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인의 항아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1
오카지마 후타리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클라인의 항아리'는 1989년에 나온 오카지마 후타리(도쿠야마 준이치와 이노우에 이즈미 콤비의 공동필명)의 작품이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일반적으로 '클라인의 병(The Klein Bottle)'으로 알려져 있다. 왜 항아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쩌면 일본에서는 그렇게 불려진 게 아닐까 도 싶다. 혹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면 이 '클라인의 병'을 보았을 것이다. 거기 그림까지도 나와 있으니까.  그 소설을 읽지 않았거나 그래도 혹시 클라인의 병이 무엇인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하여 그 모습을 올려보자면 이렇게 생겼다. 

 

 

 이것이 바로 '클라인의 병'이다. '클라인의 병'은 독일 수학자 펠릭스 클라인이 1882년 만든 토폴로지로 쉽게 말하자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 입체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클라인의 병' 또한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로 안이 바깥이 되고 바깥이 안이 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림에서 보면 중앙의 구멍으로 따라 들어가면 '안'이었다가 점차 바깥으로 나오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의 병'이 '뫼비우스의 띠'를 3차원적으로 변형시켰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 둘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는 어떻게든 윗면과 아랫면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클라인의 병'에서는 그러한 경계가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은 기하학적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펠릭스 클라인은 이 '클라인의 병'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제목 '클라인의 항아리'는 조금의 경계도 가지지 않는 공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눈치빠른 분들이라면 바로 이 소설이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고 알아차릴 것이다. 왜냐하면 장르에 있어서 경계의 상실은 대개의 경우 '가상과 실제의 경계의 상실'인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바로 그대로 '클라인의 항아리'는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다. 이러면 어떤 분들은 "뭐야? 매트릭스도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인데 너무 식상한 소재아냐?"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맨 위에서 나는 이 책이 출간 연도를 일부로 밝혔다. 그렇다. 이 책은 1989년에 나왔다. 당시는 가상현실을 다룬 작품이 아마도 '사이버공간(혹은 '전뇌공간'으로 번역된)'이라는 말을 최초로 생성시킨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1984)와 루디 러커의 '소프트웨어(1982)'가 유일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나왔을 때만 해도 아직 '가상현실'과 소설을 어떻게 접속해야 하는지 그것이 그리 잘 알려지지는 않은 시기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소설처럼 '미스터리'와는 어떻게 '싱크'시켜야 하는지는 더더욱 전인미답의 처녀지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 일본 작가들이 발을 내디딘 것이다. 역시나 가상현실을 다루었던, 지금은 사이버펑크 소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닐 스티븐슨의 '스노우크래시'가 나오기 3년 전에(이 소설의 평가를 보려면 스티븐 킹의 '셀' 2권을 보면 된다.)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상현실'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유감스럽게도 문학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그러니까 두뇌에 컴퓨터가 연결되어 전기적 신호(아시다시피 우리의 감각이란 두뇌에 전달되는 일종의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므로)를 보내어 마치 그 두뇌가 현실인양 느끼게 한다는) 가상현실의 아이디어 자체는 미국의 철학자 힐러리 퍼트남의 '이성, 진리, 역사'에 먼저 나왔다. 그러니까 1981년에 나온 그 저서의 서장에서 'A BRAIN IN A BRAT(통속의 두뇌)'라는 사고실험 케이스로 나왔던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보다 직접 그림으로 보면 '가상현실의 최초 아이디어'라는 이 말이 쉽게 수긍이 가리라 생각한다. 

   

 

    바로 이와 같다. 저기 통안에 담긴 두뇌에 컴퓨터의 전선을 연결하고 컴퓨터는 두뇌에게 투손의 햇살 아래 산책하고 있다는 전기적 신호를 만들어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두뇌는 자신이 통안에 든 두뇌 밖에는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다리와 온전한 신체가 있으며 햇살이 내리쬐는 투손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두뇌는 그것을 실제와 조금도 다름없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구상이 그 이후로 가상현실을 다루는 작품의 일종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두뇌가 온전한 신체가 되고 두뇌가 담긴 통은 신체가 들어가는 캡슐이 되었을 뿐,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를 포함하여 저 기본적 구성은 조금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 '클라인의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온 몸의 신경부위에 컴퓨터와 전선으로 연결되어 투명한 캡슐 속으로 들어가 가득한 점액질의 액체 속에서 컴퓨터가 인공적으로 생성해내는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렇다 할 직업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프리터 생활을 하던 주인공, 우에스키 아키히코는 어느 날, 그가 쓴 어드벤쳐 게임북(심리 테스트 처럼 독자가 고른 YES 혹은 NO에 따라 시나리오가 전개되는 게임북) 시나리오를 계약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전화해 온 쪽은 원래 응모했던 게임북 회사가 아니라 진짜 비디오 게임을 만드는 회사였다. '입실론'이란 그 회사는 자신들이 게임의 역사를 바꿔버릴 아주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의 시나리오가 거기에 적격이니 계약하고 싶다고 한다. 응모기준이 정했던 분량을 초과한 관계로 낙선했던 주인공은 당연히 흔쾌히 거기에 응한다.(소설의 맨 앞부분에 바로 그 계약서가 나와있다.) 그러던중 회사로 부터 시나리오 작가로서 게임 테스트에 응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게임은 놀랍게도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전 현실과 똑같은 가상현실 게임이었다. 아키히코는 그 가상현실 속에서 자신이 썼던 '브레인 신드롬'이라는 정신개조용 약품에 얽힌 스파이 게임을 하게 된다. 그런데 테스트 참가자가 하나 더 있었다. 아키히코가 보자마자 반해버렸던 미소녀 리사. 돈도 벌고 혁신적 게임에 최초의 플레이어가 되고 거기다 미소녀와 연애까지. 대박이 넝쿨채 굴러왔다고 생각한 순간 일상의 궤도가 뭔가 점점 어긋나는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엔 게임 도중 들렸던 목소리. '제어할 수 있을 때 게임을 그만두라'는 목소리. 하지만 게임 제작자들은 그 정체를 모른다. 그런 건 전혀 프로그래밍되어있지 않다는 거다. 일종의 버그인데 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다 점점 게임이 주는 폭력에 중독되어가던 리사가 돌연 사라진다. 처음엔 단순히 테스트를 그만두었나보다 했는데 리사의 친구라는 마카베가 연락을 취해 와 사라졌음을 알린다. 리사의 실종과 더불어 '입실론' 회사 자체의 의혹도 불거지면서 이제 아키히코는 '클라인-2'라는 가상현실 기계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플롯이 너무 전형적인가? 하지만 전형적인 것 만큼 속도를 또한 부채질하는 것도 없다. 사실 직접 손에 들고 읽게 되면 전형적인지 아닌지 따질 여유도 없이 단숨에 독파하게 된다. 전성기의 마라도나가 골문을 공략하듯 재빠르고 거침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복잡한 시스템적 설명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저 위에 썼던 가상현실에 대한 얘기는 그냥 내 얘기지 소설의 얘기는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은 가상현실 자체에 대해선 흥미가 없다. 그것을 둘러싼 음모도 아니다. 진짜 흥미가 있는 건 가상현실이 줄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을 도저히 구별할 수 없게 된다면?'하는 상황이다. 당신이 이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맞닥뜨릴 것도 그것이다.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가 진짜 현실이고 가상현실인지 내내 자문하면서 당신은 재차 앞 페이지들을 다시금 훑어보게 될 것이다. 

 

 

 

   당신은 구별해낼 수 있을까? 주인공이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이 가상현실인지 실제의 현실인지? 아니 당신은 지금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아니면 가상현실 머신 속에서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 속에 있는지? 장자의 '호접지몽'과도 같이 당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원래 나비인 당신이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까? 정확히 위에서 언급한 가상현실의 원초적 아이디어라고 제시한 '통 속의 두뇌'라는 사고 실험을 구상했던 힐러피 퍼트남도 그것을 묻고 있다. 퍼트남은 바로 그와 같은 질문을 위해서 '통속의 두뇌'라는 것을 착상한 것이다. 그러니까 저 '통속의 두되'는 지금 완전히 자신이 화창한 투손의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진짜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인 것이다. 혹시 지금 우리들도 '통속의 두뇌' 꼴이 아닐까? 과연 아니라고 누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워쇼스키의 '매트릭스'도 마찬가지다. 그 영화도 3부에 이르면 '클라인의 항아리' 처럼 도대체 어디서부터 가상현실이고 진짜 현실인지 구별해 낼 수가 없다. 1부에서 명확히 구분되던 두 현실들은 2부 어디선가 기묘하게 뒤틀리고 다시 조합되어 정말 '클라인의 병'처럼 경계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감각은 두뇌에 보내는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파장만 복제하면 얼마든지 현실감각을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감각과 경험으로 실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다는 생각은 비단 퍼트남의 생각만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장자를 비롯 무수히 많은 철학자가 그것을 물어왔다. 그 대표적 철학자로 데카르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감각이 주는 한계를 잘 알았다. 주체는 아무래도 현실과 가짜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고 감각하고 있는 이 현실은 어쩌면 악마가 나에게 보이는 환영일 수 있다고. 퍼트남은 이런 걸 두고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실제와 가짜를 인간은 도저히 구별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인간은 참된 실재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고 하며 퍼트남은 이 실재론이 고대 그리스 때 부터 내내 서양 형이상학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실재론'에 따르면 감각과 경험만으로 도저히 진짜와 거짓을 구분해 낼 수 없는 인간이 어떡하면 참된 실재를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뭐라고 말을 할까? 퍼트남은 말한다. 그건 인간의 절대적 한계이므로, 그렇게 완전히 능력 밖의 일이므로 인간 보다 더 나은 존재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에게 참된 실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건 '신' 같은 초월적 존재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한다. 물론 내가 지금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악마가 내게 보여주는 환영일 수 있지만 우리 세계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그런 환영을 허락할리 없을테니 내가 지금 보고 느끼고 있는 모든 것은 참된 실재라고 말이다. 웃기게 생각되어도 진짜 데카르트의 생각이다. 퍼트남도 진지하게 동의한다. '신'이 없으면 인간은 '진짜'를 하나도 얻을 수 없다고. 그러니까 인간 자신만으로는 지금 당신의 현실이 진짜 현실인지 가짜 현실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자신하겠는가? 당신이 만일 자살을 했는데 문득 눈을 떠보니 화면에 보이는 게 'GAME OVER'이고 유리창 밖에서 또다른 당신의 친구들이 손 흔들며 웃고 있는 장면을 보게되지 않을거라고. '클라인의 항아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정확히 이것이다. 안됐지만 당신에게는 지금 당신이 있는 현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 

  

  그런데도 당신은 살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터내려 생각한다. 까뮈가 내내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것. 어째서 우리는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어느 것이 진짜 현실인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는데 이러한 까뮈의 질문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당신은 산다. 자살은 꿈도 꾸지 않는다. 그만큼 지금 이 삶을 '진짜 삶'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해답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 '선택한 현실'이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어느 것이 진짜 삶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이 말이 정말 함의 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퍼트남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은 것도, 당신은 그 때 그 때의 선택(혹은 결단)에 따라 당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형성해왔다는 그것이다. 

 

  까뮈는 당신의 삶을 '천상에서 유배된 삶'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당신의 삶이 문득 지상으로 내던져진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삶이 우리에게 족쇄를 씌워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걸 '운명이라 부르며 체념한다. 그렇게 당신은 과연 당신의 삶에서 단순한 객체였을까? 그렇게 당신은 이미 만들어진 현실 속에서 그냥 지내왔던 것일까? 천만에! 그 현실 자체가 이미 당신이 선택한 것인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에서 원래 아키히코가 만들려고 했던 '어드벤쳐 게임북'이 그렇듯이 매일 주어지는 선택적 상황에서 YES 혹은 NO로써 당신은 현실을 그때 그때의 결단으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의 현실은 당신이 지금까지 해 온 모든 결단의 총합에 다름아닌 것이다. '클라인의 항아리'가 은밀히 주장하는 것도 그것이다. '진짜 삶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게 뭔 상관이냐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얼마든지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인데...' '클라인의 항아리'는 내내 그 말의 단서를 보여준다. 앞 서 말한 '어드벤쳐 게임북'도 그 단서이지만, 왜 시나리오 작가인 아키히코가 그 게임의 테스트에 참여해야 되는지에 관해 설명할 때 회사직원은 이런 말을 한다. "이쪽으로 가라 저쪽으로 가라 게임이 제시해도 플레이어는 혹시 그 이정표가 걸린 나무를 올라갈지도 모르거든요. 저희는 그런 상황까지 대비하고 싶은 겁니다."  이 말은 '삶이 아무리 주어졌대도 인간은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그러면 현실은 그에 맞게 또 수정되어 변해간다'는 말과 뭐가 다른가?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직면하게 되는 것도 그와 같지 않나? '아키텍쳐'가 "자, 너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을 때. 정말 현실이라는 숟가락이 구부러진 것인가 아니면 구부러진 건 우리 마음인가? 깃발(현실)이 흔들리는 건 바람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이 흔들려서 그러는 것인가? 선문답 같은 이런 질문이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하는 말은 단 하나다. '당신이 바로 삶의 주인이고 현실은 바로 당신의 손 끝에서 생성된다.'라는 이 단순하고도 어이없는 진실 말이다. 

 

  '클라인의 항아리'의 프로그래밍된 가상현실 처럼, 그렇게 삶엔 다른 자들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무수한 이념들이 있고, 현혹을 위해 달려드는 프레임들이 있다. 누군가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떠도는 소문들이 있고 쏟아지는 기사들이 있으며 전방위적으로 작동되는 음모와 꼼수들도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을 그저 하나의 객체, 단순히 가공된 자극을 받아들일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라 착각하는 '통 속의 두뇌'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당신의 현실은 그 때 그 때의 결단에 따라 형성된 당신만의 현실이다.'라는 말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당신 스스로 결단해야함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어느 것이 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최대한 그 참에 가깝도록 선택할 능력은 있다.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의심하거나 아님 훗설이 그랬듯이 객관적 실체가 어느정도 드러날 때 까지 모든 것을 판단중지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그들 역시도 보다 참된 실재의 삶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인 만큼 그들의 방법 또한 귀기울여 들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클라인의 항아리'는 당신의 삶이 이미 그들에게 경작된 것이 아니라 아직 미개척지로 오로지 당신에게만 열려있음을 말한다. 맞다. 그것을 경작해야 할 사람은 오로지 당신 자신이다. 왜 함부로 남에게 맡기나? 그들이라고 당신과 별다를바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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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4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학 숙제로 인해 주제를 잡기 너무 난감했는데 참고하고 주제로 정해버렸습니다.

책도 꼭 읽어 보겠습니다.

ICE-9 2011-09-15 19:43   좋아요 0 | URL
뭔가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기쁘네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