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살인 사건 매그레 시리즈 7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덜란드, 그 곳은.... 

 

  나는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년 전에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장소에서 멀리 벗어나 이곳(네덜란드)에 오기로 결심했다. (...) 여기서 나는 남의 일에 호기심을 가지기 보다는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아주 활동적인 위대한 국민들과 더불어 대도시의 편리함을 만끽하면서도 가장 먼 황야(사막)에 있는 것 처럼 유유자적하는 은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 데카르트, 방법서설 (p. 182 ~ 83) 

 

  데카르트는 암스테레담에서 오히려 '가장 먼 황야'를 느낀다. 왜냐하면 더없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지만 거기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완벽한 은둔자요 프랑스인도 네덜란드인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다. 거기서 그는 '코기토 에르고 섬'을 외치는데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렇게 그 모든 것으로 부터 이탈한 스스로의 존재가 되어버린 그가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는 존재의 '무화(無化,Nullify)를 경험하는 가운데 존재의 확실성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네덜란드를 그러한 존재를 무화시키는 광막한 황야로 바라보았던 이가 비단 데카르트 뿐만은 아니다. 알베르 까뮈 역시도 비슷한 감흥을 느꼈다. 그는 운하들이 담쟁이 덩쿨 처럼 뒤얽힌 암스테레담을 바라보며 '지옥도'를 연상했고 거기서 '전락'이라는 소설을 통해 상상적 자살을 감행했었다. 하지만 그 리스트는 까뮈에서 그치지 않는다. 까뮈 자신 심농을 읽지 않았다면 이방인을 전혀 다르게 썼을 거라며 그 영향력을 인정한 바 있었던 심농 역시 그 리스트에 들어가야 한다. 바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우리는 데카르트가 했던 고백과 비슷한 것을 매그레 자신의 입을 통해서 듣게되는 것이다. 

  한데 지금 그는 네덜란드의 그림엽서와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북유럽 특징이 농후한 광경과 맞딱드리고 있는 것이다. (p. 9) 

  그 북유럽적 특징이란 끝간데 없이 드넓게 펼쳐져 있는 히스 들판을 말한다. 게다가 공간적 배경이 되는 델프제일은 파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데카르트의 가장 먼 황야와 비슷한 가장 멀리있는 광막한 초원인 것이다. 그는 이곳으로 '생폴리앵에 지다' 처럼 수동적으로 이끌려 온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전혀 낯선 곳에 유일한 프랑스인으로(매그레가 온 것은 뒤클로라는 프랑스 교수 때문이었지만 그는 사실은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한 자였다. 그러니 정말 프랑스인은 매그레가 유일한 것이다.). 거기다 매그레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른다. 그러니 당연히 고립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그는 외딴 섬과도 같은 존재다. 아니 '얼룩'이다. 언제든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전복시켜 버릴 수 있는 '수상한 이방인'이다. 사람들은 경계하고 기피한다. 때로는 자존심 강한 유럽인들 답게 아예 무시한다. 그렇게 매그레는 자기 존재의 '무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단적으로 오스팅을 따라 들어간 카페에서 그 '무화'가 나타난다. 

  이어서 전개된 활발한 대화는 네덜란드어 특유의 거칠고 요란한 발음들 때문에 흡사 말다툼을 방불케 했고, 그러다보니 매그레가 호주머니에서 잔돈을 꺼내 계산을 한 뒤 판 하설트 호텔로 자러 가는 것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p.87)

  그렇게 그는 유령이 된다. 심농이 이렇게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데카르트가 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매그레에게 주고자 함이다. 즉 존재를 유령처럼 희미하게 만들어 오히려 매그레로 하여금 더욱 더 자기 존재에 숙고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 왜 심농은 하필 시즌2의 세번째 작품인 '네덜란드 살인사건'에 와서 그런 것을 매그레에게 주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교차로의 밤'에서 매그레가 느낀 유혹 때문인 것이다. 매그레는 전면적으로 다가오는 '엘세(Else)'에게 유혹을 느낀다. 그것은 이름에 감추어진 상징 그대로 여성성 전체가 전해오는 유혹이기도 했다. 바로 거기서 느낀 '유혹' 때문에 심농은 매그레에게 '존재의 무화'를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유혹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숙고하도록 만들기 위해. 

  때문에 매그레가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 만나는 이가 바로 포핑아를 유혹했던 존재인 '리번스'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유혹이 어쨌길래 심농은 매그레에게 '무화'까지 경험하게 하면서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생폴리앵에 지다'를 생각하면 심농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된다. '생폴리앵에 지다'와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시즌의 세번째라는 것과 공간적 배경이 모두 프랑스가 아니라는 공통점 말고도 매그레가 지극히 수동적으로 거기로 인도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단적으로 매그레는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지금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건에 휘말린 상태요! 프랑스인이 한 명 의심을 받고 있다기에 사건을 해결하라고 나를 보낸 거지....(p.216)

  매그레 시리즈에서 '수동성'은 주로 죄에 대한 인식과 관계가 있다. 즉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한 공간으로 인도된다는 것은 일종의 고해성사와도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카톨릭 세계관에 그 영혼이 깊이 침윤되어버린 자로서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인지도 모른다. '죄'에 대한 생각들이 뼛 속 깊이 새겨졌기에 스스로 그 '죄'를 인식만해도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처럼 참회에의 욕구로 이끌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신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것인 것이다. 그러니 '네델란드 살인사건'에서 또 다시 매그레가 수동적으로 인도된다는 건 심농이 그 유혹을 '죄'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때문에 심농이 매그레 자신을 온전히 숙고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그 '죄'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고 이미 '죄'라고 인지된 이상 그 숙고는 바로 스스로를 '정화'하려는 노력이 된다. 모든 고해성사가 그렇듯이... 

  하지만 여기서 '죄'는 단순히 기독교적 의미의 그런 '죄'는 아니다. 좀 더 본질적으로 존재의 위협이 되는 것. 그러니까 꾸준히 유지해 온 존재에 하나의 얼룩을 만들어 교란시키는 것. 그렇게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정확히 오디세우스를 홀려서 배에게서 뛰쳐나오게 만드려는 세이렌의 노래소리인 것이다. 즉, 심농은 '생폴리앵에 지다'에서도 그랬듯이 '죄'의 카톨릭적 의미를 교묘하게 비틀어 자신의 일상성에 위협이 되는 것을 '죄'라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인 이 '수동성'은 일종의 자기 기만적 정당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일상을 견고히 지키고 싶은 그가 위협이 되는 것에 그렇게 '죄'라는 레떼르를 붙임으로써 그 배척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러니 '생폴리엥에 지다'에서 심농이 했던 참회의 목적이 사실은 일상의 복권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도 역시 그 유혹에 관한 숙고는 본디 일상의 재탈환이 목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미 정답을 가지고 있다. 문제되는 건 오로지 그 정답을 뒷받침 해 줄 근거와 증거 뿐인 것이다. 그래서 '포핑아' 살인 사건에 있어서 매그레가 진정 원하는 것은 누가 그를 죽였는가가 아니다. 그가 정말 알고자 하는 것은 그가 '왜' 죽었는가이다. 즉 여기서 '포핑아'는 매그레에게 일종의 반면교사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모델이다. 매그레가 유혹에 굴복당했을 경우 어떤 운명을 걷게 될 것인지 알려주는 이정표인 것이다. 따라서 매그레의 수사의 진정한 목적은 세이렌의 유혹으로 부터 자신을 일상에다 단단히 결박시켜줄 그 '밧줄'을 찾아내는 것이다. 

 

  과연 매그레는 그 밧줄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오디세우스를 빌어 보여주는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삶'이라는 모습 

    

  매그레의 목적은 유혹을 제거하고 다시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바람은 정작 시도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한다. 물론 그것은 그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가 스스로 그 유혹에 노출되고 싶은 은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심농은 왜 매그레에게 리번스를 가장 먼저 만나게 했던 것인가? 매그레의 진정한 목적에 따르자면 그는 곧바로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되었어야 한다. 그곳은 말하자면 페넬로페(포핑아의 부인은 뒤클로의 묘사에 따르면 페넬로페와 똑같다.)가 있는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케'이다. 머무르는 곳. 굳건한 일상이다. 하지만 매그레는 거기로 인도되지 않는다. 리번스를 만나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뒤이어 뒤클로를 만나는 것이다. 왜 심농은 매그레를 곧장 거기로 인도하지 않는가? 왜 리번스와 뒤클로를 만나고 난 뒤에 인도시키는 것인가? 이것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이타케로 돌아와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오디세우스 역시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깥에서 저간의 사정을 듣는 것이다. 그렇게 매그레는 오디세우스의 역할을 이어받는데, 문제는 그가 거치는 인물들이 모두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리번스는 끊임없이 그 곳을 벗어나려 애쓰는 여자이고 뒤클로는 자신의 범죄 이론을 강연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을 떠도는 자이다(그는 하물며 스위스 태생이지만 프랑스로 귀화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일상을 떠나려하거나 머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게 매그레에게 들려오는 세이렌의 유혹을 상징하는 존재들인 것이다. 매그레는 그들을 만나고나서야 포핑아의 집으로 인도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유념해서 볼 것은 심농이 그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바로 여기에 왜 매그레가 오디세우스 처럼 스스로 귀를 열고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당신이 유념해서 읽었다면 매그레가 리번스를 처음 만났을 당시 암소가 송아지를 출산하고 있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리번스는 늘 떠나려 하는 여자다. 그런데 출산은 여성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지 않는가? 즉 여기에는 상반된 모순이 하나로 접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어 만나는 뒤클로 역시도 마찬가지다. 뒤클로는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니지만 사실은 포핑아 부인에 대한 묘사에서 드러나듯 내부적으로는 강하게 머무르고 싶어하는 자이다. 그 역시 모순된 삶을 살고 있으며 심농은 그것을 강조하듯 호텔(일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에서 경찰(일상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대표적인 직업)의 감시를 받는 뒤클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왜 매그레가 스스로 유혹에 노출시키는지 그 이유가 드러난다. 심농이 리번스와 뒤클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네 삶이 그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은지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유혹에 늘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것이다. 심농은 이러한 상반된 모순이 중첩된 삶의 모습을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건 '포핑아'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에서도 드러난다. '포핑아'의 집 위치를 한 번 그려보자면 이렇다. 

   

 

 

  여기서 포핑아의 집은 바로 운하에 접해 있다. 그런데 그 운하는 거대한 바다로 이어져 있다. 포핑아는 한 때 항해사였고 가장이 되어 일상에 머무른 지금도 늘 바다로 나가기를 꿈꾸고 있는 자였다. 즉 여기서 운하는 바로 그에게 '유혹'인 것이다. 출근하거나 퇴근하거나 그는 늘 운하와 나란히 놓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그는 매일 그 유혹과 대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게다가 바로 곁에 자신에게 늘 같이 도망가자고 조르는 리번스의 집 마저 있다. 그렇게 그 역시 늘 세이렌의 노래소리를 듣는 자였던 것이다. 심농은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 삶 이란게 세이렌들의 섬을 지나는 오디세우스의 배와 같다는 것을. 서로 상반된 모순으로 중첩된 이런 삶에서 우리는 늘 진정한 진실을 확인하게 되기를 염원할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우리의 눈과 귀는 그것에로 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디세우스도 부하들의 귀는 모두 밀납으로 막았지만 자신만은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그 노래를 들으려 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심농은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그레는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포핑아의 집으로 가는 것은 주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심농은 또 우려한다. 늘 그 유혹에 빠져있을 수 없다. 어차피 단단히 하나로 결부된 모순들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내버려두면 늘 그 사이에서 방황만 할 뿐 인생은 조금도 진전하지 않는다. 심농은 그것을 알고 있다. 유혹에 굴복하든 극복하든 언젠가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농은 삶의 지속을 위하여 '결단'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를 위해서 심농은 매그레 시리즈 중 그 어느 작품 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을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도록 만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심농은 두 가지 전략을 쓰는 것이다. 늘 상반된 모순을 안고 사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위해 그는 세이렌과 이타케에 있어서의 오디세우스를 차용하고 모순의 서투른 봉합이라고 해도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통해 강조되는 결단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어떤 시리즈의 다른 작품 보다 고전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다. 도면의 등장, 알리바이 공작, 용의자 감추기 그리고 마지막 범인 찾기 연출(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놓고 탐정이 범인을 밝히는 공식)까지 당신이 셜록 홈스에게 기대했던 것을 여기서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도면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 집의 배치는 사건 정황과 용의자가 왜 범죄가 불가능했는지 이해하는데 있어 정말 필수적인데 정작 책에는 실리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래서 그려본 것. 이러한 도면이 가능할 정도로 '네덜란드 살인사건'는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그것을 위해 차용하는 고전적 미스터리 공식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이미 글이 너무 길어졌으므로 세세하게 말하기 보다 가장 결정적인, 그러니까 관련 용의자 모두를 모아 놓고 범인을 밝히는 마지막 장면만을 들어 설명하려 한다. 이건 고전 미스터리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공식이라 할 만한데 애초에 왜 이러한 공식이 자리잡았는지를 설명하면 심농이 왜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차용했는가가 설명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왜 고전 미스터리는 하필이면 그러한 마지막 장면 연출을 하나의 공식으로 정립했는가? 그것은 바로 부르조아지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애초에 미스터리 장르가 왜 자리잡았는가? 그것은 근대에 이르러 더욱 더 격변하는 정세와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한 개인이 인식하고 이해하기에는 그 범위를 넘어서버린 세상에 대해 불안해진 부르조아들이 상상적으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고전 미스터리는 애초에 부르조아들에게 진정제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 해결도 경찰이 아니라 사립탐정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맡게 된 것이다. 부르조아들에게 국가란 애증의 대상이어서 자신의 권리와 재산에 지나친 간섭을 싫어한다. 이른바 야경국가란 부르조아들의 꿈인데 때문에 그들의 불안을 상상적으로 해소시켜줄 존재로 경찰은 아무래도 미덥지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뭣보다 프랑스의 '비독' 처럼 미천한 범죄자 출신들이 경찰의 전신이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열악한 그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낼 사건의 해결을 맡긴다는 것은 자존심상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반 다인의 파일로 반스 처럼 귀족이거나 최소한 신사 계급 출신이 탐정을 맡게 된 것이다. 즉 고전 미스터리의 공식들은 그러니까 철저하게 부르조아의 욕망을 실현하는 쪽으로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마지막 장면의 연출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기에 은밀히 끼어드는 부르조아의 욕망이 바로 심농이 강조하고자 하는 '결단'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왜 그렇게 연출되는 것인가?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범죄가 일어난 그 시간을 복원한다는 것이다. 탐정은 마지막에 모든 관련자들을 모아놓고 일어난 사건의 전모를 하나하나 밝힌다. 그렇게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다. 왜 이렇게 하는가? 이것은 단순하게 사건의 경위와 해결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왜 그 시간을 다시 가져오는 것인가?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범죄가 발생한, 그래서 완벽해야할 부르조아의 질서에 흠집을 가져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정이 마지막에 가서 그 사건을 하나하나 세밀히 복원하고 이윽고 범죄자릋 찾아내어 해결하는 것은 사건으로 인해 파탄나버린 부르조아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아예 그 사건이 없었던 것 처럼 만들어 부르조아의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 연출은 부르조아들의 욕망(자신들이 속한 질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앞으로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실체적 근거가 없다. 탐정의 해결이란 존 딕슨 카가 '화형법정'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진리란 수사에 불과하다.'란 말이 미스터리 장르만큼 더 잘 어울리는 장르도 없다. 그 무엇보다도 피에르 바야르가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그의 해석은 아가사 크리스티보다 더 설득적이다. '해결이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정이 행한 해결이 그 순간에 내린 결단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순간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심농이 고전 미스터리 공식을 '네델란드 살인사건'에 차용한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매그레가 해결해 가는 마지막 장면의 연출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매그레는 결정적인 해결이 순간까지 머뭇거리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니까 그는 갈등하는 것이다. 이런 진실을 밝혀도 좋을까? 때로는 등장인물에게 묻기도 한다. 사람들은 반대한다. 아무도 매그레의 해결을 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밝힌 것을 조용한 사회에 큰 돌덩이를 던졌다고 나무라는 것이다. 그는 왜 해결을 했던 것일까?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해결을 왜 감행해야 했던 것일까? 이것은 그동안 매그레가 보여준 모습과 너무 다르지 않는가?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 필요하다면 법적인 정의를 가볍게 무시할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매그레이기에 이번 처럼 모두가 기피한다면 그들의 삶을 위해 사실은 눈감아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과거의 그 자신을 깡그리 부정하듯 감행한 것이다. 그럼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건 바로 매그레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외에 다른 대답이 여기서 과연 가능할까? 그렇다. 매그레는 바로 자신을 위해 그 무모한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포핑아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포핑아 처럼 매그레 역시도 유혹에 휘둘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포핑아는 결국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유혹에 흔들리기만 하다가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러니까 매그레는 포핑아를 일종의 스스로에게 반면교사로 삼고자 해결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게 유혹에 흔들렸던 포핑아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에게 경고하고자 모두가 반대하는 해결을 해버린 것이었다. 즉, 그는 결단한 것이다. 유혹을 끊어내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물론 이것은 잠정적이고 순간적이다. 심농은 현명하게도 여기에 아무런 이성적 근거를 달지 않는다. 당연하다. 인생은 수많은 모순이 중첩된 것이라 정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만 그 때 그 때의 결단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심농은 결정적으로 포핑아의 배신이 밝혀지는 과정을 우연히 찾아든 등대 불빛에 의해 노출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 결정적인 장면들은 우연히 보게 된 시각에 의해 잡혀진다. 등대 불빛, 이층집에서 바라보는 것 등등 이렇게 '우연성으로 포착되는 결정성'이야말로 바로 심농이 말하고 싶은 결단의 본질임을 그것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 살인사건'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간단하게 그려본 것.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보기 보다 단순하지 않다. 거기에는 심농이 생각하는 삶의 진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은밀히 깃들어 있다. 시즌 2의 후반에서 이렇게 유혹이 강조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꾸로 우리 인생이 갇혀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유혹은 늘 바깥으로 인도하는 존재이니까 말이다. '네덜란드 살인사건'은 그 '갇혀짐'이 바로 우리 자신의 결단임을 은밀히 말한다. 그런에 왜 우리는 스스로 갇혀지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다음 작품 '선원의 약속'에서 고찰될 것이다. 

 

                                                 -  이타케게 갇힌 오디세우스를 떠올리며 연출해 본 것.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라이슬러 2011-08-24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심농이, 아니 매그레가 살아있다면(살아있군요..), 악수라도 청하지 않았을까 싶은 서평입니다.

ICE-9 2011-08-24 23:2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마녀고양이 2011-08-3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애지간히 추리나 스릴러에 속하는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런 리뷰도 가능하군요....... 감탄하고 돌아갑니다.

헤르메스님 즐거운 날 되셔요.

ICE-9 2011-08-31 21:55   좋아요 0 | URL
앗! 저의 서재에 들려주셨군요.
아픈 것은 잘 나으셨나 모르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