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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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문익환이라는 이름은 낯익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삶에 대해선 그만큼 친숙하지 못하다. 아는 건 이름과 목사라는 그의 직업 그리고 단편적으로 접했던 그가 했던 일 정도. 가장 큰 기억은 역시 단신으로 북으로 가 김일성을 만난 일이다. 때는 1989년. 87년의 6월 항쟁으로 6.29 선언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렀던 시절이다. 국가의 허락 없이 북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감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일을 들으면서 난 그게 가장 먼저 궁금했다. 그의 발길을 이끈 것. 마치 자력처럼 거기로 가야만 한다고 끌어 당긴 것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했다. 얼마 전 싱가포르에서 북미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리고 이제 평화 시대로 가는 길목에 서 있으니 더욱 궁금해진다. 마침 올해가 고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지 10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 100년에 남북관계에 이토록 커다란 성과가 주어졌으니 어쩌면 지금은 하늘에 있는 그의 가호가 함께 한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시인 김형수가 쓴 '문익환 평전'이 특별판의 모습으로 새로이 나왔다. 맞다. 첫 출간이 아니다. 14년 전에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바 있다. 나는 그 때 만나지 못했다가 특별판으로 비로소 만났다. 이제야 그 궁금증을 풀어 볼 기회를 간신히 가지게 된 셈이다.




 읽어 보니 평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이더라. 어쩌면 이 책에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토록 한 사람이 걸어 온 삶의 길을 낱낱이 파헤치다니! 마치 그가 돌길을 걸었다면 그가 밟은 돌 하나하나를 전부 뒤집어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문익환 목사의 삶이 온전히 그리고 생생하게 복원되어 있다. 그의 삶의 결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알고 싶은 이에겐 정말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전기가 아니고 평전이다.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니 그냥 전기를 쓰는 것보다 평전을 쓰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전기는 있는 사실을 잘 정리해 쓰면 되지만 평전은 저자의 평가까지 들어가니까 말이다. 그런데 너무 주관적으로 쓰면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좋은 전기란 언제나 독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감동까지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공감과 감동은 특히나 저자의 평가의 경우 독자들이 따져봐도 객관적으로 올바를 때, 적어도 납득될 때 가능하다. 결코 자기 기분이나 주관에 좌우되어선 안되며 사실을 바탕으로 냉철하게 분석하면서 독자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깊은 뜻마저 설득력있게 짚어줄 수 있어야 한다. '문익환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그렇게 한다. 그런 책이다. 김형수는 문익환 목사의 일대기를 일화나 업적 소개에 그치지 않는다. 문익환 목사가 삶을 걸으며 어떤 선택을 할 때, 단순히 한 개인의 삶 차원에서 그것을 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선택을 김형수는 언제나 사회나 민족 그리고 시대 전체의 맥락 안에다 두고 의미를 살피고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므로 여기엔 문익환 목사의 삶만 있지 않다. 그와 함께 연동하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사회와 민족, 시대의 초상까지 같이 어우러져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공감하고 문익환 목사의 삶에 감명 받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개인의 삶은 개인의 삶으로 그치지 않는다. 수면 위에 생겨난 작은 동심원도 스쳐가는 바람을 만나 수면 전체를 변화시키는 파문이 될 수 있듯이 아무리 작은 개인의 삶도 결국엔 전체의 삶과 결부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 개인의 삶에 의해 역사 전체가 새로운 물줄기로 흐르는 것도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은 단순히 문익환 목사의 삶을 잘 알려준다는 것을 넘어 개인과 시대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잘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대가 없이 개인이 있을 수 없듯이, 시대 역시 개인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것이란 걸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문익환 목사의 삶을 방관자에서 참여자로, 상아탑에서 민중이 고통 받는 현장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의 세계에서 세속의 세계로, 지켜보는 자에서 막중한 책임을 스스로 떠맡는 자로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것을 보여준다. 변하기 전 그도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 필부가 시대의 거인이 된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실수와 후회에서 배우고 과오를 올바른 각성 속에서 반복하지 않으며 앞으로 나서고 기꺼이 넘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뒤늦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스스로 늦봄이라 자신을 칭했던 문익환 목사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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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나오미 울프 지음, 최가영 옮김 / 사일런스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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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미 울프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언제나 나의 고정관념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이면의 진실을 발굴하여 그것을 전복시켰다. 여자에게 강요된 아름다움에 대해 쎴던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가 그랬고, 예전 한 칼럼에서는 페미니즘이 극우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기도 했다. 원래는 2012년에 나왔지만 최근에 번역 간행된 '버자니어'는 여성의 성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이 책은 단적으로 버자이너와 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 말은 여성의 경우 성적 쾌락이 오로지 육체적인 것에서만 오지 않고 정서적인 것에서도 매우 많이 온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몸과 감정 모두가 만족해야만 오르가슴을 느끼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일단 해부학적으로 그러하다. 여성의 골반은 신경계가 단순하게 분포되어 있는 남성의 생식기와는 다르게 수많은 신경계가 아주 복잡하게 얽힌 구조로 되어 있다. 게다가 그 얽힘이 일반적이지 않고 모든 여성이 저마다 다 다르다. 여성 개인은 오직 혼자만의 골반 신경계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여성은 저마다 개성적인 신경망 얽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여성은 신경 분지가 질에 더 발달해 있고 어떤 여성은 신경 분지가 음핵에 더 많죠. 회음부나 자궁경부에서 신경 가닥이 집중적으로 분지된 여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적 반응의 개인차가 벌어지는 게 당연하죠."(p. 24)


 그러므로 여성에게 성행위와 성생활에 있어서 일반론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나, 책을 통해서 들었던 모든 여성의 성에 대한 지식들은 지극이 운이 좋아야만 적용될 수 있는 헐거운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성에게 마치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처럼 강요해왔다. 그 때문에 사회가 요구한 것과 다르게 느끼는 여성들은 가지지 않아도 좋을 수치심과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문화와 가정교육이 여성의 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많은 여성에게 억울한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기거나 여성으로 하여금 내가 변태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만든다. 자신이 애인에게 오럴 섹스를 그의 전 여자친구보다 더 많이 요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질과 항문 모두 만져 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창피한가? 가끔 절정까지 오래 걸리건 절정이 모호한 것과 같은가? 여기서 주목. 그건 당신의 할머니가 양손을 이불 위애 고이 포개고 자라고 가르쳤거나 중학교 때 수녀 선생님이 유독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은 애인의 전 여자친구보다 성적으로 흥미가 덜한 사람이 아니고 더 엄격하게 길러지지도 않았다. 어떤 잠자리를 좋아하고 원하든, 모든 여성의 저마다 다른 성적 성향은 온전히 신경계의 물리적인 구조에서 오는 것일지 모른다.(p. 33)


 


 책이 강조하고 있듯이 우리가 때로 자신에 대해 어떤 자괴감이나 죄책감에 젖는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 몸을 너무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쪽에 관심을 갖고 알려고 하는 것을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연결시켜 지레 못하게 만들었으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특히 자위와 관련하여 탁월하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개인이 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통제하여 수치심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사회 권력의 지배를 공고히 해 왔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사회는 언제나 성 담론을 지배하고 관리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쉽게 순응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나오미 울프의 '버자이너'는 그런 해방의 동력을 가져다 주는 책이다. 요즘 한창 일어나고 있는 탈 코르셋 운동이 증명하듯이, 생각해 보면 여성은 언제나 자신의 몸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자신의 눈으로 직시하기 보다는 남들이 만든 틀에 맞춰 바라보기 일수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에 따라 개인적인 요구를 하려해도 언제나 슬며시 일어나는 죄책감 속에서 남의 눈치를 봐야했다. 그러나 '버자이너'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런 자신을 전혀 죄스러워할 필요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고.


 사실상 모든 여성이 적절한 환경만 조성되면 오르가슴에 도달한다는 최신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와있다. 이렇게밖에 표현 못 해서 미안하지만, 이렇게 많은 여성이 성욕 결핍과 좌절, 의욕 상실로 고통받는 것이 혹시 남자들이 여자에 대해 잘못 배워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p. 109)


 더구나 '버자이너'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여성의 경우 특히 몸은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강간의 경우, 그것은 단순히 몸을 범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인격적 살인에 해당한다. '버자이너'는 대표적으로 시에라리온 내전 중 병사들에게 무자비하게 강간당한 여성의 모습을 통해 강간이 얼마나 여성의 정신을 파괴시키는지 보여준다. 그러므로 강간은 아주 무서운 죄이다. 


 강간은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남길 수도 있는 고도의 강력범죄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그 짓을 저지르는 당사자조차도, 무기가 사용되거나 다른 신체적 상해, 멍 혹은 핏자국이 남지 않는다면 강간이 그저 '강제적인 성관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데이트 성폭행을 비롯해 경범죄의 탈을 쓴 강간의 공포와 폭력성이 뇌와 온몸에 각인되어 피해자의 심신을 평생 괴롭힌다고 말한다. (...) 또한 오래전에 입은 성적 외상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 현재의 만성적 통증 감각을 심화시킨다는 최근의 분석 결과도 존재한다. 즉 옛날에 성폭행이나 성적 학대를 당했던 사람은 훨씬 나중에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다른 병을 앓게 되면 그 통증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느낀다는 얘기다. 코디 박사는 이 상관관계를 거의 확신하고 있어서 '강간이 곧 통증'이라고 말한다.(p. 1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법원은 그 위중함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루빨리 이런 연구결과가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버자이너'는 여성의 성에 대해, 정말로 묻고 싶었으나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대답을 그것도 아주 제대로 들려주는 책이다. 나오미 울프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여자로 살아가는 게 불편한 이유 중 하나는 여자의 몸과 버자이너를 가리키는 언어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버자이너가 그냥 살덩어리라는 잘못된 인식 탓이다. 하지만 여성의 성적 쾌락의 요체는 생식기만도 쾌락만도 아니다. 여성의 성적 쾌락은 여성의 자기 인식과 긍정적 태도, 창의력과 용기, 집중력과 추진력을 매개하며 여성에게 초월적 황홀경과 해방감 비슷한 감정을 선사한다. 다시 말해 버자이너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버자이너가 뇌의 연장선상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p. 5)


 작가가 말하듯, 정말로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우울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여, 자신의 몸이 가진 진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면 '버자이너'가 좋은 첫걸음이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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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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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원래 추사 김정희를 잘 몰랐다.

 그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세한도'를 그린 사람 정도만 알았다. 책은 '세한도'가 정말 걸작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엔 솔직히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는데 이런 그림이 걸작이라고?'만 생각했다. 외워야 하니까 이름을 외웠을 뿐, 흥미도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추사의 위대함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었던 건, 유홍준의 '완당 평전' 을 읽고나서였다. 아마도 최초로 추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아닐까 기억한다. 유홍준에게 추사란 삶에서 한 번은 꼭 정복해야할 산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오로지 추사를 연구하기 위해 나이 40에 성균관대 박사 과정에 입학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5년 간 박사 논문을 위해 열심히 추사를 연구했지만 유일하게 추사의 학문 세계를 밝힐 근거가 되는 '완당선생전집'의 부실 때문에 논문은 쓰지 못하고 그 연구의 결실은 '완당 평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책으로 나처럼 추사를 비로소 진정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비판과 질정도 많이 받은 모양이다. 보다 완전한 추사에 대한 책을 위해 유홍준은 '완당 평전'을 시나브로 절판시켰다고 한다. 그러다 2017년. 칠순을 앞둔 작가는 다시금 추사란 산을 올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흡하기 때문에 절판시켜 버린 '완당 평전'을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을 맞아 공개된 무수한 새자료를 비롯 그동안 발굴하고 연구한 자료까지 포함시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완당 평전'을 고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후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당 평전'의 성격은 학술인 동시에 문학인데 지금 당장 보완하기 힘든 것은 학술의 문제이지 문학의 문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그려낸 추사 김정희의 인간상과 작가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당 평전'을 전기 문학으로 개고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예술가의 전기는 나의 학문적 과제였다.(...) 그 생각을 하면서 머리가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학술적 정확성을 위해서는 자료를 제시할 때마다 출처를 밝히고 고증해야 하지만 문학으로 임한다 생각하니 그런 주석과 고증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군더더기였다.(...) 그로인해 역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논문 형태보다 전기로 기술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p. 576)


 그렇게 하여 이번엔 전기의 형태로 다시금 추사의 생애가 우리 앞으로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추사 김정희'라는 책이다.



 유홍준에 의하면 추사의 일생은 보통 이렇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1) 1786 ~ 1809년(1 ~ 24세) :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 ~ 19년(24 ~ 34세) :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 ~ 40년(34 ~ 55세) :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의 중년기

 4) 1840 ~ 49년(55 ~ 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 ~ 56년(64 ~ 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책은 이 모든 시기를 시간 순서대로 담고 있고 그렇게 서장과 종장을 합하여 모두 12장에 걸쳐 추사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삶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고 살면서 안팎으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마련이다. 특히 상호 영향 관계가 두드러지는 학문과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추사의 삶이 그랬다. 그는 먼 청나라까지 정말 많은 교류를 폭넓게 했다. 그의 시야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 걸쳐 결코 한정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금석학과 글씨에 대한 부분은 이러한 추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신만 옳다하지 않는 것, 이만큼이면 되었다 자부하지 않는 것,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타인의 것을 제 것처럼 살피며 공부하는 것. 어쩌면 바로 그러한 타자에의 열림이야말로 추사를 위대하게 만든 원천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하면서 함께 쌓인 것들이 추사의 삶 전체에 걸쳐 녹여져 있기 때문에 유홍준이 책의 마지막에 술회한 것처럼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란 정녕 산숭심해(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가 되는 것은 아닐지.


 사진은 청나라 유학자들이 '세한도'를 보고 찬()한 글로, '세한도' 뒤에 저렇게 길게 붙어 있다고 한다.

 국제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엿 볼 수 있는 단면이다.


 '완당 평전'과 비교하자면(정확한 비교를 위해 책을 찾았으나 내 집의 서림(書林)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예전에 읽은 막연한 기억에 기대어 말해야 한다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지만), 확실히 이 책이 추사의 삶을 더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전기라서 삶의 세세한 면모를 더욱 잘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로 주고받은 서신이나 추사가 타인에게 하거나 타인이 추사에게 한 찬()이나 논()도 많이 인용되고 있기에 추사의 내면은 물론 객관적인 모습까지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책은 추사의 삶이 가진 모든 변곡점마다 그것이 어떤 상호 영향 관계로 이뤄졌는지 잘 나타내고 있기에 삶의 모든 굽이마다 추사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만큼은 확실히 알게 만든다. 때로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게 또 어떻게든 추사의 산을 넘어보려는 작가의 집념 혹은 추사에 대한 존경으로 되도록 왜곡이나 훼손 없이 추사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려는 노력 같아서 지루함을 느끼려는 머리를 스스로 채찍질하게 만든다. 과문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지만, 어쨌든 내게만은 이 책은 '추사 김정희에 관한 집대성'으로 보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에 실린 풍부한 도판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엔 정말 많은 도판이 컬러로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추사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이 금석학과 글씨인 것만큼 그 실체를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진 자료가 실린 것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빠짐 없이 수록되어 있기에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삶 전체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여정을 시각적으로도 인지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강상 시절의 추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사진은 강상 시절에 쓴 추사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잔서완석루'이다.



 추사는 타고난 천재였지만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의 8할은 교류였다. 사람과 정파, 국적을 가리지 않은 많고도 다양한 사귐이 '추사'라는 '산숭심해'를 만든 것이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 옛날의 추사처럼 교류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리려는 지금, 이러한 추사의 삶은 특히나 시사하는 바가 많다. 추사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은연 중에 오늘의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까지 알려주는 이 책을 주저없이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사가 말년에 강조했던 허화로움과 고졸함의 가치가 한껏 드러난, 

과천 시절의 대표작이자 기념비적 명작인 '산해숭심, 유천희해'.

 '산해숭심'은 원래 옹방강이 실사구시 정신을 풀이한 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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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4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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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혹은 신념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습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면 되도록 자신을 티내지 않고 두리뭉실 섞이는 게 가장 좋은 처세로 통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우리는 '평균', '평준화'를 하나의 이상처럼 생각해 온 듯 합니다. 부작용이 없진 않았습니다. 모난 돌을 내리치는 정처럼 평균에 속하지 않거나 모자라는 이들에게 그것은 '닮아야 한다', '속해야 한다'의 강요로 작용했습니다. '평균'이란 어디까지나 데이터 상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밖에 없었지만 때로는 그것만이 진리인 것처럼 타인을 멋대로 분류하며 압박한 것이죠. 그런 평균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 잘 알려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현재 하버드 교육대에서 개개인학 연구소를 맡아 이끌고 있는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이란 책입니다.






 토드 로즈는 '노르마'라는 한 여인 조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노르마는 부인과 의사인 로버트 L 디킨슨 박사가 조각가 아브람 벨스키와 합작해 만든 조각상으로 만 오천 명의 젊은 여성 신체 치수 자료를 수집하여 가장 평균의 신체 치수로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그리스어인 이름의 뜻처럼 젊은 여성 신체 치수의 보편적 규범(norma)과 같은 존재였죠. 이 조각상을 전시한 클리블랜드 건강 박물관은 이 조각상의 모습을 미국의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되어야 할 이상형으로 제시하고자 '노르마'와 가장 근접하는 신체 치수를 지닌 여성 찾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를 주관하는 자들은 그런 여성들이 많아 승부가 밀리미터 차원에서 아슬아슬하게 갈릴 것이라 내다 봤지만 천만의 말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참가자 3,864명 중에 평균치에 든 여성은 겨우 40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것도 전체 9개의 항목, 모두에서는 '노르마'가 가지고 있는 평균에 들어간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평균의 이상형이라는 '노르마'가 순전한 허상이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죠.


 '평균의 종말'은 이 '노르마'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평균'과 '표준'이 어느새 만고의 진리가 되어 다양한 면모와 자질을 가진 개인들을 억압, 관리하고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처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아이들이 대학에 지원할 때도 이런 것들이 튀어나와 무지개 빛깔처럼 다양한 존재들을 오직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일렬로 줄을 세웠습니다.


 토드 로즈는 이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교육이나 성격 그리고 아이들 발달 상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최근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보여줍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쉽게 평균의 함정에 빠지는가도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자질을 일일이 살피고 고려하자면 너무 귀찮으니까, 눈에 쉽게 드러나는 것으로만 파악해 얼른 끝내버리려는 '일차원적 사고'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지금 많은 학문 연구에서 드러나는 것은 개인이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면모도 재능도 모두. 그러므로 하나의 잣대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개인이 가진 들쭉날쭉한 측면들을 모두 고려하는 '들쭉날쭉 원칙'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차원적 사고는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본질주의적 사고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런 본질주의적 사고는 종종 성격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얘기되던 것입니다. 흔히 사람의 성격을 외향성, 내향성으로 분류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본질주의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절대 규정될 수 없는데, 이런 것들이 통용되게 만드는 것이죠. 여기엔 사람이 타고난 성격, 그렇게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현재 성격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의 성격에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언제나 상황과 맥락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평균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본질주의적 사고에서 생기는 것만큼 그런 본질주의적 사고가 현대 연구의 결과로 더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면 거기에 기반한 평균의 권위 또한 허물어지는 게 맞겠죠. 토드 로즈는 그런 사실을 자신의 경험까지 넣어가며 쉽고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후반은 특히 교육 부분에 집중되는데, 아이가 남과 달라서 고민이신 부모님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정시 확대를 두고 다시 한 번 정시와 수시의 비중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짧은 머리로 어떻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선 말할 수 없으나 다만 이왕 이렇게 논쟁이 붙은 참에 누구를 붙이고 누구를 떨어뜨릴 것인가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저마다 가진 성격과 재능이 온전히 존중되며 그것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평가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도 많은 생각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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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egraphic 2018-06-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때 부터 평균, 또는 보통이라는 단어를거의좋아하지않았어요. 독특하다는 것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대와도 같은 한국사회에는 맞지를 않죠.
 
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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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한국은행이 무려 6년 반만에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리뷰가 작성된 시점이 금리 인상한 날이었습니다^^;)

 이는 양적 완화가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양적 완화'란 중앙 은행이 금리 인하로도 경기 부양이 안 될때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자본의 유동성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금리 인상이란 곧 양적 완화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가 거듭될수록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제동 조치를 요구할 때마다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이 그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하나는 '낙수 효과'요, 다른 하나는 '양적 완화'였다. 낙수 효과는 경제 정책이 오로지 대기업과 가진 자들 위주로 펼쳐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이 벌면 넘쳐 흐른 물처럼 아래 사람들이 그 떡고물을 받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양적 완화'는 주로 불경기일 때 돈을 많이 풀면 모두의 주머니로 고루 들어가 쓸 돈이 생겨나니 경기가 살아난다는 논리로 돈을 마구 풀어 집값과 전셋값이 해마다 올라 주거 불안정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판인데 물가마저 도무지 내려갈 줄 모르니 실질 임금이 자꾸만 하락하는 것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누그려뜨리는 데 일조했다.

 

 낙수 효과는 거짓이었다는 게 애시당초 판명났지만, '양적완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이조차 거짓이었다는 걸 바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금융 관련 저널리스트이자 현재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 특별 자문이기도 한 스티븐 D 킹(호러 소설의 대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과는 혼동하지 말자.)이 집필한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언한다. '양적 완화라는 프로그램은 주식이나 국채, 회사채 등의 금융 자산 가치를 높이고 세계의 자산 귀족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p. 253)'이라고 말이다. 이 주장을 그동안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각국의 통화 정책과 국제 자본 흐름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말하기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양적 완화'를 거두겠다는 분명한 신호이기도 한 오늘의 금리 인상이 더욱 반가웠고 이 글 첫머리에 언급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 사정으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런 통찰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한 감사부터  먼저 표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화의 종말'은 과연 어떤 책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탈퇴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한창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붕괴의 현상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 또 이런 추세는 정녕 바람직한지를 과거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두루 고찰하여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시사적인 문제들과 돌아가고 있는 경제 상황에 유독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이 정말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세계 문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동기와 분야로 펼쳐지기에 거기서 어떤 일관된 움직임을 간파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전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데다 워낙 자본의 국제적인 이동이 활발하고 무작위적이라 지극히 복잡하여 여기서도 내게 유용한 정보들을 찾아 취합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마냥 엉킨 실타래와 같은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헤아려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문학적 통찰'의 요지 또한 그것이 아니었던가? 미래에 대해 제대로 예측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이 그렇다. 그런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만드냐고?

 워낙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이 한정된 지면으로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본적 태도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어떤 이념이나 상황을 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태도란, 쉽게 풀이해 말하자면,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다. 눈앞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 여기고 자기 생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조사하여 그것이 내 앞에 도래하게 된 과정이나 아래 놓여 있는 동기도 살펴 이면에 감춰진 내막도 헤아리려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내가 낙수효과나 양적완화를 말했던 것도 이와 관련있다. 그 둘은 이면에 깃든 내막을 짚어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쉽사리 속아 넘어간 대표적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정말 저자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그러므로 제목인 '세계화의 종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책은 세계화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거의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세계화'가 이제 쓸모없는 개념이 되었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이 더욱 주력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처럼 왜곡되고 본말이 전도된 세계화 관념을 우리의 뇌리에서 불식(拂拭)하고 보다 올바른 세계화의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시각 교정이다. 그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화'와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하나를 취하면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화를 원하는 사람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 무작정 반대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화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오직 한 쪽만 보고 생각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티븐 D 킹은 그동안 인류 역사에 있었던 세계화 노력을 설명하면서 그 어떤 국면에서도 이면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4년, 44개국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이 회의 결과 전후 경제와 금융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이 될 세 개의 제도가 탄생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그리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일원화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걸음이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미국의 속셈은 사실 그것에 있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그 때 미국이 의욕적으로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려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는 세계에 영국과 같은 제국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으려는 자국 이기주의의 발로였다. 이처럼 세계화의 모든 국면엔 사실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는 현재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실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마의 산'에 등장하는 다보스의 요양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실은 '다보스 포럼'의 실체가 그 요양원의 다음과 같은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


 그들은 온종일 먹고, 생각하고, 발코니에 앉아 휴식 치료를 하면서 동료 환자에게 욕정을 느끼고, 기막히게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른 폐병 환자의 성적인 장난 소리를 듣고, 가끔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기흉에 걸린 허약한 폐로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많은 경우 불가피하게도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p. 132)


 '세계화'나 '다보스 포럼'이나 모두 우리는 하나라고 소리치며 저마다 이타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면엔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면모만 가득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이뤄지는 공정 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가하는 경제 개방 압력에서도 허다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서 잘 설명했듯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실 개방을 거부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정책적인 조치를 취한 데 있었다. 수입품에 많은 관세를 매기는 굳건한 보호무역주의와 외국과의 경쟁에 뒤처진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그런 정책들이 오늘의 강대국을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강대국들은 자기가 경험한 바 약소국들이 어떻게 해야 부강해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에게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완전히 개방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 더 많은 자본과 권력 그리고 발달된 기술을 가진 강대국이 약소국과의 경쟁에 있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이 공정한 무역을 해야 한다면서 약소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한 마디로 강대국이 이익을 획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방해물들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한 공정의 진짜 의미는 불공정이었고 그들이 말한 '세계화'란 자기보다 약한 국가가 거기에 속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노력들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50년부터 2000년까지 전 세계 지니계수를 측정한 그래프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며 클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다. 세계화는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심화할수록 세계적인 불평등 정도도 더 심해졌다는 게 그래프로 분명히 확인된다. 세계화는 그것을 찬양하는 사람이 주장하듯 평평하지 못한 운동장을 평평한 곳으로 만드는 게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모든 '세계화'의 발자취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래'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 굳이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저자 자신이 국가의 이익을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역사는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며 설령 그것이 된다고 한들 항구하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신화와 역사의 해석도 달라진다. 그러니 이것이 진리다 하고 내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에는 영원한 '국제 공동체'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들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대로 행동하며,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몇 주나 몇 달, 몇 년, 때로는 몇십 년까지도 유지하지만, 동맹이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한편, 각 나라의 이익을 규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신화와 역사이며,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경이와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부끄러움의 원천에 가깝다.(p. 146)


 그건 곧 세이렌의 노래에 현혹되는 것과 같다. 그 노래에 무작정 도취되면 남아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세계화'나 '이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눈 앞의 친절한 미소와 들리는 허황된 말만 믿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자신을 기다리는 건 끝내 파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저자가 국가 이익마저 실은 신화와 역사의 해석에 불과하다며 누군가의 해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말고 언제나 그 이면을 살피고 헤아리려 노력하라고 독자에게 누누이 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길어낸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훈은 작가가 서문에 제시한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여섯 개의 명제에도 깃들어 있다.


첫째,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인 진보로 국경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화는 얼마든지 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둘째, 세계화를 증진시킨다고 믿었던 과학 기술이 오히려 세계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셋째, 경제 성장이 국가 간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반면 국가 내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현상은 한 국가가 국제적 생활 수준에 비추어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국내의 사회, 경제적 안정 추구 사이의 긴장 또한 필연적으로 고조시킨다.

넷째, 21세기의 거대한 이민 물결이 국내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다섯째, 세계화 진전에 기여했던 국제 기구들이 신뢰를 잃어간다. 

여섯째, 세계화엔 한가지 버전만 있는 게 아니다. 냉전 시대가 두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19세기 제국주의 경쟁 때처럼 다수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p. 12 ~ 13에 나온 것을 개인적으로 정리함.)


 여기서 우리는 이 명제들이 무언가에 대한 반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명제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실 지금까지 세계화를 긍정하고 그 추세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 주장했던 자들이 제시했던 근거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들이 세계화를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국경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세계화 흐름을 과학기술이 통신과 고통을 한껏 발달시켜 가속할 것이라 내다 보았으며 국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국내의 불평등도 해소될 거라며 세계화를 찬양하기 바빴다. 또한, 거센 이민의 물결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한없이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새뮤얼 헌팅턴이 예언했던 '문명의 충돌'을 조소 거리로 만들 것이라 여겼고 앞으로는 국제기구가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서 열강들이 과거처럼 약소국에 큰소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이 모든 것은 현재 하나도 들어맞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저자가 단순히 그 지지와 근거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핵심 명제들을 만들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여기엔 그보다 훨씬 깊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의 핵심 명제를 굳이 세계화와 그 심화의 근거들에 대한 반박으로 형성한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면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면을 헤아릴 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 지는 이 책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지만 특별히 3부, '21세기의 도전'이 압권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서 세계화를 더욱 진전시킬 것이라 여겨졌던, 이민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돈이 실은 거꾸로 점점 더 강하게 세계화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걸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는 것을 단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우리를 현혹하고 판단을 착란하게 만드는 가짜 뉴스와 정보들이 횡행하는 요즘엔 더욱 그렇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당부하는 세계화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대로 그 반대에 있는 국가의 이기주의적 면모를 대할 때도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응원 또는 비난을 하기 전에 그 근저에 가로 놓여 있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체적 모습을 이루었는지 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선동으로 장차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브렉시트'를 찬성한 영국 민중처럼 나중에 더 뼈아픈 후회를 남길테니까 말이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정책 결정자들은 돈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다른 나라로 떠넘길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자꾸 할수록 세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분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승자 독식의 양상을 더욱 인식할수록 점점 더 세계화를 뒤로 돌리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p. 258)


 세계화이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든, 어느 것을 대하더라도 섣부른 예단으로 낙관이나 비관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쉽게 굴하지 않고 그나마 잔존하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최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세계화의 종말'을 쓴 궁극적인 동기도 바로 그런 사유와 실천의 움직임에 대한 희구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래란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것에서 발아되고 결국 그것이 모이고 쌓여 구현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오늘의 현명한 생각과 행동이 현명한 미래를 낳는다. 분명 '세계화의 종말'은 그런 미래를 출산하는데 좋은 산파가 되어줄 것이다.


 어떤 이에게 공정이 다른 이에겐 불공정이었듯, 누군가에게 종말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일 것이다. 다가올 세상이 부디 많은 이들에게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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