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왔던 <어쩌다 어른>을 보던 아내가 말한다.
"너 강의 많이 늘었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벌써 몇년짼데."
강의 하면 우선 떠오르는 날이 2008년이다.
광명에 있는 하얀중학교에서 듣보잡이던-칼럼도 쓰지 않던 때였으니-날 부른 것.
당시 난 학교 강의도 제대로 못하는 어설픈 교수였고,
땅바닥만 보고 강의를 해 강의평가에서 "학생들하고 눈 좀 맞춰 주세요"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강의준비 땜시 다음날 바쁘다고 했을 때 어떤 학생은 날더러 이런 말도 했다.
"선생님도 강의준비 하세요?"
그런데 하얀중학교에선 왜 날 불렀을까.
잘 모르겠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거길 간 뒤
교문에 걸린, 내 이름이 박힌 플래카드를 사진 찍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강연은 제법 성공이었다.
강의준비도 열심히 했고, 기생충 샘플까지 챙겨간 정성에 학생들은 감동했다.
평소 듣기 힘든 기생충이란 소재도 흥미를 유발했으리라.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201/pimg_7472501531354635.jpg)
이듬해엔 KBS의 '스타과학자 특강'에서 강의를 한다.
기생충에 대한 저서를 검색했더니 내가 나와서 섭외를 했다는데,
같이 강의한 정재승. 이소연 (하나는 또 누구지?)에 비해 내 이름값은 너무도 처졌지만,
최소한 재미 면에서는 다른 분들보다 나았던 것 같다.
날 기분 좋게 했던 학부모의 말,
"보통 이런 강의는 학부모나 아이들 중 한명만 만족하는데,
선생님 강의는 둘 다 만족시켰어요."
그러고보면 그때부터 난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요소가 재미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을 추구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800명의 관객 앞에서 긴장을 하는 바람에
작가가 "너무 빨라요"라며 연방 스케치북을 드는 걸 보지 못했고,
그 바람에 내게 주어진 50분 중 겨우 30분만 쓴 채 강의를 마치는 대형사고를 쳤다.
(결국 모자란 20분은 내 실험실에서 추가로 촬영을 해야 했다).
그 강의가 방영되던 날엔 제법 흥분했지만,
평일 낮이라 시청률은 0.5%도 안됐고,
강의가 TV로 나가면 내가 스타가 될 거라는 기대는 무산됐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날은 2012년 8월의 어느 날이다.
모 컨설팅회사에서 내게 삼성전자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달라고 했다.
위에서 언급한 강의 이후 몇 번의 강의를 하긴 했지만
기생충 이외의 주제로 강의를 하긴 내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저서를 갖자'는 주제의 내 강의는 몇번의 웃음을 주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부끄러웠고,
강연섭외를 한 컨설팅회사 직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다시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외부강연을 하면서 살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좀 미안하긴 했지만 그리 아쉽진 않았는데,
그 이듬해 갑자기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서 강의가 쇄도하기 시작한다.
강의수준은 들쭉날쭉 그 자체였지만,
강의도 하면 할수록 늘기 마련이고,
강의가 끝날 때마다 처절한 반성을 통해 문제점을 분석하는 노력도 더해져서
2014년에는 그래도 제법 알려진 강사가 된다.
한번 부른 곳에서 다시 날 부르고,
다른 곳에 추천해줘서 다시 날 부르는 걸 보면서
"아 내가 이제 강의로 자리를 잡았구나"는 생각을 했는데,
내 삶이 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도 대충 그때부터다.
특히 작년 한해, 특히 10월부터 막판 3개월은
"이건 사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강연만 다녔다.
강의 횟수가 많아지면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늘 불안해했고,
그게 나로 하여금 매번 강의록을 고치게 만든 이유였다.
그 시절엔 거의 매일, 강의록을 손보다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6/0201/pimg_7472501531354633.jpg)
지금은 그때를 회한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오늘 경희대에서 있었던 '그랜드마스터 클래스 빅 퀘스쳔 2016'에서 강연을 하는 기회를 얻은 걸 보면
지난 시절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외수, 이어령, 더글라스 케네디 등 기라성같은 분들 사이에 내가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진 않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이제 난 2012년에 그랬던 것처럼 섭외자의 얼굴을 굳게 만드는 강의는 하지 않으며,
수많은 관객 앞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내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
이거 하나는 뿌듯한 일이지만, 슬픈 것도 있다.
2008년 하얀중 교사가 "강사료는 10만원이다"라고 말했을 때,
난 "그 돈으로 아이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라. 난 안받아도 된다"라고 답했다.
규정상 안된다고 하기에 난 강의 중간에 퀴즈를 내서 내 돈으로 산 도서상품권을 상품으로 나눠줬다.
지금보다 돈은 없었지만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던 그때의 난, 안타깝게도 죽었다.
지금의 난 강의가 들어올 때마다 "강사료가 얼마일까?"를 궁금해 하는 인간이 됐고,
심지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담당자: 여기는 xx도 xx인데요, 강의 좀 부탁드리려고요.
나: 거기 너무 멀잖아요. 안하면 안될...
담당자: 그 대신 저희가 강사료를 많이 드려요.
나: 아유, 제가 당연히 가야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좋아하는 게 뭐가 나쁘냐고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가끔은 타락한 내가 싫다.
변한 건 어쩔 수 없으니 최소한 이건 지키려고 한다.
날 불러준 분의 기대에 부응하는 강의를 하자는 것.
이것만 지키면, 그래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