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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1 - 전쟁과 바다 일본인 이야기 1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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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역사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읽기 쉽게 일본 역사를 설명해 놓은 책은 찾기 힘들다. 처음들어보는 일본의 지명과 들어도 외워지지 않는 일본인들의 이름이 난무하고, 각종 일본어 관직들은 일본사 이해를 더욱 어렵겠했다. 그래서 한국인 학자가 쓴 일본사를 읽고 싶어졌다. 한국인의 소화를 거친 일본사는 이해하기가 한층 쉬을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인 이야기1을 펼쳐들며, 일본사 속으로 들어갔다. 


  책의 제목은 '일본인 이야기'인데, 내용은 일본인 이야기에 한국인 이야기를 더하고 때로는 중국과 서양의 역사 설명도 더했다. 자유분방한 그의 서술이 설교로 들리기도 했지만, 저자가 가지는 역사에 대한 식견을 독자에게 전달해 주려는 노력이 돋보이기도했다. 한예를 들어보자. 


  "행운의 덕을 얻으려면 행운을 잡을 준비가 되어있어야하고, 그러려면 강렬한 의지를 갖고 끊임 없이 준비해 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49쪽


  강대국도 아니고 노쇠국도 아니면서 정치 군사적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유럽 의학의 중심지 네덜란드와 교류했던 일본이 안전하게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했기에 그들은 근대화를 할 수 있었다. 보통의 저자들은 설교조로 말하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보여줌으로서 독자가 교훈을 얻어가길 바란다. 김시덕의 '일본인 이야기1'에는 김시덕이 독자에게 많은 역사적 교훈을 알려주려 어깨에 힘을 주었다. 이것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비교적 쉽게 김시덕이 얻은 역사의 교훈을 흡입할 수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 

 독자에게 자신이 깨달을 바를 자세히 설명하는 김시덕의 노력 덕분에 놀라운 사실을 몇가지 알게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무역을 하며 "No business without battle(전투없이 거래없다.)"을 외치던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구의 세력이 동아시아에서는 교육에 집중한 이유를 이 책을 통해서 알았다. 포르투갈은 중국과 툰먼전투에서 패배했다.(1521) 예수회는 1589년 일본에 패배했으며, 네덜란드는 1622년 중국에 도전했다가 좌절했다. 힘이 없다면 평화도 없다. 우리의 군사력 강화를 보도하면서, 이것이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을 부채질 한다는 코멘트를 다는 기자들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실이다. 힘이 없으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가시를 가지고 있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도요토미 히데오시가 조선을 정벌하고 명나라를 거쳐 인도까지 쳐들어가려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필리핀 마닐라의 스페인 총독에게 항복문서를 보내기까지 했다. 히데요시의 야망과 광기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는 대목이다. 그가 동남아시아로 먼저 군사를 보냈다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등학교 동아시아사와 세계사 교과서에는 에도막부에서 "쇄국"을 했다고 씌여있다. 그런데 최근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쇄국"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빠져버렸다. 일본은 데지마 이외에도 쓰시마를 통해서 조선과 교류했고, 나가사키를 통해서 유럽과 청나라와 교류했으며, 사쓰마를 통해서 류큐왕국과 교류하고, 홋카이도 최남단의 마쓰마에를 통해서는 아이누 및 북방 민족과 교류했다. 총 4개의 창구를 통해서 외부와 교류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쇄국"이라는 단어 대신에 통상수교거부정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는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추진했다고 쓰고 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이밖에도 '용감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의 만주어 '다이칭 구룬'을 한자로 옮긴 것 대청국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소중한 지식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역사적 사실과 교훈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 노력하는 김시덕의 노력이 묻어나는 책이다.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가 계속 이어져서 색다른 일본사의 모습이 한국 독자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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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이야기 2 -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일본인 이야기 2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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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를 떠올리면,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대표되는 센코쿠 시대를 떠올린다. 일본인 이야기1의 표지만 보고 센코쿠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으로 오해했다. 일본 근대가 궁금했기에 일본인 이야기2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에도시대 민중의 삶에 대한 책이었다. 일본사 책들 중에서 일본인들이 쓴 책들은 상당히 읽기 힘들다. 일본인 인명을 외우기도 힘들고 지명들의 날립으로 읽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김시덕이 쓴 책들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서술되었기에 믿고 읽었다. 일본 근대를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으며, 에도시대 일본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있어 나름데로 재미있었다. 


  김시덕은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지배층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탈피해서 민중의 삶을 들여다보는 역사서술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가 소개한 에도시대 민중의 삶은 상당히 고달팠다. 내가 아르치는 한 학생은 조선을 싫어한다. 조선이 임진왜란때 멸망했다면, 개항도 빨리되고 더 잘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백성은 살기 힘들었기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수탈을 당했고 양반들은 배불리 먹고 살았다는 잘못된 역사교육이 이러한 엉터리 역사관을 가진 학생을 만들었다. 

  일본 지배층들은 백성들이 죽기를 면할정도의 삶을 살도록 수탈했다. 일본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녀석은 일본은 모두 잘살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설명을 해주어도 들으려하지 않는 녀석에게 이 책에 소개된 '마비키(영아살해)'를 들려주고 싶다. 18세기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두명의 자녀만 남기고 보두 낳자 마자 마비키(영아살해)하는 풍속이 있었다. 동화 헨젤과 그래텔을 분석하면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자녀를 버리는 행위가 중세시기에 서양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인구조절과 집안 생활향상을 위해서 냉혹하게 마비키를 행했다. 중국과 조선에서도 먹고 살기 힘든 가정에서 자녀를 버리거나 살해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단순히 흉년으로 인해서 먹고 살기 힘든 것만이 아니라, 집안 생활 향상을 위해서 마비키를 행했다. 

  냉혹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농업생산력이 낮고, 자연재해에 취약했던 과거에는 인권보다는 생존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없고,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없다. 단지, 일본의 마비키는 더욱 냉혹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의 역사를 알면 알 수록, 일본인들의 냉혹함에 간담이 서늘할 때가 많다. 그중에 하나가 자국민을 노예로 팔어먹는 일본인의 모습이다. 어느 윤리 교사에게 그리스 로마시대의 노예는 결혼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런 권리가 없었던데 비해서 조선의 노비는 달랐다고 설명했다. 즉, 외거노비는 결혼을 하고 재산을 축적해서 노비를 거느리기 까지했다. 물론, 재산을 모아 신분상승도했다. 특히 세종은 임신한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윤리교사는 "에그 그래도 조선은 같은 동족을 노비로 말들었잔아"라고 반론을 펼쳤다. 그래서 "그럼, 다른 종족을 노예로 삼아도 되고, 같은 종족은 노예로 삼으면 안된다는 말인가요?"라고 반문하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근대 시기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노예와 노비 중에서 어느쪽의 삶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이 부질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센코쿠시대 일본에서는 상대편 영지의 백성을 노예로 팔어저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17세기 말까지 포르쿠갈 리스몬, 남아메리카 리마에서 일본인 노예의 흔적이 보인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포로가 노예시장에 나타나자, 국제 노예값이 폭락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인 노예가 사라졌다면, 일본인 노예는 그 후에도 계속 국제시장에 출몰했다. 같은 일본인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지 않았고,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일본에서 이웃 영지의 백성을 노예로 파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시덕은 책 표지에서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라고 에도시대를 규정한다. 그는 "퇴보"쪽에 힘을 실어 에도시대를 설명한다. 센코쿠시대 유럽과 교류하며 더 많은 발전을 하였으나,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를 포기했다. 서양의학을 더 빨리 더 많이 들여올 수 있는 기회를 에도막부가 막아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센코쿠시대보다 에도시대가 퇴보했다고 주장하기에는 센코쿠시대에 벌어졌던 수 많은 잔혹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에도막부의 안정은 전쟁의 소멸로 이어졌다. 비록 서구의 문물이 늦게 일본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에도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서민들에게는 센코쿠 시대보다는 에도시대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저자 김시덕의 책은 쉽게 쓰여져 있는 것이 매력이다. 일본인이 쓴 일본사 책들을 읽으면서 이해도 못하면서 책장을 넘겼던 아픈 기억을 떠올린다면, 김시덕의 책은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고마운 책이다. 특히 일본 지배층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서, 피지배층의 삶을 조망하고, 간간히 조선과 중국, 서양의 역사도 비교해서 서술한 점이 무척 흥미롭다. 미처 읽지 못한 '일본인 이야기1'도 읽어 보아야겠다. 


ps. 에도막부의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개쇼군'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살생금지령' 때문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개를 살생하지 말라는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버려진 아이를 거두는 정책, 백정 즉, 히닌에게 쌀을 주는 정책, 죄수 복지에 관한 정책도 시행했다. 역사를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제대로 과거를 알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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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7-21 17: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고 싶어서 담아둔 책인데 자세한 리뷰덕분에 대충 감을 잡을 수 있겠네요. 에도 시대를 퇴보로 보는것은 저도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에도막부시대 서민경제의 성장과 새로운 문화의 등장같은 걸 보면 단순히 쇄국정책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건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 그런데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노예는 좀 다양했습니다. 노예들 중에는 지금으로 치면 지식인 전문가 그룹도 많았었고, 그들의 생활은 일반 노동 노예들과는 당연히 차이가 많이 났고요.

강나루 2021-07-21 17:13   좋아요 2 | URL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김시덕의 책은 읽을만 하다는 걸 다시 확인한 책입니다.

scott 2021-07-21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 좋아합니다(이 페이퍼 읽자 마자 장바구니 속으로 ~@@@)
과장된 일본 대하 소설 읽다가 의문 생길때 마다 들춰봐야 겠네요.


강나루 2021-07-21 17:55   좋아요 1 | URL
일본사에 대한 색다른 접근을 맛볼수 있죠^^

scott 2021-08-06 1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추카~~

담달에는 중국인 이야기로 ^.~

강나루 2021-08-06 19:56   좋아요 1 | URL
저보다 당선소식을 먼저 아셨군요.
감사합니다.^^

mini74 2021-08-06 15: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1-08-06 19:57   좋아요 1 | URL
min74님 감사합니다.^^

초딩 2021-08-06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짝짝짝~

강나루 2021-08-06 19:57   좋아요 0 | URL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8-06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1-08-06 19:57   좋아요 0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08-06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1-08-06 19:58   좋아요 0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8-06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강나루 2021-08-06 20:00   좋아요 1 | URL
부지런한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황후화 2021-08-06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1-08-06 19:58   좋아요 1 | URL
황후화님, 감사드려요^^

겨울호랑이 2021-08-06 2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의 글을 통해 이웃나라이면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모습은 ‘서구인의 눈에 비친 일본‘, ‘고대 우리에게 문화를 전수받은 후진국‘ , ‘우리를 식민지로 만든 적국‘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강나루 2021-08-06 20:1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물감 2021-08-06 2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도 당선 축하드립니다^^
너무 넘사벽 리뷰를 쓰셔서 평소 댓글달지 못했는데 이 기회에 친한척 해봅니다.ㅎㅎ

초딩 2021-08-06 21:55   좋아요 2 | URL
저도요!!!

강나루 2021-08-06 21: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물감님의 리뷰도 넘사벽이지요^^

bookholic 2021-08-07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일본인과 중국인을 같이 읽으시는 것 같던데요..
다음달에는 중국인으로 이달의 당석작 기대하겠습니다...^^

강나루 2021-08-07 07:05   좋아요 0 | URL
bookholic님 감사합니다^^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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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얼굴을 보려면, 물에 비춰보고,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려면 옆사람의 얼굴을 보라! 라는 말이 있다. 조선의 모습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이웃나라를 바라보면서 조선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듯 싶다. 저자 박상휘는 제일교포 3세로 학부는 중국어 학과를 나왔으며, 한국에서 '조선 통신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중국 중산 대학 국제 번역 학원 특빙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경계인으로서 한중일의 문화를 두루 섭렵한 박상휘가 쓴, '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라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일본에 우리를 비춰보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수 많은 조선 선비들의 눈을 통해서, 일본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서 조선 시대 우리의 모습을 바로 비춰볼 수 있다. 


1. 임진왜란의 트라우마

  신숙주가 죽으면서 왕에게 "일본과 관계를 끊지 말아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신숙주는 일본과 관계를 끊으면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적이기에 적의 동태를 알기 위해서라도 한쪽 손은 반드시 잡고 있어야한다. 그러나, 삼포왜란과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조선은 일본과 관계를 끊는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맞이한다.

  임진왜란 시기에 수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 중에는 조선의 선비, 강항도 있었다. 강항의 눈에 일본은 삶을 가볍게 여기며 가족과 살갑게 지내지 않는 사무라이의 나라로 비춰졌다. 1617년 사형수 중에서 참수를 거부하고 스스로 할복을 선택한 사람에 대해서 이경직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죽음을 당하는 사람도 또한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 자결하기를 원한다. 목욕하고 이발한 다음 눈을 감고 염불한다. 스스로 배를 가르고 손으로 오장을 끄집어내어 죽으면, 보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 칭찬하고 그 자손도 또한 세상에 이름이 높아진다."-45쪽


  죽음을 미화하는 일본! 죽은 죄인의 시체를 시험삼아 만두처럼 마구 찍으며 자신의 칼을 시험하는 '타메시기리'를 행하며 어린아이들이 와서 보도록 하는 일본의 모습은 너무도 충격적이다. 단오에는 창칼로 사람을 죽인다. 특히 원한을 가진 사람을 죽이며, 이때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조선 선비의 문화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일본의 이러한 사무라이 문화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튜브 "롯본기 김교수"에서 타메시기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매우 이례적인 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폭력이 일상화된 일본의 민낯을 바라보니 소름이 끼쳐온다. 

  조선의 선비들은 폭력이 살아있는 일본 사회를 보며 임진왜란의 공포와 충격이 소환되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일본이지만, 무력으로 그들을 응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에 원한이 없냐는 일본인의 질문에 조선 선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처단해 원수를 갚아주었기에 원한이 없다고 말했다. 어찌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사람만의 잘못일까? 일본을 응징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며 다시는 임진왜란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일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칼의 문화가 살아있는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강한 거부감을 느끼지만, 다시는 이들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2. 귀머거리 조선의 정신승리

 오규우 소라이는 1711년 통신사와 제자들이 주고 받은 수창시를 모아 '문사기상'을 편찬했다. 이 책의 발문에 "우레가 치면 만물을 놀라게 할 수 있지만 귀머거리는 편안하게 여기니, 문에 있어서도 그러하다"라는 말이 있다. '귀머거리'는 조선 사절을 뜻하며, 우레는 소라이 학파를 뜻한다. 조선에 대한 비하와 소라이 학파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나는 표현이다.  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면 시한수를 얻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는 사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충격적인 '문사기상'의 이 구절을 우리는 웃어 넘길 수 없다. 도대체 일본에 무슨 일이있었던 것일까?

  1636년 김세렴이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때, 일본의 문화는 조선에 한참 뒤졌다. 유교 경전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으며, 한시를 짓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너무도 많은 일본인들이 통신사의 시한수를 얻기 위해서 줄을 섰다. 통신사의 글은 값이 꾀나 나갔으며, 부적처럼 사용되었다. 통신사 스스로 생각해도 수준이 떨어지는 시를 급하게 지어서 일본인들에게 주면, 일본인들은 즐거워했다. 

  그런데, 1748년 통신사로 일본에 간 홍경해는 조선의 조선술이 일본에 뒤떨어졌다고 지적한다. 조선술의 순위가 아란타, 중국, 일본, 조선이라고 서술될 정도로 조선의 기술은 뒤떨어졌다. 심지어 1763년 기록에는 조선배가 일본인에게 비웃음을 받을 지경이라고 적고 있다.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의 세끼부내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계속된 기술개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조선의 조선술은 일본에 역전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술자를 천시여기는 조선이 결국 일본에 기술역전을 당했다.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항이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성리학을 전해준 이후, 조선의 성리학은 교조주의에 빠져든다.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조선의 경직된 학문 풍토이다. 그에 반해서, 뒤쳐졌지만,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일본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비판하며 자유롭게 학문의 날개를 펼쳤다. 그들 학자들 중에서 오규 소라이는 단연 돋보인다. 주자학을 비판하며 주체적으로 유교경전을 비판 그는 조선 통신사들의 한시 수준을 단신 빨리 짓는 것만을 추구한다며 비판한다. 그의 제자는 조선을 '귀머거리'에 비유한다. 그랬다. 우리에게는 뼈아픈 사실이다. 조선의 주자성리학은 교조화되었다. 유연성을 잃어버린 조선 성리학은 주자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오규 소라이의 사상은 중화사상의 틀을 벗어나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규 소라이의 영향을 받은 카꾸다이의 말을 들어보자.


  "나라에는 각기 나라의 도가 있어서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해집니다. 인ㄷ도에는 브라만교가 있어 부처의 도와 함께 나란히 행해집니다. 서양에는 천주교가 있고, 그밖에 이슬람교라든지 라마교 같은 것을 여러 나라들이 혹 모두 갖고 있습니다. 작자칠인은 모두 개국의 군자이고 (중략) 어찌 꼭 중국만이 유독 귀하고 이적의 가르침은 없어도 되는 것이겠습니까?"- 268쪽"장문계갑문사"


  일본은 중국중심사상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조선은 중국의 중화사상에 얽매여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오규 소라이 학파의 말을 귀담이 듣고 성리학 교조주의의 알을 깨고 나오기를 기대하기에는 조선 선비는 '귀머거리'나 다름없었다. 조선의 비극은 이미 이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어찌 흥선 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했기에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단정할 수 있으랴?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조선이 빨리 개항한들 근대화에 성공했으리라고 확언하기 힘들다. 역사에서 비약은 있을 수 없다. 조선은 18세기 부터 근대를 준비했어야했다. 그 출발점은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조선의 사신을 일본은 '조공사절'로 위장하였다. 이를 통해서 막부의 권위를 전국에 과시했다. 조선은 문화사절로서 야만적인 일본은 문명국으로 만들어 다시는 임진왜란의 전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믿음으로 통한다는 뜻의 통신사는 본래의 뜻을 잃어만 갔다. 조선이 일본에 문화적 우월감에 취해있을 때, 일본은 부단히 조선을 배웠다. 마침내 조선을 뛰어 넘기 시작했다. 1811년 더 이상의 통신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일본은 인공섬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이미 일본은 서구화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고, 우리는 찬란한 중화 문명에 취해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배자도 없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는 승리할 것이요. 현재의 승리에 취해서 안일에 빠진다면 패할 것이다. 일본 막부의 통치방법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며, 맹자가 말한 마음으로부터 진심어린 복종 즉, '심복'을 얻지 못한 도쿠가와 막부는 흙이 무너지는 것 처럼 무너질 것을 예언한 원중거와 같은 조선의 선비들이, 주자 성리학의 미몽에서 조선을 깨우지 못한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다시는 그 미몽에 빠져들이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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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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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흥선 대원군이 쇄국정책 때문에 근대화가 늦어졌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한다. 근대화가 늦어진 책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모두 짊어지게 함으로써, 근대화에 실패한 책임에서 나머지 사람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흥선 대원군이 과감하게 개항을 했다면 우리는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저자 신상목은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지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 잘못된 질문이라 일갈한다. 일본은 16세기에 이미 조선을 넘어섰음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이것이 신상목이 이 책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바이다. 전근대에는 조선이 일본을 앞섰지만,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일본에 뒤쳐졌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무지와 특정인에 대한 마녀사냥은 우리에게 심적 편안함을 선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훈을 안져주지는 못한다. 교훈없는 안일함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게 만든다. 조선은 그 이전부터 일본에 뒤쳐졌으며,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시점도 페리가 일본에 오기 이전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한다. 

  신상목! 그는 에도시대 일본이 조선을 앞섰다는 증거를 얼마나 깊이 있게 제시할 수 있을까?


1. 의도하지 않은 정책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다.

 박근혜 정권 시기, 청와대에서 구입한 약품 중에, 비아그라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해명은 '고산병 예방 및 치료'라고 했다. 비아그라는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발되다가 의도하지 않게 발기부전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목적하지는 않았으나, 발기부전과 고산병에 효과를 나타내는 비아그라 처럼, 에도의 탄생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일본에 선사한다. 

  에도는 탄생부터 극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근거지를 슨푸(시즈오카)에서 갈대밭인 에도로 옮길 것을 명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한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도 병력을 착출 당하지 않은 것은 에도로 봉토를 이전 당했기 때문에 얻은 부산물이었다. 

  에도 막부가 출범하고 나서는 '천하보청'을 실시한다. '천하보청'이란 막부의 토목공사에 다이묘에게 일종의 요역을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천하보청으로 에도에 인프라가 구축되고, 다이묘를 견제할 수 있는 일거 양득의 효과가 발생한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천하보청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온다. 일본의 다이묘들이 에도에 와서 토목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한 것이다. 

  에도 막부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강성한 다이묘들을 어떻게 약화시키고 천하의 패권을 천대만대 누릴 수 있을까?'가 아니었을까? 에도 막부가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실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킨코타이 제도(참근교대) 덕분이다. 다이묘들이 에도에 본처와 장자를 두고, 영지와 에도를 오고가야했기에 다이묘의 경제적 힘을 빼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산킨코타이 제도는 의도하지 않게 교통과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으며, 전국을 묵는 정보 네트워크 기능을 했다. 에도에서 유행한 우키요에게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산킨코타이 제도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일본인이라는 관념보다는 OOO지역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던 일본인에게 '전국성'을 인식하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력은 에도시대 일본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일본은 근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2. 번영하는 에도!!

에도의 번영은 눈부시다. 인구 100만의 세계적 도시로 성장한 에도는 경제적 번영을 구가한다. 경제적 번영은 사회 문화적으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거둔다. 

  에도의 경제적 번영은 지식에 대한 욕구를 증가시켰다. 그래서 주쿠와 데라코야와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등장한다. 주쿠와 데라코야와 같은 민간 교육기관이 신분에 구속되지 않고 능력 있는 전문 지식인을 육성하고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교육의 확대는근대 사회에서나 등장함직한 '판권' 개념을 등장시켰다. '판권'개념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에도시대 독서가 광범위하게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광고 전단지의 시초인 '히키부다'와 신문의 시초인 '요미우리'가 등장해서 일본사회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민간주도로 이뤄진 정보 유통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알려준다. '히키부다', '요미우리'가 등장하고, 판권 개념이 등장한 에도시대에 일본은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관광입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조선에서는 관광이 쉽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미 관광입국을 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인 데지마상관에 주제했던 엥헬베르트 카엠프페르가 '에도참부여일행기'에서 "이 나라의 가도에는 매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람들이 있어, 여행객이 몰리는 계절에는 인구가 많은 유럽 도시의 시내와 비슷할 정도로 사람들이 길에 넘쳐난다."라고 묘사할 정도로 일본의 관광은 성황을 이루었다. 

  정보의 유통과 역동적성 면에서 에도시대 일본은 조선을 뛰어 넘고 있었다. 이러한 에도의 역동성은 조선과 같은 정책을 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조선과 일본에서는 사치를 금지시켰다.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의 사치금지령에 조선 사회는 커다란 저항을 하지 않았다. 화려한 의복을 규제한다고하지만, 흰옷을 즐겨입었던 조선에서는 서민들이 큰 저항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48가지 차색과 백가지 쥐색이라는 뜻의 '사십팔차백서'가 등장하고, 멀리서 보면 단색이지만, 가까이가서 보면 세밀한 문양이 있는 '에도코몬'이 등장한다. 또한 심플함 속에 풍겨나오는 세련됨을 의미하는 '이키'의 미의식이 등장한다. 중국 속담에 "위의 정책이 있으면, 밑에는 대책이 있다."라는 말처럼, 에도 막부의 정책에 대응해서, 일본 서민들은 대책을 마련했다. 

  이렇게 같은 정책에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조선과 일본 사회의 역동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3, 에도시대, 근대를 준비하다. 

  흑선에 의해서 일본이 개항하기 이전까지, 일본보다 조선이 앞섰다는 이유없는 자부심에 우리는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전근대시기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증거로 많이 거론되는 것이 '도자기'와 '조선 통신사'이다. 과연 도자기와 조선 통신사는 전근대시기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앞섰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주장은 면밀한 검토를 해보아야한다. 우선, '도자기'부터 살펴보자.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조선의 도공을 일본군이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는 제사상에 올릴 제기도 부족할 정도였다고 하니, 임진왜란이 도자 산업에 미친 영향을 짐작할만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이삼평은 아리타자기를 만든다. 일본이 세계의 도자산업에 우뚝 설수 있는 바탕을 조선의 도공이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 만국박람회에 일본의 도자기를 소개하고, 서구의 입맞에 맞는 자기를 생산한다. 끊임 없는 혁신을 통해서 세계 자기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향수에 취해서 혁신을 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을 때, 일본은 끊임 없는 혁신을 하였다. 조선이 검약을 미덕으로 삼고 사치를 죄악시하는 유교사회였기에 조선에서 도자산업이 혁신을 이룰 수 없었다. 원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조를 뛰어 넘는 혁신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자부심을 느끼는 '조선 통신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임진왜란 이후 12회에 걸처서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파견된다. 일본 막부는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조선 통신사를 환영한다. 조선 통신사를 통해서 조선의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말고서도 새로운 문화 수입 창구가 있었다. 바로 나가사키에 있는 데지마이다. 

  데지마를 통해서 서구의 앞선 문물이 일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배탈만 일으킨다. 일본은 서구의 문물을 소화하기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한다. 1774년 '해체신서'를 번역하고, 1796년 난화사전인 '하루마와게' 발간, 1814년 영일사전인 '안게리아 고린타이'를 출판한다. 일본은 개항이전에 난화사전과 영일 사전을 편찬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대사건이다. 

  일본이 '해체신서'를 출간하고 인체 골격 모형을 제작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시기에 조선은 무엇을 했을까? 1764년 조선 통신사 수행원인 의사 남두만은 일본인이 설명하는 해부 실험에 대해서, "갈라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고, 가르지 않고도 아는 것은 성인만이 할 수 있으니 미혹되지 말라"라는 어리석은 말을 내뱉는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1881년 조사시찰단 송헌빈에게 이어진다. 송헌빈은 일본 병원의 해부 인형을 보고 "정말고 끔찍하기 작이 없다. 이는 인술을 하는 자가 할 짓이 아니다."라고 내뱉는다. 좋은 음식을 보고도 더럽다며 혀를 차는 꼴이다. 

  조선후기! 조선은 송시열과 노론을 중심으로 교조주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성리학의 배타성은 극에 달하며, 경전을 달리 해석하는 윤휴와 박세당은 사문난적으로 몰리게 된다. 반면, 일본은 성리학의 교조주의에 빠져들지 않고, 성리학 이전의 원시 유학 경전을 직접 연구하였으며, 상인의 재산축적을 합리화하는 심학이 등장하였다. 다양성과 역동성을 띄고 있던 일본의 학문에 비해서, 조선 사회는 획일적이고, 비역동적인 학문 수준을 고수하고 있었다. 유연성을 잃어버린 조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의 지배층이 조선보다 더 유능했다는 말은 아니다. 에도시대 후기, 막부의 통화정책은 낙제점이다. 잦은 화폐 개혁, 지역화폐의 존재, 3종의 본위화폐제도만 보더라도 일본 지배층이 조선 지배층보다 더 유능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단지, 일본은 낡은 세력을 교체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점이 조선과 달랐다. 


  우리는 이유없는 자부심과 국뽕에 심취해 있지 않은가? 조선의 도자기가 일본의 도자산업의 원류였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는, 왜? 원천기술을 가진 우리 도자산업은 세계를 제패하지 못했는지를 반성해야하지 않을까? 1811년 까지 12차례에 걸쳐서 에도막부에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문화발전에 기여했다고 국뽕에 취하기 보다는, 왜? 1811년 이후, 일본은 조선 통신사 파견 요청을 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하지 않을까? 과거의 찬란함에 취해서 나태와 아닐함에 취한다면,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듯이, 우리에게도 몰락만이 다가올 것이다. 주역에 '항용유회'라는 말이 있다. 높이 나는 용은 항상 후회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한때 우리 문화가 타국보다 우월했다고 자만할 필요가 없으며, 지금 우리가 타국보다 국력이 낮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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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왕국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89
다카라 구라요시 지음, 원정식 옮김 / 소화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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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사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학습을 했다. 학생들은 제주도의 예를 들면서 중앙의 강력한 국가가 주변부를 복속시키며 국가와 민족이 형성되기에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사라 주장하기도 했고, 일부학생은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의 문화를 간직한 류큐의 역사로 보아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879년 류큐의 왕이 도쿄로 끌려가면서 류큐는 오키나와 현으로 강등되었다. 오키나와 인들은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에 순응했고,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옥쇄를 강요당했다. 오키나와인들이 옥쇄로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댓가는 미군 주둔기지로 미국에게 통치권이 넘겨지는 것이었다. 조국 복귀운동을 통해서 일본으로 복귀한다면 미군 범죄도 사라질 것이라는 환상을 갖았지만, 1972년 일본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슬픈 오키나와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찬란했던 류큐왕국의 모습을 살펴보고 싶었다. "류큐왕국"이라는 책을 펼쳐든 것도 이 때문이다.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실시하면서 찬란한 류큐왕국의 시대가 열린다. 류큐는 조공무역을 통해서 얻은 명나라의 물품을 얻는다. 류큐의 나하에는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상인들이 몰려와 자국의 특산물을 진귀한 주변국의 물건과 교역하려 몰려들었다. 당연히 일본상인은 중국과 교역할 수 없었기에 중국의 물품을 류큐를 통해서 얻고 싶어했다. 이러한 류큐왕국의 강성함이 만국진량의 종에 기록되어있다. 


류큐국은 남쪽 바다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삼한의 우수한 점을 모으고 대명국과 상조하며 일본땅과 순망치한의 관계를 맺고 있다."-만국진량의 종-


 명나라의 해금정책은 류큐왕국의 부강함을 가져왔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이 사라지자, 류큐왕국의 강성함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결국, 사스마번의 침입을 받아 일본에 예속되었다. 그럼에도 류큐왕국은 유지되었고, 중국에 조공무역도 계속되었다. 류큐왕국을 유지시키면서 류큐왕국의 조공무역의 이익을 가져가려는 얄팍한 일본의 저의는 너무도 교활했다. 심지어, 일본 민간인 업자가 류큐 사자를 자칭하며 조선에 무역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선은 왜구의 창궐을 염려해서 알면서도 속아주었다. 일본의 교활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류큐왕국이 1879년 류큐처분에 따라서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충실하게 순응하면서 류큐왕국의 후손이라는 정체성도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버린 일본으로 다시 복귀하고 싶어했고, 일본에 복귀하고 나서도 일본 본토인에 비해서 차별을 받으면서도 오키나와 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일본에서 찾고 있다.1977년, 5년간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한 것을 좋아한 사람은 50%에 불과했으나, 현재의 오키나와인 대대수는 일본으로 복귀를 좋아한다. 오키나오 전투에서 천황을 위해 옥쇄할 것을 강요받았고, 수많은 오키나와 인들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으로 부터의 독립을 외치지 못하고 있다. 

  "역사가는 현민의 여론을 배경으로 역사상을 재구성할 의무를 져야한다."(185쪽)라는 의무감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가들은 오키나와의 역사가 일본사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전설상의  '고류큐 초대왕' 슌텐이 일본 헤이안 말기의 무장 미나모토노 다메토모의 아들이라점을 일본 역사학자들은 강조한다. 류큐는 일본의 지방사이고, 류큐어는 일본어와 유사성이 많다는 주장도 이러한 '역사가의 의무'에서 비롯된 연구물이다. 


  일본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오키나와인들의 바램은 가와카미 필화사건을 촉발시켰다. 1911년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가 오키나와인들에게한 강연이 문제가 되었다. 


  "오키나오를 관찰하니, 오키나와는 언어, 풍속, 습관, 신앙, 그 밖의 모든 점에서 내지와 그 역사를 달리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 현 사람들이 충군애국의 사상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한탄할 것 없다.  나는 이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키나와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큰 동시에 또 가장 많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32쪽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를 정확히 파악한 교토제국대학교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의 지적은 일본인이 되고 싶어하는 오키나와인에게는 자신의 약점을 후벼파는 강연이었다, 결국 2주간 자료조사차 오키나와에 머무르려했던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는 1주일만에 오키나오를 떠나야했다. 가와카미 하지메 교수의 정확한 지적을 포용하지 못할 정도로 오키나와 인들은 철저히 황국 신민화교육을 받았고, 일본은 오키나와 인들을 황국신민화 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에게 류큐인으로서의 자존감은 사라졌다. 그 댓가로 오키나와인들은 오키나오 전투에서 옥쇄를 강요당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서 일본에게 버림받고 미군기지로 고통을 당해야했다. 1972년 일본에 복귀하고 나서도 일본인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다. 


  2019년 10월 31일 파란만장한 슈리성이 다시 한번 불탔다. 류큐 왕국의 왕이 살던 이성은 일본에 병합된 후에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오키나와 전투때 전소되었다. 그후, 류큐대학 캠퍼스로 사용되던 슈리성터는 1992년 류큐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열망에 따라 다시 복원되었다. 오키나와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당했던 외면과 차별 처럼, 슈리성도 핏박과 슬픔을 겪어야했다. 2019년에 완전 소실된 슈리성을 다시 복원할 계획이 현재 시점에서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슈리성을 다시 복원한다 할지라도, 오키나와 인들이 류큐인으로 다시 태어 나지 못한다면, 슈리성의 의미는 다시 부활할 수 없다. 완벽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성공한 오키나와를 바라보며, 친아들이 아닌 업둥이가, 친아들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애닳픈 모습을 보는 듯하여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오키나오 인들은 일본인으로 인정받기 보다는 류큐왕궁의 후손으로서의 자존심을 갖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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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24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류큐라면 오키나와 !! 일본이 엄청 잔인하게 지배해버린 가야왕궁하고 교류도 할정도로 문화적으로 우월했었던것 같은데 황국 식민화 정책으로 지금에 오키나와는 류큐왕국에 모습을 볼수 없다는게 너무 안타깝네요 ㅜ.ㅜ강나루님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ᒄ₍⁽ˆ⁰ˆ⁾₎ᒃ♪♬메리메리 크리스마스 ^.~

강나루 2020-12-24 04: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cott 님도 메리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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