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마지막 날. 잠깐 비가 내렸다. 하늘이 낮고 흐리다. 벨벳 언더드라운드의 'After Hours'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룹의 유일한 홍일점 드러머인 먼로 터커의 음성으로. 역시 이런 날엔 이 음악이 잘 어울린다. 동영상을 링크하려 했는데, 곡의 분위기를 음반만큼 전달하지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 노래엔 이런 후렴이 있다. '당신이 그 문을 닫으면, 난 다시는 하루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이 사회엔 지금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문 닫는 일들이 많다. 닫힌 문 안쪽에 홀로 남게되는 이들에게 제발 나만 혼자라는 두려움, 잊혀진다는 두려움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름이다. 문은 확실히 열어두는 게 좋다.


 장르 소설을 즐겨 읽는다. 리뷰로도 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쓰는 속도는 읽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 읽은 책과 리뷰로 쓰는 책은 압도적으로 차이날 수밖에 없다. 더하여, 내 기억력엔 한계가 있고, 마치 후발 주자들이 계속 골인 지점으로 뛰어들듯 몰려오는 책들에게 다시 또 기억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리뷰로 복기하지 않은 책들은 어느 샌가 가물가물 해져 버린다. 나이가 들면 기억이란 데이터베이스도 꼬이게 된다. '미스터 홈즈'란 영화를 보라. 기억력 하면 최고라 자부하는 셜록조차, 나이가 드니 자랑하는 기억의 궁전이 마구 엉클어지지 않았던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더라. 한 할아버지가 한 할머니와 함께 첫사랑의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1박을 같은 방에서 하게 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할머니가 방 중앙에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할아버지는 알겠다면서 자리에 눕는다. 그러고는 한숨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선을 넘어가 널 안고 싶은데, 나이가 드니 그 짓도 도저히 못 하겠다. 이거 너무 졸려서...'


 교훈은 뭐든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미루지 말고 체력이 받쳐줄 때, 열심히 읽자. 여력이 남는다면 쓰기도 하자. 그렇게 미처 리뷰로 쓰지 못한 책들을 이 자리에서 살짝 언급해 본다.


 먼저, 켄 브루언의 '밤의 파수꾼'이다.

 올해 가장 최고의 책 을 선택 하라면, 나는 아직 반도 안 지났지만 이 책을 꼽고 싶다.

 원래 제목은 'THE GUARD'. 아일랜드 경찰을 뜻하는 말이다. 켄 브루언은 우리나라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작가다. 51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93년에 데뷔한 그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시리즈가 두 개나 있는 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이 책을 제외하고 '런던 대로' 하나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콜린 파렐 주연의 영화로 만든다기에 그 바람을 타고 나온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켄 브루언의 작품을 영영 만나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라도 나와 그동안 켄 브루언의 소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 해갈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그조차 영화가 망하고 소설 역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한 탓에 켄 브루언의 차기작 도래는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게 2011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나 불쑥 켄 브루언의 다른 책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자꾸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 하퍼 리의 '파수꾼'이 연상된다.) 언급을 자제하고 싶은데, 여하튼 '밤의 파수꾼'은 켄 브루언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잭 테일러 시리즈'의 시작을 여는 책이다. 잭 테일러 라니, 주인공 이름을 막 지은 티가 난다. 이것만 봐도, 켄 브루언은 이 작품을 쓸 당시만 해도 여기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작가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 흐르는 대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이런 사실은 직접 읽어보기만 해도 확연히 다가온다. 소설은 하드보일드에 속한다. 그러나 탐정이 나오고, 의뢰를 받아 수사를 하는 것말고는 우리가 기대하는 하드보일드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느슨한 서사, 서스펜스 제로. 게다가 탐정은 신념과 활력 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의기 소침에 빠져들어 '도대체 수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하는 독자의 푸념을 절로 일으킨다. 때문에 소설은 재미를 더 치중하는 이들에겐 확실히 허들이 높다.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지?' 하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분위기, 실존적 고뇌 이런 것을 원한다면, 소설은 당신의 마음을 기꺼이 열게 만들 것이다. 여기엔 부조리한 고통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이해하지도, 치유를 주지도 못하는, 왜소하고 무기력한 존재의 내면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문체와 캐릭터로 재현된다. 때로는 진한 블루스의 감성으로, 때로는 프리 재즈적인 감성으로 켄 브루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로 여기에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이 있다고. 때로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나 혼자 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버틸 힘을 얻는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영혼의 이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잭 테일러는 당신의 이웃이다.


 다음은, 마에카와 유타카의 '크리피'



  '절규'를 끝으로 공포 영화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모처럼 다시 만드는 공포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현재 일본 호세이 대학 국제문화부 교수로 재직 중인 마에카와  유타카. 켄 브루언과 똑같이 51년 생이다. 물론 일본인. '크리피'는 7회 일본 미스터리문학대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이웃집 가장이 실은 겉보기와 전혀 다른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는데, 기요시가 공포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서 공포물인 줄 알았지만 공포물은 아니었고 스릴러에 가까웠다. 읽은 느낌을 간단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그런 소설이 있다. 반전의 효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이전의 설정과 이야기가 붕괴되는. '크리피'가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핍진성이 부족해 보인다. 범인도, 피해자도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작가 뜻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인물과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장르 소설일 경우 독자에게 "과연 이렇게 될까?" 하는 의문을 자꾸 가지게 하는 것은 실패작이라 생각한다. '크리피'는 그렇게 만든다. 혹시 나만 그렇게 보이나? 정녕 내가 프로불편러라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기요시 감독은 소설과 다른 형식을 취했다. 주인공의 입장이 바뀐 것인데, 소설에서 주인공은 구경꾼 역할이었다. 소설이 묘사하는 비극에 그는 간접적으로만 연루되었다. 하지만 기요시는 직접 당사자가 되도록 했다. 소설을 읽어본 결과, 나는 기요시의 입장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소설 초반에 묘사된 주인공의 불륜과 뒤이어 겪게 되는 사건의 의미가 전혀 맞물리지 않아, 도대체 왜 불륜이란 설정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기요시의 설정대로라면 불륜이 의미를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크리피'는 기요시가 자신의 공포 영화를 통해 꾸준히 천착해 왔던 것, '괴물이 나타났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라는 노선을 여전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화 '크리피'의 예습으로 읽어 본 것이다.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가노 도모코, 일곱 가지 이야기.



 가노 도모코의 데뷔작이라고 하던가. 과연, 신인다운 풋풋함이 넘쳤던 작품이었다. 가노 도모코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일본추리작가협회 수상작인 '유리 기린'을 비롯하여 여러 권 소개된 것 같은데, 정작 읽어 본 것은 '손 안의 작은 새'밖에 없다. 그 역시, 차가운 미스터리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감성으로 풍부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가노 도모코의 이름은 내게 마쉬멜로 같은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는데, '일곱 가지 이야기'도 그랬다. 액자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일곱 가지 이야기'란 그림책이 중심인데, 그것을 읽고 이야기에 반한,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성이 작가에게 보내는 팬레터와 그에 대한 작가의 답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기묘한 일을 편지에 적어 작가에게 보내면, 작가가 답장에서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 때, 여성은 일상의 미스터리를 꼭 '일곱 가지 이야기'의 그림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와 결부시키므로, 그 내용이 소개되기도 하여 액자 소설 같아 보인다는 말을 참 시시콜콜 잘도 하고 있구나.

 어쨌든, 편하게 읽었다. 사소한 미스터리에 일상을 가볍게 터치하듯 진행되는 소설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부담이 없어서 오히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이렇게 사족처럼 붙여두는 나는 음흉한 사람이려나. 어쨌든 신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으면 일상 미스터리로써 괜찮은 축에 속한다. 신인만이 받을 수 있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받았다. 92년에.

 네, 92년 입니다. 90년대 초에 소설이 나왔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래서 소설엔 휴대폰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 백과사전을 꺼내 봅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드디어, '종의 기원'이구나. 그래, 읽었다. 그것도 나오자마자. 양장본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리뷰로 쓰지 않았다. 실망했거든. 안 좋은 점을 줄줄 쓰는 게 싫어서. 어쩌면 그래서 이 페이퍼를 쓰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팬심으로 하는 불만 토로의 장 비슷하게. 맞다. 이게 진짜 이유다.

 나는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28'도 읽었다. '종의 기원'에서 작가가 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려했다고 해서 혹시 전작과 비교해 보면 처음 읽었을 때에 든 실망감을 긍정으로 바꿀 소지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시간을 들여 재독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반전은 없었다.여전히 '종의 기원'은 읽은 것 중에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종의 기원'의 유진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그려내고 싶었던 악의 원점일 것이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악이라는 '어두운 숲'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했는데, 그것의 온전한 초상이 잘 잡히지 않아 '7년의 밤'의 오영제로, 또 '28'의 박동해로 다양하게 변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종의 기원'에서 악인의 진정한 기원이자 실체로서의 유진을 드러냈다는 것인데, 내게는 성과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일단 인간 포식자로 설정된 유진조차 그 악행에 있어서는 '28'의 동해보다 떨어져 보인다. 아마도 정유정 작품 중 최고의 악인은 유진이 아니라 바로 이 동해라고 생각한다. 설령 포식자라는 살벌한 닉네임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28'을 읽을 땐 동해의 악행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얼른 심판 받기를 속으로 바랐다. 나의 이런 반응은 작가가 악의 묘사에 성공했다는 것의 증거다. 하지만 유진은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은 커녕 유진의 모든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소설 초반 자신의 살인을 모조리 잊었다. 팔에 엄마가 물어서 남긴 분명한 상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망각은 자신의 악행을 대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실체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소설 장치로만 기능하는 것일까? 유진은 자신의 악행이 들통날 위기의 상황마다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지도 못했고, 스스로에게마저 악행을 변명했으며, 자신의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가책에 빠지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로부터 포식자로 분류되어 집중 관리를 받아온 존재로서는 참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미리 알고 관리를 해왔는데도 엄마와 이모는 정작 유진의 악행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어설프게 대처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안 되었다. 엄마는 유진의 첫 살인을 목격한 날에 유진을 다짜고짜 죽이려들고(이것은 과거에 유진 때문에 남편과 형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얼마나 다른가. 그 때도 엄마는 유진의 고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인간으로 만들려 한다. 너무 어려서 그랬나? 그렇게 오랜 세월 관리 했는데도 결국 살인자가 되었기에 절망해 버린 것인가? 그럼, 형의 대리자인 해진은? 입양한 아들이니까 관계없다고 생각했나? 엄마는 벌써부터 유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은데, 그래서 동생에게 상담도 한 것 같은데 왜 해진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뒀을까? 솔직히 해진은 이 소설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다. 초반, 유진에게 살인이 들킬지 모른다는 서스펜스를 주는 것 말고는.), 이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유진을 감시하던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유진을 경계하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내게는 어긋나 보였다. 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마리오네트 같다고 여겨졌다. 작가가 원하는 자리로 무조건 가야 하는 존재들. 그렇게 보였다. 이야기가 확고하게 설정된 대로 흘러가도록 복무하는 것말고는 아무 역할이 없는 존재들. 그래서 이야기도 재미없었다.

 사실 '종의 기원'은 너무 늦게 나왔다. 우리는 악의 초상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다. 일단 정본으로써,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가 있고, 프레데터를 자식으로 둔 엄마의 내면을 헤아리고 싶으면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를 읽어도 된다.


 

거기서의 악은 유진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태연히 악을 저지른다. 망각도 회의도, 번민도,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냉정하게 계산하고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 같은 존재는 그 어떤 연민의 개입도 없이 제거한다. 그것에서 우리는 악의 순수한 초상을 본다. 케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내 이성을 모조리 초월한 그 존재 앞에서 우리가 짓는 것은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 뿐이다.


 나는 '종의 기원'이 가진 근본적인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종의 기원'은 작가 말대로 내 안에, 내가 몰랐던 어두운 숲을 내가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는 그런 악이 인간 본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자 역시 유진을 별개의 존재로 여기지 않도록 원해서 그렇게 구성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접근이 유진과 유진의 살인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깊은 어둠이 아니라, 우연의 상황이 초래한 개인의 특별한 비극으로 더 보도록 만든다. 유진이 그렇게 선명한 악도 아니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할만큼 악랄하게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동해는 그렇게 보였다. 유진은 포식자라기 보다는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다만 충동을 조절하지 못해서, 또는 너무 두려워서 살인을 저지르는. 차라리 포식자 설정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조금은 유진을 납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쓰면서 정말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엄마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되는 설정은 얼마나 쉽고도 그래서 조악한 장치인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이모와 해진은 또 어떤가? 그들의 무력함은 그대로 작가의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쉬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익은 결과물을 내기 보다는 좀 더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아쉬움이 더 커진다. '28'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현재 작가는 '7년의 밤'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서사의 정돈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28'은 이야기가 흘러 넘쳐 작가 자신조차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고, '종의 기원'은 이야기에서 작가가 어디에 자신의 포지션을 정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으로, 일반화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좀 더 서사의 통제력을 키우고 자신의 관점을 확실히 잡는다면, 다시금 '7년의 밤'처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 원, 그냥 가볍게 그리고 적당한 길이로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써버리고 말았다. 진이 빠진다. 나조차도 이야기를 통제하지 못해서 이런 꼴인데 감히 누구를 충고한단 말인가? 짧게 자조하고 길게 반성한다. 어쨌든 이것으로 채 리뷰로 옮기지 못한 책들에 대해 끄적이는 것을 마친다. 그래도 아직 좀 남았다. 그것은 다음에 또 정리하기로 하고(원래 종의 기원 때문에 쓴 것이라 과연 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20000 GUN GUN(이런 표현은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을 지도. 웬 병맛?)...



But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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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6-3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의 기원 그냥 그랬는데,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니 제 머리속도 정리가 되는것 같아요.
`케빈에 대하여`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ICE-9 2016-06-30 21:16   좋아요 0 | URL
앗, 보슬비님, 말씀 감사드려요. `케빈에 대하여`는 정말 괜찮더군요. 저는 틸다 스윈튼이 엄마로 분한 영화도 봤는데, 그것도 잘 만들어졌어요. 유진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그러니까 괴물을 낳아버린 엄마의 처절한 현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눠져야 하는 책임으로 인한 고통 같은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16-07-0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면서, 4월에 아주 핫한 아이템들이 마구 출판되는군요.

 모두의 눈과 귀를 번쩍 뜨게 할 아이템은 단연 이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데아 총서로 나왔다가 어느새 절판되어 많은 이들로 하여금 헌책방을 전전하게 만들었던 그것!

 그렇습니다. 토머스 핀천의 '브이를 찾아서'가 드디어 간행된다는군요.




 간행된다, 안된다 그동안 참 설왕설래 하더니 민음사가 드디어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 작품을 바라기 하느라 한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독자들의 목을 보호 차원으로다가...

 이제 더이상 애태우지 않아도 되겠군요. 고마워요, 민음사^^


 이에 질세라 문학동네도 사건 하나 크게 터뜨렸습니다.

 타임지가 가장 선정적인 문학 베스트 10중 하나로 꼽기도 했던 존 업다이크의 커플들이 나오네요.



 와우~! 

 이 작품까지 나오면 그렇지 않아도 봄바람에 더욱 죽어나가는 솔로들의 폐가 한층 더 타들어가겠군요.

 아니, 그 반대일까요?^^ 하하.


 그러나 당신이 SF의 팬이라면 이것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드디어... 5년만에 그 작품이 찾아옵니다.

 열린책들, SF, 5년 하면 딱 하나밖에 없죠.

 맞습니다. 그것!! 댄 시먼스의 엔디미온이 마침내 우리 앞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얼마나 기다렸던가요?

 그 기다림에 보상이라도 하듯, 우와아아아!! 엔디미온의 각성까지 다 나온다네요. 대에에에에바아아악!!!!!!!

 이렇게 하여 우리는 드디어 히페리온 사가의 완전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4월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설마 세상이 종말하기라도 하나요?

 어떻게 단번에 이런 대박 아이템들이 주루루...


 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구요?

 정말?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보면 안다구요?


 아... 네, 그렇군요...

 오늘...


 여러분은 이미 아시고 계셨죠?

 하하, 만우절이라 책 가지고 한 번 장난쳐 봤습니다. 알라딘에 어울리는 농담으로...^^

 정말 속아셨더래도 돌은 던지지 마세요. 심장이 약하답니다.

 하지만 다음엔 이 거짓말들이 진짜가 되길 빌며, 양치기 소년은 이제 그만 물러가렵니다.

 그런데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 제5 도살장이 발간 예정이라고 되어 있던데..

 커트 보네것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나 봅니다. 그렇다면 '제일 버드' 좀 꼭 내어주세요.

 제가 읽은 커트 보네것 소설 중에 가장 웃긴 작품이었는데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데뷔작인 자동피아노도... 굽신굽신...

 (문학동네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거 기승전구걸이군요.


 세상에 왜 이리 읽고 싶은 책이 많은 거죠?

 책에는 정녕 불혹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아...


 아, 그리고 표지 출처는 바로 여기입니다. http://bookcover.github.io/index.html

 여러분도 재미로 여러분만의 표지 만들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오늘에 어울릴만한 노래 하나 첨부합니다.


 신데렐라의 Nobody's Fool ^^



I'm not your fool
Nobody's fool
Nobody's foooool
I'm no fooool
Nobody's fool
Nobody's fool
Never again no no!!!


여러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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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5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5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즘 필리버스터를 통해 그간 몰랐던 매력적인 정치인들을 쏙쏙 만나다보니, 갑자기 나의 세미갓, 커트 보네거트가 생각났다.

 그의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을 보면 '어떤 사람이 얼간이인가?'란 제목의 글이 있다.



  제목대로 얼간이에 대한 이야기다. 커트 보네거트가 생각하는 얼간이는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 스스로의 노력으로 타인의 말을 검증하지 않고 무턱대고 믿고 따라하는 사람이다. 커트 보네거트에 따르자면 우리나라는 KBS,MBC,SBS를 비롯한 조중동, JTBC를 제외한 온갖 종편 기자들, 필리버스터에서 박근혜 이름만 나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적으로 왈왈 짖어대는 새누리 의원들, 그리고 자신을 쉽게 해고하고 통신이든, 금융이든 마구잡이로 사찰하겠다고 하는 여전히 묻지마 지지를 보내고 있는 35%의 지지자들과 같은 얼간이들로 넘쳐나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얼간이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나라 교과서에까지 등장하여 우리도 잘 아는 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이 한 마디 말 때문에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은 종교 탄압을 거행했다. 때문에 아시다시피 거기엔 종교는 없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아마 스탈린과 중국이 해석했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인민을 부당한 현실에 수동적으로 길들이고 저항 의지를 앗아가는 '백해무익(실제, 중국에서 이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안다.)'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커트 보네거트는 그런 해석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본다.


*****

  "스탈린 치하에서 자행되었고 지금도 중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종교 탄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런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해 독재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카를 마르크스의 말을 들이댄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1844년 당시,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다. 그는 아편을 먹고 통증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자 대단히 고마워했다. 마르크스는 그저 종교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그걸 비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은 금언이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그런 얘길 썼던 당시 우리 쪽에서는 아직 노예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자비로운 신으 눈으로 과거를 되돌아볼 때, 카를 마르크스와  미합중국 중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

 스탈린은 마르크스의 언급을 법령으로 바꿔치면서 좋아라 했고 중국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나 그들의 목표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도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해, 사회주의자들은 종교와 신을 부정하며 그러기에 지독하게 불쾌한 종자들이라고 주장해왔다."

*****


  솔직히 커트 보네거트의 몇 배 이상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했을 스탈린이나 중국 독재자들이 마르크스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썼는지 몰랐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장악에 방해가 되는 성직자나 종교 세력들을 몰아내려고 그 말을 이용한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많은 이들은 마르크스의 원저를 읽지도 않고 단지 그 말만 듣고 스탈린과 중국 독재자들이 성직자들과 종교 세력들을 일소할 때 모른 척 하거나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실은 스탈린과 중국 독재자들에게 농락당한 것 뿐이었다. 한 마디로 얼간이가 된 것이다.

 종교와 신을 부정한다며 사회주의자들을 불쾌한 종자들이라고 공격한 미국인들도 얼간이인 것은 다르지 않다. 솔직히 그들에게도 마르크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따윈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뇌리엔 오직 저 잡놈의 사회주의자들을 제대로 공격해서 지지자들을 줄여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테니까.


 힘을 가진 권력의 말에 진실은 없다.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약자를 보호할 때 뿐이다.

 그렇지 않고 권력이 약자를 내몰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 한들 술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화뇌동하는 것은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무섭다. 펜은 정말 칼보다 강하다. 언론이 장악되고 한없이 한 편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우리나라. 지금의 필리버스터는 그 사실을 등골이 오싹하도록 알리고 있다. 4년 동안, 그들의 저 많은 노력들이 우리의 눈과 귓가에 일절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니! 경악은 분명 나만의 것이 아니었으리라. 많은 이들이 필리버스터를 보고, 국회까지 찾아가 방청하는 것은, 이명박 시절 나꼼수에 열광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다. 이명박 시절에도 그랬다. 분명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디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들을 수 없었다. 세상은 순탄하게 흘러가기만 했다. 왜 이럴까? 이상하다. 나만 괜히 삐딱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도 한다. 그래, 나 혼자 이런 생각가져서 뭐 하겠어? 내가 뭐라고? 자포자기와 자학도 한다. 약한 나, 외로움만 커져 간다. 그 때, 나꼼수가 나왔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네가 틀린 게 아니라고!


 우리는 바로 그런 지지와 응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던 것이다. 신념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위축과 소멸을 향해가는 신념을 굳건히 하고, 결기를 돋울 지지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길로 계속 뚜벅뚜벅 걸어가도 된다라는 응원. 우리는 정말 그런 게 필요했던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사를 따라 내려가면 몸은 편하다. 하지만 의식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괴물이 아니라면 말이다. 저 경사 아래로 내려가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 지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우리 정체성마저 좌우할만큼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도.

 그 본질적인 것을, 그것이 없다는 삶의 의미마저 부정당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한없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래도 비탈을 오르려 매달린다. 손으로 단단히 흙을 거머쥐고 매달린다. 힘들다. 그런 나를 비웃고 내려가는 이들 사이에서 외롭다. 그 때, 나꼼수가 나타나 같이 올라가자며 내 엉덩이를 밀어주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게 나꼼수는 그랬다.


 비탈길을 오르려 애쓰는 이들에겐 정말로 그런 게 필요하다.

 희망은 상상만으로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필리버스터가 그 일을 하고 있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며,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력하는 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내 몸과 엉덩이를 밀어주는 사람들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랜 시간 사막을 횡단하다 가까스로 오아시스를 찾은 이와도 같이, 반갑고 기쁘다.

 커트 보네거트도 그랬다. 너무나 냉소적이었던 그 사람, 아주 회의적이었던 그 사람.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지도, 변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우리의 필리버스터 처럼 자신의 엉덩이를 밀어 줄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같은 글의 마지막에서 그는 그 사람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파워스 햅굿(Powers Hapgood).



 미국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데, 커트 보네거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

 나는 그들과 동시대인 사회주의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인디애나 폴리스의 파워스 햅굿이다. 햅굿은 전형적인 촌뜨기 이상주의자였다. 사회주의는 이상주의다. 데브스처럼 햅굿도 중산층 출신이었고 이 나라에 경제적 정의가 더 광범위하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좋은 나라를 원했다. 그뿐이었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햅굿은 탄광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자 형제들에게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를 결성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1927년에는 메사추체츠 주에서 무정부주의자 니콜라 새코와 바살러미오 반체티의 처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햅굿의 부모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통조림 공장을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다. 파워스 햅굿은 공장을 물려받자마자 그것을 종업원들에게 넘겨주었고 얼마 후 공장은 파산하고 말았다.

 우리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간부였다. 노동쟁의가 가벼운 싸움으로 번졌을 때 햅굿은 증언을 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했다. 판사는 그를 보자 이렇게 물었다.

 "햅굿씨, 나와주셨군요. 당신은 하버드 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당신처럼 버젓한 사람이 왜 그런 삶을 택하셨소?"

 햅굿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그건 예수의 산상수훈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팀 파이팅! (p. 22 ~ 23)

*****


 이렇게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우리들에게도 당신 혼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이탈리아 감독 파솔리니가 말했던 반딧불 같은 것들이...



   그가 한 젊은이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던 1975년. 2월에 그는 한 글을 발표한다. '반딧불에 대한 논고'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거기서 그는 반딧불을 무솔리니와 같은 서슬 퍼런 독재 치하에서도 비록 반딧불처럼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멸되지 않았던 민중들의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다. 결국 그 반딧불은 그보다 훨씬 광막했던 무솔리니 체제의 어둠을 몰아내었다. 그래서 반딧불은 파솔리니에게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쓰여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은 희망과 저항 의지는 추상적인 상상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무엇이든 감각할 수 있는 실제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실제 목적하는 바는, 파솔리니가 논문에서 했던 절망, 그러니까 무솔리니 체제 아래에서도 생명을 잃지 않았던 반딧불이 현대 소비 사회에서는 소멸되어 버렸다는 절망에 반박하는 글이지만 말이다. 그는 파솔리니의 체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끈질기에 남아있는 반딧불의 계보를 여기서 들려준다.

 커트 보네거트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란 말로 경고한 것처럼, 그저 지배적인 해석과 현상에 함몰된 나머지 스스로 애써 찾아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타협하고 쉽게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놓쳐버린 희망과 저항의 흔적들을 말이다.

 위베르만은 말한다. 이미지는 결코 죽지 않는다 라고.


 희망도 그럴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이렇게 찾아온 것처럼.

 '잘 알지도 못하기에 포기 역시 이르다'는 말을 이 순간, 단단히 새겨 두련다.

 그리고 커트 보네거트처럼 희망의 반딧불이 되어 준 필리버스터에 나온 의원들에게 이렇게 외쳐주고 싶다.

 우리 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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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2-29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100개정도 누르고 싶은 글..

ICE-9 2016-03-05 00:41   좋아요 0 | URL
앗, 기네스님 이런 격한 공감, 진심으로 너무나 감사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팀 파이팅!!

ICE-9 2016-03-05 00:42   좋아요 1 | URL
시이소오님도 우리 팀이죠? 함께 파이팅 외쳐주기로 해요^^

2016-03-01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5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거듭된 재회는 실망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예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걸 이번에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나는 이미 2007년에 동서판으로 읽었고 8년만에 이번에 검은숲에서 나온 판본을 읽었다.



 여기엔 다시 재회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첫째는 아직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던 단편인 '어둠 속에 열린 창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책 뒤에서 일본에서 '문신 살인사건'이 판을 거듭할 때마다 쓴 다카기 아키미쓰의 글을 모아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글들이 꽤나 중요하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여기엔 일본 미스터리 세계에 있어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문신 살인사건'이 어떤 연유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착상되었고 집필되었는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문신 살인사건'에 매혹되어 그 뒷 이야기마저 심히 궁금했다면 이 책은 꼭 읽어야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431 페이지에 있는 '탐정 소설 작법'은 자신이 '문신 살인사건'을 어떻게 썼는지, 그 인물과 트릭의 설정 그리고 전개에 있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소상히 밝히고 있어 작품 이해를 더욱 도와줄 뿐만아니라 혹여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어 줄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다시 '문신 살인사건'을 소장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래도 이건 보너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래도 결국 본편의 퀄리티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까 부가된 것 말고 핵심이 되는 작품이 예전 동서판 보다 나아졌는가를 따져볼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역시 눈이 가는 곳은 표지와 번역이다.


표지로 눈이 가는 이유는 동서판의 표지가 좋게 말해서 너무 아스트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서판 미스터리의 띠지를 보관하지 않는 편인데 이 것만큼은 이렇게 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대놓고 보이기엔 차마 부끄러운 그 곳을 띠지로 가려야했기 때문이다. 동서판은 원래 검열의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70년대에 나왔는데 그런 상황에 어떻게 이런 표지가 버젓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아무튼 그래서 홍길동이 호부호형 못하듯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책은 내 책이요!' 하지 못했던 상황이 빈번했다.('아, 빌린거야.', '어쩌다 보니 줍게 되었어.'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상황) 하지만 '문신 살인사건' 작품 자체는 너무 좋아서 제발 표지 갈이가 되었으면 했던 책이다. 그러니 이렇게 예전 보다는 훨씬 점잖은 표지로 새로 나와 주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문신 살인사건'은 표지 만들기가 꽤나 어려운 축에 드는 것 같다. 일본판을 검색해 봤는데 하나같이 표지가 별로였다.


 (오른쪽 맨 끝에 있는 것은 미국판 표지의 모습이다. 주된 소재가 밀실이 된 욕실에 팔 다리와 머리만 남아 있고 문신이 새겨진 몸뚱아리는 없는 엽기적인 사건이라 그런지 국적을 막론하고 표지가 참 괴이하다.)


 그런 표지들에 비하면 검은숲 판은 꽤나 잘 빠진 편에 속한다.



 그럼 이제 번역이다.

 동서판 '문신 살인사건'의 번역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된 번역이라 지금 감성으로 읽기엔 텁텁함이 많이 남는다. 그런 면에서 검은숲 판은 아주 매끄럽게 읽힌다. 역자가 '고백',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완전 연애'를 번역한 김선영인데 번역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전 판과 비교해 읽어보니 단어의 선택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검은숲 판이 동서판에 비해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을 꼭 짚어줘야겠다. 아무래도 '문신 살인사건'은 불가능에 가까운 밀실 살인 미스터리를 다루는 본격물이다보니 독자에게 현장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이 핵심이기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전 동서판은 좀 두리뭉실한 면이 있었고 현장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었다. 그런데 검은숲 판은 그걸 다 해소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미스터리의 핵심인 '3자 견제'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먼저, 동서판에서는 이렇게 나왔다.


 오로치마루는 커다란 뱀이 요술 부리는 거잖아요. 이야기책을 읽어보면 커다란 두꺼비를 부리는 지라이야하고 커다란 괄태충을 타고 나타나는 쓰나데히메, 이들 셋은 도카구 산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요술로 서로 싸운답니다.(동서판, p. 69~70)


 반면, 검은숲 판은 이렇다.


 오로치마루는 이무기를 부리는 마술사잖아요. 책을 보면 두꺼비를 부리는 지라이야와 거대한 민달팽이를 타고 나타나는 쓰나히데메, 이 세 사람은 도카쿠시야마 산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요술을 겨뤄요.(검은숲판 p. 78~79)


 동서판은 오로치마루를 설명하는 첫 문장부터 오로치마루가 뱀인 것처럼 독자를 혼동시킨다. 하지만 원래 오로치마루는 검은숲판이 말하듯이 이무기를 부리는 자다. 아마도 만화 '나루토'를 보신 분들은 이를 금방 이해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나루토'에 나왔던 3자 견제. 처음 '문신살인사건'을 볼 때는 나루토를 열심히 보고 있을 때였는데 덕분에 나루토의 전설의 세 닌자가 일본에서 예로부터 전승되어오던 3자 견제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이외 괄태충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민달팽이로 정확해졌고(사실 이 민달팽이는 정말 중요한데, 밀실 현장에도 남겨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추리를 위한 중요한 단서인데 동서판은 괄태충으로 표기해서 도대체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검은숲판을 읽고서야 그것이 민달팽이인 줄 알았다.) 동서판이 그저 도카구 산이라고만 했던 것도 도카쿠시야마 산이라는 구체적 지명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번역이 보다 정확 혹은 정밀해졌다는 의미고 문장도 검은숲판이 소화하기에 깔끔하다.


 더구나 때로 동서판엔 생략된 곳도 존재한다.


 "하야카와 헤이치로, 흥, 문신 박사 따위와는 이제 와서 만나고 싶지도 않아. 아픈 걸 참고 문신을 하긴 했지만 구경거리는 아니라고 거절해버려. (동서판 p. 203)


 여기서 생략된 부분을 검은숲판에서 알 수 있었다.


 "하야카와 헤이치로, 흥, 문신 박사 따위 이제 와서 만나고 싶지도 않아. '남편도 저도 말주변이 없습니다. 아픔을 참고 문신을 새기기는 했습니다만 구경거리는 아닙니다."하고 쫓아내." (검은숲판 p. 242)


 이런 이유로 솔직히 검은숲판으로 작품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편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더라도 검은숲판을 소장할만한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여기까지 현재 나온 검은숲판과 예전 동서판을 비교해 보았다. 원래는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달라진 표지와 번역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정작 작품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만 글이 길어지고 만다.


 일본 미스터리 문학 역사상 1948년에 나온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이 지니는 위치는 각별하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모든 미스터리 작가들이 꼭 한 번은 도전하고 싶은 테마인 밀실 살인에 주력하고 있다.


 "이 창문은 바깥쪽에 쇠창살이 박혀 있어. 창문 안쪽에 자물쇠도 걸려 있는 듯하고, 유리는 전혀 부서지지 않았네. 그런데 입구도 안에서 잠겨 있다면, 대체 어떻게 되겠나?"

 "밀실 살인!"

 "바로 그걸세. 밀실 살인. 완전범죄. 모든 탐정소설 작가가, 아니, 현실의 범죄자가 영원히 갈구하는 엘도라도. 게다고 원해도 실현되지 않는 환상의 꿈이야."(p.113)


 그런데 사건 현장이 독특하다. 바로 '욕실'이다. 왜 하필이면 '욕실'로 했느냐에 대해선 작가 자신이 아예 작품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밝히고 있다.


 종래의 일본 가옥은 그 구조상 밀실 살인이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다. 각각의 방은 맹장지와 장지문으로 간단히 옆방과 나뉘어 있다. 예컨대 독립된 공간으로 보여도 천장이나 마루 밑은 하나라, 천장 밑을 지나 벽장 속으로 숨어들거나 마루 밑을 지나 다다미라도 들어 올리면 간단히 침입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욕실은 순수한 일본 가옥 속에서도 다른 방과 완벽히 독립된 공간이다. 이 욕실 역시 바닥과 벽에 빈틈없이 타일을 바르고, 천장에도 모르타르를 발라놓았다. 문 아래위에도 틈은 없고, 마쓰시타 일행이 안을 들여다본 틈새로도 실이나 바늘을 넣기란 절대 불가능했다. 그 후 수사 당국은 현미경이라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현장을 수색했지만 비밀 통로  같은 단순한 트릭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p. 120)


 이런 공간에 몸뚱아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머리와 두 팔, 두 다리만 놓여 있는 것이다. 과연 범인은 이런 밀실에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고 몸뚱아리를 가져갔는가가 '문신 살인사건'이 독자들과 대결하고자 하는 주된 수수께끼다. 정말로 여기엔 엘러리 퀸의 소설처럼 '지금까지 모든 힌트를 다 제시했으니 독자들이여 추리를 통해 범인과 그 트릭을 맞춰보라'는 뉘앙스의 도전문까지 나온다. 아무튼 욕실을 선택한 것은 일본 전통 가옥 구조상 욕실만이 온전히 밀실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선 에도가와 란포의 '천장 위의 산책자'를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갈 것 같다. 그 소설에서 관음증 환자인 범인은 벽장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 돌아다니며 그 집에 있는 모든 남의 방을 엿본다. 이런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욕실말고는 밀실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다 혹시 느낄지도 모르겠는데 작가가 은근히 미스터리 오타쿠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가옥은 구조상 밀실이 불가능하다느니 욕실의 설정에 대해서도 가능한 완벽한 밀실이 되도록 빈틈없이 묘사한 것이라든지. 오래도록 미스터리를 애호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 사실 그렇다. 그는 '문신 살인사건'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냥 좋아서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일던 사람이었다. 무려 20년 동안 한결같이. 그가 '문신 살인사건'을 쓰게 된 것도 창작에 뜻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해고 당한 뒤로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때는 패전 후였고 삶은 극도로 불안한 시기였다. 그러던 차에 자기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썼던 것이 바로 이 '문신 살인사건'이었다. 당시는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미스터리계의 중흥을 위해 온갖 신인들의 원고를 받고 있었으므로 다카기 아키미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란포에게 원고를 보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란포에게서 '소설로서의 결점은 있지만 이만한 트릭과 플롯이라면 추리소설 애호가들의 정열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란 호평을 받고 그 란포가 이와야 쇼텐 출판사에 출판 의뢰까지 하게 됨으로써 '문신 살인사건'은 전격적으로 출간되게 된다. 결국 그 란포의 도움으로 다카기 아키미쓰는 미스터리 작가로 먹고 사는 꿈을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프랑소와 트뤼포가 말한 매니아 단계에서 최종 단계에 오른 사람이다. 20년간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온 끝에 작가로 성공까지 했으니. 그는 이후에 이어진 '가면 살인사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대낮의 사각' '유괴' '파계재판'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일본 미스터리계에서 거성처럼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20년간 꾸준히 미스터리 소설을 독파하면서 쌓아온 내공 덕분이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읽음은 그냥 사라지지 않으며 널리 많이 읽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난 김에 소장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았다.)


 덧붙여, 이 작품은 일본 패망한지 얼마 후에 쓰여 전후의 윤리적으로 혼란스럽기만 했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뢰파'로 유명한 사가구치 안고가 딕슨 카의 '연속 살인사건'의 제목을 살짝 바꿔 쓴 '불연속 살인사건'과 같이 읽으면 그 때의 분위기를 한층 더 잘 느낄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유명한 미스터리의 애호가이기도 했던 안고인 지라 솔직히 본격으로서의 재미는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해도 '연속 살인사건'은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만 하다. 안고의 '무뢰파' 담론을 알고 있다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작품이 상식적 수준의 윤리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작품이므로. 


  

 더운 여름이다. 마침 '크라임신'도 끝나고 두뇌 회전을 요하는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트릭들과 대결하면서 보내는 것도 좋은 피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지니어스 그랜드 파이널'이 시작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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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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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책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데 `오만과 편견`은 항상 더 좋은 뒷맛이 기다리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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