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후 2번째로 구한 집은 당산동에 있는 삼성래미안아파트였다.
기차역이 가까워 천안까지 출퇴근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집주인이 정말 좋은 분이라,
계약기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있으라고 해줬다.
“1억쯤 올려받아봤자 쓸 곳도 없고...”
돈이 많아서 이런다고 할 수도 있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다 이렇게 관대하진 않을 터였다.
나보다 젊은 남자였는데 ‘선생님’ 소리가 절로 나왔고,
고개가 90도까지 구부러졌다.
그럼에도 그곳을 나온 건 순전 몸이 아파서였다.
내가 몸담은 병원에 입원하면 50%를 할인해 주는데,
그곳을 놔두고 다른 곳에 입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집이 천안이면 아내가 서울서 왔다갔다 하면서 간병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
천안으로 이사를 가자는 게 아내의 결정이었다.
그게 2011년 말의 일이었다.
천안에선 사람이 살지 못하는 줄 알았건만,
지방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좋았다.
갑자기 방송에 나가게 돼 역으로 서울에 올라가는 일이 잦아졌지만,
출퇴근 시간에 차가 밀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주말마다 차를 타고 맛집을 다닐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천안에 살 가치는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 학교가 어려워서 그런지 교수들에 대한 괴롭힘의 정도가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 됐다.
연구를 열심히 하라는 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아무리 봐도 이해하지 못할 괴롭힘이 우리를 짓눌렀다.
다행히 올해 안식년을 신청해 그 칼날을 피했지만,
얼마 전 만난 동료선생에 의하면 의대 기초에 있는 다른 교수들은 다들 힘들어 죽을 지경이란다.
처음으로, 다른 학교에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깨달은 건, 이제 난 다시는 서울에 올라가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살던 래미안아파트의 전세금은 3억5천이었고,
그 돈으로 천안에 54평짜리 넓은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우리 아파트의 가격은 5년 전과 비교해서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살던 아파트는 전세값만 해도 7억이 됐다.
5년간 3억5천이 올랐다면 1년에 평균 7천만원,
어떻게 이 전세값을 감당하면서 거기 살고 있는지, 서울 분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친구를 만났을 때 어떻게 서울에 사느냐고 물어봤다.
그 친구가 해준 얘기는 정말 눈물겨웠다.
돈은 많지만 마음이 넉넉지 않은 주인을 만난 탓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그냥 우리 학교에서 쭉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학교가 휘두르는 칼날이 아무리 매서울지라도,
집주인의 칼날보다는 훨씬 무딜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