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 28인의 과학자, 생물학의 지평을 넓히다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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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존재를 알았을 때 반가웠다. 그동안 유전자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생명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하지만 너무나 어렵고 방대한 영역이라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선뜻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그것과 만나게 해 줄 길잡이 같은 것이 있었으면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나타난 것이다. 강석기 작가의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바로 그 장본인인데, 이 책은 생명과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데 기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논문 28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 생명과학의 현재 지형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의 모든 성과는 그것의 시작이 되는 논문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생명과학을 보다 수월하게 이해하게 만들 최적의 안내서로 보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다.



 책은 28편의 논문을 주제 별로 모두 7개의 파트로 나눠 4편씩 담는다. 그 파트란, '현대 생명과학의 탄생', '유전자 사냥', '진화의 진화', '생리학의 재발견', '발생의 미학', '떠오르는 신경과학' 그리고 '상식의 벽을 넘다'이다. 생명과학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많아서 실린 논문 모두가 흥미로웠는데 그 중 가장 내 눈을 빛내게 만든 것은 1957년에 발표된, 조지 윌리엄스의 '노화진화이론' 논문이었다. 노화는 죽음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두려움을 준다. 거기다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노화는 현재 더욱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노화란 무엇일까? '늙는다'는 것은 생명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다윈에 따르면 사실 이런 노화는 오래전에 퇴화되어 사라져야 했다.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을 가져오는 노화는 진화의 절대 명령인 생존과 번성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다윈의 자연 선택에 대한 중대한 반대 증거일까? 31세의 젊은 나이로 막 미국 미시건 주립대 교수가 된 조지 윌리엄스는 오히려 노화가 자연 선택의 결과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것이 노화에 대한 생명과학의 이해 방향을 확 비틀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명의 노화를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노화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노화는 자동차 부품이 닳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조지 윌리엄스에 따르면 노화는 그렇게 마모의 과정이 아니다. 노화는 다만 '인체를 조절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의 정밀도가 떨어지는'(p. 119) 현상이다. 그래서 노화는 늙었다는 말과도 다르다. 나이가 젊어도 조절과 유지 메커니즘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노안'이 생각났다. 노안은 눈을 오래 써서 그 능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초점을 맞추는 정밀도가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생각하니 조지 윌리엄스의 노화에 대한 이야기가 꽤 신빙성 있게 다가왔다. 피부도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는 것도, 조지 윌리어슴에 따르면, 피부가 닳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젊었을 때만큼 피부를 통해 체온을 유지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게 덜 효율적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한 마디로 노화는 생명이 시간의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밀도의 약화는 오히려 반 자연 선택적이지 않나? 여기에 대해서도 조지 윌리엄스는 설명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노화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다면 발현 유전자인데, 주로 성적인 징후를 만들고 번식하는데 유용한 유전자들이 이에 속한다. 다면 발현이란, 유전자가 한 쪽으로만 작용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도 작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성적 유전자들이 그랬다. '개체가 성장해 성적으로 가장 왕성할 때 발현돼 번식 확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유전자가 훗날에는 정밀한 대사 조절 능력을 잃게 해 암이나 심혈관계 질환, 당뇨병 같은 병을 일으키는 등 노화를 촉진'(p. 120)했던 것이다. 즉 노화란 자연 선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 결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부머랭 같은 것이었다. 짧은 글이었지만 관점이 워낙 독특하고 글 또한 설득력 있어 이것만으로도 노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이 책엔 그런 순간들이 많았다. 노화에 대한 앞서의 이야기는 이 책이 내게 어떤 것을 남겼는지 대표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였다. '스트레스'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한스 셀리에, '페로몬'의 존재를 처음 거론한 마샤 맥클린톡의 '월경 동기화 현상' 논문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 처음에 어떻게 밝혀졌던가 알려줘서 흥미로웠고, DNA의 특정 서열을 독립적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처음 개발하여 생명과학의 지평을 확 넓혀버린, 허버트 보이어의 재조합 DNA 실험이 29살의 한 실직자 청년에 제의로 어마어마한 자본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밌었다. 역시 성공은 두 가지,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이 일화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저자가 쉽게 잘 설명하고 있어 대부분은 소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많은 전문 용어들에 대해서 별도의 검색을 통해 알아야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이 책을 통해 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이 생명과학의 대지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생명과학이 어디까지 왔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대충은 가늠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는 나처럼 초심자라 하더라고 생명과학이 무엇이고 그 얼개나마 알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각 논문에 대한 글의 분량이 길지 않고 재미도 있어서 더욱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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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0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체가 아니라 종의 개념으로 보면 노화는 진화의 필수 요소죠. 비정한 말이긴 하지만 노화로 쓸모없는 개체는 빨리 사라져 주고 젊은 유전자 개체가 번식을 담당하는...할머니 이론이 말해 주듯이 성적인 필요성이 사라져도 번식에 필요한 존재론적 가치는 여전히 확보되고 있지만.... 과학 기술이 더 발달해 아무도 늙지 않는다면 이런 구조적 상황은 어찌 달라질까 싶죠. 육아는 사회가 맡는 시스템이 더 확산될테니 안심일까 하면....아직은 멀고 먼 이야기 같은^^;

헤르메스님 서재를 웹으로 보고 있는데 고양이 가득ㅎㅎ.... 즐겁게 글 읽을 수 있는 벽지네요^^
새해 인사 안 드렸던 거 같은데... 새해 건강히 평안히/

ICE-9 2017-02-05 23:10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고 더욱 느꼈는데, 정말 생물학적 관점은 상식적인 관점과 많이 다른 점이 있더군요. 아갈마님 말씀대로 노화가 사라진 세상은 과연 어떠한 사회적 혹은 윤리적이거나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할지 궁금해집니다. 요즘엔,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고‘가 긍정적으로 묘사했듯, 고려장이라는 것도 그 사회에선 나름 합리적인 제도였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 속 할머니가 어린 세대들을 위해 일부러 건강한 이를 스스로 빼면서까지 기꺼이 고려장을 당했듯 노년 세대들도 뒷 세대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제가 고양이 집사라 서재를 온통 고양이들로 채워봤습니다. 너무 단순한가요?^^
어쨌든 아갈마님 새해 인사 감사합니다. 아갈마님도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는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이 너무 늦어 죄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