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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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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도올 김용옥은 그 무게를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도마복음'을 만나면서 그 무게를 벗어 던졌다. 자신을 무겁게 억누르는 한국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참다운 예수의 모습이 아니란 사실을 '도마복음'을 통해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치열한 사상탐구의 모습에서 나의 고통을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가난한 집안의 나는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야했다. 그리고 친구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이러한 나는 그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좋은 아이였다. 때로는 구타를 당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2학년 담임 선생은 이러한 나를 부던히 싫어했다. 학교에서 실시한 IQ 검사에서 우수한 지능지수가 나오자, 그는 나를 2시간 동안 두둘겨 패면서 컨닝을 했다고 자백하라며 다그쳤다. 두시간 동안 맞으면서도 나는 보지 않았다고 했다. 그당시 내 주변에 있었던 학생들은 나보다 IQ가 낮게 나온 학생들 뿐이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찾으면서, 자신보다 약하고, 가난한 나를 무참히도 짖밟았던 이들이 '크리스찬들'이었다. '낮은 곳으로 임하라'라는 성경의 말은 그들 세계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위선적인 기독교를 보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그때, 도올 김용옥을 만났다. 그는 당당히 한국 기독교의 위선적인 모습에 강한 일갈을 가하며 나의 가슴에 감동의 물줄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도마복음'을 만났다. 적을 때려 눞히려면, 적의 논리를 알아야한다.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왜곡하는 예수를 바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어린시절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치유받고 싶었다. 그래서 곧바로 '도마복음2'를 읽어 내려갔다.

  하루에 한문장, 때로는 한주에 한문장, 때로는 한달에 한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연습장에 영어 원문을 적으며, 모르는 단어는 찾아가며 읽었다. 때로는 새로운 환희에 무릎을 쳤고, 때로는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는 한국의 '크리스찬들'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제 참다운 예수를 만나보자.

 

 

1. 믿으면 진실을 볼 것이다! 라는 크리스찬들의 거짓말

 And he said, "Whoever discovers the interpretation of these sayings will not taste death."(그리고 그가 말하였다. "이 말씀들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초등학교 시절, 산골짜기 까지 선교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집에 허락받지도 않고 들어와 포교를 했다. 나의 이성적 질문에 그들은 "믿으면 진실을 볼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신이 있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그대로 묵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도 그들은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말만을 할뿐이다. 이 질문은 '크리스찬인 당신들이 실은 나를 왕따시키고, 나를 구타하고 있소. 만약 신이 있다면, 불쌍한 나를 왜? 구원하지 않소?'라는 질문이었다. 맹목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이비신자들과 다를바가 없었다. 현실의 문제에 뿌리두지 못하고, 공허한 말들만을 늘어 놓는 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나, '도마복음'은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해석하라'(interpretation) 도마는 말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며, 자신이 직접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예수의 쌍둥이 '도마'다운 말이다. 그렇다. 한국 기독교는 깨달아야한다. 끊임 없이 재해석 되고, 끊임 없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해야하거늘 그들은 거대한 예수의 그늘을 무기삼아 질문하지 못하고, 스스로 해석하지 못하게 강요한다. 참다운 예수와 만나는 첫 관문은 끊임 없이 해석하고 질문하는 것이었다. 도마는 우리에게 외치고 있었다. 스스로 해석하라!! 그러면 진리를 만나게 되고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2. 천국은 하늘에 있지 않다! 크리스찬들의 두번째 거짓말!!

  Jesus said, "If those who lead you say to you, 'Look, the kingdom is In heaven,' then the birds of heaven will precede you. If they say to you, 'It is in the sea,' then the fish will precede you. Rather, the kingdom is inside you and it is outside you'(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를 이끈다 하는 자들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보라! 나라가 하늘에 있도다'한다면, 하늘의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그들이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라는 바다 속에 있도다'한다면, 물고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나라에 이를 것이다. 진실로,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너희 밖에 있다.)

  나의 어린 시절, 우리집에온 포교자들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내가 만나온 포교자들은 하나같이 "예수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말한다. '천국'을 풀어보면, '하늘 나라'이다. 하늘에는 구름과 공기밖에 없는데, 무슨 천국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 천국에 가는 조건은 교회에 다니는 것뿐이라는 괴변도 서슴치 않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중학교 1학년 시기, 수학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포교를 했다. 한 친구가 질문했다.

"그럼, 우리 조상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에 지옥에 갔겠네요."

당돌한 친구의 질문에 수학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는님이 보기에는 한줌도 안되는 존재들이에요."

수학 선생님의 대답에 나는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과 같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는 무리들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예수의 존재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논리가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되니, 스스로를 크리스찬이라는 말하면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그들의 말은 스스로의 종교를 부정하는 일이다. 지하철에서 종종 듣게 되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도마복음 속에 우리가 만나는 예수가 본다면 얼마나 안타까울까? 예수님은 말하신다. 천국이 하늘에 있다면, 새가 먼저 천국에 갈 것이요. 천국이 바다에 있다면, 물고기가 천국에 먼저 이를 것이다. 천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도 있다. 그렇다. 우리 안에 천국이 있고, 우리 밖에 천국이 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말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자! 우리가 하찬케 여기는 주변의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자! 예수님은 진정으로 한국 기독교를 위해서 꾸짖고 있다. 귀가 있는 자여, 들어라!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말씀을.....

 

3. 종말론을 짖거리는 자여, 거짓된 말을 그만둘 지어다. 크리스찬들의 세번째 거짓말

The followers said to Jesus, "Tell us how our end will be." Jesus said, "Have you discovered the beginning, the, so that you are seeking the end? You see, where the beginning is the end will be. Blessed is the one who stands at the beginning: That on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teste death."(따르는 자들이 예수께 가로되, "우리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시작을 발견하였느뇨? 그러하기 때문에 너희가 지금 종말을 구하고 있느뇨? 보아라! 시작이 있는 곳에 종말이 있을지니라. 시작에 서 있는 자여, 복되도다. 그이야마로 종말을 알 것이니, 그는 죽음을 맛보지 안히라리라.")

  거리에서 포교하는 자들이 자주하는 말이 있다. "심판의 시간이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큰 목소리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해대는 말들을 들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언어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 그것도 죽음을 무기삼아 공포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우리는 광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때로는 성조기나, 이스라엘깃발을 들고 나타난다.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도 집회를 하며 자신들의 주장만을 떠들어 대는 그들을 바라보며 과연 진정한 예수님은 그들을 어찌 평가할 것인지 궁금하다.

  도마복음 속에서 만난 참된 예수의 모습은 한국 교회에서 만나는 예수의 모습과 너무도 달랐다. 종말론을 말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시작을 발견하였느냐?라고 반문한다. 시작도 보지 못한 것들이 끝을 말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랴! 철학자 강신주가 대중강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죽음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이 질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꽃피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 종말론에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늘, 나의 삶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자. 오늘을 꽃피운다면, 아니, 최소한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았다면, 내일 종말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아쉬움은 남을리 없다.

 

4. 예수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하는말,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

  Jesus said to them, "If you fast,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and if you pray, you will be condemned; and if you give alms, you will do harm to your sprits."(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너희가 금식한다면, 너희는 너희 자신에게 죄를 자초하리라. 그리고 너희가 기도한다면, 너희는 정죄되리라. 그리고 너희가 구제한다면, 너희는 너희 영혼에 해악을 끼치리라.")

 어느 교회가 아프카니스탄에 선교단을 파견하여 교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은 사건이 있었다. 여행을 자제하라는 안내판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던 그들은 그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후로, 한국의 크리스찬들은 반성을 했을까? 아니면, 위험한 지역에 선교를 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을까?

  선교하고, 기도하고, 이웃을 구제하는 것은 크리스찬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우리에게 금식하지 말라, 기도하지 말라, 구제하지 말라고 말한다. 진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순수한 금식, 순수한 기도, 순수한 희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도마복음 속 예수는 말한다. 그런데, 지난 몇달 동안 언론에 비친 기독교는 어떠했는가? 코로나 19의 확산 위험 속에서 종교 집회를 자제해달라는 질본의 호소를 뒤로하고 주일예배를 강행했다. 결국, 교회 집단 간염이라는 비극이 벌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모교회가 종교집회를 통해서 코로나19를 집단 간염시켰다. 이러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은 말씀하실 것이다. 기도하지 말라! '너희는 정죄되리라'

 

5.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홀로 서라!

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t peace upon the world. They do not know that I have come to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 and war. 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there wi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and they will stand alone."(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땅위에 충돌을 던지러 온 줄을 알지 못한다. 불과 칼과 싸움을 선사하노라. 한집에 다섯이 있게 될 때, 셋은 둘에, 둘은 셋에, 아비는 아들에게, 아들은 아비에게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되리라.")

도마복음을 읽다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중에 한 구절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기보다는 충돌을 선사하러 왔다. 가정에서 아비와 아들이 충돌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선다. 아들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의 온전한 주체로 살아갈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충돌을 통해서 이들은 홀로설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발달단계상의 과정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각기 홀로서게 될리라.'라는 말을 통해서, 타인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가 신자들을 교회에 혹은 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는 엄청난 말씀이다.  숫타니파타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들은 통하는 것이 있나보다. 그래, 정복한 왕국을 버리고 가는 왕처럼, 그대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가라!

 

도올 김용옥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철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서술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다음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경"이라는 말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성령에 의하여 쓰여진 특수한 문헌이며 인간의 지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제 이러한 황당한 거짓말로부터 우리는 해방되어야한다."-381쪽

 

성경을 '인간의 창작물'로 보는 도올의 모습은 대학시절 내가 품었던 의문과도 일맥상통한다. 대학교 3학년 시절, 한국 사상사시간이었다. 교수님은 한국 사상사를 강의하는 중간 중간 성경을 말하며 은연중에 포교를 했다. 한국 사상사를 보다 밀도 있게 듣고 싶었던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질문했다.

"종교가 시대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시대가 종교의 위에 있어야합니까?"

나의 질문을 교수님이 이해하지 못하자, 나는 달리 질문했다.

"시대가 변하면 교리도 변해야합니까, 아니면, 시대가 변해도 교리는 변하면 안됩니까?"

교수님이 답하셨다.

"종교에는 부활과 같은 영적인 것이 있기에 함부로 말할수 없죠"

나는 반박했다.

"부활은 포교를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은 순간 말을 얼버무리더니, 나의 이름을 물었다. 순간, '나의 학점은 날라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나의 학점을 A+를 주었다. 교수님은 성경도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로 사료비판을 해야한다는 나의 생각을 존중해주었다. 도올 김용옥도 '도마복음'을 풀이하면서 성서는 재해석 될 수 있으며, 인간의 창작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한다고 울부짖고 있다. 그의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지난날 부던히도 내가 외쳤던 말들이 메아리쳐 들려왔다. 도올은 '도마복음 2'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신을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자유이다."-382쪽

 

나는 어린 시절부터 급우들로부터, 거리의 포교자들로부터 나의 자유를 압살당해왔다. 그들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나를 대접했다. 나는 신자가 되고 싶지 않은데 나를 신자로 만들려 폭력을 가하기 까지 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폭력이다. 논어에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己所不欲勿施于人)'이라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데로 남을 대접한다면, 그것은 폭력의 모습을 띈다. 진정으로 인본주의를 실천하려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논어의 황금율을 가슴에 새겨야한다. 그럴때만이 진정한 평화가 이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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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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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선종불교의 화두로 유명한 말이다.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은 살불살조를 외친 임제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책이다. 사실 반야심경을 단순한 주문을 모아둔 밀교적 성격의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을 생각조차하지 않았다. 도올 김용옥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을 들고 나오자, 반야심경을 읽고 싶어졌다. 도올이라는 깊이 있는 철학자가 단순한 주문을 책을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랬다. 도올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스무살에 반야심경에 미친 도올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반야심경의 매력에 빠져보자.

 

1. 여인의 정체는?

반야심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도올 김용옥은 자신이 반야심경을 만나서 승려생활을 청산할 때까지의 이야기를 먼저한다. 도올과 반야심경의 만남을 통해서 도올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도올은 2장에서 한국 불교의 유명 스님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사를 살펴본다. 그중에서 경허스님의 이야기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계율을 지켜야하는 스님이 계율을 어기며 술을 마신다. 그리고 묘령의 여인을 열흘동안 자신의 방안에 들이다. 계율을 스스로 파괴하는 그의 모습은 고승과 파계승의 차이가 종이장 한장 차이라는 생각마져들게한다. 그러나, 사찰의 제자들이 그 여인을 내 쫓을 것을 요구하기에 어쩔수 없이 그 여인은 절을 떠난다. 그 여인의 모습을 본 제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며 경허스님에게 잘못을 구한다. 경허스님은 잘못을 비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절을 떠난다. 경허스님과 열흘을 같이 있었던 여인은 도대체 어떠한 여인일까?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행복해하지 않고 오히려 경허스님에게 잘못을 빌었을까?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찰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불쌍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무릎서는 경허스님의 모습에 경외심이 들었다. 경허스님과 같이 열흘을 한방에서 지낸 여인의 정체를 알고 싶다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을 읽어 보길 바란다.

 

2. 불교를 부정한 경전

 

  "불교는 불교를 전면으로 부정한 지혜의 사상을 지혜의 완성으로 옹립했습니다. "-223쪽

 

아니, 불교경전이 불교를 정면으로 부정하다. 반불교적 행위를 지혜의 완성으로 옹립하다니 말이되는가? 그런데, 이는 사실이다. 반야심경의 일부를 살펴보자.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싯달타께서 깨달으셨다고 하는 12연기의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사라진다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12연기의 부정은 노사의 현실에까지 다다른다. 그러니 노사도 없고 노사가 사라진다는 것도 없다.)"-219쪽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말씀조차도 "개구라"라고 말하는 대승불교의 방력있는 과감한 모습에 순간 나의 머리에 강력한 충격이 가해졌다. 260자밖에 되지 않는 짧은 경전이 나에게 이렇게 큰 충격을 줄줄은 미쳐 몰랐다.

  강을 건넜으면, 배는 버려라 라는 말이 있다. 부처의 말씀이라는 배를 이용해서 피안의 세계에 다다랐다면 부처의 말을 버려야한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조차도 버려야한다. 세상의 모든 허상들을 나의 마음에서 버려야한다. 그 허상들은 내가 깨닫기 위한 방편들일 뿐이다. 나의 인생이라는 항해를 위해서 만든 작은 나침반은 항해가 끝나면 버려야한다. 나침반은 인생을 항해하는 도구일뿐, 인생 그자체의 목적일 수 없다. '반야심경'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나침반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에 노닐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도올은 말한다. "과연 기독교가 '신약성서'를 전면부정한 적이 있나요? 과연 예수의 역사성을 전면부정한 적이 있나요?" 아니,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종교들 중에서 자신의 성전과 자신의 교리를 스스로 부정한 종교는 없다. 아인슈타인이 “불교에는 우리들이 장차 우주적 신앙에서 기대하게 될 특성들이 함축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의 영혼을 함께 아우른다. 만일 현대과학의 요구에 부합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곧 불교가 될 것이다. 미래에 과학에 부응하는 종교를 나보고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불교를 선택 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타 종교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만의 파격성이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움직였나 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고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얼개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 도올 김용옥은 마음의 짐을 내려 놓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책 곳곳에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이 도올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에 대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대학자도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소 고발에 괴로워하고 있다. "법비"라는 말이 있다. 법을 이용해서 사람의 재물을 약탈해가는 비적이라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는 수 많은 '법비'들이 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을 법비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구속하려한다. 자신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법비'들이 법을 이용해서 사람을 괴롭힌다. 도올이 '법비'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반야심경'이 선사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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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1-29 0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핫한 책이네요. 예전에 고 최인호 작가가 경허대선사님의 생애를 소재로 한 소설 <길 없는 길>에도 나온 일화인데, 저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반야심경은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한번쯤은 접해보면 유익한 경전 같습니다. 저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강나루 2020-01-29 07: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고 최인호 작가가 경허스님을 소재로한 소설을 썼군요
암튼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민트 2020-03-27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덕분에 날마다 성장하는 재미를 배웁니다.
그런데 혹시 강나루님 역사 선생님이신가요?

강나루 2020-03-27 11:27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대학.학기한글역주 - 동방고전한글역주대전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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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을 대학시절 TV를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후, 그는 동양철학에 대한 심도있는 강의를 우리를 일깨워주었다. 한국의 대표적 석학으로 우리사회에 날카로운 독설을 설파하는 그를 나즐공(http://www.hooz.com/)과 '대학 학기 한글역주'를 통해서 다시 만났다. 이 책에서도 도올의 날카로움은 빛났다. 그러나, 그와의 만남이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다. 도올의 강연은 재미있고 쉽게 하지만, 그의 책은 쉽지 않다. 알기 힘든 외래어와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한예로 '시스테마틱'이라는 용어의 뜻을 알기 위해서 다음 검색을 했으나, 용어의 뜻을 찾을 수 없었다. 간신히 단어 검색을 해보았더니 'systematic'라는 단어였다. '시스테메틱'이라 표기하고, 철자를 괄호안에 적어 주었다면, 이러한 곤란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불친절함이 '대학 학기 한글역주'에서는 더욱 심해졌다. 이 책에는 '머릿글'이 없다. 이 책을 왜? 썼는지 알려주는 '머릿글'이 없음은 황당 그 자체였다. '존사'와 '학기'를 왜? 같이 묶었는지 머릿글에서 서술해주었다면, 이책을 읽는 수고로움이 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장장 6개월 동안 이책을 읽었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를 반복하면서 떠오른 나의 단상들을 적어보겠다.

 

1. 기존 학계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창공을 날다.

  도올 김용옥의 위대성은 기존 학계의 틀을 깨고 자유롭게 자신의 학설을 설파한다는 점이다.

 

  "주희도 송나라의 일개 학인일뿐이며 왕수인도 명나라때의 일개 학자일 뿐이다."

  "21세기의 학문을 과거 어느 학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학문을 훨씬 뛰어 넘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야하는 것이다."-212쪽

 

  조선의 유학자들은 동양고전 해석을 주자의 방식대로 하려했다. 특히 우리가 대학자로 알고 있는 우암 송시열은 새로운 방법으로 중용을 해석했다하여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였다. 학문의 자유를 말살하는 패악질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를 뛰어넘는 연구성과가 나올 수 없는 구조를 노론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우리의 눈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강대국의 아류가 될 뿐이다. 도올은 조선성리학자들의 아둔함을 깨우치기 위해서 주자의 '대학'을 깨고 원본 '대학'의 참의미를 서술했다. 드디어 자유로이 학문의 자유를 얻게되었다. 도올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

  일본의 진사이는 주희를 비판하면서 '대학을 공맹의 혈맥에서 벗어난 후대작품으로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진사이와 비슷한 시기를 살앗던 우암 송시열은 주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도올은 자괴감을 느낀다.

 

  "우암의 학문은 주희의 해석을 대함에 있어 근원적으로 경학적 방법론이라는 학문적 시각을 결여하고 있다. 애초로부터 주자학을 북벌대의와 관련된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필요하게 "사문난적"의 논의만을 일으켜 정쟁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암식 노론의 학문논리는 결코 바람직한 방향으로 조선사회를 이끌어갔다고 칭송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올이 지적했듯이, 성리학의 유연선이 사라지고, 정적을 죽이는 도구로 학문을 전락시킨 조선 유학자들의 태도는 우리 역사의 불행이다. 도올은 이러한 불행을 이제 끊으려했다. 그리하여 '대학'이라는 책을 편찬하면서, '여씨춘추'의 '존사'편을 함께 집어넣었다. '존사'에는 천자보다 더 막강한 도덕권력으로서 스승의 존재를 말함으로서, 단순히 '주자 집주'속의 대학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고본대학'해석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주자가 '사서집주'를 통해서 사대부의 윤리를 위한 도구로 수신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대학'을 천자의 책에서 사대부의 책으로 변화시켰다. 반면 도올은 주자 이전의 '대학'의 진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씨춘추'의 '존사'편을 집어 넣어 '주자의 대학'이전의 진짜 '대학'의 모습을 밝히려했다. 이것이 도올의 위대성이다.

 

 

2. '학기'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1)  학연 지부족 교연후 지곤(學然後 知不足 敎然後 知困) : 배우고 난 후에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후에야 곤궁함을 안다.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과 수석과 학년 수석을 했다. 그러면서 역사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을 암기해서 쓰는 실력이 아니라, 나의 관점에서 나의 주장을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역사교사가 되고 나서 나의 부족함을 알았다. 한국사 전분야를 강의하면서 내가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었다. 역사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유가, 너무도 나의 부족함이 컸기 대문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완벽한 이해를 전제해야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배운뒤에 부족함을 알고, 가르치면서 자신의 지식의 곤궁함을 알게 된다.

2) 선학자 사일이공배 우종이용지 불학자 사근이공반 우종이원지(師逸而功倍 又從而庸之. 不善學者 師勤而功半 又從而怨之) : 잘배울 줄 아는 우수한 학생은 선생님께 즐거움을 선사하면서도 성적은 보통 학생들의 배가 된다. 그리고 그 공을 모두 선생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런데 잘 배울 줄 모른느 졸렬한 학생은 선생님께 괴로움만 선사하면서도 성적은 보통 학생들의 반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을 탓하지 않고 선생님만 원망한다.

  '학기'에 나와 있는 이말은 요즘 현실과 일면 맞기도하고, 맞지 않기도하다. 예의 바른 학생들은 교사의 수업에 귀를 기울이고, 총명하여 가르치는 것이 수월하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한 학생은 가르쳤으나, 생각이 나지 않으면 배우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때로는 예의 없는 학생도 있다. 반면, 공부를 잘하지만 예의 없는 학생도 있다. 학원에서 배웠기에 학교 수업에 오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공부는 못하지만 예의 바른 학생도 있다.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자책하기도 한다.

  '학기'의 내용은 일면 타당하지만, 일면 현실에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고전에 절대 진리를 담고 있지만은 않다.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과 유리된 내용도 있다.

3) 유자청이불문 학불렵등야(幼者聽而弗問 學不躐等也) : 연소한 학생이 경철할 뿐 질문하지 않는 것은 함부로 엽등(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감)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학기'의 내용중에서 가장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학생이 등급을 건너뛰어 올라간다면 이는 교사로서 더욱 즐거운 일이 아닌가? 학문에서 조차 선후배간에 등급을 지켜야한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학문은 경직화되고, 패거리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논문에 존칭을 쓰지 않는 것은 학자들은 대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승이라 할지라도 잘못된 주장이면, 당연히 제자가 이를 지적하고 스승을 뛰어 넘어야한다. 청출어람 청어람하지 못한다면, 어찌 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말하고 싶다. '엽등하라! 질문하라!'

4) 고군자지어학야 장언수언 식언유언(故君子之於學也 藏焉修焉 息焉游焉) : 그러므로 군자의 학습법이란 문제가 되는 것을 항상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촉발하는 계기가 찾아오면 그것을 열심히 연구한다. 휴식을 취하고 한가롭게 노닐 때도 항상 학문에서 생겨나는 의심과 관심사를 마음에서 지우는 법이 없다.)

  상당시 공부에만 매진하라는 꼰데들의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몰입의 즐거움을 생각한다면, 학문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학문에 몰입해야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학문에 미치지 않고서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 배움을 쌓고 닦고 또한 쉬면서 즐겨야만 학문을 이룰 수 있다. '학기'는 이를 말하고 있다.

5) 군자지교유야 도이불견 강이불억 개이부달(君子之敎喩也. 道而弗牽, 强而弗抑 開而不達) :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란, 학생이 가야할 대강의 큰 길을 보여주지만 억지로 잡아끌지는 아니 하며, 카리스마를 과시하면서도 학생을 억압하지 아니하며, 문제으 서두를 열어주되 금방 그 문제를 풀게 만드는 것이아니라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개닫기를 기다린다.

  강압적이지 않고, 학생들이 스스로 깨우칠수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을 '학기'는 설파하고 있다. 알을 깨고 스스로 진리의 세계로 뒤쳐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교육을 이미 2천년 전에 설파하고 있다. 현대식 교육 방법이라해도 손색이 없는 이러한 교육방법을 이제 우리가 다시 발견할 때이다.

 

3. 대학을 통해서 오늘을 바라보다.

1) 호이지기오 오이지기미(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 좋아하는데 그 단점을 알고, 싫어하되 그 장점(아름다움)을 알라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만 알려하기 보다는 그 단점도 함께 알아야하며, 싫어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단점 뿐만 아니라 장점을 바라보아야한다. 그래야 적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그래야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의 실수에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싫어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면,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없다. 진정으로 삶을 살아갈 때 유념해야할 명언이다.

2) 대덕불관 대도불기 대신불약 대시부제(大德不官 大道不器 大信不約 大時不齊) : 대덕은 관직에 얽매이지 아니하며 대도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아니하며 대신은 사소한 약정에 구애받지 아니하며 대시는 짧은 시간의 획일적 질서에 얽매이지 아니한다.

  높은 관지과세상의 명리에 큰덕은 휘둘리지 아니한다. 큰도는 하나의 그릇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크다. 즉, 보편적 법칙은 한 기능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큰 믿음은 사소한 약속보다 큰약속을 지킨다. 어머니보다 큰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 처럼.... 큰 시간도 짧은 시간의 획일적 질서에 얼매이지 않는다. 우주의 시간은 개인의 시간을 초월하기에.... 상당히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3) 인자 이재발신 불인자 이신발재(仁者 以財發身 不仁者 以身發財) : 인한자는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인자하지 못한자는 몸으로써 재물을 모은다.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주의에 빠져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말을 해주고 싶다. 재물은 사람을 위해서 모아야한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00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젊은이가 죽은 사건이 연이어서 발생했다. 그 발전소의 주인은 재물로써 사람을 위하지 않고, 사람으로써 재물을 위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을 읽어 보아야한다. '대학'의 가치는 물질만능주의가 강해질 수록 빛날 것이다.

4) 국불이리위리 이의위리야(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 나라는 이익을 취하는 것만을 이익으로 삼지 아니하고, 의를 구현하는 것을 이익으로 삼는다.

  한때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유행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를 사적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삼은 대통령과 특정 무속인에게 의존하며 아바타와 같은 삶을 산 대통령이 있었다. '대학'은 말한다. 국가는 이익을 취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여야한다고.... 독재자와 친일파의 후예들은 권력을 잡자 국가를 사적 이익을 잡는 도구로 사용했다. 우리의 국가가 사적 이익을 취하는 도구로 전락하면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대학'을 읽어야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대학'은 '논어' 보다 유명한 고전이 아니다. 분량도 적고 세상에 알려진 명언도 적다. 그러나, '대학'이 국가를 통치해야하는 제왕을 위해서 저술된 책이고, 주자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야할 사대부에게 윤리적 기준으로 '수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고전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대학'을 왜? 읽어야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주인이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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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보급판 문고본) -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
틱낫한 지음, 최수민 옮김 / 명진출판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화가 나는 일이 많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우리의 사법부에게서 느끼는 분노에서부터,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에게 받는 화가 너무도 많다. 화를 내면서도 화가 나를 갈가 먹고 있다는 생각을 끊임 없이 한다. 내가 읽은 심리학 책에서는 화를 내지 말라고 말들한다. 그렇지만, 화가 났을 때, 화를 어떻게 다스려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칠게 타인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고서도 나의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심리학 책에게 얻지 못한 해결책을 불교에게서 얻고 싶었다. 서가를 거닐다가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라는 부재도 마음에 들었다. 틱낫한 스님은 화를 어떻게 다스리라 조언해줄까?

 

1. 화가 들어있는 음식을 먹지 말라!

  틱낫한 스님은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지 말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서 화를 먹을 뿐만이 아니라 눈과 귀와 의식을 통해서도 화를 우리 몸에 받아들인다."-19쪽, 틱낫한

 

  공장식 사육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현대의 축산시설에서 자라난 동물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빠른 생육과 질병예방을 위해서 각종 생장촉진제와 항생재를 맞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러한 고기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나의 몸상태를 교란시키고 과도한 생장촉진제와 항생재를 섭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뿐이 아니다. 과자를 비롯한 음료수에는 각종 합성첨가물들이 들어있다. 바나나맛 우유에 바나나는 들어있지 않고, 대부분 바나나맛을 내는 첨가재가 들어있다. 이러한 음식을 먹고 건강한 내모습을 바란다면 지난친 욕심일 것이다. 라틴어 아식스(ASICS)라는 말이 있다. 상표이름으로 유명한데요. 원 뜻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아니마 사나 인 꼬르 뽀레 싸노 Animus Sanus In Corpore Sano)"라는 뜻이다. 화를 다스리고 싶다면, 나의 몸에 화를 담아서는 안된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듯다는 말은 나의 몸에 화를 담지 않아야 화가 없는 정신이 깃들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단지 먹는 것에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영상매체를 비롯해서 귀를 어지럽히는 더러운 말들과 더러운 잡념들을 물리쳐야한다. 바람이 부는데 깃발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수 없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화를 다스릴 수 있는 조건을 먼저 갖출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2.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듯이 화를 대하라

  화를 내고 나서 마음이 찝찝할때가 많다. 그때 화를 내는 것은 부적절했다는 것을 화를 내고 나서야 깨닫는다. 화를 떨어내고 싶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 화를 내는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화를 내는 나에게 틱낫한 스님은 어머니가 아기를 대하듯이 화를 대하라고 한다.

 

  "아기가 우는 것은 무엇인가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워서일 것이고, 그래서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어한다."-37쪽

  "화는 우리의 정신적 구성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장이나 신장을 돌보듯이 우리의 화를 돌보아야한다."-68쪽

 

  '화'와 '나'를 분리시키고, '화'를 없애버려야하는 구성물로 보아왔던 나에게, 틱낫한 스님은 화는 내 마음속의 우는 아기라고 말한다. 버리려해도 버릴 수 없는 화라는 아기를 탓해보았자, 화는 더욱 강하게 울뿐이다. 나의 내면에서 화가 나는 이유는 나의 몸안에 울고 있는 어린 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중받지 못해 상처받고 아파하는 아기가 사랑으로 감싸앉아 달라며 울고 있었다. 어른 몸에 깃든 어린 아기는 울부짓는다. 따뜻하게 안아 달라고.... 그런데, 나는 그러하지 않았다. 왜면하고 나의 몸속에서 내 쫒으려했다. 그럴수록 그 아이는 더욱 강하게 울어댄다.

  틱낫한 스님은 '화'도 우리의 정신적 구성물이라 지적한다. 화를 배척하기 보다는 끌어안으라 당부한다. 울고 있는 내면의 아기를 포용하고 내면 아기와 화해해야한다. 화를 다스리는 두번째 단계는 화를 나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울고 있는 내면 아이와 화해하고 사랑스럽게 안아주는 일이다.

 

3. 호흡과 미소와 보행명상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라.

  내면 아이와 화해하고 사랑스럽게 안아주었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할까? 틱낫한 스님은 보행명상을 권한다.

 

  "호흡과 미소와 보행명상을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몸에 익히면 5분이나 10분이나 15분 안에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41쪽

  "10분이나 15분쯤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고 걸음 걸이를 자각하면 그 사람은 응징이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44쪽

 

  유발 하라리도 '비파사나'라는 걸으면서 명상하는 수행을 한다. 1년에 한달정도 '비파사나'를 하면 놀라운 집중력을 갖을 수 있고, 아침을 명상으로 시작한다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불교의 명상 수행방법은 집중력을 높이는데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화를 다스릴 때도 큰 도움을 준다. 하기사, 화를 다스리지 못한다면,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할 수도 없기에 불교의 명상법은 불교신자 뿐만 아니라, 화가 범람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화에 집중할 수록 화는 더욱 치밀어 오른다.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 화를 아기처럼 대하고, 호흡과 미소 보행을 하며 명상을 하면 화에게 나의 정신을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보행을 한다는 것은 뇌과학적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있다. 산책을 하면 세라토닌이 분비되어 집중력을 높이고 머리를 맑게해준다. 단순히 앉아서 명상하는 것보다는 걸어다니면서 상처받은 나의 내면아기를 보살피는 것이 효과가 높다는 생각이든다.

  틱낫한 스님은 '화내는 것도 습관'이라 말한다. 그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 호흡과 미소 보행을 하며, 내면 아기와 대화하자. 우리 모습은 어린 시절 부모와 주변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살기 힘들었던 부모는 우리에게 많은 공감과 배려를 배풀어주지 못했다. 나의 주변인들은 나에게 수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친 부모들 밑에서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화는 대물림된다. 시대의 아픔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그 상처는 자녀들에게 대물림된다.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어떻게 보듬느냐가 우리의 현재모습을 결정할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그 치유의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4. 자각하라!

  호흡과 미소 보행을 하면서 우리는 화를 자각할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자각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화는 꽃과도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화의 본성을, 다시말해서 화가 일어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각의 에너지로 화를 감싸안는 법을 배우고 나면, 화라는 꽃이 봉오리를 터뜨리게 된다."-33쪽

  "마음속에 들어 있는 고통의 올가미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각의 에너지로 그것들을 감싸안고 변화시키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178쪽

 

  정신분석학에서 '직면'을 강조한다. 자신의 상처를 회피하기 보다는 그 상처를 '직면'할때 치유는 시작된다. 틱낫한 스님은 정신과 의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화를 회피하기 보다는 꽃을 대하듯이 화를 자각하고 감싸안으면 화가 일어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 꽃을 감싸 앉듯이 화를 감싸 안자. 꽃봉오리가 터지듯이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될 수 있도록 말이다. 나의 몸을 느끼고 사랑하는 것에서 진정한 사랑은 시작된다. 나 자신을 자각하며 상처받은 꽃은 치유의 꽃망울을 터트릴 것이다.

 

 

5. 공감과 연민하자.

  화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단계는 공감과 연민이다. 틱낫한 스님은 나를 화내게 한 사람을 화로 앙갚음하기 보다는 이해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하면 그 사람은 더욱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함으로써 위안을 얻으려 할 것이다. .....  어느쪽도 앙갚음을 반복해서는 안된다."-27쪽

   "내게 화내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라"-103쪽

  "상대방이 가진 나쁜 씨앗보다는 좋은 씨앗을 보아라"-81쪽

 

  '연민의 정'을 가지고 화내는 사람의 말을 경청하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은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나의 경험상 학생들이 격앙되었을 때 먼저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말하도록 한다. 학생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나서 내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학생들도 나의 말을 경청한다. '연민의 정'은 강력한 무기이다.

  '상대방이 가진 좋은 씨앗을 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은 최성혜박사의 감정코칭이라는 연수에서 배운 내용과 유사하다. 상대방의 장점을 20개를 작성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나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불교철학이 현대 심리학과 서로 상통하는 모습을 이 책에서 다시한번 볼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단순히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가서, 나를 화가나게한 자에게 선물을 주라고 말한다.

 

  "화가 났을때 .... 그에게 선물을 주면 그에 대한 미움이 가라앉고 화가 풀리며 마음이 너그러워진다."-132쪽

 

  이 조언은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성현의 말씀은 서로 상통하는 것이 있다는 점을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러나, 틱낫한 스님의 조언이 100%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이 당당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낼 필요가 없다. 오히려 화를 내는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그러나 상대가 비굴한자라면, 어떠한가? 내가 화를 내지 않으면 그는 더욱더 나를 만만히 보고 나를 무시할 것이다. 비굴한 학생들을 대할때도 마찬가지이다. 강하고 엄격한 선생님에게는 납짝 엎드려있다가도, 유하고 만만한 선생님에게는 날뛰며 떠드는 학생이 있다. 이들에게 연민과 관용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뿐인가? 사회적 갑질을 하는자에게, 버닝썬 사태를 비롯한 국정농단 세력에게 관용이 과연 힘을 발휘할까? 그들을 용서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더 많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국민을 짓밟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해와 연민'은 나약한 감정이 아닐까? 틱낫한 스님은 당당히 아니라고 말한다.

 

  "이해와 연민은 나약하고 비겁한 감정이 아니다."-148쪽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을 역사에 던졌던 수많은 사람들은 복수의 감정만으로 불의에 대적하지 않았다. 아니, 복수의 감정만으로는 자신의 한평생을 정의에 바칠수 없다. 그들에게는 '약자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이었다. 조국을 짓밟는 일제에 대항해서 조선의 민초를 살리겠다는 약자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는 독재자에게 항거하는 민주화 투사에게는 나라에 대한 사랑과 시민에 대한 연민이 있었다. '연민과 이해'는 불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준다.

  틱낫한 스님의 '이해와 연민'은 조건이 필요하다. 상대가 비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나라를 팔아 먹는 큰도둑이 아니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이해와 연민'이 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물론 나의 마음을 치유하는데도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약자를 짓밟는 싸이코패스들에게는 정의의 단죄가 필요하다. 불의에 관대한 것은 악을 자라게하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만 있는 병이 있다. '화병'이라는 병명은 세계에도 알려진 한국만의 독특한 병이다.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에 불교가 여인들에 의해서 신봉되었던 이유도 그녀들의 '화'를 치유해주는 방법을 불교는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는 누구나 관세음보살이 되어야한다.'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와 보살은 어쩌면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도달해야하는 이상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의 고통과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다리기 보다, 내가 고통을 이겨내고 문제를 해결해야되듯이, 부처를 기다리기 보다는 우리가 부처가 되어야한다. 팃낫한 스님은 '비가 내릴때 우리는 햇빛이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분노와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렇다. 현실이 비관적이라할지라도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희망은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발견못할 뿐이다. 우리가 화에 지배당하지 않고,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감싸안으며, 내면아이가 활짝 웃게할 수 있는 비결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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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9-06-07 14: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를 잘 승화시킨다면 삶에 대한 열정이 아닐는지...

강나루 2019-06-07 16:43   좋아요 0 | URL
그래요
화를 승화시키면 열정이 될수도 있을것같아요

붕붕툐툐 2019-06-07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깔끔한 정리 감사합니다. 저도 명상을 하는데, 확실히 화에 효과가 있어요~ 좀 전에 바나나우유를 사먹고 싶은 충동을 참았는데 잘했다 싶습니다:)

강나루 2019-06-07 16:4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두 짬짬이 명상을해보려 합니다

민트 2020-03-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혹시 역사선생님이신가요?
 
한입 매일 철학 - 일상의 무기가 되어줄 20가지 생각 도구들
황진규 지음 / 지식너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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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있는 생각을 하고 싶다면, 철학책을 읽어라! 한해 한해 나이를 먹으면서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현실과는 상관 없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만하는 학문이 '철학'이라 생각했던 적이있다. 그러나 세월은 나에게 나이를 주었고, 더 많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한 일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삶을 살아가면서 느릿느릿 깨달았다. 거북이보다 느리게 깨닫는 나에게 철학책은 어려운 책이었다. 도올 김용옥, 강신주 라는 철학자를 만나면서 철학을 쉽게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닫는 속도가 조금은 나아졌다. 그리고 팟캐스트 '철학 한입(철학흥신소)'를 통해서, 황진규라는 철학자를 만났다. 철학에 빠져 7년 동안 다닌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철학에 빠져사는 그는, 니체, 푸코, 칸트.... 무척이나 어려운 철학자들의 말들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황진규의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지혜를 깨다는 행운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한입 매일 철학'이라는 책을 펼쳤다. 철학이라는 '지혜의 학문'을 안내해줄 황진규의 '한입 매일 철학'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나의 삶을 철학하다.

  철학책을 읽는 이유는 철학으로 부터 인생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한입 매일 철학'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이론만을 나열하기 보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러 나의 삶을 반추하게 해준다. 그 몇가지를 살펴보자.

  나는 미셸 푸코를 좋아한다. 물론, 그의 책은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의 책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혜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음 글도 그러한 글귀중에 하나이다.

 

  "19세기 정치적 권리에서 발생한 가장 대대적인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주권의 이 오래된 권리, 즉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가 새로운 다른 권리에 의해 대체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완됐다는 것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중략)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이 된 것이죠. 그러니까 주권의 권리란 죽게 만들거나 살게 내버려 두는 권리입니다. 그런 뒤에 새로운 권리가, 즉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리가 정착하게 됩니다."-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323쪽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방법에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으로 억압의 방법이 정교화되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고문, 체벌)' 방법의 기억이 많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을 많이 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몸으로 학습되어 교사가 되고 나서 학생들을 지도할때 많이 사용했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이 얼마나 비교육적인지는 교사로 성숙되어 가면서 깨달았다. 지금 나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과거 폭력적인 방법으로 훈육되어온 나는, 또다른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요즘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방법은 교육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가 성숙되었기에 체벌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의 훈육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감시, 훈육)' 방법의 교육은 강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교복과 두발을 학생통제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학교가 많다. 야간 자율학습 참여율을 중요시하며, 담임 교사를 쪼는 교장들이 있다 학생을 감시하고 통제해야한다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리자들에 의해서 학교현장은 아직도 참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나의 자녀들을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방식의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절, 임용고사에 합격하면 연애도 결혼도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임용고사에 합격하고, 교사로 발령받고 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연애와 결혼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해서 주변의 많은 분들이 "결혼하라", "결혼은 언제하냐"고 묻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개팅을 하고 데이트를 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데이트를 하면서 여성을 리드하는 일이었다. 약속장소를 물색하고, 사전 답사를 가서, 데이트 코스를 결정한다. 계획된 장소에 계획된 일정에 따라서 여성을 리드하지 못하고 버벅되다가는 여성에게 퇴자를 맞기 쉽상이다. 여성에게 결정권을 주고, 여성이 스스로 원하는 데이트 코스를 가도록 하는 '민주적'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여성들은 '민주적' 데이트를 원치 않았다. 왜? 내가 만난 여성들은 그들 스스로 결정권을 가지는 '민주적 데이트'를 싫어할까? 남자에게 리드 당하는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여성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자 황진규는 라캉의 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황진규는 남자는 대체로 강박증적이며, 여성은 대체로 히스테리적이라고 규정했다. 강박증자는 "내 맘데로 할꺼야!"라는 구호를 외치는 반면, 히스테리 환자는 "네 맘대로 해"라는 구호를 외친다. 상당수의 남성과 여성이 강박증적이며,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민주적 데이트'는 설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강박증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했다. 치밀한 계획과 사전답사를 했고, 계획이 치밀해질 수록 데이트가 귀찮아졌다.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는 지금까지 혼자살아야했을 것이다. 이제는 변해야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미 젊은 세대는 변했는지도.... 여성도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고, 원하는 데이트를 남성에게 요구하는 모습을 보여야한다. 더 나아가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가 원하는 데이트를 당당히 대화를 통해서 찾아가야한다. 강박증적 남성과 히스테리적 여성이 지배하는 한국사회는 변화해야한다.

  초임 교사에 발령 받았을 때, 교무부장님은 자상하게 학교일을 알려주셨다. 너무도 자상하셨고, 친절히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셨다. 교무부장에서 밀려나 짐을 꾸리는 부장님을 도와드리며 쓸쓸한 그분의 뒷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런데,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 신봉하는 신문은 조선일보이며, 가장 믿는 언론인은 조갑재였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수구 정당을 지지하는 그분과 말싸움에 가까운 대화를 하곤 했다. 대화가 불가능한 그분이 너무도 자상한 그분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흄이 "절대불변의 진리나 법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의 믿음이 있을 뿐이고, 인간은 그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화를 할 수 없는 존재와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저자 황진규는 비트겐 슈타인의 '언어게임'이라는 이론을 소개하며, 대화할 수 없는 존재와의 대화방법을 제시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지역적 문화적 연령적 창이에 따라서 다른 언어규칙을 사용한다. 따라서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의 규칙을 버리고 상대방의 규칙으로 들어가야하다. 교무부장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북녘땅에 지주로 살다가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땅을 빼앗기로 남으로 내려와야했던 그분의 가정사를 알고 공감해야한다. 친일파보다 공산당을 싫하는 지주의 심정을 이해해야한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대화는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황진규는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려할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상대가 미워질 때 대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삶을 철학하려 할때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철학, 진정한 삶은 이뤄질 수 없다.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손을 떠시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신다.

  "손이... 안떨려고 하는데도, 손이 떨린다."

  불안한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심각성을 깨달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갔다. 어머니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다. 급히 파킨슨병에 대해서 공부를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치매'는 병명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치매'는 증상일뿐 병명이 아니다.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헌틴텅 무드병 등의 다양한 병들이 심각해지면, '치매'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어머니가 손을 떠는 이유는 파킨슨병을 앓고 계셨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부모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으로는 오래사신 것을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나이드셨음을 두려워해야한다.(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저자 황진규는 "자기의식은 기억이기에, '나'는 내가 가진 기억의 총합이다. 그게 바로 자아이고 '나'다."라고 말한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에게 자아란 없다. 자아를 잃어가는 노인을 보면서 가족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기에 우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커져간다. 인간은 기억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같은 기억,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리고 자아를 만들어 간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자아를 잃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연히, 팟캐스트를 듣가다가 한 개그우먼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이번 주제는 '이번생은 글렀어'입니다."라는 개그우먼의 말은 '이번생은 글렀으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라'라는 말로 들렸다. 천박한 개그우먼의 말이 한동아 귓가를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리셋하길 원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 황진규는 '삶을 리셋하기 보다 삶의 아장스망을 바꿔보자'라고 제안한다. 들뢰즈가 사용한 아장스망은 '배치'라고 번역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생의 모든 것의 관계를 재배치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단 눈에 보이는 것만을 재배치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재배치할 수도 있다. 돈을 인생의 일순위에 배치했다면, 이번에는 사랑을 인생의 일순위에 재배치할 수도 있다. 새롭게 아장스망을 한다면, 삶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어리석게 '이번생을 글렀으니, 목숨을 끊고 다음생을 기약하리라'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사람은 다음생에서도 이번생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 척박한 황무지를 탓하기 보다는 금이 이 황무지를 옥토로 변화시키자.

 

2. 주인으로 살수 있는 방법을 철학하다.

  '다상담',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강신주의 책에서 강조하는 말은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을 거머쥐지 못한 우리가 주인으로 살기란 너무도 힘들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철학자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주인으로 살라했을까?

  마르크스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가 달라지면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143쪽

  변혁을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야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아리스토켈레스보다 감동적인 마르크스의 말에 눈물이난다. 내가 상관으로 모시는 존재를 상관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와 사회적 관계를 단절시킬 각오를하며 산다면 나는 나의 상관의 노예가 될 수 없다. 사표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라는 강신주의 말이 이해된다.  당신과의 사회적 관계를 벗어 던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결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인으로 살 수 없다. 주인으로 살려면 사회적 관계를 달리할 수있는, 때로는 사회적 관계를 단절할 결기가 필요하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제시했을까? 저자 황진규는 니체의 '힘의 의지'를 당연시하지 않고 그 의도(꿍궁이)에 의문을 던질 때 '우리가 세상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휘둘린'다고 말한다. 즉, 나를 억압하려는 사회구조, 국가, 회사 상관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말이다. '힘의 의지'는 '힘 싸움으로써의 관계 맺음'의 결과다. 우리가 '힘의 의지'에 순응한다면 히틀러가 독일인들 위에 굴림하며 유럽을 전쟁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었듯이, 권력자는 우리를 암흑의 수렁텅이에 몰아 넣을 것이다. 반면 우리가 그들의 '힘의 의지'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의 꿍꿍이를 파악하고 저항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촛불 혁명'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수동적으로 나에게 주인으로서의 지위가 주어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주인이 되려 노력이 필요하다. 그 에너지를 우리는 '주인의식'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주인으로 살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는 '인정투쟁' 때문이다. SNS에 집착하는 이유도,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도 황진규가 지적했듯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 때문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길 원하는 이유는 태생부터 부모라는 존재에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인으로 살고자 한다면,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기 보다는 내 자신의 양심에 귀기울여야한다. 나의 양심과 나의 욕구에 귀기울일때 우리는 타인에 휘둘리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혼자서만 살 수는 없다. 저자 황진규는 "기쁨을 주는 타자는 악작같이 찾아나서야한다. 동시에 슬픔을 주는 타자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써야한다."고 충고한다. 기쁨을 주는 타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여야한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기쁨을 주는 유쾌한 존재라면, 내주변에는 유쾌한 사람이 모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주변 사람들도 유쾌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슬픔을 주는 타자도 기쁨을 주는 존재로 바뀌지 않을까?

  저자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계획은 우리의 믿음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브리콜뢰르는 '손재주꾼'이나 '맥가이버'로 번역할 수 있다. 철저히 계획된 준비물을 토대로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보다는 주어진 것들로부터 필요한 것을 만드는 것이 바로 '브리콜뢰르'이다. 브리콜뢰르에 계획은 필요없다. 계획을 신봉하며 계획된 데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당황하며 급속히 무너지는 '일본인'과 임기응변에 강하지만 계획성은 다소 부족한 '한국인'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황진규는 '브리콜뢰르'를 강조하며 계획의 불필요성을 강조하지만, 나는 계획과 무계획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째즈와 같은 삶을 제안한다. 계획성과 무계획성을 횡단하며 아무리 촘촘한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때, 우리는 자유로운 주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언어의 구조에 주목하자. 소쉬르의 말을 살펴보자.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 인간은 결정된다."

  "생각이 언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생각을 만든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제가 우리에게 말과 글을 빼앗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언어라는 구조에 의해서 우리가 결정된다면, 언어라는 구조를 바꾼다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된다.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인간 혹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독재정권이 '보도지침'을 내려서, '교통비 인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하게하고 '교통비 현실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 이유도 언어를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권력자가 파놉티콘을 만들어 우리를 일망감시하려한다면, 우리는 역파놉티콘으로 그들을 주시해야한다. 모두가 중앙에 있는 권력자를 감시한다면, 파놉티콘은 다수의 감시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읽으면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학과 만나는 길이 너무도 어렵다. 난해한 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의미를 깨닫는 일이 보통의 노력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황진규 덕분에 나는 철학자들의 글들 사이를 비교적 쉽게 헤집고 다니며 깨달음의 보석들을 발견했다. 그중에 하나가 흄의 말이다. 

  "인과관계는 근본적으로 논증 불가능하다."-69쪽

  어제 태양이 떠오른다고 내일도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을 법칙이라 할 수 있을까? 어제 떠오른 태양이 내일 떠오르는 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태양이 50억년 이후에는 수소를 다태우고 백색외성이 되어서 수축하거나 폭발할 것이라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태양이 떠오를 수 없다. 법칙은 한정된 조건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태양이 존재하고, 지구가 태양주위를 공전하면서 자전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철학은 우리가 당연시하는 일들에 의문을 품는다. 당연한 일들에 의문을 던지며 나의 고정관념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나의 사고도 좁은 알을 깨고 드넓은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철학책을 읽는 맛이 난다. 함께 철학의 품에서 뛰어 놀지 않으련가?

 

ps. 나의 가슴에 남는 몇줄을 적어본다.

"감성이 없으면 대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으면 대상은 절대로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지성이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고, 감성이 없는 지석은 공허하다."-칸트 95쪽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한 노예여야만 한다."-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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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9-05-02 05: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삶이 오래 될 수록 생각이 많아지네요

2019-09-12 0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나루 2019-09-12 06:15   좋아요 1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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