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박병화 옮김 / 로도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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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 영국의 화가 조셉 말러드 윌리엄 터너는 '비 증기 그리고 속도'라는 그림을 발표했다. 그의 나이 70세에 그린 이 그림은 기차 여행중 기차의 빠른 속도로 인해 유리창에 그려지는 빗방울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 속도감으로 인해 달라지는 세계의 인상을 이렇게 화폭에 옮겨 놓은 것이었다.

 

 터너의 그림에서 보듯 근대에 들어와 놀랄만큼 빨라진 속도는 사람들에게 경이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체험이었고 단시간에 보다 멀리까지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그들의 세계를 보다 확장시켰으므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그 때부터 사람들은 빠른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새삼 시간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루 걸릴 거리를 한 시간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은 시간 단위들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사람들의 생활은 이제 하루, 반나절 이런 단위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빨라진 속도에 맞춰 시간 혹은 분 더 나아가서는 초 단위까지 나뉘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 우리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시간 테이블은 근대에 들어와 나타나게 된 일종의 발명품이었고 그것을 정형화시킨 이는 바로 미국의 프레데릭 테일러였다. 테일러는 1910년대 당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던 생산 공정에 표준화를 가져온 이로 유명하다. 그것이 가장 최초의 정형화된 일련의 공정이었으므로 '테일러주의' 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테일러는 생산 공정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공정을 세부적으로 단계를 나누어 그 순서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단순 반복 작업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숙련성'을 노동자에게서 박탈하였고 그래서 보다 쉽게 노동자들을 교체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무튼 테일러는 그 단순 반복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분단위까지 잘게 나누어 시간표를 짰는데 바로 그러한 시간의 분할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간적 생활양식의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원인과 결과란 종종 되먹임의 과정이다. 원인이 촉발시킨 결과가 다시 그 원인을 가속화시키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분과 초 단위까지 관리되기에 이르자 생활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시간 여행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것도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도시로 왔을 때 반복적으로 보여지는 장면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온 여행자가 자신의 시대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의 행렬을 놀란 표정으로 보게 되는 장면이다. 왜 영화들은 자주 이것을 묘사하는가? 바로 이 속도의 체험, 가속화된 시간의 체험이 과거의 사람에게 무엇보다 시간적 단절의 느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의 시간 리듬이란 근대와는 달라서 보다 더 긴 시간 단위 그러니까 하루나 한달 어쩌면 계절을 주기로 흘러갔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가속화'란 어디까지나 근대에 의해 창출된 이른바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각을 우리는 독일의 다큐멘터리 작가 플로리안 오피츠의 '슬로우'란 책에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시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경향이 점점 심해지는 이유는 요즘 부쩍 늘어난 시간 관리 상담가라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시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잡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아끼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 문제를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보는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습니다.(P.89)

 

 

 

 

 오피츠의 '슬로우'도 이와 같이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속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 아니 이 책 자체가 오피츠가 살면서 가지게 된 하나의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 의문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든 한 번은 떠올려 보았을 그런 의문이다. 즉 '왜 이렇게 시간에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걸까?' '시간을 벌려 바쁘게 살아가는데도 휴식은 커녕 왜 더 바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게 지내야 하는 걸까? 대체 여기에 해결책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다.

 

 기술적 발달로 절약한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는 간단하게 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손편지 하나 쓰는 것보다 이메일을 작성하는 것이 두 배는 빠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편지 10통 쓰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면 이제는 30분이면 이메일을 10개 쓸 수 있죠. 그런 30분의 여유가 생깁니다. (...)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메일을 10개가 아니라 50개 60개씩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린 셈이지요. (...) 우리는 이메일 기술의 발달로 시간을 벌었지만 그만큼 읽고 처리해야 할 뉴스도 많아졌기 때문에 이를 도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신기술의 발달로 얻는시간 보다 뉴스의 양이 훨씬 더 빨리 늘어나기 때문입니다.(P. 73~74) 

 

 

 그렇게 단순히 오피츠 개인의 의문이란 것을 넘어서 어쩌면 사회 보편적 의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의문들을 말 그대로 오피츠 스스로 풀어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슬로우'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기 때문에 인터뷰가 중심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파문처럼 보다 확장되는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장 '우리는 왜 불안하게 쫓기며 살까?'가 개인 차원의 시간 관리 문제를 다뤄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밝혀낸다면 2장 '속도와 경쟁에 집착하는 세상'은 거기서 보다 확장되어서 사회적 차원을 다루는데 즉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사회가 이미 구조적으로 가속화 사회이기 때문임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논리가 시간을 부족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시간은 곧 돈이고 돈은 늘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불가능한 겁니다. 우리를 몰아세우는 것은 비단 자본주의나 경제만은 아닙니다. 경쟁 논리도 한 몫 거들죠. (...) 바로 이 경쟁 논리가 이 사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이 경쟁 논리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언제가는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 세상이 조금씩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우리도 그에 맞춰 빨라져야 한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빨라진 속도는 이제 활동의 자유를 가져다주지도 못하고 자기 발전에 대한 희망도 심어주지 못합니다. 압박은 점점 심해지는데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없지요. (..) 우리는 속도를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빨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P.112 ~ 113) 

 

그리고 3장 '행복과 속도, 그 대안을 찾아서'는 이미 구조로 자리잡은 가속화 사회에서 과연 그 속도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할 수 있는 진정한 여유를 가질 수 있는지, 그 대안을 탐색한다. 이 모든 과정은 오피츠 개인의 체험으로 접속되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과 함께 보다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누구나 한번쯤 해 보았을 의문에다가 그 과정이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의 해답 찾기 과정이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 않게 그리고 마치 내 문제 처럼 그 여정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그래서 오피츠의 고민과 더불어 첫 페이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앞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책이다. 거기다 대답의 추구 대부분이 인터뷰로 이루어져 있는지라 각 사람들의 체험을 통하여 보다 더 생생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다.

 

  이 책은 특정한 대안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사람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주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그들의 육성으로 생생한 체험들을 들으면서 독자 자신이 자기에게 맞는 대안들을 찾아 가도록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이 꼭 건네는 충고는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이 얼마든지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는 과욕을 부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바로 그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식의 내겐 한계가 없다는 과신이 속도의 강박을 불러온다고 한다. 그래서 엄연히 존재하는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은 신체와 정신의 피로만 가중시킨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진정한 '슬로우 라이프'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기 절제'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겸허히 내 한계를 인정하고 거기에 맞춰 삶을 꾸려나가는 것. 그렇게 스스로 제동 장치를 두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한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단 이것은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사회 역시도 이러한 제동 장치가 필요한데, 오늘의 거대한 위기를 초래한 신 자유주의가 바로 그러한 제동장치가 없는 체제였기 때문에 이 '자기 한계의 긍정에서 나오는 절제'라는 제동 장치는 정말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가속화는 장기적인 안정이 보장될 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안정은 다시 제동 장치의 기능이 원활할 때 보장되지요. 최근 수 십년간 지속되는 신자유주의는 이 제동장치를 체계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안전도 사라졌죠. 신자유주의 정치는 처음부터 자본의 흐름뿐 아니라 교육제도와 노동시장에서도 제동장치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동 효과가 있거나 유연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 그리고 자본이나 상품, 투자의 흐름을 방해하는 모두 제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P. 132)

 

 '슬로우'는 한번쯤 삶이 가진 바쁜 속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느림'을 추구하는 책이 아니라 '속도'라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책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지는 속도의 강박은 삶의 충실에 대한 강박과 맞닿아 있었다. 즉 우리가 그렇게 분초를 다투며 바쁘게 시간을 메우는 것은 그것이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어'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속도의 집착이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주로 성공한 엘리트들의 삶은 자주 회사의 복도를 부단히 이동하는 가운데 정신없이 말을 주고 받는 장면으로 묘사되곤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충실은 삶이 가진 시간의 아주 작은 단위조차 허투르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슬로우'는 그것이 일종의 강박이며 오해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당신이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느 만큼의 속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어느 만큼의 속도가 필요한가? 무엇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입니다.(p. 137)

 

 말하자면 '슬로우'는 바람직한 삶을 위해 당신으로 하여금 제대로 질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해답은 늘 제대로 된 질문이 있는 가운데 있어왔다는 건 불변의 진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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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없는 사회 -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들이 만드는 현실 속 유토피아
필 주커먼 지음, 김승욱 옮김 / 마음산책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어떤 책은 마치 내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내가 평소 궁금해왔던 그 문제에 대해 풀어놓을 때가 있다. 바로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란 책이 그렇다. 이 책은 기독교든 불교든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번쯤은 해 보았을 바로 그 의문으로 다시금 인도한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그것을 믿는 자들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이 보여 주는 괴리를 보았을 때 가지게 되는 의문 말이다. 그러니까 종교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누구보다 윤리적이고 자비로로워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오히려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도대체 종교라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 주커먼의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의문에 천착하는 책이다. 단적으로 그는 가장 종교적인 국가 미국과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인 덴마크와 스웨덴이 보여주는 모순된 모습을 통해 이것을 풀어나간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가장 종교적인 국가인 미국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가장 비종교적인 국가 덴마크와 스웨덴이 가장 윤리적이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에 대해서 보았던 그러한 괴리가 이제는 국가로 확장된 것 같은 모습인데 이에 대한  필 주커먼의 말을 다소 길지만 직접 인용해 본다.

 

 미국은 확실히 서구 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다. 그리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확실히 서구민주주의국가 가운데 가장 비종교적인 나라다. 그렇다면 신앙심을 자랑스레 내보이는 미국에 총이 범람하고 형벌이 가혹하고 매주 사형선고가 이루어지고 약물 중독자들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수많은 어린이와 임산부가 기본적인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수많은 노인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저임금과 과로에 시달리고 정신병 환자들은 길거리에 방치돼 있고 선진국 중 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비종교적이 덴마크와 스웨덴, 대부분의 미국인이 보면 거의 '하느님이 없다'고 까지 할 수 있는 이 두 나라에서는 어디서도 총이 보이지 않고 형벌 체계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인정과 자비가 넘쳐서 재활에 중점을 두고 있고 사형은 이미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약물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나 심리적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져 보살핌을 받고 모든 사람이 훌륭한 보건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노인들도 세계 최고의 보살핌을 받고 사회복지사들은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일을 맡고 정신병 환자들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빈곤율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나는 어떻게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건지 궁금했다.(p.64)

 

 

 

 '신 없는 사회'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속화가 진전된 국가가 더 윤리적이고 행복한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 의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평소 느끼는 의문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의문엔 또 한가지가 더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보여지는 현실 그대로 딱히 종교가 제대로 살게 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하게 만들지도 못한다면 과연 우리에게 있어 종교가 가지는 의미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가 필 주커먼이 이 책의 서문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종교 과잉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종교로 넘쳐나는 시대이기 때문에 꼭 한번은 음미해 보아야 할 동시대적 물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그 주요한 방법으로 필 주커먼은 면접법을 가져 온다. 대표적인 사회과학연구 방법중 하나이기도 한 면접법은 일종의 인터뷰 같은 것으로 연구 대상자와 직접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개인의 가장 내밀한 부분이라 할 수있는 '종교에 대한 가치관(이것은 또한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도 직접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방법은 적절해 보인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종교사회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진면목을 보여준 바 있었던 막스 베버 역시도 종교사회학에 있어 이러한 개인적인 접근 방법이야말로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한 바 있다.

 

내가 사회학자가 된 주된 이유는... 아직까지도 우리 학문을 둘러싸고 있는 집합적 개념이란 유령을 추방하기 위해서였다. 사회학이란 학문 자체는 단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따로 따로 분리된 개인들의 행위에서부터만 연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엄격히 '개인주의적' 연구방법을 채용해야만 한다.

 

- 막스 베버가 그의 친구 리이프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이렇게 필 주커먼은 많은 수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속화가 진전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종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종교가 없으면 삶과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왜 그들이 지금처럼 신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멀어진 상태에서의 삶은 또 어떠한지 바로 그 심층적인 모습을 인터뷰 대상자들의 생생한 경험까지 더해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개개인의 특수 사실에서 일반적인 대답을 끌어내는 일종의 귀납법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그렇게하여 결국 필 주커먼은 덴마크와 스웨덴이 '세속주의 국가'가 된 이유를 찾아낸다. 이유가 모두 일곱개다.

 

 각각을 살펴보면, 그 하나는 게으른 독점이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루터교가 국교가 되어 있어 그 스스로 확장할 필요를 못 느껴 구태어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킬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종교는 특히 사회에 대해 안전의 확신이 없는 가운데 번성하게 되는데 아시다시피 덴마크와 스웨덴을 세계 최고의 안정된 사회이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여성들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가 캘럼 브라운에 의하면 남성과 아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만든 것은 순전히 여성들 덕분이라고 한다. 즉 전업 주부인 여성들이 주일마다 남편들과 아이들을 거의 반 강제적으로 종교 행위에 참여시키기 때문에 종교가 번성하는 것을 도왔는데 지금의 덴마크와 스웨덴은 여성들이 대부분 직업 여성들이라 그럴 여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문화적 방어욕구의 결여라 말한다. 그러니까 문화적, 종교적 독점이 위협을 받으면 바로 그 종교적 독점이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역할을 하여 저항의 중심 기관이 되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한 필요를 불러일으켜 왔는데 덴마크와 스웨덴은 단일민족국가라서 굳이 종교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발달이다. 덴마크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가장 먼저 시행한 나라이기도 하다. 시작이 무려 1814년이다. 그만큼 교육 수준이 높다. 통계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종교성이 약해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그들의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한 사회민주주의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동안 공립교육에서 특정 종교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 접할 기회를 많이 상실하는 바람에 종교성이 약화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원래 종교가 유포되었던 역사적 경험 또한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모두 부족장과 왕들이 자신들의 정략적인 이유로 종교를 유포시켰다. 즉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위로 부터 강제적으로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애초 부터 존재한 이런 경험 때문에 종교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가질 수 없어 지금의 종교성 약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상의 일곱가지 이유는 그러나 단순히 덴마크와 스웨덴의 종교성 약화를 나타내는 이유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 이유들은 더 나아가 가장 종교적인 국가라는 미국이 왜 그렇게 강한 종교성을 나타낼 수 밖에 없었는지 바로 그 이유를 드러내기도 한다. 즉 미국이 그렇게 가장 종교적인 국가가 된 데에는 우선 역사적인 원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과거에 종교가 어떻게 유포되었는지에 대한 차이를 말한다. 즉 덴마크와 스웨덴이 위로 부터 '상명하달' 식으로 유포되었던 것과 달리 미국은 처음부터 청교도 신자들이 이주해와서 건국하게 된 것이므로 민중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확립했다. 바로 그 위로 부터냐 아니면 아래에서 부터냐 때문에 종교성마저 차이를 가져왔다고 한다. 거기다 지금 미국이 처한 사회적 원인들 역시도 한 몫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이자 그렇게 인종적으로 계급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양한 성원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단일 성원, 단일 국가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종교에 대한 욕구가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교가 무엇보다 정체성 확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성원들이 뒤섞여 살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환경이 정체성 확보의 욕구를 낳았고 그 욕구를 종교를 통해서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구조적 요인도 있다. 일단 미국은 정교 분리의 국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덴마크와 스웨덴 처럼 '게으른 독점'이 성립할 수 없다. 할 수 없이 교회는 자유경쟁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대중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발할 수 있는 온갖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후반의 모르텐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미국 교회를 다니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또한 한국 교회가 번성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다 미국 사회가 아주 불안하기 때문이다. 안전의 욕구가 바로 종교의 욕구로 나타난다는 건 앞서도 언급했다.

 

 그런데 이렇게 미국과 덴마크와 스웨덴에 상이한 종교성의 차이를 가져와 버린 그 이유들을 살피다 보면 종교가 지금 사회에서 무슨 의미마저 알 수 있게 된다. 아마도 필 주커먼은 그래서 이러한 공통된 원인들을 중심으로 비교 접근법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종교성의 차이가 바로 역사나 사회 환경 같은 것들에서 유래된 것임을 밝혀 종교가 자발적 생성이 아니요 외부적 요건들로 인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래서 종교가 바로 문화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 말이다. 즉 필 주커먼은 미국과 덴마크, 스웨덴의 비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종교가 가지는 문화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전통적인 종교가 반드시 신자들을 위한 깊은 신학적 확신으로 가득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신자들이 반드시 독실하고 경건하게 종교를 믿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최후에 문화적 정체성의 가장 깊은 곳에 남아있는 종교가 전통적인 종교다.

 - 한스 라운 이베르센 - (p.252)

 

 

 종교가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종교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내내 확보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체성 확인의 통로로 문화로서의 종교가 기능하는 것이다. 즉 종교는 굳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며 더구나 자신의 정체성만 내내 확보해 줄 수 있으면 오로지 종교 활동만으로도 유지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필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문화적 종교'란,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적 전통에 일체감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 안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진심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확연히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현상이다. (p. 261)

 

 

  그런데 이는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이라는 그렇게 종교에 있어 가장 알맹이는 빠지고 오로지 껍데기인 행위만이 남아 그것이 전부가 된 현상을 말할 수도 있다. 즉 신앙이 아니라 형식이 전부가 되어버린 종교이다. 그런데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종교 행사만 있어도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정체성을 내내 확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하고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 섞이어 안정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종교 행위만으로도 충분해서 그런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확인을 통한 소속감과 안정감이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꼭 종교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는 그 두가지가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것 하나가 무색해지는 바람에 결국 남게 된 한가지를 의미하는 것일까? 필 주커면은 이성의 발달과 합리화의 진전이 결국은 초월자의 믿음을 희석시키고 그렇게 남게되어 버린 기능으로 여기는데 그래서 합리화가 가장 진전되었고 또한 미국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겪지 않아도 되는 스웨덴이나 덴마크에서는 종교가 그 힘을 잃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면 미국이나 한국이 보여주는, 모르텐의 말처럼 '광신'에 가까운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가 남는다. 그러니까 미국이나 우리나라가 합리화가 많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문화적 종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사실은 종교 자체가 문화적 종교이고 그래서 미국과 우리 나라 역시 이 경향에 깊숙히 함몰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궁금한 것이다. 필 주커먼은 물론 전자 쪽이다. 왜냐하면 결론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아마도 유대인과 덴마크인, 스웨덴인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p.276)

 

 내가 문화적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필 주커먼의 이와 같은 말은 좀 수정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종교란 그같은 정체성 확보를 위한 문화적 수단 밖에는 없었으며 덴마크와 스웨덴은 문화적 종교가 가장 강렬하게 나타난 곳이 아니라 사실은 종교 자체의 의미가 희석화되어 버린 곳이 아닐까 싶다. 말하자면 종교의 사르갓소 같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필 주커먼이 말하는 문화적 종교의 핵심은 신앙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신앙(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적 종교'는 오로지 행위만이 내재된 신앙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미국 같은 경우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공직자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요식행위의 집착이 바로 문화적 종교를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 이러한 문화적 종교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는 어떤 장로는 조의금 때문에 교회 장례식으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를 억지로 자기가 있는 교회로 옮겨오게 한 분도 계시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그렇다면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선진국 선교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어떨까?

 

 그러니까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다니는 교회에서 프랑스로 선교 활동을 가야할지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사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기독교를 믿어왔고 사회적 성숙도도 우리보다 앞서는 나라에 왜 굳이 선교를 가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반대를 천명했다. 하지만 곧 찬성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반박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선교를 가야하는 주된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했다. 즉 프랑스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교회의 수 또한 날로 감소 추세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프랑스의 신앙이 죽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그렇기에 우리의 선교로 식어버린 이들의 믿음에 다시 불을 지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도 드러나듯이 한국 교회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교회 출석, 주일 성수, 헌금, 기도와 같은 요식 행위에 집착한다. 아마도 기복 신앙의 '치성'의 개념과 관련되어 더 강조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바로 그렇게 보이는 행위를 통해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가 아주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프랑스든 독일이든 무모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선교를 감행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보이는 행위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텐은 미국은 자신의 신앙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회라고도 꼬집었는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베버는 아주 좋은 대답을 해주고 있다. 베버는 바로 여기에서 종교에 대한 갈망이 비롯된다고 했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 좀처럼 만족하지 못한다. 그것 이상으로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는 그가 자신의 행운을 마땅히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음을 - 특히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보다 운이 덜 좋은 사람들도 단지 그들이 응당 치뤄야 될 대가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라는 믿음이 인정되기를 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종교의 역할이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역할을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정체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즉 자기는 남보다 낫다는 확인을 신앙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자꾸만 대형화되고 화려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정작 실생활에서 종교적 명령을 실천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요식 행위는 오로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필 주커만이 말한 '문화적 종교'의 진짜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과도 같은 요식 행위의 집착은 분명 문화적 종교의 현상 중 하나이며 그 가장 부작용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걸 마르틴 부버의 말로 표현해 보자면, 철학자이자 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를 만나고 '너'를 '너'로 받아들이는 길 이외에 '나'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리고 유한한 '너' 속의 무한한 '너'의 만남과 수용 없이는 '너'를 만나며 받아들일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관계는 계속적으로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변형되는 존재의 비극적 운명 아래 놓이게 된다.

 

  문화적 종교란 종교가 바로 부버가 말했던 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부버가 말하길 '나와 그것'와 관계가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존재론적 관심을 잃고 단순히 인식적 관심 그리고 행위적 관심 밖에는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렇게 '그것'은 다만 대상일 뿐이며 그것도 하느님으로 인해 확장되는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그냥 획일적인 '나'로 항구적으로 있게 하는 도구적 의미 밖에는 남지 않는다. 현재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나와 그것'의 관계가 가장 극단적으로 나아간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종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화적 종교는 어떻게 보면 종교의 가장 진실한 모습일지 모르며 덴마크나 스웨덴 처럼 긍정적인 결과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과 같이 사회 안전망이 부실하거나 계층간 격차가 자꾸 심해지는 나라들에서 문화적 종교는 훨씬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문제다. 문화적 종교는 정체성 확보를 위해 주로 이루어지는데 이런 나라들에서 정체성 확보는 나의 뿌리가 아니라 나의 우월함(미국 보다는 단일성의 정도가 강한 우리나라에 국한된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드러내는데 더 맞춰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 필 주커먼의 책은 우리(특히 신앙인)에게 또 한 가지의 의미를 더 가지게 된다. 즉 과연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종교를 믿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책이 신앙과 관계된 주제에 대해 내밀한 자기 고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고민들은 언젠가의 내가 했던 고민이거나 누군가로 부터 상담 받던 고민들이기도 하다. 즉 누구나 한번쯤을 떠올려 보았던 그런 고민이나 생각들인 것이다. 그 친숙함 때문에 그들의 고백을 듣는 한 편 그 말에다 바로 나의 모습을 비쳐보게 된다. 즉 나는 어떻게 생각해 왔던가 혹은 나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려 하는가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아버지 표트르와는 달리 신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윤리적이 될 수 있고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여겨도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으며 삶의 궁극적 의미따위 신경쓰지도 걱정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타인에 대해 관대할 수 있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고백들을 보면서 더우기 신을 믿는다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들이 이정도로 허무와 무상함을 인정하는 가운데에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외부에 전혀 기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외부의 어떤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신을 요청하는 궁극적 이유도 사실은 신 앞에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신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때문인 것 같다. 즉 그 인정을 통해서 나를 더욱 더 높이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해서 정말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또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종교마저도 내 우월을 위한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기에 특히나 더욱 행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오히려 그 때문에 정작 삶을 희생하는 결과를 낳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내 생각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에서 그 '신'은 그저 '신'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내 우월을 인정받으려는 모든 수단화된 타자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마르틴 부버의 말대로 '너'가 아닌 '그것'이 되어버린 타자들 말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사회'란 제목에 포함된 뜻은 그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을 끊는 것 부터가 먼저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은 그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아의 사람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주어진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언어와 틀에 박힌 행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 믿음을 드러내는 것.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문득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이런 얘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말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어냐고 예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예수가 하나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자 그래도 굳이 하나만 지킨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이웃사랑이라고 말했다. 그 이웃사랑이 바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예수마저도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포용하고 사랑하는 행위가 곧 신을 믿는 신앙 자체라고 선언했다. 그러니까 '신'이란 단일한 가면 아래에는 내가 포용하고 사랑해야 할 무한의 타자들이 있는 것이다. '신 없는 사회'란 아마도 '신'이라는 그 단일한 가면을 벗어버린 사회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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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김영명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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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전체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속이 시원했다. 나는 기독교를 믿고 이 책의 지은이 김영명은 불교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평신도로서 그동안 내가 기독교(정확히는 한국 기독교 교회라고 해야겠다)에서 가지고 있었던 불만이나 교리와 설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았던 호기심을 모조리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른데도 이러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을 보면 초심자 혹은 평신도가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느끼는 불만이나 부족한 부분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제목 부터가 도전적인 이 책의 부제는 더더욱 도전적으로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이다. 부제만 놓고 보자면 지은이가 불교에 상당히 조예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 쉽겠지만 천만에 그는 스스로도 밝히지만 이제 겨우 불교에 입문한 초심자에 불과하다. 이처럼 종교 경험이 일천한데도 감히 한국 불교의 문제에 대해서 들고 나온 것은 그저 상식적인 견지에서 아무리 따지고 보아도 한국 불교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정말은 무엇을 중생들에게 주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너무나 고담준론이라 수양이 깊지 못한 미천한 존재들이라 그런지 그저 뜬구름 잡기 식의 허황된 담론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은이 김영명은 그걸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도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뉴욕주립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까지 받은 소위 먹물을 먹을만큼 먹은 인사(人士)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불교의 이론이 심오하다해도 그래도 이정도 가방끈이면 수박 껍질에 그려진 줄들의 개수 정도는 헤아릴 수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개수마저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말들은 한문 투성이고 논리는 비약과 과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으며 강해하는 자들조차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인 이론으로 가득하니 절망하기도 전에 분노부터 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록 불교의 내공은 깊지 못하나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라고 벽력뇌성으로 일갈하며 오직 그의 무기라곤 그동안 닦은 학자적 수련과 상식 밖에는 없지만 '불교'라는 비약과 허장성세 그리고 고담준론들의 춘추전국과도 같은 강호로 나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초심자들의 의문과 답답함을 제대로 풀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전체 11장에 걸쳐 불교라는 난적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간다. 거기에는 어려운 한문만 고집하며 불교의 가장 기본적 개념 조차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하는 한국 불교계 뿐만아니라 흔히들 소승불교는 개인 수양 대승불교는 세상에 대한 자비 실천을 주 이념으로 하나 제대로 둘 다 살펴보니 정작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그리 다르지 않는데 굳이 그러는 것은 그냥 자신들을 구분지으려고 억지로 그러한 것들을 갖다 붙인 것은 아닌가 하며 대승불교를 논박하고 거기다 아예 석가모니에게까지 나아가 그가 정말 사람들이 말한는 겸손과 자비의 인물인가를 논하며 아울러 불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고해와 그것을 벗어나는 경지인 해탈과 열반이 사실 제대로 된 개념인지마저 검증한다.

 

  이렇게 그의 칼날은 거침이 없고 위 아래를 따로 두지 않는다. 마치 제대로 살풀이를 하려는 듯 이참에 그는 평신도로서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문점들을 다 해소하려 덤벼든다. 윗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불교라는 것이 도대체 뭣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으니 스스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한 번 단단히 마음먹고 파악해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제천대성 손오공이 세상 끝까지 날아가 부처님 손가락에다 자신이 세상의 끝까지 도달했노라 남기듯 그가 찾은 불교의 핵심을 책 마지막에 새겨 둔다. 그가 이해한 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수행을 통한 나와 남의 괴로움 제거이다.(P.274)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초심자이자 평신도인 그가 오래도록 고군분투 끝에 도달했어야 할 만큼 한국 불교는 이 단순한 진리를 어렵게 말하고 배배 꼬이고 또한 잔뜩 부풀려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선 이해를 못하면 친절히 가르쳐 주기는 커녕 믿음이 부족하다는 둥 수양이 덜 되었다는 둥 오히려 못하는 자를 타박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조한다.

 

  그들이 아무리 많이 알고 수양이 높더라도 무턱대고 그들의 말에 기대지 말 것을. 아무리 믿음이 강조되는 종교라 하더라도 그 모든 이론과 교리에 관해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맞는지 아닌지 제대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 마디로 그들의 권위에 쫄지마라는 것이다. 종교의 이론이나 교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모든 건 다 똑같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 스스로 찾고 구하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그 대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 지은이 김영명은 이 책을 통해 몸소 시전해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또한 그것은 나 역시 기독교 생활을 해 오면서 생각했던 것이었고 그래서 이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지은이에게 적잖이 감명을 받았다. 애초에 내가 불교에 대한 책을 읽기로 한 것은 현재 한국 기독교가 정말로 문제가 많아서였다. 바로 그것을 불교나 여타 다른 종교들을 배워 봄으로써 그 상대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지금의 한국 기독교란 한 마디로 딱 장사아치에 불과하다.(물론 여전히 소명을 가지고 일하시는 목사님들이 많다. 하지만 그분들의 노고보다 더 많이 드러나는 건 돈 밖에는 중심에 두지 않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다.) 이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 성경이 정말 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경의 진의를 왜곡하여 설교한 목사들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기복신앙에만 빠져 무분별하게 목사들의 말을 맹종했던 신도들의 책임 또한 크다. 다행히 지금은 헌금이나 십일조에 대해서 비성경적임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그렇게 스스로 자정하려는 노력들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기독교가 진정으로 기독교다워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험란한 고비들이 많다. 이 고비들을 제대로 넘기 위해서라도 이제 평신도가 깨어나야 할 때라고 많은 분들이 목소리를 모아 말한다. 더 이상 예전처럼 목사의 말이라고 무분별하게 수용하지 말고 늘 깨어서 스스로 그것이 참인지 아닌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또한 그대로 이 책의 주제와 상통하는 바이기도 하다.

 

 즉 불교나 기독교나, 그 종교가 제대로 자기답기 위해서는 일반 신도가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설교나 강론에 있어 그저 듣기만 하는 객체가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진리를 앎이 귄위있는 소수에게만 허락되었을 때는 항상 부패와 타락이 뒤따랐다. 혹세무민은 늘 남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그렇게 스스로는 생각할 줄 모르는 다수가 있을 때 일어났다. 말들은 언제나 참여하는 자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보다 더 정확해지고 제대로 된 의미를 찾게 되는 법이다. 바로 집단 지성이 그 오염된 말을 정화시키기 때문이다. 흔히들 종교는 믿음이라며 그래서 따지기 보다는 그냥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헛소리다. 교부철학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스콜라 철학의 토마서 아퀴나스, 종교개혁을 가져온 루터나 지금의 개신교를 낳게 한 칼뱅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디 그저 믿기만 햇던가 제대로 따지고 들었기 때문에 바로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보다 많은 이들이 권위에 주눅들지 말고 자신 역시도 당당히 하나의 대등한 참여자라는 생각으로 핵심, 이론 그리고 교리에 대해 사유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불교와 기독교 아니 모든 종교를 본래의 모습 그대로 지켜줄 것이다. 그러니 믿음이 무슨 마법의 지팡이라도 되는 양 얼버무리지 말고 아무리 알 수 없는 것이나 모호한 것이라 해도 끝까지 따지고 의미와 이유를 추구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불교에 갓 입문한 초심자인 김영명이 이 책에서 제대로 보여준 것 처럼 말이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이 말은 단순히 믿음, 기도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종교의 모든 것을 그대로 믿지말고 스스로 사유할 것을 요청하는 말이기도 했다. 즉 진리는 그저 다가오지 않는다. 스스로 나서서 찾고 두드리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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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려 대한민국 - 위기의 한국에 고한다
김광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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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특히나 주인공의 남편인 방귀남은 '며느리'라는 직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그야말로 초인기를 누리고 있다. 극중에서 그 남편이 아내를 위해 시누이를 야단치거나 시어머니 앞에서도 이왕이면 아내와 자기가 같이 있을 때 야단을 쳐달라고 하는 둥 그야말로 아내의 편에 써서 아주 든든한 '쉴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사람들은 '한국에 저런 남편이 어딨어?' 하고 비현실적임을 지적하려다가도 어느 순간 그가 30년간 미국에서 키워졌다는 설정을 떠올린 나머지, 그만 '아, 그래 미국에서 자랐으니까 저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납득하고 만다. 어쩌면 정말 그 때문에 그 같은 조금은 무리하게도 보이는 그런 설정을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편 '방귀남'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에서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부분은 그것뿐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 '하얀거탑'이나 '브레인'에서도 드러났듯이 거의 군대와도 맞먹는 철저한 위계 사회인 '의사들' 세계에서조차 그는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권력을 가진 과장에게 '부하 의사들 업적에 숟가락 올려 놓지 마라'고 직언하거나 기업이나 마찬가지인 병원의 아주 중요한 세미나조차 아내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단칼에 포기해버리는 그의 모습은 직장에서 여지없이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겐 참으로 먼나라의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그럴수도 있겠구나'하고 받아들이는데 그것도 알고보면 모두 그가 미국에서 오래도록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방귀남이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의 바탕엔 가만히 보면 그가 있었던 미국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놓여져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인들과 달리 남녀사이에 별다른 차별이 없을테니까, 미국의 조직 사회는 한국의 조직 사회와 달리 그렇게 위계적이지 않을테니까 방귀남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미국을 우리나라보다 좀 더 나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방귀남을 보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란 나라는 우리나라보다 더 좋은 사회일까? 여기에 대해 절대로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책이 바로 현재 경북대학교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중인 김광기의 '정신차려 대한민국'이다.

 

 

 

 

 '정신차려 대한민국'은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세계전체라는 거시적 측면에서 진행중인 위기들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보다 미시적 차원에서 이 위기의 시대에 이제 우리나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1부와 2부 모두에 있어서 중점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식 체제, 미국식 이데올로기가 우월하다는 관념의 파괴이다. 즉 여기서 제목의 '정신차려'는 바로 거의 사대주의적으로 '미국 것'에 추종하는 우리들 보고 정신차리라고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그리 좋거나 정치적으로 발전된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온갖 문제들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종은 어림도 없고 때로는 배타도 필요한 그렇게 어디까지나 한 발 물러난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여느 나라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게 이 책의 지론이다.

 

 1부에서는 왜 미국에게 서브프라임이라는 사태가 일어났으며 그것을 일으킨 장본인이 누구인지에서 부터 그리스로 인해 초래된 유럽의 위기가 정말은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벌어진 사태인지를 정확히 꼬집어주고 있으며 그 다음에선 미국과 유럽의 사태를 일으킨 존재들이 여전히 개혁되지 않는 한 장차 또 어떠한 문제들이 연이어 '위기'라는 이름으로 닥쳐올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언제 화약고가 폭발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조금이나마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으려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얘기한다. 그렇게 세계 경제와 정치를 모두 아우르며 진행되는 책인지라 언뜻 보면 난해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책은 나 같이 지하철 같은 곳에서 책을 읽어야 하는 자를 배려라도 하는 듯 거기서도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게끔 쉽게 서술되어 있다. 책날개에 보면 김광기 교수는 '무엇보다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위해 무엇보다 맛깔스런 글쓰기에 주력하는' 교수라고 나와 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이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함량이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쉽지만 2008년 부터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짚어주고 있다.

 

 그렇게 1부가 정보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2부는 충고적인 성격이 강하다. 아무래도 1부는 현실 분석적이고 2부는 앞으로 제대로 나아가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에 얘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김광기 교수가 2부에서 특히 강조하는 건 물론 '미국식 혹은 미국것'에 대한 우리의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식의 무조건적 추종이다. 이를테면 한미FTA를 왜 무턱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지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것 만큼 세계화가 그리 좋은 것만을 주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노동계급이나 그 이하 빈민계급들에 있어서만큼은 가속화된 재정위기로 사회안전망을 축소할대로 축소시켜 이중고를 겪게 만들고 또한 론스타 케이스에서 보듯이 외자를 유치하는 것이 그저 플러스적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손쉽게 금융투기세력에게 고스란히 이익을 빼앗기는 일이 될 뿐이며 동시에 세계적 지위 상승을 위해 벌이는 OECD가입이나 G20 같은 각종 국제행사를 유치하는 것이 사실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만 안겨줄 뿐인 '빛깔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과 현재 조지 소로스를 위시한 헤지펀드 세력들이 제3세계의 곡창지대를 점점 선점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이 향후 그 투기적 이익을 위해 식량 위기를 가져올 것이 예측되는데 이러한 때 한미 FTA를 하는 것은 진정 지켜야 할 식량주권을 마치 그대로 내어주는 것과도 같기에 위험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 모든 것들에 사회학자답게 세세한 근거를 들어 설득력이 있다. 이런식으로 그는 미국식처럼 되어가는 월세화를 왜 막아야 하는지 그리고 미국 대학들처럼 등록금이 하염없이 치솟는 것을 왜 저지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보여준다. 그렇게 그는 미국식 제도들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아주 문제점이 많은 것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에 대해 전혀 열등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 미국에 대해 당당함을 가지고 문제 해결에 있어 미국식을 추종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결정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나 그런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 것들을 '이제는 당당히 주인의식을 되찾아야 할 때'에서 보여주는데 개인적으로 이 책이 특히 빛나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깨우치는 바가 많았다. 이를테면 미국 시민권자를 포기하는 자들을 특별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부분의 경우, 그들이 시민권을 포기하고 우리나라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은 이미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일자리 찾기가 쉬운 한국에서 일자리를 얻으려면 병역을 마쳐야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뭔가 대단한 희생을 한다거나 특별히 애국적인 행위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랬다. 우리가 가진 미국에 대한 프리미엄식 평가 때문에 이를테면 가나의 시민권을 포기하고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과 사실 별 다를 바 없는 일인데도 우리는 유독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는 것을 언론은 집중적으로 보도하고 그것을 보는 우리들은 대단하다고 여겨왔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미국식에 대한 프리미엄 부여는 공교육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왜 우리나라 공교육을 미국의 공교육보다 열악하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선 우리의 공교육 현장을 살펴보면 미국에 비해, 교사의 질, 공부하는 절대적 시간, 배우는 내용, 학교 시설 등에서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 아니 미국의 공교육 현장에 비해 월등하다.(김광기 교수는 미국의 보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먼저 교사의 질은 미국 공립학교 교사들의 고등학교 성적이 하위 3분의 1에 해당한다면, 우리나라 교사들의 성적은 거의 상위 등급이다. 정말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의 길로 접어든다.(P.248)

 

 이렇게 그는 공교육, 의료제도, 정치제도 등등에 있어서 사실은 우리나라가 미국 보다 좀 더 발전된 사회임을 조목조목 밝혀준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우월함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외국인이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꼭 대답해야 하는 것과 같은 주눅이 드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미국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프리미엄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말을 그저 '우리 것이 최고야!'식의 국수주의적 주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그렇게 해석하는 건 그야말로 심각한 오해가 아닐까 한다. 개인적인 느낌은 여기에 담긴 진심은 1부에서 세세하게 보여준 현재 진행중인 위기와 앞으로 도래할 위기에 있어서 제대로 우리가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것이라면 무조건적 프리미엄을 붙이는 습관적 사고와도 같이 그렇게 외국의 것에 기대어 판단하고 결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긍정하고 그 내부의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정말 현명한 길임을 강조하는데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많은 중요한 사안들마다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말들을 참으로 많이 들어왔다. 100분 토론 같은 것을 보면 꼭 들어가는 것이 선진국은 이렇고 저렇고 하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나라들은 저마다 다른 역사와 풍토를 가지고 있다. 삼권분립을 처음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그것들을 '사물의 본성'이러 불렀다. 즉 여기서 사물의 본성이란 그 나라 혹은 지역이 가지는 고유의 역사, 언어 그리고 문화들을 총 망라한 고유한 풍토성을 이르는 말이었다. 즉 그 고유의 풍토성이 일종의 본성 혹은 본질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그가 이렇게 사물의 본성이란 명칭을 부여하면서까지 고유의 풍토성을 강조했던 것은 무엇보다 법이란 것이 그 사물의 본성 그러니까 고유의 풍토성에 합치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몽테스키외는 법이란 어디까지나 각 나라와 고유의 특색에 적합해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어디 거기에 적합해야 할 것이 법 뿐일까? 제도나 정책 역시도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남의 것을 들여오기 전에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이 좋고 나쁜지에 대한 우리의 정직한 모습을 먼저 바라보고 그것이 과연 우리들이 입기에 적당한 옷인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김광기 교수의 '정신차려 대한민국'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그 어떤 사대주의나 열등의식 없이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정말로 나쁘기만한 것인지 어떤 살릴만한 좋은 점은 없는지 한 번 제대로 바라보자는 하나의 외침(2부에서 두드러지는 어조로 볼 때)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방귀남의 얘기로 돌아가서, 과연 방귀남이 미국에서 오래도록 생활했기에 그렇게 아내의 편을 적극적으로 들어주게 되었을까 여기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김윤진이 출연해서 유명해진 미국드라마 '로스트'라는 게 있다. 거기서 김윤진은 한국인 아내로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아마도 공항 로비에서 그녀의 한국인 남편과 같이 있는 것에서 부터 였는데 거기서 김윤진은 남편의 말이라면 뭐든 고분고분 따르는 순종적인 아내로 나온다. 그 옆에서 그러한 김윤진을 보고 있던 미국인 아내가 이런 말을 한다. "어떻게 저렇게 살지? 나는 절대 저렇게 못 살아!" 그렇게 그녀가 말하자 그 옆에 있던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그게 왜 나뻐? 너 한국의 이혼률이 미국의 이혼률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 알기나 하는거야?" 하도 오래전에 봐서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비슷한 뉘앙스의 대사를 미국인 남편이 한다. 즉 사실을 말하자면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여자를 마음껏 휘두르고 싶다는 것에선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인가? 그렇다면 이건 또 어떤가? 오 헨리의 '할렘의 비극'이란 단편에 보면 남편에게 매맞는 친구를 부러워하는 아내의 얘기가 나온다. 그녀는 그 때리는 행위에서 남자다움을 본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남편'이란 이데아가 있다면 딱 거기에 해당되는 자신의 남편이 자신을 때리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물론 단편의 제목이 '비극'이므로 이 얘기는 오 헨리가 일종의 풍자 처럼 쓴 것이다. 하지만 일상을 그대로 담아냈던 헨리이니 만큼 아마도 당시에 아내를 폭행하는 일이 그 정도로 보편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은 가능하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자리잡은 하나의 문화적 관습이 달라지기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처럼 미국적 가치관이든 그 사고방식이든 오히려 더 못하면 못했지 별다른 차이는 없다. 그러니까 방귀남은 미국적 삶의 세례를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그가 착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오해하면 '아니~ 아니~ 아니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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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TV 프로에서 유명 연예인이 나와서
우리나라도 외국처럼 동거도 자유롭고 성생활도 자유로우면, 급증하는 이혼율도 줄어들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동거 자유로운 나라가 이혼율 역시 훨 높더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처럼... 이라는 말은 참 위험하고, 주체적이지 못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 애증이 섞이죠. 그건 중국이나 일본, 북한과 마찬가지의 느낌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이라고 무조건 따라가고 복종하고 비굴하게 구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도 문제이니... 적절한 균형이 가장 중요한거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힘이 역부족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니까요.

일반화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여자를 휘두르고 싶은게 아니라, 남녀 상관없이 타인을 휘두르고 싶어하는게 아닐까
싶어지기도 하는걸요... 아하하..... 오해하면 아니~아니~ 아니되오! ^^

ICE-9 2012-04-30 19:22   좋아요 0 | URL
저도 항상 우리나라 얘기를 하는데 있어 무분별하게 외국 사례를 가져다 오는게 마음에 안들었었는데요. 그렇게 특히나 미국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건 MB정부의 주된 레퍼토리이기도 해서 더욱 이 책의 주제의식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 일반화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크게 공감하게 되네요^ ^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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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변화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어온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폐해가 극에 달해 곳곳에서 파열의 신호가 감지되던 2011년 1월.

 그 파열을 거대한 크레바스만큼이나 열어젖힐 거센 변화의 바람이 설마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불어올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23년동안 튀니지를 독재했던 밴 앨런 정권을 무너뜨렸던 재스민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건 마치 사막을 뒤덮는 거대한 모래바람처럼 철옹성 같았던 구시대의 독재 정권들을 하나하나 삼켜갔다. 이집트의 독재 정권 무라바크가 무너졌고 42년간이나 리비아를 좌지우지했던 가다피마저 쓰러뜨렸다.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그리고 환호했다. 그 변화의 바람이 비단 아프리카에게만 자유를 가져다줄 희망의 바람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런 변화의 바람을 염원하고 있었다. 부자들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세상.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예외없이 무시당하고 짓밟히는 이 세상. 이렇게 된 근본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 때문임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곳곳에서 폐해가 드러나는 난파선 처럼 침몰해 가고 있는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고 싶은 마음들이 커져갔다. 뭔가 자신들에게 보다 안정된 삶을 가져다 주고 떳떳하게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살아가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재스민 혁명은 바로 그러한 소망에 불을 지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랐다. 그건 이제까지 그들이 알고 있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그들은 미개하고 너무도 가난해서 그저 굶주림에 늘 고통받는 땅일 뿐이었다. 소말리아 내전을 다룬 영화 '블랙호크다운'에서 보듯 그들은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평화의 쟁취가 불가능한 존재들이었고 시에라리온의 내전을 다룬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보듯 문명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어린아이들마저 무참히 사람들을 살육하는 그런 무자비하고 잔혹한 대지일 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뭔가를 이루어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가 아프리카를 보던 눈이었다. 하지만 재스민 혁명은 거기에서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스스로 생각과 판단을 하고 자유와 해방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떨치고 일어나 싸울 수 있는,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내부적 역량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임을 똑똑히 보여준 것이다.

 

 그랬다. 재스민 혁명은 단적으로 아프리카가 그동안의 가면을 벗고 자신의 원래 얼굴을 우리들에게 보여준 것이나 같았다. 사람들은 마치 이제 아프리카를 처음 보듯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현재 주 세네갈 한국대사관 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 윤상욱의 책 제목인 '아프리카엔 아프리카가 없다'는 바로 이러한 것을 뜻한다.

 

 

 그는 부제에다 당당히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라고 달았는데 바로 이 말이 왜 저자 윤상욱이 이 책을 저술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 마디로 그는 우리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자연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편견에 불과한 것임을 밝히고 이제 새로이 맨 얼굴을 드러내는 아프리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런 편견들만 덧씌우는 외부에서의 시각이 아니라 아프리카 내부에서 그들의 가치관과 문화로 바라보아야 함을 이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이 책은 총 5장에 걸쳐 우리들에게 가장 객관적인 그래서 가장 진실된 아프리카의 모습을 보여준다. 각 장들은 현재 아프리카의 모습을 경제, 정치 문화 각 방면에서 다 조망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선 1장 '왜곡된 정체성'에서는 제목 그대로 그동안 우리가 가진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모두 서구중심주의에 의해서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것임을 밝힌다. 무려 그 왜곡의 연원은 제국주의가 한창 팽창되던 18세기까기 거슬러 올라간다. 윤상욱은 당시의 대철학자 헤겔을 거론하며 서구중심주의가 그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얼마나 의도적으로 아프리카를 부정적으로 의미화 작업을 했는지 대표적으로 밝힌다. 수전 벅모스의 저서 '헤겔, 아이티, 보편사' 역시도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니 같이 참고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이미지들은 오로지 서구가 문명화를 통한 야만의 계몽이라는 미명하에 제국주의적 수탈을 스스로 정당화하려고 내놓은 기만적 술책에 의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제 아프리카를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들은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안되며 그 내부로 들어가 그들 고유의 시각으로서 조망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게 2장 빈곤과 저개발에서는 그 내부의 시각에서 아프리카의 현재 경제 상황을 살피고 3장 독재와 폭력에서는 아프리카의 현실 정치를 그리고 4장 심성과 편견에서는 그 내부의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바라본 그들의 문화를 얘기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프리카의 경제, 정치 그리고 문화를 살펴본 뒤 현재 아프리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내전의 빈발, 경제적 궁핍, 관료와 엘리트들의 부패, 장기 집권등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과 전망을 마지막 장 '아프리카의 봄'에서 탐색한다.

 

 이렇게 이 책은 현재 아프리카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반적으로 훑어준다. 무엇보다 현재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 내용들이라 보다 더 직접적으로 아프리카를 보듬게 하는게 커다란 장점이다. 그렇게 다시금 새롭게 보듬게 되는 아프리카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아프리카와는 물론 다르다. 물론 가진 문제점도 여전히 크고 많지만 그것을 개혁하려는 그 내부의 움직임도 그 못지 않게 적극적이고 커다랗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대로 오로지 외부의 원조에만 기대려 하는 아프리카는 아닌 것이다. 아예 그들 스스로 보다 자립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원조를 거부하자는 주장까지 내부에선 제기될 정도였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왜곡에서 비롯된 편견인줄도 모르고 진실로만 생각해서 그 대상이 지니고 있을 변화의 가능성마저 미리 배제해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원조'라는 것에 대해서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TV를 보면 아프리카를 도와주자는 내용의 프로그램들을 더러 보게 되는데 솔직히 이 책을 읽고나니 TV에서까지 저렇게 아프리카에 도움을 운운하는 것은 별로 좋지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원조의 정당성을 위해서라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아프리카의 모습만 강조하면 우리가 가진 왜곡된 아프리카에 대한 인상들은 앞으로도 더욱 더 굳어질 것임이 틀림없을테니까 말이다. 생각해보면 진정한 원조란 단시 그들에게 빵을 주고 돈을 줘서 굶주림을 덜어주고 경제적 궁핍만을 면하게 해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건 원조라기 보다는 적선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원조와 적선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원조는 동등한 차원에서의 배려라 할 수 있지만 적선은 오직 주는 자의 우월함만 드러내는 계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원조는 그들이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다리가 부러진 자를 위해 내 어깨를 빌려주듯 그렇게 같이 동등한 자로서 어려움을 나눠 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원조를 함에 있어서는 그 원조를 받는 타자를 보는 시선 역시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떠하냐에 따라 원조의 성격 역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원조의 방법 역시 결정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엔 비단 경제적 어려움 뿐 아니라 정치적 어려움들도 존재한다. 문제는 이것이 분리되지 않고 단단히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솔직히 지금 외국의 원조한 것들 중 대부분은 지도자와 관료 그리고 엘리트들 수중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정치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자들은 전혀 도움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무턱대로 도와주는 것에 앞서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며 그 지향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프리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최근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도움만 추구한다. 혹시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가져온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 때문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이 책의 마지막 장 '아프리카의 봄'은 여전히 전망은 불투명하고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장애물들을 극복해 보려는 내부의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비록 우리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미약하고 존재하는 해악들 앞에선 바람 앞의 촛불처럼 속절없을지라도 속단은 금물이다. 재스민 혁명은 바로 그 미약한 가능성들이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것이니까 말이다. 아마도 진정한 원조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촛불 같은 가능성들이 꺼지지 않고 그대로 밝은 여명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아프리카를 그 고유의 시각으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그 첫 발걸음으로 이 책 '아프리카엔 아프리카가 없다'는 참으로 유용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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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1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제가 원하던 주제군요.....
헤르메스님은 저의 지름신이 맞다니까요. 항상 궁금했거든요. 아프리카는 미개하다는데, 왜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문명인인가? 에 대해서요. 거기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근원지이기도 하구요. 결국 서양의 수탈과 관련이 있는거군요.

ICE-9 2012-04-11 03:40   좋아요 0 | URL
아아, 이 책 정말 강추합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최근에 수전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도 읽었는데 근대때 서양인들이 어떻게 아프리카를 왜곡시켜왔는가의 그 이론적 뒷받침을 살피는데 있어 정말 유용한 책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이 두 책을 꼭 추천드리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