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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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에세이의 미덕이란 온천에 몸을 천천히 담그다 고개 들어 문득 푸른 하늘을 본 것과도 같이 쉽고 편안한 가운데 돌연 깊은 의미와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잡문은 그런 미덕으로 넘쳐나니 선택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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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옷!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이 새로 모습을 바꾸어 나오는 군요. 

번역까지 새로이 해서 말이죠.


당연하겠죠. 무려 40주년 기념판이니까요!

벌써 책이 나온지 40년이 지났군요. 번역만이 아니라 이 40주년을 위해 르 귄이 새로운 서문과 작가 노트까지 썼다고 합니다. '어둠의 왼손'에 실린 머리말이 정말 좋았기에 이번 40주년 기념판의 서문도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더구나 작가 노트까지 있다니!


참고로, 69년 하드커버 초판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일명 겨울이라 불리는 얼음 행성인 '게센'이 무대인데 표지는 그것을 표현한 것 같군요.

저 위에 성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아리코스토르 성' 같습니다.

이런 모습의 성이죠.(참고로 이 그림도 '어둠의 왼손' 커버 중 하나입니다.)


아무튼 두 눈에 하트 뿅뿅 그리는 것은 이만하고...


1976년 미국의 SF 전문잡지 'LOCUS'가 독자들(주로 SF분야 종사자나 골수 SF팬들)을 대상으로 'SF 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를 설문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슐러 르 귄은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에 이어 4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 1975년엔 '최고의 SF 장편'을 설문조사했는데 그 때에는 프랭크 허버트의 '듄'과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에 이어 이 작품 '어둠의 왼손'이 3위에 올랐습니다.


물론 좀 오래된 순위이긴 합니다만 어슐러 르 귄이나 '어둠의 왼손'이나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이죠. 물론 그 가치는 지금도 전혀 바래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명한 영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1994년에 나온 자신의 책에서 '어둠의 왼손'을 서양 문학의 정전 중 하나로 꼽았고 르 귄은 톨킨보다 더 판타지 소설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켰다고 평했었죠. 그러니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새로운 모습으로 자주 우리 곁으로 오는 게 아닐까 싶네요. 잦은 귀환 자체가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죠.


아무튼 새로운 판본이 나온다고 하니, 제가 '어둠의 왼손'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어슐러 르 귄을 알게 된 것은 박상준의 '멋진 신세계' 덕분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이 아니고 박상준 작가가 SF의 역사나 작품들에 관한 글들을 모아 엮은 것이었는데 덕분에 SF의 좋은 소설과 작가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거기서 이 어슐러 르 귄과 '어둠의 왼손'도 만나게 되었죠.


정말 어떤 작품인지 보고 싶었는데 마침 이렇게 나와 주더군요.

그리폰 북스 시리즈 중 하나로.



이것이 바로 그 때 나온 '어둠의 왼손' 모습입니다.

SF 소설 하면 역시 커버 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어둠의 왼손' 커버는 정말 멋졌습니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커버 때문에라도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


보시는 바와 같이 1995년 5월에 나왔습니다. 가격은 지금이라면 '겨우'가 붙을 6천원^ ^

나온 시기가 영화 잡지 'KINO'가 나왔을 때랑 비슷하네요.

'그리폰 북스'랑 '키노' 둘 다 열심히 모았던 것 같습니다^ ^


그리폰 북스의 시작을 연 '내 이름은 콘라드'와 나란히 찍어 보았습니다.

앞에 있는 엽서들은 당시 출간된 그리폰 북스 책에 들어있던 우편 엽서입니다.

그 때는 독자로부터의 피드백을 대부분 이런 엽서로 받았었죠.

이 카드를 작성해 보내면 자동적으로 그리폰 북스 회원이 되고 안내책자와 팜플렛 그리고 신간 정보를 받을 수 있다고 엽서에 나와 있네요.

한 번 보내볼 걸 그랬어요^ ^ 
 


뒷 날개에 적혀 있는 앞으로 출간될 책의 리스트들.

'어둠의 왼손'이 첫 출간 작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리스트들을 보고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이 '멋진 신세계'에서 좋은 작품으로 언급된 것들이라 더욱 그랬죠.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있고 아직 나오지 않은 것도 있네요.
아무튼 이 리스트 하나만큼은 SF의 필독서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책의 뒷 모습

 

어슐러 르 귄의 모습과 작가 설명 그리고 간략한 책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어둠의 왼손' 1969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SF 상의 양대 산맥인 네뷸러와 휴고상을 동시에 석권했죠.

하나 타기도 힘든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한 번이 아니었습니다.

1974년에 어슐러 르 귄은 '빼앗긴 사람들'로 다시 한 번 네뷸러와 휴고상을 동시에 수상하게 됩니다.

괴물 같은 작가죠, 한 마디로...

 

 개인적으로 소설도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머리말을 꼭 읽어보시라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어요.

 

 어슐러 르 귄이 SF 소설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썼는데

 정말 잘 썼습니다. 우리가 왜 SF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글입니다.

 

 도대체 무슨 글인데? 하실 분들을 위하여 살짝 인용해 볼까요?

 

모든 허구는 은유이다. 과학소설은 은유이다. 이 과학소설을 고전적인 허구 형태와 달라 보이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현대생활의 골격을 이루는 어떤 거대한 지배체제 - 그 가운데는 과학, 즉 각 분야의 학문과 기술, 그리고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관점 등이 있다 -로부터 도출된 새로운 은유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계있지 않나 생각한다. 우주여행은 이 은유들 중의 하나이다. 대체역사도 그렇고, 대체 생물학 역시 마찬가지다. 미래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 그런 것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허구화된 미래란 그 자체가 곧 하나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은유한 것인가?

만일 내가 은유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도 물론이다. 그리고 조금은 장엄한 투로, 이 소설의 주인공 겐리 아이가 나와 당신에게 진리란 상상의 문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내 책상에 앉아 잉크와 타자기의 리본을 소모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P. 11) 

 

 이런 글입니다. '이 정도로 뭘~?' 하신다면 분명 전체를 읽어보면 다를 것이다라는 말을 꼭 드리고 싶네요. 인용한 글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진리란 상상의 문제에 불과하다.' 르 귄의 SF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죠. '어둠의 왼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정 관념을 저 말처럼 뒤흔들고 있지요. 결국 르 귄의 SF도 독자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고자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리란 이름으로 우리의 머리와 몸을 가두고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해방시키고자 한다구요.

우리에게 얽혀 있는 모든 관습적인 사고와 편견의 사슬을 은밀하게 푸는 '어둠의 왼손', 그것이 바로 이 작품입니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파세의 이 말 그대로입니다.


 알려지지 않은 것, 그리고 예견되지 않은 것, 증거되지 않은 것.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지는 사고의 기반입니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것이 행동의 근거입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이 증명되면, 신도 없고 종교도 없게 됩니다. (...) 내게 말해 주시오, 겐리(주인공의 이름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중에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또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무엇을 피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미래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바로 죽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답될 수 있는 질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겐리.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 인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영원히 괴롭히는 '불확실성'입니다.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무지' 바로 그 한 가지 인 것입니다.(p. 93 ~ 94)



 


 '어둠의 왼손'은 르 귄의 대표 시리즈인 헤인 시리즈의 대표작입니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도 그 헤인 시리즈에 속하는 단편집이죠. 처음으로 소개되는 헤인 시리즈 작품이라 역시 많이 기대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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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카버의 아우라를 느껴 본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도 하루키는 카버의 여파를 자기 스타일로 잘 소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드디어 카버의 아우라가 듬뿍 느껴지는 단편을 만났다. 그냥 누가 쓴 것인지 모르고 만났다면 '이거 혹시 카버 소설 아니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바로 '도쿄 기담집'에 두 번째 단편인 '하나레이 해변'이다.


 카버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상실의 파문' 같은 것이었다. 카버의 세계란 썰물에 끊임없이 모래가 쓸려나가는 해변이랄 수 있었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열심히 달리다 보니 문득 자신이 허공 위에 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만화영화의 캐릭터처럼 어느 순간 시간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으며, 소중한 존재를 잃었고, 자신을 잃었다. 그러나 정작 카버가 해부하는 것이 '상실' 자체는 아니었다. 카버에겐 바로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 상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카버의 소설은 화두처럼 던져진 그 질문을 풀어나가는 여정이었다.



 '도쿄 기담집'도 그랬다. '도쿄 기담집'엔 다섯 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물론 '기담'이라는 것은 아니다. 바로 '상실'이다. 다섯 개의 '기담'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잃고 있는 중이다. 소설 어디를 펴 보아도 우리는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라는 세번 째 단편 제목 그대로 상실이 도래했음을 보게 된다. 카버처럼 하루키도 상실의 물방울이 삶이라는 수면으로 떨어질 때의 그 접촉의 순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하루키의 돋보기가 향하는 곳은 그 접촉이 바깥으로 그려내는 파문의 무늬다. 처음의 진한 아픔을 동반한 선명했던 파문의 동심원이 어떻게 차츰 묽어져 다시 고요한 삶의 수면과 하나가 되는지, 그것이 하루키가 들려주고자 하는 기담이다.


 혹은 그래서 정말 '기담'이다. 도저히 잊힐 것 같지도 않고, 극복될 것 같지도 않을 상실이 어떻게 하다 보니 껴안고 살면서도 더 이상 마음에 폭풍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세상이 끝날 것처럼 사납게 울부짓던 바다가 아침에 보니 언제 그랬나 싶게 잔잔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상실을 잉태한 삶도 결국엔 그렇게 되기에 '기담'인 것이다.


 "제가 한 가지, 부인에게 개인적인 부탁이 있어요." 사카타라는 초로의 경관은 헤어지는 참에 사치에게 말했다. "이곳 카우아이 섬에서는 이따금 자연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곳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동시에 때때로 거칠고 치명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요. 우리는 그런 가능성과 함께 여기서 살아갑니다. 아드님의 일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부디 이런 일로 우리 섬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인 입장에서는 주제넘은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제가 드리는 부탁이에요. (중략) 대의가 어떻든 전쟁에서의 죽음은 양측이 각각 갖고 있는 분노나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아요. 자연에 내 편 네 편 따위는 없습니다. 부인께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아드님은 대의나 분노나 증오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연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p. 51~52)


두 번째 기담인 '하나레이 해변'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기담의 주인공 사치는 오래전에 남편을 여의고 외아들과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런 아들이 서핑을 하러 하와이에 있는 하나레이 해변에 갔다가 거북이를 쫓아 해변까지 들어온 상어에게 다리를 물려 놀란 나머지 익사해 죽는다. 소식을 듣고 놀란 사치는 바로 하와이로 달려왔고 아들의 시신을 인도받기 위해 찾아간 경관에게서 저 말을 듣는 것이다. 사실 읽다보면 경관의 이 말은 다소 맥락없이 느껴진다. 불현듯 어디선가 날아와 뒤통수를 때린 테니스 공 같기도 하다. 아마도 경관은 머나 먼 타국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을 위로하려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말은 꼭 그것만은 아니라 하루키가 사치처럼 언제 뜻하지 않게 상실을 안게 되어버릴지 모를 독자에게 보내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서핑 장소인 '노스 쇼어'에서 가장 커다란 곳이 바로 '하나레이 베이'이다.

           큰 파도가 많아 서브 포인트가 정말 많아서 서핑을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사실 저 말은 소설의, 아니 같은 상실을 다루고 있는 '도쿄 기담집'의 주제라 해도 좋을 정도다서핑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게 서핑의 매력을 처음 알려준 영화 '폭풍 속으로'에서 삶의 의미를 오로지 거대한 파도를 서핑하는 것에 두고 있는 패트릭 스웨이지는 이제 겨우 서핑을 시작한 키아누 리브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도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탈 수 없어.' 결국 '도쿄 기담집'이 말하는 것도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나 '하나레이 해변'이 그러한데 이 소설은 상실이 주는 아픔을 과장하지도 않고, 상실을 억지로 피하려 하거나 극복할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상실이라는 욕조에 몸을 푹 담근다. 그대로 가라앉아서 상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본다. 하지만 버둥거리지 않는다. 조용히 바닥으로 이끄는 중력의 손길에 몸을 내맡길 뿐이다. 소설의 시간은 그런 시간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스쳐 지나가는 물결과 하나가 되는 시간. 거부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침전.



 서핑과 같다. 파도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지 않으면 파도를 잘 탈 수 없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활의 명수인 주인공은 이런 대사를 말한다. "바람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극복은 바람을 온전히 받아들여 그걸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하루키가 소설에서 말하는 상실의 치유도 그것이다. 온전히 받아들여 그 안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 상실에 극복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상실을 극복한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나레이 해변'은 그것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만들어 준다. 카우아이 섬 경관의 말처럼 늘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은 그러나 자연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위험이나 상실마저 모두 자연의 순리 안에 있는 것이라 여긴다. 사치는 아들을 화장한 뒤, 아들이 죽은 하나레이 해변으로 간다. 경관의 말대로 하나레이 해변은


 몇 년 전에 들이닥친 거대한 태풍 탓에 섬의 수목은 대부분 크게 변형될 만큼 타격을 입었다. 지붕이 날아가버린 목조가옥의 흔적도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산의 형태가 변해버린 곳도 있었다. 자연이 혹독한 땅이었던 것이다.(p. 53)


 하지만 그 곳에서도 사람들은 여유롭게 살고 있었고 하물며 아들이 상어에게 물려 죽은 서브 포인트조차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서퍼들은 여전히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사치는 아무래도 그게 이해되지 않는다.


 사치는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상어가 무섭지도 않은가. 아니면 내 아들이 며칠 전에 이 자리에서 상어 때문에 죽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한 것일까? (p. 53)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사치조차 모래사장에 앉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나리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게 된다. 방금 아들의 시신을 화장하고 왔는데도 그러하다.


 사치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런 광경을 한 시간쯤 무심히 바라보았다. 윤곽이 잡히는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었다. 무게를 지닌 과거는 어디론가 어이없이 사라져버렸고 미래는 아득히 머나먼 어둠침침한 곳에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의 그녀와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녀는 시시각각 이행하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주저앉아 파도와 서퍼들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반복의 풍경을 그저 기계적인 눈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구나. 그녀는 어느 시점에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p. 53 ~ 54)


 거대한 태풍이 할퀸 상처가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고 갑작스런 상어의 출몰로 아들이 익사한 '하나레이 해변'은 사실 상실을 안고 있는 삶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루키는 상실을 안고 나아가는 삶을 '하나레이 해변'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치는 오래도록 거기에 머무는데 그건 그대로 상실을 억지로 피하거나 쳐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앞서 말한 조용히 가라앉는 '침전'인 것이다. 사치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간도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특별히 가라앉는다는 말을 쓰는 것은 온 몸이 젖어 그만큼 물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가 말하는 상실을 받아들임은 바로 그러한 젖음이다. 그런 상태로 하지만 단조롭게 상실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시간. 그것이 사치가 원했던 시간이다. 하나레이 해변은 그런 시간을 준다.


 하여, '하나레이 해변'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사치는 거기서 삶에서 무엇하나 원하는 것이 없었던 그녀가 그나마 가장 좋아했었던 피아노 연주를 떠올린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음악실에서 재미삼아 쳐보고 매료되었던 피아노는 결국 그녀의 생계 수단이 되었다. 한 때는 타고난 엄청난 재능에 비해 독창적인 면모가 부족하여 프로 피아노 연주가가 되지 못하리라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그만 지금까지도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사치는 '하나레이 해변'에서 피아노 연주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일까?


 하루키가 사치에게 하필이면 '피아노 연주'를 가지고 온 것은 그것이 아들의 '서핑'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핑이 부드러운 곡선의 파도를 타는 것이라면 피아노 연주는 부드러운 곡선의 선율을 탄다.


 한 마디로 피아노 연주란 손으로 하는 서핑이다. 이런 서핑과 피아노 연주의 유사성 때문에 하루키는 사치에게 피아노 연주를 가져다 준 것이다. 거기다 둘은 행위의 단조로운 반복이라는 점에서도 같다. 사치는 하나레이 해변에서 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서퍼들을 본다. 그들처럼 사치 역시도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친다. 사실은 그게 바로 그녀의 재능이다. 무심하게 쳐가는 것. 이러한 사치의 재능은 서핑과 피아노 연주의 유사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피아노를 치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건반 위에 열 개의 손가락을 올려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툭 트였다. 그것은 재능이 있고 없고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아니다. 아들도 아마 파도를 타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사치는 상상했다.(p. 70)



 바로 이것이 하나레이 해변이 가진 치유의 힘이었다. 아들의 서핑도, 사치의 피아노 연주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조로운 반복. 그 단조로운 반복의 궤도가 결국엔 상실이 안겨준 절망에서 스스로 기어나오게 만드는 힘이 되어주리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나오는 주인공 쓰쿠르이다. 쓰쿠로도 사치처럼 아주 커다란 상실을 경험한다. 완벽한 공동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의 모임에서 혼자 버려진 것이다. 그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절망했지만 결국 그 어둠에서 헤어나오게 만든 것은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이었다. 쓰쿠르는 그 단조로운 반복을 성실히 행했고 그러다 끝내 그 아픔을 무심히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 소설이 쓰쿠르가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순례라고 한다면 진짜 치유는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 치유는 다른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삶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쓰쿠르가 바로 사치의 연장이라는 걸 이제 깨닫는다. 아마도 사치가 없었다면 쓰쿠르도 없었을 것이다. 사치와 쓰쿠르라는 분신을 통해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바라는 치유란 어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있다는 것이리라.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와도 같이.


 상실을 주는 삶은 치유도 준다. '하나레이 해변'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모든 것엔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 조르주 깡길렘이라는 프랑스 학자에 따르면 질병도 사실은 치유를 위해 몸이 새롭게 적응해 나가는 징후라고 한다. 삶에는 저마다 자기 치유 능력이 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시간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상실을 그토록 힘들어하는 것은 어떤 조급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둘러 이 상실감에서 빠져나가고 싶다, 얼른 이 모든 상실로 인한 아픔들을 없던 것으로 지우고 싶다.'는 바로 그 마음이 상실을 가시처럼 여기게 만들고 상실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성급하게 지우려해도 그렇게 안되는 것이 상실이다.


 뜸을 들여야 제대로 된 밥이 되듯이 상실에게도 저마다 필요한 기간이 있다. 사치가 아들에 대해 고백했듯 한 인간으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듯이 이별하는 데도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을 고통으로만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그건 온전히 부정의 경험만이 아니다. '하나레이 해변'은 분명히 보여준다. 상실이 어떻게 또 다른 새로운 삶의 다음 문으로 나아가게 하는지. 상실로 인한 그 침전의 시간이 없었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시간들을 삶은 또 어떻게 마련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래서 '하나레이 해변'은 기담의 장소가 된다. 부정을 받아들이게 하여 더 커다란 긍정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분명 상어가 있지만 상어를 더는 신경쓰지 않게 된다.


 "너희, 하나레이에서 상어에게 잡아먹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치?"

 "거기, 상어 있어요? 진짜로?"

 "있어." 사치는 말했다. "진짜로." (p. 81)


 이러한 하나레이 해변을 하루키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피아노를 치지 않을 때는 가을이 끝나갈 무렵의 삼 주일 동안 하나레이에서 지낼 일을 생각한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아이언트리의 술렁임을 생각한다. 무역풍에 휘날리는 구름, 크게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아가는 앨버트로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 것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에게 현재 그것 말고는 생각해야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레이 해변. (p. 82)


 하지만 하나레이 해변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바로 당신의 삶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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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정이란 존재는 오해의 산물입니다.

소설에서 탐정은 주로 명석한 두뇌로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고 누구도 보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을 찾아내 숨어있는 범인을 잡습니다. 덕분에 탐정은 진실의 발견자이며 질서의 구현자라는 칭송을 얻습니다. 범죄는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 혼돈을 가져옵니다. 범죄의 본질은 법의 이름 아래 꽉 짜여 있는 직물과도 같은 질서를 끊고 교란하던 것이니까요. 탐정은 그 끊어진 직물을 다시 잇고 얽힌 질서를 잘 풀어 되돌리는 이를테면 수선공 같은 존재입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탐정은 진실을 발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드는 존재죠. 또한 질서를 구현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단지 그 얼룩을 덧칠해서 임시로 보이지 않게 할 뿐입니다. 그는 솜씨 좋은 수선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런 척을 할 뿐입니다. 솜씨 없는 자들일수록 대개 현란한 말솜씨로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마련입니다. 탐정도 그러합니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진실을 찾지 못하고 질서를 바로 잡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가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가진 탐정의 모습은 허상입니다. 조작된 신화에 불과합니다. 그건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실체를 본 사람은 드문 망령과도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정은 자본주의의 망령입니다. 그는 느닷없이 출몰하고 배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사회가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줍니다. 보통의 망령은 현실 세계를 상대화 시키지만 탐정이란 망령은 다릅니다. 그는 현실 세계를 절대화시키기 위해 나타납니다. 그의 화려한 수사는 이 세계를 빠져 나갈 출구가 없다는 흐느낌입니다. 그가 세우는 것은 질서가 아니라 창살입니다. 그는 우리를 감금하고 교도관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자본주의가 그런 탐정을 낳았습니다. 그는 역사적으로 분명한 자본주의의 자식입니다. 탐정의 탄생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모든 가치 질서를 근본부터 뒤엎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이 지배하던 중세에는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높이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계급은 하늘이 정했고 한 번 정해진 이상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경쟁은 원천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그건 오로지 더 많은 영토를 위한 왕과 귀족들만의 것이었고 나머지 농부들은 언제나 변함없는 소박한 일상을 살아갔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유행병이 있었고 자연은 언제 사납게 돌변할 지 몰랐으며 야밤에 강도떼나 이웃 나라 군사의 침입을 받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도처에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스스로 보호할만한 수단은 적었던 그들이었습니다. 정글에서 주위 사정에 민감한 쪽은 대부분 생태계의 약자들입니다. 육체로 부터 달리 생존 수단을 얻을 수 없는 이들이기에 바깥의 정보를 최대한 모으는 것으로 생존을 이어가려 합니다. 이렇게 약자일수록 정보가 중요합니다. 중세의 정보는 지금처럼 책에서 구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아는 자는 압도적으로 적었습니다. 대부분 수도사만 글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니 정보는 오로지 경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경험을 한 자가 사회의 우대를 받게 됩니다. 그가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으니까요. 아니면 많은 곳을 떠돌아다닌 여행자이거나. 보편적이었던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오래 산 사람에 대한 존경도 그 때문입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정보가 축적되어 있으니까요. 네, 중세 시대엔 연장자에 대한 존중이 현대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지금처럼 늙은이들을 뒷방 노인네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연륜에 깃든 경험 때문이죠. 우리나라의 경로사상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이제 계급은 하늘이 아니라 돈이 정합니다. 사다리가 올라갈 수 있는 고도의 제한은 이미 없어졌고 하늘 아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오로지 상품 생산을 통해 목숨을 이어갑니다. 무조건 상품을 많이 만들어 많이 파는 것. 그게 자본주의의 지상 명령입니다. 뛰어드는 사람은 훨씬 많아졌는데 달릴 수 있는 루트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가치가 '돈'으로 단일하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속의 사람들을 자주 경마장의 말에 비유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단일한 루트' 이것이 궁극적으로 지금의 노인 문제를 가져온 원인입니다. 경마장의 말에게 중요한 것은 연장자의 경험이 아닙니다. 오로지 필요한 것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근력 뿐이죠. 똑같이 자본주의는 상품을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노동력만이 최상의 수단입니다. 더이상 노인네 경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일 똑같은 물건만을 만들 뿐인데 들어봐야 어디다 쓰겠어요? 근력이 딸리는 노인네들은 생산을 저하시키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노인의 지위 격하가 가속도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누구나 노인이 됩니다. 육체의 쇠약은 필연적입니다. 궁극에 있는 죽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만 싫습니다. 쇠약이나 죽음 모두 자신이 경쟁에 뒤쳐지게 만드는 것이니까요. 노인 혐오와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입니다. 바로 그 공포가 추리 소설을 낳았습니다. 죽음이 삶의 당연한 결과로 여겼던 중세에선 추리 소설의 탄생은 불가능했던 것이죠.


 현대인들에게 지나치게 죽음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기필코 피해야 할 것이기에 관심이 그만큼 높아집니다. 추리 소설은 그 강박을 먹고 자라났습니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죠. 추리소설을 통해 이제 죽음은 분석의 대상이 됩니다. 탐정들은 무엇보다 임상의로 나타납니다. 그는 죽음이 가지고 있는 공포에 맞서 철저한 분석으로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 가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로 만들며 결국 죽음이 가진 공포를 무화시켜 버립니다. 공포는 오로지 미지의 것에서만 옵니다.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무서운 것입니다. 파악 가능하다면 공포는 사라져 버립니다. 탐정이 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탐정은 죽음의 공포 때문에 벌벌 떨던 현대인들의 '고스트버스터'였습니다. 이제 왜 제가 탐정을 자본주의의 망령이라 언급하는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져온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불현듯 출몰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음이란 음산한 묘지를 배회하는 존재입니다.


 중요해진 것은 얼마나 철저하게 분석할 수 있느냐 입니다. 아주 작은 것까지 분석할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탐정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질이 관찰하고 파악하며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탐정의 능력에 열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 자신이 가진 죽음에 대한 공포를 희석시켜 주기 때문이죠. 셜록에 대한 찬사와 동경은 그가 나를 죽음의 공포에서 건져주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분석과 설명이 납득할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납득하지 못하면 공포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납득 가능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규칙입니다. 중세에는 이런 규칙을 만들기가 어려웠습니다. 경험이 가진 개인차가 들쑥날쑥이라 보편적 잣대를 세우기가 어려웠으니까요. 하지만 근대에는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분석과 설명이라는 데 있어서는 정말 좋은 심판이 존재합니다. 바로 과학입니다. 그 과학이 모두를 납득시킬 규칙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합리성'이 태어났습니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분석과 설명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이란 벗의 도움으로 탐정은 이제 '합리'의 망토를 두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무리 말도 안되는 가설을 세우고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합리의 규칙'에 의거해 타당하기만 한다면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는 유일한 진실마저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왜 탐정이 궁극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하는 지를.


 탐정이 근거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실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리성에다 현실을 그리스 신화의 프로쿠르테스의 침대처럼 끼워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그에겐 뉴얼이 있습니다. 모든 현실은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 재현되고 해석되어야만 합니다. 진짜 현실은 탐정에게 필요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설과 설명을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납득시켜 줄 매뉴얼 뿐입니다. 매뉴얼이 없으면 탐정은 무능으로 전락합니다. 진실도 입증받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질서를 구현하겠습니까? 현실의 질서는 이미 그에게 소용없는데. 탐정에겐 오로지 매뉴얼의 질서만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질서를 현실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질서의 구현이 아니라 사실은 질서의 왜곡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구요? 바로 제더다이어 베리의 '탐정 매뉴얼' 때문입니다. 처음 이 책을 보고 제가 기대했던 것은 고전 스타일의 추리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저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제가 지금까지 말했던 탐정의 역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탐정의 한계에 대해, 모든 질서의 구멍들을 메우고 바로 잡아줄 것 같지만 정작 하는 건 있는 질서마저도 왜곡 시키는 탐정의 사기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장르가 발전하면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가 기반하고 있는 장르의 규칙을 허물고 그 그라운드 제로에서 장르가 가진 규칙의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를 밝혀주는 작품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흔히 '자기 반영성의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한 장르가 궁극에 달했을 때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태어나는 일종의 도약을 위한 발판과 같은 것입니다. 단언컨대, '탐정 매뉴얼'이 그런 작품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설명하기 위하여 위에서 저렇게 구구절절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뉴욕대 교수인 로버트 스탬이 자기반영성을 테마로 문학과 영화를 분석한 책입니다.

자기 반영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는 책이라 한 번 소개해 봅니다.(현재 이 책은 절판이네요. 아쉽게도.)

               

 과연 제가 설명을 잘 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미흡하다면 바로 '탐정매메뉴얼'을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 설명은 어디까지나 '탐정 매뉴얼'에서 나온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물론 제더다이어 베리가 작품에 투영한 의미를 제대로 잡아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탐정물의 진화된 형태를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꽤나 독특합니다. 저는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세계에 초대된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소설 자체가 환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말하고 몽유병자도 나옵니다만 정말 끝이 보이지 않는 몽환의 미로 속을 몽유병자가 되어 걷고 있는 듯 했습니다. 고전 스타일의 추리 소설을 기대하셨다면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소설입니다. 책이 벽으로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셨다면 소설의 내용이 좀 더 수월하게 이해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영화 '다크 시티' 보셨나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소설 속 어떤 부분의 설정이 이 영화의 세계와 많이 유사합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셉션'도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와! 아직도 전 주인공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군요. 그런데도 이렇게나 길게 썼다니 새삼 제가 대견해질 정도입니다. 이름은 언윈입니다. 그는 한 탐정 회사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탐정은 아닙니다. 탐정이 한 일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서기'입니다. 이 '서기'라는 게 왜 나왔는 지는 '왓슨'만 생각해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왓슨' 역시도 홈즈의 서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소설 자체가 홈즈가 한 활약에 대해 왓슨이 쓴 보고서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아가사 크리스티의 탐정 '엘큘 포와로'의 동반자 헤이스팅즈 대위도 왓슨과 똑같이 '서기'라고 할 수 있죠.


 전통적으로 추리 소설에선 '서기'가 꼭 필요합니다. 기록을 통해 탐정의 천재성을 널리 알려야 하니까요. 옛날에 알렉산더 대왕은 '트로이'에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아킬레우스에겐 호머와 같은 시인이 있어 그의 업적을 영원히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데 자신에겐 그런 시인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죠. '서기'란 그런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작 유포하는 것은 탐정의 천재성이 아니라 합리성의 환상이죠. 회사에서 언윈의 존재 가치도 그러합니다만 '서기'의 존재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탐정이 본 것을 대리해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알아낸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닙니다. 탐정이 알아낸 것을 대리해서 쓰는 것일 뿐입니다. '서기'는 실은 자기가 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메아리와 무엇이 다를까요?


 '서기'는 탐정의 머리 속에만 있던 것을 '보고서'라는 물질로 실현시키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현실은 사실 오로지 서기의 손에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그 '서기'가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자기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서기'는 진실의 유포자가 아니라 환상의 유포자입니다. 메아리 자체가 실체 없는 허상이듯이.

 그렇게 '서기'의 신체란 현실과 환상의 변증법적 종합과도 같습니다. 그는 환상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곳이며 그 내부에선 파도가 쉴 새없이 밀려드는 해변과도 같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선이 나날이 고쳐 그려지고 있습니다.


 앞서 '탐정 매뉴얼'이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말하는 소설이라 한 바 있습니다. 장자의 '호접지몽'을 혹시 아시나요? 장자가 어느날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꿈에서 깨어나 보니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사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호접지몽'입니다. 소설이 말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존재의 자유'입니다. 언윈이 늘 꿈꾸는 그것이죠. 하지만 언윈은 바깥으로의 자유를 꿈꿉니다. 소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를 묻습니다. 바깥을 통한 자유는 영역이 확고한 경계를 이루고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현실과 환상의 경계조차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경계마저 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소설이 말미에서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화두입니다.


 소설이 '탐정 회사'를 통해 '합리성'을 공격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가장 선명한 경계선으로 구획을 나누는 것이 바로 '합리성'이니까요. 그들은 그들만이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토마스 H 쿤의 '패러다임'이 잘 밝혀주었듯이 현실 세계의 진실이 아니라 매뉴얼의 진실일 뿐입니다. '합리성'이란 '매뉴얼 대로'의 의미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탐정 회사의 '탐정 매뉴얼'은 여러가지 판본이 있습니다. 어떤 판본은 중요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원본이 되는 매뉴얼은 '서기'가 작성했습니다. 현실을 만드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매뉴얼 자체가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매뉴얼이 만들어 내는 경계가 고정적일 수 있을까요? 가장 굳건한 경계선을 만드는 '합리성'이 그렇다면 나머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소설이 하는 말은 정말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경계선은 없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우리 머릿속에만 있겠죠. 초반에 언윈이 그랬듯이 우리는 혹시 있지도 않은 경계선에 구애받아 스스로의 자유와 가능성을 억압하고 있지 않을까요? 진정한 자유로움은 세계를 달리 보는 시선에 있는데 오로지 바깥으로 부터 얻으려고만 하여 스스로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탐정 매뉴얼'은 어느 순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띠지의 안내 문구는 이 책을 '명탐정이 되기 위한 최고의 안내서'라고 하고 있지만 소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아닙니다. 사실 소설은 메뉴얼의 제거를 추구합니다. 탐정도, 매뉴얼도 존재하지도 않는 경계선을 머릿속에다 주입하여 우리와 자유와 잠재된 가능성을 억압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에겐 탐정도, 매뉴얼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했다죠.

 '탐정 매뉴얼'이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입니다.

'탐정을 만나면 탐정을 죽이십시요. 매뉴얼을 만나면 매뉴얼을 불태우십시요.'

 '탐정 매뉴얼'은 그것을 위한 총알이자 성냥입니다.












 곁다리로 탐정 매뉴얼과 비슷한 탐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아울러 추천해 봅니다.











 존 딕슨 카의 '화형 법정'과 벤틀리의 '트렌트 최후의 사건' 입니다.

 모두 탐정이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진실이란 사실 탐정이 만든 수사에 불과하며

 그 자체가 합리의 환상임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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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4-08-31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헤르메스님...
이 책 감상문을 저도 써보려고 했으나, 난해해서, 머리가 헝클어져서 못 쓰고 있습니다.

글 잘 읽었네요~ ^^

ICE-9 2014-08-31 22:00   좋아요 0 | URL
앗! 마녀고양이님도 읽으셨군요. 마녀고양이님의 감상문이 정말 너무도 기다려집니다.
이 소설은 참 남은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 잘 읽었다는 말씀도 감사합니다^ ^

tataaz 2020-05-26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독서모임 책인데 전 꾸역꾸역 읽었는데,,리뷰 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글 잘쓰시네요
 

 

 



 1. 파묵에게 소설이라는 것은... 시작은 '소설과 소설가'로 부터...

 

 

 

 

 

 

  오르한 파묵이 자신이 바라보는 소설의 의미와 자신은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에 대해 말하는 책, '소설과 소설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소설은 두번째 인생이다"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소설의 완성도는 그 첫 문장에서 결정된다고 말한 바 있지요. 그만큼 작가에게 있어 첫 문장이란 첫 소설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있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한 파묵이 자신의 문학관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저렇게 시작했다는 것은 스스로 소설이라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독자들에게 역시도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 순수한 내면적 진실의 발로로써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소설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사실을 말이죠. 


 오르한 파묵이 그동안 쓴 작품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물은 역시 '책'입니다. 스물 여덟 살 때 발표한 데뷔작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책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나옵니다. 더구나 그 책은 그저 단순한 하나의 사물로 그친 적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책'들은 막혔던 인생의 활로를 열어주거나 아니면 아예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야말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바로 '책'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보듯이 아예 '새로운 인생'이란 말 자체까지 넣어가며 이를 강조해 왔습니다.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소설가이니 소설을 좀 더 팔아보려고 독자들에게 소설의 위대성을 심어주기 위해 불어넣는 거짓 환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진실입니다. 그것도 자기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인 삶을 살펴보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습니다. 그것도 감성과 지성에 있어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말이죠. 그는 사랑이 필요했으나 그 어디서도 그것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의 그림자만 벗하고 살아가는 고독한 나날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파묵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아 주었던 것은 오로지 '책'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보르헤스가 말했던 책으로 가득한 '바벨의 도서관'에 틀어박힘으로 불우한 시기를 건너온 것입니다. 그리고 책은 그렇게 파묵이 익사하지 않고 건너올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파묵이 책의 힘을 긍정하지 못할 이유란 없습니다. 이혼이 초래한 고독의 나날들 속에서 어둠과 절망만이 가득했던 자신의 삶에다 책이 '새로운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파묵은 존재하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깨달음이기에 저렇게 첫문장으로 소설이 두번째 인생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지만  소설 '새로운 인생'에서는 반전되는 믿음...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은 그러한 파묵의 깨달음이 전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오스만이라는 한 젊은이가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통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져 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책을 통해 새로운 삶과 사랑에 눈 뜨지만 결국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좌절과 안타까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네? 이런 말이 이상한가요? 오르한 파묵의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책이 가져다 준 인생을 새롭게 여는 힘에 대하여 말하는 책이라면서 어떻게 기쁨과 희망이 아니고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끝나냐구요? 그런 결말이라면 차라리 그 힘을 불신하는 것이라고 해야되지 않느냐구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앞에서 한 이야기에 따르자면 분명 이 작품 자체는 그에 대한 반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먼저 그걸 단적으로 보여드리죠. 처음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이란 책을 읽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P. 9)


 놀랍게도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첫 문장에서 부터 단적으로 이렇게 선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주욱 나중에 그 책을 지은 것으로 밝혀지는 철도원 르프크 아저씨의 죽음을 말할 때까지 책이 가져다 준 새로운 힘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감격은 꾸준히 계속됩니다. 한 장에 걸쳐서 그러한 감격을 말하고 있는 1장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 그리하여 책이 가진 힘의 최종적 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문장으로 끝납니다.


 나는 빛의 나라에서 떠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P. 27)


 빛이 상징하는 모든 것이 책이 오스만에게 가져다 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상징하는 진실, 빛이 상징하는 긍정 그리고 빛이 상징하는 구원. 책은 오스만에게 이 모든 것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집약된 결정체라고도 할 만한 책과 함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또 하나의 경험이라 할 수 있을 사랑 또한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소설 초반은 책에 대한 긍정, 보다 자세히는 소설에 대한 긍정으로 시작됩니다. 오스만은 그 힘을 충실히 믿으며 오르한 파묵이 '소설과 소설가'에서 되도록 가까이 하지 않으면 좋을 두 유형의 독자중 하나의 유형이기도 한, 소설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다 믿는 '소박한 신자'가 되어 소설에 나오는 세계를 진짜 세계라 믿고 찾아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단적인 상징과도 같은 여인, 자난의 사랑을 획득하려 애를 씁니다. 오르한 파묵이 피해야 할 유형의 독자로 분류했던 것을 오스만의 외양으로 선택한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러한 오스만의 소망은 우려대로 역시 쉬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나아가면 나아갈 수록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조차 모르는 '크레타의 미궁' 속을 거니는 것과도 같은 상황만 이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후반에 이르러 오스만은 이렇게 고백하지요.


 그러니 독자여, 그다지 섬세하지도 못한 나 같은 인물을 믿지도 말고, 나의 고뇌나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이야기의 폭력성도 믿지 말라. 오직 이 세계가 잔인한 곳이라는 사실만을 믿어라. 그리고 서양 문명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 소설이라는 이 새로운 장난감은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이 페이지들에서 독자들이 듣는 나의 목소리가 이토록 격한 이유는 내가 책으로 오염되고 거대한 사고들로 인해 저속해진 수준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 외국에서 들여온 장난감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배회해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P. 322)


 그야말로 책의 힘을 순전히 믿었던 자신을 부정하는 말이지 않나요? 300여 페이지가 넘는, 시간적으로 는 수년에 걸친 여정을 끝낸 뒤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게 된 것은 지독한 혼란 밖에는 없다고.


 그는 이제 소설을 포함한 텍스트를 불신합니다. 순진한 신도에서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찬  불신자가 된 것이죠. 또한 오르한 파묵이 경계하라고 했던 두 유형 중의 하나이기도 한 '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가 된 것이기도 합니다. 책에 나온 내용을 전혀 곧이 곧대로 믿지 않으며 언제나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만을 파악하려 애쓰는 독자 말이죠. 결국 오스만 신뢰 가득한 빛의 제국에서 불신의 창살로 가로막혀져 있는 자기만의 어두운 골방으로 추락해버린 것입니다. 오스만은 오로지 '책'을 쫓다가('책'이 가진 진실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애쓰다가) 이렇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정말로 텍스트 자체를 아주 회의적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스스로 자신의 신념이여 밥줄이기도 한 '문학'을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고 걷어차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러한 반전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일까요? 도대체 오르한 파묵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오르한 파묵은 어떻게 역사를 끌어들이게 되었는가?

    '제브데트씨와 아들들' 그리고 '고요한 집'에서 파묵이 느낀 한계

 

 

                                  

 



  자, 잠깐 진정하세요. 우리는 그 이유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르한 파묵이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불현듯 벼락이라도 맞았던 것 처럼 획기적인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전환이 아니라 그의 작품 여정이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는 가운데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당연한 '변화'였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첫 작품,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 부터 다섯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까지는 단적으로 책을 포함한 텍스트(푸코 식으로 하자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담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에 대한 신뢰가 붕괴되어가는 여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까지 이어지던 텍스트가 진실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세번째, '하얀 성'에 이르러서는 터키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외부의 타자라 할 수 있는 서양에 의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네번째, '검은 책'에 이르러서는 붕괴되고 급기야 다섯번 째, '새로운 인생'에서는 저렇게 격노에 차서 지금까지의 모든 신뢰를 철회하기에 이르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이 아무 이유없이 이루어졌을 리는 없습니다. 그럼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역사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번째 작품인 '고요한 집'에서 부터 역사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소설에서 중요한 화자 중 한 명은 역사가였죠. 거기다 그 역사가는 세번째 작품, '하얀 성'을 폐허와 같은 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 터키어로 번역 해 출간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전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기점이 되는 '하얀 성'이 중세의 터키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이것 자체가 초기의 책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붕괴시킨 장본인이 바로 역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역사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왜 오르한 파묵은 역사를 끌여들어야 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터키의 현대사가 가지고 있는 혼란했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보게 됩니다. 터키의 현대사도 우리나라만큼이나 굴곡이 많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오래도록 군부 독재도 겪었죠. 그 당시의 우리나라 작가들이 문학을 했던 것은 그 어둔 시대를 걷히게 해 줄 빛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오로지 그 시대가 어떤지 그 진실된 모습을 확인해야만 가능하므로 작가들은 리얼리즘적 기법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채록하려 했었죠.


 우리의 80년 '서울의 봄'과 같이 터키에서도 그러한 유화적 시기였던 82년에 나온 오르한 파묵의 첫 작품, '제브데트와 아들들'도 그러했었습니다. 군부의 독재가 가장 치열했던 5년 동안 파묵이 오로지 그 작품의 집필에만 매달리면서 하고자 했던 것은 오직 그 시대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의 우리 작가들처럼 그 역시도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담기 위하여 리얼리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제브데트씨 가족을 중심으로 65년에 걸친 세월을 리얼리즘적으로 담았지만 터키가 가진 진실의 빛을 드러내기엔 뭔가 미진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다음 작품, '고요한 집'에서는 서술 스타일을 달리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다중화자를 도입하는 등 프랑스의 작가 로브 그리예를 비롯하며 현대소설적 기법을 적극 끌어들여 '고요한 집'으로 터키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담아내려 했었지만 역시나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건 고운 모래와도 같이 움켜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생각해야했고 거기서 얻은 한 가지 답이 바로 역사였습니다. 흔히들 터키를 유럽과 동양의 접점이라고 부르듯, 역사적 과정 속에서 어느새 뒤섞어버린 터키의 혼합된 정체성 자체가 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음을 역사를 도입함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대상의 진실을 담기 위해서는 훗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대상의 순수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라보는 주체 역시도 순수하고도 단일한 정체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터키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미 바라보는 주체가 여러가지 다른 것들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그래도 카펫으로 유명한 터키, 그렇게 정체성 역시도 이런 저런 것들이 교차된 직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성찰이 '고요한 집'의 다중화자로 나타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결국 오르한 파묵 스스로 어떤 모순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터키만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진실을 드러내려 했으면서도 그 기법은 터키의 것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리얼리즘이나 현대 소설 기법들을 차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부터 말이죠. 아마 그러면서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도대체 터키만의 정체성이 있기는 한가? 이 서양이란 외부로 부터 유래된 기법들로 부터 벗어나 온전한 터키만의 것으로 담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죠.



 4. 드러나게 된 메워질 수 없는 간극... '하얀 성'...


 

                           

   

아마도 그것이 세번째 작품, '하얀 성'에서 터키인 호자와 이탈리아인 '나'를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확한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건 '하얀 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지요. 주인공과 호자가 서로의 문명적 지식과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서로가 대체가능할만큼 분리불가능한 존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얀 성'으로 가까이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말이죠. 네, 제목에서 말하는 '하얀 성'은 파묵이 다가가고자 하는 터키가 가진 고유의 진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볼 수는 있어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보는 눈 자체가 그 순수한 진실을 획득할만큼 순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건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두고 저만치에 있습니다. '하얀 성'은 바로 그 간격의 긍정입니다.



 5. 그 메울 수 없는 간격의 끝에서... '새로운 인생'

 


 문제는 그 긍정 후의 삶입니다. 진실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터키의 역사는 파묵의 소설이 간행되는 동안 변해왔습니다. 보다 안 좋은 쪽으로요. 터키와 쿠르드간의 대립이 격화되었기 때문입니다. 84년 쿠르드족 만의 노동당이 출범하면서 터키와 쿠르드간의 갈등은 심해져 갔습니다. '하얀 성'은 그에 대한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그 대립이 파묵에게 '하얀 성'과의 간격을 각인시킨 것이죠. 결국 터키는 92년 본격적으로 무력으로 쿠르드족 지역을 점령해 나갑니다. 이제 서양에서 침략 받는 대상이 아닌 침략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터키는 고유의 것을 잃고 차츰 밀쳐내려 했었던 서양을 닮아나갔습니다. 그건 그대로 적극적으로 타인이 되려는 것과 같았죠.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어 태어난 것이 바로 네번째 작품, '검은 책'입니다. 이건 당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절망의 기록입니다. '하얀 성'에서의 간격은 이제 더욱 넓혀지게 되는데 그건 그들 고유의 것을 이제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자각 때문이었죠. 진실인 것도, 신뢰할만한 것도 없습니다. 파묵은 이제 그 부재 속에서 문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문학이 진실을 주고자 한다면 그건 어떤 진실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입니다. 글이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걸 철회하는 일. 글이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반박하는 작품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새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가 이토록 책이 가진 힘에 대하여 공박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믿음을 깨뜨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든, 무언가를 읽든 그 이면에 진실이 있다고 상정하는 믿음 말입니다. 파묵이 깨달은 바 대로 우리의 눈 자체가 근대 이래로 형성된 서양의 인식론에 길들여진 탓인지 우리는 날 것 그대로의 진실을 날 것 그대로로 보지 못합니다. 무언가 그 뒤에 어떤 것, 배후의 진실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보여지는 사물을 넘어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무언가를 상상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념' 같은 것을 말이죠. 민족도 포함됩니다. 터키와 쿠르드족의 갈등의 주요 요인은 민족 때문이니까요. '새로운 인생'에서 파묵이 공격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날 것 그대로의 우리를 보면 터키인이나 쿠르드족이나 다 같은 것을 왜 그 배후의 것을 가지고 이리도 반목하는 것인가? 사실 그 배후란 있지도 않은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보다 나중의 작품 '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지요. 바로 이 때문에 파목은 '새로운 인생'에서 초기의 믿음을 완전히 폐기했습니다.



 6. 고유의 사물에게로...

     '내 이름은 빨강' 그리고 '순수 박물관'

 

 

                                    


 

 

 그러자 새로운 차원이 열렸습니다. 그 배후의 것을 보려고 하지 않자 사물 그 자체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존재하는 나와 사물간의 직접적 관계 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사물들과의 직접적이고도 순수한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 박물관'을 파묵 스스로 만들었을만큼 사물 자체를 중요시 하는 것이 다음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을 기점으로 보다 전면적으로 작품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여섯번째 작품 '내 이름은 빨강'은 사물 자체가 육성을 가질 정도로 그것이 전면화된 작품이었죠. 물론 이러한 사물 중시의 모습은 '새로운 인생'에서도 드러납니다. 글로는 잡아낼 수 없는 인물의 핵심을 포착하기 위하여 그 주위를 둘러싼, 그 존재의 흔적이면서 그 기억이 새겨진 잔여물이기도 한 사물들이 나열되는 장면이 곳곳에서 개진되는 것이죠. 그렇게 그는 사물로 나아갔습니다. 사물들을 뒤에서 규정하고 그로 인해 더욱 사물들의 진실을 가려버리는 배후로 부터 사물들을 건져내고 그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물만이 가진 고유의 연대기를 헤아리는 가운데 나타나게 되는 각자의 진실들이 그 자체만으로 무엇보다 중요하며 우선시 되는 파묵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의 파묵이 다다른 곳은 그렇게 '순수 박물관'입니다. 파묵의 작품 여정 처음에서 회고해 보자면 그가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곳이기도 했습니다.

 


 7. 타자와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을 위하여...

 


 여기까지 숨가쁘게 오르한 파묵이 거쳐왔던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책을 읽고 난 뒤 제 나름의 생각이니 별로 구애받으실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통해서나마 부디 오르한 파묵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리는 것은 지금 쿠르드족 문제는 다행히도 유화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우리에겐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가벼이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세계적인 경기 불황으로 인해 가장 선진적인 문명 국가라는 유럽조차 외국인 혐오가 거세게 확장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세계는 점점 타자에 대한 배척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어제도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습하여 무려 천 명이나 사상자를 내었었죠. 이는 존재하지도 않는 배후가 있다는 상상으로 오히려 실재하는 개체를 죽여나가고 있다는 파묵의 우려가 공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더구나 사실 그들이 배후를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자기들 스스로 온전히 순수한 정체성의 소유자여야 합니다만 파묵이 '하얀 성'이나 '검은 책'에서 잘 보여준 것 처럼 사실 그러지도 못합니다. 이미 우리 모두는 그 고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만큼 이리저리 혼합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집단으로서의 '나'가 아닌 순수한 개체로서의 '나'인 것입니다. 타인을 바라볼 때도 그 '집단' 속의 '너'가 아닌 보여지는 그대로의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르한 파묵이 '순수 박물관'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 고유의 연대기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시대를 통해 개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통해 시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대가 있고 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있고 시대가 있는 것임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현존하는 것과의 순수한 응시와 교감. 그것이야말로 타자를 대할 때 우리가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 개인적으로는 오르한 파묵의 여덟 권의 책이 놓여진 '순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된 최종 결론 입니다. 차후에 오르한 파묵이 또 어떤 사유의 지점을 보여줄 지 궁금하고 당신이 그 책들의 박물관을 거닐면서 가지게 될 느낌도 궁금하군요. 그 순수한 응시와 교감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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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30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헤르메스님 정말 멋진 페이퍼예요.
저도 한강의 소설들로 이런 구성의 페이퍼를 써보려고 일단 계획은 중인데 잘 될 지는 모르겠어요. 헤르메스님보다 잘 쓰지 못할 것으로 생각은 드네요. 헤헤.

ICE-9 2012-12-01 00:41   좋아요 0 | URL
옷! 한강은 저도 참 궁금한 작가인데 소이진님이 쓰실 페이퍼가 그래서 저에게 참 유용할 것 같은데요. 얼른 써 주시길. 그리고 필력은 저보다 월등한 소이진님께서 엄살은 요~ 얼른 보게되기만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

프레이야 2012-11-30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 페이퍼 별찜 해두고 읽어야겠어요.
일단, 소설과 소설가,부터 사야겠어요. 담아만 두고 여태.^^
좋은하루 보내세요^^

ICE-9 2012-12-01 00:43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감사합니다.^ ^
너무 개인적인 생각으로 파묵을 본 것은 아닌가 사실은 올리면서도 잔뜩 걱정했었는데 찜해서까지 읽으신다니 쓴 보람이 절로 나네요^ ^ 이렇게 기쁨을 주신 프레이야님도 좋은 주말 되세요^ ^

마녀고양이 2012-11-30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터키는 정말 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아주 예전부터 손꼽았지만
너무나 혼란스러운 점이 많은 나라인지라 과연 제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읽으면서 문득
현실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소설보다 더한 이야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소설이란 우리가 너무나 엉켜붙고 혼란스러우며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이해를 하고자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이 현실의 어떤 면과 닮아 있을수록 더욱 가슴을 치게 하는게 아닐까 싶어집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물 자체가 중요해졌다는 말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헤르메스님께서 쓰신 페이퍼를 보면 이 책들이 도전할만 하구나 싶은데
제가 실제로 해보니, 별로 쉽지 않더란 말이죠.. 아하하.

ICE-9 2012-12-01 00:47   좋아요 0 | URL
앗! 달여우님 들려주셨군요. 와락 환영합니다.^ ^
저도 꼭 가고 싶은 곳이 터키입니다. 가서 오르한 파묵을 만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겠구요. 하지만 현실은 느긋한 해외 여행은 꿈도 못 꾸는 형편이니 손가락만 쪽쪽 빨 수 밖에 없네요^ ^; 우와! 현실과 소설을 대비한 말씀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오르판 파묵 덕분에 소설의 한계 같은 것을 더 생각하게 되었는데요. 이것은 아직 정리가 안 되서 어떻게 말씀은 드릴 수 없고 아무튼 좀 더 많이 배우게 되면 그 때 달여우님과 여기에 대해 꼭 나눠보고 싶네요. 그 때 가서 행여 징징거리더라도 내치지 말아주세요.^ ^


oren 2012-11-3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전혀 읽어보지 못했는데, 헤르메스님의 긴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그의 작품세계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저같은 문외한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헤르메스님의 긴 글을 읽고나서 제게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은 (꽤나 주제넘은 예단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순수한 개체로서의 너'가 결국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순수한 응시와 교감'으로부터 결국 나중에는 '타자와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공감의 단계'로 나아가면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가 궁극적으로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2-12-01 00:53   좋아요 0 | URL
oren님 정말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나 모자라는 글을 과분하게 좋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 역시 oren님의 말씀에 공감하며 파묵이 사물 자체로 순수하게 접근하려 함은 무엇보다 공감의 터전을 닦기 위한 것임을 첨언하고 싶네요. 결국 파묵에게서 중요해지는 것은 말씀대로 윤리가 아닐까 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새로운 인생'때 부터 결국은 윤리에 대해 말해오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좀 더 생각해 볼 여지를 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