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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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터키, 터키인들의 역사 '오스만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때 마침 '오스만 제국사'라는 책이 눈에 띄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과 전쟁터를 누비는 예니체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서문에서부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가났다. 저자의 의도는 오스만 제국 입문서로 이책을 저술했다. 장대한 스케일의 오스만 제국사를 알고 싶었던 나로서의 적잔히 실망했다. 그러나, 단행권으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서가 거의 유일하기에 이 책을 계속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기대와는 다른 오스만 제국 입문서이지만,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는 재미는 쏠쏠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예니체리가 생각난다.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라고 불리는 어린이 공납제도에 의해서 충원되었다. 기독교 지역에서 어린이를 충당하여 교육시키고 관료와 예니체리로 선발하였다. 그런데,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만 본다면 데브시르메가 오스만 제국 시기 내내 잘 운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그런 착각을 갖게한다. 그러나, 제국의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데브시르메 제도는 사라지게 된다. 세습의 방식으로 예니체리는 충원되었다. 수박 겉핥기식 역사교육으로 빚어진 오해를 이책이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도 새롭게 알게되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3악장 KV331 '터키행진곡'을 들으면서도 왜?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유럽에서 이러한 음악이 작곡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하면 콘스탄티노 폴리스 공방전에서 사용된 청동대포를 기억하는 나는 오스만의 음악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오스만 제국은 군사력으로만으로 유럽을 위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만의 음악은 유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적대 여성 리더가 공중에 던지는 지휘봉을 비롯하여, 러시아와 영국 합스브르크의 군악대도 오스만의 영향을 받았다. 오스만제국은 '유럽의 병자'가 아니라, 문화 대국이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화려했던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 '압제자'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널드 쿼터트는 이를 민족주의 논리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흔히 민족이 만들어지고 국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국가가 먼저 만들어지고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규정한다. 1차 세계 대전 후, 서아시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한다. 그후, 분리 독립한 국가들은 국가 정체성 확보가 당면과제였다. 그들은 튀르크인의 악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강조했으며, 아르메니아 학살을 강조했다. 청년 튀르크당이 튀르크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일어났다. 홉스봄의 '만들어진 역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 도널드 쿼터트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사'를 서술했다. 보통의 서양 학자들이 서구의 시작에서 제국주의적 편견에 휩싸여 제3세계 국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널드 쿼터트는 그러하지 않았다. 한예로 1915~1916년에 벌어진 아르메니아 학살을 서술하면서 그리스인이 저지른 1821년 오스만 무슬림 학살, 1876년 불가리아 기독교인들이 1000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사례를 지적했다. 학살은 비인간적인 행동이지만, 이것이 오스만 제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즉, 무슬림인 오스만은 악마, 기독교인은 피해자라는 도식에서 벗어난 서술이 돋보인다.

  60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존속했으며,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었고, 커피와 음악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를 유럽에 전해준 오스만 제국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부정적이라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보다 많은 책이 번역되거나 쓰여진다면 오스만 제국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것이다. 그날을 그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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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 -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 본 이란 현대사
유달승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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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대항한 국가는 비극을 면치 못한다. 세계 초강대국 앞에서 무력하기만한 약소국들을 바라보며 냉혹한 국제질서의 무자비함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미국에 대항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가 '악의 축(Axis of evil)'의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이중 이라크는 미국의 공격으로 친미 국가가 세워졌다. 북한은 미국과 종전 선언을하고 평화협정을 맺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이란은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도 자존심하나를 내세우며 미국과 날선 대립을 하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에도 이란의 역사는 너무도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시험에도 잘 출제되지 않는다. 세계사 교과서만으로는 이란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또한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다. 이란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어졌다. 현대 이란을 만든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 현대사를 살펴보는 '이슬람 혁명의 아머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그래서 나의 관심을 끌었다. 호메이니를 통해서 이란의 역사를 살펴보자.


1.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서울과 테해란은 자매도시이다. 이란에는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고, 수도 서울에는 '테해란'로가 있다. 멀고 먼 나라 나라로 기억하고 있지만, 사실은 너무도 가까웠던 나라가 이란과 한국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에 테해란로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디나-아케메네스 페르시아-파르티아-사산왕조 페르시아사파비왕조는 이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란인의 조상이 세운 왕조이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아시아를 식민지로 삼을 때, 이란을 통치하고 있었던 카자르왕조는 너무도 부패했고 무능했다. 1891년 담배 이권을 영국에 넘긴 것에 분노한 이란인들은 담배 불매운동을 전개한다. 담배 불매 운동이 성공하는데 성직자의 역할이 컸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바탕이 이미 이때부터 마련되고 있었다. 

  1921년 레자 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1925년 팔레비왕조를 창건한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근대화의 방식은 너무도 폭력적이었고 급진적이었다.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근대교육제도를 실시했고, 여성의 베일 착용을 금지시켰다. 이는 종교인들의 반발을 가져왔다. 이어 모사데크 수상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석유국유화 조치를 이행한다. 결국 파레비왕조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진다. 이때 미국이 팔레비왕조를 도와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어 일명 '백색혁명'으로 불리는 친미 노선을 견지하자, 자주의식이 강한 이란인들의 강한 저항을 얻게된다. 미군의 치외 법권과 미군주둔, 서구화정책은 수많은 시위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팔레비 왕조는 유혈진압을 했다. 인권 외교를 펼쳤던 카터 행정부는 인권탄압을 하고 있는 팔레비왕조를 열열히 지지했다. 이란은 '중동의 헌병'이라 불리며 충실한 친미국가로 거듭났다. 

  서아시아에 이란이 있다면, 동아시아에는 한국이 있지않은가! 모함마드 레자 샤가 폭력을 사용하여 반정부 시위를 짓밟았다면, 박정희 정권도 자신의 반대파를 잔인한 고문으로 짓밟았다. 이 두 정권이 친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 '테해란로'가 생긴것도, 테해란에 '서울로'와 '서울 공원'이 있는 것도 이러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었다. 

  이란과 한국과의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팔레비왕조의 폭압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시위가 계속된다. 민중시위의 핵인 호메이니를 터키로, 이라크로 보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에 있는 동안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정치 이론을 완성했다. 호메이니의 사상은 이란으로 흘러들어왔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그를 멀리 프랑스로 보냈다. 호메이니의 영향력은 파리에서 세계 언론을 통해서 더욱 커졌다. 결국, 무함마드 레자 샤는 망명길에 올랐고 이란 혁명은 성공하였다. 이란은 호메이니가 제시한 이슬람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났다. 

  팔레비왕조가 친미정권이었기에 호메이니는 미국을 좋아할리 없다. 1979년 11월 4일에 발생한 미대사관 인질 사태는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이란은 반미노선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1989년 하메이니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으며, '조선-이란 친선주간'이 설정되기도 했다. 이란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과 남한이 친선관계를 맺었다면, 이란에 반미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과 이란의 관계가 좋아졌다. 

  요동치는 국제 정세에 따라서 이란과 대한민국과의 관계는 좋아지기도 했고 나빠지기도 했다. 남한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정권이 들어섰지만, 이란은 아직까지 호메이니를 이맘으로 여기는 이슬람 공화국이 미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란은 얼마전 우리의 배를 환경오염을 시켰다는 이유로 나포했다. 이란의 속마음은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원화자금을 사용하지 못한것에 대한 항의적 성격이 농후하다. 과연 이란과 한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2.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는 나쁘기만할까?

  호메이니는 미국을 너무도 싫어한다. 자신을 핍박했던 팔래비왕조를 지지했고, 이란을 떠난 무함마드 레자 샤의 입국을 미국이 허락하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을 찔렀고, 젊은이들은 분노하여 이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령하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런데,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가 가장 좋았을 시기는 친미정권 팔레비왕조시기였다. `1978년 이드 알 피트르의 시위에서 잘레 광장의 출굴르 막고 탱크와 헬기 사격으로 2000명을 사망시킨 무자비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함마드 레자 샤의 어리석은 광기가 빛을 발한 이 사건을 인권 외교를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는 비난했을까? 카터 대통령의 인권외교에 기대를 걸었다면, 우리는 너무도 순진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다. 미국을 방문한 레자 샤의 환영회 만찬 자리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이란을 "국민들이 샤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정의 섬"이라고 불렀다. 자국의 이익에 인권은 없었다. 오직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서 '이란 콘트라 사건'이 발생했다. NSC에서 이라크를 상태로 전쟁하던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 일부를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에 제공했다. 이란과 미국의 중간 무역을 이스라엘이 담당했다. 이란과 미국, 이란과 이스라엘은 견원지간이다. 철천지 원수들 사이에 이러한 밀거래가 행해졌다. 

  이란 콘트라 사건이 벌어지던 시기 이란은 이라크를 상대로 전재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의 적국인 이라크를 지지했다. 미국은 팔래비왕조가 이란을 지배했을 시기에는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로 규정했다. 그러나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후,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를 반대했다. 이어서 이라크를 테러지원국가에서 삭제했으며, 미국의 무기를 이라크에 보내주었다. 

  자신의 적의 적을 친구로 삼는 것은 냉혹한 국제 사회의 현실이다. 그런데, 자신이 지원하고 있는 이라크의 적국에게 다시 무기를 판매하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이라크와 이란이 전쟁을 하는 사이에 양쪽에 무기를 팔아서 미국이 엄청난 이익을 얻는 모습은 세계 대전 시기 미국이 연합군과 추축국에게 했었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미국의 선택적 정의에 실망하고,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오직 영원한 실리만이 있을 뿐이다.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라는 책은 이란 현대사와 냉혹한 국제질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호메이니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팔레비왕조의 폭압정치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정치 형태를 탄생시킨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그를 평가해야할까? 아니면, 카자르왕조와 팔래비 왕조에서 부족하지만 진행되었던 근대화를 '문화혁명'을 통해서 무효로 만들고, 아직도 차도르와 터번을 두루고 다니는 중세시기로 시간을 되돌린 인물로 평가해야할까? 

  나는 호메이니를 나쁘게만 평가할 수 없다. 이책의 들어가는 글에 저자 유달승은 이란사회의 모습에 깜짝 놀란다. 도서관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저자에게 몸이 불편하면 사원에 가서 자라고 친구가 제안한다. 사원에 가서 잠을자라? 신성한 사원에서 잠을 자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다. "사원은 힘들때 쉬는 곳"이기에 사원에서 낮잠을 자기도하고 아이들이 놀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과장에게 청소원이 당당히 자신의 보조를 채용해 달라고 요구하고 이를 관철한다. 학과장도 청소원에게 예의를 표하고 정당한 요구를 받아준다. 신 아래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좀더 시간을 두고 내려야겠다. 호메이니가 제시하고 성립시킨 '이슬람 공화국' 이란의 실험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가에 따라서 호메이니는 탁월한 성직자이자 정치가, 혁명가로 평가될 수도 있으며, 헛된 실험으로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호메이니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이란인들이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부디, 호메이니가 탁월한 정치가이나 성직자미염 혁명가로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ps.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사산'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사산'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였던 '사산'을 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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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2-13 0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는 호메이니가 무슨 악마처럼 묘사되지만 이란인들의 입장에서는 분명 영웅적인 인물이겠죠? 하지만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또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종교적 지배의 과거로 회귀시킨 인물이기도 하고 참.... 선악의 개념으로 인물이나 역사를 볼 수 없다는게 항상 조심스럽습니다. 강나루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강나루 2021-02-13 07:18   좋아요 0 | URL
한인물을 무자르듯이 말할 수 없네요 바람돌이님 말처럼 선악의 개념으로 호메이니를 평가하기 힘드네요
 
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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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연기'라는 말이 있다. 이말을 쉬운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인연이라는 그물로 연결되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태균 교수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역사라는 그물에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포획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전쟁,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하기에는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는 기록하는 민족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1.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나비의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는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사실들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의 비극인 6.25전쟁의 날개짓은 바다건너 베트남에 커다란 폭풍을 일으켰다. 

  6.25전쟁의 전쟁 전개 양상은 베트남 전쟁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흔히,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전선을 형성하여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을 것으로 상상한다. 6.25전쟁에 대한 교육을 받은 우리로서는 '전쟁'이란 당연히 전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는 전선이 없다.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뤄야하는 기이한 전쟁이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이 전선이 없는 기이한 양상을 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6.25전쟁의 날개짓 때문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자, 중국군이 참전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후 전개되는 지루한 공방전의 아픈 기억을 미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군도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북위 17도선을 돌파하면 중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것을 미국은 두려워했다. 중국도 미군이 북위 17도선을 돌파하지 않기를 바랫을 것이다. 결국, 북위 17도선을 유지한채,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전투개 전개되었다. 밀림 속에서, 구찌터널에서 출몰하는 베트공은 미군을 괴롭혔다. 

  뗏대공세와 펜타곤 페이퍼가 공개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민낯이 보여지자, 반전운동이 들불처럼 일이났다.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전쟁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의 곳간은 비어있었다. 결국 닉슨은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안한다. 이는 6.25전쟁에서도 보았던 모습이다. 남북의 전쟁에 중국군과 소련군,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개입하면서 6.25는 국제전쟁화하였다. 휴전협상에 남북한이 마주앉지 않고, 북한군과 중국군 VS 미군이 마주앉았다. 강대국들의 휴전협상이 이뤄지면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무수한 소모전 속에서 알토랑 같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무수한 화력을 쏟아부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얇팍한 생각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계속되었다. 6.25전쟁의 휴전협상 시기에 쏟아진 화력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판단한 미국이 선택한 협상전략이었다. 이시기 우리의 한국군의 젊은이들도 많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6.25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화'라는 6.25전쟁의 교훈을 배우기 보다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얕은 방법만을 그들은 배우려했다. 진정한 교훈을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댓가는 이길 수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했을 때, 특히 미국에서는 전쟁범죄자 취급을 받도록했다. 전쟁에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평화'라는 가치란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2. 전쟁에서 배워야할 것.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 어느 여군의 회고담이 있다. 끔찍한 전쟁이 끝나자, 그 여군은 이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며 살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녀에게 장난감 무기를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미워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 나오는 소련 여군의 느꼈던 아이러니를 역사에서 흔하게 목격한다. 끔찍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과연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할까? 

  6.25 전쟁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듯이, 베트남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서 민간인 학생이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정권의 대통령이 베트남에 사과를 했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승리한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미국의 용병으로 온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저자 박태균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 미군에 노근리 학살의 사과를 요구하면, 그들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며 반박한다. 한국도 그러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니, 우리에게 반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나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일본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듯이, 미국에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듯이,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용기있게 사과해야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해야 우리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고통과 직면해야만 우리는 과거의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다. 

  저자 박태균이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의 교훈은 무엇일까? 박태균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한다. 그것이 곧 암보다."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지지한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진 역사를 우리는 무수히도 보았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앞도적인 화력의 우위속에서도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쫓겨 났다. 한국과 태국, 필리핀까지 끌어들이면서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쏟아부어서 남베트남정부를 지원했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했다. 미군없는 남베트남정부는 너무도 허무하게 북베트남에 무너졌다. 국민이 지키고 싶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강한 세력이 유지시키고 싶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저자 박태균은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베트남 전쟁에 알토랑같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은 박정희 정권도 결국 남베트남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몇년후에 붕괴된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하는데 누가 날 죽이겠나!"라던 그도 김재규의 총탄에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자들은 역사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배운다. 진정으로 현명한 자라면 역사에서 참된 교훈을 얻어야한다. 위정자들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참된 교훈이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반성과 사과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한 용기가 모여 이 사회를 움직인다면,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신대학교에서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을 때, 박태균 교수를 처음 만났다. 젊고 실력있는 교수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역시나, 그의 책 '베트남 전쟁'은 쉬우면서도 수많은 생각할 꺼리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하수는 쉬운말을 어렵게 설명하고, 고수는 어려운말을 쉽게 표현한다는 말이있다. 학문적 내공이 상당한 박태균 교수는 어렵고 복잡한 베트남 전쟁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과 어떠한 관계를 모색해야할지를 고민하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ps. 한홍구 교수의 책 '유신'에는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위안부를 보내려했으나, 다행히도 보내지 않았다고 씌여있다. 과연 베트남에 한국군이 관리하는 위안소가 있었는지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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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아시아
아시아네트워크 엮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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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시아인인가? 라는 질문에 '나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라고 당당히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될까?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동아시아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서아시아에서 부터 시작하여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로 묶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과연 타당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질 정도로 아시아라는 개념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화가 어우러진 광대한 지역이다. 그리고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도 타지역의 아시아인에 대해서 무지하다.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아시아네트워크)'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1. 그것은 거짓말일까?

 '우리가 몰랐던 아시아'라는 얇은 책을 읽는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책이 어려워서라기 보다는 한장 한장을 넘길 때마다 기존 나의 지식을 무참히 짓밟는 주장들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그 첫번째는 '간디는 성자인가?'라는 질문이다. '간디 자서전'을 읽은 나로서는 간디는 당연히 성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지옥에 내려간 사람이 "발가벗은 마하트마 간디와 마릴린 먼로가 정을 통하고 있"는 장면이 펼쳐진다.

 

  "와, 마하트마는 행운이야. 좋은 일 한 걸 되돌려받는 모양인데, 바로 저거야. 내가 원하는 벌도...."  그러자 천사가 귀띔했다. "저건 간디가 벌받는 게 아니라 마릴린 먼로가 벌받는 거야."-16쪽

 

 '유명한 인도 우스개'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 농담을 읽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위대한 성자 간디를 간디인들이 이러한 농담소재로 삼을 수 있는가? 간디를 비판하는 자들은 무슨 근거로 간디를 비판할까?

  간디를 비판하는 자들의 근거는 무엇인가? 간디에게 열악한 노동현실을 개혁할 조언을 구하러온 노동자에게 간디는 협력과 조정을 권한다. 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적극적 투쟁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간디의 조언을 따른 노동자들의 생활은 더욱 열악해졌고, 간디를 따르지 않은 노동자들의 생활은 개선되었다. 노동문제 뿐만 아니다. 간디는 매혹적인 젊은 아가씨를 옆에 재우면서 어떻게 자제했는지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일로 '금욕주의'를 설파했다. 그런데, 그 실험 대상이 된 여성의 인권은 짓밟은 꼴이 되었다. 간디는 종교의 벽도 넘지 못했다.자신의 아들이 이슬람 여성과 결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간디의 투쟁 방식이 비폭력적이었다. 이것은 영국 자본가의 눈에 과격한 노동투쟁을 하는 자들에 비해서 간디가 성자로 보일 수도 있다. 특정 인물을 영웅시하다보니, 그 인물의 어두운 이면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완벽한 사람은 존재할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간디가 비록 흠결이 있지만, 그의 전체적인 삶을 살펴볼때 그는 경멸의 대상이 될 정도의 인물은 아니다. 진보진영에서 과도하게 도덕성을 강조하여 탁월한 진보의 리더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간디는 완벽한 성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못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도 인간이니까?

 두번째 '인권 투사 코라손'은 과연 인권투사였는가?라는 질문이다. 1986년과 2001년 피플파워의 주인공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을 우리는 필리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과연 인권투사였는가라는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만 할까? 그녀가 집권하고 나서 인권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성과가 미미했다. 군부세력의 쿠데타 위협속에서 군부세력과 타협하며 적극적인 성과를 이뤄내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힌 결과일 뿐이지, 이를 두고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987년 '멘디올라 학살' 사건은 그녀를 더 이상 변호할 수 없었다. 토지개혁을 외치던 농부가 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만보기만 했던 대통령'을 변호할 수는 없다. 더욱이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이라 자평하는 포괄적 토지개혁법이 무력화 되기도 했다. 자신의 일가친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지주들이 빠져나갈 구멍들을 눈감아 주었던 것이다.

  "피플 파워"를 통해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혁의 동력으로 삼지 못한 무능한 아키노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할까? 지금의 문재인 정권도 '촛불 혁명'을 통해서 집권했다. '촛불 혁명'의 힘을 이용해서 적폐세력을 몰아내는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문재인 정권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도록 '촛불 혁명'을 주도했던 국민들은 힘이 되어주기도 해야겠지만,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매서운 비판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실패를 우리의 반면 교사로 삼아야한다.
 세번째. ''킬링 필드'의 전설을 끊는다.'이다.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주에 의해서 캄보디아에서 300만명이 학살당한 사건이라 기억한다. "'킬링필드'의 전설"이라는 제목 자체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킬링필드'는 거짓이라는 말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킬링필드는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 킬링필드는 1969년 부터 1973년까지로 베트남전쟁 시기에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하면서 40만~80만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다. 2차 킬링필드는 1975년 부터 1979년까지로, 크메르루즈를 이끄는 폴 포트에 의해서 처형 10만~30만명에다가 기아와 질병, 중노동으로 사망한 이들을 합쳐 최대 약 80만~100만명이 사망했다. 1차와 2차를 합쳐 10년 동안 약 150만~160만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킬링필드는 크메르루즈에 의해서 이뤄진 학살만을 떠올린다. 강대국 미국에 의해서 이뤄진 죽음은 애써 외면한다. 국제사회가 학살자 처벌을 주장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만 호출하여 재판하려한다. 강자의 학살에는 눈감고, 약자의 학살에는 단호한 것이 정의란 말인가? 강자든 약자든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면 모두 재판대에 올라야하지 않는가?

 이책을 읽으며 가장 읽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부분이다. 나의 고정관념을 수정해야했고, 알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는 진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시아'에 대해서 나는 너무도 무지했다.

 

2. 혁명의 시련과 고통의 아시아.

  우리에게 5월은 민주화의 시기이자, 고통의 시기이다. 5.18 민주화 운동부터 시작하여, 5.16 군사쿠데타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5월에 일어났다. 5월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말이 빈말은 아니었다. 태국에도 5월 혁명이 있었으며, 필리핀에도 5월 항쟁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5월도 뜨거웠다. 그러나 이들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었을 뿐, 구질서를 말끔히 제거하지 못했다. 마치 5.18민주화 운동 이후에 신군부세력의 폭압정치가 이어졌듯이 그들도 계속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지눌 스님이 '돈오점수'를 말하지 않았던가! 돈오! 깨달았다면, 점수! 수행해야한다. 한번의 혁명으로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 '시민의 힘이 조직되지 않는다면 혁명은 납치 당한다.'라는 유발하라리의 말처럼, 시민은 조직되어 계속 혁명을 이어가야한다.

  이들 나라들이 혁명의 첫발을 이뤘다면, 동티모르 대통령 사나나 구스마오는 혁명의 첫발을 떼기 시작했다. 구스마오는 포르투갈로부터 독립의 기쁨도 잠시, 인도네시아와의 독립투쟁을 해야만했다. 많은 동지와 동포들이 죽어갔고, 그도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감옥에 갖혀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만했다. 국제사회의 관심으로 독립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인도네시아에 매수당한 반독립파들이 동족을 죽이는 현실을 보며 울분을 토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한다.

 

  "그들이 되돌아와서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우리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 게릴라 동지들이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빌 것임을 분명히 약속했다."-251쪽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없다. 진실은 승리한다." 촛불 집회 때 불렸던 노래 가사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진실이 승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직시하면 많은 슬픔이 밀려온다. 인도네시아에 빌붙어 동족을 죽였던 반독립파를 끌어 안아야만 하는 구스마오 동티모르 대통령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할까? 진실이 힘을 갖지 못한다면,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구스마오가 독립과 혁명의 기쁨을 누렸다면, 그 기쁨을 위해서 달려가는 두 사나이가 있다. 한명은 민주화를 위해서 밀림으로 간 의사 나잉옹이다. 다른 한사람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지도자 야신이다. 버마에서 안락한 의사생활을 할 수도 있었던 나잉옹은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서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되었다. 승리가 보이지 않는 투쟁을 이어가며 전우의 죽음에 슬퍼하는 인간 나잉옹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국경지대의 소수민족과 유대를 지켜가며 자신들의 진로를 모색하는 모습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독립투사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나잉옹은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타국의 민주화를 지원해줄 정도의 성숙된 모습을 가지는 못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아흐메드 야신! 그는 나잉옹 처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야했다. 게다가 달리기를 하다 쓰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나약한 몸의 소유자가 강력한 무장단체 하마스의 지도자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1948년 "대학살"을 겪고,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인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지 고민한다. 술과 마약, 섹스로 펠레스타인 젊은 이들을 유혹하여 정보를 빼내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책을 쓰고, 무장단체 하마스를 조직한다.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에 잡혀 자신의 눈 앞에서 아들이 고문당하고, 자신의 육체가 부서져도 그는 이스라엘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도 망가졌다. 그러면서 한국의 독자에게 말한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시절을 돌아보자. 한국 시민들은 자신들의 순결한 독립투쟁의 역사를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들의 난동으로 불러왔던가?"-264쪽

 

  아흐메드 야신의 이말에 나는 숨이 멈졌다. 자신의 삶의 터젼을 잃어버린 이들의 절규가 느껴졌다. 야신은 "과연 누가 테러리스트고 누가 희생자였던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답해야한다. 누가 테러리스트인지! 강자의 폭력인 전쟁, 약자의 폭력인 테러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악한가?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인간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인권을 유린한다면 그 세력이 나쁜 것이 아닐까? 나치의 박해를 경험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면 분쟁의 역사는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너무 큰 희망사항일까?

  아시아는 아파하고 있다. 한번의 혁명으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계속 혁명을 위해서, 혹은 독립과 혁명을 위해서 부단히 몸부림치고 있다. 아파서 울고 있는 아시아에 너무도 무지했던 우리는 이제 관심을 갖아야하지 않을까?

 

3. 아시아의 여성과 성

미투운동이 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억눌렸던 여성들이 이제 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아시아의 여성들은 이제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당당히 밖으로 나온 것일까?

  여성의 지위를 말할때 그 사회의 대통령 혹은 수상이 여성출신이 있는가?를 물어본다. 이 질문에 아시아는 당당히 있다고 말한다. 여성을 억압한다고 평가 받아온 이슬람 사회에서도 여성 대통령과 총리가 선출되었으며, 스리랑카와 필리핀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활약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여성의 인권은 높지 않다. 왜? 일까? 문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가보다 여성이 어떠한 정치를 하는가에 있다. 치마를 입은 남성이 정치를 한다면 현실정치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성다운 정치를 하지는 못했다. 스리랑카의 쿠마라퉁가는 남편이 암살된 후, 가정주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대통령이 된 그녀는 타밀 호랑이와 전쟁을 확대한다. 경제는 피폐해지고 결국, 그녀도 몰락한다.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여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못했으며, 남성의 마초적인 정책을 흉내내려했다. 이는 스리랑카에서만 보여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다른 나라의 여성정치인에게서 나타난다. 자신의 능력으로 최고 지위에 올라가지 않고, 가문이나 혈통의 후광에 기대어 최고 위치에 올라가다 보니, 남성 정치를 흉내낼 수밖에 없다. 그녀들은 아시아의 여성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서 "하이힐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이스라엘군을 향해서 돌을 던지는"여성이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이다. 독립만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말에 안주가히 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용감히 현실에 뛰어드는 모습에서 희망을 본다.  "2천개의 율법"으로 여성을 옥죄고 있는 레바논의 경우를 보면서, 여성의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쟁취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는다. 레바논 여성들은 최소한 교육에서는 외형상 성평등을 이뤘으니 말이다.

  "오럴 섹스"를 하면 종신형에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믿겠는가? 그것도 강소국 싱가포르에서 말이다. 아시아에서 '성'은 억압의 대상이다. 태국의 경우, 성산업을 황색 저널리즘으로 이용할 뿐, 성노동자의 인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성애 교범인 카마수트라를 남긴 인도 역시 성을 금기시한다. 서구에 비해서 아시아는 성에 대해서 억압적이고 수줍어한다. 물론, 성진국 일본은 예외이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다. 섹스를 장려할 필요도 없지만, 지나치게 억압할 필요도 없다. 건전한 성문화는 사회를 밝게 만들테니 말이다.

 

 

4. 민족주의는 악마인가?

 민족주의를 악마화 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민족주의를 말하면, 히틀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기도 하지만, 1민족 1국가의 역사가 깊지 않은 서구와 남아시아 사람들에게 민족은 만들어진 상상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민족을 순수 혈통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바라보면,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민족주의는 악마일까?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거짓말을 진실로 믿기 때문이라 말한다. '종교'와 '민족'이 사피엔스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민족을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규정한다면, 민족주의에 쏟아지는 비난은 달라질 것이다. 또한 아직 민족을 만들지 못한 국가의 민족 만들기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마치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상대하기 위해서 민족을 호출했듯이 말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독립투쟁을 '민족주의'를 만드는 핵심 신화로 이용했다. 그러나 수하르토가 집권하면서 1965년 9월 공산주의자 박멸을 '민족주의'를 만드는 신화로 이용했다. G35S가 인도네시아의 주요장군을 살해한 사건을 수하르토가 격퇴하면서 그는 민족의 영웅이 되어 독재정치를 한다. 기존의 인도네시아 교과서에서도 수하르토는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주요 장군들이 신체 중요부위가 잘라진체 죽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주요 장군들은 공산주의자에게 신체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없으며, 신체 중요부위가 절단되지도 않았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인도네시아 현대사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한다.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설 때만이 인도네시아는 보다 성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민족만들기가 이뤄져야할 것이다.

  민족을 만드는데, 민족의 문화유산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문화재를 돌볼 경제적 여유가 없고, 약소국이라는 이유로 문화재를 강탈당하고 있는 것이 아시아의 현실이다. 캄보디아는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은 도굴과 약탈, 파괴를 겪어야했다. 그리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이스라엘의 입맛에 맛는 유물만 살아남고 있다고 이책에서는 말한다. 약자의 힘은 단결에 있다고 한다. 약소국들이 많은 아시아가 하나로 단결하여 문화재 도굴, 약탈, 파괴 문제를 다룰 때만이 해결의 실마를 얻을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시아의 민족만들기는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잘못된 신화와 싸워야하며, 강대국의 약탈과 파괴에 맞서야한다. 아시아의 연대는 요원한 걸까?

 

 

 6.25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는가? 내전? 강대국의 대리전? 등등 수많은 평가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6.25가 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본에게는 성장의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며, 인도는 비동맹의 리더로서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필리핀은 파병을 강요당했으며, 타이의 경우 군부가 부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많은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6.25는 아시아에서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말이다..... 나는 질문한다. 혹시, 당신에게서 아시아도 6.25와 같은 잊혀진 존재는 아닌가? 힘있는 강대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 갖으면서, 우리의 이웃인 아시아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심이 없다. 아시아는 제2의 6.25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시아는 바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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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읽다, 베트남 세계를 읽다
벤 엔겔바흐 지음, 김아림 옮김 / 가지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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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과 끈기의 민족"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나라는 베트남이다. 중국에 천년의 지배를 받고도 민족성을 잃지 않았으며, 몽골의 3차에 걸친 침입을 물리쳤다. 프랑스와 미국과의 3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의 상처가 치유되기 전에 캄보디아와 중국과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잠들어있던 베트남이 '도이모이'정책을 펼치며 기지개를 펼치고 있다. 이번 겨울 가족여행을 베트남으로 정했을 때, 그 베트남의 힘을 직접 보고 싶어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여 이렇게 말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잘보고 잘 느끼기 위해서 '세계를 읽다. 베트남'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벤 엔겔바흐'이다. 미국인 영어강사가 베트남에 대한 여행안내서를 썼다. 베트남 전쟁 당사국으로서 편견이 개입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그는 너무 낭만적인 베트남에 대한 묘사를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베트남의 부정적인 면만을 그리지도 않았다. 베트남의 현실을 서술했다. 택시기사와 노상시장에서 바가지를 쓴일도 서술하면서도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주는 마음씨 착한 베트남인의 일화를 서술하기도 했다. 가감 없이 베트남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 이책의 매력이다.

  미국인이 쓴 책이라서 미국인의 눈에 비친 베트남의 모습이 너무 이해가지 않는다는 내용이 많다. 그중에서 "체면"과 "많은 권력을 가진 노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것은 중국인이나 한국인도 마찬가지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는 노인이 많은 권력을 가졌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이것은 '노인에 대한 공경'으로 표현해야할 것이다. 노인 공경이 '권력을 가진  노인'으로 해설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을 통해서 새롭게 알았다. 물론, 노인으로서 품의를 지키지 못하고 박근혜 지지 집회에 나가는 분들을 보면서 모든 노인에 대한 공경은 힘들다는 생각을 해왔다. 아뭏튼, 노인을 공경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를 이해못하는 외국인의 시선이 낯설다. 미국인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베트남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은 미국인이 가진 프리즘을 살필수 있는 기회이기도하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인의 시선에 '체면'과 노인공경은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책에는 베트남에 대한 여행정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이 어떻게 관광비자로 타국에 와서 직장을 얻으며 생활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이 책에 그 비법이 서술되어 있다. 저자 자신도 중국과 한국을 거쳐서 베트남에 정착하며 주변국을 여행한다. 10여개국을 여행하며 현실을 즐기는 욜로족의 모습을 보며, 초강대국 미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났다는 특권을 무기삼아 세계 여러나를 여행하고 현재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부럽다. 단지 영어를 할 줄알며, 백인이라는 특권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며 인권을 침해당하는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위화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아차, 동남아시아 노동자에게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우리가 엄청난 특권을 가진 존재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해외여행을 하면 그 나라에 대한 책을 몇권읽고 가려 한다. 너무 학술적인 책과 너무 단편적인 정보만 담은 책 사이에서 인문학적 지식과 여행정보를 함께한 얇지만 깊은 책을 찾고 있었다. 간편히 하루면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베트남의 민낯을 볼 수 있는 책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이 책에 필수 베트남어가 몇개 소개되어 있다. 씬 짜오(안녕하세요), 땀 비엣(잘가요). 깜언(감사합니다.) 이 세단어는 베트남 현지에서 사용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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