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에는 정신분석 - 노답 한국 사회의 증상 읽기 우리 시대의 질문 4
김서영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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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분석은 개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개인을 제대로 정신분석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에 대한 정신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은 그릇 속 물과 같아서 사회가 흔들리면서 만들어내는 파동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미 주체라는 것 자체가 '대타자'라는 상징 질서 안에 편입되면 더 이상 주체로써 기능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사회 속 '나'라는 주체는 사회가 짜놓은 의미망 위에 찍어 놓은 하나의 좌표와 같다. 그러니 그 좌표만 분석해서는 지금 개인의 처지가 어떠한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진정한 해석은 오로지 그 좌표가 찍혀 있는 지도 전체를 헤아려야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사회에 대해서 정신분석을 해야 한다. 이번에 나온 '헬조선에는 정신분석'은 바로 이렇게 현재 한국 사회의 중요한 병리적 증상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정신 분석을 해 보는 책이다.


 원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연재된 것을 모은 책으로 '한국라깡과현대정신분석학회' 소속 9명의 학자들이 각자 쓴 9개의 글들이 모여있다. 저마다 다루는 사회 현상이 다르다. 백상현은 최근 들어 한껏 늘어난 멘토 의존 경향을 다루고, 김소연은 공부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현상을 다루며, 이성민은 한국에서만 유독 엄격하게 자리잡은 선후배 관계를 초점으로 한국 특유의 수직적 관계를 분석하며, 정지은은 오포세대에 들어와 달라져 버린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정신분석적으로 되짚는다. 정경훈은 날로 극심해지고 있는 외모 지상주의를 분석하며 김석은 현재 한국을 가장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돈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그리고 이만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혐오와 폭력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홍준기는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세대 갈등과 한껏 높아져만 가는 불안 속에서 추구해야 할 사회적 대안을 모색하며 마지막으로 김서영은 이런 '헬조선'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각 글마다 분석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가 살면서 피부로 부딪히는 것들로 알고 보면 우리 역시 한 번은 이유나 가치 판단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들이다. 그렇기에 라깡이나 바디우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인용되고 이론들이 전개되지만 거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살갑게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서술이 평이하기에 이해에 요구되는 허들이 그리 높지 않지만 말이다. 이런 글들에서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달리 보기'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하나의 예로 멘토 열풍에 대해 분석한 첫 글은, 지그문트 바우만도 사람들이 삶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기 보다 누군가 대신 선택을 알려주기를 바라면서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에 기대려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한 바 있는데, 이 글 역시 비슷한 논지에서 오히려 불안과 우울이야 말로 진정한 주체가 탄생하는 장소라고 말하면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자주 나타나는 텅 빈 풍경을 그 공간의 예로 든다. 사람들은 확고한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해당 사회의 지식과 권위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p. 20)하며 '진리의 순간은 우리 자신을 규정하던 정체성의 지식들이 우리 자신의 자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실패한 순간, 이러한 초과에 대해 우리 자신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파악하려는 시도 속에서 실현'(p. 27)되며 그러므로 불안과 우울 그리고 공포 증상을 통한 내 정체성 붕괴의 경험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실은 시작(p. 31)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텅 빈 시간 속에 고독하게 내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그 때문에 더욱 기댈 멘토를 찾는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 시간과 공간은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 환영해야 할 것이라며 이렇게 평소 우리가 근절하고 싶었던 불안, 우울 그리고 공포가 가진 긍정적 면모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지식과 해야 할 공부는 오로지 내 주체를 길들이거나 위축시킬뿐인 사회의 지식과 권위의 잔여물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횡단하여 내재된 균열이나 그것이 미처 당도하지 못한 외부의 것들이며 진리를 주장하는 그들의 기만에 찬 가면을 벗길 수 있는 계보들에 대한 것이다. 바로 그것을 정신분석이 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정신분석이라는 조금은 색다른 도구로 그간 익숙한 한국 사회 문제들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도록 하기에 더욱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 책은, 지금 '헬조선'에 누벼져 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관심을 가져보았다면 꼭 읽어볼 것을 감히 추천드리고 싶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얻는 게 많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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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 -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
슬라보예 지젝 지음, 정혁현 옮김 / 인간사랑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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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의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의 원래 제목은 '절대적 되튐'이다.

 되튐은 원래 화학 용어로 어떤 물체나 입자에 전자기파나 고속 입자가 와서 닿을 경우 운동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서 물체 또는 입자가 도로 튀어나가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되튐이란 부정(否定)의 운동이다. 그 되튐에 지젝은 '절대적'이란 말을 붙였다. 절대는 헤겔이 즐겨 사용했던 말이다. 대표적으론 '절대 정신'이 있다. 헤겔에게 절대란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절대적 되튐이란 절대적 부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측면에서 부정이란 정립에 대한 반정립으로, 절대적 부정이라 함은 아무리 해도 종합적 정립에 이르지 못함을 말한다. 절대적 부정이란 메워질 수 없는 구멍,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다.


 지젝은 흔히 '포스트 모던 시대의 코뮤니스트'로 평가 받는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지하에 묻어 버린 거대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생명을 다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며 레닌 식의 대중 혁명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가 변증법을 통해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기 전인 본래 모습의 '헤겔'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헤겔의 진정한 유산을 아직 우리가 상속받지 못했다고 여긴다. 주체에 대해, 유물론에 대해, 혁명에 대해 헤겔은 우리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말들이 많다. 아니 이미 들린 말들도 오해로 점철되어 있다. 지젝은 그 오해를 불식시키려 하고 미처 듣지 못한 언어를 찾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에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이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무엇보다 지우고자 하는 것. 그것은 악셀 호넷이나 로버트 피핀이 형성한 헤겔의 모습. 그러니까 '상호 인정'의 헤겔이다. 지젝은 그것을 '기가 꺽인 자유주의적 헤겔'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젝에게 헤겔의 생명은 인정이나 그 인정을 통해 서로 하나 되는 종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이 아닌 적대, 영원히 종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절대적 부정에 있기 때문이다. 일단 주체부터 부정의 산물이다. 피핀의 상호 인정이 가능하려면 타자를 인정하는 주체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런 주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인다. 왜냐하면 피핀 식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상징 질서 내에 있어야 하는데, 상징 질서 즉 대타자에 편입된 주체는 지젝이 보기에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상징적 좌표 들의 빽빽한 짜임 외부 뿐이다. 헤겔을 경유하여 지젝이 주체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는 주체로 정립되는 순간 주체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주체는 결코 정립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현재의 행위를 통해 소급적으로 정립될 뿐이다. 현재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계기가 되어 과거 자신의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젝의 주체다. 때문에 주체는 늘 완전한 자신을 누릴 수 없다. 그는 늘 자신에게 뭔가 빠져 있음을, 나 자신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함을 느낀다. 그렇게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그는 현재의 자신이 아니라 늘 과거로 소급하여 자신을 정립한다. 그 때 주체가 출현한다. 그 과거란 것은 언제나 소급하는 현재의 시점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소급을 통해 출현하는 주체도 한없이 임시적이고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체는 늘 부정에 의해 자신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제목을 그대로 따와서 말하자면 되튐이야 말로 주체의 형성 작용인 것이다. 나아가 지젝은 그런 주체들이 모여서 만드는 사회 운동 역시 실은 부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주 상생을 말하고 조화를 말한다. 가진자들도, 가지지 못한 자들도 한결같이 서로에게 그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지젝은 그것이 그저 거짓 연기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하나의 예를 든다. 레비 스트로스가 '구조 인류학'에서 대서양 부족들 중 하나인 원네바고 부족 마을 건물들 공간적 배치에 대한 분석이다. 그 부족은 공교롭게도 '위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하는 집단과 '아래에서 온 자들'이라 불리는 지배 당하는 집단, 이렇게 두 집단으로 확고히 분리되어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두 집단에게 지금의 마을 공간 배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지배하는 집단은 마을에 배치된 집들이 중앙을 둘러싼 하나의 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배 당하는 집단은  비가시적인 경계로 엄격히 분열된 두 개의 다른 마을로 보았다. 분명 같은 공간적 배치를 보았지만 해석은 이렇게나 달랐다. 사회적 공간에 대한 인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시각에 좌우된다. 그리고 본다는 것은 단순히 관찰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를 드러낸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사실에다 투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각은 일종의 바람(desire)이다. 그렇게 지젝은 두 집단의 시각이 그들 스스로 가지고 있는 외상적인 중핵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외상적인 중핵, '그것은 마을 주민들이 공동체를 조화로운 전체로 안정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사회적 관계의 불균형을 상징화하거나 해명 혹은 내면화 하거나 그것과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적대'(p. 172)를 말한다. 지젝은 적대, 이것이야 말로 실재라 말한다. 주체는 외상을 통해 실재와 대면하는데, 바로 이 적대가 주체들의 외상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쓰는 조화, 상생 같은 단어는 사실 이런 적대를 교묘하게 위장한 가면이다. 조금만 생각해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만 따져 봐도, 위에 있는 자들이 하는 조화나 상생의 진심은 사실 '우리가 하는 일에 제발 딴지 좀 걸지 마라. 네 놈들은 그저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르기만 하면 돼!'인 것을 알 수 있고, 아래에 있는 자들의 상생은 '너희들은 너무 많이 가졌어. 이제 그것을 나눠 줄 때야.'인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실은 이렇게 서로에 대해 분명한 적대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말로만 그것을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지젝은 본질이 이렇다면 그것을 감출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가 헤겔의 복권을 통해 진정 추구하는 것도 국가에 의해 구조적으로 가리워진 적대적 폭력을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내기 위해서다. 절대적 부정, 그것은 절대적 적대이기도 하다. 그 적대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상징적 조작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오물이다. 국가는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 어떻게든 그것을 세탁하려 하고 적대의 기를 꺾으려 하지만 지금의 백만 촛불처럼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고 있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단번에 그리고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지젝은 그 출현의 순간을 믿는다. 하지만 분명 많은 이들이 그의 믿음을 몽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고, 당신은 잘못된 플랫폼에서 오지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 뒤에 놓여 있는 압도적인 시간의 과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냐고.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개인화 되었고, 인지 자본주의는 적대 보다는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주체란 어차피 과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과거의 그가 무엇이든 현재의 그에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주체가 되튐으로 형성된다고 믿고 있으니까.


 주체는 언제나 이미 그것의 재현 속에서 사라지는 X이다. (...) 물론 우리는 과거의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가상적 차원 뿐이다. 근본적으로 어떤 것이 새로 출현할 때, 이 새로운 것은 자신의 가능성 및 그 자신의 원인들과 조건들마저 소급적으로 창조한다. 하나의 잠재성은 과거의 현실 속으로 삽입될 수 있다.(p. 313)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하느냐를 통해 과거는 소급적으로 형성된다. 현재의 주체 행위에 되튀어 과거의 파장이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단절을 가져오고 그 시간과 함께 움직이는 상징 질서의 그물망에서 빠져 나오도록 돕는다. 그래서 되튐은 진정한 자유에 속한다. 지젝은 말한다. 칸트가 실천 철학에서 말한 자유는 사실 불가능한 실재라고. 왜냐하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위는 우리가 한 행위가 정말로 자유로운 행위였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불안을 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진정으로 자유로웠을 가능성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불안을 어떤 병리적인 동기로 환원함으로써 이러한 외상을 길들일 가능성이다.(p. 527)


 병리적인 것, 불안, 우울증. 이것이야말로 주체를 주체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그 모든 적대적 증상들이야말로 내가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우리는 이 말을 얼른 납득하기 어렵다. 안정과 행복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외상을 대타자의 요구에 따라 길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아닌 나가 되어 나인 것으로 알고 사는 가짜 나일 뿐이다. 절대적 되툄은 그런 가짜 나를 찢고 진짜 나를 되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사회가 은폐하고 왜곡하는 안정과 평화의 기만적인 가면 또한 찢는 과정이다. 그 기만의 언어와 정보 왜곡 속에 세월호 아이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무구한 생명들이 희생되고 상처 입었던가. '박근혜 게이트'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를 길들인 대타자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민낯에 대해 많은 이들은 거리로 나가 촛불을 밝혔다. 광화문 거리를 가득 메웠던 적대의 불빛. 그것은 진정한 주체의 강물이었고 자유의 파도였다. 우리는 그렇게 새로이 태어났고 역사도 태어났다. 바울의 이 말 그대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완전한 새것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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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리맨 2018-02-0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봤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이번 미국 대선 결과는 결국 이제는 내수가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듯하다.

 이번 미국 대선의 승패를 결정지은 것이 미국 백인 중산층인 것을 감안하면

 역시 이런저런 자유무역협정으로 해외에서 들여오는 값싼 수입품 때문에 미국 내 산업이 망한 것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갈수록 붕괴되어만 가는 중산층의 불만이 이번 대선을 계기로 결집해 폭발한 것이다.

 미국은 이제 보호무역주의로 나갈 것이다.

 더이상 우리나라가 고수했던 대기업 중심의 성장 주의도 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경제정책을 근본부터 뒤집어 엎고 내수 진작 중심의 틀을 짜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이걸로 싸드는 이제 설치 되지 못할 것 같다. 트럼프는 먼로식의 고립 주의를 지향하므로

 중국이 아시아에서 뭘하든 별 관심이 없을 것이기에.

(이것 하나는 좋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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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1-0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미국은 어찌되었건 헤쳐나갈 잠재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우리나라의 지금 현재이지.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옛 속담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ICE-9 2016-11-09 16:25   좋아요 1 | URL
저도 격하게 동감합니다^^ 솔직히 무당이 수렴청정을 하고 온갖 신을 다 끌어들인 굿판을 벌이고 전봉준과 접신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장관 후보에 오르는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가 미국을 걱정하는 것은 넌센스죠.^^
 
인민이란 무엇인가 컨템포러리 총서 2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서용순 외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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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민간인이 대통령을 조종하고 마음껏 국정 농단을 행하고 있는 와중이다 보니 '국민주권'이란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주주의의 위기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재검토 되고 있는 말이 '국민'이라는 말이다. 학술적인 측면에서는 '국민' 보다는 '인민'이라는 말이 더 보편적으로 쓰인다. 사실 역사적으로 국민주권이 기원이 되는 것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시에예스나 루소는 '인민 주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도 '우리는 인민의 의지에 의해 여기에 있다.'였다.


 원래는 국적을 초월한 개념이었는데, 우리에게선 국적에 한계지어진 개념이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분단 상황과 상관있을 것이다. 북쪽에 있는 정권이 공공연히 인민 정부라는 말을 운운했으니, 쓸 수 없었던 것이리라. 아무튼 알랭 바디우와 피에르 부르디외 그리고 주디스 버틀로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여기에 사드리 키아리와 자크 랑시에르까지 가세한 오늘날의 인민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는 여섯 개의 논문이 모인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여기저기서 현실화되고 있는 요즘에 다시금 재검토되고 재확인되어야 할 인민의 의미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는 역시 과정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그답게 '인민'이란 결코 국적으로 제한 받아서도, 완성형의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곤란하다고 말하며 인민이란 어디까지나 국제주의적이어야 하고 현재 있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인민이 국가의 승인을 받고, 현재적 상태로 규정되어 그 자체로 인민 외부의 것에 대해 인민 자체가 폭력적인 상황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이것은 그대로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도 이어지는데, 그녀 역시 인민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 본다. 그녀는 특히나 집회와 시위가 인민의 출현 장소로 보는데, 그렇게 모두가 함께 모여 육체적인 발화로서 스스로 인민을 말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 호출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버틀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거리에 나가 지금 잘못된 것에 대해 국가에게 구체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진짜 인민(우리나라 용어로 하자면 국민)이 된다. 여섯 개의 논문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민이 결코 국적으로 분리되지도 현재 상태로 고정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인민은 국적을 초월하며 더구나 현재 상태가 절대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인민이라는 개념은 필요에 따라,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공존해야 할 모두가 결국엔 하나의 인민이 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마도 이러한 석학들의 인민에 대한 정의는 최근 시리아 난민 사태로 더욱 빚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이주민 유입으로 인한 갈등에 중요한 성찰의 지점들을 제공할 것 같다. 영국은 과거 인민의 개념에 함몰되어 외부에서 유입되는 이주민들을 같은 인민으로 보지 않으려 했고 결국 브렉시트까지 감행하고 말았다. 이주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독일조차 내분의 반발로 메르켈 총리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처음 등장한 인민은 원래 포용과 관용의 의미가 더 컸다. 그랬던 인민이 어쩌다 이렇게나 협소해져 버린 것일까? 여기에 대해 사드리 키아리는 이렇게 말한다.


 공화국의 그리고/또는 '국가정체성'의 '가치들'이 식민지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인들의 '문화들' 신앙들과 호환 불가능하다는 명목 아래, 밀려드는 이민자들을 통제하고 중단시키며, '프랑스인의' 일자리를 보존하고, 테러리즘이나 범조에 맞서 싸울 '필요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민 개념은 백인, 유럽인, 기독교인, 소위 '토박이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좁혀졌다. 달리 말해, 이 정책은 프랑스 인민이라는 기운 빠진 개념을 가장 쉬운 곳에서,즉 비백인에 맞서 재건설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것이다.(p. 158)


 이렇게 지금 우리가 널리 공유하는 국적에 기반한 인민, 즉 국민이라는 개념은 객관적 진리를 쫓아 창안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뭔가에 반대하여, 누구를 배제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개념 자체에 이미 배타적인 요소들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인민이라는 말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도 북측을 배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왜 여섯 명의 저자가 국적이 아닌 국제를, 현재가 아닌 미래를 인민에게 가져오려는지 이로써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작은 순수했더라도 어떤 말이든 시간이 흐르는동안 오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 말을 가지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속고, 선동되어 오염된 언어를 받아들인 채 또 시간이 흐르게 되면 그것이 상식이 되고 진리로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이 도리어 원래는 공존해야 할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말이든, 무턱대고 받아들이고 쓰기 보다는 원래의 의미는 어떠한지,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늘 살펴보고 성찰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인민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서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인민(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달리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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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6-11-0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인데 많이 안 읽히는 거 같아 아쉬웠어요. 헤르메스님 리뷰로 오랜만에 다시 만나 반갑네요^^

ICE-9 2016-11-04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갈마님은 이미 보셨군요. 말씀대로 인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습니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 - 아주 사적인 알츠하이머의 기록
메릴 코머 지음, 윤진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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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사람은 이런저런 많은 타격을 받기 마련이지만, 치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둔중한 타격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한 때,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기억을 온전히 그대로 가진 채로 육신이 죽는 것과 육신은 비록 살아있더라도 자신을 포함하여 살면서 가진 모든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 중에 어느 게 더 나을까 하고. 문득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거기서 인위적으로 규정된 수명이 다해, 자신을 만든 사람을 찾아 수명을 늘리려 지구에 잠입한 안드로이드 룻거 하우어는 결국 그 일을 실패하고 수명이 다해 죽으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할 것들을 봤어.

 오리온 좌의 어깨 위에서 불을 뿜던 공격함들.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 암흑에서 명멸하던 C 광선 하며.

 하지만 이제 모두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블레이드 러너'에서 기억은 정체성을 의미한다. 영화는 초반부터 기억을 통해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별하는 장면을 통해 그것을 나타낸다. 기억을 잃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치매는 육신은 살았어도 정신적으론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품위라는 게 있다. 노년의 품위란 살아온 모든 것이 어디에 이르렀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식이다. 치매는 그것을 스스로 파괴시킨다. 정말 점잖고 반듯하게 살아와 누구에게나 존경받던 사람이 치매에 걸리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연거푸 내뱉고 주위 사람들에게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등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을 몇 번 목격한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나는 죽더라도 지금 가지고 있는 기억을 가진 채로 죽고 싶다. 부디 내가 아닌 다른 나가 되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운명은 사람의 뜻과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미국의 하비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였고 미국국립보건원의 유능한 의사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미국에서 68초마다 한 명 생긴다는 알츠하이머가 찾아오고 말았다. 그것도 아직은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인 56세라는 이른 나이에 그만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만 것이다. 치매와 알츠하이머는 약간 다르다. 치매는 정신 질환만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신체까지 영향 받는다. 몸을 거의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알츠하이머는 치매의 하위 범주로 들어간다. 그토록 자신의 삶을 잘 통제하던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리자마자 차츰 통제가 무너지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잇단 폭언을 일삼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식의 결혼식 날, 축사를 읊는 자리에서 그것과 아무 상관도 없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주구장창 늘어놓아 하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의 사회적 평가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가 계속되고 결국 직장에서도 밀려나 집에만 있게 된다. 그 후로 20년 동안 내내.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계속 돌본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아내, 메릴 코머다. 그녀로선 정말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하비가 알츠하이머에 걸렸을 때는 메릴이 그와 재혼한지(하비는 세 번째 결혼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내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그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호전의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내내 낯선 사람이 되는 그와 아주 오랜 시간을. 메릴 코머는 그 시간을 한 권의 수기로 발간했다. 그것이 바로 이 책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이며, 제목은 그렇게 절로 지어지게 되었다.



 나도 치매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 치매를 돌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정보가 부족하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치매에 걸린다는 것은 살면서 당하는 가장 낯설고 황망하기 그지 없는 경험이라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쩔쩔매게 되는데, 더구나 치매의 증상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기에 그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메릴 코머도 비슷했다.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내 서가에는 치매 환자 돌보기에 관한 책들이 잔뜩 꽂혀 있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정보는 항상 책에서 빠져 있다. 환자의 두뇌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얽혀 있고 각기 다른 특징이 있다. 나는 치매 환자를 돌볼 때 공통되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p. 16)


 그녀가 이 수기를 쓰게 된 이유도 아마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 책에 하비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쳐온 모든 과정을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상세하고 정확하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분명 치매 환자를 돌보는 미국의 1천 5백만 명의 보호자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수기에서 필요한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정말 동의하는 것이지만, 메릴 코머의 말대로 보호자 역시 치매의 간접 희생자로, 사회적 보호의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이가 많든 적든 치매 환자를 돌보는 보호자는 뇌 질환, 충격에 따른 뇌 손상, 기억력 감퇴로 인한 만성 질환 등에 시달린다. 보호자는 치매 환자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다.(p. 19)


 하지만 우리 사회는 치매 환자도, 그 보호자도 오로지 가족의 문제로 국한시키고만 있다. 그래서 짊어지게 되는 생계를 위협할 정도의 비용 부담, 가족 생활의 파괴와 해체에 대해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이의 수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 혹은 그녀가 받고 있는 돌봄으로 인한 고통을 사회에 환기시켜 그 보호를 위해 필요한 움직임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내게는 개인적인 경험도 있어, 상당히 편치 않은 독서였다. 치매는 정말 무서운 병이다. 하지만 그 무서움을 옆에서 그걸 함께 지켜본 자만이 안다는 게 문제다. 지근 거리에서 치매 환자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이에게 치매는 그저 남의 일일 뿐이다. 그러니 혼자 치매 환자를 돌보며 고생하는 이에게 '어쩌겠어, 그게 자식된 도리인 걸. 자네가 참아야지.'와 같은 말을 참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이며, 그저 개인이 감수할 문제로 치환할 뿐, 사회적으로 널리 공론화 되지도 않는 것이다. 치매 환자가 갈수록 늘어나 이제는 정말 사회 차원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는 데도 말이다. 메릴 코머의 이런 말을 들으면 과연 언제까지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둘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직장일과 간병을 곡예하듯 병행하다가, 경력을 포기하고 시간제 일자리를 찾고, 어쩔 수 없이 조기에 퇴직을 하고, 스스로의 노후 준비를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 중 누구도 자기자신을 순교자나 이타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우리가 돌보고 있는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p. 245)


치매 환자도 문제지만 보호자가 당하는 고통과 삶의 위험을 일깨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메릴 코머의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정말 한 개인이 짊어지기엔 너무나 큰 짐이다. 최근엔 민간 요양소도 많이 늘어났다지만, 여전히 그 곳에 보내는 게 부담이 되는 가정도 많다. 정보도 부족하고 늘 우왕좌왕 하다가 치매 증상이 악화되거나 보호자들의 고통과 희생이 잘 이해되거나 소통되지 않아서 아니 되었을 수도 있었던 가정 붕괴가 일어나는 경우도 잦다. 국가 차원에서 치매 환자의 관리와 보호자들의 보호가 정녕 시급한 시점이다. 이 책 때문에라도 많은 분들이 문제에 통감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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