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 터키에서 본 문명, 전쟁 그리고 역사 이야기
조윤수 지음 / 렛츠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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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접종을 했을 즈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소아시아사에 대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책은 예상외로 불친절했다. 해당 유적지를 방문한다면, 방문지에 대한 지도를 친절하게 제시해야했다. 그러나, 불친절한 커다란 지도를 한장 제시할 뿐, 해당 유적지가 터키의 어느 부분에 위치한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인터넷에 신세를 져야했다. 가볍게 읽을 수는 있지만, 불친절한 자료제시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한가지 위로라면, 조윤수 대사가 제시한 사진 자료를 통해서 미처 알지 못한 소아시아의 다양한 유물 유적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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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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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탄생하는 것일까? 호치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을 찌라도, 호치민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을 떠올리며, 호치민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왜? 그 과업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베트남을 부러워했다. 호치민에 대한 제대로된 서적을 서가에서 찾아보았다. 900페이지라는 묵직한 벽돌책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가 구할 수 있는 제대로된 호치민 평전은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유일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벽돌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어떻게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는 만들어진 존재일까? 탄생한 존재일까?

 

1. 호치민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공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다. 베트남의 적국 출신인 그는 역사학자가 되어 호치민을 연구했다. 아무리 객관적인 시선으로 호치민을 바라본다하더라도, 그가 베트남의 적극 출신이며,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며, 강대국의 시선으로 쓰여진 구절들이 못내 아쉬웠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에필로그는 '신화에서 인간으로'라는 주제로 쓰여 있다.

윌리엄 J. 듀이커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 구절들은 여러 곳이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하다보니, 정작 호치민을 1인칭 시점에서 살펴보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을 강조하다보니, 호치민의 내면을 서술하지 못한 셈이다. 호치민이 쓴 자서전 또한 1차 사료로서 비중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윌리엄 J. 듀이커의 거리두기의 결과였다.

그래, 역사학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픈, 그의 노력이라고 넘어가자며 위안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 투쟁한 베트남의 애국자 판보이차우를 "반역자"로 지칭한 것은 나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그는 호치민이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글들을 저술하는 것조차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응우옌 아이 쿠옥은 사진 손질을 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121

 

생계를 위해서 사진 손질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글을 쓰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호치민)"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은 나로하여금 윌리엄 J. 듀이커의 인격을 의심케했다. 아니, 세계 초강대국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로서는 조국 독립 투쟁이라는 거룩한 가시밭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사용해서,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을 마음껏 해부했다. 그리고 그 해부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을 흠집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한다. 베트남인들이 존경한 판보이챠우가 베트남인의 밀고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베트남으로 압송되었다.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사람을 그의 비서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볼 것인가, 응우옌 아이 쿠옥의 동료 람둑 투로 볼 것인가를 두고, 윌리엄 J. 듀이커는 세심하게 검증의 매쓰를 들이댔다. 어쩌면 응우예나 아이 쿠옥이 범인일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다. 다행히 윌리엄 J. 듀이커는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인물은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결론 내렸다. 객관성, 실증성, 논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응우옌 아이 쿠옥을 해부했다. 애국이라는 뜻의 응우옌 아이 쿠옥으로 이름을 바꾼 호치민이 독립운동의 선배를 내부 권력투쟁을 위해서 밀고했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상세히 서술한 윌리엄 J. 듀이커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독립전쟁이라봐야 방임적 통치를한 영국에게서 전쟁한 것이 고작인 미국! 그러한 미국인으로서 가혹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베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함을 응우옌 아이 쿠옥에게 들이대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에게 덧씌워진 '호 아저씨'라는 신화를 깨고 싶었나보다. 이 책의 곳곳에 "호는 인자한 호 아저씨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742)라는 글이 난무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숨기고 '호 아저씨'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평생을 인자하고 검소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배우로서의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본모습이아닐까? 설령 저자의 말대로 "호 아저씨 역할"을 했을지라도, 평생을 "호 아저씨 역할"을 하며 살았다면, 호치민은 호 아저씨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신화를 깨기 위해서 매쓰를 호치민의 여자문제에 들이댔다. 여기에 주석의 개인 간호사인 수안이라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1955년 국경의 카오 방 성 출신의 한여자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예쁘장한 수안은 곧 나이가 들어가는 주석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개인 간호사 일을 맡겼다. 결국 수안은 주석의 아들을 낳았으며, 훗날 이 아들은 호의 개인 비서인 부키가 양자로 데려갔다. 1957년 어느 날 수안의 주검이 교외의 한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처음에 이 사건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죽은 여자들 가운데 한 여자의 약혼자가 국회에 진정서를 보내, 수안 양은 찬 쿠옥 호안에게 강간당했으며, 호안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다른 두 여자 역시 진상 공개를 막기 위해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진정서 사건은 금방 흐지부지되고 호안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나......(중략).... 호치민이 이 애처로운 이야기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않지만, 어쨌든 그는 이 일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738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 혹은 "호치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텐데, 굳이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호치민이 수안을 정식 아내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 호치민이 "호 아저씨"라는 배역을 강요받았기에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호치민은 왜? 억울하게 죽은 수안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했을까? 수안 사건은 박정희 정권시기에 있었던 정인숙 사건과 비슷한 사건일까? 숱한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윌리엄 J. 듀이커의 검증의 칼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자의 가장 약한 급소는 배꼽아랫일이다. 유력 대선후보가 여자문제로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청렴결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진보 개혁진영에서 여자문제는 치명상을 입힌다.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급소를 직접 건드린다.

70대의 할아버지가 된 호치민은 중국의 당 지도자 타오 주가 하노이를 공식 방문했을 때, 벗을 삼으려하니 중국 광둥성의 젊은 여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타오가 베트남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호치민은 "모두 나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혼자 살아야했던 호치민! 그는 너무도 외로웠을 것이다. 조국과 결혼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그런데, 호치민은 그의 아우라 때문인지, 윌리엄 J. 듀이커의 말대로 호 아저씨의 역할을 강요받아서인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윌리엄 J. 듀이커가 들이댄 검증의 칼날을 보며,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호치민을 위선자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고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평범한 남성의 바램을 느낄 수도있다. 나는 그를 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호치민은 여러차례 유언장을 수정했다. 전쟁 이후,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흩어 뿌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를 뿌린 장소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정치가들은 호치민의 바램을 짓밟았다. 권력을 잡은 레 두안은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처리했다. 유언장에서 세금 감면과 소박한 장례식을 요청한 부분을 삭제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호치민을 신격화했다. 그렇게 그는 신화가 되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책에서 끈질기게 호치민의 신화를 해체하려했다. 그러나, 그도 결론에서는 "호는 전세계의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던 혁명적 영웅의 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840)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의 신화는 지구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화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호치민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2. 그는 가능했고, 우리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것도 국제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우리는 강대국들에 의해서 독립을 했고, 그들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다.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김구와 여운형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호치민이 있었다.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호치민을 탐구하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판보이 차우와 판쭈친의 영향을 받으로 성장했다. 독립 정신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호치민이라는 거목이 자라났다. 호치민의 형 응우옌 신키엠과 누나 응우옌 티 타인 또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한그루의 거목이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듯이, 베트남 식민지배라는 상황속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의 영향을 받으며 그는 혁명가로 자라났다.

예수가 광야를 헤매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달련했듯이, 호치민은 프랑스로 가는 배의 주방보조역할을 하며 세계를 탐방한다. 인도차이나를 비롯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는 프랑스와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가 등지를 전전하며 견문을 넓힌다. 이 시기가 그에게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게했다. 호랑이가 사냥감을 기다리며 엎드려있듯이, 그는 조국 독립을 준비하며 조용히 세계를 여행했다.

어떤이는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었기에 우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20년대 베트남에는 3개의 공산당이 존재할 정도로 공산주의 세력은 분열되어있었다. 또한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대립했다.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호치민이 공산주의 보다는 민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처럼 민족을 우선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권력의 핵심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호치민은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면서도 소련에게 그의 공산주의 사상을 의심받을 정도로 민족을 계급투쟁보다 중시했다. 그가 소련과 친밀했던 이유는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줄 나라가 소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9241월 레닌의 죽음과 1925년 쑨원의 죽음, 1920년데 판보이 처우와 판쭈친의 죽음, 그리고 그후, 베트남 국내에서 활동하던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가 죽음으로써, 사실상 베트남 독립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호치민밖에 없었다. 1940년 봄 베트남으로 귀환한 그는 "아시아 혁명은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으며, 볼셰비키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392)라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해 나갈 수 있어다. 그랬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았기에 민족을 우선시한 그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둘째, 기민하게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했다.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조선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백범 김구가 광복군과 미 OSS와 손을 잡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빠른 패망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잠입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다가오는 조국독립의 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아직 베트남에 들어오지 않은 절묘한 기회를 틈타서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한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이 중국 남부에 그대로 남아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쳐주기를 기다린 반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도전했다. 그리고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피를 흘리며 댓가를 당당히 요구한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독립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남이 대신 피를 흘리기를 기다린 그의 경쟁자들은 결실을 얻을 자격이 없었다.

셋째,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떤이는 베트남의 상황보다 한국의 상황이 매우 나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은 베트남이 더 나빴다. 북부는 중국군과 프랑스군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남부는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때, 미약하게나마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미국은 베트남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호치민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돌아모며 신생국 베트남에 대해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우리한테는 기계도 없고, 원료도 없고, 심지어 숙련된 노동자도 없다. 우리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는 산과 숲, 강과 바다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동포는 결의, 용기, 창의성이 강하다."-565

 

빈약한 무기로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희망이다.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 이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쳤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물러나게했다.

세계적 초능력자 유리겔러에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방법을 묻자. "한국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일을 외친다면, 그때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고, 그 리더를 믿고 한마음으로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많았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서, 백범 김구 등등... 수많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외치지 못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아직도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세력이 존재하는한, 우리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900페이지의 벽돌책을 내려 놓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배라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봄이 오기를 기다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만들었다. 그들의 영웅을 만들었다.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이라는 리더를 믿고 희생하지 않았다면,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보다 팔오우십이 약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되려했지, 현명한 팔로우가 되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과의 전쟁(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리더 호치민이 죽었으나 베트남이 쓰러지지 않은 것도, 베트남인들의 탁월한 팔로우십 때문이다. 호치민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며, 호치민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윌리엄 J. 듀이커는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호치민 신화는 베트남인들에 의해서만들어진 것이기에, 베트남이 다시 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은 호치민 신화를 소환하거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것이다. 신화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다시 한번 베트남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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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2-03-08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실 듀이커는 자유주의자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을 비판적으로 봤던 학자죠. 호의 가족 및 청렴 문제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저는 그런 점들 보단, 듀이커가 인간 호치민의 혁명적 생애를 보다 조명하는데 더 시간을 할애했다는 생각이 책을 읽으며 들었었죠. 아이러니 하게도 예전에 미국서 만난 베트남계 미국인 하버드 대 교수는 저랑 대화하면서, ˝듀이커의 호치민 전기는 좋은 책이지만, 호치민의 과오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PBS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 시리즈가 명작임에도 미국 위주의 편향성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듯이, 듀이커도 그렇겠죠. 저는 베트남 여행가기 전인 2020년 1월에 다시한번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었었는데, ‘실패한 사회주의‘라는 듀이커의 표현이 다소 불편했습니다. 베트남 도이모이의 배경에는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제재가 분명히 있는데, 듀이커는 이에 대해 입을 닫았죠. 서방학자가 가지는 한계랄까요.

뭐 그래도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훌륭한 역작이고, 지금까지 나온 호치민 주석 관련 책들 중에선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봅니다. 강나루 님의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22-03-08 21:48   좋아요 1 | URL
듀이커에 대한 정보와 개인적으로 만난 학자와의 대화 내용이 흥미롭군요. 호치민에게 관심이 많은 NamGiKim님의 견해 잘들었습니다. <<호치민 평전>>에 많은 기대를 했기에 몇몇 부분에서 실망을 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한글로된 호치민에 대한 책이 희소한 현실에서 <<호치민 평전>>은 소중한 책이라는 견해는 동의 합니다.

NamGiKim 2022-03-08 21:58   좋아요 1 | URL
하버드 대 교수로 호치민시와 미국을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었죠. LA에서 인천으로 귀국하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았죠. 그래서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 제가 베트남 역사를 제법 아니, 반가웠는지 명함도 주더군요. 호치민 보다 응오딘지엠을 긍정적으로 말했었죠. ˝응오딘지엠은 애국자지만 잔인하기도 했다.˝고 ㅋㅋㅋㅋㅋㅋㅋ

보트피플의 태생적 한계랄까요.
 
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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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제국의 후예들'이라는 제목은 박진감 너치는 영웅들의 활약을 기대하게한다. 티무르를 비롯한 몽골제국의 후예들이 펼치는 영웅담을 기대며 이 책을 펼쳤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쉽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제국의 이름과 너무도 많은 인물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얇은 책에 넓은 이야기를 담으려니 수박 겉핥기 식의 서술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13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제국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라,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그 이후에도 줄기차게 역사의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세계사에서 티무르제국과 무굴제국 정도만 기억하던 나에게 모굴 칸국을 비롯해서 우주벡 칸국까지 여러 몽골제국 계승국가를 알게 되었다. 역사는 단절되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앞시기의 역사가 뒷시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물론, 저자 이주엽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칭기즈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그 왕국을 몽골제국 계승국가로 여길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주엽은 10장 청제국 : 몽골인의 협력으로 건설된 만주인의 제국을 저술했다. '청제국'을 독립된 장으로 저술한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청제국은 엄연한 만주인의 제국인데 '4부 동내륙아시아의 몽골제국 후예들'이라는 제목으로 10장 청제국과 11장 북원을 하나로 묶어 편성한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으로 보인다. 또한 맘룩 제국의 지도자 중에서 몽골인의 피가 섞인 자들을 골라내어 강조한 것도 논리적 비약으로 보인다. 


  광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던 몽골제국이 멸망했다. 그후,  수많은 계승국가들이 출현했다. 이들의 역사를 하나의 책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힘든작업이다. 이 작업을 해낸 이주엽의 학문적 성취는 마땅히 인정해야한다. 이책을 덮으며 저자 이주엽의 집념과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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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이야기 - BBC 한 권으로 읽는 인도의 모든 것
마이클 우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살림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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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 문명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찾는다. 수 많은 히피들이 그러했듯이 신비의 나라 '인도'를 상상하며 인도를 찾아 떠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인도와 현실의 인도는 다른다. 머릿속에 상상하는 인도의 모습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그들에게 인도는 자신의 수많은 모습중에서 일부만 보여준다. 마이클 우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인도를 세상에 알렸다. 그가 만난 인도는 어떤 모습일까? 영국인이라는 한계를 그는 뛰어 넘어 참다운 인도의 모습을 발견했을까?


  세상은 넓은면서도 좁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서구의 언어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1786년 콜카타에 살던 영국인 판사 윌리엄 존스 경은 발견한다. 산스크리트어가 그리스어, 라팅어와 흡사하다는 사실은 이들 언어가 동일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왔다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인도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윌리엄 존스 경 처럼 인도의 언어를 공부하며 스스로 의문을 품고 이 질문에 답하려할 때만이 자신의 모습을 조금 보여준다. 

  인도의 참모습을 보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인도의 참다운 모습을 보려고하기 보다는 없애버리려고하는 자도 있다. 우리가 세계사 교가서에서 배운, 쿠샨 왕조의 카니슈타왕의 석상이 2001년 4월 카불 박물관에서 탈레반의 손에 박살냈다. 극단적 종교 중심주의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재를 우상으로 규정하고 훼손했다. 머리가 사라져버린 카니슈카왕의 석상은 우리에게 극단적 종교중심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같은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굴제국의 아크바르는 달랐다. 그는 이슬람교를 비롯한 힌두교 등의 다양한 종교의 화합을 추구했다. 종교적 극단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관용과 화합이라는 탁월한 정책으로 무굴제국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 샤 자한을 황금 감옥에 가둔 아우랑제브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휩싸여 제국을 병들게 했다. 


  "나는 혼자 와서 이방인으로 떠난다. 내가 누군지, 지금껏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 어떤 처벌이 날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구나!"-355쪽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어떠한 처벌을 받을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저지른다면, 그 죗값은 더 무거워질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저지르면서 죄를 짓는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종교가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를 폭력적으로 이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라는 색안경으로 인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인도의 일부분만 볼 수 있듯이, 국가라는 색안경을 쓴자도, 인도의 일부분만 왜곡해서 바라보게된다. 저자 마이클 우드는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죄악을 정면으로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도 영국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영국이 인도를 200년 동안 식민지배하면서,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다. 그중에서 가장 최악의 만행은 인도인을 분할하여 통치하려는 계획이다. 뱅골분할령은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갈등이 심화되도록 했다. 비록, 뱅골분할령이 당시에는 실패했을지라도, 이후의 영국의 인도 식민정책의 근간은 힌두와 이슬람교를 이간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간계는 성공해서, 인도가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독립되도록 했다. 만약 마이클우드가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를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영국의 뱅골 분할령을 언급하며 통렬한 반성을 했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며, "분할이 영국의 현실정책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도의 분할은 여러 번에 걸친 실패의 결과였다."라며 영국의 책임을 회피한다고,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만행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라는 안경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한, 영국인 마이클우드는 인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아무리 가족과 인도를 많이 찾고,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할지라도, 그는 제국주의 영국이라는 저질 안경으로 인도를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인도를 전공한 학자가 적고, 인도 관련 서적이 적기 때문에 인도에 관한 정보를 얻기 힘들다. 비록 무더운 여름철 시워한 냉수 같은 시원함을 선사하지는 못하지만, 마이클우드의 '인도 이야기'는 인도에 대한 지식에 목말라하는 우리에게 한모금의 김빠진 사이다의 맛을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문자의 한계는 분명했다. '살림'출판사가 이책을 다시 출판하려한다면, 부록에 이책의 다큐멘터리를 함께 담아 출판하기를 기대한다. 적어도, 유튜브에 관련 다큐멘터리를 올려 놓고, 이책에서 안내를 해준다면, 책과 다큐멘터리가 조화를 이룬 재미있는 인도 여행이 될 것이다. 


ps. 흥미로운 사료를 첨부한다. 


"왕으로 봉해진 지 8년이 지나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왕-'신드의 사랑을 받는 자'-은 칼링가를 공격했다. 15만 명이 생포되었고, 10만 명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그 뒤에도 거의 같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칼링가를 무릎 꿇린 뒤 왕의 마음속에서 투쟁심 또는 갈등, 법을 향한 갈망이 싹텄다. 정복에 대한 후회도 생겼다. 자유민을 정복한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학살하고, 노예로 만든다는 듯이다. 이제 왕은 이런 일에서 고뇌를 느꼈다. 대단히 심각한 일있다."-아소카 석주 8

 

"위대한 구원의 건축가인 쿠샨의 카니슈카, 올바른 분, 정의로운 분, 전제군주, 신 예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 나나를 비롯한 모든 신에게서 왕의 자리를 얻으셨다. 왕은 첫 번째 해에 즉위하셨다. '''' 그리고 그리스어로 '칙령'을 발표하신 뒤 아리아어로 번역하셨다. '''''' 왕의 영토는 사케타시, 카우삼비시, 파트나시, 스리캄파시까지 이르렀다. '''' 왕의 의지에 굴복한 모든 왕과 그밖에 중요한 인물들에게 까지, 왕은 인도 전체를 자신의 의지에 굴복시켰다.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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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07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이책 찜!!☝
장바구니로~~@@

강나루 2021-05-07 17: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초딩 2021-05-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

강나루 2021-05-08 19: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두서 없이 쓴글이 당선되어 쑥스럽고요
축하까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초딩 2021-05-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이야기의 근원이 여기 인것 같군요 ㅎㅎㅎㅎ

서니데이 2021-05-08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강나루 2021-05-09 05:1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5-09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행복한 날 되세요^^

강나루 2021-05-09 09:27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이하라님도 행복하고 사랑 넘치는 하루 보내세요.^^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 - 세계사를 뒤흔든 중동의 거대한 바람
류광철 지음 / 말글빛냄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이슬람의 눈으로본 세계사'를 읽고, 이슬람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그 책을 읽은지 꾀 오래되어 이슬람에 대한 역사도 희미해져갔다. 이슬람 역사에 대하서 다시한번 빠져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라는 책을 꺼내들었다. 


  전직 외교관 출신이라 그런지, 이슬람의 역사를 설명하면서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막에 떠돌아 다니던 유목민을 이슬람교는 하나로 뭉치게 했다. 그리고 그 힘은 대단했다. 이베리아 반도까지 팽창하며 유럽을 공포에 질리게 만든 것이 이슬람이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빈을 포위 공격하며 유럽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화려한 이슬람의 역사를 이슬람인들은 잊지 못한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도래하자, 이슬람인들은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는 정치인들과 과거 영광스러운 순수 이슬람시대로 돌아가자는 종교인들로 양분된다. 이에 대해서 유광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대에 생긴 문제는 이 시대의 중지를 모아 현대의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187쪽


  영광스러운 과거가 오늘의 족쇄가 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것을 잊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며, 내일을 설계해야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고집하며 과거를 오늘에 재현하려고 한다면 이는 과거의 노예일 뿐이다. 우리가 과거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교훈을 얻고, 과거의 승리와 패배의 요인을 알아내어, 오늘을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인 과거의 성공 이야기에 취해서, 과거에 했었던 모든 것을 재현하면 과거의 영광이 돌아올 것으로 착각한다. 역사는 변화와 발전이라는 개념이 있다. 과거의 일이 현재에 다시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변화된 환경과 발전된 사회라는 조건 하에서 유사하게 반복된다 할지라도, 과거의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다면 패배자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 이슬람은 중세 유럽인들이 이슬람의 발전된 문물을 배워 근대를 이끌어낸 점을 교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특히 탈레반에서 자행되는 여성 억압과 IS에서 이뤄지는 반인륜적인 행동은 이슬람교의 전통에도 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재미있게 이슬람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고 싶다면, 이책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책에도 몇가지 오류들이 있다. '알라신'이라는 표현이 대표적이다. '알라'는 '신'을 의미한다. '알라신'은 '신신'의 뜻이니, 너무도 황당한 표현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120쪽에 "오스만이 진출하는 곳에는 언제나 예니체리가 앞장섰다."라는 표현이다. 물론, 예니체리를 미화시키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으나, 사실과는 다른다. 예니체리는 다른 군대를 보내고, 최후의 결정적 순간에 투입해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부대이다. 그들을 총알받이로 앞장세우는 일은 없다. 

  분쟁이 지금도 계속되는 서아시아 지역(중동)을 바라보며, 이제는 알라의 평화가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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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4-13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광스러운 과거가 오늘의 족쇄가 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노예가 된다는 교훈을 배워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