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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까지 가자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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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락방, 독서와 수업 사이에서 한 선생님이 '달까지 가자'라는 책을 읽고 가상화폐에 대해서 대화를 하고 싶다하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책을 읽어 내려갔다. 내가 소설책을 잘 읽지 않는 이유는 뻔한 줄거리 때문이다. 몇페이지만 읽어보면 결론이 눈에 들어오는 책들은 읽고 싶은 마음을 멸균시켜버린다. 장류진의 소설 '달까지 가자'를 읽으며, 가상화폐에 투자했다가 쪽박차게되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는 나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이 이책을 읽으며 느낀 유일한 호감이다. 돈에 미쳐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상화폐라는 지극히 위험한 곳에 자신의 전재산과 빚을 끌어모아 투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두둔하는 소설로 읽혔다. 장류진은 과연 '달까지 가자'라는 책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말하려는 의도와는 달리, '달까지 가자'는 청년들에게 가상화폐에 투자하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하진않을지 걱정이 된다. 가벼운 문체에 가벼운 주제를 담아 가볍게 읽고 책을 던져버릴 수 있도록 책을 썼다. 우리의 삶이 가볍지 않을진데 가벼운 책을 읽은 것이 못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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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09-02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상화폐에 대해 대화를 하려면 다른 책을 먼저 읽어야 하지 않나요. 소설이 아니라… 가상화폐의 근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쪽박 차는 경우부터 가상화폐에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감히 말씀 드립니다만, 가상화폐를 투기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는 것과 다름이 없거든요.

강나루 2021-09-03 19:45   좋아요 0 | URL
네 공감합니다.
제가 가상화폐에 관심이 없어 깊이 있는 책부터 읽자는 제안을 안했네요
 
마음의 부력 - 2021년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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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예술이 그들만의 리그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예술 분야만의 일은 아니다. 시가 더 이상 대중과 가까이 있지 못하고, 소설도 비평가들이 좋아하는 작품과 대중이 좋아하는 작품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많은 소설을 읽었던 내가, 대학 진학후 소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을 만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이상문학상 작품집 '마음의 부력''을 꺼내들었다. 비평가들에게 대중의 눈에 맞추라고 요구할 수 없기에 나의 눈에 맞는 작품을 뽑아 보기로 했다. 2021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소개된 작품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을까?


  제44회 당선작들은 대부분 가족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작품들이다. 대상 수상작도 가족간에 있을 수 있는 어머니와 아들, 형제간의 미묘한 갈등을 소재로한 이승우 작가의 '마음의 부력'이다. 우리 영화에서 흥행 코드는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소재로한 작품은 한국인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치매 초기의 어머니와 먼저 저세상으로 간 형이라는 소재는 흥행에 적격이다. 게다가 미스터리를 풀어가듯 단서들을 찾아서 진실을 밝히는 전개 형식은 독자를 빨려들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승우 작가의 서술방식은 '부재증명'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나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지 못해서 타인에게 이를 부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담긴 소설 '부재증명'을 읽으며, 주인공이 혹시 헤리성 성격장애이거나, 아버지의 배다른 동생이 금천에 실존했을 가능성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승우 작가만의 흡입력은 탁월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방식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소재는 영화에 익숙한 대중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사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어머니의 존재는 '신과 함께 1'에서 보았던 내용이고, 단서를 토대로 진실에 다가가는 전개방식은 외국의 많은 영화들에게 흔히 보았던 전개 방식이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은 훌륭하지만, 내가 심사위원이라면 그의 작품을 대상의 반열에 올려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수작 중에서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다. SF 소설을 읽는 듯한 박형서 작가의 '97의 세계'는 무한 타임루프 속에서 딸을 구하기 위한 아버지의 부성에가 느껴졌다. 윤성희 작가는 누가나 가진 가해자로서의 양심의 가책을 소재로 잔잔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블랙홀'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장은진 작가의 '나의 루마니아어 수업'은 작품을 읽는 동안 아련한 짝사랑의 기억을 소환시키며 옛 추억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천운영 작가의 '아버지가 되어주오'라는 작품은 희생자로만 비춰질 수 있는 어머니의 삶을, 어머니 입장에서 새로운 '사랑의 삶'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 속에서 감동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나, 제44회 이상문학상 우수작들은 모두 훌륭했지만, 나의 마음에 깊숙히 다가왔던 작품은 한지수 작가의 '야심한 연극반'이었다. 어머니로 알았던 존재가 아버지였으며, 우토로라는 공간을 소재로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 전개와 한일간의 아픈 역사를 상기시키는 소재, 성 소수자에 대한 성찰 등은 타작품과 분명히 비교되었다. 조그만 일상에 갖혀서 오늘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 소설과는 달리, 한일관계의 아픈 역사를 생각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색다른 관심을 불러 일으키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의 전개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끝났지만, 소설 이후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소설이 사소설로 빠져들고 있다는 우려섞인 말을 자주 듣는다. 2021 제4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이러한 우려를 떨쳐내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생각하는 대상 작품에 공감하기 보다는 깊은 성찰을 하도록 나를 끌어 당기는 한지수 작가의 '야심한 연극반'이라는 작품에 대상을 주고 싶다. 심사위원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 소설이 사소설로 빠져들고 있다는 걱정은 당신들의 안목이 대중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한지수!! 그녀의 '야심한 연극반'을 내가 뽑은 대상작품으로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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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21 11: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말씀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한지수 작가님의 ‘야심한 연극반‘ 때문이라도 이번 44회 작품집 꼬옥! 읽어봐야 겠네요

강나루 2021-08-21 12:13   좋아요 4 | URL
빗소리를 들으며 읽기 좋은 단편소설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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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이라는 장소는 억압의 장소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여 고통을 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세상이 나의 자유를 빼앗아 고통을 주려할지라도, 나의 내면의 자유까지 빼앗지는 못한다. 감옥을 '대학'이라고 말한 고 김대중 대통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통해서 주옥과 같은 글들을 남긴 고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켰다. 감옥이라는 고통의 공간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처절한 노력을 한 빅터 프랭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통해서 제3의 심리학을 탄생시켰다. 감옥에서 절망하지 않고 영혼의 자유를 지키려 노력한 소설이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바로 그 책이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어떻게 수용소에서 영혼의 자유를 지켰을까?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었을 때, 수용소가 군대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러한 인상은 알렉신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 곳곳에서 먹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이 묘사되어있다. 죽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그릇과 숫가락까지 싹삭 핱는 모습에서 수용인들의 배고픔이 읽혔다. 그리고 군복무 시절,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팟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초코파이 하나를 먹기 위해서 가지도 안던 교회를 다녔다. 그런데, 휴가를 나오면 그렇게도 맛있어 보였던 초코파이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수용소와 군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고, 그러한 억압속에서 생존이라는 너무도 기본족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본능에 집착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도 역시 생존이라는 본능에 집착했다. 그러나, 본능에만 집착하는 동물이 되지는 않았다. 소련 공산당이 그를 동물 취급하며 수용소라는 우리안에 갖아두었지만, 이반 데니소비치는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의 규칙을 만들었다. 수용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모자를 벗었으며, 뇌물을 주어 좀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뇌물을 주려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뇌물이라는 것을 줘본 적도 없고 받아본 적도 없다. 수용소에 들어와서도 그짓만은 끝내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동물취급을 받으면서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수용소에서 혹은 군대에서 동물 취급을 받는다. "너희는 전쟁에서 한번 써먹기 위해한 소모품이야"라는 당직사관의 말을 들으면서도 소모품이 되기 싫었다. 사수가 되어 부사수에게 경계근무에 나설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재발리 PX에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왔다. 부사수에서 지금 당장 먹으라며 먹을 것을 주었다. 경계 근무지에서 경계근무 원칙을 부사수에게 외우도록 했고, 그러지 못하면 무척이나 면박을 주었다. 당직사관이 경계근무에서 복귀하는 우리에게 물어볼 것이 뻔하기에 경계근무 2시간 동안 부사수를 교육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미안해서 부사수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냐고.... 부사수는 의외의 말을 했다. 근무지에 가기전에 맛있는 먹을 것을 주어서 오히려 좋았다며 부사수는 웃었다. 그랬다. 먹을 것에 집착하는 동물적 본능에 우리는 충실했다. 그러면서도 나 혼자만 먹는 동물이 되기 싫어서 부사수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먹을 것을 나눠먹는 인간적인 모습에 부사수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수용소에서도 군대에서도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하려 노력했다. 

 수용소와 군대가 괴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담배한대를 피우며 상념에 잠기며 안정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추운 수용소에서 작업을 하기 전에 난로를 쬐며 몸을 녹인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난로가 없어도 이 순간의 자유로움이란 너무도 행복한 것"이라며 이 순간을 즐긴다. 수용소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순간의 행복을 잃지 않는다. 이 모습은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에서 볼 수 있었던 수용소에서 수용자가 찾는 조그마한 즐거움과 너무도 일치하는 모습이다. 물론, 교회에 나가서 초코파이 하나를 얻어 먹으며 행복해하던 우리들도 마냥 행복했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좋더라도 희망을 잃는다면 지옥을 맛보는 것과 같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하루를 마감하며 "그렇다. 오늘 하루는 왠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그래서 그런지 마음도 들떠서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라며 행복감에 취한다. 누구에게는 수용소 혹은 감옥이 하루도 있기 싫은 지옥일 텐데, 이반 데니소비치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벌이는 강압과 통제 속에서 내면의 자유와 행복을 느끼고 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감옥에서 독서를 통해서 엄청난 지식을 얻었고, 고 신영복 선생은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풀려날 수 있다는 기약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고전을 읽으며 마음 수양의 장으로 감옥을 이용했다. 일체유심조라했던가! 나의 심지가 굳을 수록 외부의 강압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자전적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얇지만, 절대 얇지 않은 책이다. 스탈린치하의 소련 수용소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탁월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책에 1962년 소련에서 발표되었고, 1964년 레닌 문학상 후보에 추천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4년 소련에서 추방되기 전까지 작가로 소련에서 생활을 했다. 우리는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기억하고 있다. 만약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같은 소설을 펴낼 수 있었을까? 북한이라는 곳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들이 소련에서는 가능했다. 그것이 그나마 소련과 북한의 차이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 한켠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쌓여져갔다. 러시아 출신의 한국인 박노자는 대중강연에서 소련시절 자신의 추억을 솔직하게 말했다. 빵을 구하려면 줄을 서야했지만, 소련시절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체(미르) 속에서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던 아련한 추억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소련에 대한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반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비친 소련의 그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의 제국이다. 박노자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기억하는 소련의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물론, 소련의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났던 박노자와, 조국 전쟁에서 제2급 훈장 및 붉은별 훈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소 선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8년 교정 노동형을 선고받은 솔제니친이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는없다. 과연, 누구의 기억이 현실에 존재했던 소련의 실제 이미지에 가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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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하브루타 - 랍비가 직접 말하는
랍비 아론 패리 지음, 김정완 옮김 / 한국경제신문i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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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시절,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인의 놀라운 민족성에 감탄했다. '탈무드', '탈무드 도전', '천재를 만드는 탈무드 교육' 이 세권이 그 시절에 읽은 대표적인 유대인 관련 서적이다. 탈무드를 읽으면 유대인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갖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 시절에 갖았다. 교사가 되고 나서, 하브루타라는 유대인 학습법을 알았다. 유대인 관련 서적을 읽으며 유대인의 능력을 샘솟게 하는 원천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탈무드 하브루타'를 펼쳐 들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은 '탈무드'는 재미 있는 이야기를 뽑아서 만든 어린이용 탈무드 동화책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탈무드 하브루타'는 랍비 아론 패리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한 입문서, 혹은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성격상, 유대인이 되거나, 하브루타를 배우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탈무드의 율법들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도 많은 율법들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율법을 지키려면 수도승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랍비에 의해서 씌여졌다보니, 자신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부분도 있다. 신화를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팔래세타인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했다. 

  또하나! "동아시아에서 마야인"이라는 글은 너무도 어이없었다. 이부분은 번역자의 실수인지, 랍비의 무지 때문인지 알수는 없지만, 마야인을 동아시아 사람이라고 서술한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내가 유대인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독교의 원죄론에 강한 의문을 갖았던 나로서는 원죄론을 부정하고, 신이 세상을 불완전하게 창조했고, 이 창조행위는 계속되며, 여기에 인간도 동참한다는 티쿤울람 사상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또한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숙명론에 반기를 들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한 부분은 유대교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힐렐 이라는 랍비는 토라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이것이 토란의 전부다. 나머지는 해설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논어' 위령공편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한 말과 너무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로 상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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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14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탈무드는 과대평가를 받기 쉬우면서도 오해받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해요.

강나루 2021-01-14 09: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책을 읽으며 탈무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학습법인 하브루타라는 점이에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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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적인 몸을 주신 아버지와, 영혼을 낳아주신 아버지를 가진자는 행복하다. 강신주는 유체를 주신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서 영혼의 아버지도 떠나보내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가 없다. 비, 바람을 막아주던 큰나무를 떠나 보내야 작은 나무는 큰나무 처럼 대지에 뿌리 박고 우뚝 하늘로 치솟을 수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떠나보내고 홀로 서려는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바치는 장송곡이다. 무척이나 김수영을 사랑한 강신주는 어떻게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낼까?


1. 강신주 다시 태어나다.

  항상 대중 앞에서 강해보이는 강신주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찌질했다. 가난한 가정에 코를 질질 흘리며, 소매로 흘러내리는 코를 열심히 닦아서 소매가 맨질맨질 윤이날 정도였다. 이러한 강신주는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찌질한 강신주!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글쓰기 실력이다. 책상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좋은 느낌을 풀어쓴 글이 상일 타게 되었다. 이로인해서 강신주를 괴롭히던 선생님과 강신주를 왕따시키던 학생들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신주는 알게 되었다. 글을 통해서 찌질한 강신주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강신주로 다시 태어난다.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두번째는 김수영과의 만남이다. 강신주는 자신이 평생의 삶의 맨토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강신주는 괴로울 때마다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김수영을 통해서 배운 그의 삶의 신념은 강신주의 나침반이 되었다. 

  철학 판매 분야에서 10여년 동안 독보적 1위를 차지하는 강신주는 어린시절 글솜씨와 김수영 철학의 세례를 받으며 거리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강신주의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은 강신주에게 어떠한 철학적 세례를 주었을까?


2. 단독성의 발견

 우리는 "모난돌이 정맞는다.", "튀지마라, 잘할 것도 없다. 중간만 가라."라는 말을 자주듣는다. 자신만의 삶을 살기 보다는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며,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기 보다는 타인이 하는 일반적인 말을 하며 안전하게 살도록 우리는 교육받았다. 부모로부터, 군대에서, 학교에서.....

  김수영의 시에서 강신주는 "단독성"을 발견한다. 일반적인 시가 아닌, "단독성"을 가진 시를 김수영을 썼다. 누구나 쓸 수있는 시가 아닌, 유일한 시를 김수영은 쓰고 있다.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라는 삼위일체가 이뤄지면서 김수영의 시는 단독적인 시로 우리에게 우뚝서게 된다.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는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하며 "내가 어렸을 적 영화공부를 할때 마음 깊이 새긴 말이 있다."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건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다."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세계적 감독 봉준호가 가슴에 새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강신주가 김수영에서 보았던 "단독성"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 "단독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며,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싶었던 강신주는 봉준호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서 보았던 "단독성"을 김수영에게서 보았다. "단독성"은 이렇게 거장들에게는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하지 않을까?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하듯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한다. 인구 통계상의 숫자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유일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3. 단독적인 시

  강신주가 소개한 김수영의 시는 너무도 "단독적"이다. 참신하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리고 보편적이다. 너무도 단독적인 김수영의 시 두편의 일부를 읽어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70쪽,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단독적이지 않은가?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는 납짝 엎드려 순종하다가, 만만한 선생님 앞에서는 기고만장하게 대드는 학생 처럼, 강대한 거악에는 순종하는 강아지 처럼 꼬리를 흔들다가, 힘없는 약자에게는 군림하려든다. 김수영의 부끄러운 모습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했던 우리의 진면목이다. 독재정권에는 순종하던 언론이,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정권 위에 군림하려고 자본과 기존 기득권세력과 야합하고 있다.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위대해 보이는 것은 김수영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 가장 창조적이었으며, 보편적이면서도 참신하기 때문이다. 그 어는 상상력 많은 시인의 시보다 많은 상상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수영은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한다. 진정 자신의 나약함과 직면할 수 잇는 용기가 김수영에게 있다. 그렇기에 김수영은 위대하다. 나약한 나 자신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강한척, 용감한 척하는 우리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아마도 강신주도 나와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찌질한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지 못하는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김수영이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두번째 시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너무도 충격적이다. 


  "'김OO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18쪽, 김수영, <김일성 만세>-


  2021년 지금 읽어도 너무도 충격적이고, 못내 불편함을 느끼게하는 시이다. 이러한 시를 발표하고 군사정권에서 김수영이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행히도 김수영은 이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수영이 2021년 다시 발표해도 그는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이다. 이 땅의 기레기들이 김수영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시를 인용하면서도 '김OO 만세'라고 적어 놓은 것은, 나 자신도 분단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기에는 대한민국의 땅은 너무도 척박하다.

  과거 독재로부터 압살당하던 언론은,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자본권력은 물론이고 적폐세력과 손을 잡고 민주정권을 물어 뜯고 있다. 자신에게 썩은 고기라도 던져주는 기득권들에게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충견임을 입증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수영은 분단만 넘어서면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분단을 넘어선다할지라도 기자들이 자본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 언론은 기레기들의 천국일 수 밖에 없다. 김수영이 살았을 때보다 어쩌면, 우리 언론의 현실은 더욱 비참해 보인다. 그럴수록,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단독성은 더욱 빛이 난다. 



  강신주는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을 통해서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치유했다. 그리고 단독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했다. 강신주의 어린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흡사했다. 가난한 가정과 코피를 잘 흘리는 아이, 가난하기에 새옷을 해입고 다니지 못하는 아이였다. 같은 옷을 매일 입고 다녔기에 반아이들은 나를 싫어했다. 강신주가 왕따만을 당했다면, 나는 구타도 당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없는 시간에 여러번 당하는 구타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때 나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는 행복했다. 강신주가 김수영을 발견했듯이, 나도 강신주를 발견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의 삶이 옳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방향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강신주가 생각하는 세상은 어떠해야하는 것일까?  갖가지 꽃들이 자신의 단독성을 드러내며 장엄하게 핀세상, 바로 "화엄"의 세상이 아닐까? 치과에 걸려진 TV로 박근혜 탄핵을 보던 아주머니가 '박근혜 불쌍하네'라는 말을 했다. 그때 나는 '박근혜를 동정하기 보다는 박근혜를 뽑은 우리가 반성해야한다.'라고 강변했다. 그 아주머니가 곧이어한 말은 "그럼 누구를 뽑아야해?"라고 노예처럼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 제대로된 대표를 뽑지 못하는 노예였다. "각 개인들의 철저한 국민의식, 다시 말해 메시아를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가 되고 결단과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타인에 이해서 주입된 신념과 이념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강신주가  "공통된 중심이 없어야 다양한 팽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돌 수 있는 법"이라 말했듯이, 강요되고 주입된 거짓들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의 단독성을 마음것 발현한다면 "사회는 이런 다양한 소리들로 빚어낸 교향곡"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화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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