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왔던 <어쩌다 어른>을 보던 아내가 말한다.
"너 강의 많이 늘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벌써 몇년짼데."
강의 하면 우선 떠오르는 날이 2008년이다.
광명에 있는 하얀중학교에서 듣보잡이던-칼럼도 쓰지 않던 때였으니-날 부른 것.
당시 난 학교 강의도 제대로 못하는 어설픈 교수였고,
땅바닥만 보고 강의를 해 강의평가에서 "학생들하고 눈 좀 맞춰 주세요"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강의준비 땜시 다음날 바쁘다고 했을 때 어떤 학생은 날더러 이런 말도 했다.
"선생님도 강의준비 하세요?"
그런데 하얀중학교에선 왜 날 불렀을까.
잘 모르겠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거길 간 뒤
교문에 걸린, 내 이름이 박힌 플래카드를 사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강연은 제법 성공이었다.
강의준비도 열심히 했고, 기생충 샘플까지 챙겨간 정성에 학생들은 감동했다.
평소 듣기 힘든 기생충이란 소재도 흥미를 유발했으리라.
이듬해엔 KBS의 '스타과학자 특강'에서 강의를 한다.
기생충에 대한 저서를 검색했더니 내가 나와서 섭외를 했다는데,
같이 강의한 정재승. 이소연 (하나는 또 누구지?)에 비해 내 이름값은 너무도 처졌지만,
최소한 재미 면에서는 다른 분들보다 나았던 것 같다.
날 기분 좋게 했던 학부모의 말,
"보통 이런 강의는 학부모나 아이들 중 한명만 만족하는데,
선생님 강의는 둘 다 만족시켰어요."
그러고보면 그때부터 난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재미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추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800명의 관객 앞에서 긴장을 하는 바람에
작가가 "너무 빨라요"라며 연방 스케치북을 드는 걸 보지 못했고,
그 바람에 내게 주어진 50분 중 겨우 30분만 쓴 채 강의를 마치는 대형사고를 쳤다.
(결국 모자란 20분은 내 실험실에서 추가로 촬영을 해야 했다).
그 강의가 방영되던 날엔 제법 흥분했지만,
평일 낮이라 시청률은 0.5%도 안됐고,
강의가 TV로 나가면 내가 스타가 될 거라는 기대는 무산됐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날은 2012년 8월의 어느 날이다.
모 컨설팅회사에서 내게 삼성전자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달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강의 이후 몇 번의 강의를 하긴 했지만
기생충 이외의 주제로 강의를 하긴 내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저서를 갖자'는 주제의 내 강의는 몇번의 웃음을 주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부끄러웠고,
강연섭외를 한 컨설팅회사 직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다시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외부강연을 하면서 살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리 아쉽진 않았는데,
그 이듬해 갑자기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서 강의가 쇄도하기 시작한다.
강의수준은 들쭉날쭉 그 자체였지만,
강의도 하면 할수록 늘기 마련이고,
강의가 끝날 때마다 처절한 반성을 통해 문제점을 분석하는 노력도 더해져서
2014년에는 그래도 제법 알려진 강사가 된다.
한번 부른 곳에서 다시 날 부르고,
다른 곳에 추천해줘서 다시 날 부르는 걸 보면서
"아 내가 이제 강의로 자리를 잡았구나"는 생각을 했는데,
내 삶이 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도 대충 그때부터다.
특히 작년 한해, 특히 10월부터 막판 3개월은
"이건 사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강연만 다녔다.
강의 횟수가 많아지면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늘 불안해했고,
그게 나로 하여금 매번 강의록을 고치게 만든 이유였다.
그 시절엔 거의 매일, 강의록을 손보다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때를 회한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오늘 경희대에서 있었던 '그랜드마스터 클래스 빅 퀘스쳔 2016'에서 강연을 하는 기회를 얻은 걸 보면
지난 시절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외수, 이어령, 더글라스 케네디 등 기라성같은 분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진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이제 난 2012년에 그랬던 것처럼 섭외자의 얼굴을 굳게 만드는 강의는 하지 않으며,
수많은 관객 앞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내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
이거 하나는 뿌듯한 일이지만, 슬픈 것도 있다.
2008년 하얀중 교사가 "강사료는 10만원이다"라고 말했을 때,
난 "그 돈으로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라. 난 안받아도 된다"라고 답했다.
규정상 안된다고 하기에 난 강의 중간에 퀴즈를 내서 내 돈으로 산 도서상품권을 상품으로 나눠줬다.
지금보다 돈은 없었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던 그때의 난, 안타깝게도 죽었다.
지금의 난 강의가 들어올 때마다 "강사료가 얼마일까?"를 궁금해 하는 인간이 됐고,
심지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담당자: 여기는 xx도 xx인데요, 강의 좀 부탁드리려고요.
나: 거기 너무 멀잖아요. 안하면 안될...
담당자: 그 대신 저희가 강사료를 많이 드려요.
나: 아유, 제가 당연히 가야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쁘냐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가끔은 타락한 내가 싫다.
변한 건 어쩔 수 없으니 최소한 이건 지키려고 한다.
날 불러준 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강의를 하자는 것.
이것만 지키면, 그래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