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잠든 숲'은 보텐슈타인과 피아 형사 콤비가 주연인 타우누스 시리즈의 8번째 작품이다.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무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함을 빌어 감히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여우가 잠든 숲'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타우누스 시리즈의 결정판 같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친밀해 보이지만 속 모습은 전혀 반대인 공동체, 집단적인 방관과 무책임 속에 은폐되어 버린 과거의 비극,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유지되어 온 사회, 그 사회의 진정한 구원은 과거의 비극에 깃든 진실이 올바로 밝혀지고 무고한 자가 희생양의 족쇄에서 풀려날 때 찾아온다는 것 등등. 타우누스 시리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중핵으로 일컬을만한 것들이 '여우가 잠든 숲'에선 모조리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혹시 당신이 보텐슈타인 형사의 팬이라면 이 소설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2권 말미에 실린 넬레 노이하우스의 고백에 따르면, 이 소설엔 무엇보다 올리버 보텐슈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한껏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오랜 세월 존재했었던 - 하여, 트라우마라고 불러도 무방한 - 상처가 여기서 드디어 드러난다. 그가 왜 승진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오로지 사건의 진실만 쫓는 형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자신의 조그만 잘못에도 쉽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타우누스 시리즈의 대표작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피아가 독선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일부러라도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투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는지, 바로 그 내막이 이 소설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텐슈타인이 지닌 무려 42년 동안 지속된 고통의 결을 헤아리고 동시에 치유를 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42년 전, 그러니까 1972년에 일어난 일이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려 그의 오두막을 찾는다.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그 남자를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한다. 그 뒤, 소설 속 시간은 2014년의 현재로 돌아온다. 한 청년이 시즌이 지나 인적이 뜸해진 캠핑장을 찾는다. 그는 마약 중독자다. 그러나 그 곳을 찾아온 것이 마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실은 정반대의 목적으로 찾아왔다. 마약을 완전히 끊기 위해. 그에겐 연인이 있다. 그녀는 사내 아이를 임신했다. 곧 태어날 아들에게 청년은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이다. 격리된 이 곳에서 갱생의 기회를 잡기 위해. 그리고 사고. 남자가 찾아 온 캠핑장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캠핑카 하나가 전소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불에 탄 시체. 피아의 전남편이자 법의학자인 헤닝은 그 시신이 남자이며 화재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임을 밝혀낸다. 결혼과 일 모두에서 실패하고 이 곳에서 여행을 떠난 동생 대신 캠핑장을 관리하고 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던 전직 기자 펠리치타스는 폭발 즈음해서 급하게 떠난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딸 소피아의 양육으로 곤란을 겪는 보텐슈타인은 도저히 맡길 데가 없어서 딸을 데리고 범죄 현장으로 간다. 이런 보텐슈타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캠핑장을 찾은 청년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프롤로그까지 포함하면 넬레 노이하우스는 아버지와 관련하여 세 명의 남자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자,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자 그리고 아버지가 된 자. 모두 뜻하지 않게 가정을 이루는 일에 실패했다. 펠라치타스 또한 마찬가지다. 피아 역시 범죄 현장에서 하필이면 전남편과 같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살며시 보여주는 증상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안정으로 충만한 가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연 그러한 것 같다. 불에 탄 캠핑카 소유주를 시작으로 수사를 확대해 보니 그 어느 가정도 우리가 기대하는 범주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신뢰 대신 적대가, 안정 대신 불구가 되어버린 가정들이 공동 묘지의 묘비처럼 즐비하다. 그리고 마치 그런 속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살인 또 살인. 죽음에 임박한 요양원의 할머니가 급사하고 보텐슈타인에게 뭔가 전하려 했던 신부도 목을 매단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살인이 거듭될 때마다 보텐슈타인은 상처를 입는다.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엄격하게 자기 절제를 하는 보텐슈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참혹한 죽음 앞에선 속수 무책이다. 피아가 걱정할만큼 보텐슈타인은 사건 수사에 개인 감정을 드리운다. 그러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려 42년 전에 일어난, 그것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 되어버린 바로 그 아이의 실종 사건에 관련 되어 있음을 알고는 아예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공공연히 선언해 버린다.


 당신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난 이 사건과 그냥 어떤 식으로건 관련돼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 이 뼈의 주인공은 한때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소. 42년 전에 실종됐는데, 그 때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나였소!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 말이오. 내 말 알아듣겠소? (1권. p. 316 ~ 317)


그 날 사라진 소년의 이름은 아르투어. 실종된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보텐슈타인이 새끼 때부터 젖을 먹여가며 키운 여우 막시마저 같이 사라졌다. 당시 보텐슈타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던 두 존재가 동시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 일로 보텐슈타인은 달라졌다. 러시아에서 이주한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 누구도 친하려 하지 않았던 아르투어와 기꺼이 친구가 되고 가련히 여겨 새끼 여우를 아낌없이 보살폈던, 그토록 약한 자에게 공감하며 정이 넘쳤던 보텐슈타인은 사라지고 감정을 억제하고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 하는 보텐슈타인이 되어 버렸다. 사건이 모두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관계가 있어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로 소환된다. 그렇게 넬레 노이하우스는 보텐슈타인으로 하여금 여지껏 피하려고만 했었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든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시점에서.


 그는 정의를 믿고, 규칙과 가치를 믿었기에 경찰이 되었다. 선과 악도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사라지면서 예전에 그를 가득 채우고 독려하던 사냥 욕구도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속고 바보 취급 당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1권. p. 37)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 신물이 났다. 사라지거나 죽은 피해자에겐 아무 관심이 없는 세상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경찰직을 떠날 생각을 한다. 바로 그런 시점에 넬레는 보텐슈타인을 원점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하여. 그것이 전부 사회의 책임인지, 과연 보텐슈타인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보텐슈타인에게 이 소설의 여정은 더욱  뼈아픈 것이기도 하다. 넬레 노이하우스가 이렇게 보텐슈타인을 은연 중에 심문대 위에 세우는 것은 아르투어와 관련된 그의 태도가 현재 독일 한 편에서 진행중인 외지인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사함이란 것은 바로 반응이다. 아르투어가 사라졌을 때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가족의 아이가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 찾는 것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했고 방관했다, 그러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하나, 아르투어의 가족이 외지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당시 아르투어 실종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 사건은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아르투어의 부모는 아주 선한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욕하지도 않았고 남들처럼 계속 우리를 찾아와 꼬치꼬치 묻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에겐 눈엣가시였던 것 같아요. 이전엔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적대감이었죠.(1권, p. 370)


 비단 아르투어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루퍼츠하인(실제 지명이기도 하다.)에서 유일한 의사인 레나테 바제도프 또한 외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저 아래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내 환자들이에요. 그중에는 30년전부터 이 병원을 찾은 사람도 많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름과 질병, 혈연관계에 대해 잘 알아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아요. 나는 여기 토박이들의 눈엔 여전히 이방인이에요.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도요.(2권, p.59)


 바로 이것이 소설 초반, 마치 루퍼츠하인 자체가 저주 받은 것처럼 모든 가정이 붕괴된 것의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비극 앞에서 침묵했고 방관했다. 자기 일로 여기지 않았고 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이 작태를 외지인이란 이유 하나로 정당화 시켰다. 외지인을 희생양 삼아 비극이 벌여 놓은 공동체의 상처는 쉽게 봉합되고 그들이 바라는 정상 생활 또한 수월하게 되찾았지만 사실 그건 한없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모든 가정들이 서서히 붕괴되어 갔던 것이다. 그 비극과 정면으로 맞서고 치유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은 도미노처럼 이어졌고 무수한 희생자만 낳고 말았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청년도 알고보면 그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마을의 모습은 그렇게 친했고 소중했던 친구와 여우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는데도 적극적으로 거기에 뛰어들어 뭔가 하기 보다는 42년 동안이나 소극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보텐슈타인에게 너무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저 자신의 상처 달래기에 바빴던 보텐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가해자들 중 하나였다. 넬레가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가 보텐슈타인에게 이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진작에 아르투어와 막시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훨씬 더 빨리 그들을 찾아냈을 것이라고. 바로 그 마음을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제도프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녀는 피아에게 자진해서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건네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피아가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난 용기를 보여야 할 때 외면한 적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그 결과가 두려워졌어요. 내가 잘 아는 세 사람이 살해되었고,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는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여기서 일어난 일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두고만 볼 수 없어요. (2권, p. 59)


 나는 바로 이것이 넬레 노이하우스가  '여우가 잠든 숲'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픈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비극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것. 설령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여우 막시처럼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러니 그것의 진실을 알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것. 그렇지 않으면 방관한 자들의 자녀인 엘리아스와 파올리네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 더 큰 비극이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42년 전, 아르투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지금까지 내내 반편으로 살아온 레오 켈러는 그대로 사건 이후 지금까지의 보텐슈타인의 삶이 정말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보텐슈타인 역시도 레오 켈러처럼 바보처럼 살았다는 것을. 소설 마지막에 보텐슈타인이 내놓은 집을 레오 켈러가 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레오 켈러가 이제 진짜 안정을 구가할 수 있는 집을 가지게 되었듯이 보텐슈타인도 카롤리네와 소피아와 더불어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의미까지 더하여.


 '여우가 잠든 숲'은 최근 시리아 난민과 IS의 테러로 외지인에 대한 반감과 적대가 한층 깊어지고 있는 현재 독일에게 보내는 하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배척 보다는 관용과 대화의 태도를 권유하는. 소설에서 모든 게 자기 일이라 생각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배척과 적대가 실은 눈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기세가 좀 꺾였지만 독일의 대표적인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 당이 자국에서 제 2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무분별한 반감과 적대를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독일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백인 우월주의에다 이민과 이슬람 그리고 페미니즘과 동성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우정단 국민전선이 내놓은 대선 후보 마린 르 펜이 1위의 에마뉘엘 마크롱과 아주 근소한 차이로 결선 투표 진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와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미국 대선과 참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유럽에서의 이러한 극우의 득세는 거듭된 테러로 실제 자신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진보 세력들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기이한 것은 성소수자들이 그들을 반대하는 극우 세력을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무슬림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배척하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반감이 그들을 적대하는 극우 정당들의 지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여기엔 지금까지 프랑스가 자랑했던 톨레랑스와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가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서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도 자신을 자꾸 연기하게 만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논리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나는 정의의 가장 기본적 임무의 하나는 최대한 공적 정동의 공간을 넓히고 정체성의 축소에 항거하고 또한 불행의 공간이란 결국 우리가 전체 인류 차원에서 직면해야 할 공간이지 결코 정체성에 국한되는 발언에 가두어서는 안 되는 공간임을 기억하고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불행에서 오직 정체성만을 중요한 것으로 입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행에서 오직 희생자의 정체성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비극적 사건 자체에 대한 위험한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복수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 복수는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항상 잔혹함이 반복되는 서막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미 오래전, 위대한 그리스 비극은 정의의 논리와 복수의 논리를 대립시켰습니다. 정의의 보편성은 가족, 지방, 국가, 정체성의 복수와 대립됩니다.

 -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중에서 -




 소설에 외지인과 인간이 아닌 여우 막지를 데려 온 넬레의 마음은 이런 바디우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보텐슈타인이 앞으로 구현할 정의가 바로 바디우가 말한 정의일 지도 모른다. 과연 어떨지?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도 결코 멀리 있지 않기에 그 정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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