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민주주의
김종철.조기숙 외 지음 / 인간사랑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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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참 안타까운 것이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 그 순간엔 정작 좋은 것인지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은 지나고 나서야 혹은 놓치고 나서야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정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금 이재명 성남 시장의 표현에 따르면 근본도 알 수 없는 사람에 의해 국정이 함부로 유린된, 막장의 정점을 찍기 바쁜 현 정부의 모습을 보니 노무현 정부 시절이 얼마나 좋았었던 가를 반면교사처럼 거듭 되새기게 된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그런 마음으로 잡게 된 책이다.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이란 데가 있는 모양이다. 서문에 자신들에 단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2008년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희망이 뒤섞인 어수선한 상황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적 정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한 싱크탱크로 구성'(p. 11)되었다고 한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는 그 단체가 '한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2012)에 이어 두 번째로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의 재밌는 점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사안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장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아갔던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을 다루고 있으며, 2장은 대통령 권한을 너무 약화시키는 것으로 한국 현실에는 맞지 않다는 비판을 많이 받은 사정 기관을 비롯한 권력 기관 정상화 노력에 대해 다룬다. 이것을 읽으면 지금 박근혜 정부의 행태와 너무나 비교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런 노무현 대통령의 신념이 너무 순진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진정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구나 생각되기도 한다. 3장은, 이 역시 현재 박근혜 대통령과 너무나 대조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론'을 다룬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절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고, 가장 지지율을 떨어뜨린 사안이기도 하다. 지금의 박근혜 개헌론은 어디까지나 최순실 게이트를 덮기 위한 것이지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론은 마침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20년만에 똑같은 해에 이루어져, 그 호기를 이용하여 대통령 단임제의 부작용(특히 정책을 꾸준하게 해 나갈 수 없다는)과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거 주기가 불일치하여 일어나게 되는 양당간의 극단적 대결 정치로 인한 국정의 불안과 비효율 그리고 책임 정치의 실현 곤란을 막고자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을 골자로 한 '원포인트 개헌론'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4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시기 내내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정부 혁신론을 다룬다. 이 정부 혁신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조직 내에 민주적인 의사 결정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이런 노무현 정부의 혁신론이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면 오늘날처럼 많은 국민들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최순실 게이트라든가, 문고리 3인방 혹은 우병우 사태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4장을 읽으면서 새삼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나라 권력 기관에 정말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 큰 그림을 그렸구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이 정부 혁신론은 당시에 최장집을 비롯 진보 지식인들에게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지금 그들은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보면서 과연 어떻게 입장 표명을 할까 참 궁금하기도 하다. 당시 국민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 혁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약한 정부' 운운하는 반대편 공격에 더 지지를 보냈다. 아마도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2장에서 보듯 권력을 내려놓은 탓도 클 것이다. 그 때 국민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태주었다면, 오늘날의 충격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인 셈이다. 5장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 강하게 추진한 대통령의 당정 분리론을 다룬다.  그는 당정 분리가 되어 정당과 국회가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율성이 강화되길 원했고 대통령과 대등한 존재가 되어 입법부와 행정부 간에 정책 중심의 대화가 되길 원했다. 그렇게 자율과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민주주의 시스템이 만들어지길 꿈꿨다. 이것도 지금 상황을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올만한 부분이다.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것과 완전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집권 정당은 대통령의 거수기가 된지 오래이며, 행정부와 국회가 불통으로 일관한지도 오래이다. 자율과 책임은 휴지조각이 되고 나라는 만인지상 일인지하로 굴러가고 있다. 더구나 그 일인마저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그냥 일개 민간인이다. 개그라기 보다는 악몽에 가까운 현실이다.


 6장은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집권 동안 이것이야말로 가장 많은 역풍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바로 '대연정 제안'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것을 발표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지탄을 늘어 놓았다. 대연정은 지금도 완강하게 남아 있는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내놓은 노무현 대통령의 고육책이었으나, 그 진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 진의는 지금까지의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포용과 상생의 정치를 도모하는데 있었다. 진심은 정당했으나 너무 이상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다. 저자 역시 아직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때가 아니라며 적극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이 이제 그것을 학습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민을 믿었다. 경험하게 되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달라지리라 여겼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모두 6장에 걸쳐, 아직도 노무현 정부의 공과 과로 첨예하게 논쟁 중인 여섯 가지 사안들을 담는다. 하나하나가 사안을 철처히 분석하고 깊이있게 해석하고 있어, 입체적인 이해를 돕는다.


 전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이 집권하는 동안 추구했던 것은 첫째, 제왕적 대통령의 탈피였고 둘째는 포용과 상생으로 가기 위한 설득과 협상의 정치였으며 셋째는 통치의 공정성과 운영의 투명성 보장이었다. 이 책에서 살펴보는 여섯 가지 사안을 두고 내내 노무현 대통령의 당리당략을 위한 음모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그저 어떻게든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우리나라에 빨리 뿌리내리게 하려는 그의 충심이 느껴질 뿐이다.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안과 관련한 생전 어록을 많이 담고 있는데, 무엇보다 바로 거기서 그런 게 느껴진다. 그것은 누구와 달리 녹화된 것도 아니며 누가 비밀리에 받아보고 수정한 것도 아니다. 그가 직접 말한 것이다. 이제는 대통령에게서 그런 허심탄회한 진심조차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고보니, 노무현 대통령이 더욱 그리워진다.


 맞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섯 가지 사안들은 어떤 의미로는 노무현 대통령의 실험이라 할 만하다. 아무래도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무엇보다 아직은 연약한 묘목에 불과한 민주주의를 보다 튼튼한 나무로 육성시키는 데 있다고 본 것이 틀림없다. 적어도 그는 그 나무의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땅을 다져주려 했으며, 보다 높이 자랄 수 있도록 그 세포가 될 국민 개개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정말 어떤 것인지 경험시키려 했다. 물론 이런 그의 마음이 누군가의 말마따나 너무 국민의 수준을 모르는 이상주의 놀음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또 그런 현실과 유리된 이상주의 때문에 혼란만 가중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우리는 자신에게 한 번 솔직히 물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과연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하고자 했던 것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하고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시절 좌우 가릴 것 없이 많은 공격을 받았다. '사면초가'였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통령 당선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그것도 자신의 정당인 민주당이 주도하여 탄핵 위기까지 겪었으니 말이다. 그는 어디서나 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말투 때문에 조롱 받았고, 솔직한 표현 때문에 그 진의가 헤아려지기도 전에 공격부터 당했다. 이런 상황인지라 대통령으로서 그가 정말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그 내막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저 그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해 쏟아낸 말에 휘말려 정작 그의 진실한 초상은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이렇게 무슨 연유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것들이 나왔는지, 그 온전한 내막과 해석을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어보면 여기에 실린 제안들 하나하나가, 지금에 와서 더욱 절박해지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정착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로 보인다. 오늘의 현실이 더없이 치욕적이고 분노를 일으킨다면, 그럴수록 우리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올바른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민주주의야 말로 무임승차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노력과 실천 없이는 결코 거둬들일 수 없는 과실이다. 그런 우리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실험은 중요한 유산이 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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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車書 2016-10-2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약이 좋은 글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라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ICE-9 2016-10-28 12:08   좋아요 0 | URL
오거서님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분 좋은 오후를 맞네요^^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음, 홍지수 옮김, 오강남 해제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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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는지? 종교에도 수명이 있다. 인류학자 리처드 소시스에 따르면 19세기에 종교적, 세속적 이상향을 꿈꾸던 종교 공동체가 무려 200개나 만들어졌는데, 그 평균 수명이 겨우 25년밖에 안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이슬람교를 보면 종교의 생명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길고 질길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교가 문화적으로 도태되는 현상은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나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역시 한 번은 해 봤을지도 모를 그 질문에 본격적으로 천착하여 한 권의 책까지 쓴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교 교수인 아라 노렌자얀이다. 그리고 그 책이 '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는 종교의 생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종교 내부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종교란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에 대해 진화론, 인지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그 방법을 통해 종교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을, 무엇보다 문화적으로 밝혀낸다.


 터키 동남부에는 '괴베클리 테페'라는 유적지가 하나 있다. 원래는 중세의 공동묘지로 알려져 관심을 별로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라는 게 밝혀졌다. 무려 11,5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영국의 유명한 고대 유적지인 스톤헨지보다 두 배는 더 오래된 신전이다.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신전이라는 말은 이 때 종교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전이 있었던 시기는 놀랍게도 신석기 시대였다. 지금까지 종교는 농경 사회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베'의 존재는 먼저 거대한(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먼저고 그 믿음 때문에 농경 사회도 출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류가 무리에서 사회로 전이해 가는데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과연 종교의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책의 전반부는 바로 그 의문을 푸는데 할애된다. 최근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육식 동물에 비해 부족한 체력적인 한계를 무엇보다 상호 협력을 통해 생존해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의 언어도, 윤리 감각도 그리고 어린이에 대한 보호도 알고보면 그런 협력을 통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런 협력을 원활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협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신뢰다. 종교는 바로 그 신뢰를 구축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령 먼 이국의 이방인일지라도 신을 믿고 있다면 신뢰할만한 존재로 여기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회를 넘어 국가가 만들어지고, 먼 이국의 땅까지 교역이 이뤄져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신뢰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노렌자얀이 거대한 신에 대한 믿음이 우리들에게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으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신의 초자연적 감시자로써의 속성이다.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의 신에겐 결코 빠지지 않는 공통된 특성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우리가 신의 명령과 믿음을 져버리면 형벌을 받는다'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산타클로스조차 1년 동안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나쁜 일을 하는지 지켜본다는 관념이 남아있을까? 종교의 신은 이렇게 초자연적 감시자와 기독교의 십계명과도 같이 신이 말한 것을 따르지 않았을 경우 형벌을 내리는 것을 중점으로 하여 구축되었다. 왜나하면 바로 이것이 상호 협력을 위한 신뢰를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사회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무역을 할 때, 언제나 신을 믿는가 안 믿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따졌다. 신을 믿으면, 그 역시 초자연적 감시자로부터 감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며 형벌을 받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은 설령 같은 신을 믿지 않아도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엔 서로 다른 신을 많이 믿었지만 이방인 사이에 교역이 이뤄지는 것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신을 믿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가 있다. 바로 이슬람교 최대 성지 순례 행사인 '하지'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로 성지 순례하는 하지는 이슬람교도라면 꼭 지켜야 할 5대 의무 중 하나이기도 해서 매년 수백만의 이슬람교도들이 이나라 저나라에서 찾아든다. 한 마디로 이슬람교에서 가장 대규모로 이뤄지는 국제행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처럼 온갖 국적과 파들이 모이는 행사에 모이는 교도들이 그렇지 않은 교도들보다 더 타인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라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여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폭넓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종교적 체험이 도덕의 테두리를 확장시킨'(p. 304)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도 남아 있다. 재밌는 예 하나를 들자면, 9. 11 이후 미국에서 무신론자에 대한 반감이 훨씬 커졌다는 게 조사로 입증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신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신을 믿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상류층들은 자신의 아기들을 위한 보모를 고르기 위해 유타주에 주로 공고를 낸다고 한다. 거기는 몰몬교들이 많기에, 신을 믿는 그들이라면 자신의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란다.


 다시 말해, 신은 인류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호 협력을 위한 증진 방안 중의 하나로써 인위적으로 구축된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이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신이 있어 인류가 좀 더 사회적이 되고 도덕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본 결과 입증되었다. 신에 대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빈도가 증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 종교로 인한 많은 갈등을 보고 있다. IS는 코란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렌자얀은 그것이 전적으로 종교의 탓으로 볼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종교는 원래 이타주의적이 되도록 만들어졌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 소속감이 필요했다. 그 소속감을 주기 위해선 종교 나름의 성스런 가치의 강조가 필수적이었는데, 현재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 대부분은 바로 이 성스런 가치를 절대적 진리로 여기게 되는 바람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렌자얀은 그런 종교들간의 타협불가능한 성스런 가치들 역시 마땅히 타협 가능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 본연의 의미에 맞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리하자면, 내게는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생각해 보니 한 번도 사람들이 왜 종교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 천 년간 지속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문화진화론적 관점에서 종교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참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전에 필 주커면의 '신 없는 사회'를 읽은 적이 있다. 세계 최고의 복지 국가이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가 모여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나라들을 중심으로 신 없이도 얼마든지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아라 노렌자얀 역시 이 책에서 그런 나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국민이 정부에 대해서 가지는 신뢰가 무척 크기 때문인데, 노렌자얀은 그것이 무에서 창출된 것이 아니라 바로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이 정부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된 것으로 설명한다. 필 주커면도 여기에 대해선 그다지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종교가 그냥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문화로 자리잡았기에(다시 말해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아비투스화 되어버렸기에) 가능해진 것이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책은 무신론의 유혹이 깊어지는 시대에 종교의 효용이 그렇게 없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 종교가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훨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책 전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사람을 보다 도덕적으로 만들고 내부의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도록 이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종교인으로 넘쳐나는 우리 나라가 이토록 살기가 어렵고 힘든 것은 우리가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생각지도 않고 서로 자신의 성스런 가치만 고집하고 때로는 그것을 탐욕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국정마저 한 이상한 종교인(과연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때문에 파국이 되어버린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면, 이제야말로 과연 종교라는 게 무엇인지 그 근본부터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렌자얀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종교의 본질은 상호 신뢰를 증진하여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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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 유전체 의학의 불씨를 당기다
마크 존슨.케이틀린 갤러 지음, 금창원 외 옮김, 서정선 감수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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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유전체 의학이 차세대 의학의 주류 트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의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환자 맞춤형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암환자의 경우, 환자가 가진 유전자에 따라 양상도 여러가지이고, 치료 방법도 달라진다는 것이 확인되었기에, 유전체 의학은 더욱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물론 여기엔 외부 요인, 즉 DNA 염기 서열 분석 기술의 발달로 유전체 분석의 정확도와 속도 그리고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양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반면 들어가는 비용은 격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3년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처음으로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이후로, 유전자는 인간의 생명과 존재가 가진 신비를 풀 열쇠로 간주되어 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유전자를 해독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러다 1977년, 영국과 미국 학자들에 의해 유전자 해독법이 처음으로 고안되었고 1990년, 마침내 정부 주도로 인간이 가진 모든 유전자의 지도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13년이 흐른, 2003년, 드디어 32억개로 이루어진 한 인간의 전체 게놈이 완성된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번째 인간 게놈 해독을 위해 걸린 시간은 7년이었고, 수 백 대의 분석 기계들이 동원되어야했으며, 여기에 들어간 총 비용만 해도 무려 27억 달러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고 많은 기계를 동원할 필요도 없다. 비용 역시 천 달러 정도로 분석 가능하도록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유전체 의학은 특히나 스마트 환경과 맞물려 한층 더 각광받고 있다.


 앞으로 더 분석 기술이 발달하고, 비용이 저렴해지면 스마트 폰의 앱만으로도 한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분석된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의 진단을 받을 필요 없이 앱 자체가 질병의 관리와 치료 방법을 내놓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손 안의 의사'도 불가능 하지 않다. 하지만 게놈 프로젝트가 완성되었을 때조차 이런 유전체 의학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이 없었다. 한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실제 치료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 오늘날과 같은 유전체 의학의 부흥을 가져온 것은 한 소년 때문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이 바로 니콜라스 볼커다.


 그에겐 병이 있었다. 스테이크를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소년의 내장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작은 연필 막대 같은 구멍이 생겼기 때문이다.'(p.23) 2년 동안 많은 의사들이 달려들어 소년의 병을 연구했지만 발병의 정확한 이유도, 치료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닉의 병은 흡사 인간 의학에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존재로 보였다. 닉의 담당의 메이어는 닉의 질병이 마치 용과 같다고 생각했다.


 '병은 사실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파괴적이었다. 자신이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없었더라면 그런 질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것 같았다. 자신의 모든 의학 기술을 동원해 용을 겨우 달래서 일시적인 수면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물을 퍼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배가 계속 떠 있게 할수는 있지만 물이 어디서 새고 있는지 밝혀낸 것은 아니었다. (p. 151)


 그런 닉은 혈액 주사를 통해 직접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기에 마지막 방법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유전자 분석이었다. 메이어는 닉이 가진 유전자의 결함으로 생겨난 병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시도해 볼 수 있는 최후의 복안이었다. 그래서 메이어는 당시 최고의 유전체 서열 해독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 하워드 제이콥에게 도움을 구한다. 그 때만 해도 유전체 서열 해독 기술이 실제 의학에 사용될 수 있는지 확실치 않았었다. 제이콥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저 생리학을 전공하고 쥐를 가지고 유전자 서열 해독을 연구하는 과학자였다. 하지만 제이콥은 닉의 엄마 애밀린이 블로그에 쓴 일기를 읽고, 자신 역시 두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닉과 부모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여 결국 닉의 유전체 서열을 분석하기로 결정한다. 그에겐 워디란 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시애틀생명의학연구소에 있다가 일년 전, 면접에서 제이콥이 2014년부터 아픈 아이들의 DNA 염기 해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 말에 감명 받아 제이콥이 있는 위스콘신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닉의 해독은 원래 계획 보다 5년이나 앞당겨진 것이었지만 제이콥과 함께 과감히 뛰어들었다.


제이콥은 워디에게 때가 왔다고 얘기했다. 의사들의 손발을 들게 한 치명적인 질병에 고통받은 끝에, 오직 게놈 해독만이 운명을 바꿔줄 수 있는 환자가 눈앞에 있다.(p. 164)


  워디에겐 희망이 있었다. 닉이 가진 병의 초기 증상은 근본적으로 너무 낯설고 불가사의하며 위협적이라 분명 유전적인 것이 원인으로 보였다. 그리고 만일 정말 그렇다면 반드시 닉의 30억개 유전체 서열에 무언가 나타나게 되리라 믿었다. 그녀는 표준 게놈 서열과 닉의 게놈 서열을 비교했다. 표준 게놈이란 '무엇이 정상적인 사람의 게놈인지 그 기준을 알려주고, 질병을 가진 사람의 게놈과 비교하여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p. 168)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범 답안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표준 게놈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고작 28명의 게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28명 모두가 알려진 희귀 질환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를 위한 출발점은 되었다. 그러나 이런 표준 게놈이 있다고 해도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이 가진 DNA는 모두 32억개. 이것들을 소수의 사람이 소수의 도구들만 가지고 전부 분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워디는 인간 행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가 있는 엑솜(exome)에 집중했다. 이 엑솜은 전체 게놈 중 1.2%에 지나지 않기에 분석하기에 훨씬 유용하다. 더구나 '상당수 유전 질환이 단백질 문제에 있었기 때문에 닉의 병 역시 엑솜의 어떤 부위에서 기인'(p. 172)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티스푼 정도의 혈액에서 닉이 가진 병의 탐색이 시작되었다. 그 혈액은 DNA로 축소되고,  DNA는 엑손(exon), 액손은 염기 서열의 구성 문자인 A(아데닌),C(사이토신),G(구아닌),T(티아민)로 환원되었다. 하지만 모든 걸 기계가 하지 않았다. 유전자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기본 단위인 백혈구의 핵을 뚫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직접 해야 했다. 그렇게 분석되었다. 물론 그 과정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2009년 10월, 닉의 유전자는 다섯 번째로 해독되었고, 그 결과 16,000개에서 32개로 변이 유전자의 후보를 좁힐 수 있었다. 그것들을 대상으로 워디와 동료들이 직접 개발한 분석 프로그램인 '카르페 노보'를 사용한 끝에, 결국 병을 일으킨 유전자를 찾아내었다. 범인은 바로 XIAP였다.


 XIAP에 문제가 생기면 면역체계가 좋은 균과 나쁜 균을 구분하는 능력에 이상이 생겼다. XIAP의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 XIAP 단백질 생산이 줄었다. 닉의 백혈구는 필요한 XIAP 단백질의 60%만 가지고 일하고 있었다. 닉의 몸 속에서 일어난 대혼란은 32억개의 DNA 염기서열 중 단 하나의 염기가 잘못된 염기로 치환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잘못된 염기를 바로 잡아야했다. 그러자면 골수 이식밖에 없었다. 결국 닉은 골수이식을 받게 되었고, 생명과 건강한 삶을 되찾았다.


 이렇게 니콜라스 볼커는 당시까지만 해도 반신반의의 대상이었던 거대 게놈 프로젝트과 의학의 연결을 현실적으로 확인시켜 준 계기였다. 이 치료의 성공으로 오늘날과 같은 스포트라이트가 유전체 의학에 비로소 비춰졌던 것이다.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는 이 과정을 굉장히 상세하고 충실하게 담고 있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니콜라스 볼커의 병을 씨줄로 하여 유전체 의학의 등장과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날줄로 잘 누벼놓았기 때문에 유전체 의학의 전모마저 잘 살벼볼 수 있게 해 준다. 유전체 의학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셨던 분들이라면 정말 좋은 안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곧 입시철이다. 지금 중3들은 과학고 지원으로 한창 바쁠 때다. 그러고 보니, 요즘 과학고에선 아예 모집 공고를 낼 때부터 의대 갈 학생들을 지원하지 말라고 직접 써 둔다고 한다. 의대 진학을 위해 과학고를 이용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전체 의학이 지금의 의학 패러다임을 많이 바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유전체 의학이 상용화되면 의사에 대한 수요는 지금보다 훨씬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자동 수술 기계도 정녕 꿈만은 아닌 것 같으니. 그러므로 기술로 대체 가능한 의사가 되기 보다는 그 기술 자체를 만들어내는 분야에 뛰어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어진다. 미래의 직업은 보다 더 많이 알 때,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다. 학생이라면 교과서만이 아니라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자신의 삶을 위해서도 더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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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전환점이 된 일란성쌍둥이에 관한 기록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 알마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하나의 성이 '섹슈얼리티'와 '젠더'로 나뉘어져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건,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기 기든스가 쓴 '현대 사회학'이란 책에서였다. 대학 신입생 때였는데, 전공은 아니지만 사회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사회학 전공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 책을 가장 많이 본다 하여 읽게 된 책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인간의 성(sex) 을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자연적인 '섹슈얼리티(sexuality)'와 한 개인이 사회화되면서 가지게 되는 인위적인 '젠더(gender)'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게 된 가장 대표적인 계기로 기든스가 말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여기서 소개할 존 콜라핀토의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이비드 라이머 케이스'이다.



 데이비드 라이머는 1965년 8월 22일, 예정일을 4주 앞두고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부모는 둘에게 브루스와 브라이언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생후 7개월로 접어 들었을 때, 두 아이 모두 소변 할 때마다 칭얼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의 성기를 살펴보니, 포피가 성기 끝 부분을 막아 소변 보는 걸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병원에서 포경 수술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여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은 말처럼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았다. 브루스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전류로 절단 부분을 지져서 봉합하는 기구('보비 소작기'라고 한다.)를 썼는데, 의사의 실수인지 아니면 기계의 고장인지 그만 브루스의 성기가 타버린 것이다. 아이는 평생 성적 불능이 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부부에게 머니 박사라는 사람이 연락을 해왔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의 저명한 의학 교수였다. 특히 성 심리학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데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음양 환자들이 총계를 놓고 보았을 때, 남성이건 여성이건 성 행태와 성 지향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지는 않는다.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지만, 반음양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알 수 있듯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 출생 당시 중립적이었던 섹슈얼리티는 성장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성적인 쪽으로 혹은 여성적인 쪽으로 차별화되기 시작한다."(p. 59)


 그래서 부부에게 브루스를 성전환시키고 아예 여자로 기를 것을 제안했다. 결국 부부는 머니 박사의 뜻을 따랐고, 브루스는 브렌다로 자라게 되었다. 하지만 머니 박사가 순수하게 브루스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야심이 있었다. 자신이 적극 주장하고 있는 '후천적 성 형성론'이 진리인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같은 성을 가진 일란성쌍둥이는 좋은 표본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인위적으로 한 쪽은 남자로, 다른 한 쪽은 여자로 만들고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 자라게 된다면 그것만큼 자신의 이론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것도 또 없었다. 브루스의 소식을 들었을 때, 머니 박사는 쾌재를 불렀다. 그가 먼저 브루수의 부모에게 연락하여 당장 존스홉킨스대학으로 데려오라고 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브루스는 정말 브렌다로 자라났다. 아이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자 옷을 입었고 여자처럼 행동했으며 생일 선물도 브라이언은 기차를 골랐는데 자신은 인형을 골랐다. 브렌다는 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삽시간에 이 사실이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그래서 사회학의 가장 대표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는 기든스의 책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머니 박사의 명성까지 한없이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브루스와 브렌다에 관한 모든 것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그 뒤, 브렌다가 된 브루스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니 그렇게 알려지기 전이라도 브루스가 진실로 브렌다의 삶을 받아들였는지, 그 정확한 내막과 소식이 알려진 바 없었다. 그러다 우리는 1997년에 화와이대학의 생물학자와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한 정신과 의사가 발표한 논문에서 아주 놀랄만한 사실을 알게 된다. 브루스가 처음부터 자신에게 강제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에 계속 반발해 왔으며 결국 열 네살 때 다시 남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논문은 머니 박사의 실험은 실패라고 단정했다. 우리가 진실로 알고 있었던 '쌍둥이 케이스'는 '공상 의학 게임'일 뿐이라고. 그 논문이 발표되자마자 이 책의 작가 존 클라핀토는 직접 당사자를 찾아갔다. 현재 그는 논문에서 말한 그대로 남자 청년이 되어 있었고 이름도 브렌다에서 데이비드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는 브렌다의 삶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내렸다.


 "세뇌 당한 거나 다름 없어요.(p. 11) 


 브렌다는 가장 유명한 아이 중 하나였다. '젠더'라는 개념이 자리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례의 장본인인 만큼 누구나 브렌다를 알았다. 하지만 그는 가장 알려지지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렇게 살아가는 그의 내면을 알려 하지 않았다. 언제나 이상한 나라에 사는 것과 같았던 그의 실존, 그 내면에 자리한 고통은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었다. 그는 그냥 머니 박사가 만든 브렌다란 껍데기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저자 존 클라핀토는 그 껍질을 깨고, 데이비드가 되기까지의 진정한 알맹이의 삶을 보여주려 한다. 숨김없이, 남김없이. 그리고 우리는 똑똑히 보게 된다. 제아무리 객관적이라 자부하는 과학이라 해도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잘못도 진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또 그런 과학이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처참하게 유린할 수 있는지. 문득 칼 포퍼가 말한, 과학에 있어 진정한 객관적 지식의 의미가 생각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과학 및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객관적'이고자 하는 개인적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과학자들의 우호적-적대적 협동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열린 사회의 적들' 중에서.)


 머니 박사의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과학자들이 집단적으로 '브렌다 케이스'를 검증했다면, 브렌다의 고통은 훨씬 빨리 줄어들지 않았을까? 피해자가 비단 브렌다만은 아니었기에 더욱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이 이 '브렌다 케이스' 때문에 머니 박사와 그의 이론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전환을 당하고 강제적으로 규정 당한 성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그들은 폭력의 희생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남이 멋대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성 정체성적으로 단 두 개의 삶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한 인간의 삶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 책에서 똑똑히 볼 수 있다. 머니 박사가 남성 아니면 여성의 삶밖에 없다는 고정 관념에서 탈피만 할 수 있어서도 브렌다와 같은 많은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여기서 아무래도 쥬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정체성이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행동을 통해 부단히 형성된다고 말했다. 식물처럼 남성이나 여성으로 대지에 고정되어 그렇게만 자라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 광활한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바람처럼 어디에나 깃들 수 있는 것이며 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브렌다에게 여성의 삶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설령 성기를 잃어버렸다 한들,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삶의 과정을 배려하며 그만이 가진 가능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오늘의 데이비드가 훨씬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사람의 성은 신비롭다.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는 그걸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더하여, 한 사람을 대한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늘 세심하게 살피고 진중하게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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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경제 - L’economie des inegalites
토마 피케티 지음, 유영 옮김, 노형규 감수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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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성과연봉제가 이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성과연봉제는 업무능력과 성과를 등급별로 평가, 임금에 차별을 두고 저성과자는 해고시키는 게 방침인 제도다. 정부는 일단 공공기관부터 그것을 적용하려는 참인데, 현재 노조의 반발이 꽤나 거세다. 물론 취지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 서비스가 주목적인 공공기관에서 사기업처럼 업무 능력과 성과를 일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 기관의 무능과 부패는 대부분 권력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자행되는 낙하산 인사로 인한 것인데 그 책임을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하는 일반 직원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결국 성과연봉제는 임금 억제와 쉬운 해고가 골자다. 근본적으로 부자 감세로 인한 재정 부족 상황을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타개하려는 데 있다. 단적으로 소득 불평등 심화에 일조하는 정책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평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토마 피케티는 이렇게 되는 이유로 전체 소득에서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의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꼽는다. 그는 그것을 선명히 나타내기 위해 피케티 공식이라는 것을 고안했다. 공식에 대입하면 피케티 지수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 전체 소득 중 자본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을 가리킨다. 피케티는 이 지수가 1950년 이후로 계속 증가해 왔다고 한다. 즉 원래 가지고 있는 자본에서 얻는 소득이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보다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부의 획득이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 오로지 세습을 통해 더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단어인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정태인 교수가 피케티 공식에 따라 우리나라의 피케티 지수를 산출했는데, 우리나라 전체 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이 무려 절반에 가까운 48%였다고 한다. 절반에 가까운 소득이 아무 노동 없이도 가능하다니, 정말 우리나라 불평등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피케티는 이 지수가 앞으로 더욱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라 본다. 당신이 흙수저라면 앞으로의 미래도 현재만큼이나 암울하다는 예언인 것이다. 이 운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피케티는 조세 정책에 승부수를 띄운다. 


 무엇보다 오직 자본을 압박하는 조세만이 자본과 노동의 진정한 재분배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p. 91)


 지금까지는 경제 성장이 우리의 생활을 향상시킨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피케티에 따르면 OECD 국가의 경우, 1983년부터 1995년까지 부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는데, 같은 시기 노동자들의 삶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실질 임금의 하락으로 삶의 질은 전반적으로 낮아졌다. 한 마디로 성장의 과실은 결코 노동자에게로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들이 흔히 주장하듯, 경제 성장이 더 좋은 삶을 가져다 주진 않는다. 한 마디로 넌센스에 불과하다. 때문에 기댈 곳은 오직 재분배 정책밖에 없다. 그것도 자본 소득에 집중된 재분배 정책이어야 한다. 거기에 가장 실질적이며 커다란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세 정책이다. '21세기 자본론'에서 피케티가 강조한 부유세는 바로 이러한 현실에 대한 고찰에서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인적 자본 성장에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반적인 불평등도 그렇지만 부국과 빈국 간 불평등의 핵심은 생산 수단의 불공평한 분배가 아니라 인적자본의 불공평한 분배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p. 112)


 이 인적 자본을 평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바로 '효율적 재분배'다. 피케티는 재분배 정책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높은 임금과 낮은 임금 사이의 격차를 완화시키는 '기초적 재분배'이고 다른 하나는 인적 자본 형성 과정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개인의 학력간 능력간 차이를 없애는 '효율적 재분배'다. 이를테면 효율적 재분배란 로스쿨처럼 돈과 부모의 배경이 있어야만 배움의 기회가 허락되는 것을 근절하고,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 학제처럼 누구나 균등하게 어려움 없이 자신의 인적 자본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학생들이 부유층 못지 않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 같은 지원 제도를 정부가 광범위하게 마련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효율적 재분배라 할 수 있다. 즉 부유세를 통해 확충된 재정이 효율적 재분배를 위해 쓰이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식의 인적 자본의 성장 주도가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심한 불균형을 해소할 것이라 보고 있다.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여기저기서 보다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것을 보게되는 요즘, 피케티의 이런 조언은 아무래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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