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ㅣ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해 쓴다는 것,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쓴다는 것, 저 죽음들 앞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고 쓴다는 것의 무능함 앞에서, 그는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자, 끊임없이 고쳐 쓰고 끊임없이 지우며 "머리말을 지우고 후기라고 고쳐" 쓰는 자이다. 그에게 언어의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사는 것,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아니라 절대적인 침묵 속에 사는 것이다. (p. 80)
글의 첫 머리에 이광호가 쓴 글을 인용하는 것은 왠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여전히 세월호에 대해 뭔가 쓰는 것이 어렵다. 그것이 설령 세월호에 대한 책 리뷰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읽었다. 세월호 1주기에 발간된 이 책을 이제야 읽은 것이다. 왜 읽은 것일까? 답답해서일 것이다. 2년이나 흘렀는데도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원흉들은 아예 당당하게 아무 잘못 없다고 떠들고 있으니. 거기다 세월호 리본을 보고 서슴없이 빨갱이라 부르는 노친네들이 주말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광장을 아우성치는 요즘이니 더더욱.
2년동안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늘상 반복되는 사고들 중 하나로 경화시키려는 움직임과 싸워왔다. 마땅한 애도를 이념의 색깔을 뒤집어 씌워 왜곡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유족의 단식을 곁에서 폭식을 하는 것으로 조롱하며 계속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 '아직도 세월호냐?'며 피로감부터 토로하며 얼른 과거사로 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맞서서 말이다. 그렇게 그저 불운한 사고로 돌리려는 치들은 팽목항의 바람을 잠재우려 애썼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왜곡과 조롱 그리고 증거 조작과 무시가 김기춘이라는 국가 권력 최상층이 조직적으로 계획했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그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이 나라가 완전히 변화할 때까지 계속 불어올 것이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모든 글들은 바로 그러한 경화에 대한 저항이다.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침묵만 강요하는 세력에 대한 거울의 발화이다. 그들의 진실된 초상을 책의 언어들이 비춰주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잘도 감추고 있었던 국가의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였다. 그것은 증거였다. 진태원의 말처럼 우리의 국가가 실은 계급 국가이며 그 진실된 정체는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p. 14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때, 그 재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자연재해가 어느 정도 공평하고 무작위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실상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가난은 위험하다. 흑인인 것은 위험하다. 라티노인 것은 위험하다.(p. 23)
세월호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었다. 진태원은 세월호 참사가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국가가 놀랍도록 무능하다는 것과 구조의 무의지에서 표출된 국가가 결코 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국가의 무능력과 무의지에서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가 가진 분노의 원천은 아니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만들고 거기에 얽힌 모든 진실을 규명하려 하는 것은 비단 희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한 유가족이 말했던 그대로 이대로 방치했을 경우 언젠가 나나 내 가족이 바로 그 희생자의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예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 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해요."(p. 154)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변화의 강풍이다.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는 촛불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산 자들의 의무다. 전혀 다르게 만들기 위해선 모든 것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몇 편의 논문들은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권명아는 고통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끝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광호는 '문학의 언어는 언어의 불가능성과 침묵의 잠재성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건 이후의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언어의 자리에서 그 모순과 분열을 '견디는' 남은 자의 글쓰기이다. 문학은 사라진 자들의 침묵의 능력에 의지한다.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익명으로만 간신히 말할 수 있다. 주어를 알 수 없는 저 목소리들을 통해 이름은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다(p. 104)'고 말한다. 이현정은 유민 아빠가 단식할 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 그리고 세월호 참사 때 희생된 이들 중에 있었던 외국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있는 가족의 개념이 얼마나 편협하고 폭력적인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그 자리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문과 의심은 하나의 권유이다. 소문과 선동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지 말고 스스로 먼저 사유하고 성찰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라는 요청이다. 후반의 논문들은 이러한 우리의 주체적인 실천과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말들이 너무나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요즘 박근혜를 옹호하고 탄핵 기각을 바라는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고 거기에 어이없이 휘말리는 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와 같은 존재들. 세월호 참사를 반복시키는 잠재된 위험들. 바로 그런 그들이 있기에 세월호 참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팽목항의 바람은 멈춰선 안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바람을 기꺼이 맞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