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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 3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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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치 니체처럼 기독교는 도올 김용옥이 뛰어 넘어야할 커단란 산줄기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자에게 강한 독설을 퍼부으면서도 기독교 연구에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니체가 '안티크리스트'라는 책을 쓰면서 참된 크리스트인이 되기를 촉구했듯이, 도올 김용옥은 수많은 크리스트교 저작을 통해서 참된 크리스찬은 어떠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는 이런 점에서 도올 김용옥의 탁월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2권에 이어서 3권을 1년 이상 읽었다. 하루에 한장 혹은 일주일에 한장, 그것도 안된다면 1달에 한장을 읽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이제 그 대장정을 마친다. 

  도마 복음은 예수의 언행이 이루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이 예수님의 말씀만을 모아 놓았기에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문헌이다. '논어' 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에, 어떠한 관점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도올을 통해서 내가 얻은 진리를 소개하겠다. 


1. 우리 모두 길잃은 양이 되자. 

107장

 Jesus said,  (중략) "One of them, the largest, went astray. He left the ninety-nine and sought the one until he found it. After he had gone to this trouble, he said to the sheep, 'I love you more than the ninety-nine."(예수께서 가라사대, (중략) 백마리 중에 가장 큰, 그 한 마리가 무리를 떠났다. 목자는 아흔아홉마리를 버려두고 그 한마리를 찾을 때가지 헤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수고를 끝내었을 때, 목자는 그 양에게 말했다. '나는 아흔 아홉마리보다도 너를 더 사랑하노라!'


  크리스찬들은 자신을 양에 비유하고 크리스트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길잃은 양으로 비유한다. 성경에 나와있는 이야기가, 도마복음에는 놀랍게도 길 잃은 양에 대한 칭찬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중의 무리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양들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져서 방황하고 도전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하는 큰 양을 예수는 더 사랑했다. 무리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으려하는 모습은 청소년 시기, 자신의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학생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미운 7살, 방황하는 청소년 시기에 뇌가 발달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가 부모의 입장에서는 말안듣고 속썩이는 말썽장이 자식의 모습이겠지만, 사실은 도마 복음에서 사랑받는 커다란 양의 모습이었다. 

  도마 복음 속의 예수는 말하고 있다. 99마리의 양들처럼 순응하고 도전하지 않는 삶보다는 도전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  모험을 즐겨라! 


2. 천국은 이땅위에 있다.  

113장

  His followers said to him, "When will the kingdom come?" "It will not come by watching for it.  (중략) Rather the kingdom of the father is spread out upon the earth, and people do not see it."(그의 따르는 자들이 그에게 가로되, "언제 나라가 오리이까?" "나라는 너희들이 그것을 쳐다보려고 지켜보고 있는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오지 않는다. (중략) 차라리, 아버지의 나라는 이 땅 위에 깔려 있느니라,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니라."

51장 (전략) "What you look for has come, but you do not know it."(너희가 기다리는 것은 이미 와 있노라. 단지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할뿐이니라.)

52장 (전략) "You have disregarded the living one who is in your presence and have spoken of the dead"(너희가 너희 면전에 있는 살아 있는 자를 보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만을 이야기하는 구나!)


  수많은 크리스찬들이 나에게 전도를 하면서 죽어서 천국가려면 교회나오라고 말한다.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라는 그들의 말이 나에게는 강한 반감을 주었다. 내새를 위해서 현새를 희생하라는 그들의 논리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개똥받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처럼, 저승보다는 이승에서 행복한을 추구하는 것이 값지지 않을까? 

  그런데, 도마 복음속의 예수님은 철저히 현세에 천국이 있다고 강조한다. 천국이 언제 올 것이냐는 추종자들의 말에, 아버지의 나라, 즉 천국은 이 땅위에 깔려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거룩한 말인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도 주인공 남매는 파랑새를 찾아서 헤메지만, 파랑새는 남매 곁에 있었다. 단지 파랑새를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도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요, 물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네 안에 있고 네 밖에 있다. 이 땅위에 깔려 있지만, 단지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할 뿐이다. 

  대학에 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니 취직해야 행복할 줄알았다. 취직하니 결혼해야 행복할 줄알았다. 결혼하니 아이가 다 자라면 행복하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우리를 보고 나이드신 할머니분들은 "저 때가 행복할 때인데, 그때는 몰랐어"라는 말을 하셨다. 맞다. 행복은 지금 우리 옆에 있다. 단지 우리가 행복을 몰라볼 뿐이다. 내세이서, 다음생에서, 지금 이순간이 지나고 나서 행복을 찾으려는 어리석은 모습을 버리자. 행복은 이 땅위에 깔려 있다. 단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3. 일부 눈먼 목사를 위한 조언 

34장 

Jesus said, "If a blind man leads a blind man, both of them will fall into a pit"(예수께서 가라사대, "눈먼 자가 눈먼 자를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서울의 어느 목사와 신도가 신자들을 현혹시켜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결국 코로나 19가 유행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는 언론 보다가 연이어서 등장했다. 도마 복음 속의 예수님은 그들을 '눈먼 자'라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수많은 신도들을 코로나19 감염의 위험속에 빠뜨린 눈먼 목사와 눈먼 신도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자신의 눈으로 성경을 읽지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눈먼 목사의 설교를 듣고 구덩이에 빠지는 눈먼자들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눈물흘리지 않을까?


4.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31장

Jesus said, "A prophet is not acceptable in the prophet's own town; a doctor does not heal theose who know the doctor."(예수께서 가라사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의사는 그 의사를 아는 자들을 고치지 아니한다.)


  이 말은 너무도 공감이 가는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녀석들은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렸을 적 그대 그대로의 내가 지금도 계속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금의 이 사람이 미래에도 이러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의 이사람이 과거에도 이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엄청난 시간 속에서 잠시 만난 일부분이 그사람 이생의 전부인냥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선지자와 탁월한 의술을 가진 의사가 자신의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러니컬한 일들이 벌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에 휩싸여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지금 만난는 이 사람도 그사람의 인생속에서는 한낱 찬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그사람의 변화가능성, 성장가능성을 인정하자. 



  도마복음 속의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이해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너무도 이해되지 않아서 이해하지 않은 채로 넘긴 것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01장의 내용이다. 


  "Whoever does not hate father and mother as I do cannot be a follower of me, and whoever does not love father and mother as I do cannot be a follower of me. For my mother gave me falsehood, but  my true mother gave me life."(내가 증오하는 것 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증오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 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지아니 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도반이 될 수 없다. 나의 엄마는 거짓을 주었지만 나의 참된 엄마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


  101장의 내용을 당신은 이해할 수 있는가? 유교 문화권에 사는 우리에게는 긍정할 수 없는 표현이다. 도올 김용옥은 "세속적 엄마가 문자 그대로 거짓을 준다는 뜻은 아닐것"이라고 설명했지만, 101장의 예수님 말씀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른 문화권에서 단편적인 말씀만이 기록되어 있는 도마복음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도마복음이라는 백사장에서 나의 인생을 함께할 조약돌 한두개를 주었다면, 나름 의미있지 않은가! 그래, 도마 복음과의 기나긴 여행이 끝났다. 이제 새로운 책을 찾아서 새로운 길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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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EBS CLASS ⓔ
강신주 지음 / EBS 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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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공기의 사랑"!! 이보다 적정 사랑을 잘 표한한 말이 있을까? 사랑이 고픈 이에게 한 공기의 사랑은 가장 최적의 사랑이다. 한공기의 사랑마저 받지 못한다면,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방황한다. 한 공기를 넘어 두공기, 세공기, 아니 그 이상의 사랑을 준다면 이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된다. 저자 강신주는 철학 강의를 하면서 철학의 원래 뜻이 '지에 대한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이중에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수차례의 강연과 그의 저서를 통해서 강조해왔다. 이제 그 결정판이 나왔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이 바로 그 책이다. 불교철학을 기반으로 김선우 시인의 시 8편을 캐스팅해서 강신주만의 설명을 했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학교 현장에서도 중요한 주제이다. '사랑'이 부족해서, '사랑'이 너무 넘쳐서 발생하는 학교현장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교사 다락방 "독서와 수업 사이"에서 이 책을 첫번째 읽을 책으로 선정한 이유이다. 그럼, 한공기의 사랑을 맛보러 가보자.

 

1. 사랑의 매는 존재할까?

일체개고(一切皆苦)! 사람은 태어났기에 고통을 겪는다. 삶이 곧 고통이라는 이 말은 불교를 염세주의적, 비관주의적 종교로 착각하기 만들기 좋은 단어이다. 저자 강신주는 웃음은 울음 뒤에 배우는 것처럼, 고통 뒤에 행복을 배운다고 말한다. 한 공기의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사라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고파진다. 배고픔의 고통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한 공기의 밥을 먹는다. 한 공기의 밥은 잠시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할뿐, 영원히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수많은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어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고통을 완화하면서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한 공기의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듯이 말이다.

현실은 행복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천국이라 호도하지 말자! 현실을 냉정하게 보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희망과 사랑을 품자! 싯다르타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면서도 그 고통의 현실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그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우리는 공감이라한다. 저자 강신주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이이라면 '사랑의 매'라는 논리를 들이대며 폭력을 합리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폭력에 익숙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개발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주변에는 폭력이 일상화되었다. 그리고 그 폭력을 합리화하는 논리에 나 자신도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었다. 동료 교사의 고통을, 학생들의 아픔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낀다면 폭력을 합리화하는 '사랑의 매'라는 표현은 존재할 수 없다.

()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행복과 자비와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 학교 현장에서 진정한 교육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감수성에서 출발해야한다는 화두를 던진다.

 

2. 지는 꽃은 가치가 없을까?

학생들 중에는 유독 청소를 싫어하는 녀석이 있다. "어차피 더러워질 텐데, ? 청소해요?"라고 묻는 학생에게 나는 말한다. "너는 어차피 배고플 텐데 왜? 밥을 먹니?" 그렇다. 우리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불교에서는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표현한다. 형성된 모든 것들은 소멸하는 법이다. 모든 것이 소멸하기에 모든 일은 부질없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는 지나친 염세주의이다. 변하기에, 영원하기에 우리는 지금 이순간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저자 강신주는 '조화''생화'를 예로 든다. 생화가 우리의 현실이라면, 조화는 이상화된 천국이다. 많은 이들이 우리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천국을 좋아한다. 천국이라는 논리에 매몰되어 오늘을 천국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당신은 조화와 생화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조화보다는 생화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라는 말이 있다. 참다운 불교의 진리를 담고 있는 우리 속담이다. 지극한 행복만이 있어 지지 않는 꽃만이 존재하는 천국보다는 힘겹게 꽃망울이 터지더니 활짝 핀 꽃이 행복하게 하늘거리는 현실이 좋다. 그리고는 이내 꽃이 떨어진다. 떨어질 꽃이기에 지금 활짝핀 지금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애절해 보인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해야한다.

아파마데나! '올바른 자각' 혹은 '올바른 지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래,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바라고 소중하게 간직하자! 작년에도 나는 학생들과 일 년을 함께 보냈다. 올해도 학생들과 일 년을 함께 보낸다. 그리고 내년에도 학생들과 함께 일 년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작년의 학생과 올해의 학생은 다르다. 올해의 학생과 내년의 학생은 다르다. 지금 이 순간 만난 학생은 내생에 유일한 올해 나의 제자들이다. 이들과 만나는 올해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이 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자!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아모르 파티", 이 순간을 잡으라는 뜻의 "카르페디엠"이라는 단어가 우리 가슴속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도 우리 세상의 유한함과 모든 것은 영원함이 없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은 우리에게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오늘 만나는 모든 이는 소중하다.

 

3. 교칙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할까?

'제법무아(諸法無我)'! 사물에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이 개념을 강신주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일화로 설명한다. 추운 겨울 혜림사에 단하스님이 묵게 되었다. 너무도 추워 단하스님은 목불을 도끼로 쪼개어 땔감으로 만들었다. 단하스님이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을 본 혜림사 스님은 화를 냈다. 그러자 단하스님은 "이 부처에 사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려고 태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혜림사 스님은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는가?"라고 내뱉었다. 그렇다. 목불은 나무일뿐 부처가 아니다. 목불에는 '자성'이 없다. 사물에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듯이, 우리에게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단지 수많은 인연들이 얽혀서 이루어진 관계일 뿐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고, 아들에게는 아들에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 그렇다면, 학생에게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는 학생을 위해서 만든 것이 학교의 교칙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을 위해서 만든 교칙이 본래 의도를 벗어나 학생이 교칙을 위해서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여학생의 교복 치마에 치맛주름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교칙은 학생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치맛주름을 없애는 것은 교칙을 위반하는 일이라고 단속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치맛주름을 없애는 것은 교복변형을 금지시키는 교칙을 위반했으니, 학생부장이 아침부터 열심히 여학생을 지도해야했다. 그런데, 학생에게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다면, 교칙에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으며, 교복에도 본래 주어진 속성이 없는 것이 아닌가? 교칙도 교복도 학생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학생이 교칙과 교복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되지 않은가? 교복 변형이 문제라면, 불편한 교복을 후드티와 같은 학생이 편하게 입고 다닐 수 있는 옷으로 변경하면 되지 않을까? 실재로 서울의 모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많이 입는 후드티를 교복으로 정해서 학생들에게 박수를 받은 사례가 있다.

여기서 나는 전율을 느낀다. '제법무아'라는 단어는 우리 교육현장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혁명적 사상을 담고 있었다.

 

4.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행복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은 바보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세상의 근심 걱정도 알지 못하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먹을 것이 자신의 입에 들어오면 마냥 행복한 바보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를 깨달은 싯다르타는 행복했을까?

나의 질문에 저자 강신주는 원효 스님을 소환한다. 원효는 고요한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부르고 요동치는 마음을 '생멸문'이라 부른다.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혹은 내부의 욕망에 의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한다면, 모든 갈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고요한 물과 같은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원효는 생멸문을 두개로 나눈다. 미숙한 생멸문과 성숙한 생멸문이 그것이다. 미숙한 생멸문은 나에 대한 고집 때문에 생기는 생멸문이다. 이에 반해서 성숙한 생멸문은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생멸문이다. 내부의 욕망과 집착으로 부글부글 끓던 마음이 생멸문을 거쳐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고통 받는 중생들을 보며 나뭇잎에도 파문이 이는 잔잔한 물처럼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그래서 진여문에 제대로 도달한 싯다르타는 다시 생멸문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스스로 파계승의 길을 선택하고 속세로 나아간 것이다.

교사 생활을 하다보면, 고고한 것처럼 보이는 교사가 너무도 험한 일을 많이 당한다고 절망할 때가 많다. 전두엽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고, 변연계가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충동적인 고등학생을 상대하다보니, 논리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을 때가 많고, '금이야 옥이야' 하며 애지중지 키운 자녀를 교사가 혼냈다고 막말을 해대는 막무가내식의 학부모도 보았다. 그럴 때마다. 속세의 때를 벗어 던지고 산사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속세의 때가 싫어 산사를 찾는다면 싯다르타는 아마도 나를 혼낼 것이다. 강신주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부처는 타인의 고통에 너무나 아파하고 타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이다." 참다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른 사람은 중생을 외면할 수 없다. 속세의 때가 없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깨달았다면 다시 속세로 나와야한다. 참다운 깨달음의 방법은 때가 가득한 속세에서 깨닫고 부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신주는 말한다. "자비가 아니라면 불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화이트헤드나 들뢰즈와 같은 서양의 철학자들은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에 만족하지만, 불교는 인연, 연기 등의 이론적 틀로 "자비"를 실천하라 말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인가!

 

5. 나쁜 인연에 대처하는 법은?

교사 생활을 하다보면, 유난히도 나를 괴롭게 만드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다. 다음해에는 그들과 만나기 싫기에 그 학생들과 함께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강신주는 나쁜 인연을 만나면 다시 수평선 너머로 배를 몰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새로운 인연을 만날 수 있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나쁜 인연에 길들여진 존재는 나쁜 인연에 안주하게 된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쉽게 길들여진다. 나도 나를 괴롭히는 인연을 쉽게 단절해버렸다.

 

그런데, 교사라는 직업은 반전의 연속이다.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학생과 학부모가 다음해에, 혹은 2~3년이 지나서 감사를 표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너무도 말썽을 부렸던 녀석들이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학교를 찾아온다. 그러면서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나에게 감사를 표한다. 유난히도 속을 섞였던 녀석들이 많은 해일수록, 그해 졸업생 중에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녀석들이 많다. 나쁜 인연으로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좋은 인연으로 성숙하는 경우가 교육 현장에서는 꾀나 있다.

싯다르타는 극단의 영원성이나 불변성에 빠지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편의 극단적 순간성에도 빠지지 말라고 가르친다. 지금 이 인연이 나쁜 인연이라고 혹은 좋은 인연이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지금 힘든 인연이라면 일단은 그 인연과 관계를 잘 마무리 짓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자. 그러나 나에게 힘든 인연이 성숙하여 좋은 인연으로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극단에 치우치기 쉬운 것이 우리의 인생사이다. 싯다르타는 그 극단을 경계했다. 성숙한다는 것은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6.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가?

학생을 상담하다보면, 진로를 두고 부모와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녀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고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가 이뤄주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모는 자녀를 하나의 독립적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시기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며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서고 싶은 학생과 자녀를 자신이 못한 일을 대신해주는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 사이의 갈등은 첨예하게 대립되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때로는 실업계 학교로 가기 위해서 교칙을 어겨 징계를 받는 경우도 보았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돌봄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라캉이 말했듯이,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부모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한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인으로 살기 힘들다.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부모와 대립하며, 때로는 퇴학을 선택하는 학생들은 하나의 인격체로 홀로서기를 선택한 존재들이다.

15년 전 D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해서 눈물 흘리는 학부모의 모습이 안타까워 문제 학생에게 물었다. ? ? 문제를 일으키냐고……. 어머니가 불쌍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자신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온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 퇴학당하겠다고 말했다. 놀란 나는 학생의 어머니와 면담하며, 실업계로의 전학을 권했다. 그것이 어머님과 학생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말했다. 어머님은 울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실업계로 전학을 보내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후, 학생은 퇴학을 당했다. 그 후로 3년여가 흘렀다. 그해 졸업식이 끝나고 홀가분히 집으로 오는데, 전화를 받았다. 그때 그녀석의 어머니였다. 선생님과 식사를 같이하고 싶다는 것이다. 녀석은 D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실업계에 진학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실업계 전형으로 대학에도 했다고 한다. 나의 조언이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고마운 마음에 전화를 한 것이다. 그 녀석은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많은 길을 돌아가야 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 녀석이 대견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들이 사실은 타인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네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다!! 임제스님의 법문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도 주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7. 아끼는 사람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끼는 사람을 아끼는 방법을 강신주는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처럼 보는 연습을 반복하자."라는 강신주의 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반려동물에게서 우리는 많은 기대나 보은을 원하지 않는다. 맛있게 사료를 먹고, 나를 위해서 웃음만 지어주길 기대한다. 때로는 집안에 똥을 누워도 탓하지 않는다. 특별한 보은을 바라지 않기에 반려동물 때문에 고통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녀를 사랑하면서도 무수히 많은 것을 요구한다. 학원을 보내고, 좋은 성적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를 한다. 이러한 사랑이라는 요구에서 불행이 시작된다. 이러한 사랑은 집착이 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아바타로 성장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강신주는 "아끼는 사람을 반려동물처럼 보는 연습"을 하도록 했나보다.

사랑한다면, 아낀다면, 우리는 건강한 사랑의 방법을 배워야한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존재이다. 더욱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게 사랑은 절대적이다. 농작물이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강신주의 표현대로 "아끼는 사람에 대해 우리 자신이 '한공기의 연'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을 채우지 못한다면, 아끼는 사람의 행복은 우리로 인해 파괴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이 힘든 가 보다. 학생이 자라기 위해서는 학생과 연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이 건강한 만남을 이뤄야한다. 교사는 그 인연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제자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나약한 존재가 교사이다.

 

교사 생활을 하기전, '사랑'이라는 뻔한 단어에 환멸을 느꼈다. 너무도 교과서적인 단어이며, 교사를 혹사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현장에서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무수히 많은 학부모를 만나면서 모든 문제는 '사랑'에서 발생하여 '사랑'으로 해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와 교사의 사랑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며, 부모와 교사의 건강한 사랑이 사태를 해결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학생은 사랑을 먹고 자라는 병아리들이다. 그러하기에 강신주 자자의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은 우리들에게 참다운 사랑에 대해서 고민하게 해준다. 심오한 불교 철학을 기반으로 참다운 사랑의 방법을 알려준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학교 현장의 많은 선생님과 학생들, 그리고 학부모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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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5-01 2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정성 가득 담긴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교직에서 치열하게 아이들을 사랑하시느라 애쓰시는 모습이 느껴지네요~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강나루 2021-05-01 21:17   좋아요 3 | URL
책읽은 감상을 두서없이 적은 것인데, 칭찬을 해주시니 쑥스럽네요....
감사합니다.^^

scott 2021-06-04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추카~*
교육 현장에 강나루님 같으신 분!이
계신 것만으로도 뭉클한 감동이 ^ㅅ^

강나루 2021-06-04 21:28   좋아요 1 | URL
과찬이십니다.
저는 평범한 교사일 뿐입니다.
scott님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6-04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1-06-04 21:28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초딩 2021-06-04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불금 되세요~~~

강나루 2021-06-05 04:43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초딩님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ookholic 2021-06-05 0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시원하고 즐거운 주말.... 하지만 천천히 지나가시길...^^

강나루 2021-06-05 05:56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bookholic 님도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하라 2021-06-05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강나루 2021-06-05 11:13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해요
이하라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래요^^
 
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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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벙커1'을 통해서 강신주를 처음 만났다. 그가하는 상담을 들으며 강신주라는 철학자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많아 살아본 할아버지도 아닌데, 상담 심리학을 정공한 사람도 아닌데, 일개 철학자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꿰둟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후, 강신주의 동영상 강의와 서적들을 살펴보며 그가 말하는 논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긍금했다. 지난번 강신주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위해서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 이어서 '철학 삶을 만나다.'를 펼쳐들었다. 강신주식 철학의 비밀을 이 책을 통해서 파헤치고 싶다. 


1. 강신주식 철학적 사고의 매력

  강신주가 쓴 철학책들은 쉽다. 대학에서 '철학 개론'을 들으며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도 않는데 시험을 보기 위해서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이 한 말들을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이 남는다. 대학에서 배운 철학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무조건 암기하는 탁월한 암기과목이었다. 이에 반해서 강신주가 말하는 철학은 우리 삶을 철학하게한다. 철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에서는 일상적인 우리 삶에서 어떻게 철학적 사유가 일어나는가를 풍부한 사례와 친절한 설명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왜? 이러한 철학 수업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쏟아냈는가?, 교수가 학생과 대화하기는 커녕, 교수 혼자 독백을 했가? 라는 질문이 연속으로 쏟아졌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낯설게 볼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3단 논법대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우리의 사유는 일어난다. 어찌보면 평범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의 사유에 강신주는 도끼를 휘두른다. "당연하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우리는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우리 딸들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가 내 옆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낯설게 보면서 소중함을 안다. 강신주가 다상담에서 "'내옆의 아내와 언제던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3단 논법대로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사유한다. 나의 행동과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3단 논법을 끌어들여합리화한다. 강신주의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인간은 3단 논법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뇌 과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역사적 사례를 소환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을 철학적 사유를 하지 않았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철학적 사유의 위대함은 '우연성의 철학'과 '필연성의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일들이 유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유와 신과같은 존재의 계획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유의 대립이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를 발전론적으로 보고, 역사의 필연성을 밝혀내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무척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문들을 우수한 논문으로 대우한다. 반면 우연에의해서 발생한 사건들의 나열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역사적 사유를 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라고 교육받았던 나로서는 세상은 필연적이기 보다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주장이 낯설기는하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담준론에 갖힌 사유가 아니었다. 우리 삶을 철학하게하는 소중한 지혜였다. 


2. 강신주의 철학을 넘어서.

  강신주는 '사랑과 가족',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를 낯설게 만든다.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적 사유를 유발시킨다. 

  우리의 사랑은 남녀가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완성된다는 헤겔식 철학의 고정관념에 가깝다. 반면, 강신주는 바디우의 철학을 끌어들여 '둘'의 사랑을 '둘'로 정의 내린다. 둘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눈부처'를 보면서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 우리는 '둘이 하나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에 갖혀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에 항상 맞짱구만 칠수는 없다. 나의 전공이 역사이다보니, 강신주가 근거로 제시하는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강신주는 '국가'도 낯설게 본다. 인디언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로 묘사하며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디언 들에게 서구 문명의 총아인 '총'을 주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 재레드 다이야몬든 교수가 말했듯이, 태평양의 부족들에게 총기를 주자 그들은 잔인한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대표적인 왕국이 하와이 왕국이다. 물질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문명화로보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그들의 물적 토대가 강력한 집권자가 나오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원시공산사회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국가에 확장시켜 인질=국민, 국가=인질범이라는 도식으로 국가를 낯설게 본다. 강신주식 사고가 무척 신선해보인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개인의 생존은 위태롭다. 시리아 내전을 본다면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곳의 주민들은 생존 자체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시리아를 탈출해서 유럽으로 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독재자가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생명을 위협받는 무질서보다는 안정된 독재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국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국가는 수탈과 자본에 따른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민낯을 보여준다. 강신주의 글이 이해가 가면서도 불현듯 반론을 제기해본다. 국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국가는 개인을 일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할까?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보라! 국가라는 시스템이 있기에 개인은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않는가? 강신주의 지적대로 국가가 개인을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그러한 국가의 속성을 개인이 이용해서 복지의 혜택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있지 않은가! 공기의 매서운 저항을 이용해서 우리가 행글라이드를 보다 재미있게 탈 수 있듯이, 국가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 삶을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특정 지배층이 국가를 이끌어가던 시대라면 강신주의 주장은 정확히 들어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며 국가를 제대로 움직인다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은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가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철학적 사유가 없어지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라는 대답이 기억난다. 그때는 '철학적 사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철학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말들을 외우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난다.'라는 책을 읽으며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철학이 우리 삶과 전혀 관계 없는 학문이기 보다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한 학문임을 강신주의 책 '철학 삶을 만난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하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입문서로 읽는다면 삶이 풍성해지리라는 믿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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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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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그의 책을 처음 읽었을때, 그로부터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자료를 근거로 탄탄한 근거를 제시하는 박노자의 글에 기가 질렸다. 고정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박노자의 언변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도덕경'을 쓴, 노자가 살아돌아온 것관 같은 착각을 한다. 그러나 세월은 흘렀다. 그 흐름 속에서 박노자의 책을 어느덧 7권째 읽었다. 그러면서 박노자의 고정된 틀이 보이기 시작했다. 신선했던 그의 글이 이제는 신선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박노자의 전략이 나의 눈에 파악되면서 이제 박노자의 주장에 나만의 반박을 할 수 있는 내공이 쌓였다. 자, 박노자의 글과 한벌 놀아보자!


1. 국가는 절대악인가?

  박노자의 사상적 기반은 마르크시즘을 기반으로한 공산주의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사회가 도래한다면 국가는 소멸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공산혁명을 일으킨 나라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또다른 억압의 도구가 되었다. 현실에서 국가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역할이 중요시되고 있다.그런데, 박노자는 '국가'라는 존재를 '악'으로 대하고 있다. 


  "모든 폭력성을 대변하는 국가라는 지배계급의 기구는 당분간 존재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으로 볼 수 있어도 절대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254쪽


  국가를 '필요악'으로 보는 박노자의 견해를 우리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박노자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2천년 동안 국가를 읽고 유대인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민족에게 '국가'라는 존재에 대한 충성심을 바랄 수 없다. 유대인에게 이스라엘을 제외한 국가라는 존재는 그져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배제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그에 비해서, 우리에게 국가라는 존재는 애증의 존재였다. 조선시대 피지배인에게 국가는 나를 착취하는 기구이기도 했지만, 나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존재였다. 임진왜란 시기, 의병이 일어났던 것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항일 독립투쟁에 참여한 것도, 모두가 나의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나라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노자와 우리는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진 존재이다. 그러하기에 박노자에게 국가란 폭력과 착취의 기구였으며, 스쳐지나갈 수 있는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국가는 나를 억압하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없어지면 생존권이 위협받는 애증의 존재였다. 바꾸고 싶어도 쉽게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박노자에게 한마디 더하고 싶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 만들어가고 있다. 기득권층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도전하며 촛불을 들어 어둠을 몰아내는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 어찌 대한민국을 폭력적 존재! 억압적 존재라 단정할 수 있겠는가? 국가가 억압적 존재라면 국가를 문명화시키는 것도 나라의 주인인 깨시민들의 의무일 것이다. 


2. 호국불교는 청산의 대상인가?

  폭력에 몸서리를 치는 박노자는 국가 폭력의 도구인 '군대'라는 존재 자체 또한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부처님의 제자인 승려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했다하여 목탁을 버리고 칼을 들고 일어서는 행위를 박노자는 반불교적 행위로 규정한다. 


  "'악이 선이 되고 선이 악이 되는' 도덕적인 상대성 논리다. 언뜻 보면 불교를 왜곡하는 논리로만 보인다. 중생에 대한 살해가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생에 대한 살해가 중생 교화로 둔갑될 수 있기 때문이다."-264쪽


  한국의 호국불교는 박노자의 지적대로 한국불교가 청산해야만하는 대상일까? 폭력은 칼에 비유할 수 있다. 산적의 칼은 힘없는 자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도구이지만, 어머니의 칼은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도구이다. 국가 폭력의 도구인 군대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지배자들이 피지배층을 수탈하기 위한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군대는 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반면에 외적의 침입에 대응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면 군대는 우리 생존의 파수꾼으로 존재하게 된다. 도구의 성격은 도구의 쓰임새에 따라 달라진다. 도구의 악한면만에 주목하여 도구를 버린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금찍할 것이다. 

  박노자에게 질문해보자! 박노자 당신이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승려였다면, 왜군이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을 유린하고 코를 베어가고 노예로 끌고가는 현실을 보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칼을 들고 불쌍한 중생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것인가? 

  아무리 고고한 인품을 가지고, 고고한 삶을 살고 싶어도 현실의 삶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때가 많다. 내가 평화를 사랑하며 사랑과 자비의 말만을 하고 싶어도, 우리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침략세력이 우리를 위협한다면, 우리는 고고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현실을 떠난 이상론은 말그대로 이상일 뿐이다. 

  물론, 호국불교의 성격이 일제 강점기 친일불교로 변질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대동아 성전'으로 미화하며 반민족적 행위를하는데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호국불교'라는 칼의 칼자루를 일제가 쥐고 한민족을 위협하는 부작용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불교가 친일의 어두운 그림자를 반성하고 뉘우치면서 해결해야갈 문제이다. 


3. 모든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할까?

 불교의 계율을 모든 불자들은 반드시 지켜야할까? 아니, 지킬 수 있을까? 살생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로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명도 귀하게 여긴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먹지 말아야한다. 동물과 식물을 희생시키지 않고 인공적으로 합성한 영양제만 먹고 사는 경우를 제외하고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살생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박노자는 모든 불자에게 계율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식과 '나와 남에게 진정한 이익은 무엇인가'에 대한 투철한 문제의식으로 계율을 실천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아니겠는가. 아마도 계율과 함께 사회를 비판적으로 해부할 수 있는 시각을 내면화한다면, 우리 사회의 그토록 다양한 분야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계율을 어기는 현실들이 결코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138쪽


  박노자는 계율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원리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3.1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이 달성될 수 없음을 깨닫고 의열투쟁에 참여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상대가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우리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어찌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계율은 해탈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올 김용옥의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라는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두스님이 개울을 건너는데 한 여성이 불어난 물을 건너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이든 스님이 그 처자를 업어 개울을 건네주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스님이 이를 탓하자, 나이든 스님이 "나는 그 처자를 게울에 건네주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그 처자를 떠나 보내지 아니하였구나!"라고 말했다한다. 여성을 가까이해서는 안되는 것이 불교의 계율이다. 그러나 이 계율은 승가 조직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개울을 건너지 못해서 어쩔줄 모르는 처자를 그냥 지나치는 것보다 그녀를 도와주는 것이 참다운 선을 행하는 일이다. 

  콜버그의 도덕성 발달 단계 이론을 통해서도 박노자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다. 콜버그는 도덕성 발달단계를 6단계로 나누었다. 그중 4단계는 법과 질서 중시, 5단계는 사회계약 중시, 6단계는 보편적 윤리를 중시하는 단계이다. 박노자는 4단계 법과 질서를 중시여기는 수준에 고착되어있다. 불교의 계율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한글자 한토시도 고칠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법과 질서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며, 이러한 법과 질서가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5단계로 이행될 수 있다. 한시가 급한 응급환자를 태운 구급차가 신호를 지켜야하기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데도 붉은신호 앞에 멈춰선다면, 생명을 살리는 더욱 커다란 가치를 잃어버린다. 박노자여! 이제는 사고의 폭을 넓힐때가 되지 않았는가?


4. 괴력난신을 어찌하오리까?

  박노자의 눈에는 대입기도를 드리는 부모의 모습도 아힘사(비폭력)의 원칙에 어긋난 것으로 보인다. 내 자녀가 합격하면 누군가의 자녀는 떨어진다는 논리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불상과 불화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도 문제시한다. 철두철미하게 부처님이 말씀하신데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박노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국가와 폭력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자리잡고 있다. 

  박노자의 말대로라면, 대학에 합격하는 행위자체가 불자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 된다. 불자들은 모두 속세를 떠나서 살라는 말인가? 글쎄, 박노자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불상과 불화를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는 있다. 부처의 말씀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불상과 불화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야만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노자의 말대로 모든 불상과 불화를 사찰에서 없애버려야할까? 이러한 태도는 기독교인들이 우상이라고하면서 불상을 회손한일과 무엇이다를까? 불상과 불화를 예배의 대상으로 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가 아닐까? 훌륭한 불교 예술 작품으로, 후세에 전해주어야할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예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생들의 마음이 잘못된 것이지, 불상과 불화, 그 자체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의 마음에 쌓인 헛된 바람이 불상과 불화를 보고 미혹되는 것이지, 불상과 불화가 중생을 미혹시키는 것은 아니다. 

  신통력 있는 스님이 인정받는 현실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박노자의 말대로 신통력 있는 스님을 찾는다면, 불교가 무속신앙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불교는 고차원적인 철학적 종교이다. 

  불상과 불화에 대해서는 관대한 생각을 가진 내가, 신통력을 가진 스님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박노자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다수가 가질 수 없는 능력의 보유 그리고 다수의 상식을 초월하는 '기적'의 존재를 주장하는 일은 결국 다수에 대한 권위주의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로 쉽게 연결된다는 사실이다."-106쪽


  부처님의 제자가 신통력을 앞세워 부처를 부정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박노자의 경고는 깊이 있게 되새겨 보아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 한국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중에서 여성이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없기에 남성으로 다시 태어나서 성불한다는 '변성성불론' 비판, 초기 불교의 정신이 깃든 '산중공의'의 현대적 부활을 외친 부분에 깊은 공감을 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큰 문제점은 참여불교가 너무도 미약하다는 점이다. 참여불교로 나아가지 못한 대표적 예가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이 정부의 수배를 피해서 조계사로 들어갔지만, 한상균 위원장을 품어주기는 커녕, 조사계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김수한 추기경이 명동성당으로 온, 민주 시민들을 품어주었던 사실과는 너무도 대조를 이루는 사건이었다. 현실과 유리되어 기득권 세력과 손을 놓지 못한다면, 한국불교는 민중속에 뿌리 내릴 수 없다.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아 불교의 외형을 번성시키는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날 때이다. 그래서 박노자는 "이제는 짐이될 뿐인 전통들을 폐기해야 살아 숨쉬는 불교로 거듭날 수 있다."(287쪽)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박노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우리의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나 또한 박노자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해본 것이다. 박노자의 새로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도 박노자와 깊은 대화를 할 것이다. 그의 책을 읽을 그날을 고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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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루님 서재방에 2021년 연하장 놓고 가여 ㅋㅋ

새해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021년 신축년
┏━━━┓
┃※☆※ ┃🐮★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강나루 2021-01-01 0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님도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중용한글역주 - 도올 선생의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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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 1948년 6월 14일생으로 올해 나이 72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저술활동과 강연을 하는 철학자이다. 일생을 고전과 힘든 씨름을 하던 그가,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책 '논어 한글 역주'를 시작으로 '대학 한글역주'를 읽고, '중용 한글역주'를 읽었다. 고전은 단번에 읽어 버리기 힘든 책이다. 일명 '사서'로 불리우는 책들은 하루 한줄씩, 일주일에 한줄씩 적어가며 음미해야 그뜻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책에 메달려서도 안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인생을 음미하며 곱씹어봐야 겨우 그 의미와 맛을 느낄 수 있다. 유튜브에서 '도올-중용, 인간의 맛(1~36강)'을 보면서, 책을 함께 읽었다. 도올의 '중용한글역주'를 읽으며 놀라운 것은, 고전에 대한 학설도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토오 진사이의 중용 3분설, 타케우찌 요시오의 중용2분설을 비롯한 기존의 정설은 '중용'이 자사의 초간 이후에, 후대학자들이 제1장과 21장 이후를 추가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덤에서 발견된 곽점본 죽간이 출현하면서 기존학설들이 무너졌다. 도올 김용옥은 '중용한글역주'를 저술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학설들을 종합해서 자신만의 관점을 정립하고 중용을 해설하였다. 끊임 없이 절차탁마하는 노학자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낀다. 도올 김용옥! 그가 '팔만대장경 판본보다 중용한줄이 낫다'라고 극찬한 중용의 맛을 맛보자.


1. 민폐 종교인에게 경종 울리기.

우리는 좀비들과 살고 있다.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일부 목사의 독단적인 말을 무조건 추종하는 좀비들이 모여서 코로나19를 옮기는 숙주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에서 집회를 금지시키자,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다며 발악을 한다. 놀이 공원은 허용하면서 종교집회는 금지한다며 생떼를 쓴다. 중용 28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왈 우이호자용천이호자전생호금지세반고지도여차자재급기신자야(子曰 愚而好自用賤而好自專生乎今之世反古之道如此者災及其身者也,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려 하고, 신분이 낮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 지금 세상의 법도로 살고 있으면서도 옛날의 도로만 돌아라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하며, 현정권을 비판한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황당한다. 한예로 문재인 대통령이 금20톤을 뇌물로 받았다.라는 내용은 너무도 황당하다. 우리 한국은행에 있는 금보다도 더 많은 금을 물리적으로 가지고 있을 수 없음을 그들은 모르고 있다.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며, 행동을 제멋대로 하고, 민주 정권 시기를 살면서 깡패가 활개치는 자유당 정권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려한다. 결국 그들에 의해서 코로나 19 재앙이 그들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도 미친다. 

  그들은 또 말한다.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나는 그들에게 유학의 "예법"을 배우라고 말하고 싶다. 


  "공자가 말하는 "예법"이나 제식은 현재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류의 교리가 말하는 제식이 아니다. "예법"은 "예배"가 아니다. 모든 "예배"란 결국 "귀신에 대한 복종과 찬미와 희생"을 의미한다. 유교의 "예"에도 "배"는 있으나, 그 "배"는 신 앞에 무릎을 꿇는 "절"이 아니라, 신에게 경외감을 표현함으로써 신을 차단시키는 인문의 결단이다. "예법"은 신에 대한 "신앙"을 유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사이에 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주대의 예법 사회가 진행되어도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문제가 되는 사회병폐는 일체 발생하지 않았다. -123~124쪽


  원시유가에서는 '교회가 교회를 탄압'하는 잘못이 벌어지지 않았다. 신에게 경외감을 표현하고, 신에게 거리를 확보한다면,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는 서양 중세의 병폐는 없었을 것이다. 중세시기 흑사병이 전유럽을 휩쓸고 다니는데도 사람들은 교회라는 밀폐된 공간에 모여서 구원을 빌었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서 흑사병은 더 쉽게 전파되었고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일부 교회의 대면예배와 소모임이 코로나 19를 전파 시키고 있는 현실은 중세 흑사병의 유행과 너무도 유사하다. 그들은 "예배"가 아닌, 유교의 "예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일 것이다. 


2. 못난 정치인에게 경종 울리기

  적폐세력들이 개혁세력을 비판하는 아이런이한 정치현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독재세력들이 하던 방식으로 검찰권력과 국정원, 경찰 등의 권력기관을 이용해서 폭압 통치를 했다면, 찍소리 못하고 숨죽였을 세력들이, 민주세력이 집권하면 민주주의를 악용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인권과 자유, 민주주의를 외친다. 민주적 헌법에 의해서 국가조직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적폐세력이 집권하면 민주적 시스템이 망가진다. 민주 세력이 집권하면 그들은 민주적 시스템을 이용해서 민주세력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 중용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왈 문무지정 재방 기인존즉기정거 기인망즉기정식(子曰 文武之政 布在方策 其人存則其政擧 其人亡則其政息)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문왕과 무왕의 훌륭한 정치는 목판이나 간책에 널브러지게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를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는 흥할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는 쇠락하고 말 것입니다." -중용 20장


  훌륭한 정치에 대한 책들이 널브러져 있다 할지라도, 그 가치를 실현할 사람이 있으면 정치는 흥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정치는 쇠락하게 된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서 사회와 국가가 움직여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스템이 갖춰졌다한들, 이를 현명하게 움직일 사람이 없다면, 민주적 시스템은 쉽게 붕괴한다. 적폐세력의 못난 행동에 두눈 부릅뜨면서 감시하는 깨시민이 되어야한다. '깨어있는 참된 시민'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정치인을 뽑는 현명한 투표가 행해져야한다.

  깨어있는 백성, 깨어있는 시민들이라면,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사탕발림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많이 배웠다고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이 배우지 못한 자라할지라도, 인생의 지혜를 갖춘자라면 몸으로 참된 정치인과 어리석은 정치인을 구분할 수 있다. '중용한글역주'에 소개된 '회남자'의 일부분을 살펴보자. 


 동언이신 신재언전야(同言而民信 信在言前也동령이민화 성재령외야 (同令而民化 誠在令外也) 똑같은 언어로 말을 해도 백성들이 그 것을 믿는 것은 그 믿음이 바로 언어 이전에 있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내리는 똑같은 명령을 내렸는데도 백성들이 그것을 받아들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그 지도자의 성의가 그 정령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234~235쪽


  아무리 사탕발림말을 국민에게 한다할 지라도 현명한 국민은 적폐 정치인들에게 믿음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바보 노무현'과 그의 친구를 지지하는 것은 '바보 노무현'과 그의 친구들의 말 이전에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민주세력이 보여주었던 '성의'가 너무도 감동적이기 때문에 민주세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적폐세력이 뭐라해도 그들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난 10년 동안 보여준 적폐세력의 막장행동 때문이다. 말보다는 '정성(誠)'과 '애정(情)'이 먼저라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적폐세력은 명심해야할 것이다. 

  중용에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세력을 배려하는 말도 있다. 중용 20장을 보자. 


 성신 유도 불명 호선 불성호신(誠身 有道 不明 乎善 不誠乎身矣)자기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방법이 있으니, 선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몸을 성실하게 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중용 20장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해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할 수있다. 갈피를 못잡고 있는 수구세력은 사회가 원하는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있다. 일정한 목표없이 민주세력을 물어뜯고 흠집내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몸을 성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선 수구세력은 사회의 '선'을 명료하게 인식해야한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할 수록 그들은 자신의 몸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사회의 '선'을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려 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적폐세력일 수 없다. 수구세력이 적폐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대열에 참여하길 바래본다. 


3. 배우고 가르치는 자에게 경종 울리기

  유학은 교육을 강조한다. 중용에도 학문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안내하는 글이 있다. 


 박학지심문지 신사지 명변지 독행지(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널리 배우십시오. 자세히 물으십시오.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분명하게 사리를 분변하십시오. 돈독히 행하십시오. - 중용 20장


  학문을 배우면서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며, 사리를 분명하게 판단하고, 돈독히 행하는 자세야 말고 참다운 배움의 자세이다. 학급의 급훈으로도 손색없는 명문이다. 

  그렇다면,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좋은 글귀는 없을까? 중용 22장에 교사들이 가슴에 담으면 좋은 글귀가 있다.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능진기성 진인지성(能盡其性則 能盡人之性 )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이라야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자기의 타고난 성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게 되어야 타인의 성을 온전히 발현케 할 수 있다. -중용 22장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신을 갈고 닦에야한다. 교사는 자신이 타고난 재능을 온전히 발현해야, 학생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현시킬 수 있다. 못다핀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자신의 재능을 발현시키지 못한 교사는 학생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현시킬 수 없다. 교사가 온전히 자신의 재능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온전히 발현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부단히 절차탁마해야한다는 말이다. 아무리 탁월한 재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열심히 재능을 가록 닦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다. 옥을 갈고 쪼듯이 자신의 재능을 계발하고 부족한 점은 채울 때만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다. 

  중용14장에는 교사와 학생 모두가 가슴속에 새겨듣는다면 좋은 글귀도 있다. 


  정기이구어인즉무원(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 상불원천(上不怨天) 하불우인(下不尤人)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치 아니 하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아니 한다.-중용 14장, 391쪽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행이나, 자신의 잘못을 남탓으로 돌린다. 때로는 하늘을 원망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발동하는 방어기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의 불행이나 잘못을 외부에 돌리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것이다. 그래서 중용에는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또한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타인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을 절대 존재에게 돌리거나, 자신보다 힘이 약한 아랫사람에게 돌리지 않는 유교 철학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 학교 현장의 교사와 학생이 이러한 마음 가짐을 가진다면, 학교는 보다 즐겁고 아름다운 곳이 될 것이다. 


4. 세계 정치인들에게 경종 울리기

  트럼프라는 세계에서 가장 별난 정치인이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이 무섭게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생각하며 미리 견제를 하고, 중국은 발톱을 숨기고 힘을 키우는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벗어나,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대국굴기(大國崛起)'를 하려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결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정치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있는 글귀가 중용에 있다. 


  후왕이박래 소이 회제후야(厚往而薄來 所以懷諸侯也) 가는 것은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은 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제후를 회유하는 것이외다. - 중용 20장, 509쪽

  

  남녀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베풀어야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가는 것이 후해야 오는 것이 후할 수 있다. 중국과 미국이 후하게 주고 박하게 받으려하지 않고, 서로 작하게 주고 후하게 받으려 한다면 두세력 사이의 불화는 끝이 없을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를 살았던 공자와 공자의 손자 자사가 추구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더 갖으려는 욕심보다, 보다 많이 배풀려는 풍성함이 이루어낼 수 있다. 

  유교의 황금률이라할 수 있는 문장을 살펴보면, 중국과 미국이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시제기이불원 역물시어인(施諸己而不願 亦勿施於人) 자기에게 베풀어보아 원하지 아니 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지어다. - 중용 13장, 353쪽


 이 문장은 '논어'에도 실려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 하여 이를 남에게 강요한다면 이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 타인에게 폭력을 행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이 가진 물질문명을 선한 것으로 여기고 타문화를 야만적으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자신의 문화를 '글로벌 스탠다드'라며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반면, 유가에서는 자기에게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아니하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말라한다. 내가 싫은 것은 타인도 싫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이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강요하지 않았다고해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이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문화를 절대선으로 여기며 강요한다면 이는 새로운 문화 제국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용'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물병육이불상해 도병행이불상패(萬物竝育而不相害 道竝行而不相悖) 저 대자연에 피어나는 만물들을 보라! 저 만물들은 서로 같이 자라나면서도 서로를 해침이 없다. 저 대자연을 수놓은 무수한 길들을 보라! 저 길들은 서로 같이 가면서도 서로 어긋남이 없다. - 중용 30장, 608쪽


  불교의 화엄세상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광활한 들판에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장엄하게 제각각 피어있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화엄의 세계이다. 놀랍게도 '중용'에도 그 화엄의 세상을 노래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대자연에 피어난 수많은 꽃과 풀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수많은 세상의 길들이 서로 어긋나지 않은 세상! 바로 그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이상 세계이다. 

  우리 세상이 이러한 화엄 세상이 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서로 못난 것도 없으며, 잘난 것도 없다. 제각각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수놓으면 된다. 미국을 따를 필요도 없으며, 중국을 따를 필요도 없고, 나와 같아지라 강요하지 않는 세상!! 그것이 바로 화엄 세상이다. 어떠한가! 시진핑과 트럼프는 화엄세상을 이땅에 만들 용의가 없는가?


5. '중용'에 경종 울리기

  '중용'은 좋은 고전이다. 그러나, 고전의 모든 부분이 현대 사회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고전이 만들어지던 시기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한 부분도 엄연히 존재하기 대문이다. 고전을 맹종하고 고전에 대한 비판적 수용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른 도그마에 갖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중용'이 좋은 고전이기는 하나, 우리 삶에 적합하지 못한 구절들을 살펴보고 현대적 의미에 맞도록 새롭게 해석해보자.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군자지도사 ''미능일언 (중략)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소구호신 이사군 미능야) 군자의 도는 넷이있구나, 나 구는 그 중 한가지도 능하지 못하도다! (중략)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 나는 이것에 능하지 못하도다. -중용 13장, 364쪽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긴다면, 제대로 국가가 잘 통치될까? 임금이 신하에게 요구하는 것은 절대적 복종일이다. 선조처럼 백성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왕권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임금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다면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수 있을까? 또한 신하는 특권층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옹호하며 백성들의 삶에 반하는 정책을 입안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대되는데 10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기득권층으로 대표되는 신하들과 조선의 양반 지주들의 반발 때문이다. 요즘, 사법부의 사법농단에 대한 제대로 된 법의 심판이 이뤄지지 않는 것도 사법부가 특권 세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검찰개혁이 이렇게 지지부진한 것도 검찰이 특권세력화 되었기 때문이다.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긴다면, 기존의 특권세력이 이익은 증대되겠지만,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수정해야할까? '백성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잘 섬겼는가?(所求乎民 以事君)으로 수정해야한다. 나라의 기반인 백성의 마음으로 임금을 섬겨야 나라가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유효한 문장이 될 것이다. 


 去讒遠色 賤貨而貴德 (거참원색 천화이귀덕) 所以勸賢也 (이권현야) 모함하는 이들을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현인을 권면하는 것이외다.-중용 20장, 508쪽


  재물을 낮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김은 현인을 권면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이의를 달아본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재문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 즉, 돈을 귀하게 여긴다.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절대빈곤의 상태에 빠지면, 덕을 갖춘 선비로서의 품위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덕'과 '재물'을 대비시켜 마치 '덕'과 '재물'이 상극인 것처럼 표현한 것은 오늘날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덕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재물에 노예가 되지 않고, 재물에 주인이 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로 수정해야한다. 돈에 노예가 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삭막해질 것이다. 그러나 돈에 주인이 된다면, 돈을 의로운 곳에 쓰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돈을 더러운 것으로 여겨 가난에 허덕이기 보다는 돈에 주인이 되어 돈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해야한다. 


  仁者人也 親親爲大 (인자인야 친친위대) 인이라는 것은 발음 그대로 인입니다. 사람의 근본바탕의 감정이지요. 인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용 20장, 478쪽


  '親親爲大 (친친위대)'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친족을 친하게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가장 친근한 사람을 친근하게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 혈연을 중시여기는 우리와, 관시를 중시여기는 중국 사회의 모습이 '親親爲大 (친친위대)'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학연과 지연, 혈연을 중시여기는 우리의 풍토가, 각종 불합리한 결과로 이어지는 결과가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중용의 여러 문장 중에서 우리가 이부분을 가장 유의해서 읽어야한다.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하는 것과, 친하다는 이유로 각종 불합리한 특혜를 준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이야기이다. 친함이 지나쳐, 불합리한 특혜가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는 '親親爲大 (친친위대)'를 주의해서 해석하자.

  '중용'의 일부 문장이 현재 우리의 삶과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 있지만, 놀랍게도 현재에도 유효한 문장이 많다. 그중 한문장을 살펴보자. 


 군자지도 조단호부부(君子之道 造端乎夫婦) 기지야 천지(及其至也 察乎天地) 군자의 도는 부부간의 평범한 삶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지는 것인, 그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에 꽉 들어차 빛나는 것이다.-중용 12장, 346쪽


  보통 유학이 여성을 비하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논어'에도 소인과 여자는 다루기 힘들다는 공자의 말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중용'에는 '부부'를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시작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조화로운 관계가 군자의 도가 시작되는 시초라는 말은, 독신을 사제의 조건으로 여기는 타종교와는 대조적인 부분이다. 음과 양의 화합과 조화를 추구하는 유교와 달리, 일부 종교에서는 본성과는 배치되는 독신을 강요한다. 참다운 깨달음은 부부의 인연을 맺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니 유교의 합리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도가에서 은거하는 방법중에서 산속에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는 것보다, 군중 속에서 은거하는 것을 가장 높은 경지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부부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이룬는 것을 중시여긴 점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유학이 여성 비하적이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용'은 4서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경전으로 알려져있다.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이요 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요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니라"라는 장엄한 문구로 시작하는 '중용'은 불교와 같은 고차원적 철학서적보다는 읽기가 약간 수월했다. 이 책을 읽을 때 박학다식한 도올 김용옥의 풍부한 설명이 '중용' 이해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때로는 도올이 인용한 많은 책들이 중용의 글귀보다도 더 가슴에 와닿았다. 특히 '순자-불구'편의 한구절이 인상 깊다.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높음을 예찬하고, 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 후덕함을 존숭한다. 사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의 예견된 움직임에 따라 삶을 설계한다. (天不言而人推高焉(불언이인추고언地不言而人推厚焉(지불언이인추후언), 四時不言而百姓期焉(사시불언이백성기언).)"


 대자연은 아무런 말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대자연을 숭상하고 그에 맞춰 살아간다. 사람도 그와 같은 도량을 갖춘다면 주변 사람이 추앙하지 않겠는가! 스승이나 부모가 대자연과 같이 살아간다면, 학생들과 자녀가 참다운 사랑을 받으며, 참다운 사랑을 베풀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중용'을 덮으며,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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