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를!
브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이럴수가! 제가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여류 미스터리 작가인 조세핀 테이의 또 다른 스탠드 얼론 작품인 '브랫 패러'가 출간되었습니다. 작년에는 '프랜차이즈 사건'이 나와서 저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이번에는 '브랫 패러'로 또한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군요. '브랫 패러'는 사실상 조세핀 테이의 스탠드 얼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48년에 나온 '프랜차이즈 사건' 바로 다음 해.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왔죠. 굳이 이 작품들을 스탠드 얼론으로 묶는 것은 조세핀 테이의 대표적인 시리즈 작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앨런 그랜트 경감이 나오는 시리즈죠. 죠세핀 테이는 '브랫 패러'를 쓰고 나서 바로 그랜트 경감 시리즈로 돌아가 다음 해, 1950년에 그랜트 경감 시리즈인 'TO LOVE AND BE WISE'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1951년. 그랜트 경감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자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진리는 시간의 딸'을 내놓게 됩니다. 굳이 이런 계보를 밝히는 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왕 '브랫 패러'가 나온 김에 여기서 말한 테이의 작품들이 모두 나왔으면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브랫 패러'가 이처럼 그녀의 황금기에 나온 작품임을 알리기위해서 입니다.

 

 이 시기 조세핀 테이가 작품을 통해 천착하는 것은 2차 대전을 통해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된 파시즘이라는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은 그런 그녀의 주제 의식을 참으로 잘 보여준 작품이었죠. 파시즘이라는 것이 독일이라는 특정한 나라 그리고 히틀러와 나치라는 특정한 인물과 집단이 있어서야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편견과 이기심으로 배척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생길 수 있는 것임을 잘 형상화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결국 이 시기의 조세핀 테이는 '우리 앞에 나타난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것을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내내 질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프랜차이즈 사건'과 바로 뒤이은 이 '브랫 패러'가 가지는 설정상의 공통점들로 바로 추정 가능합니다. 일단 그 공통점에 주목해보죠. 두 작품 모두는 내부적으로 결속이 강한 집단이 한 편에 있으면 다른 한 편엔 그 집단의 유대를 위협하는 타자가 존재하는 구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작품의 서스펜스는 주로 이 둘이 충돌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긴장 관계를 통해 이어지며 작품의 주제는 그렇게 결속이 강했던 집단이 타자와 얽히면서 어떻게 변해가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프랜차이즈 사건'과 '브랫 패러'는 마치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따라 그리는 것처럼 이렇게 닮은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가의 질문은 반복되고 작가가 질문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작가에게 더없이 중요하다는 것임과 동시에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니만큼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해서 보다 그것을 심화시켜서 대답을 살펴보려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보다 현명한 대답은 보다 깊은 숙고를 통해서라야 나올 수 있는 법이니 이러한 조세핀 테이의 반복은 쉽게 말하자면 나사를 한 번 더 조여 더 깊이 내려가 보는 것이죠. 

 

 그렇게 이 '브랫 패러'는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했던 것을 보다 아래로, 보다 깊이 가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바깥 타자와의 간격에서 드러납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타자로 나왔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살긴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외부에 있었습니다. 내부적으로 결속된 집단의 울타리 너머 그녀들이 사는 '프랜차이즈 저택'으로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일원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해도 되나?'하는 식의 반성적 자문은 하지 않아도 되었었죠. 하지만 '브랫 패러'에서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 타자는 더 이상 울타리 너머 저만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아예 가로놓인 간격 조차 없습니다. 즉 '브랫 패러'의 타자는 보다 깊숙이, 아예 그 집단의 일원으로 들어옵니다. 그것도 가장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 만한 가족의 일원으로 말이죠. 그래서 그 타자를 대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합니다.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하고. 다시 말해 반성과 성찰이 뒤따를 수 밖에 없는 관계가 된 것이죠.

 

 이것이 전작 '프랜차이즈 사건'과 획기적으로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이제 집단의 일원들은 대놓고 타자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건 의혹의 대상이 되고 불안한 가운데 내린 잠정적 결론만이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 신뢰할만한 근거가 외부로 부터 전혀 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그 신뢰를 구축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 자기가 스스로 믿음의 근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보다 한 차원 나사를 더 돌려 깊이 내려간 조세핀 테이가 물어보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바깥으로 부터 아무 것도 주어질 수 없다면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이 조세핀 테이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독일인이 2차 대전을 일으키고 거리낌없이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자행했던 이유만 생각해봐도 되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때 그들이 그렇게 아리아인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그 외 다른 민족들을 하등 동물 취급하며 세계사의 유례없는 잔혹한 홀로코스트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파시즘'이라는 외부의 것을 통해서였습니다. 바깥에서 온 이데올로기에 그들의 이성과 영혼을 쉽게 내줘버렸기 때문에 양산되어진 비극이었죠. 물론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에리히 프롬의 말입니다. 어쩌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독일인이 나치즘과 같은 광기의 포로가 되었나를 연구한 끝에 발표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우리가 쉽게 바깥의 유포된 선동이나 이데올로기에 쉽게 물드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건 스스로 사고하기를 귀찮아하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을 창시하는데 결정적을 도움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대니얼 카너먼은 '사람은 본성상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게으른 동물이다'라고도 하더군요. 사람은 본래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복잡하게 따지고 드는 것도 귀찮아 합니다. 연구에 따르면 전문가들로 부터 일반인 모두가 그렇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우리 정치 현실에 있어서도 서민 코스프레 같은 감성에 호소하는 홍보 전략이 먹혀드는 것이죠. 안 그래도 살기가 팍팍한 현실이니 더욱 당장은 상관없어 보이는 문제에 매달려보지 않으려 합니다. 나치즘이 일어나던 당시의 독일도 그랬습니다. 지금만큼이나 그 때의 독일인들도 경제적으로 힘들 때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지지'가 횡행했습니다. 히틀러가 유포하는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다시금 재현하자'라는 말에 쉽게 흔들렸습니다. "과거를 보라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든가? 그건 우리 탓이 아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다. 우리가 과거의 그 영광을 다시 찾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우리를 괴롭히려는 세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태인이고 그들과 협력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이다."라는 악의에 찬 거짓을 진실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나치 앞에다 바쳤으며 그렇게 이성이 마비되어버리자 소중한 목숨까지 필요하지도 않는 전쟁에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2차 대전 전체 사망자 거의 6천만명 그리고 유태인 사망자 6백만명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조세핀 테이로서는 마치 세이렌의 노래소리와도 같이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이 바깥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경계해야 하고 그 목소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자신의 이성으로 스스로 사유하는 법을 권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바로 전자의 목적을 위해서 '프랜차이즈 사건'을 썼고 후자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 '브랫 패러'를 썼던 것입니다. 저만치 물러서 있던 타자가 가족의 일원으로 성큼 들어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조세핀 테이답게 '프랜차이즈 사건'은 200년 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썼는데 이건 '브랫 패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브랫 패러의 줄거리를 간단히 이야기해 본다면, 먼저 제목인 '브랫 패러'는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난 브랫 패러는 원래는 영국 태생이지만 어찌어찌해서 미국과 멕시코를 떠돌다가 향수병으로 인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다가온 것은 브랫 패러가 자신의 조카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는 이름이 패트릭으로 8년 전에 절벽에서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그는 웨스트오버에 있는 애시비 가문을 이을 적자로 장차 그 가문의 모든 것이 그의 소유가 될 판이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하는 바람에 그의 쌍둥이 동생 '사이먼'이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이제 유예되었던 기한이 다 되어 곧 공식적으로 사이먼이 모든 걸 가질 판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브랫 패러에게 은밀히 제안해 옵니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실치 않은 패트릭을 패러가 정말 닮았으니 이참에 패트릭을 연기해 그 모든 걸 가져보지 않겠느냐고? 원래 브랫 패러는 재물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었지만 말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훌륭한 말들이 가득한 마굿간이 있다는 말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합니다.(역시 말을 사랑하는 조세핀 테이답게 '프랜차이즈 사건'에서도 그랬듯이 말에 대한 사랑이 주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리고 솔직히 죠세핀 테이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행복해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예 목장을 배경으로 진행되어 말들이 전면으로 잔뜩 등장하니까요.)

 

  

 (사진은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웨스트오버의 풍경입니다. 이런 풍광을 바라보며 말을 타고 거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조세핀 테이가 그것을 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 지는 쉽게 상상이 갈것 같습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밝힙니다. 그래서 제목도 '브랫 패러'가 되었습니다. 즉 브랫 패러가 가짜인지 아닌지를 밝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브랫 패러가 들키느냐 안들키느냐가 중요한 서스펜스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프랜차이즈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입니다. '프랜차이즈 사건'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진행되었던 반면 이 '브랫 패러'에서는 바로 그 타자의 시선으로 결속이 강한 내부 집단을 관찰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낯선 타자를 앞에 둔 집단 일원의 반응들이 객관적으로 관찰됩니다. 더우기 그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 들킬지 모르는 자의 시선이라 더욱 면밀하고 정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이 하나의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무엇보다 신뢰의 근거가 될 바깥의 어떤 목소리도 차단된 상황 안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탐색하는 작품이니만큼 그것을 보다 세세하게 그리고 독자도 확실히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포착하면서 또한 그러한 관찰이 작품의 진행과 별 무리없이 섞이도록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이 설정이 택해진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리고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설정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다시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 즉 이 작품 역시도 '프랜차이즈 사건' 처럼 오래된 하나의 원본이 있다는 이야기로 돌아가봅니다. 그럼 과연 브랫 패러의 원본은 무엇일까요? 그 단서는 다름 아닌 이름에 있습니다. 즉 8년 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했다고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인 패트릭. 그것이 단서입니다.

 

 이를 보다 더 확실한 단서로 만들기 위해 또 하나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브랫 패러'라는 이름입니다. 소설에는 이 브랫 패러라는 이름이 어떻게 주인공의 이름이 되었는지 밝혀주고 있는데 영어로 쓰자면 'BRAT FARRAR' 이렇습니다. 여기서 'BRAT'은 '사고 뭉치 어린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름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수식어 같은 것이니 정작 중요해지는 것은 뒤이어 나오는 'FARRAR'란 성입니다. 그런데 원래는 이 성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성은 'FARRELL'이었죠. 브랫이 우연히 타게 된 배의 선장이 이름을 잘 못 보고 표기하는 바람에 그만 'FARRAR'란 성으로 굳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FARRELL'은 유명한 아일랜드 성중 하나입니다. 얼마전 영화 '토탈리콜'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대표적인 아일랜드 배우 콜린 파렐도 바로 이 성을 쓰고 있죠.

 

 

  

 그러면 왜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 조세핀 테이가 하필이면 주인공의 성을 아일랜드 것으로 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세핀 테이는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소설에 나오는 '패트릭'이란 이름이 정말은 어디서 나왔는지 확실하게 독자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으니까요. 네 그 패트릭은 아일랜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로 성 패트릭 이었습니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그래서 지금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도 불리는 이입니다. 그런데 이 패트릭에게 있어 원래 아일랜드는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로 끌려와 살게 된 곳이 바로 이 아일랜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노예로 착취당하던 중 탈출을 했고 오래도록 외국을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바울과 같은 영적 체험을 한 그는 선교사가 되어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왔고 그렇게 아일랜드를 이전과 다른 새로운 땅으로 바꿔버렸습니다. A.D 400년 전후의 일입니다. 이 정도만 말해도 바로 이 성 패트릭의 이야기가 브랫 패러의 이야기임은 달리 말할 필요가 없겠죠. 또한 이 패트릭의 일생이 그대로 소설에서 브랫 패러가 걸어가게 될 여정이라는 사실도 말이죠.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성직자라 할 수 있는 성 패트릭

 

 

 조세핀 테이는 이 성 패트릭의 이야기를 내부적 결속이 강한 집단으로 부터 축출된 타자가 다시 돌아와 오히려 그 집단을 바꾸게 되는 것의 원형으로 보고 그걸 다시금 문학으로 형상화해낸 것입니다. 그리고 패트릭의 쌍둥이 동생의 이름을 하필이면 '사이먼'으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바로 성 패트릭의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타자의 축출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사이먼은 바로 시몬 베드로의 이름이죠. 그렇게 가장 강한 내부적 결속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패트릭과 사이먼의 관계를 놓고 보자면 이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야말로 농후해집니다. 그러므로 조세핀 테이는 사실 이 소설로 독자들에게 어떤 반전이나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과 같은 그렇게 결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과정으로써 다가가고 싶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미리 위장하는 존재를 밝혀서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 탄로나느냐 그러지 않느냐를 통하여 서스펜스를 죽 이끌어 갔던 것도 독자들이 가급적이면 그 과정을 좀 더 음미해주길 바라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어쩌면 집요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 과정에 독자를 붙들어 매여 두려는 것은 그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보다 주고 싶은 것이 홀로의 힘으로 믿음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정 앞에서 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타인의 존재를 통해 이 소설이 차용한 성 패트릭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어떻게 내부적 결속을 허물고도 그대로 무너지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욱 바람직한 집단으로 재탄생하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그럼으로 궁극에 가선 타자를 두려워하거나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마지막 장을 덮는 가운데 깨닫게 만드는 것이죠. 조세핀 테이는 그렇게 '프랜차이즈 사건'에서 가졌던 '구원은 타인으로 부터 온다'라는 생각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끝에 가서 말들이 두리뭉실해진 것은 가급적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죠세핀 테이의 의도대로 그 과정을 온전히 당신의 눈으로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즐기려면 되도록 아무런 선입관이 없는 것이 더 나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렇게 긴 말을 쓰고 말았으니 어쩐지 이런 말들이 별로 설득력이 없을 것 같네요. 그래도 조세핀 테이 입니다. 시간을 얼마든지 들여도 아깝지 않은 작가. 그러니 이 '브랫 패러'가 보여주는 과정을 마음껏 벗해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기꺼이 권해드려 봅니다.

 

 

 [다음은 그냥 곁다리 입니다.]

 

 

  조세핀 테이의 소설답게 이 브랫 페러 역시도 두 차례 영화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1963년에 나온 프레디 프랜시스가 감독한 'PARANOIAC'이란 영화입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사이먼 입니다. 여기서는 '제3의 사나이'로 유명한 감독 캐롤 리드의 조카가 되는 올리버 리드가 사이먼 역을 맡았습니다. 영화제작사가 공포 영화 전문의 헤머 영화사라 원작 보다 좀 더 공포 분위기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또 한 편은 1983년 BBC에서 3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이 판본이 궁금한데 언젠가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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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세핀 테이에게 경배를!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2-12-13 00:08 
    먼저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 하자면, 나는 조세핀 테이를 좋아한다. 물론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그녀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체'를 좋아한다. 아니 차라리 나의 이상형이라고 해야겠다. 내가 이상형을 꼽는데 있어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인데 조세핀 테이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와 비슷한 조건으로 이상형을 꼽는 사람은 조세핀 테이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면 분명 나와 같은
 
 
ICE-9 2012-12-13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 '프랜차이즈 사건'과 비교해서 리뷰했기 때문에 혹시 전작이 궁금하시다면 위의 리뷰를 참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