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오면 책이 아냐."
"책이 아니면 뭔데?"
"파지(破紙)" ('소각의 여왕' p. 20)
이유의 소설인 '소각의 여왕'에서 중심 무대가 되는, 해미가 일하는 고물상은 '비정상(非正常)'의 장소다. 바깥 세계에선 내부의 질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는 책이 거기서는 오직 책이 가지고 있는 무게로만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대표하듯이,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가치는 여기서 모조리 전복되는 것이다. 고물상이 가진 이러한 특성은 해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무조건 따로 떨어뜨려놓아야 해. 하다못해 책도.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거지."(p. 21)
이런 해미의 말처럼 고물상은 집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철저하게 개체 중심의 세계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분해된 개체가 원래 타고난 재질에 따라서 가치의 위계 질서가 세워진다는 점에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엄격한 신분 사회의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점은 해미의 아버지이자 고물상의 주인인 지창씨가 고물상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개인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하지만 그 보람도 없이 결국은 파멸하게 된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한 번 금수저는 영원한 금수저이고, 한 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인 것이다. 그리고 지창씨의 운명처럼, 고물상의 모든 것들 역시도 누군가에게 팔리지 못하면 소각된다. 자본으로 될 수 있는 것만이 생명을 보장 받는다. 그렇지 못하면 죽음 뿐이다. 더구나 이런 고물상의 세계에서 고물의 획득은 어디까지나 선착순으로 정해진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격언은 이 세계에 금과옥조와도 같다.
그런데 이런 고물상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딘가 모르게 많이 익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개인주의에 점점 뛰어넘기 힘들어지는 신분 격차 그리고 비정규직이 되면 특히나 더욱 뼈져리게 경험하게 되는, 이익이 되지 못하면 가차없이 폐기되어 버리는 상황이라든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현저하게 겪어온 경쟁 같은 것들은 사회가 그 어떤 좋은 말로 자신을 형용하였어도 살면서 피부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민낯의 진실이 아니었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유 작가가 그려내는 고물상은 바로 지금 우리 현실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세계에서 해미는 살아간다. 원래 해미는 재수생으로 사회가 강요한 궤도의 이탈자였다. 하지만 현실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고물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세계에 쓸만한 인력이 되어 가면서 어느새 그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관에 스스로 동화되어 버린다. 이러한 그녀의 변모는 아버지 지창씨에 대한 불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사력을 다해 만드는 이트륨 분리 기계가 자신이 보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고 사기꾼 김씨에게 마냥 놀아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에 대해 해미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 비정상이 된 것으로 단순히 정의해 버린다. 그래서 아버지가 해미에게 자신이 만든 기계의 중심에 가장 중요한 것을 넣었는데 그것이 바로 '진심'이라고 말했을 때도 코웃음 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비정상이었던 것은 누구였던가? 그것은 바로 해미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애도 보다는 먼저 이것으로 거머쥘 수 있는 액수를 헤아릴 때 단적으로 나타난다. 생각하지 않고 살게 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던가? 비정상의 세계에 살면서 오래도록 그것의 유지와 지속에 일조하다 보니 그만 그녀 역시 어느 것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찾으려 했던 몸부림이라 볼 수 있는 기계 제작도 허파에 든 바람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소설에서 말하는 '허파에 든 바람'은 알고 보면 우리가 그 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과 다르게 쓰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허황되고 유치한 몽상이 아닌 것이다. 비정상인 세계에 함몰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려는 노력이자, 그 탈주로 비정상 세계의 지속이 점점 정지된다는 점에서 그 세계에 정상성을 가져오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해미도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빨간 불이면 서야 하고, 충돌하면 멈춰야 하는' 궤도가 강요한 규칙이 실은 다만 자신을 비정상 세계에 얽매는 쇠사슬일 뿐임을 깨달은 해미는 그 어떤 충돌과 추격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영원한 탈주를 감행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자신도 할아버지와 아빠처럼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고.
비슷한 세계에 살면서도 처음부터 계속 허파에 바람이 들었던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인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다. 한탸 역시 해미처럼 책이 버려지는 곳에서 일한다. 그는 지하실에서 홀로 폐지를 기계로 압축하는 일을 한다. 누구도 잘 오려 하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잘 하려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무려 삼십오 년째.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한탸는 해미와 다르다. 해미는 개체를 나누고 단일한 개체마저 낱낱이 뜯어 팔 수 있는 것과 팔 수 없는 것을 가른 다음, 자본이 될 수 없는 것들은 소각시켜 버리지만, 한탸는 나뉘어진 개체를 한데 모으고 그것이 하나의 총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며 그러는 한 편, 그 단일성과 융화 시키기에 아까운 고유한 가치를 발하는 존재들이 있다면 발굴하여 자신이 직접 마련한 서재에서 영원히 존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미와 한탸가 하는 일은 이렇게나 정반대다. 해미가 하는 작업이 분해와 소각이라는, 결국 타자의 말살을 바탕으로 한 자기 이익 추구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한탸의 작업이란 융합과 발굴을 매개로한 타자 보존과 구원의 과정인 것이다. 사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는 해미에게 그런 작업을 강요하는 세계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가져오는 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바로 한탸에게 결코 메울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준 어린 집시 여인에게서다. 혈육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던 그녀가 한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오직 당시 체코를 지배하던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문자 그대로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실이 한탸를 삼십오 년동안 홀로 자신의 자리만 지키면서 묵묵히 폐지 압축 일을 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한탸가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한 개인의 독자성(獨自性)으로 충만한 세계이다. 지창씨가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이트륨 분리 기계가 공간화되었다면 나타났을 그런 곳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창씨가 이탈에 성공했다면 보여주었을 그 모습을 우리는 한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탈주한 자아만으로 온전히 채워지는, 순전히 개인만의 영토이며, 바깥 세계는 거기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해미의 고물상이 비정상의 장소라고 한다면, 한탸의 지하실은 '정상(正常)'의 장소라고 할 만 하다.
이러한 한탸의 공간이 가지는 성격은 역사적으로 비정상 체제였다고 평가 받는 독일 파시즘과의 대비로 더욱 뚜렷해지기도 한다. 아시다시피 독일 파시즘은 개인의 고유한 존재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체제였다. 거기엔 한탸가 책에게 하듯이, 내적인 면을 헤아려 발굴하는 작업 따윈 없었다. 철저하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만 가지고 평가했고, 그 평가 기준 또한 자신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아니면 자신과 얼마나 동일화될 수 있는가만 따져 보는 아주 이기적이고 자의적인 것이었다. 파시즘은 그 기준을 개인과 타자에게 강요했고, 기준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이 배제하거나 소각해 버렸다. 바로 이것이 어린 집시 여인을 죽여버린 독일의 민낯이었고, 그녀의 죽음을 통해 독일 파시즘과 함께 그에 뒤이어 체코에 또 다시 자리 잡은 전체주의의 본성을 깊이 깨달은 한탸에게 그의 작업은 사실 그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는 그가 세계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작업을 떠나게 되었을 때, 끝내 스스로 압축기에 들어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로 그 최후의 순간, 한탸는 집시 여인의 죽음 뒤로 내내 잊고 있었던 그녀의 이름을 비로소 기억해 내는 것이다.
한 편, 나는 여기서 해미의 고물상과 독일의 파시즘이 서로 꽤나 닮아 있음을 본다. 아마도 해미의 고물상은 해미와 똑같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오포(연애,출산,결혼,내 집 마련, 인간관계 이 다섯 가지를 포기하는 것.)'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를 소묘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독일의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내게 동일한 하나의 흐름이 다만 얼굴만 바뀌어 역사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짙게 남긴다. 그렇지 않아도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 역사를 동일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흐름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만 인정하고, 닮을 수 없는 것은 배제하고 보는 것이 서양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었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독일의 파시즘은 다만 그 동력이 다만 극한에 도달한 모습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파시즘이 무너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뒤이어 출현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남미와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세계 각지에서 출몰했던 독재국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한결같이 자신의 체제에 도움이 되거나 순종하는 이들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개인들은 모조리 억압하거나 배제해 버렸다. 그런 독재 국가조차 역사에서, 최근의 자스민 혁명까지 더하여 쏙쏙 퇴출 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이 질긴 악연은 이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남아 여전히 우리들의 통증과 신음을 양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제라도 이 흐름과 절연할 필요가 더욱 커지는 것 같다. 제대로 된 결별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고통과 절망에 노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저 취미로 인문서를 주마간산 하는 게 전부인,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 나로서는 이 물음에 뭐라고 답한다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 일이다. 다만 오늘 이야기한 두 권의 책이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고, 거기서 도출되는 대안 또한 유사하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말해 본다면, 역시 이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즉 그런 흐름에서 스스로 빠져 나오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그 흐름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중심을 두고 다른 모든 것을 그것과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므로 따라서 거기서 빠져나오려 하는 노력이란 다름아닌 자신만의 차이를 발굴하고 형성하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대체 불가능한 독자성의 영역을 생성하고 지속하는 자발적인 탈주만이 진정한 방법이라고 감히 말해 본다.
아마도 또 다른 한 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글은 여기서 매듭이 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너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을 나중에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안토니오 타부키의 소설, '인도 야상곡'이었다. 주인공의 이름은 호스. 그는 한 여자의 부름을 받고 친구인 사비에르를 찾기 위해 인도를 방문한다. 공교롭게도 호스가 하는 일은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한탸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는 직업을 묻는 한 여성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소설가시군요." 여자가 따져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경험 삼아 써보는 겁니다. 제 직업은 따로 있어요. 죽은 쥐들을 찾는 일이지요."
"뭐라고요?!"
"농담입니다. 고문서들을 뒤져서 오래된 연대기들이나 시간 속에 파묻힌 것들을 찾아내는 것. 그게 제 직업입니다. 그걸 죽은 쥐 찾기라고 한 거죠."('인도 야상곡', p. 104)
그 역시 한탸처럼 발굴과 보존이 주업(主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호스는 한탸처럼 타자 지향적이고, 그랬기에 만난 적도 없는 낯선 여인의 호출이었지만 기꺼이 자신의 조국을 떠나 자신에겐 더없이 생소한 타자의 땅인 인도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한탸와 다른 점은, 한탸는 영혼만 탈주했지만, 호스는 육체마저 탈주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아예 정주(定住)라는 개념이 없는 듯 보였다. 인도에서 내내 호텔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인도 자체도 타자의 영토인데, 호텔마저 잠시 깃들다 갈 뿐이라는 점에서 타자의 공간이다 보니, 그는 그렇게 겹쳐진 타자의 영역에서 어디든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 이러저리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조차 우연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마치 소설 전체가 타자의 영역 속에서 자아는 고정된 자신을 가지기 어려우며 다만 끊임없이 변하는 유동적인 존재가 될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야상곡'은 내게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는 또 다르게, 타자의 영역으로 완전히 탈주한다면 도대체 어떤 상황이 펼쳐지는지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탸가 전혀 나아가 보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어쩌면 타자 속을 거듭 전전했던 예전 한탸의 연인 만차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성스러운 존재가 된 것을 보았을 때 한탸가 가지게 되었던 낙담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지도 몰랐다.
만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평생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간 사람이 만차였다. 책들에 둘러싸인 나는 책에서 쉴새없이 표징을 구했으나 하늘로부터 단 한 줄의 메시지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책들이 단합해 내게 맞섰는데 말이다. 반면 책을 혐오한 만차는 영원토록 그녀에게 예정된 운명대로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는 여인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돌로 된 날개를 퍼덕이며 비상했다. 깊은 밤 환히 불밝혀진 왕성의 두 창문처럼 부드러운 빛을 발하는 날개였다.('너무 시끄러운 고독', p. 104)
'인도 야상곡'의 호스는 바로 이런 만차와 이어지고 있었다. 흐라발은 만차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 내막을 나는 타부키의 소설에서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성스러운 전화(轉化)란, 자신을 타자를 통해 부단히 변화시키는 것에서 도래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한탸와 그리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한탸 역시 타자가 쓴 책을 통해 자신을 계속 변화시켜 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호스와 한탸 사이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탸의 변화는 고정된 자신에 타자를 계속 덧붙이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가 하는 폐지의 '압축'은 이 변화의 단적인 형상이기도 하다. 그 역시 자신의 독서 행위가 실은 압축이며 자신의 육체 또한 족히 3톤이 되는 책들이 압축된 백과사전과 같다고 고백하고 있다. 압축은 지층이 쌓이는 것과 같다. 타자로부터 오는 것들은 고정된 내 위에 쌓여갈 뿐이다. 변화는 나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오지 않는다. 다만 그 무게에 못 이겨, 타자가 내리 누르는 강압 때문에 나와 타자의 경계가 무너질 뿐이다. 한탸 자신도 어느 게 자신의 생각이고 책에서 읽은 것인지, 또 읽은 것이라면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왜 이렇게 된 것인가? 그 이유를 타부키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탸의 변화가 압축을 통해 이뤄진다면, 호스의 변화는 여행을 통해 이뤄진다. 그런데 그 여행이란 것이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懷疑)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자의 영토인 인도는 호스에게 계속해서 과연 네가 알고 있다고 하는 게 정말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과 연장되어 네가 알고 있는 자신이 진정한 네 자신인지 끊임없이 되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케이지 지구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야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장방형에 가둬둔 것이다. 프레임 바깥의 피사체는 언제나 또 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그 피사체는 너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인도 야상곡', p. 17)
멀리서 느릿하고 단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기도 소리이거나 외롭고 암담한 한탄의 신음 소리일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요청도 못 하고 한탄 그 자체만을 표출할 뿐인 그런 소리 말이다. 나로서는 해독하기가 불가능했다. 인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평탄하고 차이가 없이 모든 게 뒤섞인 것 같은 소리들의 우주.(같은책, p. 42)
인도에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잇달아 발견하며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것도, 알 수 있는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기억 또한 진실된 순간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인위적 재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의 확인으로 이어지고 끝내 그런 기억의 집적이라 볼 수 있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라는 것 또한 결코 분명하지 않다고 수긍하게 된다.
지나간 현실은 늘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법이다.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인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왜곡은 거듭 일어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는 여러 호텔이 가득하다. 조지프 콘래드나 서머싯 몸의 책들에서, 키플링이나 브롬필드이 소설을 각색한 미국 영화들에서, 우리는 벌써 여러 호텔을 만난 바 있다.
마치 그곳에 가본 듯 친근하다.(같은 책, p. 83)
이러한 모습은 한탸와는 정반대이다. 한탸는 고정된 자아를 중심으로 타자가 집적되는 형태를 보여주었지만, 호스는 그렇게 이미 정립된 자아라는 것은 없으며, 그 자아조차도 타자의 매개로 이뤄지고 그렇기에 타자를 통한 변화란 원래 없었던 다른 자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자아가 그 순간 조우한 타자로 인해 비로소 발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보이는 것을 너무 확대 해석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확대는 맥락을 변조하지요. 사물은 멀리서 봐야 해요. 선택된 부분은 신중히 보시기 바랍니다.(같은 책, p. 113)
섣부른 정의(定義)가 편견을 만들고 그것이 하나의 한계가 되어 자신의 존재와 가능성을 협소하게 이해하도록 만들며 그것을 통해 타자 또한 무분별하게 가르고 배척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한탸에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그 정확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난다. 한탸는 책의 지식을 아무런 질문 없이 무분별하게 섭취했고, 그것의 진실됨을 회의(懷疑) 속에서 검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독서엔 자신의 적극적인 개입이라고 할만 한 게 전혀 없었다.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통째로 생략된 것이되다. 그래서 한탸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 줄 수 없었던 존재의 극한에 이르고자 했었지만, 나 자신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어떤 의미에선 자신에게 보다 강고하게 유폐되는 것이라 할 만한 자신의 죽음으로 그 여정을 완성하고 만 것이었다.
울지 말거라. 네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이제 나는 라이프니츠조차 가르쳐줄 수 없었던 그걸 보러 갈 테니까. 존재와 무의 극한까지 갈 것이다.('이 시끄러운 고독' p. 130)
그의 여정은 다른 이에게로, 미래로 이어지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이미 근대의 초기부터 허먼 멜빌의 단편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주어지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차이와 균열을 만들어내는 저항의 움직임이 계속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억압하는 흐름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었는지도 모른다. 한탸가 했던 압축의 독서가 실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수집과 같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어떤 타자에게로 이어지지 않고 개인의 수집으로 그치고 마는 한탸 식의 타자 지향적인 저항은 결국 발터 벤야민이 수집의 종말에 대해 말했던 다음과 같은 예언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고 하겠다.
수집이라는 현상은, 만약 그것이 그 주인을 잃게 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발터 벤야민, '나의 서재 공개' 중에서.)
이런 면에서 인도 야상곡의 결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호스는 마지막에 결코 홀로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틴이란 여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을 향한 질문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의 여정은 여인의 여정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미래를 가져온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이것 역시도 작위적인 해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위험까지 무릅쓰고 다시 한 번 감히 말하자면 한탸의 마지막이 끝내 살아서 만나볼 수 없었던 집시 여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나고 호스의 마지막은 마치 그 부름에 응답하듯 여인이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 호스의 길을 좀 더 우리가 취해야 할 대안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응답하여 도래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어야 그 반대편의 역사적 반복을 저지할 하나의 흐름이 연속적으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호스는 그 만남에서 자신이 정말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깨닫게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정확히 그런 건 아닙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나는 오랫동안 찾아다녔지만, 나를 찾은 지금은 더이상 날 찾으려는 마음이 없는 겁니다. 혼란스럽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나도 그 사람이 날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어요. 우리 둘 다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자는 거지요.(같은 책, p. 111)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마침내 확인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의 적극적인 사유의 개입이 있지 않고서는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변화의 힘은 책을 비롯하여 그 어떤 타자를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타자를 지향하더라도 거기엔 나의 끊임없는 질문과 회의 그리고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미처럼 무분별하게 동조하게 되거나 한탸처럼 변화를 만들어낼 그 어떤 움직임도 자아내지 못한 채, 나 자신의 존재감만 키우는데 국한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선동과 유폐의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호스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단한 사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알랭 바디우는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의 오베르빌리에 시립극장에서 일어난 IS 테러집단에 의해 민간이 무수히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건을 추모하면서 이런 비극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의무만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유의 의무라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커다란 비극일수록 그것에 대해 신중히 사유하지 않으면 실제 역사가 증거하는 바대로 곧 감정적인 복수와 비이성적인 광기에 휩쓸리고 또다시 누군가를 희생자로 만드는 비극을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게 있어 사유 또한 타부키와 마찬가지로 질문이자 회의의 여정이다. 내게 대한 것을 포함하여 모든 절대적인 것과 확신을 부정하고 차이와 균열을 생성하는 저항의 몸짓, 그것이 바로 사유인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확신과 고집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 있다. 손쉽게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여 멋대로 이름 붙이고 서슴없이 혐오와 적대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 예를 굳이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다. 얼마 전 세간을 뜨겁게 달군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이 이런 실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도 처음 시작은 참으로 미약하였으나 누군가의 적대가 상대편의 적대를 부르고 그렇게 몇 차례 오고가다 보니 둘러싼 모두를 활활 태우는 거센 불길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메갈리아 논쟁의 모습은 따지고 보면 테러의 여파와 유사하다. 9. 11의 미국의 시민이 그랬고, 오베르빌리에 극장 테러 이후의 프랑스 시민이 그랬듯이, 갑자기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정체성의 충성도가 충동적으로 강해지고, 그렇게 격양된 정서 속에서 전쟁을 불사하는 국가적인 보복이라는 참으로 비이성적인 행위마저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복수(復讐)는 정의가 될 수 없다. 하물며 한 국가나 성별에게 국한될 수도 없다. 그래도 정의의 이름을 빌어 그것을 관철하고 싶다면 미국이나 프랑스 시민은 현재도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더 큰 빈도로 일어나고 있는 이라크나 파키스탄, 나이지리아와 콩고의 학살에도 똑같이 제재하라고 나서야 하며, 남성들 역시 여성이 당하는 다른 모든 차별에도 그러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이다. 정의는 어느 하나에 편중되지도 않고, 편재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유는 그러한 충동을 막기 위해서다. 비이성적인 감정의 감염을 저지해,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모든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 야상곡'에도 나오는 다음과 같은 페소아의 시,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어떤 사태를 마주할 때 취해야 할 준비 자세에 대해 잘 보여주는 듯하다. 나도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눈먼 과학은 불모의 땅을 일구지요. 미친 믿음은 자기를 찬미하는 꿈을 먹고삽니다. 새로운 신은 그저 하나의 말일 뿐입니다. 찾지도 말고 믿지도 마세요. 모든 건 감춰져 있습니다.(p. 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