔가 말도 안되는 트릭을 믿으라고 강요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했다. 별다른 트릭도 없었다. 흔해 빠진 기억상실증 그게 다였다. 그런데도 소설이 끝날 때까지 흥미진진. 도대체 결말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서 페이지 넘기기를 그만두기가 어려웠다. 이게 가능할까? 오로지 한 인물에만 집중해서, 오로지 플롯의 기교로 독자를 작품의 세계에 가둬두는 게 가능할까? 그런데 가능했다는 거다. 놀라웠다. 

 혹자는 '기억상실증' 이라는 아주 편리한 방법을 썼다고, 트릭이 너무 진부하다고 혹평을 하기도했다. 비판 받았던 대로다. 이 소설은 아주 전형적인 트릭을 쓴다. 하지만 아무리 망가진 붓이라도 오언 장승업의 손에 들어가면 걸작을 그려내듯이, 아무리 전형적이고 진부한 트릭이라도 작가가 어떻게 능수능란하게 플롯을 엮어가느냐에 따라 놀라운 효과를 발휘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진부한 트릭이라는 것은 사실 이 소설에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뻔한 트릭을 가지고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플롯의 구성, 그리고 그것을 엮어내는 작가의 역량이 그것을 넘치도록 보완해주고 있기 때문에. 

 미스터리 소설에서 트릭은 중요하다. 아무래도 기발한 트릭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소설을 끝까지 읽도록 만드는 동력이 된다. 그럼, 미스터리 소설에 있어서 트릭과 플롯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 것일까? 

 '트릭'이라는 것은 데리다가 말한 일종의 PARERGON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PARERGON은 '장식'이란 의미로 데리다에 따르면 '작품'을 의미하는 ERGON에서 보자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론, 데리다는 장식을 부수적인 것으로 보는 서열의 매김이 본질 우위에 젖어있던 희랍 철학 이래의 부산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장식' 자체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렇게 미스터리 소설에서 만큼은, 트릭은 어디까지나 '장식적인 것'으로 아무래도 탄탄한 플롯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어딘가 밋밋하고 앙꼬 없는 붕어빵 처럼 심심해져 버릴게 분명하다. 물론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트릭은 역시, 장식이 그 바탕이 되는 작품과 온전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그 빛을 발하는 것처럼, 그렇게 작품의 주요한 뼈대가 되는 플롯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는 것 같다. 뭐, 이런 내 생각조차 데리다는 유기체적 사고의 독단에 빠져있어서 그런거라고 한 소리 하겠지만서두... 

 물론, 미스터리 소설은 탁월한 트릭이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트릭이 훌륭하면 플롯의 허술함이 어느정도 상쇄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론 훌륭한 트릭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트릭이라도 플롯의 허술함을 보완해 줄 수 없지않을까 싶다. 아니, 애초에 트릭이 '훌륭함'을 느끼려면 플롯이 탄탄히 바쳐주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러니까 진짜 문제는 트릭이 플롯에서 얼마나 적재적소에 있냐는 것이리라. 트릭이 자기 자리를 잘 차지하고 있을 때, 그렇게 장식이 작품에서 온전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양쪽 모두가 더욱 더 빛을 발하는 일종의 플레시보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진부한 트릭이라도 플롯이 훌륭하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거꾸로라면 아무리 기발한 트릭도 허술한 플롯 탓에 원했던 효과를 독자에게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조금은 급작스럽게, 트릭과 플롯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당신이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만일 미스터리 소설을 쓰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아니 창작의 열정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미스터리 장르물을 좋아하는가 혹은 매혹되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면 당장 이 소설을 읽는 것이 좋다. 

 탁월한 플롯이 얼마나 작품을 놀랍게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니까! 

 이 작품에 대해서는 단지 이 말을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자프리조의 '신데렐라의 함정' 불어판 표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당신은 이 책의 탁월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번역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동서 미스터리 문고는 70년대 발간되었던 그대로 지금 발간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적 간격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차이로 인해 어색한 문장들이 많다. 거기다 일본어 중역이기 때문에 우리말 같지 않은 표현들이 이 소설의 매력을 맛보는 데 더욱 더 훼방을 놓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책 후반에 실린 자프리조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살인급행 침대열차'이다. 이 소설 역시 꽤 매력적인 소설이지만 '신데렐라의 함정' 보다 더 번역이 엉망인지라 그 매력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하고 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특히 번역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장 상황을 제대로 독자가 알 수 있어야 나름의 범인 추적도 가능해지니까 말이다.  미스터리 소설이 여타 다른 장르 문학과 차별되는 점은 작품 스스로가 독자를 단지 지켜보는 관객이 아니라 마치 같이 경주라도 벌이려는 것 처럼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시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벨라스케스가 그림 '시녀들'에서 그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상정하고 그렸던 것과 같다. 

 그런데, 번역이 엉망이면 독자는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거기다 탐문과 심문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장르의 특성상 엉망인 번역은 독자들에게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결국 독자를 소설의 흐름에서 소외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결국 미스터리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만다. 독자가 적극적 참여자가 되기는 커녕 구경꾼 노릇 조차 제대로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이만큼, 미스터리 소설에서 번역은 정말 중요하다. 미스터리 장르를 일종의 스포츠로 인식하고 독자와 공정한 게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 녹스는, 독자와 공정하게 게임하기 위해서 작가가 쓰면서 지켜야 할 10가지 규칙을 마련한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통해 미스터리 작품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여기에 한 가지 규칙을 더 집어넣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즉, '정확하고 올바른 번역이라야 독자와의 공정한 게임을 보장한다'고 말이다. 

  '살인급행 침대열차' 영화판 포스터. 

 이렇게 '살인급행 침대열차'는 영화(1965년작으로 감독은 무려 영화 'Z'로 유명한 코스타 가브라스 이다)까지 만들어질 만큼 평가가 좋았던 작품이지만 지금의 번역으로서는 그 매력을 느끼기가 아주 힘들다. 특히 후반의 범죄자와의 심문 부분은 많은 부분이 엉성해서 범죄자가 어떻게 그리고 무슨 이유로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다. 프랑스의 미스터리 소설들은 -조르주 심농이 대표적이지만 - 범죄자들 역시 투철한 개인적 신념을 그린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내는 경향이 있어서 캐릭터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도 꽤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의 범죄자 역시 심농의 그런 경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역시나 제대로 의미조차 전달하지 못하는 번역 때문에 그 매력이 빛을 많이 잃고 말았다.

 모처럼 플롯의 정점에 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만났는데, 번역 때문에 그걸 제대로 느낄 수 없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발, 제대로 된 번역으로 다시 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리뷰는 그것을 호소하는 심정으로 쓰여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영원히 잃어버린 '소년' 시절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새해 처음으로 읽었다.
몰랐는데, 5년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벌써 5년이라니? 어느새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나 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해를 넘겼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서 있던 그 날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라는 소설에 나오는 G-그리핀의 노래 가사 처럼 난 또 그만큼 소년에서 멀어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 
 혹시 린타로가 감독한 ’은하철도999’ 극장판을 본 적이 있는지?
 본 적이 있다면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지?  마지막은 이렇다.
 어쩔 수 없이 메텔과 헤어져야만 하는 철이는 이윽고 메텔이 탄 기차가 점점 멀어지자 마구 따라 뛰어간다. 애타게 메텔의 이름을 부르며... 두 눈 가득 눈물을 흘리면서... 하지만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절규하듯 소리쳐도 메텔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지는 기차의 이별을 통보하는 듯한 비정한 기적소리 뿐...  

 가버린다.... 그렇게 사라진다.... 영원히...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 속에 그런 느낌이 가득찬다. 영원한 상실감... 그래서 혹시 감독인 린 타로 자신도 이 '철이'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년 시절에 대해서 울부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여기서 말이지만, 린 타로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은 어린 시절 그 만화를 보면서 우주의 동경을 꿈꾸던,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 시절 열광했었던 만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시절의 기분을 맛볼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메텔’은 우리가 소년시절에 한번쯤 꿈꾸어봄직 했던 이상화된 첫사랑의 ’연인’으로 ’은하철도 999’는 '소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들이 모험으로 나타나 주었던 그 시절의 ’낭만’ 으로 체화된다. 그 시절 소년이었던 우리들이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우주 저편으로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 속 '태수'처럼...
그 때문일까?
실은 나도 메텔을 애타게 부르며 울면서 달리는 철이의 모습과 저 먼 우주 속으로 가느다란 실이 되어 끝끝내 사라지는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울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소년 시절은 완전히 끝났어... 하면서... 이건 진짜다.


 때문에 나는 솔직히 이 소설 읽기가 아주 힘들었다.
여기엔 이제 내게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소년 시절이 활짝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시간들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그건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연우가 아무리 힘들어도 태수가 아무리 방황해도 채영이 아무리 고독해도... 내게 느껴지는 건, 감정에 이입되기 보다는 때로는 질투심으로 까지 변질되곤 하는 부러움이 만들어 낸 거리감이었다. 딱 김종삼 시에 나오는 화려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아 든 아주 가난한 아이 같았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 덕분에 자신의 초라함만 더욱 더 강조되는...  
게다가 위로를 바란다는 연우는 내가 보기에 정말 멋진 엄마에 듬직하고 의리있는 친구에 거기다 매력적인 연인까지... 소년 시절의 우리들이 한번쯤 꿈꾸어보곤 했을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기까지 했으니, 정작 소년시절 그 무엇하나 가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오히려 거꾸로 내가 연우에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2. 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로해줘야 하나?
 나는 완전히 폼 좀 잡으려다 무리해서는 결국 마라톤을 포기하고 '회수버스'에 실려오면서 차창 밖으로 열심히 완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치욕의 쓰라림을 느끼고 있는 재욱 딱 그 꼴인데 말이다. 그 때의 재욱처럼 그렇게 나 역시 완주를 해낸 연우에게 오히려 위로를 구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부턴, 채영의 아버지처럼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이미 입어버린 그리고 길들여져 벗기도 힘이드는 우리 세대의 하소연을 좀 하려고 한다.

 17살... 소설속 연우의 나이... 부끄럽지만 내겐 그 때의 추억이 별로 없다.
억지로 떠올려봐도 나타나는 건 그저 새벽별 보기 운동이라도 하듯 학교로 가고 다시 그 학교에서 학원으로 그리고 별도 없는 어둔 밤, 가로등 불빛을 축쳐진 어깨로 힘없이 받으며 귀가하는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만 그득할 뿐이다. 가슴 설레는 '풋풋한 첫사랑'은 커녕 사진첩에 끼워두고 이따금 펼쳐보며 흐뭇해질 수 있는 추억 조차 변변찮다. 일본 영화에서 흔히 가장 눈부신 '여름'으로도 표현되곤 하는 십대 후반의 청춘이란 게 가질 수 있는 낭만은 그저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고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불확실한 미래에 모든 것을 걸고 엎드리면 내 상반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작은 책상에 붙박히는 것 뿐이었다.
 물론 이탈과 탈주의 유혹과 욕구는 언제든 있었으나, 평범한 가정에 평범한 성격으로 태어난 죄로 그마저도 상상적으로 충족할 뿐, 부모와 선생님으로 그렇게 이중으로 둘러싼, 넘어야 할 울타리의 벽은 언제나 높았다.
 용기가 없었다고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자신의 말이 아니라 어른들의 말을 읽고 입안에 머금고 채 되새기도 전에 서둘러 뇌리속에 새겨야 했던 우리들이 할 수 있었던게 뭐가 있었을까? 그렇게 뇌리에 새겨진 그 말들을 우리 자신의 말인양 착각하고 읊조리던 우리들이 그런 용기를 만들어내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우리에 오래도록 갇히면 우리 자체가 온전한 세계가 된다.
 연우는 스스로를 '도화선이 없는 폭발물'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아예 불발탄이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핑크 플로이드의 영화 'THE WALL'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벽돌이 되어 들어갈 자리에 딱 알맞게 들어가 하나의 벽이 되는 게 전부였었다.
그렇게 재욱이 말했던 안전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어른들이 먹기 좋은 소시지가 되는 것... 그게 흔히 '모범생'이라는 태그가 붙어지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전부였다.
 그렇게 연우가 G-그리핀의 말이지만 어쨌든 그래도 자신의 말로, 관계로, 형형색색의 계절의 색깔로 채워가던 그 시기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우리들에게는 그저 커다란 공백에 불과했다.
 그러니,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

 때문에 나는 소설 속 '마리'에게 더욱 더 연민을 느끼게 된다.
 '모범생'의 태그를 붙인, 좋아하는 연우와 이어지지도 못하고(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게 그저 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애처롭던지.) 사실은 자신의 정답만 강요할 뿐인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야 하고 이제는 어쩌면 유일한 의지처였을 수도 있는 오빠 태수 마저 잃어버린 마리에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가능한 한 커다란 위로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오빠를 잃고 난 후의 마리는 지나가는 이야기로도 나오지 않으니, 어깨라도 토닥이려 들어올린 손을 어떻게 내려야 할 지 난처할 뿐이다.

 물론 작가가 이 소설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이해가 간다. 자의든 타의든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독과 아픔들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나 역시 연우와 채영 그리고 엄마 신민아와 재욱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사물엔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 있듯이 위로 또한 시스템 바깥 뿐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게 아닐까? 다행히 작가는 채영의 아버지와 마리의 속내를 밝혀 그 내부의 자들에게 까지 배려해 놓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내게 온전히 질투의 산물이 될 뻔 했으리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처럼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한 번 선택해서 간 길을 다시 되돌아 와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그렇게 한 번 잘못된 선택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게 되면 다시 제대로 된 옷을 입기 위해 벗는 건 그다지 수월하지 않다. 그래서 주저하게 되고 결국은 틀린 것을 알면서도 길들여지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일상의 힘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맞지 않는 옷은 누구보다도 입고 있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게 되는 일이다. 누군가 일부러 일러주지 않아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다는 건 절절히 느낀다. 어쩌면 시스템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나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건 자기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우도 연우의 엄마도 태수도 채영도... 물론 시스템으로 부터 이탈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저 계기였을 뿐, 바깥에 머무르는 건 모두 그들 자신의 의지였다. 그들 중 아무도 시스템에 적응하려 애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연우의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연우의 '심드렁'이 그렇고 태수가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이 그렇다. 채영은 일부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재욱은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힙합 무대를 일부러 찾아 다닌다.

 하지만 시스템 내부에 머무르는 자들의 경우, 그들에겐 애초부터 선택이란 게 있지 않았다. 마리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 음... 꼭 선생님 지시만 기다리는 착실한 반장 같아요. 그런 애들, 자기 생각은 거의 없거든요. 정해진 정답만 열심히 찾아요. 저희 엄마도 그래서 안 행복한 거 같아요.(P. 416)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 고백...

 -나는 어떤 집단 속에 있으면 무조건 먼저 유리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강박부터 생깁니다.... 나한테는 생존방식이랄까요, 그렇게 안 하면 불안해요. 농촌 가난한 집의 우수한 장남, 이런 얘기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그게 어쩔 수 없이 납니다....하지만 어떡합니까. 어릴 때 부터 입어온 옷이 이미 피부나 마찬가지가 돼어버린 걸. 다른 옷을 입어 볼 여유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그 옷이 살을 파고들어 흉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P. 439)

 이 두 사람의 말에서 보여지듯 이들에겐 자신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 그들의 가능성의 영역은 외부로 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이 입혀주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 했던 것이다. 자의라면 그나마 덜 했을텐데, 타의로 억지로 입어졌다면 그 아픔이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 그 타의로 입혀진 옷을 입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으로 늙어가는 나를 보는" 끔찍한 기분으로 살아가던 채영의 아버지는 연우 엄마의 어쩌면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한 마디에 그만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었던 흉중의 말을 쏟아내게 된다.
그 만큼 그 사람에게는 그냥 그런 정도의 말이라도 충분할 만큼, 진심어린 어떤 자그마한 위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위로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건 상관없이...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대로,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내부에 있는대로,
각 자만의 삶의 무게와 그 짓눌림에서 오는 아픔을 감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제목인 '소년을 위로해줘'의 소년은 '연우'만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 소년은 어쩌면 나를 비롯하여 아직 날아오를 수 있는 자신의 날개를 가지지 못한,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작가는 재욱의 에세이의 결말을 일부러 이렇게 맺은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어린 아들, 즉 소년들이다. 서로 위로해주자."(p.389)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어디에 서 있든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위로해주자,
태수가 말했듯, 아픔은 겪는 각자에겐 다 그 무게가 있으니 그 원인이나 크기는 상관말고.
그냥 위로해주자.


 3. 결여의 존재들 그리고 위로

 그건 우리가 잘 나서도 더많이 가져서도 아닌, 우리 모두가 '결여'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제목도 그렇고
 재욱이 굳이 우리를 '소년들'로 지칭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또한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년'이란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데, 그건 날개를 가지지 못한 '결여의 존재'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비행기, 공항, 우주정거장 등등 그토록 비상과 비행에 관련된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으리라. 거기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역시도 '결여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연우의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게 가장 대표적이다. 마찬가지로 연우와 채영 그리고 마리, 마리의 엄마가 자신들을 이어주는 태수를 잃는 것도 그렇다.  태수 역시도 과거 미국에서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있으며 연우 엄마와 재우는 소설의 후반까지 내내 아슬아슬한 관계를 이어간다. 그리고 채영의 아버지와 엄마는 여전히 냉랭한 관계로 남는다. 이렇게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존재론적 결여'는 우리가 위로를 해야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그래서 부족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의지는 필연적이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 자체가 일으켜 세워 달라는 작은 아이가 내미는 손이 된다. 거기엔 나도 포함된다. 내 존재 자체도 누군가에게 내미는 작은 아이의 손이 된다. 때문에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길 원한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서로는 서로의 손을 잡고 부족한 결여들을 메워가면서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존재론적 결여'는 잡아주는 손길, 즉 위로가 상대와 처지와 이유에 상관없이 마땅히 해야 하는 당위로 되어야 하는 것까지 요청한다.
 이러한 결여된 존재로서의 조건이 위로를 당위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소설에서 연우 엄마가 자기가 가장 행복한 꿈이라고 생각한 꿈을 꾸고 난 후에 한 고백에서 잘 드러난다.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대로 누워 있었어. 짧았고 조용했고 피할 수 없는 것, 결코 지속될 수 없는 것, 사라져버리는 어떤 찰나를 향해 가는 기분이 들어. 유한한 존재들을 스쳐가는 짧고 날카로운 빛... 그런걸까. 무력한 어린 존재가 그보다 조금도 나을 것 없는 무력하고 철없는 젋은 엄마에게 모든 빛은 내쏘며 전 존재를 의지하는 것. 그것을 바라보는 한없이 초라하고 피곤한 젊은 엄마의 가슴 뜨거운 찰나 같은 것. 연우야 생각해 봐. 눈물을 흘리며 내가 너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는 거야. 응. 너무 행복했어. (P. 404)

 나에게 있어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기도 한 이 독백은 그야말로 우리가 왜 서로에게 위로를 필요로 하고 위로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연우 엄마의 고백 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전 존재를 의지하는 가련한 소년들이다. 그건 당신이 어디에 있어서건 상관없이 무슨 일을 하건 상관없이 그냥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무겁디 무거운 삶의 중력을 등에 지고 버텨야 하는 고독한 '아틀라스'들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는 할머니의 모습 자체가 우리의 도움을 구하는 무언의 호소이듯이 날개를 잃어버린 채 내리누르는 중력으로 버거워하는 우리 '소년'들의 존재 자체가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할 권리도 그리고 아낌없이 위로를 건네야 할 의무도 역시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년을 위로해줘'를 읽으며 난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소년시절을 떠 올렸고 그 상실감에 소설 속의 연우를 질투하기도 했다. 거기다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있는 내 17살.  그래서 소설 속 연우의 여정은 그의 아픔과는 별도로 나 역시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바라보는 가난한 아이'처럼 괴로움의 과정이었다. 그나마 마리의 얘기가 없었다면 그나마 재우의 넋두리와 채영 아버지의 속내가 없었다면 끝까지 읽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으면서 왠지 어느결에  바로 앞에서 길게 인용한 연우 엄마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모든 소년에게 진심을 담아 보내는 위로가 느껴졌다. 사실 그 대부분은 연우 엄마, 신민아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러고 보니 왜 연우는 엄마라 부르지 않고 고집스럽게 신민아라고 부르는 것일까?   엄마라는 영역에서가 아니라 신민아라는 별개의 단독자로서 위로를 건넨다는 그런 의미일까? 하긴, 엄마라서 위로를 한다면 그건 위로에 조건을 부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위로가 전 존재적 호소이자 응답'이라는 소설의 주제에서 보자면 끝까지 신민아로 남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경구처럼 주옥같기도 했지만 공백으로 허전한 내 마음을 다독여주는 손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배는 아팠지만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누구라도 하다못해 퍼즐카페의 주인 아저씨까지 응원하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은 마리의 뒷 얘기를 읽지 못하는 것은 그지없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모두들 마지막의 연우와 채영 처럼 봄눈을 맞으며 '돌아오지 못할 것들은 그만 보내주고(이건 나에게 하는 말 같다.) 다른 별에 온 것' 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빌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몽키스 레인코트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전행선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로버트 크레이스의 1987년도 데뷔작 '몽키스 레인코트'를 읽었다.
 

 공간적 배경은 LA.
 레이먼드 챈들러와 제임스 엘로이가 사랑했던 그 곳.
 왜 사립탐정들은 죄다 서부에 거주하는 걸까?

 더쉴 해미트의 샘 스페이드 조차 샌프란시스코이니...
 어쩌면 누군가(자크 카보)가 말했던 그대로,
 정말 사립탐정 장르는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웨스턴 장르 소설의 직계비속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적 배경은 1980년대의 미국. 

 때는 점차 레이거노믹스의 거품이 빠져가기 시작하고
 서서히 만성적 재정적자와 내수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공황이 사람들을 덮쳐오던 무렵이다.
 탄탄해 보이던 삶이 갑작스레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심리적 공황을 느껴가던 그 시절.
 어쩐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가 등장하던 무렵의 시대적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면, 이렇게 어려운 시절들이 그렇게 사립탐정을 부르는 것일까?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모럴'을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그런 영웅들을...
 과연, 블랙 먼데이가 일어났던 1987년은 또 하나의 사립탐정을 호출(CALL)한다.

 그의 이름은 엘비스 콜(COLE)!

 로버트 크레이스는 책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하이쿠를 통해
 엘비스 콜이 어떤 식으로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초겨울 찬비
  원숭이도 도롱이를 쓰고 싶은 듯...

 초겨울의 찬비 같은 한파가 몰려오는 1980년대의 사람들에게
 크레이스는 엘비스 콜이 그들을 조금은 따스하게 덮어줄 수 있는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트, 엘런 랭은 모두 초겨울 찬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이다.
 엘비스 콜은 의뢰에 따라 수사를 하지만 정작 그를 움직이는 것은 돈도 아니고 정의감도 아니며
 진실에 대한 추구도 아니다.
 엘비스 콜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일종의 연민이다.
 118 페이지의 아이의 말을 통해 듣는 밤에 홀로 자신의 사진첩을 보면서 우는 모트의 모습은
 묘하게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다. 엘비스 콜도 늘 그 생각을 한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들킨 아이에게 자신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게 다 무슨 사진인지 하나도 모르겠구나"
 하고 말하던 그의 모습을... 그렇게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바라보며 울고 있을 모트의 모습을... 
 그리고 그는 나즈막히 읊조린다.

 "토토, 여기는 더이상 캔자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p. 167)"
( 이 소설에서 최고의 문장을 뽑으라면 이걸 뽑겠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은 챈들러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 소설의 구도는 결국 챈들러의 소설처럼, 어떤 것을 추적하지만 결국 밝혀낸 것은
 그것이 변질되고 말았다는 확인 뿐이라는 것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이건 정말 레이먼드 챈들러와 역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로스 맥도널드로
 계승되는 사립탐정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사립탐정의 '수사'란 '진실의 획득'이 아니라 '변화의 관찰'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 내내 단서와 탐문이 이어지는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크레이스의 엘비스 콜 또한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를 쫓고 탐문을 하다가
 결국 남부러울 것 없었던 모트와 엘런 랭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벼랑끝으로 내몰리게 되었나 그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하지만 크레이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비록 그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적자이긴 하지만(사실 이 소설에서 모트와 엘런 랭의 고향이
캔자스로 설정된 것은 그가 가장 처음 읽었고 감명받았다고 하는 챈들러의 '리틀 시스터'의 오마쥬임이 분명하다.) 

그는 엘비스 콜을 그냥 거리를 두는 관찰자로 남겨두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엘비스 콜이 자신이 느끼는 연민을 통해 뭔가 하기를 원한다.
말 그대로 진짜 위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몽키스 레인코트'가 되기를...
 
때문에 크레이스는 엘비스 콜을 감성이 풍부한,
시종일관 타인에게 시시껄렁한 간섭일지라도 하지 못하고는 못배기는
뭐랄까 인간적인 면모? 그런 것을 많이 부여하고 있다.
아마도 챈들러의 필립 말로우가 험프리 보가트 특유의 '포커 페이스'가 잘 어울린다면
크레이스의 엘비스 콜은 표지에 나온 그대로 엄지를 치켜들고 짓는 익살스런 표정이
잘 어울리는 탐정이라 하겠다.

크레이스의 이 데뷔작은 비록 챈들러의 아우라가 많이 느껴지긴 하지만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어디인지 알고 있고 또 그곳을 향해 뚝심있게 걸어가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번쯤 읽고 그의 걸음에 동참해 볼만한 좋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주쿠 상어 - 사메지마 형사 시리즈 01 뫼비우스 서재
오사와 아리마사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를 읽었다.

사실은 두 번째 읽는 것이다. 처음 읽었던 것은 꽤 오래전인데, 그 때는 제목이 ‘소돔의 성자’로
나온 판본이었다. 지금은 벌써 절판되었지만...
그 때 읽었을 때도 워낙 재미가 있어서 단숨에 읽었던 것 같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것은 총기류에 관한 자세한 서술.
이 책을 통해 산탄총 같은 것을 한 번 꺾었다 펴서 재장전하는 것을 ‘볼트액션’이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 뒤로 잊고 있었는데, 훨씬 나중에 주간문춘에서 20세기 일본 최고의 미스터리 베스트 30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과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제2작인 ‘독원숭이’가 그것도 나란히 13위와 14위에 랭크(독원숭이가 13위 소돔의 성자가 14위)되어 있는 걸 보고 ‘호오, 이게 그정도로 굉장한 작품이었나.’하고 놀랬더랬다.
벌써 오래전에 읽은지라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그래서 정말 제대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책은 이미 절판된지 오래. 구하기도 어려워 재회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노블마인’에서 다시 발간해 주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거의 ‘들이키는’ 수준으로 책을 읽어버렸다.

그만큼, 이 책은 정말 재미가 있다.
대중성이라는 잣대를 ‘재미’로 놓고만 본다면 아마도 ‘high level’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신주쿠 상어’는 장르로서는 레이먼드 챈들러 식의 ‘사립탐정’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 사에지마는 형사지만, 파트너도 없이 상관의 명령도 없이, 완전히 독고다이로 수사하는데 이건 ‘사립탐정’과 별로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근데, 이 사에지마는 그보다 더 독특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춤추는 대수사선’을 보면 일본 경찰에게 있어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차이가 얼마나 커다란지 잘 알 수 있다. 사에지마는 캐리어이다. 직책도 간부인 ‘경감’.
하지만 과거의 어떤 일로 인해 그는 영락했고 지금 그의 존재는 일선 형사와 별로 다를 게 없다.(캐리어 출신이 과연 이럴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부릴 수 있는 부하가 없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그가 있는 방범과에서는 ‘왕따’나 마찬가지다. 
 

   
            -  BGM : STAY HERE! PERFORMANCE BY WHO’S HONEY -

                                       -  VOCAL : SHAW  -

                                     
캐리어이자 형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립탐정이 오로지 홀로 맞부딪혀야 하는 것처럼 그도 그렇다.
그렇게 그가 홀로 부딪혀야 하는 것은 바로 그가 맡은 구역 ‘신주쿠’다.
이 '신주쿠'가 어떠한 곳인가는 이 소설의 원제인 ‘소돔의 성자’라는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제목의 ‘소돔’이 바로 이 신주쿠인 것이다.
‘신주쿠 상어’의 가장 큰 장점은 아주 리얼한 묘사에 있다고 보여진다.
소설 속에서 신주쿠가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마치 손에 잡힐 듯 하다.
그 생생한 현장감으로 우리가 목도하게 되는 신주쿠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의 애인인 쇼의 노래 가사와 같다고 보여진다.

   Get Away, 다들 말하지 얼른 떠나는게 좋다고

   여기는 거리의 밑바닥 밤마다 밤마다 울부짓는 소리 

   Get Away, 다들 말하지. 얼른 떠나는 게 좋다고

   여기는 거리의 밑바닥 오늘도 내일도 비탄에 잠겨드네. (P.49)


소설이 시작되는 남자들간의 동성애가 주로 이루어지는 ‘사우나’는
바로 이러한 소돔으로서의 신주쿠가 가지는 특성에 있어 일종의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만하다.
아리마사는 절묘하게도 바로 여기에 뒤이어 사에지마가 어떻게 해서 캐리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같은 존재가 되었는지 보여주는데, 이는 사우나와 경찰 조직 모두가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공통점에서 볼 때, 이건 두 세계 모두, 누군가를 약자로 찍어 가차없이 폭력을 가하는 것은 똑같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마치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초반 사우나에서 폭력을 휘둘렀던 이는 결국 경찰로 밝혀진다. 

이렇게 아리마사는, 동성애가 이루어지는 '사우나'라는 질서 밖의 세계와 '경찰'이라는 질서를 부여하고 유지하는 세계가 결국은 똑같은 모습이며 이 두 개의 세계가 어우러져 형성하는 '신주쿠'라는 공간 역시 폭력과 약자를 린치하는 짐승들의 '소돔'이라는 것을 설득력있게 형상화한다. 

따라서 홀로 정의를 관철하는 우리의 사에지마가 왜 그가 속한 경찰 조직에서조차 왜 홀로가 될 수 밖에 없는지 잘 알게 된다.  

죄악으로 소돔이 되어버린 신주쿠나 그것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질서를 부여해야할 경찰이나
아리마사에겐 모두 똑 같은 죄악에 물들어버린 존재이니, 어떻게 경찰이 신주쿠의 폭력으로 부터 시민들을 보호한단 말인가? 따라서 아리마사는 사에지마를 철저히 버려지고 홀로인 존재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 소설의 기묘한 점이 있다. 그건 시점이 둘로 분산된다는 것이다.               
하나는 사에지마를 중심으로 하지만 다른 하나의 시점이 또 존재한다. 그건 형사를 동경하는 일종의 오타쿠 같은 자의 시선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사건에는 참여하지 않고 늘 '폴리스 라인'의 바깥에서 관찰만하고 사에지마가 보여주는 행동들을 모방하면서 그 흉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뿐이다. 이 모든 것은 혹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꽤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왜 하필 이 시점을 소설 속에 등장시켰는지 지금까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쩌면 이 시선은 지금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희화한 것은 아닐까?   
‘폴리스라인’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렇게 독자가 체험하는 간접 경험과 실제의 현실은
얼마나 괴리가 있는 것일까를 보여주기 위한... 
아니면 본격추리물에 흔히 등장하곤 하는 안락탐정식의 수사물을 엿먹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무튼 잘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두 개로 분산된 시점의 모호성이 주제까지 모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소설 '신주쿠 상어'의 주제는 그런 것에는 꿈쩍도 안 할 정도로 너무나 명확하다. 그리고 그건 바로 '쇼'가 속해있는 밴드 '후즈허니'의 노래 제목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TAY HERE!’  

한 마디로, 포기하지 말고, 떠나려 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맞써서 싸우라는 것!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Stay Here' 마지막 가사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미완으로 남겨진 '말줄임표'는 혹 작가 아리마사가 그래도 이 세상에 어떤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론을 유보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가 정말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는 아마도 후속편, '독원숭이'에 나타나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유로, '독원숭이'가 너무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마쥬'라는 게 원래가 자신의 창작적 혈통이 어디에 있는지 밝히려는 것임과 동시에 일종의 작품 창작의 동지적 선언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문학에서도 '오마쥬'라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입니다. 둘 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테마로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 자신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쓰는데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두 작품은 시기적으로도 비슷합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1886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1891년에 나왔죠. 이렇게 두 작품은 공히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인들이 겪었던 정신적 혼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 역시 19세기의 유럽을 휩쓴 격변의 물결을 피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발달로 귀족사회는 점증하는 신흥 부르조아지들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고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자유주의의 바람 또한 중세 이래로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사회체제를 마구 뒤흔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드보르작은 귀족사회가 거의 없다시피하고 한창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미국을 보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신세계 교향곡'을 지었고, 귀족들의 문화적 취향을 대변하던 낭만주의는 척박한 노동과 빈곤한 삶의 질곡을 담아내고 있는 사실주의에 의해 공격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혼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겠죠.

바로 그러한 정신적 혼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작가들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 였다고 생각됩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킬박사와 하이드'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로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는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할 수 있는 약을 먹으려 결심하면서 한 생각입니다. 지킬은 이렇게 그 약을 먹음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있는 두 존재로 인한 갈등과 번민에서 해방되려 합니다. 왜냐하면 지킬은 본래 쾌락을 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고결한 척 해야했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과 행동의 괴리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주 자신의 본성을 따르고 싶지만 남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눈들 때문에 억지로 참아야했고 그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이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언이 양심의 가책은 모두 '초상화'에 떠 넘긴 채, 쾌락을 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플라톤의 대화 중에 '사람들이 왜 도덕적이 되느냐?'에 '기게스의 반지'가 나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기게스의 반지'는 약지에 끼고 돌리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신기한 반지입니다. 플라톤과 대화하는 상대방은 바로 이 '기게스의 반지'를 예로 들며 사람들이 도덕적이 되는 것은 바로 남들의 시선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남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면 그 누구도 도덕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킬' 역시 그러합니다. 그가 그의 추한 본성을 억누르고 사는 것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하이드'를 만들었던 것이죠. 사실, 이러한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나중에 H.G 웰즈에게 문자 그대로 중요한 주제로서 쓰여지게 됩니다. 그 작품이 바로 '투명인간'이죠.

 스티븐슨과 웰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게스의 반지' 논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영국에서 중요했던 것은 타인의 시선이었죠. 그건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이 초상'에서도 똑같습니다. 바질은 도리언에 대한 온갖 추한 소문이 돌고 있음을 알고 도리언을 찾아 옵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언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모든 추한 소문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일을 하면 아무리 감추려해도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인데 도리언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순수했기 때문이죠.

 

 이 시선,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이 그들 모두에게는 중요했습니다. 그걸 이른바 '명예'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렇게 그 시선들은 '신사다움'을 보는 것이고 그건 그가 '얼마나 매너를 지키느냐?'하는 것을 판별하는 시선에 다름아니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남들로 부터 오는 시선은 그 매너, 사교 예절 등등을 수립한 '서양 문명'으로 부터 오는 시선이었습니다.

 로베르토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그런데 이 문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이 문명은 자연발생적이 아닙니다. 문명이라는 말은 1760년 미라보란 사람이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렇게 그건 근대의 개념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원은 로베르토 엘리아스에 따르면 중세의 '궁정 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문명의 출발은 이렇습니다.

 중세 당시 왕들은 많은 영주를 거느리고 있는 체제였습니다. 왕은 그 많은 영주를 주로 토지를 나눠줌으로서 지배했는데 아시다시피, 귀족이 많아지면 나눠줄 수 있는 땅은 점점 적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왕은 언제까지고 땅을 통해 귀족들을 지배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이 만들어낸 귀족 지배 방법이 바로 매너(예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매너(예절)이란 왕과 귀족 각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거기에 맞는 격식, 예절들을 만들고 교화시킴으로서 스스로 자기 자리의 본분을 지키도록 해 나가도록 만든 일종의 프로그램이었던 것이죠. 이 프로그램은 성공했고 격식과 예절을 지키는 것은 이제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그 신분을 알려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리잡자 마자 신흥부르조아지들은 혈통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귀족과의 차이를 이 격식과 예절을 흉내냄으로서 상상적으로 따라잡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격식과 예절이 주는 '신분적 기호' 덕분에 그건 유럽 전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들은 그 기원과 상관없이 문화가 되고 미라보에 의해 '문명'으로 선언되는 것이죠.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은 바로 로베르토 엘리아스가 보았던 것 처럼 '권력 유지를 위한 지배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니 거기엔 자연 억압 효과가 들어가게 됩니다. 게다가 그것은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죠. 그러니 사람들은 '매너'라는 것이 곧 자신을 나타내는 잣대이므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거기에 맞출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 밖에 없고 자연, 외부로 부터 강요된 문명이라는 것에 맞춰 자신의 본성을 죽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오스카 와일드, 웰즈가 '기게스의 반지'를 통해서 피하고 싶었던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그들이 그 거대한 문명의 시선이 바로 자신을 억압하는 시선임을 깨달은 것은 바로 19세기에 몰아닥친 격변 때문이었죠.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가 그 이중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그것을 수직적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킬은 자주 그의 하이드를 '저급한 존재'라고 말을 하는데 여기에 나타나듯이 그는 하이드를 자신보다 덜 발달한, 아직 진화론적으로 미숙한 그런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수 동물... 말하자면 서양 문명이 자신에게 맞지않는 것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 처럼 그렇게 여기고 있지요. 여기서 지킬이 아직
그 거대한 문명적 시선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는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건 단적으로 서문에 드러납니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리얼리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길길이 날뛰는 것과 같다.
 낭만주의에 대한 19세기의 반감은 캘리번이 비친 얼굴을 보지 못해 화가나서 미친듯이 날뛰는 것과 같다


 여기서 캘리번은 세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나오는 괴물을 말합니다. 그는 프로스페로에 의해 길들여지는 야수이기도 하죠.

 오스카 와일드가 일부러 캘리번을 언급한 것은 스티븐슨의 '하이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스티븐슨이 하이드의 비문명성을 저급한 것으로 보았던 것을 비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아예 인간의 본성이 비문명적인 것이며 이중성이란 바로 '어디서 바라보느냐?'란 시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리얼리즘과 낭만주의가 삶과 예술을 다르게 바라보듯이 말이죠. 

 아무튼, 오스카 와일드는 스티븐슨이 애써 다른 존재로까지 만들어서 감추고 지우려 했던 문명화되지 못한 본성들을 당당히 존재의 본성으로 선언합니다. 모든 존재는 캘리번이고 문명적이라는 것은 그에 덮어씌우는 외피에 불과하다고...

 말하자면 그는 더이상 '기게스의 반지'가 필요없는 사람입니다.

 같은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도덕적 삶은 예술가가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러나 예술의 도덕성은 불완전한 매개 수단을 어떻게 완벽하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는 더이상 문명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개인의 삶 뿐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예술과 삶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그렇게 리얼리즘과 낭만주의의 관계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중요한 테마를 이루게 됩니다. 사실 여기서 사조의 명칭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리얼리즘은 그냥 '현실적인 삶', 낭만주의는 그냥 '예술'로 바꿔도 무방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 예술은 '도리언'으로 '삶'은 바로 도리언의 초상화로 형상화됩니다. 그렇게 '도리언의 초상화'는 근본적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짊어져야 하는 책무, '양심'에서 떠오르듯 윤리... 같은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단적으로 말해 윤리라고 해도 좋겠죠. 하지만 이것은 문명적인 것을 넘어선 것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원초적 배려'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자유로운 예술(서문에도 나와있듯 '어떤 예술가도 윤리적인 동정심을 지니지 않는다'가 그걸 말하고 있죠)과 거기에 책임을 지우려는 윤리적인 삶과의 투쟁입니다.

 사실 이건 오스카 와일드가 하나의 우화로서도 얘기한 바가 있지요.

 그게 바로 우리들이 잘 아는 '행복한 왕자'입니다.

 잘 아시는대로, 모든 사람들이 경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예술적으로 완벽한 그 왕자는 타인들의 삶을 신경쓰게 되고 그렇게 윤리적인 선행을 베푼 나머지 모든 예술적 환영을 망가뜨리고 퇴락한 존재로 돌변해 버립니다.

 여기에 오스카 와일드가 바라보는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아주 집약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윤리'라는 것은 예술과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윤리는 예술을 좀먹는 것이며 결국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대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반복됩니다. 결말도 그렇지만 특히 도리언이 그토록 매혹되었던 시빌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절교를 선언하는 장면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도리언이 시빌과 절교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은 시빌이 도리언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삶의 진정성을 깨닫고 자신이 하고 있는 연기가 단지 환영에 불과한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빌은 예술적 환영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어 줄 연기를 도리언이 보는 앞에서 마치 그것이 가상에 불과한 것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려는 듯 일부러 엉성하게 만들어 버리죠. 행복한 왕자가 자신의 눈부신 금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듯이...  그렇게 행복한 왕자가 사람들에게 버려졌듯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시빌 역시 도리언에게 버림받게 되는 것이죠. 

 이제 결말을 지어야겠네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과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적 격변에 의해 균열이 벌어진 틈 사이로 문명의 억압적 시선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달랐습니다. 스티븐슨은 자신도 모르게 알게된 그 비문명적인 것을 감추기 바빴고, 오스카 와일드는 비웃으며 그걸 가볍게 벗겨버리고는 비문명적인 것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고 자기 갈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술과 윤리의 문제에... 

 그렇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예술이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가?' 혹은 '윤리가 예술에게 지울수 있는 책무는 어디  까지인가?"하는 질문에 오스카 와일드 스스로가 치열하게 해답을 찾아보는 사유의 과정의 산물이라 정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문명적 시선'을 벗어난 인간은 과연 어디 까지 다다를 수 있는 것인가의 과정이기도 하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