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인문학 - 새벽에 홀로 깨어 나를 만나는
김승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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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명상에 관심이 있었다. 이를테면 선종의 좌선 같은 것. 달마 대사가 했다고 하는 면벽수련. 하염없이 벽만 바라보고 앉아서 내면의 세계에 칩거하는 것을 은근히 동경했다. 세계를 지우고 궁극엔 나를 지우는 그런 일들을. 그만큼 내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는 그랬다. 죽음과 참 가까이 있었던 시절. 이젠 다 지나간 한 때의 이야기다. 언제 그랬나 싶게 한없이 일상인이 되어버린 나. 다름 사람들과 똑같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일상 속에서 몸과 마음 모두가 거기에 찌든 피로로 버겁다 보니 바라는 것은 그저 수면이나 휴식일 뿐, 명상만큼 고차원적인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게 오래도록 명상이란 걸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걸 할 만한 시간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문득 이 책을 보았을 때 시선이 한동안 머물렀던 것 같다. 마치 어른이 되고나서 우연히 어릴 때 가장 많이 갖고 놀았던 장난감을 발견하게 된 것 마냥. '아, 그래. 예전엔 이런 것도 했었지.'하는 느낌이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까지 담아 새삼스럽게 되돌아 보게 되는 것. 김승호의 '명상 인문학'을 손에 들게 된 건 이처럼 그리움이란 원심력의 추동이었다.




 저자는 모르는 사람인데 주역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란다. 주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명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하여 더욱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이 취하고 있는 근본 전제에 개인적으로 허들이 존재했다. 바로 영육 이원론이다. 이 책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별개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거대 전제 삼아 명상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영혼의 존재도, 육체와 별개로 존재하는 영혼도 잘 수긍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이렇게 만들지 않으려면 저자가 왜 영혼이 존재하고 그것도 육체와 별개의 것인지에 대해 제대로 된 근거를 들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는데 이조차 너무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기에 읽다보면  '이 무슨 공상 속 객담이냐!' 하는 반응을 부를 수 있다.


 특별히 이런 부분.


 햔편, 밖으로 나온 태아의 내면에서는 또 다른 대단한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태아의 영혼이 뇌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하는 것이다.(-> 비문 같다.  '그것은 태아의 영혼이 뇌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하는 것이다.'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는 태어난 이후 자기 몸을 이루고 지배하기 위함이다. 또 한 몸 밖에서 오는 여러가지 신호를 감지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아이의 영혼은 점점 뇌로 올라간다. 호흡이 들뜨고 얕아지기 시작한다. (p. 77)


 영혼이 몸을 장악하기 위해 뇌로 올라가다니. 여기서 SF 호러 영화를 떠올리는 게 비단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저자는 '황제내경'을 근거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황제내경'이란 한나라 때 나온 지금으로 치면 의학책 같은 것으로 한의학의 원형이 되는 책이다. 그 '황제내경' 제2장에 나온 '혼령은 위(머리)에 잡고'에 따라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혼령은 어디서 나타나는 것인지(인간은 출생할 때 몸과 함께 혼령도 출산하는 것일까? 그것이 나중에 합쳐진 것이 태아란 말일까? 그렇다면 그 혼령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산모의 복중에서? 아니면 저 위 하늘 어딘가에서? 그것도 아니면 이것은 정말 상상하는 것조차 싫을 정도의 호러 같은 일이지만 속세를 유영하는 어떤 혼령이 출산되기를 기다렸다가 휙 끼어드는 것일까?) 또 바로 뒤에서 말하겠지만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인간의 의식과 관련지어 긍정하는데, 여기에 따르자면 인간은 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영혼이 장악하기 전의 두뇌는 과연 무엇일까? 영혼이 의식의 전부라면 인간은 왜 두뇌라는, 인간 생활 에너지의 80% 가까이 쓰는 불필요한 낭비 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바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나의 몸, 나의 의식'이라는 자기 의식 일 수도 있다. 혼령이 뇌를 지배해야 비로서 나라는 주체가 태어난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혼령이 지배하기 전에 감각 기관에서 오는 정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두뇌는 '나'라는 걸 모르는 것일까? '나'가 아니면 어떻게 쏟아져 들어오는 감각 기관들의 정보를 취합 분류하고 적절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 자기 의식이 없다고 하는 동물들처럼. 혼령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하면 태아의 행위는 아무리 봐도 인간 보다는 동물에 가까우니 이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뭐, 이런 반론들이 무한정 솓구치는데 여하튼 저자는 영혼의 존재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긍정하고 있다.


 영혼이란 무엇보다도 행위에 대한 주체로서 존재의 당위성이 인정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영혼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역시 그것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태어난 것뿐, 자유 선택이 아니므로 영혼'이'(책엔 '의'로 되어있는데 오타 같다.) 없다는 주장은 그의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인간은 생체로봇일 뿐, 모든 판단은 자동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판단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 주장에 따르면 '그'는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다.(p. 37)


 나름 논리가 잘 서 있긴 하나 그렇다고 영혼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영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읽다보면 영혼의 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보인다. 어떤 때 영혼은 의식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써 놓았다가 또 어떤 때는 영혼이 의식 전반을 포함하는 것으로 써 놓기도 한다.) 생각하고 질문한다는 것이 꼭 영혼만의 기능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반문이 가능해 보인다. 현재 뇌과학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의식은 오로지 두뇌 영역의 것으로, 영혼 없이도 얼마든지 성립과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조금은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영육 이원론을 굳게 밀고 나가는 것은 주역 사상의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주역에서는 이 세상을 음양의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 음양이 그 말에서 우리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그늘과 빛 같은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는 음은 물질이고 양은 물질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을 채우고 부피가 있는 것이 '음'이며 그런 것이 없는 게 '양'이다.


 영혼도 양이고 귀신도 양이다. 온갖 괴상한 것은 다 양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세상엔 음과 양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물질과 괴상한 것만 존재한다.(p. 89)


 세상의 본질을 이런 대립적인 것들의 평형 상태로 보는 것이 바로 주역이 가진 세상에 대한 근본 시선이기도 하다. 저자의 영혼에 대한 설명은 바로 이런 주역에 근거한 것이며 지금 우리 자신은 음이 되는 육체와 양이 되는 영혼이 평형을 이룬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적어도 내가 보기엔 무리가 많이 가는 설명으로 내내 영혼에 대해 말해왔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가 생각하는 명상의 의미도 밝혀지는 것 같다. 지속적으로 영혼을 상기하는 명상을 통해 평형 상태를 잘 유지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특히나 2부를 읽다보면 잘 느껴지는데 그 2부는 명상을 하는 방법에 대해 장소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자세라든가 하는 식으로 참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은 내면의 침잠을 방해하는 잡념과 지극히 수동적이 되면 될수록 일어나게 마련인 육체의 반란, 즉 활동하고자 하는 본능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에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명상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음'인 육체에서 솟구치는 본능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마치 접시 돌리기와도 같이, 접시가 계속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명상인 것이다. 본능이 힘을 얻으면 동물적인 욕구가 생기고 번뇌가 뒤따른다. 끝내 평형이 깨어지고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져 처참하게 부서진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 나를 나로서 잘 지속하기 위해 저자는 명상을 가져온다. 이는 명상의 목표를 주역의 원리로 설명하는 제 4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주역의 원리에 기대어 명상의 목표로 내세우는 것이 '부동심'인 것이다.


 부동심은 주역의 괘상으로는 천산돈에 해당되는데, 이는 산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때 산이 하늘을 따라 요동하는가? 산은 그저 산일 뿐, 하늘의 일에 미동도 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늘이란 세상 또는 세상만사인데 그에 대해 산처럼 부동의 자세로 견지하라는 가르침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p. 253)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것. 좌고우면 하지 않는 것. 일희일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부동심'이다. 여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균형 상태. 명상은 바로 이런 것을 가져오려는 시간이다. 내면의 침잠을 통한 지속적인 영혼의 환기로써.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영혼의 존재도, 영육 이원론도 결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 부분은 나름 긍정할만한 게 있다고 생각하여 어쩌면 당신을 아주 지루하게 했을 지도 모를 이 리뷰를 썼다. 통신의 발달로 어디로든 쉽게 연결될 수 있기에 그만큼 더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폭풍우 치는 바다 위 일엽편주처럼 이런 저런 말들에 쉽게 흔들리고 상처 받는 게 요즘의 시대이기에 더욱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서 말이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여기저기서 조작과 선동의 언어가 난무하는 때엔 더더군다나. 


 갑자기 삶을 이야기 하다 불쑥 정치 이야기를 해서 문맥이 좀 난감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새 대통령이, 그것도 비로소 대통령이라고 인정할만한 대통령이 막 통치를 시작한 시점에 지지자들이 이런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 바람이 지나치게 앞서는 바람에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왕 엇나간 김에 내처 계속해 보자면, 나는 말 보다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본다. 거기 매 순간마다 드러난 됨됨이를. 내 신뢰의 근거는 바로 그것이다. 높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빌딩이나 들판이나 다 평지일 뿐이고, 깊은 해구로 들어가면 순수한 농도의 어둠 밖에 없듯이 보다 높이 그리고 깊이 헤아리면 치장과 현혹의 언어들은 다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 법이다. 그 본질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그것이 믿음의 절대 근거가 된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부동심이 된다.


 명상도 아마 그런 노력일 것이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고, 깊이 내려가 헤아리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은 궁극의 자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넘나들기 때문이다. 지금 내 글처럼. 삶에서 정치로, 정치에서 삶으로 막 넘나들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삶이 정치와 다르겠는가? 삶과 정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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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5-11 16: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깊이 헤아리면 치장과 현혹의 언어들은 다 걸러지고 본질만 남는 법이다.

이 구절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갑니다.

언젠가 ‘새벽에 읽는 주역인문학‘을 읽으면서,
님이 말씀하신것과 같은 그 부분이 혼란스러워,
제대로 된 리뷰를 올리지 못했었습니다.
걸래내고 남은 본질이 자꾸 바뀌는 느낌이랄까요.
6권짜리 주역원론이라는 책도 구입했는데, 들춰보지도 못했구요~--;

님의 리뷰를 보니, 깨닫게 되는 부분이 있어 감사인사 남깁니다, 꾸벅~(__)
..

ICE-9 2017-05-13 11:34   좋아요 0 | URL
앗, 양철나무꾼님도 주역을 공부하시는군요. 저도 영혼에 대한 부분에선 꽤 난감해서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럽더군요. 주역의 근본이 음양이니 그런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간신히 납득했습니다만.^^;
그리고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주역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려는 참인데, 좋은 책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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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이름은 삶의 어느 때와 단단히 결박될 때가 있다.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그렇다. 그 이름은 내 20대와 떼어낼 수 없다. 그의 책을 처음 읽었고 더불어 벗하면서 사람과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는 눈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혼돈과 불안의 나날들을 그래도 자맥질을 하며 겨우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영복이라는 구명조끼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랬던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것도 예전 인기를 끌었던 가요의 제목처럼 벌써 1년이다. 1주기를 맞이하여 유고집이 나왔다. 그가 살아 생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 중 미처 책으로 엮이지 못한 글들이 여기에 실려있다. 얼레에 무수히 감긴 실처럼 그의 책에 절로 내 질긴 그리움이 거듭 칭칭 감기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렇게 단단하게 얽히고 뭉친 그리움으로 육신 없는 혼의 언어를 소중히 받아든다.



 표지에 눈이 오래 머문다. 저자가 직접 쓴 글자들이 모여 있는 품새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에 있던 내가 떠오른다. 이 글자들의 운집이 그 밤, 나 역시 일원이 되어 내부에서 목을 빼들고 바라봤던 촛불의 행렬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냇물아 흘러 흘러’라는 노랫말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때 바라봤던 촛불의 행진은 문자 그대로 함께 더불어 흘러가는 강물로 보였으니까. 어둠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저마다 작은 빛이라도 되어서 정의가 바로 서고 위계에 상관없이 공정하며 아프고 약한 자의 마음을 먼저 돌볼 줄 아는 데다 사람이 오로지 사람이기에 존중받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묵묵히 흐르고 있는 빛의 강은 그야말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란 그의 말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힘겨운 겨울이었다. 그 겨울, 밤바람을 맞으며 광장에 서 있었던 것은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고 매서운 현실의 칼바람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모두가 너나없이 밤을 낮처럼 밝히는 하나의 숲이 되었던 덕분에 다행히 희망을 만들고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제 막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난파 중인 배에 고리를 걸어 그저 침몰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이 배를 어떻게 수리하고 어느 곳으로 몰고갈지 생각해야 한다. 겨우 결실을 맺기 시작한 희망의 과일이 다시 파과(破果)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책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여겨 대안을 구축하고 실현하는 주체로서 참여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더욱 운명처럼 우리 앞에 도래했다고 여겨진다. 읽어 보니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들이 글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에 있는 글들이 20대에서 70대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서 발표한 것들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마다 변치않고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존재한다. 바위처럼 굳건하고 한결같기에 그의 신념 혹은 근본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 말이다. 바로 '관계 중심'이다. 나는 이것이 중심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1998년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던가. 적어도 내겐 이것이 핵심으로 보인다. 그는 근대까지의 서양 철학이 내내 개별적 존재에게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개별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충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로 인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마저 억압과 저항이 기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은 예전의 그 역시 이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얼른 상상하기 어려운, 무려 20년이라는 긴 수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늘 함께하고자 했던 민중의 밑바닥 현실로 들어갈 수 있어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자신의 꿈에 있어서 바깥과 감옥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꿈을 감옥에서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냉대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많이 배웠고 이론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가진 것도 없고 기댈 데도 없이 오로지 혼자의 몸으로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의 언어가 그들의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기에 제아무리 논리 정연하고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신뢰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왔다. 시야의 지축이 흔들린 것이다. 그 때까지 그는 자기 앞의 사람을 자신이 이끌고 갈, 그만큼 그 사람에겐 자신만의 생각이나 삶의 경험이 없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삶이라는 거대한 맥락은 괄호쳐 버리고 눈 앞에 보이는 모습만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감옥 생활을 통해, 통렬한 절망 뒤에 찾아온 혜안의 시야 속에서 그는 모든 이가 자신만큼 육중하면서도 광대한 삶의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 앞의 존재란 그저 빙산의 일각이며,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체화된 모든 삶의 내막을 다 껴안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p. 50~51)


 바로 존재론에 빠진 서양의 시각이 그것을 무시한 채로 개인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고 그것의 한계란 그대로 그것만 공부한 그의 한계가 되었다. 그런 서양의 시각은 무엇을 낳았던가? 타인을 단순한 존재로 치부한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자신마저 남들에게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결국 개인은 내재된 가치에 상관없이 오로지 겉모습을 이루는 조건에 따라 쉽게 계량화 되었고 무엇과 교환될 수 있는지에 따라서만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관계는 이뤄질 수 없다. 진정한 관계는 공존과 조화가 생명인데, 교환가치는 경쟁과 우열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갈수록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와해되는 것(p. 47)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지 않은 우리의 머리와,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 우리들의 삶 속에 사람 대신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아있는지... 참으로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 183)


 그는 그런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을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만이 가진 고유하고 온전한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저마다 가진 삶의 결을 그의 처지에서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관계론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뼈져린 삶의 경험이 바탕된 것이었기에 한층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모음(母音)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진정한 배움을 감옥 생활이 가져다 주었기에 그는 감옥 생활을 사람들에게 '대학 시절'로 소개한다.


 내가 이것을 모음(母音)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그의 모든 신념과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책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전체에 걸쳐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가 석방 이후에 동양철학 연구에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이나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붓글씨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두 근본엔 '관계 중심'이 있었다. 개별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 보다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동양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붓글씨 또한 그것의 높은 경지는 파격을 통한 균형 잡기에 있고 그것은 관계론적 사고가 없으면 성취되기 어려운 미학인지라 한층 더 수양에 힘을 쓰게 된 것이었다.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중시하기 위하여 고속 도로보다 완만한 속도 속에 풍경을 음미하여 그 안에 있는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었다. 결과 중시는 얼마나 잘 그리고 빨리 이루느냐가 중요하기에 성장과 속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도로의 문화다. 하지만 그것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마저 내포되어 있다. 바로 그 위험이 지금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삼성 중공업의 거제 조선소에서 크레인이 전복하여 7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것도 노동자들이 쉬어야 할 '노동절'에 말이다. 성정과 속도에만 치중한 나머지 당연히 해야 할 안전상의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은 결과였다. 희생당한 그들이 기업으로써는 손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하청 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기에 더욱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수단이 되면 어떤 비극이 찾아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허다하게 일어났던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이없이 삶을 희생당하는 이들이 생겨나야 할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중시했다면, 그 어떤 이도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으로 대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성장과 속도의 혜택마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주머니만 채운다는 사실을 신자유주의 10년을 거쳐 맨 가슴으로 쏟아진 냉수처럼 선명하게 경험한 지금, '자본 논리에 맞서 인간 논리를 지키는 길이 '도로의 문화' 대신 '길의 문화', '길의 정서'를 키워야'(p. 70) 한다는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리라.


 이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해당된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인해 역사를 올바로 세우지 못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그리고 처참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 요즘이 아니던가? 이처럼 역사가 쉽게 오염되는 근본에는 역사가 그저 과거의 사실로 국한되어 그만큼 쉽게 규정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존재론적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대로 역사에도 투영되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무분별한 변질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사 역시 관계론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드러난 하나의 사실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흐름이 표출한 것으로 보고 거기까지 진행되었던 당대의 다양한 움직임과 깊은 내막을 당대의 처지와 한계를 고려하면서 두루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말이다.


역사의 보편적 발전 구도는 오랜 불균형 상태와 일시적인 균형 상태의 교직이다. 이것이 사회 변화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과정으로 파악하는 근거이다. 따라서 발전과 진보의 개념은 과정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취된 이상적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 오는 과정도 아니다.(p. 243)


 이는 특히 진보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꽤 둔중한 경고가 될 것 같다. 출근길의 지하철처럼 종착지만 생각하면 도중의 역들은 그저 시간을 지체시키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만 고집하는 이들에게 현재란 바로 그와 같을 것이다. 자신이 정한 미래의 규격에만 맞추다 보면 현재란 늘 모자라고 부족하게 보이기 마련. 그래서 현재가 가진 장점과 긍정적인 가능성 또한 쉽게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 흔히들 보수는 쉽게 뭉치고 진보는 쉽게 분열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최근 대선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진보가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자신이 선취하려는 이상적 모델을 현실과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그러기 보다는 영국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대로 현재가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체로 나타난 최선의 결과라 생각하고(이것은 현실의 한계를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혁 주체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거나, 대중이 덜 계몽된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좀 더 나은 쪽으로 진전시킬 것인가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면 대화와 협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책엔 오늘날 당면하고 문제들과 관련하여 새겨 듣고 사색할만 말들이 참 많다. 더구나 이 말들은 한 순간 표출된 것들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줄기차게 그의 내면에서 영글어 왔으며 선생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 했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삶 자체를 통해 온전하게 구현된 '관계 중심'은 결국 나와 그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그래서 함께 이 구차한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으로 향해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그 일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양'이라는 말이나 '자기의 삶 속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분단의 상처'나 '개인의 팔자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민족의 팔자'(p. 192)라는 말에서 그것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한 개인을 단면이 아닌 폭과 깊이를 지닌 입체로서의 인식하는 일은 이렇게 별개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삶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인식으로 이어지고 시대의 부조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선도, 부당하게 고통 받고 있는 병실의 구분도 없게 만든다.


 좋은 음식을 받을 때 당신의 ‘밥’이 생각납니다. 따뜻한 겨울 난로를 만날 때 당신의 ‘방’이 생각납니다. 만원 버스 속에서 여자들과 몸 부대낄 때 나는 당신의 ‘밤’을 생각합니다. 도시의 거리와 거리에 넘치는 인파, 그 흔한 보행의 자유 속에서 나는 당신의 묶인 ‘발’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전선에 두고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당신을 병실에 남겨 두고 혼자 퇴원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곳만이 전선이 아니며 그곳만이 병실이 아니라던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p. 257)


 나는 그의 이 고백이 그가 지향하는 '관계 중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가 그 어떤 높은 지위와 좋은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여기엔 내가 속하거나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를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의 주체와 맥락들이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깨달음과 설령 내가 가장 환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 기꺼이 가장 어둔 곳에서 외롭고 아픈 이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초혼처럼 찾아온 그가 내게 전하고 싶은 밀알의 언어라고 믿는다. 더하여 광화문의 겨울밤을 밝혔던 빛의 강이 다음으로 나아갈 바다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나로 국한하자면, 그는 관계와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될 내가 얼레가 되길 바란다고 할 수 있다. 나만 고집하지 않고 계속 타인들과 삶이 가진 다양한 측면들을 나처럼 여기며 감아갈 수 있도록. 그것도 무한정.


 냇물의 생명은 흐르는데 있다. 설사 바다에 다다른다고 해도 냇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일흔이 넘어서까지 과거의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계속 재구성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말이다. 유고를 먹먹한 그리움과 함께 읽고 난 지금, 나도 그 꿈을 꾸어본다. 감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에 기쁨을 느끼는 얼레의 나를.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유동하며 잘 섞이는 냇물의 나를. '떨리는 지남철'과도 같이.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p. 248)


 그렇게 오늘의 내가 아니라 달리 변화될 내일의 나를 더 기대하는 나를. 죽순의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한 힘이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p. 204)고 했던가. 이 순간 가지게 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그런 힘을 가진 마디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려 한다. 죽순의 마디가 그 힘을 뿌리에게서 배우듯이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을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치열하게 껴안겠다고 마음 먹어 본다. 외면도 않고 순응도 없이 보다 많이 품고 깊이 헤아리려 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때까지 선생의 말은 내게 내내 '꽃세움 바람'이 되어주리라.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입니다. 긴 겨울잠으로부터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무성한 잎새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아니라 꽃을 세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 입니다.(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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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워크 - 강렬한 몰입, 최고의 성과
칼 뉴포트 지음, 김태훈 옮김 / 민음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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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력이 떨어져서 고민이다. 그것을 나는 특히 책을 읽을 때 느낀다. 읽다보면 어느 순간 잡념이 끼어들고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읽은 부분을 멍하니 읽고 또 읽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물며 소설을 읽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고 등장 인물마저 헛갈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처음엔 기억력이 떨어져서 그러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최근들어 부쩍 산만해진 탓이었다. 이런 내 모습이 갈수록 실망스러워 뭔가 집중력을 높일만한  묘책 같은 것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책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능력을 만들어준다는 이 책, '딥 워크'를.


 저자는 칼 뉴포트. 현재 조지타운 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조교수라고 한다. 따로 검색을 해 보니 미국에서 공부 잘 하는 사람으로 알아주는 존재였다. 그것도 고도의 집중력에 기반한 학습 방법의 카운셀러로 이름이 높아서 더욱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히 집중력을 증진시켜 줄 뿐만 아니라 왜 우리가 집중력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바로 그것을 앞으로 찾아올 시대 변화와 연계하여 설명해 주는 책이었다. 자기계발서인 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인문학적 성찰까지 덤으로 얻게 되었다고나 할까. 기대했던 것 이상을 수확하게 된 풍성한 독서였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 한다.



 먼저 '딥 워크(DEEP WORK)'란 인지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 붙인 완전한 집중 상태에서 직업적 활동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저자에 의하면 카를 융, 미셸 드 몽테뉴, 마크 트웨인, 우디 알렌, 피터 힉스, 조앤 K 롤링, 빌 게이츠, 닐 스티븐슨 등의 과거와 현재의 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두루 이런 '딥 워크'에 헌신했고 그로 인해 높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딥 워크'의 전통은 지금의 지식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메일이나 SNS, 인터넷을 비롯한 네트워크 도구들 때문이다. 무엇보다 맥킨지가 2012년 행한 조사에 따르자면 현재 미국 지식 노동자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업무 시간의 60% 이상을 전자 통신과 인터넷 검색에 쓰고 있는데 그 중 이메일을 읽고 쓰는 시간만 해도 거의 3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되돌아 보니, 나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때는 업무 시간의 절반을 이메일 읽고 쓰는데만 보내고 있을 때도 있다. 바로 이런 네트워크 도구들이 지식 노동자의 몰입을 방해하고 산만하게 만들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피상적 작업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피상적 작업이란 딥 워크와 정확히 반대되는 말로써 '지적 노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서 다른 것에 정신을 팔아도 얼마든지 수행 가능한 작업'을 일컫는다.


 지금 우리는 고도의 정보화 사회이고 이러한 정보 경제 양상은 줄기차게 가속화 되고 있다. 따라서 딥 워크의 중요성도 앞으로 계속 커질 전망이다. 왜냐하면 정보 경제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계속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려면 복잡한 것을 빠르게 익히는 능력을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용한 가치를 하나 창조하면 거대한 소비자 집단에 쉽게 연결되는 환경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결과물이 그리 뛰어나지 못하면 소비자가 온라인을 통해 다른 것으로 손쉽게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여 성공하고 싶다면 자신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든 최선의 성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눈에 봐도 이 모든 게 쉽지 않아 보인다이만한 일을 해내려면 설령 짧은 시간이라 해도 고도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바로 '딥 워크'의 능력이다. 그래서 칼 뉴포트는 이렇게 '딥 워크'가 앞으로는 성공을 위해 필수적으로 가져야만 하는 초능력으로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몰입은 의미 없는 낡은 능력이 아니라 밥값을 못하는 사람들을 몰아내려 하는 정보 경제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다. 진정한 보상은 페이스북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혁신적으로 분산된 시스템을 잘 구축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딥 워크는 너무나 중요해서 비즈니스 저술가인 에릭 바커의 표현을 빌리면 '21세기의 초능력'으로 간주해야 한다.(p. 19)


 하지만 날로 발달하는 이런 저런 네트워크 도구들 때문에 앞서도 말했듯 지식 노동자의 업무 환경은 갈수록 피상적 작업만 쌓여가는 곳이 되어버린다. '딥 워크'를 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점점 희박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딥 워크 가설'이라는 걸 내놓는다. 이런 식으로 딥 워크의 희소가치가 점점 상승하여, 그 능력을 키우고 자기 삶의 중핵으로 만든 소수만이 앞으로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바로 이 책의 토대를 이루는 개념이기도 하다. 거기에 맞춰 책은 크게 2부로 나눠진다. 1부에서는 이 딥 워크 가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딥 워크를 하고 그것을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공개한다.


 요즘 '제 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대선 때문에 한층 더 유행하게 된 이 말엔 알파고와 같은 인공 지능의 발달로 가까운 미래에 많은 일자리들이 기계로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내재되어 있다. 아니, 조립이나 피자를 굽는 것 같은 단순 노동들은 이미 기계로 대체되고 있다. 운동화를 만드는 나이키나 아디다스 같은 회사의 공장들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50만 켤레의 운동화를 고작 10명의 관리인이 생산할 정도로 무인 생산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10명이라는 수조차 더욱 줄어들 예정이다. 올해 초엔 트럭에 피자 굽는 로봇을 태워 지역을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ZUME'라는 기업까지 생겨났다.


 'ZUME'의 피자 굽는 로봇


 2016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는 이런 식으로 2020년까지 무려 7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번역가, 회계사나 변호인 같은 전문직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법률 을 전문으로 하는 ROSS라는 인공 지능이 개발되어 미국 대형 로펌에 취업한 바가 있다. 유엔 미래 보고서는 적어도 2030년엔 이 세 직업이 모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라 내다 보았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히든 피겨스'에서는 거대한 IBM 컴퓨터가 삽시간에 많은 흑인 여성 계산원들을 실직의 위기로 내모는 장면이 나왔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변화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미리 거기에 맞춰 능력을 향상시킨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발빠른 대처의 대가로 오랫동안 그토록 원하던 관리자로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신기술에 대한 지식을 누구보다 빨리 습득하여 자신에게 숙원과 같았던 관리자 지위까지 오르게 된 도로시 본.


 바로 이런 일이 앞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급격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를 잃겠지만 거꾸로 누군가는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 아이비리그 우등생 클럽인 파이 베타 카파의 맴버이자, 공부 관련 블로그인 '스터디 핵스'로 공부에 있어 미국 최고의 전문가 중 하나로 인정 받고 있는 저자 칼 뉴포트는 선언한다. 바로 그 후자를 딥 워크가 우리에게 줄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직장만 둘러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피상적 작업만 양산하는 온갖 네트워크 도구들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말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지금 우리 업무 환경은 '상시접속 문화'와 '최소저항의 원칙' 아래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시접속 문화'는 수신한 물음에 언제든 빨리 답신을 해야 한다는 의무를 낳았다. 기업 환경에서 어떤 행동들이 과연 실적으로 연결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워(이것을 저자는 '계량의 블랙홀' 현상이라 부른다.) 현재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을 중시하게 만드는 '최소저항의 원칙'은 네트워크 도구들을 사용하여 빨리 답신하는 것을 일하는 자신에게 있어서나 기업에게 있어서나 생산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장기적 계획과 집중 보다는 그저 단기적인 불편만 피하면 된다는 풍조를 이루었다. 그러다 보니 바쁘다는 것이 높은 생산성과 직결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분주함이 생산성과 동의어가 되었고 지식 노동자들은 그보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더 나은 방법이 없기에 갈수록 분주한 모습만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자신도 공유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화이고 이런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아무래도 '딥 워크'는 실현되기가 어렵다. 한다고 해도 분명 일을 안 한다거나 나태하다는 오명만 잔뜩 뒤집어 쓸 게 뻔하다. 뉴욕대 교수이자 커뮤니케이션 이론가이기도 한 닐 포스트먼은 컴퓨터 혁명이 시작되었던 90년대 초에 이미 이런 상황을 경고한 바 있었다. 신기술이 가져다 줄 효율성에만 혈안이 되어 그것이 야기할 문제들은 제대로 논의조차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좀 더 발전된 기술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형성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예언을 들어 맞았고 새로운 기술만 무분별하게 편식한 결과가 바로 우리의 현재인 것이다. 날마다 산적된 피상적 작업만 분주하게 잘 처리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납득하며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인 '오대수'라는 이름처럼 그저 오늘만 대충 수습하는 것으로 자족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말이다.


 딥 워크는 오늘날의 사업 환경에서 우선시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딥 워크는 어려운 반면 피상적 작업은 쉽고, 직무에 따른 명확한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는 피상적 작업을 통해 분주하게 보이는 일이 자리 보존에 도움이 되며, 우리의 문화가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는 능력에 미치는 영향과 무관하게 '인터넷'과 관련된 모든 것을 좋게 보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모든 추세가 형성된 이유는 몰입하는 데서 나오는 가치나 몰입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대가를 직접 측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p. 70 ~ 71)


 하지만 시대의 거대한 흐름은 이제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는 방향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 계속 그런 삶의 방식을 고수하다간 끝내 도태되거나 쉽게 대체되는 운명으로 말이다. '히든 피겨스'의 도로시 본처럼 노력과 훈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상승시킬 필요가 있다. 거기에 딥 워크, 즉 몰입은 아주 에너지 넘치는 동력이 되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말해도 선뜻 시도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인정한다. 사람은 아무래도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말이다. 때문에 저자는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도록 두 가지를 독자에게 제안한다.


위니프리드 갤러거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


 하나는 위니프리드 갤러거의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이론이다. 둘 다 '몰입'의 긍정적 가치를 한껏 강조하는 이론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환경에 관해서라면 특히 갤러거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실은 특정한 대상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인 결과로 나타난 주관적인 것이라 전제한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 몰입하여 나름의 정신 세계를 구축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거기에 맞춰 달라진다는 의미다. 몰입, 즉 딥 워크는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내재되어 있기에 몰입한 상태로 시간을 충분히 보내면 우리 마음 또한 세계를 의미와 중요성이 넘치는 곳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 환경을 자신이 주도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의미와 가치가 부유한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갤러거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쉽게 권태를 느끼고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스스로 그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산만하고 너절한 피상적 작업만 하고 있는 탓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칙센트미하이의 '몰입' 이론도 여기에 거들고 나선다. 그에게 '몰입(flow)'이란 자발적으로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으로 육체나 정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일 때 찾아오는 최고의 순간을 의미한다. 갤러거는 그냥 몰입하는 게 아니라 중요한 대상에 몰입을 해야 삶 역시 중요하고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말하지만 칙센트미하이는 대상과 상관없이 몰입만 하면 최고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비록 이런 차이는 있더라도 '딥 워크'가 자신의 삶을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있어 최고의 방법이라는 데는 둘 다 찬동하고 있다.


 이만하면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무의미와 권태에 지쳤다면 당장 '딥 워크'부터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딥 워크'를 할 것인가? 그 의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2부이다. 2부는 '딥 워크'를 실행하는 네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 각 규칙마다 한 챕터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네 가지 규칙이란 이러하다.


  1. 몰두하라.

  2. 무료함을 받아들여라.

  3. 소셜 미디어를 끊어라. 

  4. 피상적 작업을 차단하라.

 

  '몰두하라'에서는 일상 생활 속에서 '딥 워크' 습관을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을 소개하고 '무료함을 받아들여라'에서는 딥 워크 최대의 적인 산만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제시한다. 특히 여기서 '데드라인 공략법'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는데, 미국 대통령으로 유명한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하버드 재학 시절 주로 사용한 방법으로써 그 양태가 우리가 시험칠 때 자주 하는 '벼락치기'와 흡사해 눈길을 끌었다. 빠듯한 시간이 '딥 워크'를 가능하게 만들고 향상까지 시킨다니, '벼락치기'도 영 쓸모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수험생이라면 여기에 나오는 '집중력을 높이는 암기 훈련'이 이목을 끌 것 같다. 전미 기억력 챔피언이자 카드 암기 부문 기록 보유자이기도 한 론 화이트의 카드 암기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카드 한 장을 따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다섯 개의 방이 있는 집을 그리고 그 방에 친숙한 가구들로 채운 다음 카드를 한 장씩 볼 때마다 가구와 특정 인물의 상황을 연결시켜 집에 하나하나 배치하는 기억법으로 누구든 훈련을 거치면 카드 한 벌을 쉽게 외울 수 있다고 한다. 칼 뉴포트가 쉽게 된다고 장담하고 있어서 나도 한 번 시도해 볼 생각이다.


 바로 이런 그림처럼 암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딥 워크 습관 형성을 위해 더욱 힘써 주장하는 것은 소셜 미디어와 피상적 작업의 차단이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에서 다른 하나는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단절로, '소셜 미디어 차단'에선 라이언 니커디머스가 취한 '짐싸기 파티'와 같은 '30일 간의 근절 방식'이 그리고 '피상적 작업 차단'에선 '37 시그널스'라는 기업이 실제로 실시했던 제도가 관심을 집중시킨다.


  저자가 많은 네트워크 도구들 중에서 하필이면 소셜 미디어만 딱 꼬집어 말하는 것은 그것이 딥 워크를 가장 심하게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는 예측할 수 없는 간격으로 개인화된 정보를 제공하여 엄청난 중독성을 지닌다고 말이다(p. 193)'.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가디언 오브 갤럭시 VOL.2' 시사회 장에 갔었다. 공식 개봉 전의 상영이라 주최측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영화 도촬을 막기 위해 관객들이 입장하기 전에 핸드폰을 모두 수거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마치 반사신경처럼 핸드폰을 찾는 동작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곧잘 보였다. 무심코 손이 갔다가 '아, 참 맡겨놨지' 하면서 '핸드폰도 없는데 영화 상영까지 뭘 하면서 보내나?' 하는 말도 들려왔다. 사정이 이러하니 엄청난 중독성이라는 말도 그리 과장되어 보이지 않는다.


 왜 우리는 이토록 중독되어 있을까? 저자는 그것이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아 돈을 버는 회사들이 능숙한 마케팅으로 소셜 미디어를 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놓칠 것이라는 생각을 깊이 심어준 탓이라고 대답한다. 또한 소셜 미디어가 이렇게 급격하게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생산된 콘텐츠가 트윗이든 페이스북이든 실제 가치와는 아무 상관없이 얼마나 교환했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도록 만든데 있다고 한다. 즉 '나의 업데이트 상태에 '좋아요'를 눌러주면 나도 '좋아요'를 눌러주는 식으로 가치가 만들어지고 이렇게 되면 모두에게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중요한 콘텐츠를 올린 듯한 허구적인 느낌(p. 195)을 주어 소셜 미디어가 지금처럼 창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셜 미디어가 주는 '잠시라도 하지 않으면 금방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 그리고 허구적인 만족감이 사실은 전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저자는 30일 간 소셜 미디어와 단절할 것을 권유한다. 이 부분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기에 나도 한동안 그간의 소셜 미디어와 블로그 활동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모두를 나름 주체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소상히 되짚어 보니 착각에 불과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셜 미디어에 대한 지은이의 제안을 보다 더 진지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피상적 작업 차단'과 관련한 '37 시그널스' 기업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 업무 환경을 주도하고 있는 '상시접속 문화'와 '최소저항의 원칙'이 그렇게 강력한 것이 아니며 제도적 차원에서 변화를 준다면 얼마든지 '딥 워크'가 가능한 환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37 시그널스' 회사가 주도하여 상시접속 문화를 차단하고 직원마다 한 달에 걸쳐 자신만의 프로젝트에 '딥 워크' 할 수 있는 시간까지 할애해 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매출이 줄기는 커녕 이익이 오히려 더 늘어났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러한 '37 시그널스'의 모습은 저자가 제시한 '딥 워크 가설'이 옳다는 것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증거였다. 그러니 더욱 딥 워크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라건대, 이런 '37 시그널스'의 사실이 널리 알려져 조직적 차원에서 이제는 피상적 작업의 양산과 분주함이 생산성과 동의어가 되는 흐름에서 벗어나 '딥 워크'가 보다 중시되는 분위기가 주류로 자리잡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이러한 변화는 조직 문화에 일대 파란을 가져올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회사와 사원의 관계란 주종이나 다를 바 없는 수직적 상하 관계였는데, '딥 워크' 문화가 자리잡게 되면 직원 모두가 회사의 이익과 문화 그리고 가치 구현에 있어 저마다 주체로서 참여하는, 그렇게 '파트너'라는 수평적 관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을 목전에 앞두고 대체 불가능한 개인적 가치의 확립과 더 높은 상승을 위해서도 '딥 워크'가 많은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에 더하여 조직 문화마저 이제까지의 강제와 착취에서 벗어나 협력과 상생으로 인도해 줄 것이기에 그 의미가 가일층 높아지는 것 같다.


 이 책, '딥 워크'는 개인과 조직 모두에 대해 몰입이 가진 창조와 변화의 힘을 제대로 느끼고 습득하게 만드는 책이다. 앞으로의 내 삶에 구체적 설계를 위해 뭔가 길잡이가 될 만한 정보들이 필요한 분이나 그런 몰입의 시간이 한번쯤 내게도 주어졌으면 하고 많이 바랐던 분들은 물론 현재 조직 문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 중인 분들 모두에게 감히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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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5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0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이오닉맨 - 인간을 공학하다
임창환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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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얼마 전 이런 기사가 있었다.

 미국 팜스프링스에서 아마존 기업 후원으로 마스 2017 콘퍼런스가 열렸다. 거기에 우리나라 한국미래기술이 직접 개발한 로봇인 '메소드-2'를 가지고 참가했는데 아마존 CEO인 베조스가 직접 탑승해 보고 아주 만족한 뒤 '에일리언 영화에 나오는 시그니 위버가 된 것 같았다'라는 소감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것이었다. 길이 4미터에 2족 보행이 가능하며 사람이 탑승하여 팔과 다리를 조종할 수 있는 '메소드-2'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영화 '에일리언2'에 나와서 관객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준 '파워로더'와 유사해 보였다. 어릴 때 극장에서 '에일리언 2'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메소드-2'의 모습에서 막연히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미 현실로 성큼 와 버렸음을 느꼈을 것이다.


 '메소드-2' 의 모습


영화 '에일리언 2'에 나왔던 '파워로더'


'꿈은 이뤄진다'더니, 예전엔 정말 공상 속 존재로만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현실로 착착 이뤄져가고 있다. 현재 한양대 생체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임창환의 '바이오닉맨'은 바로 그런 실상을 물씬 느끼게 만드는 책이다. '바이오닉맨'이란 한 마디로 기계와 인체의 융합이라 할 만하다. 의족이나 의수처럼 신체적 결함을 기계로 보완하거나 인체가 가지는 능력의 한계를 기계를 통해 증강하는 것 모두를 통칭하여 '바이오닉맨'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일을 주로 하는 것이 바로 '생체공학'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바이오닉맨'은 쉽게 말해 현재 생체공학이 다양한 분야에서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상세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모두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거칠게 나누어 처음 1장과 2장은 인체의 운동 기관과 감각 기관을 보완 혹은 대체하는 생체공학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다고 한다면, 3장과 4장은 수명이나 뇌의 능력 혹은 불사등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건적인 한계를 생체공학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현재 생체 공학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에 대해선 간간이 나오는 짧은 신문 기사로 밖에는 접해보지 못하여 그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기가 참 어려웠는데 이 책은 오늘날 생체 공학이 활동하는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하고 있어 특히 반가웠다. 비록 '에일리언 2'의 파워로더는 현실화 되었지만 현재 생체공학 기술로 옛날 TV 드라마에 나왔던 '6백만불 사나이'나 요즘 상종가를 치고 있는 마블 슈퍼 히어로 '아이언 맨' 혹은 영화 '스파이더 맨 2'에서 숙적으로 나왔던 '닥터 옥토퍼스'의 기계 촉수 같은 것은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무거운 다리의 무게 때문이다. 그 다리를 들어올리고 또 드라마나 영화처럼 빠르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모터의 동력이 필요한데 그 정도 동력을 낼 수 있는 모터를 다리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드는 게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인체의 어떤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여 능력을 증강시키기 보다는 앞서 말한 '메소드-2'처럼 기계를 마치 사람에게 옷처럼 입혀 능력을 키우는 로봇이 활발히 개발 중이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는 '외골격 로봇'이라고 한다. 처음 이 외골격 로봇은 군사 분야에서 활발히 개발되었지만 최근엔 하지 마비 장애인이나 뇌졸중 환자 재활을 위해서도 이 외골격 로봇이 적극 응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지 마비 장애인이나 뇌졸증 환자들은 자기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선 바이오닉 기술이 어떻게 응용되고 있을까? 그렇게 1장의 2부, '바이오닉 다리'와 3부 '바이오닉 팔'은 바이오닉 기술이 적용된 의족과 의수를 다루는데, 다리 보다 팔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이오닉 다리는 무릎이나 발목처럼 비교적 적은 수의 관절만 적절히 조절해도 '잘 걷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지만(p. 56) 29개의 뼈와 29개의 관절, 34개의 근육, 123개의 인대로 구성된 손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동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이오닉 팔은 196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하필 이 시기에 그랬던 것은 다름 아닌 독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인류 의학 역사상 최악의 재앙 중 하나라는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다. 1950년대 후반, 독일에서 만든 이 약은 임산부의 입덧을 방지한다고 해서 많은 임산부들이 복용했는데 그 임산부들이 약의 부작용으로 그만 사지가 없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아이들을 출산하고 만 것이다. 이 수가 전 세계 46개국에 무려 1만명에 달했다. '바이오닉 팔'은 바로 이 같은 아이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개발되었다. 이렇게 실제 의료용으로 개발되는 바이오닉 기술들은 큰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인과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기업들은 벌어들인 많은 돈을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아낌없이 재투자한다. 이런 점이 바로 반도체나 휴대전화를 개발하는 일반 전자회사와 생체공학 의료 기기 회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p. 67)


 이야기가 곁가지로 나가는 것 같지만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이었다는 걸 밝혀두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과학이 아주 차갑고 비인간적이라는 시선이 강했다. 무엇보다 현재 과학 기술이 보여주는 모습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재 생체 공학이 다름아닌 이런 아프고 약한 자들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시작되었다니, 내가 그동안 과학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확실히 그 어떤 분야든 뭐라 단정을 짓기 전에 먼저 거기에 대해 제대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내겐 '바이오닉 맨'을 읽은 가치는 충분한 것 같다. 한편, 바이오닉 팔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감각과 촉각이다. 인간의 손처럼 뜨겁거나 차가운 감각 혹은 거칠거나 부드러운 촉각을 바이오닉 팔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렵다고 한다. 사람의 피부라는 것이 제곱 1cm 안에 자리 잡은 감각 신경이 무려 수 천개에 이를만큼 아주 정교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로 이만큼 정밀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거기에 또 한 가지 난제가 더 남아 있다. 우리의 뇌가 어떤 식으로 감각을 다양하게 인식하는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만 밝혀지면 바이오닉 기술은 혁신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기대되는데 이처럼 생체 공학 분야에 있어 하나의 기술은 그것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다른 기술과 연동되었다. 어쩌면 우리 인체가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고 보완할 바이오닉 기술로써는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팔이나 다리, 혹은 심장이나 장기 등 인체의 조직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을 흔히 '사이보그'라 일컫는다. 2장은 바로 이런 사이보그에 대한 것으로 심장이나 눈 그리고 귀의 이식에 있어 생체 공학 기술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600만불 사나이'만큼이나 유명한 '소머즈' 역시 실제로는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소머즈는 한 쪽 귀만 '바이오닉 귀'로 대체되어 보통 인간의 수 백배나 되는 청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선 이렇게 한쪽 귀만 바꿔서는 그렇게 듣는 것이 불가능하단다. 인간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가 소리가 나는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도록 '음원 국지화'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두 귀를 다 사용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밌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인간이 듣는 방식에 관한 것인데, 알고 보니 여기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보통의 경우처럼 음파 진동이 없어도 두개골의 진동을 통해 듣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그러한데, 그 때 우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성대의 떨림이 두개골로 직접 전달되어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평소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개골이 저음을 잘 전달하기에 골전도를 통해 들으면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보다 좀 더 낮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책엔 생체 공학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의족과 의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친 16세기의 외과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를 비롯 사람의 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 또한 담겨 있다. 그래서 딱히 생체 공학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와 관련하여 혹시 수험생이라면 '지능 증폭'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 좋겠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경가소성'이고 다른 하나는 '서파 수면'이다. '신경 가소성'이란 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뇌의 기능이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2006년, 영국에서 런던 택시 운전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실제 증명된 것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런던 도로망과 지명을 모두 외워야만 하는 런던 택시 운전사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장기 기억과 공간 지각을 관장하는 해마 영역의 회백질이 훨씬 더 두꺼웠다고 한다. 이는 생활 습관의 개선이나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뇌를 후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즉 뇌는 쓰면 쓸수록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 탓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두 번째, '서파 수면'은 독일 튀빙겐 대의 얀 보른 교수가 발표한 것으로, 사람이 깊은 잠에 빠지면 느린 뇌파가 발생하는 서파 수면에 이르게 되는데 그 때 깨어 있을 동안의 기억들이 장기 기억으로 보존된다고 한다. 즉 외운 것을 되도록 오래 까먹지 않고 싶으면 깊은 수면을 취하라는 것이다. 바이오닉 기술은 뇌를 향상시키는 쪽에도 응용되는데 주로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기도 한다. 나아가 미래엔 '공각기동대'에서 두뇌에 직접 단말기를 연결했듯이 뇌의 특정 부위에 마이크로칩을 삽입하여 두뇌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가능해지는데 분명 여기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타고난 사람의 신체적 능력이 이제 가지고 있는 자본에 따라 차등되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이처럼 저자는 생체 공학이 가져온 어두운 면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생체 공학 기술의 특성 상 이 기술의 발달이 또 다른 차별을 가져 올 위험 역시 큰 것이다. 이런 부작용이 생겨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어떻게 정비할 것인가 또한 생체 공학 기술 발달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민이라고 하겠다. 제도는 그렇다치고 공학자나 사업가나 생체 공학이 어떤 동기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는지 생각한다면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바로 생체 공학이 아프고 약한 자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말이다. 그렇게 생체 공학 중심엔 인간이 있었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 과학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 기술이 인간에게 악마가 되었던 때는 언제나 기술의 중심에 인간이 부재했을 때였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오로지 그것을 지향하며 발전해 온 생체 공학이 원래 자신의 고향만 잘 기억한다면 생체 공학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낙관적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끝이 이상해졌는데, 아무튼 여기서 총평 하자면, 현재 4차 산업 혁명이란 말이 유행 중이다. 생체 공학은 그 4차 산업 혁명에 있어 핵심 분야 중 하나라고 알고 있다. 혹시 그 때문에 관심이 생겨 바이오닉 기술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바이오닉 맨'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공학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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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4-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에 마이크로칩 넣는 방식은 앨런 머스크가 고려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각기동대처럼 군사용으로 시범적으로 써보려 한다는데...이 정도까지 말이 나왔다면 상용화할 기술이 나왔다고 봐야겠죠.

ICE-9 2017-04-16 14:18   좋아요 0 | URL
‘스텐트로드‘라고 해서 두개골을 열지 않고도 그런 게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더군요. 예전 닥터 후의 한 에피소드에서 그런 것들이 상용된 세상을 그린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이면에 세뇌 프로그램이 있어 사용자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지구를 지배하려는 외계인의 음모가 있었다는 게 기억나네요.^^
어떤 기술이든 어둔 그늘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 중시가 필요한 것 같아요^^

2017-04-17 0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8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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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을 받지도 하지도 않는 시대다. 지금은 구속이 된 박근혜 대통령만 봐도 집권 시절 기자 회견 장에 나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기자들의 질문은 일체 받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또 필요할까? 비단 박근혜만이 아니라 내가 이제까지 만나 본 윗 사람들 대부분이 아래 사람의 질문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다. 동료들도 질문이 많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괜히 시간만 잡아먹고 일만 복잡하게 만든다고 핀잔을 주기 일쑤다. 나는 원래 질문이 많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되면 손을 번쩍 들고 질문부터 하고 보는 게 버릇이었다. 하지만 사회로 나오고 나서 난 변해 버렸다. 질문을 해도 '쓸데 없이'란 말 외에는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과 질문을 할 때마다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받는 피로 때문에 점차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나처럼 질문을 곧잘 해대는 부하에게 짜증부터 부리는 내가 된 것을 보았다. 과거에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실망할 때가 바로 이런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부터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어쩌다 우리는 질문을, 특히나 받는 쪽에서 자신에 대한 불신이나 공격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정당한 질문조차도 질문 자체로 보지 않고 저의부터 의심하고 보는 버릇을 들이게 된 것일까? 질문을 받는 쪽이 그러하니 질문을 하는 쪽도 질문이 편할리 없다. 살면서 그림자처럼 뒤따르게 되는 질문이건만 반응이 그렇다 보니 손을 내리고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게 약점으로 여겨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는 척을 하거나 조금 아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침소봉대 하게 된다. 검색이 수월해지면서 질문의 필요는 점점 더 사라진다. 본래 진정한 의미의 질문은 계단처럼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는 매개물로 질문은 수명이 길수록 빛을 발하는 법인데 검색에서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요즘에 있어 질문의 수명이란 그저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토록 질문의 가치와 수명이 한없이 추락 중인 이 시대에 오히려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가 한 사람 있다. 그가 바로 뇌과학자로도 유명한 김대식 교수다. 그는 이미 인류를 위대한 진보로 이끌었던 31개의 질문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쓴 바 있다. 그런 그가 조금은 더 대중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질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책을 들고 나왔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거기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질문을 찾고 그것을 통해 자아를 확장해 왔는지 독자의 눈 앞에서 직접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로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책을 통해 질문을 찾아 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회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책을 많이 읽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그는 책을 통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그 해답을 만들어가는 지적 여정을 평생 계속해왔다. 바로 그 여정의 가장 최근 모습이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담겨 있다. 말하자면, 그의 내밀한 사유의 궤적이 녹화된 최신 테이프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책은 모두 6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삶의 가치를 고민하라',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라',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라', '과거에서 미래를 구하라', '답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라' 마지막으로 '더 큰 질문을 던져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질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질문이란 실은 초월의 몸짓이다.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이 모든 게 아니라는 자각이 결국은 질문을 만든다. 질문은 현재 너머의 꿈을 꾸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실제 그 너머로 도약하기 위한 발구르기와 같은 방법 찾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되면 질문은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다. 아르튀르 랭보가 보다 풍성한 삶의 경험을 위해 시를 포기하고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를 전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안주가 아니라 탈주를 취할 때 인간의 삶이란 보다 풍요로워질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장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첫 파트에 실린 책에 대한 이야기에서 절감할 수 있다. 질문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간수의 주머니에서 몰래 열쇠를 가지고 나와 안주의 철창에 갇힌 우리를 탈주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더 깊은 근원과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고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세상의 질서와 상식들은 이제 우리가 억지로 거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더이상 구애받지 않게 된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처럼 꼭 기승전결일 필요가 없으며 더글러스 애덤스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답'이 '42'이여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긍하게 된다. '42'라는 숫자는 종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다시 또 달려야 한다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또한 어차피 삶의 의미란 어딘가에 숨어 있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추구를 위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위에서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을 질문의 여정 속에서 스스로 경험한 것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질문 뿐이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삶의 진짜 가치는 지속에 있고 그렇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바로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닐 아난타스와미가 자신의 책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나'라는 미스터리 하나만 해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고 더욱 본질적인 것을 찾아간다. 역사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다발의 시간이 되고 다각적으로 오늘의 시간과 공간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기르게 된다. 김대식 저자의 말대로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들은 언제나 폭력과 불행의 시작'이 되지만 질문의 신전에 존재를 의탁한 우리들에게 그런 것은 더이상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절대는 상대가 되고 영원은 잠정이 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했던 것을 우리는 질문이라는 필터로 절대와 영원에 함유된 독소를 거른다. 모든 권위의 우상들은 회의(懷疑)의 밧줄로 쓰러질 것이며 타인을 무분별하게 모방하다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욕망은 좀 더 근본을 응시하고 헤아리는 마음 속에서 저절로 용해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질문은 바로 그것을 가져다 준다. 남이 만든 정답과 경계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잔뜩 안고서 웅크리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설령 아무 것도 없는 헐벗은 대지에 서 있다 하더라도 그 황무지 위에서 내가 만들어 갈 세상에 대한 기대감만으로도 당당하고 강해질 수 있는 우리가 되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루이지 세라피니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라는 한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었던 것처럼. 


 책에 삽입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백과사전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의 모습.


 먼 옛날, 질문 자체를 몰랐던 원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모른다고 해서 더이상 불안해 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설령 고향에서 추방된다고 해도 그것을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계기로 받아들일 뿐이다. 진정한 고향은 어떤 외부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든 어디나 다 고향이다'라는 말처럼 실은 내면에 정초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중심이 강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 아닌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다. 더이상 타인 때문에 내쳐질 타향이나 변방이 존재하지 않고, 현재라는 과정 역시 어디에 닿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매 순간마다 미래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용과 공존 그리고 조화와 융합은 질문의 여정이 데려가는 진화의 장소이자 질문을 주관하는 여신의 발에 입을 맞추고 헌신을 맹세한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나는 유발 하라리가 일컫는 '호모 데우스(신 같은 인간)'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감히 생각한다. 온갖 것과 융합되고 시간마저 초월하며 더이상 하나의 육체에 고정된 자아가 아닌 '호모 데우스'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포용과 공존 그리고 조화와 융합은 필수일 테니까. 그리고 길고도 무수한 질문의 여정 속에 다다르게 된 존재인만큼 김대식 교수의 말처럼 설령 많은 의문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가 우려하듯 위험한 존재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질문을 이어가고 천착하는 한, 지배 보다는 공존을, 배제 보다는 포용을 택할 테니까. '너무 낙천적인 게 아니냐고?', '한낱 질문 하나에 그만한 진화의 동력이 있다니, 너무 과장이 아니냐고?'. 그렇게 내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말없이 다만 이 책,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슬쩍 들이밀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처럼 믿게 될 테니까. 최소한 비슷하게라도 생각은 할 테니까. 어쨌든 나는 힘을 얻었다. 질문에 깃든 엄청난 가능성을 알았으니 다시금 질문을 즐기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 볼 작정이다. 다시 사람들에게 치인다면 김대식 교수처럼 책을 통해서라도 질문의 여정을 이어가련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찾아오는 모든 질문에 최대한 귀기울이고 함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련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이어 '어떻게 답할 것인가'도 나의 주된 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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