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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 70여 년 동안 이어진 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끝나지 않는가
김재명 지음 / 미지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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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이 있다.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 핍박을 받았으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드디어 신께서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했다!!' 소년 시절, 탈무드를 읽으며 이스라엘인들을 응원했다. "땅 없는 민족에게 주인 없는 땅을"이라는 테오도르 헤르츨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주인이 있었다. 성경을 보더라도 출애굽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왔을 때, 불렛셋이라는 팔레스타인 선주민이 있었다. 2천년 후, 유대인들이 다시 팔레스타인에 왔을 때에도 그 땅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땅의 주인을 몰아내고 학살했다. 그러면서 성서에 기록된 약속의 땅이라는 점을 근거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인종 청소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인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바라본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담은 책이다. 


1. 악마와 싸운 그들이 악마가 되었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는 저서에서 "악마와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스스로도 악마가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악마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히틀러라는 악마와 싸운 유대인들은 히틀러와 싸우며 그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히틀러도 유대인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다. 결국, 유대인들은 히틀러를 닮아가지는 않았을까? 이 책에서 이 물움에 대답을 찾아보자.

  1948년 5월 14일 나크바라는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이르군, 하가나 같은 이스라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을 학살했다. 그들을 패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피난을 떠나야했다. 그들의 손에는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열쇠와 집문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중동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은 패배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다. 아랍국가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만들어 독립전쟁을 했다. 마치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수시로 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한 것과 비슷한 활동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도 전개했다. 

  그런데, 1982년 9월,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공격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믿고 철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브라, 사틸라 난민촌을 에워싸고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을 학살할 수 있도록 아리엘 샤론의 명령에 따라 밤새도록 조명탄을 쏘았다. 마치 청산리 대첩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그 분풀이로 간도의 조선인 동포를 학살한 간도참변 처럼 말이다. 전시라 할지라도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분명한 국제법 위반이며 전쟁 범죄이다. 그런데, 아리엘 사론은 "나를 괴물이나 학살자로 불러도 좋습니다. 이스라엘을 유대인 나치 국가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죽은 성자보다는 그게 낫습니다."(121쪽)라고 말했다. 그렇다. 아리엘 샤론의 말처럼 그들은 유대인 나치국가가되어 히틀러가 유대인에게 했었던 만행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하고 있었다. 악마와 싸우며 악마가 되어 약자를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그들의 섬뜩한 모습에 히틀러는 지옥에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이스라엘에 이스라엘군이 주둔하면서 식민지배를 한다. 이에 대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제1차 인티파다 시기에 그들이 가진 것은 돌밖에 없었다. 일제의 무단 통치에 대항해서 우리가 3.1 운동을 했듯이, 그들은 인티파다를 전개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아리엘 샤론은 2005년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불법 정착촌을 철수시킨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필요시마다 가자지구를 F16 전투기로 폭격했다. 

  2009년 저자 김재명은 가지구를 방문했다. 그 때 팔레스타인 주민은 "우리가 하마스를 지지했다 하더라도 총을 들고 싸운 전투원이 아닌데, 왜 마구잡이로 폭격해 집을 부수고 사람 목숨을 빼앗아 가느냐?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76쪽)며 울분을 토했다. 탁트인 시야를 확보하겠다며 불도저로 올리브 농장을 밀어붙이고, 응급차의 마을 진입을 막고, 부모의 주검 옆에서 굶주리는 아이 4명을 나흘이나 내버려둔 이스라엘군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은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는 인간이 아니라 제거해야할 블렛셋인들로 보였던 것인가?

  이스라엘군의 정신상태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이스라엘 군인이 단체로 티셔츠를 맞추었다. 그런데 그 티셔처에 인간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팔레스타인 임산부 배에 총으로 조준을 을 해 놓고는 "1 shot 2 kills"라 적어 놓은 것이다. 1발로 2명을 죽인다는 섬뜩한 글귀를 적은 티셔츠를 단체로 맞춰입고 sns에 자랑하며 올린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다. 

  이러한 사실을 유엔도 알고 있다. 2009년 3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특사 라디카 쿠마라와미는 제10차 유엔 인권 이사회에서 "이스라엘군이 가지지구 침공 당시 11세의 팔레스타인 소년을 '인간방패'로 활용하는등 많은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101쪽)는 내용의 43쪽 보고서를 제출했다. 임산부와 배속의 태아에게도 총을 조준하며 "1 shot 2 kills"을 외쳤을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소년들은 인간 방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분노에도 거칠 것이 없다. "UN 마크가 뚜렷이 달려 있는데도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소속 직원의 차량이 부서졌고, 난민촌은 파괴되고, 점령지역 민간인은 강제로 이동당했다. 이는 제네바 조약 규정 위반이며 명백한 전쟁범죄이다. 이스라엘이 전쟁 범죄를 저질러도 그들에게는 미국이 있다. UN에서 미국은 거부권이라는 무기로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눈감아 주었다.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이스라엘 로비와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국익보다 이스라엘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미국외교를 지적했다. 유대인은 유대인 로비단체를 이용해서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을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반유대 정서를 확산시키는 일등 공신은 이스라엘일지도 모른다. 


2.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인가?

  이슬람 지식인은 저자 김재명에게 "이스라엘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내 민족만 잘났다고 타민족을 압살해선 안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배우기는 커녕, 나치의 악랄한 수법을 그대로 배워 중동땅에서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211쪽)고 토로했다. 히틀러의 수제자가 이스라엘이라는 그의 지적에 의문이 들었다. 과연 구약에 의해서 모든 것을 약속 받았으며, 고통이 끝나고 약속의 땅으로 그들이 귀환하여 이스라엘을 건국했다는 그들의 신화는 진실일까?

  저자 김재명은 아서 쾨스틀러의 '열세번째 지파'라는 책을 인용해서 이스라엘의 신화를 걷어낸다. 현대 유대인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740년 무렵 카자르 왕국의 불란왕이 유대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탄생했다.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독일 히틀러에 의해서 희생당했다. 아쉬케나짐 유대인은 로마에 의해서 나라를 잃고 2천년 동안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기억하는 자의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화를 기억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팔레스타인인을 박해하고 학살하고 있다. 

  그뿐아니다. 유대인은 동유럽에 분포한 아슈케나짐, 스페인을 중심으로 분포한 세파르딤, 이슬람인들과 조화롭게 지낸 미즈라힘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은 미즈라힘의 역사를 지워버렸다. 박노자 교수의 '하얀 가면의 제국'이라는 책에 의하면, 이스라엘인들은 로마에 의해서 디아스포라의 고통,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거쳐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슬람인들과 이웃하며 조화롭게 살았던 미즈라힘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고한다. 조화롭게 더불어 살았던 역사를 버리고 박해받았던 고통의 역사를 모든 유대인의 기억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피의 복수가 벌어질 수밖에.....

  이러한 이스라엘의 박해의 기억은 이스라엘을 제대로된 민주국가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갖은 21%는 아랍인이다. 그들은 병역을 면제 당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업하기 어렵다. 취업해도 똑같은 일을 하는 유대인 입사 동기와 임금 및 승진에 차별을 받는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주류 사회에 편입하지 못하고 2등 시민 취급을 받는다. 또한 유대인 사회 내에서도 피부색에 따라서 차별이 존재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1등 시민 유대인과, 2등 시민 아랍인, 그리고 죽여도 비난받지 않는 호모사케르보다 못한 팔레스타인인으로 구성된 비민주적인 국가이다.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의 의해서 강제 점령당하고 있다. 곳곳에 검문소가 있고, 서안지구 내에 분리장벽이 존재한다. 땅의 주인이 자신의 땅에서 죄수 취급을 당하고 있다. 불법 정착촌 사람들이 달리는 차에 돌을 던져 팔레스타인인을 위험을 빠뜨리고, 이스라엘군이 난민촌에 총을 쏘아 댄다. 팔레스타인인이 저항하면 그들을 테러리스트라며 감금한다. 랄프 쇤만은 '시오니즘의 숨은 역사'라는 책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인 순사가 독립운동가에게 했던 '성폭행과 전기고문'을 비롯한 악랄한 고문을 소개했다.(169쪽) 열악한 감옥에 인권을 유린하면서 감금당하는 팔레스타인이들에게서 우리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인권을 중시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만행이 이스라엘에서는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저자 김재명은 이스라엘을 민주국가라기 보다는 "군사 파시스트에 가깝다."라고 단언한다. 그 근거로 "이스라엘은 21세기에 식민지를 두고 있는 유일한 국가"(331쪽)임을 지적한다.김재명의 날카로운 지적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스라엘은 아테나 보다는 스파르타에 가까운 나라이다. 스파르타도 그들 내에서는 민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그리고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반자유민인 페리오코이와 예속농민인 헬일로타이를 지배했다. 그리고 반란의 기미가 있는 건장한 청년들을 주기적으로 살해했다. 이는 이스라엘을 '군사 파시스트에 가깝다'고 지적한 김재명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이후 지금까지 '국가 비상 사태'아래 있지 않은가!

 

  "2000년부터 2021년까지 22년 동안 팔레스타인 희생자는 최소 1만 2600명이고 이스라엘 희생자는 1700명 가량이다. 사망자 비율로 따지면 유대인(이스라엘) 1명당 아랍인(팔레스타인) 7.4명 꼴이다."(33쪽) 이러한 사상자 비율은 일제의 의병 학살에 맞먹는 교환비율이다. 이는 전쟁이 아닌 학살이라고 볼 수 있다. 2024년 현재에도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구호물품을 전달하기 위한 유엔 차량을 폭격하고 난민촌을 폭격하고 있다. 전기가 끊겨 인큐베이터에 있던 아이들이 침대에 눞혀져야만 했다. 2014년 프란시스코 교황이 세월호 가족을 만났을 때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15쪽)이라는 말을 했다. 저자 김재명은 기계적 중립을 거부한다. 악과 선 사이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중립이 정의가 될 수 없다. 일제에 대항한 우리의 의병투쟁과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가 오버랩되기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다. 아우슈비츠의 피해자였기에 가해자가 되어 버린 그들은 용서 받는 것인가? 히틀러의 뒤에 서서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동을 이제는 그만두어야한다. 그들이 인간적 양심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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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
도브 왁스만 지음, 장정문 옮김 / 소우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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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브 왁스만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이라는 책제목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쉽게 설명해줄 책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도브 왁스만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죄를 저지른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불안감이 들었다. 과연 도브 왁스만은 그의 조국 영국이 저지른 원죄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 문제의 진실을 우리에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도브 왁스만에 대한 불신은 한국어판 서문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과 친한 한국과 팔레스타인과 친한 북한의 구도를 설명하는 도브 왁스만의 글을 읽으며 그가 객관과 중립이라는 미명하에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거짓과 섞어서 우리에게 전하진 않을까? 라는 불안감이 들었다. 


  "사람들은 갈등이 있을 때, 그 안에 숨겨진 복잡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어느 한쪽편을 드는 경향이 있다. 분쟁에 대해 단순하고 편향된 관점을 취할 뿐 아니라, 선과 악 사이의 일종의 도덕적 게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16쪽


  달리는 기차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중간은 기회주의자들의 선택일 뿐이다. 아일랜드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가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양비론, 양시론으로 양쪽의 비판을 피해가며 악이 승리하도록 방조하는 우를 도브 왁스만이 저지르지는 않을지 내심 불안했다. 특히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의 말을 저자가 인용할 때는 그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분쟁은 비극이며, 정의와 정의의 충돌이다. 따라서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불의와 불의의 충돌이기도하다."-19쪽


  전형적인 양비론, 양시론이다. 양쪽을 긍정하고 양쪽을 비판하는 전형적인 미꾸라지들의 행태이다. 논어에 자공이 마을 사람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는 사람은 어떻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시 자공이 마을 사람이 모두 싫어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역시 좋지 않다고 말했다. 공자는 마을 사람중 착한 사람은 그를 좋아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그를 싫어해야한다고 말했다.(子貢問曰: 鄕人皆好之, 何如? 子曰: 未可也. 鄕人皆惡之, 何如? 子曰: 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好之, 其不善者惡之.) 중립을 지키는 책보다는 정의를 말할 용기가 있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랬기에 이 책을 읽는 초반에 도브 왁스만의 글을 의심의 눈초리를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 책은 생각보다 객관적으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었다. 1994년 헤브론의 이브라히미 모스크에서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이 기도하던 팔레스타인인 29명을 총으로 쏴죽인 사건을 도브 왁스만은 과감하게 소개했다. 팔레스타인의 가해는 대서특필하면서 이스라엘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서방 언론과는 확실히 대비되는 서술이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의 땅을 빼앗은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민족은 없다.'라고 선전한다. 심지어 "땅없는 민족에게 민족없는 땅을"(94쪽)이라는 구호는 초기 시오니스트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극명히 보여주며 팔레스타인이라는 민족이 실존하지 않다는 프로파간다를 갖게한다. 더욱이 서아시아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박현도 교수님도 팔레스타인 민족은 없다고 팟캐스트에서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브 왁스만은 팔레스타인 민족을 인정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한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이지역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다고 신뢰하는 박현도 교수님도 팔레스타인 민족은 없다고 말했는데, 영국 출신의 도브 왁스만이 이를 인정하다니! 이는 충격이었다. 

  보드 왁스만은 근대민족주의가 18세기 이후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이라면 1834년 대규모반란과 1948년 5월 15일 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 민족이 탄생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민족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민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주인없는 땅에 옛주인이 다시 돌아왔다는 그들의 서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민족을 인정할 때만이 평화의 대화가 가능하다. 

  팔레스타인 분쟁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에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졌다. 땅의 주인이면서도 땅을 빼앗기고 그땅에 죄인처럼 창살없는 거대한 감옥에 살아야했던 우리의 근대사와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오버랩되었다. 만약 우리가 독립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팔레스타인인 처럼 창살없는 감옥에 살거나 전세계에 흩어 뿌려져서 뿌리내리지 못한 민족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신 선열들이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한편, 강경파 팔레스타인이들에 대한 아쉬움도 들었다. 팔래스타인 지역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UN에서 고민이 있었다. 이때 팔레스타인 아랍지도자들은 팔레타인 특별 위원회(UNSCOP)에 참여를 보이콧했기 때문에 특별 위원회는 시온주의자들의 발표만 들었다. 결국,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결정이 내려졌다.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UNSCOP)의 결정에 시온주의자들은 예루살렘 헤브론 등 유대의 역사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랍 국가 영토에 포함되어 불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UNSCOP)의 분할 계획을 수용한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에 반발하며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과는 나크바(대재앙)으로 이어졌다. 

  이 부분은 5.10 총선에 참여하지 않은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행동과 오버랩된다. 결국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가 5.10 총선을 거부하자,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은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후, 친일파에 의해서 독립운동가가 역청산되는 비극이 벌어진다. 현실을 무시한 선명성 경쟁이 비극을 불러온 것이다. 지금 100%를 갖지 못한다해도 이를 받아들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금씩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 노력하는 영리함을 독립운동가와 팔레스타인인들은 갖지 못했다. 

  오슬로 협정에 대해서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에 굴복한 굴욕적인 협정으로 서술되어있다. 그러나, 도브 왁스만은 오슬로 협정의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면을 강조한다. 


  "오슬로 협정은 폭력에 대한 외교의 승리이자, 이스라엘 정부와 PLO 지도부가 만들어낸 정치적으로 대담한 이니셔티브의 상징이다."- 209쪽


  PLO가 패배한 협상을 정적으로 바라보는 도브 왁스만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다. 이협정에 도장을 찍은 아라파트도 결국은 암살당하지 않았던가? 팔레스타인 인들은 정부를 구성하지도 못했다.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서 인권을 침해당하며 생명까지도 잃는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인들의 모습을 도브 왁스만은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헤르츨은 '오래된 새로운 땅'이라는 글에서 "이루고자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목표는 더 이상 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대인의 의지가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재앙의 시작이 되었다. 도브 왁스만이 이 책에서 말했듯이,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유전자가 상당부분 겹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두 민족이 유전적으로 서로 관련이 있음을"(68쪽) 알려준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유전자를 가지고 살았던 두 민족이 이제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불행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이 '평화'라는 목표를 같이 이루고자 노력하길 바란다. 그런다면 두민족은 더 이상 한민족의 의지가 타민족의 재앙의 시작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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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2024-06-30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타인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준은 그 역사를 통과한 사람들의 흔적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나루님의 걱정에 저 또한 더욱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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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어느 가장이 폐허가된 건물 잔해 속에서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다.(2024.06.06.) 힘없이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와 물끄러미 아버지를 응시하는 딸과 천진난만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아들의 모습이 애절해보인다.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죽었다. 그 중에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하기에 가장은 폐허속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잔인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우리가 반드시 바로 알아야할 역사이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출신 미국인 라시트 할리디의 책을 꺼내들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을 '정착민 식민주의'라고 정의한다. 정착민 식민주의는 무엇이며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1948515일 나크바(대재앙)가 시작되었다. '대재앙'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시작되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서 약속의 땅에 도착은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정주민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신이 약속한 땅이라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의 주인을 그 땅에서 몰아냈다. 사실 구약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인정하다 하더라도 팔레스타인에는 블렛셋이라 불리는 팔레스타인 선주민이 있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의 첫주인이 아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팔레스타인인을, 그 땅의 주인을 자신의 땅에서 몰아냈다. 히틀러가 저지른 만행의 피해자가 로마가 일으킨 디아스포라의 가해자가 되었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늙은이들은 죽고 젊은이들은 잊어버릴 것'이라며 이스라엘의 미래를 낙관했다. 자신들이 2천년 동안 유랑민으로 살았음에도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을 팔레스타인인들은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종식되는 날, 팔레스타인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인에게 트라우마의 시작이며 멀고 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첫걸음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다시 땅을 되찾는데는 2천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착민 식민주의 기획이 낳은 결과"!! 그렇다. 지금의 팔레스타인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저자 라시드 할리디가 말한 '정착민 식민주의 기획이 낳은 결과'이다. 그렇다면 '정착민 식민주의'란 무엇일까? 저자는 정착민 식민주의의 사례로 미국과 호주를 든다. 총과 천연두균을 앞세운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의 주인인 내이티브 어메리칸들을 '인디언 보호구역'에 몰아 넣고 아메리카의 주인이 되었다. 호주로 간 유럽인들도 호주의 주인인 어보리진들의 땅을 빼앗고 학살을 자행했다. 심지어는 어보리진들의 아이들을 납치해서 백인 가정에서 기르게했다. 뿌리 뽑힌 어보리진과 내이티브 어메리칸들은 땅의 주인임에도 이방인이 되어 레디메이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땅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창살없는 감옥에 갖혀 독립국가 건설의 꿈을 꾸며, 혹은 그 꿈도 없이 죽은 가족의 복수를 꿈꾸며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며 일제 강점기 땅의 주인이면서도 일제에게 땅을 빼앗기고 만주로, 연해주로 유랑을 떠나야했던 우리의 역사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팔레스타인인은 죽거나 사라진 팔레스타인인이지요."라고 말했다. 이 말은 1869년 미국의 필립 셰리든 장군이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다.(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라고 한 말과 유사한 말이다. 유럽인이 내이티브 어메리칸인을 학살하며 땅을 빼앗앗듯이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인을 죽이며 그들의 땅을 빼앗았다.

194849일 데이르 야신 마을에 이르군과 하가나의 공격 대원들이 들이 닥쳐서 주민 100명을 도살했다. 이중 67명이 여자와 어린이, 노인이었다. 유럽인들은 여자와 어린이를 학살하는 것을 야만인들이나하는 것으로 여기며 맹비난을 한다. 인도의 세포이 항쟁 시기 세포이들이 백인 여성과 아이들 학살한 것을 들먹이며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학살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팔레스타인 인종청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역사는 강자의 기록인가보다.

저자 라시드 할리디는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를 폭격할 때 그곳에 있었다.라시드 할리디는 임신한 아내와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딸을 폭격과 폭력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탈출 시키려 발버둥을 쳤다.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반쯤 완공된 8층짜리 아파트에 최소 1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라파트가 이곳을 다녀간 직후 폭격이 있었고 아파트는 주저 앉았다. 더 끔찍한 일은 잠시 후, 그곳에서 차량폭탄이 터졌다. 모사드가 "잔해더미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찾으려 애쓰는 가족을 도와주는 구조대원을 죽이려 설치해둔 폭탄"(217)이 터진 것이다. 모사드 장교는 이를 "살인 자체를 위해 살인하는 무기"라 불렀다. 여성과 어린이가 있는 아파트를 폭격한 것에서 더해서 사랑하는 가족의 유해라도 찾으려 다가간 사람과 그들을 구조하려는 구조대원을 죽이려는 모사드의 잔혹한 만행은 분명히 테러이며 인종청소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 다 19828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한다. 그들은 미국을 통해서 베이루트에 남아있는 팔레스타인 가족의 안전을 보장 받았다.

 

"베이루트에 남아 있는 법을 준수하는 팔레스타인의 비전투원들과 철수한 사람들의 가족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거주하도록 승인을 받을 것이다." -227

 

레바논 외무장관이 전달한 미국 문서를 받아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대원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양심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이 쪼가리는 그들의 가족을 지켜주지 못했다. 914일 이스라엘은 베이루트 서쪽을 장악한다. 이스라엘은 조명탄까지 쏘면서 '레바논 부대' 민병대가 민간인을 도살하도록 도와준다. 1,300명이 이들에 의해서 도살된다. 이러한 만행을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겪은 피해자들이 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베긴은 그들의 인종청소를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용감한 군대가 무고한 민간인들 사이에서 히틀러와 그 심복들이 지하 깊숙한 벙커 속에 은신해 있는 베를린을 상대하고 있는 느낌"-216

 

묻고 싶다. 베긴이 히틀러와 닮았는가? 아니면 아라파트가 히틀러와 닮았는가?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을 히틀러에 비유하는 그들을 보며 몸서리가 쳐진다. 이스라엘이 우리의 이웃이 아닌 것이 다행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팔라스타인인에 대한 공격을 계속된다. 20147월 가자 시티 슈지이야 폭격에 대해서 "미국의 한 퇴역 장군은 이스라엘의 포격을 <균형이 전혀 맞지 않은 보복>"이라 규정했다."(320) 불행히도 균형이 맞지 않은 보복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과 평화로이 살기보다는 그들을 박멸하길 원한다. 유럽인들이 내이티브 어메리칸인들에게 했듯이 말이다.

어떤이는 말한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부정과 부패, 무능이 문제이다!! 이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들은 부정 부패를 저지르고 무능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요인을 암살했다. 이라크 바트당의 아랍해방전선, 아부 알아바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해방전선 이들에 의해서도 팔레스타인해방전선의 핵심 인재들이 암살 당했다. 지도부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내리는 원인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독재국가 지도자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요인을 암살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팔레스타인이여! 그대들에게 신은 너무도 멀리있고, 이스라엘은 너무도 가까이 있구나!

19727월 카나피니는 17살짜리 조카 라미스나즘과 함께 모사드의 차량 폭탄 공격으로 암살당했다. '하이파로 돌아가다'의 저자이자 산문 작가인 그를 모사드가 암살했지만, 17살짜리 소년과 함께 암살했지만 이스라엘은 테러국가로 지목받지 않는다. 강자의 폭력은 전쟁이고, 약자의 폭력은 테러라고 말한다. 그러나, 강자인 이스라엘은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폭력을 가장 약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사용한다. 그들이 소년일지라도....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는 국제법 전문가도 없었으며, 탁월한 지도자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유랑생활을 했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요인들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오슬로 협정에 서명한다. 우리는 오슬로 협정을 탁월한 평화 협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탁월한 협정이지만,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최악의 협정이었다.

이스라엘의 점령 상태는 무한정 유지되었고, 군사통치가 종식되지도 않았으며, 불법적인 유대인 불접 정착이 동결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데 팔레스타인인 자치국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협력>"(289)이 체결된 것이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 낙관했으나 그도 이스라엘에 의해서 창살없는 감옥에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갔다.

 

책을 덮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100년 동안의 전쟁에 가슴이 아파왔다. 시집살이를 당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서는 새며느리에게 더 가혹하게 시집살이를 하듯이, 히틀러의 박해를 받은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그 이상의 박해를 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평화의 희망을 찾기 위해서는 미국의 양심있는 시민에게 호소해야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한 이유가 전쟁무기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미국의 양심있는 시민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우리 모두가 바란다면, 양심있는 친구에게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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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동남아 - 30개의 주제로 읽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강희정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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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아라는 지역에 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보다 뒤떨어진 지역, 열대지역이라는 조건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은 지역으로 생각한다. 나도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책을 읽었다. 그러나 책장을 덮고 나서야 깨달았다. 동남아는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지역이라는 시실을....


  그렇다면 우리는 동남아로부터 무엇을 배워야할까? 그것은 외교에 있다. 동남아는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풍족한 자원과 향신료는 동남아에게 축복이기보다는 재앙이었다. 신이 동남아인에게 준 선물은,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자에게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수완나부미(황금의 땅)'을 찾아서 인도인 이슬람인들이 동남아로 왔고, 그 뒤를 이어서 유럽인도 왔다. 그들은 동남아를 식민지로 삼으며 수탈했다. 식민의 아픔을 겪었기에 그들은 깨달았다. 약자가 강자에게 짖밟히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현명한 외교술을 터득했다. 

  약자의 힘은 단결이라고했다. 미국과 소련의 강자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동남아 국가들이 제3세계 외교에 참여한 것도, ASEAN을 결성해서 미국을 초대한 것도 약자로서 살아 남기 위한 현명한 외교술이었다. 강대국의 외교 논리에 휩쓸려가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판을 만들어 강대국을 자신의 판으로 초청하는 탁월한 외교술이다. 

  싱가포르의 라자라트남장관은 "태양이 여러개일 때야 말로 작은 행성들은 항해의 자유를 더 확보할 수 있다."(323쪽)고 말다.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ASEAN을 구성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마치 가얇픈 개미가 무리를 이루어 강하게 생존하는 모습을 떠올리게한다. 

  특히, 싱가포르는 작지만 강한 나라이다. 경제력만이 강한 나라가 아니다. 외교에서도 강소국 외교를 구사하고 있다. ASEAN을 주도하며, 필요하면 새로운 협력체를 만들고 이슈를 이끌어간다. 이슈를 만들지 못하고 미국과 일본에 끌려다니며 의탁하는 외교 행태를 보여주는 우리 현실과 너무도 대비된다. 

  싱가포르가 강소국 외교의 모범을 보여준다면, 인도네시아는 한나라의 외교가 어떠해야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독립적 행동 외교"(Bebas dan Aktif), 즉 외부 강대국의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국제 사회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인도네시아의 외교는 자주 독립 국가의 외교는 어떠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일본과 미국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외교를 펼치고 있는 사이, 문재인 정권시기 드높았던 외교적 위상은 추락했다. 우리는 더 이상 변수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며 경제적으로 추락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위기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동남아의 싱가포르와 인도네이사가 보여주는 외교력은 우리의 외교가 어떠한 길을 가야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지구상의 3분의 2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었지만, 타이는 독립을 지켰다. 타이의 피분이 친일노선을 걸었기에 패전국의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타이는 패전국의 대우를 받지 않았다. 쁘리디를 주축으로한 '자유타이(세리티아)'는 OSS를 통해서 군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전투없이 종전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제국주의 일본의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분단을 맞이했다. 부러움에 타이를 바라보았다. 라마4세와 라마5세의 개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유능한 국왕들 덕택에 지금도 왕실은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존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선입견이 진실일까? 자혜로운 국왕의 통치 밑에서 외세의 침략없이 타이인들은 행복하게 오늘날에 이르렀을까? 아니었다. 1976년 10월 탐마삿대학에 왕실 근위대와 경찰,군대, 우익청년들이 기관총을 난사하며 대학생들일 학살했다. 피흘리는 학생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의자로 내리치는 장면을 AP 통신 기자 닐 율레비치는 사진에 담았다. 자혜롭고 유능한 국왕의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었다. 민주 공화국을 바라는 학생들에게 국왕은 자혜롭지 않았다. 

  태국 정치사를 전공한 저자 현시내는 타이인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푸미폰 왕에 대해서 다른 평가를 내린다. 


  "결국 이는 30년에 가까운 군부 독재에 대항해 시민들이 피흘려 쟁취한 민주화운동의 승리를 가로체는 일이었다. 푸미폰 왕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나선 것이다."(287쪽)


  1973년 10월 대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군경은 탱크와 헬리콥터를 투입해서 해산하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77명 사망 800여명 부상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다. 그런데, 그날 푸미폰 왕이 "군부가 사퇴할 것이며, 새로운 총리를 임명해 의회를 재구성하겠다.'고 전격 선언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민주주의의 영웅이 되었고, 민주주의는 납치되었다. 이것이 타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한 근원적 이유였다.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그렇게 자란 자유는 때로는 납치당하기도한다. 타이처럼.....

  그런데, 어찌하여 푸미폰 왕을 타이인들은 존경하고 사랑하는가? 이는 푸미폰 왕의 어머니 상완의 이미지 메이킹 덕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어머니(매팔루앙)'라고 불리는 상완은 산간 벽지의 가난한 소수민족을 헬리콥터로 돌아다니며 보살핀다. 소수민족에게 상완은 하늘에거 내려온 어머니로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그녀의 아들 푸미폰 왕에게 이어져 자혜롭고 서민적인 국왕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부모를 사랑한다. 생존을 위해서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부모에게 버림받지 않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푸미폰 왕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국왕을 모독하면 최고 15년 동안 감옥에 갖혀 살아야하는 상황 속에서 국왕을 자혜로운 분으로 존경하며 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 마치 박정희 독재 정권 시기를 살면서 박정희를 자혜로운 어버이로 생각하는 우리의 7080세대처럼 말이다. 


  동남아는 고통을 통해서 생존의 방법을 찾았다. 강대국에 맹종하기 보다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고 강대국을 자신이 유리한 판으로 초청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식민의 아픔을 겪고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가 동남아에게 배워야할 교훈이다. 또한, 피의 댓가 없이 자유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며, 피로 키운 자유는 언제나 납치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지만은 않는다. 현명한 시민이 깨어있을 때만이 정의는 승리할 수 있다.




ps.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은 학자라는 사람들이 '대동아 전쟁'이라는 명칭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이책의 6쪽과 278쪽에는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는 일본이 백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해서 대동아시아 공영권을 만드는 전쟁이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만든 용어이다. 적어도 학자라면, 대한민국의 학자라면, 황국사관에 젖어있는 어용학자가 아니라면 '대동아 전쟁'이라는 용어는 사용해서는 안된다.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필자들에게 간곡히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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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600년사 - 1299~1922
이희철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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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중심의 역사를 넘어서 우리의 눈으로 세계사를 바라보아야한다는 과제를 무겁게 느끼고 있다. 이슬람 지역에 대한 한국의 역사연구가 일천하다보니, 서구의 시각이 담긴 역사책을 번역해서 출간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눈으로 이슬람 역사를 바라보지 못하고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이슬람의 역사를 바라보았다. 빈을 포위 공격하며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제국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눈에는 야만적인 제국이자 하렘의 궁중 암투라는 도색적인 이미제와 유럽의 병자로서 강대국의 이익에 의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로 오스만을 그렸다. 내가 읽었던 오스만에 대한 책들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한 책이 거의 없었다. 이희철이 쓴 '오스만 제국 600년사'는 나의 갈증을 해결해주었다. 


  이책은 6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 역사 속의 튀르크인, 2장 건국시기, 3장 세계 제국, 5장 격랑의 시대, 5장 변화와 외교의 시대, 6장 개혁과 근대화로 나누어 600년 오스만의 역사를 한국인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 짧은 전성기 후에 긴 쇠퇴기를 맞이했다는 면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를 연상케하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비교적 긴호흡에서 차분히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메흐메드 2세에 대한 평가였다. 국방티비에서 '토크멘터리 전쟁사'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전쟁사를 깊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임용한 박사님과 이세환기자님의 깊고 폭넓은 설명에 시간가는줄 몰랐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무라드 2세가 술탄직을 아들 메흐메드 2세에게 이양했다가 자신이 다시 술탄직에 오른 이유를 메흐메드 2세의 난폭성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600년사'에서는 무라드 2세가 아들에게 술탄직을 양위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럽이 다시 십자군을 조직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라 서술했다. 당시 정세로 보았을때, 저자 이희철의 설명이 더 합당해보인다. 

  그뿐이 아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는 메흐메드 2세의 폭압성을 강조하며 수박이 사라지자 이를 시종이 먹었을 것으로 예상한 메흐메드 2세는 시종의 배를 갈라서 확인해 보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이렇게 폭압적인 지도자가 어떻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두개 대륙과 대개의 바다를 지배하였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이희철의 설명을 달랐다. 이희철은 메흐메드 2세를 '정복자'라고 부르면서도 법령 작업으로 국가체제를 새롭게 정비했으며, 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한 위대한 군주로 서술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가 서구 중심의 시각에서 메흐메드 2세를 악마로 묘사했다면, 이희철은 서구의 안경을 벗어던지고 우리의 눈으로 메흐메드 2세를 서술했다. 

  

  오스만에 대한 나의 지식이 일천하기에 저자 이희철의 '오스만제국 600년사'가 얼마나 정확한지, 얼마나 유럽의 시각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쓰여졌는지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천한 나의 지식으로 보아도 이희철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애정과 지적 탐구욕은 바다처럼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계사를 가르치면서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전후 맥락을 이해하며 쉽고 재미있게 가르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한 책이 우리 주변에는 없었다. 이희철의 책이 그러한 갈증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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