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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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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에드워드 윌슨은 consilience라는 말을 부활 시켰다. 그의 제자이자 이 책을 번역한 최재천은 책속에 잠들어있던 통섭이라는 단어를 시간의 먼지를 털어내고 consilience의 번역어로 사용했다. 두툼한 책장을 넘기며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화두는 '과연 통섭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었다. 큰스님이 행자에게 던지는 화두와 같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었다. 


  이책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섭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문학을 전공한 나에게는 에드워드 윌슨의 이 주장이 자못 오만하게 들렸다. 


  "교양과목이 대학의 핵심 교과과정으로 자리잡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464쪽


  시대가 변하니 대학의 핵심과목도 변해야한다. 아니, 기존의 교양과목이 변해야한다. 유시민이 '문과공'이라는 책을 쓰고 나서 각종 유튜브에 나와서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하지 않기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한다는 내용의 지적을 했다. 유튜브에서 비춰진 유시민의 발언은 인문학보다 과학이 우선한다는 인문학 전공자의 항복선언이었다. 글쎄, 인문학자가 과학을 공부해야한다는 명제는 깊은 공감을 하면서도 그의 그러한 모습은 좋와보이지 않았다. 

  통섭의 당위성에는 공감하지만 전공하나도 제대로 알기 힘든 상황에서 어찌 과학까지 공부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천재일 수는 없지 않은가? 라는 질문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화를 알기 위해서 뇌과학과 신경과학 유전학을 먼저 설명하는 에드워드 윌슨의 글을 읽으며 그가 말하는 통섭이 만물박사가 되라는 것은 아님을 알았다. 사실 만물박사가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기에 유한한 시간속에서 배울 수 있는 학문의 양도 제한적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품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통섭을 필요하다.

  인문학 내에서도 같은 사건을 역사학과 정치학이 달리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서로의 연구 방법론이 다르다보니, 대화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학문의 장벽을 넘나들며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이 필요하다. 그 장벽을 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험난할 것이다. 그렇지만 올바른 진리를 찾기 위해서 인문학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류를 연구했듯이, 인문학자는 자신의 주장이 뜬구름이 아닌 대지에 뿌리박기 위해서 과학을 공부해야한다. 

  인문학만이 과학을 필요로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과학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괴물을 만들어냈다. 우리 과학자가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문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이라는 괴물이 폭주하지 않고 인간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인공지능 개발 윤리가 필요하다는 외침이 절실하게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서 '의지적인 진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 과학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해있다. 유전자 조작,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을 목도하며 과학자들이 윤리적 철학적 판단력이 절실하다. 과연 우리 과학자들은 윤리학과 철학을 통섭하며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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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4-05-2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괄적인 이론을 형성할 때 서로 다른 다양한 분야의 원리를 서로 연결하는 것>
혹은
<특히 과학과 인문학의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 간의 합의>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Consilience 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William Whewell 이었습니다.

과학과 역사에서 일관성(증거의 수렴 또는 증거의 일치),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출처의 증거가 강력한 결론에 ‘수렴‘할 수 있다는 원칙입니다.

이 Consilience 의 개념은 과학 철학자들(Philosophers of science) 에 의해 널리
논의되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한 용어였다가,1998년 저술가이자 생물학자인
E. O. 윌슨의 저서인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 <통섭: 지식의 통합> 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문화적 간극을 메우기 위한 시도로 사용되며 알려졌습니다.

윌슨은
˝the humanities, ranging from philosophy and history to moral reasoning,
comparative relig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arts,
will draw closer to the sciences and partly fuse with them˝

“철학과 역사, 도덕적 추론, 비교 종교, 예술 해석에 이르는 인문학이 과학과
가까워지고 부분적으로 과학과 융합할 것”이며, 이러한 융합을 통해 과학과
과학적 방법이 물리적 현상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지침을 제공하고
모든 진리의 궁극적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강나루 2024-05-26 14: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 네요

Jeremy 2024-05-26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조>에서 <부활> 로 바로 본문 고치셨군요.
 
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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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흡연하지 않습니다. 그저팔 뿐이지요. 우리는 그 권리를 젊은이, 가난한 사람, 흑인 그리고 멍청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둡니다."-31쪽


  담배회사 알 제이 레이놀드의 광고모델로 활동하던 데이비츠 괴릴츠가 흡연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해서 사장이 한 답변이다. 담배를 피는 당신은 알 제이 레이놀드 사장이 말한 부류 중에서 어느 부류에 해당되는가? 젊은이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흑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멍청한 사람인가? 당신에게 담배를 팔면서도 담배회사 사장은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라는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담배를 팔기 위해서 담배회사들이 펼치는 사악한 저주가 묻어있는 판촉행위를 소개한다. 저소득층 여성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푸드 스탬프에 한갑당 25센트 할인 쿠폰을 제공한다. 그녀들에게 자신은 돈을 절약하고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담배 판촉을 늘리려는 속셈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치로 나타났다. 최저 소득 위에 있는 여성보다 저소득층 여성이 1.72배 높은 흡연율을 기록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하루 하루 살아가기에도 버거운 사회적 약자들에게 발암물질을 팔기 위해서 최소한의 양심마져 던져버린다. 

  그들의 사악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담배의 유해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지만, 과학자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식을 생산하고 있다. '연기 없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을 들으면 당신은 무엇이 상상되는가? 금연 운동 슬로건이 아니다. 연기나는 연초담배 연기 없는 전자담배를 피우자는 슬로건이다. 2017년 필립 모리스는 '연기 없는 세상' 재단을 만들고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투자한다. 담배회사가 막대한 자금력으로 과학자들을 어떻게 섭외하는지 날카롭게 비판하던 데렉 야크를 재단 이사장에 앉혔다. 전자 담배가 연초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자담배는 연초담배보다 덜 해롭다는 주장을 하며 전자담배 판매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며 대중을 멍청한 사람으로 남겨두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질서를 내면화합니다. 그 사회의 권력을 가진 이들이 아름답다고 뛰어나다고 규정하는 것들을 그 사회 전체의 표준이 되곤합니다."-174쪽

  

  사회적 약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지식을 생산하지 못하고있다. 오히려 지식권력자들이 생산한 질서를 내면화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아닌데도 이토 히로부미를 탁월한 인재라 칭찬하는 친일적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는 정치인이 있는 것도,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 사는 노동자들이 진보 정당을 빨갱이라고 욕하며 보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스스로의 지식을 생산할 지적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돈에 혈안이 되어 지식권력을 장악한 그들에게 우리들은 어떻게 저항해야할까? 담배는 해롭다는 진리를 머리로는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그들을 멍청하다고 말해야할까? 담배회사에 유리한 근거를 들이대며 담배를 끊는 것이 스트레스를 증가시켜 오히려 몸에 해롭다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이해를 김승섭 교수가 흑사병이 유행할 당시의 어리석은 유럽인의 행태를 설명하는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잘못된 광신도들은 조롱하기란 쉬운 일이다. (중략) 그러나 이들은 비난하기에 앞서 이 고행단들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공포를 기억해야만 한다."-220쪽

  

  거대한 재앙 앞에 나약한 도시민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비난은 쉽지만 대처는 힘들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야하는 가난한 노동자에게 가장 값싼 휴식을 제공하는 것은 한까치의 담배일 수 있다. 사회 구조가 변화하지 않는 이상 담배회사의 사악한 판촉을 막을 수 없다. 

  그럼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김승섭 교수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누군가는 사회적 약자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한 지식, 아니 우리 모두를 위한 지식을 생산해야한다. 그러한 지식을 생산해야만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동력이 만들어진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자신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구 조사를 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리라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 김승섭 교수의 연구와 조사, 글쓰기가 단번에 우리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물방울이 모여서 큰강을 이루듯이, 김승섭 교수가 생산한 지식이 우리 사회를 바로보는 안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땅의 많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함께 노력하여 우리 사회를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물론, 지식권력을 가진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힘든 그 싸움이 외롭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깨어있는 동료 시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ps. 김승섭 교수의 의견을 대부분 존중한다. 그러나 다음의 글에는 동의할 수 없다. 


   "OECD 국가 중 다른 인종에게 가장 적대적인 한국인들이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가해 행위가 문제로 인지되지 않을 만큼 한국사회에 인종차별이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177쪽


  우리사회는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일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유튜브 'Q언니'에서 세계를 두르두르 다녀본 Q언니는 유럽 거리에서 백인남성에게 얼굴에 침을 맞았다. 그때 그녀는 무서워서 반항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묻지마 폭행을 당하며 "고홈 옐로우 멍키" 소리를 들어야하는 우리들이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있을까? 영국의 경우 유색인종이 거주지에서 경찰에 범죄 신고를 해도 그들은 출동조차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보다 더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있는가? 겉으로는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척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종차별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는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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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만들어진 위험 -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당신에게
리처드 도킨스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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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서 유전자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준 리처드 도킨스가 종교에 도전장을 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과 '신, 만들어진 위험'이라는 책 중에서 어느 책을 읽을지 고민했다.  '신, 만들어진 위험'이 표지도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쪽수가 '만들어진 신'의 절반인 350여쪽이었다. 매력적인 쪽수이다. 그런데, 책의 내용은 더 매력적이다. 

  

  우선,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자이다. 이과 남자가 문과 방면에도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그가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명작을 쓴 원동력이었으리라... 구약에 대한 리처드 도킨스의 지식은 상당하다. 여러 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섭렵하고 성경을 비판적으로 읽고 있다. 

  물론, 역사를 전공한 나는 구약의 '모세 5경'을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학자들이 사료비판을 통해서 밝혀냈음을 알고 있으며, 구약의 여러 신화가 메소포타미아의 수많은 신화와 이야기 속에서 장점만 뽑아내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리처드 도킨스가 성경이 고유한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신화를 그들 나름의 이야기로 재창조했다는 지적이 새로울 것이 없었다. 

  진정 그의 탁월성이 돋보이는 것은 성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읽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죄물로 신께 바치려는 장면을 이삭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했다. 이삭을 얼마나 두려웠을까?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아버지와 신에 대한 불신에 가득차서평생을 고통받았을 것이다. 이삭의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으니, 성경의 잔인성에 몸서리가 쳐진다. 

  도킨스는 출애굽 이후, 유대인이 저지른 제노사이드를 비판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신의 명령을 리처드 도킨스는 히틀러의 레벤스라움과 비교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이미 3천여년 전에도 벌어졌던 것이다. 도킨스의 표현대로라면 이스라엘은 히틀러보다 나을 것이 없는 행위를 3천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벌이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박해하는 것은 그들의 경전인 구약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인가?

  성경을 읽다보면, 여성비하적 표현과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표현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이 완전한 경전이라면 이러한 표현이 있으면 안된다. 그렇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했듯이, 이들 책들은 시대적 한계 속에서 탄생했다. 그러니 그러한 표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성경을 무결점의 성스러운 서적으로 여기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야한다. 

  1부에서 성경의 헛점을 지적한 도킨스는 2부에서 진화론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이 없이도 진화론으로 우리 자연계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부모에 의해서 주입된 거짓 지식에 의해서 일평생을 특정한 종교인으로 살아야하는가? 


  "내가 만일 바이킹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오딘과 토르를 굳게 믿었을 것"

  "어째서 여러분이 태어난 나라에서 우연히 물려받은 신앙이 옳아야하는가?" (20쪽)


  그렇다. 만15세가 되기 전에 부모와 사회, 국가에 의해서 강제로 주입당한 신앙에 의해서 일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15세가 되어 스스로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갖았을 때, 스스로 무신론자와 종교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하고, 종교를 선택한 자는 다시 세상의 여러 종교 중에서 한 종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물론, 도킨스의 이러한 주장을 내가 적극 지지하는 이유는 나 자신이 초등학교 시절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초등학교 동급생과 초등학교 2학교 담임 교사에게 미움과 따돌림, 구타를 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초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은 수업시간에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믿으라고 설교했다. 

  도킨스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인들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가한다. 


  "그런 사람들은 지옥 같은 장소가 없는 것을 천만 다행으로 알아야한다. 아이들에게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는 사람보다 더 지옥에 가도 싼사람은 없기 때문이다."(135쪽)


  협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를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협박으로 우리를 종교의 노예로 만들려한다. 도킨스는 기독교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히 맞서고 있다.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성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 많은 사람들이 비종교인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래서 열정적인 저술을 통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적 설명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나약한 존재이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신의 존재를 믿고 싶어한다. 인간은 그럴정도로 나약한 존재이다. 

  책을 덮으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를 생각해보았다. 바로 불교이다. 부처는 '깨달은자'라는 뜻이다. 싯다르타는 먼저 깨달은 존재일 뿐이다. 우리도 수행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의 철학이고 가장 우주적인 종교이다. 도킨스에게 불교에 대한 견해를 묻는다면 그는 어떻게 답할까? 철학자 강신주가 벙커1에서 말했듯이, '기독교를 믿고 계신 분이 있다면, 불교로 바꾸세요.'라고 말할까? 아니면, 불교 조차도 필요없다며 오직 과학만이 진리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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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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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계기는 유시민 작가 덕분이다. 유작가는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를 집필하고 나서 각종 언론과 유튜브에 나와서 자신이 과학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최재천의 아마존'에 나와서 유시민은 '과학적으로 삶은 의미 없다.'라고 단언했다.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그도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았기에 유시민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에도 우리의 존재가 아무 의미없다는 말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유시민의 말처럼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인간이 숭고하게 여기는 모성애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정신도 모두가 유전자가 프로그램화한 유전자 운반 기계의 행동일뿐일까? 


1. 생물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다.

  인간을 동물과 다른 별개의 존재로 볼 수 없다. 동물도 인간 처럼 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며, 불완전하지만 나름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도 슬픔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역으로 동물을 통해서 인간을 설명할 수도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소개한 기생 일개미를 보며 인간세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생 일개미 중에서 일부(Bothriomyrmex regicidus와 B. decapitans)는 기생 일개미 여왕이 다른 개미종의 집에 침입하여 영왕개미를 죽이고 개미 사회를 장악한다. 그리고 기생 개미 영왕은 자신의 알을 낳고, 노예 개미의 시중을 받으며 서서히 원래의 종을 대체한다. 더욱 충격적인 사계도 있다. 

  기생 개미 중에서 Monomorium santschii의 여왕개미는 노예 일개미에게 자기 자신의 여왕 개미를 살해하도록한다. 그리고는 노예 개미의 시중을 받으며 왕국을 빼앗아 자신의 왕국을 구축한다. 정말 충격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소위 축출 이혼이 그러한 사례이다. 범죄 관련 팟캐스트에서 알게된 사연이다. 술집 여자와 하룻밤을 잤고, 그결과 아이를 갖게 되어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부모를 모욕하고 두자녀는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린다. 이성을 잃은 남자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줄렀고, 결국 그 남자는 법원에서 접근금지 처분을 받았다.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빼앗기고 이혼까지 당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새로운 삶을 살면서 자녀를 고아원에 보내고 남자에게는 양육비라는 명목으로 돈까지 계속 뜯어내려한다고한다. Bothriomyrmex regicidus와 B. decapitans는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Monomorium santschii도 존재한다. 일본의 신친일파 육성 프로그램에 따라서 일본 정부나 사사카와 재단의 돈을 받으며 신친일파로 육성되는 사람이 많다고 호사카 유지 교수는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정권을 잡고 친일적인 정책과 행보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더욱이 좌우의 이념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우파라는 신념(?) 혹은 망상 속에서 친일 정권의 매국행위를 동조하는 이웃을 보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Monomorium santschii는 우리 사회에도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 역시 인형을 직접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 처럼 간접적으로 자기 생존 기계의 행동을 제어한다."(113쪽)고 말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제시한 프로그램 명령어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182쪽)

  "거주자면 공격하고, 침입자면 물러나라!"(153쪽)


  이주민에게 배타적인 모습을 띄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적어도 리처드 도킨스의 말이 맞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는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수,당 전쟁을 끈질기게 수행한 것도 유전자에 의해서 프로그램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앞도적으로 불리한 군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국토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의 원천도 '거주자면 공격하고, 침입자면 물러나라'라는 명령어 덕분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라는 명령어가 필요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했다. 전쟁은 줄어들었으며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이방인을 만나는 빈도가 늘어났다. 이방인에게 환대를 해야하는 시대가 되었다. 유전자의 프로그램을 인간이라는 생존기계가 거역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며, 거역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희망과 존재 가치가 발견된다. 


2.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는 회의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다고 한다. 유전자의 조작에 의해서 유전자가 시켜 결혼하고 짝짓기를하며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회의주의에 빠진 사람이 많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과학적으로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유전자 운반 기계에 불과한 인간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불교에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 끝을 달이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는 "개체의 몸이란 일시적인 유전자의 조합을 위한 임시 운반체에 불과하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도킨스도 말했듯이 은유적 표현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당신은 노저어오오.'라고 말하는 연인에게 '당신의 마음이 호수라며 왜? 노 저어 갈 수 없지? 호수는 어디있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과 대화할 수 있겠는가?

  '이기적 유전자'를 잘못 읽은 사람들이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다는 유전자 결정론에 빠져든다. 더 나아가 '인생은 의미 없다.'라고 결론 짓는다. 과학의 한계를 생각하지 못하며, 과학이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진실이 밝혀낸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우주에 있는 84.5%를 차지하는 암흑물질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단지 알고 있는 것은 절반도 안되는 15.5%만을 알면서 우주 전체를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더욱이 과학에 문외한이 과학책 몇권을 읽고서는 '과학적으로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단언한다면 당신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있겠는가?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알면 알 수록 고개를 숙여야한다.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백사장의 수많은 모래알 중에서 모래 몇알밖에 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인정해야한다.

  리처드 도킨스는 "나는 어머니를 하나의 기계로 취급한다."(218쪽)고 말했다. 인간을 "생존기계"로 표현하는 도킨스의 극단적 비유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리처드 도킨스를 유전자 결론론자로 이해하는데 일말의 빌미를 도킨스가 제공한셈이다. 

  그러나, 리처드 도킨스는 분명히 말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재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335쪽) 또한, "뇌는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다."(123쪽)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자가 아니다. 유전자는 프로그램화를 시켰을 뿐이다. 유전자가 우리의 뇌를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바로 그 틈, 그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창조하고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유전자의 운반체인 인간이 문화와 문명! 혹은 밈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다시 최재천 교수의 유튜브 아마존으로 가자. 최재천 교수는 그의 유튜브에서 유시민의 '과학적으로 삶은 의미 없다.'는 표현을 언잖아 했다. 심장의 일부분을 떼어서 모아 놓으면 심장 박동을 만들어 낸다고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페이스메이킹이라한다. 부분은 전체의 합 그 이상이다. 챗GPT가 일정한 용양이상을 학습하고 파라미터의 수를 증대시키자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 처럼, 세포와 유전자로 이뤄진 우리의 몸도 그것이 모여서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운반 기계'를 만든다. 그리고 그 운반 기계가 모여 문명을 만든다. 그들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철학이라는 형이상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과학자 최재천 교수는 '철학'에서 과학이 하지 못하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칭 인문학을 공부했다는 자는 과학을 영접하면서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면, 과학을 공부한 석학은 인문학을 통해서 의미를 찾고 창조하려한다. 나는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여하고 창조하는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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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사도들 - 최재천이 만난 다윈주의자들 드디어 다윈 6
최재천 지음,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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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심상치 않다. '다윈의 사도들(Darwin's 12 Apostles)'은 다윈을 절대 틀리지 않는 교주로 모시며 일생을 바쳐 다윈의 말이 진리임을 과학적인 근거로 증명한다. 원래는 13명의 사도를 다룰 계획이었으나 하버드 대학교 에드워드 윌슨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이 인터뷰 후에 무자비하게 난도질 당하는 바람에 이 책에 싣지 못했다. 다윈주의자 최재천이 만난 12명의 사도들에게 다윈은 어떠한 매력이 있기에 그들은 기꺼이 다윈의 사도가 되었을까?

 

최재천이 만난 사도들 중에서 나의 흥미를 끈 첫번째 사도는 헬레나 크로닌이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과 논쟁도 불사하는 전투적 여성이다. 한국에 미투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차기 대권그룹에 있었던 정치인들이 줄줄이 낙마하는 사태를 겪으며 한국에서는 페미니스트에게 부정적 발언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사회적 매장을 각오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성적 피해를 당했다는 증거를 요구하는 말조차 2차 가해로 뭇매를 당했다. 석연치 않은 의심을 지울 수 없지만 나 또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성인 그녀가 페미니스트와 설전도 불사하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페미니즘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세상을 더 공평한 곳으로 만들고, 여성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성이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할 수 있겠습니까? 애초부터 과학적 정보를 바탕으로 한 고려를 배제한다면 어떻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것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거행된 것들이라면, 저는 정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타당성을 잃었다고 말하겠습니다."-86

 

과학문명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과학에 근거한 판단을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과학적 진실보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현실을 만들려고 과학이라는 지식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경우가 많다.

1정 연수 때의 일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설명하는 강사가 여성이 남성보다 수학이나 과학을 못한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그 강사는 강의 중에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과 과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래서 질문을 했다.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과 과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다면 이를 인정하고 그에 맞도록 수업을 해야하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수학과 과학을 못한다는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모순이 아닌가요?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을 잘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올바른 교육이 되지 않나요?" 나의 질문에 그 강사는 짜증나는 목소리로 "그건 알아서 잘 이해하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페미니스트는 감정적일뿐 이성적 사고는 상당히 박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성적 두뇌로 이해되지 않으면 그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 페미니스트 강사는 여권신장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그 강사는 헬레나 크로닌의 책을 읽었어야했다. 헬레나 크로닌이 나의 질문에 답한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멍청이도 많지만 노벨상 수상자도 많네"라고 단순 명쾌하게 말했을 것이다. 경쟁이 많은 남성에게 변이가 많다. 그렇기에 노벨상을 타는 사람 중에 남자가 많지만, 멍청한 사람들 중에도 남자가 많다. 그에 비해서 여성 집단은 서로 비슷하다. 중간층이 두텁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과학과 수학 점수의 상위권자들 중에는 남성이 많을 수 밖에 없다. 상위권 학생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다수의 남성은 무시된다.

헬레나 크로닌의 설명은 오랜 동안 해결되지 않고 나의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을 깔끔히 정리해주었다. 우리 학교에 남학생들의 학업 성취가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설명해주었다. 우리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과학적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하위권의 남학생을 중위권으로 끌어올리고 중위권의 여학생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교수학습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헬레나 크로닌이 소개한 남녀의 차이를 더 살펴보자. 신생아 중에서 남아는 경쟁적이며, 모빌을 더 선호한다. 그에 비해서 여아는 협력적이며 인간 얼굴을 더 선호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며 부모의 양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외적인 사례를 말한다. 남아인데도 협력적이며 인간 얼굴을 더 선호하는 아이가 있으며, 여아인데도 경쟁적이고 모빌을 선호하는 아이가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남녀의 차이를 규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매도한다. 헬레나 크로닌은 이에 대한 반론도 제시했다. 가끔 남녀의 차이가 반대로 나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자궁에 있는 동안 남성 호르몬에 노출된 여아는 전형적으로 말괄량이 같고 여성 평균 공간 지각 능력을 초월한다. 남아도 정반대가 성립한다.

나는 역사를 배우면서 ~주의, ~이즘(ism)의 위험성을 많이 보아왔다. 주의와 주장에 매몰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과 반대되는 근거는 무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근거들만 본다. 이른바 확증편향이 형성된다. 우리나라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이러한 확증편향이 보인다. 과학적 진실을 직시하고 이에 바탕을 둔 활동을 할 때만이 페미니스트들은 확증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정설이 변했듯이, 과학적 진실도 바뀔 수 있지 않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 과학적 진실도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세계의 진실을 모두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진실을 직시하고 그 범위 내에서 올바른 판단과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결정이 잘못된 결정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고 신중히 판단하고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 우리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나의 흥미를 끈 두번째 사도는 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마이클 셔머를 비롯한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도들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리처드 도킨스가 진화론의 신봉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 제목 때문에 그의 책을 읽기를 꺼려했다. 인간을 선악설에 근거해서 바라보는 삐딱한 학자로만 생각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까지 쓰면서 종교에 선전포고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윈의 사도들 중에서 한국에 많은 기독교 신자가 있으며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사실을 거론하며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나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크리스트교는 서양 사상의 기둥이다.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크리스트교를 드러내 놓고 비판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선입견이었다. 더욱이 서양에서는 말이다.

 

"무조건적인 찬양 또는 숭배가 그렇습니다. 믿음의 대가로 무언가를 가져가는 것을 숭배하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나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찬양하기만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종교의 부적절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주 강력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을 빼 버린다면 더 이상 무엇이 남겠습니까?" -205

 

대니얼 데닛의 이 말은 종교에 대해서 평소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역사를 전공한 나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많은 신화와 설화를 그대로 믿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적 의미와 사실을 끄집어 내려 노력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한국 사상사 수업을 듣던 중에 교수님이 갑자기 기독교 이야기를 했다. 기독교 신자인 한국사 교수에게 나는 질문했다. "종교 위에 우리의 현실이 있어야합니까? 종교 밑에 우리의 현실이 있어야합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었다. "시대가 변하면 종교의 교리도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합니까? 시대가 변해도 종교의 교리는 변하면 안됩니까?" 교수님은 "그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네, 부활 처럼 영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교수님께 다시 질문했다. "신비한 종교의 이야기는 해당 종교를 포교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 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교수님은 "그렇다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거짓을 오랫 동안 믿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럴 수가 있나요."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 교수님은 단군신화를 신화로 가르치면서도 서구 종교의 신화는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있었다. 근대 과학문명의 세례를 받은 학자가 종교에서 벌어지는 신이한 기적들을 그대로 믿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대다수의 다윈의 사도들은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상당히 논리적이며 나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런데, 종교와 과학은 조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인가? 아무리 과학적 진실이 진화론이 옳음을 말해도 많은 인간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다. 심지어 인도에서는 11, 12학년 이외의 학년에서는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기로 했다. 진실을 직시하기 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그것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믿으려하는 사람을 과학의 진실 앞으로 끌고 올수는 없다. 강제로 과학의 진실 앞으로 끌고 오려할 때 과학은 또 다른 종교로 변질 될 수 있다. 골턴에 의해서 정립된 우생학이 열등한 사람으로 지목된 사람에게 단종수술을 행하고 열등한 민족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던 죄악을 다시 저지를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지구상에서 바이러스를 박멸시킬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절대자에게 나약한 자신의 정신을 의탁하고 싶어한다. 그런 의미해서 칸트가 말했듯이 신은 요청되어진 존재이다. 스티븐 핑커는 "왜 이 지구에 보내졌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이유도 없다."라고 대답했다. 스티븐 핑커의 대답이 과학적 관점에서는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은 조약돌에서도 우주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존재가 "아무런 이유도 없다."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나약한 사피엔스는 종교를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나약한 사피엔스를 위해서 과학과 종교의 건전한 공존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만들어진 신'을 나의 독서 리스트에 올려 놓은 것도 이 책을 읽으며 얻은 수확이다. 좋은 책은 다음에 읽을 책을 연쇄적으로 읽도록 한다고 말한다. '다윈의 사도들'이라는 책은 내가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에 입문하도록 나를 인도했다.

책장을 덮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다윈이 이렇게도 중요한 인물인지 새삼스럽게 알았다. 다윈의 두번째 사도 헬레나 크로닌의 말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다윈의 핵심적인 이론은 영원히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생물학은 영원히 다윈주의적일 것이라는 말입니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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