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所懷)


 니헤이 츠토무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블레임'이 해적판으로 국내에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으니 나름 꽤 오랜 팬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막상 '시도니아의 기사'를 봤을 때는 좀 이질감도 느꼈었다. 특유의 거친 펜선이 아닌, 이토록 깔끔한 펜선이라니(하기사 이 변화는 이미 '바이오메가'에서부터 나타났지만.). 거기다 대사는 왜 이렇게나 많이 나오는 거야. 어라, 이번엔 내 머리가 에피소드를 따라갈 수도 있잖아. '블레임' '아라바' 그리고 '바이오메가'에 비하자면, '시도니아의 기사'가 좀 대중화된 것 같아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오든 말든 그냥 자기가 내키는 대로 질주하던 니헤이 츠토무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대중의 눈치를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는 71년 생이다.)


 그래도 아직 예전의 근성이 다 죽지는 않았는지 이야기가 그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더러 핵심적인 장면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뭔가 제대로 로맨스로 발전하거나 활약할 것 같은 인물이 허무하게 죽기도 하여, 역시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이구나 인정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요리보고 조리봐도 다 비슷한 인물들의 얼굴이란!!!(여기서 느낌표 세 개를 찍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니헤이 츠토무의 브랜드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니까. 인물들 구별이 힘들다는 것이 '블레임'도 그랬고, '바이오메가'도 그랬듯이 무엇보다 니헤이 츠토무의 악몽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아니었던가. 주인공은 상대를 죽이지만, 그것이 정말 적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알 수 없다. 그 모호성과 불가해성이야 말로 니헤이 츠토무가 독자에게 주려하는 핵심이다. '넌 지금 뭔가 하고 있지만, 정작 그게 어떤 것인지는 하나도 몰라.')


남들에게는 작품의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부분이 내겐 오히려 니헤이 츠토무의 낙관으로만 보이니, 나는 정말 츠토무의 '빠돌이'인가 보다. 어쨌든 '시도니아의 기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회는 이쯤에서 그치는 게 좋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뷰랍시고 쓰는 글이니까 말이다.


 2. 츠토무의 세계란 알고보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사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을 리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건 이제 막 구구단을 깨친 아이가 미적분을 푸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리뷰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의 굉장한 그림과 동선이 확실한 액션 묘사에 아이돌 그룹의 소녀팬처럼 '꺅! 꺅!'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시도니아의 기사'는 좀 더 대중친화적이 되어 그나마 리뷰하기가 쉬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쓰기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경향은 여기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서사를 파악하기가 힘든데, '시도니아의 기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그런 것은 니헤이 츠토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이해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머리를 쓰려하지 말고 츠토무가 재현한 세계에 가슴을 열고 풍덩 뛰어드는 게 그의 작품을 즐기는 제대로 된 방법이다.


 솔직히 나는 니헤이 츠토무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독자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저 압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건물들로 꽉 채워진 세계는 그야말로 한없이 작아진 엘리스가 마주한 구멍속 세계와 아무래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어떤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하나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세계의 구성과 질서를 파악해야 출구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엘리스의 세계에선 이렇게 해선 안된다. 파악하고 이해하려 들면 들수록 탈출은 커녕 오히려 그 세계에 더욱 갇히게 된다. 그저 그 세계가 무엇을 보여주든 받아들이고, 그것과 하나로 나부껴야 문득 홀연히 출구가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여 달라진 시각으로 보게 되어 그렇다. 예전의 눈이었다면 결코 찾지 못했을 문이, 달라진 눈으로 보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엘리스의 세계다. 세계를 내 눈높이에 맞추려 하기 보다는 그 세계에 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출구를 찾게 만든다. 그래서 이해가 아닌 경험이 주가 되는 것이다. 이해는 외계에 실재하는 것을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를 먼저 변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경험은 그냥 나에게 압도적으로 닥쳐오는 것으로써, 태생적으로 번역 불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에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타자에 맞춰 날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3. 시도니아와 가우나 그리고 츠무기, 타니카제와 오치아이 - 나인가, 타자인가?


 물론 엘리스와 똑같이 경험을 중시하는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에도 이런 태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도니아의 기사'도 변함 없다. 아니, '시도니아의 기사'는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전작에선 그저 모호하게 나타났던 타자가 '시도니아 기사'에서는 뚜렷한 실체가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우나'란 우주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다. 지구는 이미 가우나에게 멸망 당한 상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도니아를 타고 다시금 인류를 번식시킬 별을 찾아 우주를 유랑하고 있다. 그래서 시도니아를 파종선이라 부른다. 인류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배라는 뜻이다. 물론 가우나는 여전히 시도니아를 공격한다. 가우나가 어디서 어떻게 지구로 오게 되었는지 인류는 모른다(가우나의 진짜 목적은 후반에 밝혀진다.). 당연히 왜 공격하는 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공격해 오니까 맞서고, 인류가 다시금 부활하는데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되기에 무찌르려는 것 뿐이다. 이런 시도니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에서 홀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우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시도니아는 광활한 우주에 이렇게 홀로 떠다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정말로 츠토무는 시도니아를 홀로 분투하는 개인이 우주선화(宇宙船) 된 것으로 설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유사성은 시도니아 역시 엘리스의 분신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가우나에 대한 시도니아의 초반 대응이 눈에 띈다. 시도니아는 가우나에 잘 모르기 때문에 가우나를 앞질러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다. 가우나는 늘 인류가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공격해오기 때문에 출현한 그 순간을 그저 막아내기에만 급급하다. 이는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의 주인공이 했던 것과 같다. 자신을 압도하는 타자가 있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먼저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그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려는 지에 대해 전력으로 눈과 귀를 기울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맞춰 보자면, 시도니아의 디자인도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시도니아는 이렇게 생겼는데,



 선체 위쪽을 둘러싸고 있는 소혹성 같은 것은 어떻게 보면 쪼그라든 인간의 뇌로도 보인다. 이것이 타자 앞에서의 나라는 주체의 왜소성, 즉 자기 중심적 파악과 이해의 한계를 나타내는 디자인이라면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인 것일까? 하지만 나중에 나타나는 가우나 최상위 군집인 대형 슈가후젠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렇게 터무니 없는 해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슈가후젠은 이렇게 생겼다.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나? 응? 해파리라고? 으음, 그렇게도 보이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의 뇌로도 보이지 않는가? 아래에 달려 있는 촉수들은 뇌의 척수들이고 말이다. 얼마든지 억측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내겐 대형 슈가후젠이 사람의 두뇌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시도니아의 쪼그라든 뇌와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거기다 크기의 차이도 어마무시하고 말이다.


 두뇌를 갖지 못한 주체와 두뇌를 가진 타자.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가우나의 대응 방식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가우나의 공격 방식은 특이하다. 한 번 패배를 당하면 다음엔 자신을 패배시킨 대상을 모방하여 공격해 온다. 가우나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패배로 인해 이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얼른 자신을 압도한 타자를 받아들인다. 모방은 자신의 타자를 흡수를 통해 이뤄지는데, 그러면서도 호시지로 시즈카에게서 볼 수 있듯이 타자를 말살하지 않고 보존해 둔다. 이러한 가우나의 흡수와 모방 관계는 어떻게 보면 공존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 가우나와 인간의 융합 개체인 츠무기의 존재가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더구나 츠무기는 타나카제와 사랑에 빠진다.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이런 츠무기는, 만일 가우나가 타자를 오로지 포식하기만 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츠토무가 이렇게 뇌의 모습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도 보다 온전한 형태를 지닌 뇌의 쪽이 보다 강한 주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가우나는 강한 존재다. 가우나와 대적하는 인간형 병기 모리토는 가우나 촉수에 한 번만 맞아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우나를 압도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츠무기와 같은 융합 개체다. 물론 타니카제도 강하다. 그러고 보면, 츠무기와 타니카제 모두 타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타니카제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츠무기마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다. 그가 정말 강한 것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타자 중심의 주체야말로 진정 강한 주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오치아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오치아이도 타자를 지향한다. 그는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지금 인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를 연구한다. 하지만 오치아이의 타자 지향은 그냥 듣기 좋은 허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의 타자 지향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치아이는 츠무기, 타니카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타자란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는 혈선충으로 타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활을 위해 누군가의 신체를 강탈하기도 한다. 그에겐 오직 자신밖에 없고 나중에 거대해져 버린 신체는 그가 가진 자기 중심주의의 크기가 실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오치아이이기에, 대형 슈가후젠과의 최종 결전 바로 전에 다시금 맞붙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니아가 슈가후젠을 물리친다는 것은 이제 진정 타자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전쟁이 아닌, 인류의 부활을 앞두고 앞으로의 인류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대안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시도니아가 거쳤던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배운 것이 그 대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대안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오치아이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다. 극단에 위치한 사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인류 구원을 향한 최종 단계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관통할 필요가 있었다.


 4.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 - 학습


 나는 앞서 시도니아가 마지막에서 찾는 대안이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배운 것이라는 말을 했다. 왜 이 말을 반복하느냐 하면 츠토무가 압도적인 타자를 통해 이해 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학습' 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며,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츠토무에겐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에서 함장은 가우나가 공격할 때, 왜 자신들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지 학습시켜 주자는 말을 하고, 츠무기는 여러 장면에서 자기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배우는 것이 나온다. 오치아이가 100년 전, 융합 개체를 만들어 일으켰던 최초의 파국적 사태는 융합 개체가 아무런 학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츠무기에 이은 두 번째 융합 개체 카나타도 마찬가지다.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자, 막무가내로 행동하려 한다. 100년 전, 융합 개체나 카나타는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유아적인 자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는 또한 오치아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나타는 가우나와 융합하려는 오츠아이를 두고 친구가 태어난다는 말을 한다.


 배우기 위해선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배우려는 대상을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에게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학습은 타자 중심적인 행위다. 츠토무는 그것이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합당한 태도이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스 적인 세계를 연출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시도니아의 기사'가 츠토무의 작품 이력에서 이채로운 것은 이전 작품까지 은밀히 전개되어온 학습이라는 테마가 여기서 비로소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시도니아의 기사'가 학원물 비슷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왜 많은 작중 여성들이(중성인 이자나를 비롯하여) 타니카제에게 들러붙는 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모두 학습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타니카제를 비롯한 등장 인물들은 배워나가는 것이다. 인간을 배우고, 관계를 배우며, 세계를 배운다. 그런 식으로 타자와 나를 그리고 공존을 배운다. 타니카제를 둘러싸고 아예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물들(중성인 이자나,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 츠무기, 로봇 테루루등)까지 얽히는 설정도 이와 관계 있다. 타자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것의 반영인 것이다.


 5. 츠토무의 지향점인 융합


 그러고 보면, 첫 작품 '블레임'부터 츠토무는 내내 융합을 지향해 왔다. 마치 일본의 데이빗 크로넨버그처럼 신체와 기계를 융합시켰다. 그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경계를 지워왔다. 사실 어디까지나 배운다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에겐 기존의 고정된 경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그 경계는 늘 새롭게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융합의 지향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츠무기는 지금까지 일관해온 세계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인격화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츠무기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츠토무의 학습과 융합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내가 '시도니아의 기사'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다. 그저 착각과 오해의 산물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론 지어 본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츠토무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것의 정점을 찍었다고.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어떤 태도를 추구했는지 보다 인지가 쉬운 형태로 만들어 제대로 경험케 만든 것이다.


  이제 츠토무는 다음엔 어디로 발을 내밀게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  '블레임'이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참에, 절판된 '블레임'도 애장판으로 재간되기를 희망해 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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