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많은 소설을 읽는다. 하는 일이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 주위에 소설을 벗하는 이도 드물다 보니 늘 ‘어디 쓸 데도 없는 걸 뭐하러 그리 열심히 읽어?’란 소리를 듣는다. 하기야 처음 듣는 지청구도 아니다. 어릴 때 난 아버지에게 “소설 그만 읽고 공부 좀 해라!”란 말을 허다하게 들었으니까. 요즘 아버진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죽어라고 소설을 읽더니 애가 아주 이상해져 버렸어.”
아버지의 말마따나 난 현재 이상한 사람으로 통한다. 주위 사람들에겐 구닥다리 취미를 가진 데다 그들이 모르는 사람, 알지 못하는 책을 입에 주워 담는 일이 잦다 보니 대화에도 잘 끼워주지 않게 되었다. 소설 때문에 고독해졌다. 침묵의 벗이 되었다. 벌써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읽고 있다. 권 수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다. 그냥 소설이 좋은 것이다. 장르가 무엇이든. 국적도 상관없이.
왜 그렇게 소설을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누구도 밥 먹는 이유에 대해 따져보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까진 그랬다. 그런데 최근에 문득 내가 왜 소설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어느새 밝아버린 창문으로 하얀 설원이 되어버린 세상을 보고서였다. 그때 마침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던 것도 한몫 했다. 읽느라 일어날 때 다리가 저려 얼른 제대로 서지 못할 만큼 오래도록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일어나게 된 건,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아우토반’이 되었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아버지, 누이 그리고 아내를 버릴 수 있다고 말했던 ‘명예의 한순간’을 과연 잡았는지 그 결과를 확인하고 나서였다. 그는 원하던 것을 갖지 못했다. 평생을 꿈궈온 영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총성을 시작으로 느닷없이 운명에게 옆구리로 발길질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는 눈과 코를 매캐하게 휘감는 포연과 죽어가는 이들의 신음 소리로 가득한 대지 위에 벌렁 나자빠진다. 이제 죽음만이 남았다고 확신한 순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파란 하늘이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그 드높은 하늘은 안드레이의 운명은커녕 유럽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전쟁마저도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초연한 표정으로 정적과 평안만이 가득했다. 그것을 보면서 안드레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명예의 한 순간’이 실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생각한다.
‘왜 나는 전에 이 드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p. 540)
이런 고백이 무심결에 마음의 현을 진동시켜 나도 하늘이 보고싶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일어났던 것인데 세상이 완전히 변했음을 발견한 것이다. 팔짱을 낀 채로 풍경을 한동안 응시하다 돌연 깨달았다. 내가 소설에 매혹을 넘어 중독까지 된 것은 그것이 안드레이에게 그랬듯이 드높은 하늘을 보여주기 때문이란 걸.
소설은 그런 손길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하며 골방 같은 일상에 안주하며 세상이 정답이라고 말한 것 외엔 눈 닫고 귀 막으며 살려는 나를 문을 박차고 들어와 밖으로 이끄는 굳건한 손인 것이다. 어린 시절 내겐 그런 친구가 하나 있었다. 방학만 되면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와 나를 이끌고 온종일 산과 들판을 쏘다니던 녀석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곳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곳이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인가 감평하는 역할이었다. 둘이 합의하여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인정되면 ‘비밀기지 몇 번’이라는 넘버링을 붙였다. 그리고 둘이 함께 만든 지도에 그곳을 첨가했다. 모두 그 당시 열광했던 애니메이션인 ‘보물섬’의 영향이었다. 소설은 그 친구 같다. 표지를 넘기면 문득 그때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담장을 타고 넘어오던 내 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오늘은 또 어떤 미지의 장소를 발견하게 될까 두근거린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아이일 때와 마찬가지로 모험을 동경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http://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150/8991290159_3.jpg)
그런데 소설 또한 애초부터 그런 존재이지 않았나? 많은 이들이 문학의 시원을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로 꼽는다고 알고 있다. 그 이야기 속의 오디세우스 역시 낯선 세계로 호출되어 정처 없이 유랑하며 예전에는 보지도, 만날 수도 없었던 기이한 장소와 존재들을 만난다. 그리고 끝내 자신의 고향 ‘이타카’마저 완전히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모험을 통해 오디세우스에게도 안드레이처럼 ‘드높은 하늘’이 도래한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후예라고 해도 좋을 소설은 늘 그랬다.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단적인 예다. 몸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뛰쳐나가는 것이 소설의 사명이라는 것을.
그러나 단순한 가출은 아니다. 풍차를 괴물로 간주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돈키호테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리석다 말할 테지만, 세르반테스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누군가가 규정한 협소한 시야에 한없이 속박되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동시에 강조한다. 소설의 임무는 그런 구속에서 독자를 자유롭게 만들어 모호함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속에서 이제 모든 의미와 질서를 스스로 찾고 구축해 나가도록 돕는 데 있다고 말이다. 이것을 올해 읽은 켄트 하루프의 ‘축복’과 이언 매큐언의 ‘넛셸’도 다시금 확인시켰다.
많은 이들이 ‘축복’을 두고 평범한 삶을 찬미하는 소설이라 말한다. 하지만 내겐 정반대로 읽힌다.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하는 일상이란 이사할 때 장판을 걷으면 발견하게 되는 무수한 곰팡이처럼 치졸과 비겁함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무수한 자기 검열과 타인에 대한 냉대, 남 탓하기로 마구 얼룩진 것에 지나지 않으며 남들 눈에 무난하게 보이는 평범한 삶이야말로 오욕이라고 말이다. 소설에서 그것은 ‘겁쟁이’란 말로 표현된다. 굳건한 기독교 신앙으로 우리와 그들이 명확히 구분되는, 미국 남부 아이오와주의 ‘홀트’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엔 겁쟁이들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병으로 죽어가는 주인공 대드 루이스가 대표적인데, 그는 남의 눈이 무서워 동성애자인 아들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버린다. 더하여 오 년 동안 자기 밑에서 일한 ‘클레이턴’이란 부하 직원이 자신의 돈을 횡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역시 신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직원과 아내의 절박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해고한다. 그 결과, 아들은 집을 나가고 임종의 순간에도 찾아오지 않으며 클레이턴은 자살한다. 이것은 그에게 평생 한으로 남는다. 사실 그는 지금 죽는 게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에 사랑과 자비 보다는 냉정을 선택했을 때부터 ‘대드’란 이름에 이미 ‘죽음(Dead)’이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 죽어 있었다. 이러한 대드의 삶은 그와 정반대의 인물인 라일 목사를 통해 선명하게 대비된다. 라일 목사는 한 마디로 겁이 없는 사람이다. 동성애가 죄가 아니며 아랍이 적이 아니라고 소신껏 말한다. 신도들이 격노하여 자신을 비난하고 교회를 떠나도 굽히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마저 그를 버리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수한다. 이름 또한 삶(Life)을 연상시켜 한층 더 뚜렷하게 대조되는 두 삶을 보여주며 켄트 하루프는 ‘누구의 삶이 축복인가?’란 질문에 분명히 답한다. 그것은 바로 라일 목사라고.
이언 매큐언의 ‘넛셸’ 또한 클로드가 트루디를 부르는 호칭 그대로 우리를 ‘생쥐’로 만드는 세속적 가치에 점령당한 일상을 통박(痛駁)하고 있다. ‘돈키호테’와 정반대로 현대인의 초상을 정립한 ‘햄릿’을, 시간 배경을 현대로 옮기고 태아인 햄릿을 화자로 하여 다시 쓰고 있는 이 작품에서 그런 일상은 클로드의 말버릇이기도 한 ‘상투어’로 나타난다. 클로드는 결국 햄릿의 아버지 존을 살해하는데 그 존이 하필이면 시인이다. 구체적인 사물을 거래하는 부동산 업자인 클로드와 모호한 언어로 추상적인 세계를 그리는 존의 관계는,하이데거를 따라 시가 일상을 점령한 존재자들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존재 본연의 모습이 도래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걸 감안하면 일상과 비일상의 대립이란 게 더욱 확연해진다. 그야말로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말처럼, 한 쪽에는 성(聖)이, 다른 한 쪽에는 속(俗)이 있는 것이다. 이 사이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햄릿을 태중에 가지고 있는 ‘트루디’란 여성이다. 그는 존의 아내다. 하지만 남편이 자신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자 클로드와 어울린다. 나는 이 소설에서 트루디란 인물이 가장 흥미로웠다. 그녀는 일상을 벗어나는 것과 일상에 매달리는 것 사이에서 용기 있게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늘 갈등속에 흔들리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그 모든 것의 관찰자다. 그는 트루디의 몸을 통해 세상을 읽는 독자와 같다. 바깥 세계를 감각을 통해 만나게 하는 어머니의 자궁이 그에겐 책인 것이다. 그 모든 읽기를 끝내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온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슬픔, 그다음은 정의, 그다음은 의미, 나머지는 혼돈이다.’(p. 263)
이처럼 ‘전쟁과 평화’, ‘축복’ 그리고 ‘넛셸’ 모두 하나의 진리만이 존재하는 현실 세상이 감추고 있었던 세계로 데려가 그런 진리조차 잠정적으로 통용되는 가설에 불과하며 일상의 현실 또한 여전히 모호한 채 남아있는 여백이 아주 많다는 것과 아직도 경험과 사색의 항해가 많이 필요한 대양(大洋)이란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은 불가능한 시공을 담는다. 현실 세계에 단 한 번도 재현되지 않는 시공이란 의미에서다. 당연하다. 그것은 활자로만 존재하니까.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인물의 대기 속에서 단 한 번도 울렸던 적이 없는 말들로 소설은 채워져 있다. 일상에서 불가능한 것은 어리석은 몽상이요, 부재는 쓸모없는 것이지만, 소설에선 거꾸로 불가능을 통해 가능을 구현하고 부재를 매개로 존재가 정립된다. 돈키호테에게 풍차가 괴물이란 게 진실이었던 것처럼 현실의 모든 의미와 질서는 소설에서 전복되는 것이다. 벽은 무너지고 토대는 붕괴되며 지도는 재가 된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 모호하지만 무한하게 펼쳐진 가능성이며 스스로 그것을 발굴해 의미를 세공할 독자 뿐이다.
지금의 시대는 갈수록 눈에 보이는 것만을 원하고 있다. 돈과 외모는 물론이고 인종과 성별 또한 그러하다. 종교와 민족도 마찬가지다. 클로드처럼 나와 남을 확실히 구별해 줄 것만을 찾는다. 내적인 성장은 내버려두고 외적인 것만 중시하다 보니 엷어진 자존감에 자기 보다 훨씬 더 큰 존재에 기생하여 ‘호가호위’ 하고픈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런 시대의 끝에 뭐가 있는가는 ‘축복’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 내가 다른 이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 불안에 떠는 겁쟁이가 되어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커다란 아픔을 줄 뿐이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모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상과 가상, 현실과 몽상, 과학과 신비, 실용과 무용 등, 결국은 나와 너를 나누는 지금의 세상이 무한정 그어놓은 경계선을 관통하는 용기가 말이다. 나는 소설이 그것을 준다고 믿는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한 존재가 된 나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남들은 소설의 종말을 운운하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소설의 생명은 더 왕성하리라 내다본다. 분명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병적인 집착에 질린 이들이 차오른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소설의 우물로 모여들 것이다. 소설의 기나긴 역사가 증명하듯이, 소설이란 현실이 감춰놓은 세계를 드러내어 기울어진 시대를 바로잡는 균형추이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나역시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소설이 초대하는 항해에 기꺼이 뛰어들 것이다. 모험은 계속된다. 앞으로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