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절판


예전에 TV에서 우토로 마을에 대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우토로 마을은 인근의 군 공항 건설을 위해 강제징용된 조선인들 1,300명이 온종일 강제 노동으로 혹사당하던 중에 자연스레 형성되어진 마을이었다.
하지만 패망 후 공항 건설은 중단되고 그 동안의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한 푼도 없는 처지인지라 전쟁이 끝나서도 그 곳을 떠날 수 없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선인의 마을로 자리잡게 도었다. 그러다가 그 마을 전체의 부지가 한 부동산 회사로 넘어가면서 회사가 거기 사는 마을 주민 모두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렸고 그로 발생한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애환과 그 도움의 호소를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수 년에 걸친 가혹한 강제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그들을 거기다 그렇게 냉혹하게 몰아내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멀쩡히 우리나라 땅에 잘 살다가 어느 순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3~4백 미터 지하의 갱도에서 석탄을 캐거나 때로는 단바의 광산에서 처럼 겨우 30CM의 좁은 갱도에 몸을 집어 넣고 망간을 캐거나 우토로 처럼 공항을 건설하거나 일본 자국민에게는 시키지 않을 그런 고되고 위험한 막노동일을 하면서 강제징용 당한 우리 조선인들이 흘린 눈물과 피가 저 일본 땅에 참으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기도 이를데 없었다. 그러다 그 후, 단바 망간 기념관에 대한 소식을 TV에서 또 보게 되었고, 그 때 나는 그 고통의 역사적 현장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시 일본에 간다면 나 역시 저렇게 고통의 현장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역사가 새겨놓은 상흔들을 겪고 기억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일단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거기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내 힘으로선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적절한 도움을 얻을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차에, 이렇게 사진작가 이재갑의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후쿠오카로 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 곳곳에 아로 새겨진 강제징용당한 우리 조선인들의 상처와 애환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 대부분 일본이나 우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저 무관심과 망각 속에 버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 속 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캐냈던 석탄 더미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 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역사적 존재로 남아있는 그 현장을 말이다.

그 대부분의 현장은 "우리의 언어는 아우슈비츠가 어떤 장소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조너선 웨버가 말했던 것 처럼 언어화가 불가능한 그저 망연히 전해져오는 그 곳에 깃든 상처와 고통에 오롯이 젖을 수 밖에 없는, 리오타르가 말했던 바와 같이, '트라우마'의 공간들이다. 지은이는 답사를 통해 바로 이러한 트라우마의 공간에게 그동안 잃어버렸던, 그렇게 지워진 목소리들을 다시금 찾아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진을 하나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다름아닌 '우리 이웃들의 삶이 때로는 우리 삶을 지탱한다'는 말이 내포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는데 있었는데 작업이 치열해질 수록 바로 그 지탱하는 이웃들의 삶이 무엇보다 역사적인 것이며 오히려 한국전쟁과 일본 강점기 처럼 무엇보다 거센 폭력에 노출되고 그로인한 아픔과 상처로 점철된 역사속의 이웃들이 현재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웃인 그들의 눈물과 애환이 우리네 삶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에 그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과도 같아서 그는 일본 전체에 걸친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트라우마적 공간을 이렇게 하나의 책에다 담으려 하는 것이다.

책은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처음에는 이렇게 답사한 곳의 위치가 나와있는 지도가 있다. 다소 대략적이라는 게 아쉽지만 이 책이 답사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동안 망각 속에 버려졌던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삶을 다시 환기시키는 데 있음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단순히 과거의 아픔을 환기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 작업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당연하겠지만 그는 그 아픔이 어떻게 현재로 연결되고 있는지,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그 아픔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아울러 담는다. 그러한 측면이 무엇보다 개인의 기억함과 일본 사회의 망각함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즉 지워지고 있는 역사를 복원시키려 노력하는 개인들과 과거의 상흔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지움으로써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변해버린 일본 현재의 모습 사이의 대비인 것이다. 그렇게 기억하려는 개인과 망각시키려는 사회의 대조를 통해 과거를 이어받는다는 것,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로새기려 한다. 무엇보다 이 사진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강제 징용 당한 한 조선인의 무덤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이 노역 끝에 죽어도 묘비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의 무덤은 하나의 돌로 표시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폐허를 지우고 과거의 범죄적 흔적을 지운 현재 일본의 변모해버린 모습에 비해서 이 희생자들의 무덤은 저렇게 제대로 된 표식하나 없이 그저 돌 하나가 된 채 그것도 풀 숲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일본이 그들의 범죄적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꾸만 망각 속으로 떠밀고 있는 듯한 형국과도 같다. 그 곳을 찾아오는 이는 저 할아버지 처럼 그것을 기억하는 개인들 뿐이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신세타령가를 부른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로 시작되는 그 타령은 마치 망자의 혼이 다시금 흘러나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는 것 같다. 말이 아니라 노래,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죽은 자의 빙의된 목소리라는 점에서 저 돌 하나로 남은 무덤은 그야말로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서의 트라우마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빙의라는 점에서, 그 상처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점에서 그 곳은 나와 연결된, 내가 속한 공간이 된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 공간과 연결된 나를 되새김은 비단 내 국적, 내 민족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비단 유태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가 인류에게 가할 수 있는 극한의 폭력이 가져온 비극을 상기시키듯, 여기 하나의 돌 무덤에서 환기되는 것도 다른 나라 백성이라고 해서 마구 가해지는 제국주의적 폭력과 착취가 가져오는 커다란 비극인 것이다. 지금 일본이 지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폭력과 착취의 증거들인 것이다. 지워진 것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아픔, 새겨진 비극을 기억함은 바로 그 반복의 연쇄를 끊는 일이 된다. 초래될 비극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일이 된다.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벽에 쓰여진 글 처럼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돕기 위해 사이타마에서 왔다는 이 누군가의 글은 이러한 기억함의 궁극이 종래에는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지은이가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오키나와에 있는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들이 무덤인 '한의 비'에서 느끼는 것도 그것이다. 문득 거기 묻혀진 조선인들 중 하나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은 고향이었음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감정에 빠진다. 그는 이렇게 그 감정을 고백하며 답사를 맺는다.

"지난 1996년부터 일본 관련 작업을 시작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만들며 나를 합리화하고 이겨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들과 달랐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치솟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마치 이 작업의 당위성이 나의 운명인 듯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p.338)"

이 치솟는 울분, 아픔, 눈물이 바로 트라우마적 공간과의 만났을 때의 반응이며 그것은 모두 저 아픔을 당한 자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그렇게 나와 연결되고 내가 속해 있는 바로 그 곳의 존재라는 깨달음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도우러 온 사이타마에서 온 사람이나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결국 울어버린 지은이나 트라우마적 공간 앞에서 느끼는 것은 똑같다. 이들이 모두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며 그들의 버려짐이 바로 나의 버려짐이라는 자각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내가 정말 이 아픔의 현장들을 둘러볼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도 유년 시절 약주에 취하시면 내내 들려주시던 그 고통과 아픔이 절절했던 징용 시절의 기억이 어디선가 남아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분명 그 곳에 이르면 지은이와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트라우마의 공간들을 내 몸 여기저기에 새겨놓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잊지 않는 것. 그 어디든 폭력에 노출되고 사회의 강압에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자들은 모두다 내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아마도 그 새겨진 상처들은 그렇게 호소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언제든 빨리 그 곳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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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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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은 비단 진시황제만의 욕망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은 900년 넘게 살았다고 한다. 아서왕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은 사람의 수명은 600년이 적당하다고 말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다 배울 수 있다고. 그래서 그는 그만큼 생을 누렸다. 신화라는 것을 인간이 가장 욕망하는 걸 은유와 상징으로 버무린 이야기라고 정의한다면 이렇게 오래 산 사람들이 나오는 것은 수명의 연장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근원적 욕망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같은 이야기를 스페인의 철학자 우나무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삶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비극적 의미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며 종교를 비롯한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적인 것들은 바로 그 비극을 조금이라도 지연해보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왔다고.

  다행히 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욕망은 서서히 충족되고 있는 중이다. 테드 C 피시먼의 ‘회색쇼크’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1시간 마다 평균 수명은 11~15분 정도 늘어나고 평균 수명은 날마다 5시간씩 늘어난다(P.447)’고 하니까.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모두 조금이라도 오래 살기를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이러한 바람들이 집단적으로 실현이 될 때 개인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각종 사회 문제와 그로 인한 변화들이 마구 생겨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테드 C 피시먼의 책 제목 ‘회색 쇼크’의 의미이며 이 책이 독자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의 전부이다. 

   ‘회색 쇼크’는 말 그대로 점점 수명이 늘어나는 그렇게 노인이 많아지는 ‘고령화 사회’를 다룬다. 하지만 이론적인 틀로 독자를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모두를 아우르는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독자를 그것의 목격자로 참여시킨다는데 독특성이 있다. 한 마디로 '고령화' 사회에서 야기되는 모든 문제와 변화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한 번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초점이 실제적 사례들에 맞춰진 만큼 피시먼은 현재 고령화 현상이 가장 집약적으로 표출되고 있다고 보여 지는 일종의 ‘사례군’으로서의 몇 개의 지역(혹은 국가)들을 골라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에 의해 선별된 지역(혹은 국가)들은 이렇다. 

  먼저 ‘고령화’에 특화된 지역사업들을 개발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고령화’에 발맞춰 나가고 있는 미국의 ‘플로리다’로 부터 갑작스러운 '고령화'의 진전으로 부족해진 노동력으로 인한 이민족의 유입과 극심한 재정 압박으로 인해 이제 노인 문제를 가정 내부의 책임으로 전가시키고 있는 ‘스페인’을 비롯, 세계에서 가장 노인 인구가 많아서 ‘고령화의 최전선’으로 불리지만 오히려 그 ‘고령화’ 때문에 젊은 세대가 기성 가치관으로부터 탈피하고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는 등 가치관 자체가 혼란의 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일본을 경유하여 제조업의 발달로 부유한 도시로 손꼽히다가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제조업이 몰락하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한 이민자들의 대량 유입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늘어난 노인 인구들이 저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도하는 가운데 오히려 전통적 가족의 가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미국의 록퍼드와 오랜 역사 때문에라도 동양의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국가가 ‘고령화’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해체되고 새롭게 받아들여진 자본주의 때문에 어떤 식으로 다시 조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중국까지, 피시먼은 마치 현미경을 들이대듯 한 개인의 삶이라는 미시적인 부분에서부터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부분까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건져내어 마치 탁본을 떠 보이듯 독자 스스로의 눈으로 그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야말로 전 세계에 미치고 있는 ‘고령화’의 현재와 그것이 야기할 미래의 모습을 충실히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별로 친절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앞 서 말한 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고령화’의 현상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내가 판단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도움이 될 만한 해석의 틀 같은 것은 이 책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실제 상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거기에 대해 일종의 원론 같은 것으로 ‘장수에 관한 짧은 역사’라든가 ‘과학이 노화를 막을 수 있을까?’ 등등의 약간 이론적 틀이라 볼 만한 것들을 부가하고 있긴 하나 정작 논의하고자 하는 것과는 또 맥락이 맞지 않아 오히려 혼란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 마디로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아우르기엔 곳곳에 다소 산만한 구석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너무 개별적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한 나머지 독자로 하여금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게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나 싶다. ‘회색 쇼크’ 즉 ‘고령화’는 가까운 미래에 전 세계에 걸쳐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분명 떠오를 문제다. 그것도 부정적 의미에서 말이다. 아마도 피어슨은 거기에 대해 독자 개인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 현상을 잘 이해하고 거기에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그렇지만 인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시각을 만들어줄 수 있는 틀이 있어야 비로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령화’가 가져올 변화 그리고 문제들은 절절히 체감하는 바이지만 거기에 대해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은 그리 제대로 짚어주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다시 말 해 책에 기술된 실제 상황에서 각 나라들은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령화'에 대처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 중 어느 것이 자기에게 적합한지 그 적절한 선택의 기준을 얻기 위한 갈피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대처 방안이란게 현실과 깊이 맞물릴수록 존재하기가 어렵지만 스스로 그 잠정적인 대안이나마 도출할 수 있도록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최소한의 이론적 틀마저 주지 않는 것은 다소 불친절한 게 아닌가 싶다. '고령화'가 지금 나에게도 닥쳐올 문제이기에 더욱 그렇다. 피어슨이 혹시라도 또 ‘고령화’에 대해 쓴다면 실제적 현실과 그것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적절히 안배하여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게끔 해서 독자들이 ‘고령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 할 수 있도록 좀 친절히 써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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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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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사전'을 읽으면 김승옥 작가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소설이 생각난다. 1964년 서슬퍼런 군부독재 시절 그렇게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에 짓눌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고 그저 익명화된 존재로 살던 주인공들이 남들은 모르는 오로지 자기만이 알고 있는 사실과 지식들을 들먹이며 애써 그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애달아하던 그 모습이 왠지 떠오른다. 그런데 왜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던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척 닮아보이는 '미셀 푸코'는 지식마저도 근대에 이르러서는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양산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지식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지식-권력이야말로 근대의 핵심적 권력이라고. 그렇게 그 권력은 사회 성원들이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체제 유지를 위해서 알아야 할 것만을 주입시켰고 근대에 이르러 자리잡게된 교육 체제는 성원들이 필요한 지식 보다는 체제가 필요한 지식을, 거기에 감겨든 진정한 의도는 슬쩍 가려둔 채, 상식이라는 시멘트까지 발라 더욱 견고한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 그렇게 의도 자체에 이미 체제 유지를 위해 유용한지의 여부가 중요했던 것 처럼 그렇게 양산되고 관리된 지식들 역시도 당연히 오로지 '쓸모' 여부에 의해 그 가치와 생존여부를 심판받게 되었다. 그것이 소위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이 태어나게 된 배경이었다. 우리는 자주 '잡다한 지식'이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을 할 때 우리는 분명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스스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세우고 당당하게 '잡다한 지식'들이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반대편에 있는 쓸모있는 지식이란 뭘까? 그것은 최소한 자본으로 교환가능한 지식을 말한다. 그렇게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고 나아가서는 자본의 교환으로 그 체제를 지속해야만 하는 자본주의 자체에 도움이 되는 그런 지식들 말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들의 위계질서란 오로지 현실적으로 쓸모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졌을 뿐 거기엔 어떠한 진리치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에 이르러 헤게모니를 쥐게 된 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게 했고 우리는 근대에 이르러 편재된 기성교육 덕택에 그러한 관점을 스스로 내면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체제는 본질적으로 지식의 확산을 싫어한다. 그래야 안정을 구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가 천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신부나 수사들만이 글을 알았기 때문이다. 왕을 비롯하여 그 어떤 귀족도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또한 마찬가지다. 인쇄술의 발달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혁명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체제든 스스로의 안정을 위해서는 지식을 관리하고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지식만 존치시키기 위하여 많은 지식들이 유통되는 것을 막는다. 그리고 그 유통의 억제를 위해서 아예 그 구성원들 마저도 체제가 싫어하는 지식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도록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원들을 아주 협소한 시야로만 지식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지속적인 검열은 그 어떤 체제든, 특히나 뒤가 구린 체제일 수록 필수적이다. 굳이 사회가 원하는 지식만 유통시키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회내의 구성원들이 항상적으로 편협한 지식에 대한 시각을 가지도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지식을 넘어 개인 스스로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 여기기 쉬운 취향마저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우리의 의식과 신체를 횡단하고 있는 지식이나 취향들은 모두 사회가 암암리에 새겨놓은 코드들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자면 그 코드로 부터 벗어난 정말 나만의 것이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 속의 네오는 사실 그리 먼 인물이 아닌 것이다. 이미 우리 자신이 네오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각이 비단 지식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은 그렇게 지식들의 체계적인 분류와 통제가 결국 윤리학적인 문제로 연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지식에 대한 체제의 유용성 기준이 그대로 사람에게까지 통용되는 것이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나누는 기준 역시도 지식과 똑같이 체제에 얼마나 쓸모있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되고 그렇게 정해진 기준은 지식과 마찬가지로 또 그렇게 성원 개인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오로지 '쓸모' 여부에 따라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아니한가. 이렇게 지식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국은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으로까지 연결된다. 때문에 내가 지식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쩌면 정말 중요한지 모른다. 유용성의 기준 따위는 던져버리고 그 모든 지식들을 다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렇게 타인들마저도 받아들이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 처럼 이렇게 '잡다한 지식'들이 가득차 있는 책이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어디가서 '사람의 입맞춤이 개미들이 얼굴을 맞대고 영양교환행위를 모방한 것'이며 '빈대들의 성(性)'이라든지,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의 얘기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사회가 쓸모없다며 한 켠으로 치워버린 지식, 혹은 묘지 속에다 봉인해버린 지식들이 이렇게 다시금 생명을 얻고 스스로를 내보일 기회를 만들어주는, 그래서 모든 지식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얼굴을 들이미는(이 책의 지식들이 최소한의 항목으로도 나눠지지 않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그 항목으로 나누고 체계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근대 지식-권력의 소행이라고 푸코는 말하지 않았던가! 항목의 부재와 무질서한 지식의 나열은 그 자체로 모든 지식이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책들이 난 정말 소중하다고 믿는다.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의 주인공들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사실과 지식으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고 했던 것 처럼 누군가가 내게 원했던 지식이 아니라 바로 내가 스스로 원하는 지식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이런 책들이 그동안 사회로 부터 오염되고 세뇌된 내 의식과 영혼을 조금은 정화화고 껍질을 벗겨서 보다 더 '본래적' 나로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그냥 몰라도 좋은 지식, 잡다한 지식 같은 건 없다. 그런 지식들의 위계질서를 만들고 분류하고 통제했던 근대 자체를 낳게 했던 지식들만 봐도 그렇다. 그 지식들은 당시 어떠한 지식들이었나? 흔히들 근대는 르네상스로 부터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르네상스를 낳게 한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연구는 당시 가장 쓸모없는 짓거리 중의 하나였다. 쾌쾌묵은 옛날 얘기들을 연구하는 건 정말 할 일없고 바보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지식, 잡다한 지식이 결국은 근대를 낳고 말았다. 여기서 보듯이 그 어떤 지식이든 쓸모없는 것은 없으며 그대로 다 소중하다. 다만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그 빛을 발휘하고 있지 못할 뿐. 그러니 '상상력 사전'에 나오는 그 어떤 지식들이라도 한 반 꼼꼼하게 읽으실 것을 권하고 싶다. 혹 누가 아는가? 그 중 어떤 것이 근대를 가져왔던 그 지식 처럼 또 시대를 들어올릴만한 지렛대가 되어줄 지... 

 ps.  더 하여 이러한 '쓸모없음'으로 치부되어 버려진 모든 지식들의 진정한 가치 회복을 위하여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도 꼭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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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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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 보기가 힘들어진 시절이다. '요즘'이라고 쓰려했으나 그 기간이 아주 오래된 것 같기에 '시절'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렇게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이 사라진 것을 보면서 한동안 품었던 의심이 하나 있었다. 늘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도시의 불빛들로 인해 이렇게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혹시 이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자본주의에서 발현된 제국주의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언제나 멈추지 않는 식욕과 모든 것을 자신의 수중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탐욕을 가진 자본주의가 오로지 자기만이 완결된 체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밤하늘의 별들을 모조리 '보이지 않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즉,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밤하늘의 별들은 단순히 낭만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매개물로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넘어선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가능성의 상징인 것이다. 체제의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이 체제의 외곽에서, 그렇게 바깥에서 다시금 그 체제를 돌이켜볼 수 있게 해 주는 존재로서의 '별들'이다. 고개만 올려 보면 늘 거기 있는 별들은 가장 손쉽게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하나의 '객체'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전해줄 수 있었다.  그건 '민족주의'를 만들면서까지 체제내의 노동력과 그로부터의 이윤을 끝없이 빨아들여야했을 자본주의로서는 그 '손쉬움' 때문에 가장 커다란 위협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흡혈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의 사람들이 오로지 이 체제가 '종국적인 것'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다. 마치 리처드 애덤스의 소설 '워터십 타운의 열 한마리의 토끼'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처럼 그 바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늘 토끼들을 식재료로 쓸 수 있듯이 말이다. 때문에 아마도, 어쩌면 틀림없이, 자본주의는 도시의 빛으로 장벽을 쳐서 별들의 존재를 가려버렸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가능성을 꿈꾸지 못하도록. 그렇게 자신의 삶이 다른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도록. 오로지 이 체제의 규율만이, 그 체제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삶의 방식의 전부라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이제 자연적으로 이 '바깥'을 사유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사라졌다. 도시는 끊임없이 빛으로, 콘크리트로 그러한 사유를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존재들을 퇴출시키고 있다.  해서 우리는 이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 처럼 활자를 통해 '그 너머' 혹은 '여기의 바깥'을 사유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다른 가능한 방법들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별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깥'을 사유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로지 '내부'에서만 가지고는 자신의 존재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냐면 내가 속한 이 내부란 것도 어떤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태어난 인위적인 구성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위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은 특정한 의도에 따라서 작위적으로 구성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들엔 그 의도에 봉사토록 하는 이데올로기가 은밀하지만 필연적으로 끼어든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그 내부에서 나 자신을 보려해도 이미 작동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밖에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누가 내게 씌워준 누군가의 시력에 맞춘 안경을 가지고 사물을 그리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것, 혹은 가지고 있는 욕망 등등은 순전히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인생을 우리는 어쩌면 오로지 남(라캉이 말하는 '대타자'와도 같은)의 욕망을 채우려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모습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에 '바깥'의 사유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진정한 모습은 '안'과 '바깥'을 모조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온전히 파악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근데, 이것은 다만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혹시 우리가 리처드 애덤스 소설에 나오는 '워터십 타운'에 살고 있는 토끼들이라면 이것은 그야말로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가 아닌가.  

   해서, 어쩌면 절박한 심정으로 그 사유의 계기를 찾고 싶은 요즘, 불현듯 한 권의 책이 '역병'처럼 번지둣 내게로 왔다. 그것이 바로 이 책, '사유의 악보'이다. 이 책은 인문서로 나왔지만 스스로 인문서가 되기를 거부한다. 아니 저자 자신의 서문이라 할 만한 서곡을 읽어보면 널리 이해되는 것도 거부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유일하게 이해할 '소수'를 위해 메뉴얼, 그렇게 그들을 위한 '악보'로 사용되기를 희망한다. 악보는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로 표현된 범위 안에서 모든 주관적인 해석들을 허용한다. 그건은 마치 정해진 한글의 자음과 모음의 갯수를 가지고 무수한 글자들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여기 내가 몇 개의 악보들처럼 기보하는 이러한 '사유'의 조각들은 그것들을 서로 맞추고 조율하여 새롭게 연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펼쳐져있고 흩뿌려져 있다.(p.8)

   그렇게 이 책은 널리 다양한 해석을 권장하고 새롭게 다양하게 창출된 의미들이 널리 창궐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면서도 종국엔 보이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스스로 그 자취를 감추려는 것일까? 이건 다음의 글에서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글들은 어쩌면 오히려 소위 인문학적 사유나 철학적 깊이의 저 진부하고도 암묵적인 강요에 대한 강한 의문, 곧 우리에게 사유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누군가가 우리에게 원하는 방식으로? - 자들의 저 역겨운 교훈과 무의식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어떻게 사유하고 전복해야 하는가 하는 극단적으로 실천적인 질문으로 부터 탄생한 기형과 잡종의 것들이다.(p.7) 

    여기에서 보듯이 이 책 자체가 그러한 사유의 강요로 부터 이탈하기 위한 실천적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근원이 이러했으니, 어떻게 독자에게 그러한 것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 책은 스스로,관람되기를 원하는 일종의 유물전시장에 그치기를 원한다. 그저 관람객들이 와서 살펴보고 개인적 감상만을 가지고 갈 뿐인 그런 전시장. 그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볼 수 있도록 늘어놓을 뿐. 혹 개안이라도 하는 관람객이 있다면 진심으로 행복해 하면서...  나는 여기서 일부러 '유물전시장'이란 비유를 썼는데 그것은 다음의 말 때문이다.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사유의 프로그램'이 필요하며 그 새로운 프로그램은 '새로운 사유의 가동'으로부터 출발된다는, 일견 신선해보이지만 또한 지극히 오래된 어떤 믿음, 내가 나의 글쓰기로써 도전하고 도발하고 싶었던 믿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  오히려 이 글들은 어쩌면 그 '새로움'이라는 자신만만하고 희망찬 환상에 도전하기 위해, 혹은  저' 시대' 또는 '세대'라고 하는 어떤 구성된 집단적 주체와 인위적 시공간에 대해 오히려 어떤 도발적 도박과 내재적 내기를 걸기 위해 반대로 어떤 낡음으로 부터, 어떤 폐허로부터, 어떤 잔해와 잔재로부터 출발한다. 이 글들은 탈근대로의 여정을 위해 근대성의 유적과 지층을 파헤치고 이론 이후로의 이행을 위해 이론의 잔여와 여백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글들을 '사유'의 조각들이 아니라 사유의 '조각들'로 명명하는 이유이다. 이 글들은 기형과 잡종의 조각난 육체들이다.(p.8)

   그렇게 이 책은 일부러 과거의 잔재들을 훑는다. 왜냐하면 이 책이 의문시하는 것은 과거와 새로움을 나누는 그 '사고' 자체이기 때문이다. '3악장, 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 알튀세르가 했던 것, 혹은 자크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분배' 나 바디우의 '비미학'에서 했던 것 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게 혹은 전형적으로 남아있는 모든 사유의 체계들을 의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의 책이 일관된 논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통념에도 반대한다. 그렇게 스스로 마땅히 기형과 잡종의 파편이 된다. 

   이 책은 조각난 육체들이다. 그렇게 어쩌면 의도적으로 아무런 접점을 만들지 않는다.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에서 종곡, 중독에의 권유까지, 그렇게 저자 자신의 말대로 이 책은 그 어떤 순서로 읽어도 무방하리 만큼  내용적으로 독립적이다. 게다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여러가지 글쓰기가 변주되고 있다. 특히나 '7악장, 불가능한 대화를 위한 자동번역기' 같은 경우 '거리에 붙어 있던 한 벽보: 옮길 수 없는 것을 옮겨 적기'에서의 뛰어쓰기의 실종이나 '발전기를 돌릴수록 더 어두워지는 밤: 헤어스탈일에 관한 자기 성찰의 단상'의 마침표의 생략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그렇게 이 책들은 '자고로, 책은, 글은 이래 저래야 한다는'등의 통념들을 한없이 미끄러지며 빠져나간다. 그래서 얼른 이 책들은 아이 앞에 무수히 쏟아져 있는 레고 블럭과도 같아 보인다. 아마도 아이는 그 무수한 조각들 앞에서 당황할 터이지만 언젠가는 - 왜냐면 아무리 무수한 조각이라 하더라도 그 조각을 이어붙이고 싶은 욕망을 참기가 힘드므로. '테트리스'게임이 정확히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듯이 우리 인간이란 아무래도 혼돈 보다는 질서를 좋아하므로 - 하나하나 조각을 이어붙이고 연결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렇게 결국은 나도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을 물론 만들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오독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어차피 오독의 가능성을 더 원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상관없지 않을까. 

   내가 짓고 있는 혹은 연주하고 있는 어떤 조형이나 선율의 바탕은 하나의 느낌인데 이 책만큼 집요하게 그 어디서든 '불가능성'을 추구하는 책이 있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혼돈 보다는 질서를 원하는데, 이 책은 오히려 계속적으로 질서에다 균열을 만들고 가능성의 영역을 불가능성의 구멍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블랙홀'. 

    1악장,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와 2악장 '페티시즘과 불가능성의 윤리'에서는 윤리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하고 3악장,'미학으로 (재)생산되지 않는 미학'에서는 알튀세의 연극 비평을 중심으로 미학 역시 그 진정성은 불가능성의 영역 위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4악장,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에서는 야구를 소재로 한 문학을 중심으로 책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서 시작해 이사만루 상황에서 무타무주로 끝내는 방법의 불가능성을 지나 근대비평에의 불가능성에로까지 나아간다. 이 뒤로도 우리는 그 어디서든 끊임없이 불가능성의 영역들을 볼 수 있는데, 스스로 기형과 잡종의 조각들로 자처하는 이 책이 왜 이다지도 '불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호기심이 나 스스로 블록 짓기를 감행하게 했는데 결국 내가 만들어낸 것은 이 불가능성이 내포하고 있는 저의가 혹시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그 자신이 언급했던 것 처럼, 혹시  모조리 전복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1악장에서 그가 바타유를 끌어와 폭력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 때 우리가 모든 사회 문제를 소통의 부재에서 찾았듯이 그렇게 소통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여겼던 우리의 생각을 전복시키기 위해서였고 2악장에서 굳이 페티시즘을 이끌고 오는 것도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모든 가치들 역시도 사실은 우리가 그 가치들을 맹목적인 페티시즘에 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었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바타유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소통이란 타자를 우리의 입장에 맞도로 바꾸는 폭력적 훼손에 다름 아니며 2악장에서 윤리의 가능조건으로 말하고 있는 페티시즘적 부인도 사실은 우리가 이미 긍정하고 있는 가치들이 관념적인 것들임을 겨냥하고 직립보행이나 바타유의 '유물론'에서 이끌어나온 새로인 유물론적 윤리들을 정초하기 위한 희생물로써 쏘는 총알인 것이다.(즉, 여기서 페티시즘 부인이 기능하는 것은 지금 이 책이 서론처럼 제시한 유물론적 윤리학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불가능성'으로 우리가 지금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혹은 긍정하고 있는 것을 의문시하고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즉, 이 불가능성이 진정으로 의미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가능성'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그것을 최대한 가능성의 범주에 넣지 않기 위해서이다. 즉, 어떤 새로운 출발점을 찾게 되더라도 그것을 영원히 고정된 한 점이 아닌 우연히 발견된 한 점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뭔가 하나를 쥔 것 같더라도 어느새 아래로 새어버리는 모래처럼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게 '불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끊임없이 독자를 헤엄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 파도를 일으킨다. 사유의 헤엄치기를 그만둔다면 우리는 익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해답자'이기 보다는 영원히 '질문자'로 남기를 원하기 때문에 뭔가 하나의 고정된 해답이란 사유의 죽음과도 같다. 불가능성을 늘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건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저 원시시대 번갯불만 번쩍여도 신에게 기도하던 원시인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서의 겸손이란 어떤 권위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나는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 어느 방향으로든 추구할 뿐...'이라는 정도의 겸손이다.  근데 이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간다는 것에서 문득 나는 '번역자인 그'를 느끼게 된다. 

    불가능성과 더불어 번역은 이 책의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다. 여기서 번역은 굳이 다른 나라말을 옮기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 말을 자기네 말로 바꾸는 것이 번역인 것처럼 다른 이의 사유를 자기의 사유로 소화하는 것도 일종의 번역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이 책 역시도 그 모두가 아주 많은 책들에 대한 독서 기록인 셈이며 그 많은 책들을 저자가 서로 합종연횡시켜여 재창출한 사유의 전시장인 셈이다. 그렇게 번역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한 글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에 관하여 본격적으로 음미하는 9악장, '랑시에르의 번역을 둘러싸고'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한다.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게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p.368)

     이 '진심을 다하는 것'. 이것이 항상 불가능성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자의 겸손이지 않을까. 

   아마도 이 겸손 때문에 그렇게 그 진심을 다하기 때문에 그의 문체는 상당히 길고 때로는 무수한 반문들이 부기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문체는 특이하리만큼 길다. 길게 길게 이어지는 문체들은 '악보'라는 제목에다 '작곡가'라는 그의 직업 때문에 어쩐지 선율로 들릴 지경이다. 내게는 문장이라기 보다는 글의 흐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왜 이렇게 단정적이어도 좋을 문장에 굳이 길게 길게 그 사유의 흔적들을 보태는 것일까? 거기다 보통의 인문서들은 스스로 객관적이기 위해 저자를 굳이 감추려 드는데 그는 자주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주 '일독을 권한다.'라는 말을 보게 된다. 서곡에서 이 책이 역병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들을 감염시키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왜 이렇게 드러내는가?     

   왜 소설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며, 왜 비평가의 모든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일 수 밖에 없는가? (...) 소설가와 비평가라는 정체성 개념에 대한 이런 종류의 보편화에는 숙명적인 어떤 것이 있다. 이러한 숙명에 있어서는 저 두 정체성이 각기 자신만의 것으로 품고 있는 진실성의 형식만이 문제가 된다. 소설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이며 반면 비평가의 정체성이 갖는 진실성이란 자신의 이름이 아닌 것에 기대어 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형식'인 것, 말하자면 이것이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이다. (p.483)

    나는 이 말을 과연 저자가 부정적으로 했는지 긍정적으로 했는지 아직 알 수가 없다. 알려고 몇번을 읽었는데도 정확한 의도를 짚어낼 수 없었다. 아무튼 아마도 그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서 보듯이 근대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반발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이 반발만을 말하고 싶은게 아니다. 결국 이것이 저술에 대한 일종의 한 태도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5악장, '테제들의 역사를 위한 현악사중주'에서 글렌 굴드에게서 보여지듯이 말이다.  

   이 문장 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이것을 '피아노를 실현하려면'이라는 구절이다. (...) 그는 결국 언어적 진술이 아니라 피아노로 '실연'하고 '실현'해야만 하는 것이다.(p.195)

   아마도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 역시도 글렌 굴드가 그랬던 것 처럼 이 책을 통해 스스로 사유를 실연했던 것은 아닐런지. 그러니까 결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사유'를 보여주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하는 그의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그래서 문체는 끊임없이 자문과 질문이 혼용되어 이어지고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 그토록 이채로운 빛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바깥'을 사유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부재'를 사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재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음으로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든 사유들은 내가 확실히 딛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고 궁극에 가서는 허물어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나가 아니고 내가 딛고 서 있던 것으로 구성되어진 인위적인 인격체라고 한다면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그 가상현실을 빠져나오려고 자발적으로 빨간약을 먹었듯이 그 인위적으로 조합된 환경과 인격이라는 '나'에서 빠져나와 '근원의 나', '바깥의 나', 그렇게 '부재하는 나'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생기지 않을까? 사실 부재란 것도 알고보면 그저 부재인 것 만은 아니다. 부재는 오히려 바깥에서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재의 성격은 오히려 음악에서 더 두드러진다. 사실 음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음과 음 사이의 '부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악보에 음표와 음표 사이 비어있는 공간이 있듯이. 때문에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존재 그 자체를 제대로 사유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바로 이런 사유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책이다. 적극적으로 그 불가능성을 안고 가려는 책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 많은 불가능성의 현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앞서도 말했듯 이제 새로이 자신만의 사유를 이어가기 위한 단초에 불과하다. 진정한 사유의 연주는 오로지 독자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더하여 여기서는 이 불가능성을 사유하는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어렵고 난해하지만 꾸준히 숙독을 하면 길고 불가하해하고 파편적인 맥락들 위로 이 모든 사유를 이어감에 있어서 진심을 다하고 있는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그 역시 이 책을 통해 하나의 연주를 하고 있음을 듣게 된다. 나는 기나긴 그의 문장들이 일종의 선율 같았다. 시드니 루멧의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음대 교수가 강의실에 들아와 베토벤의 소나타와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을 들려주며 왜 마돈나의 노래가 더 신나게 들리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정답은 리듬. 팝과는 달리 클래식에는 리듬이 없기 때문에 난해하고 지루한 것이라고. 그처럼 아마도 이렇게 긴 선율로만 이루어진 연주이기에 난해하게 들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클래식도 처음만 어렵지 자주 듣고 또 공부도 하면 언젠가는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클래식이 애저녁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 어떨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바깥' '부재' '불가능성'을 사유해야 한다면  이 책을 곁에 두고 가끔씩 클래식 CD를 듣듯이 펼쳐보는 것도. 아니 읽기가 어렵다면 그냥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른다. 이 책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성'을 웅변하고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인문학에 대한 열망이 불타올랐다. 특히 직립보행이나 '자코토의 고유명' 그리고 '파국의 해석학'은 너무도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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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는 내내 설레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습니다. 저는 헤르메스님의 이 글 덕분에 한 사람의 저자로서 온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혹은,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불가능성을 넘어 온전히 이해받는다는 것의 어떤 다른 '가능성', 다른 변주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요?

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과 의의를 이렇게 잘 정리하고 평가한 글은, 제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이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저는 사실 제 책에 대한 일종의 '매뉴얼'적인 성격의 작은 글을 하나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미 헤르메스님께서 가장 훌륭한 '매뉴얼'을, 그것도 가장 훌륭한 또 다른 변주곡을 써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는 내내 매 문단들마다 소리 내어 감탄사를 연발했고, 글을 다 읽은 후에는 잔잔한 흥분과 감동이 몰려 왔습니다. 그 점에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여 저 소설가와 비평가의 근대문학적 정체성에 대한 제 개인적 정리의 의미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그 안에는 어떤 부정성의 느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저로서는 그 자체가 자기고백적인 발언이었다는 점을, 그러므로 그러한 정리 안에는 긍정적인 단정의 요소가 다분히 내재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그 부분에 관한 헤르메스님의 분석을 읽었을 때 저는 제가 피분석자가 된 진료실에서 제 무의식의 일단을 발견한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로 이것이 '온전히 이해되었다는' 느낌(비록 이것이 하나의 '환상'일지라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아무튼 이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제게는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어떤 행복 같은 경험이었음을, 역시나 자기고백적으로, 그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을 따라 읽어주신 섬세한 분석에, 때로는 그 결이 담고 있는 것 이상을 추출하면서 새롭게 내주신 독해의 길에, 새삼 깊이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ICE-9 2011-05-0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자이신 람혼님께서 이렇게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거기다 부족한 글에 이렇게 과분한 칭찬까지 해주셔서 더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제가 의문으로 가졌던 점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람혼님의 책을 읽으면서 새로이 깨닫게 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인문학 읽기에 대한 열망도 생겨났구요. 오히려 이런 각성의 기회를 주신 람혼님께 제가 되려 감사를 드려야 겠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들로 더더욱 많이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