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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하브루타 - 랍비가 직접 말하는
랍비 아론 패리 지음, 김정완 옮김 / 한국경제신문i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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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인의 놀라운 민족성에 감탄했다. '탈무드', '탈무드 도전', '천재를 만드는 탈무드 교육' 이 세권이 그 시절에 읽은 대표적인 유대인 관련 서적이다. 탈무드를 읽으면 유대인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갖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 시절에 갖았다. 교사가 되고 나서, 하브루타라는 유대인 학습법을 알았다. 유대인 관련 서적을 읽으며 유대인의 능력을 샘솟게 하는 원천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탈무드 하브루타'를 펼쳐 들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은 '탈무드'는 재미 있는 이야기를 뽑아서 만든 어린이용 탈무드 동화책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탈무드 하브루타'는 랍비 아론 패리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한 입문서, 혹은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성격상, 유대인이 되거나, 하브루타를 배우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탈무드의 율법들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도 많은 율법들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율법을 지키려면 수도승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랍비에 의해서 씌여졌다보니, 자신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부분도 있다. 신화를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팔래세타인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했다. 

  또하나! "동아시아에서 마야인"이라는 글은 너무도 어이없었다. 이부분은 번역자의 실수인지, 랍비의 무지 때문인지 알수는 없지만, 마야인을 동아시아 사람이라고 서술한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내가 유대인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독교의 원죄론에 강한 의문을 갖았던 나로서는 원죄론을 부정하고, 신이 세상을 불완전하게 창조했고, 이 창조행위는 계속되며, 여기에 인간도 동참한다는 티쿤울람 사상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또한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숙명론에 반기를 들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한 부분은 유대교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힐렐 이라는 랍비는 토라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이것이 토란의 전부다. 나머지는 해설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논어' 위령공편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한 말과 너무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로 상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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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14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탈무드는 과대평가를 받기 쉬우면서도 오해받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해요.

강나루 2021-01-14 09: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책을 읽으며 탈무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학습법인 하브루타라는 점이에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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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육체적인 몸을 주신 아버지와, 영혼을 낳아주신 아버지를 가진자는 행복하다. 강신주는 유체를 주신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서 영혼의 아버지도 떠나보내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가 없다. 비, 바람을 막아주던 큰나무를 떠나 보내야 작은 나무는 큰나무 처럼 대지에 뿌리 박고 우뚝 하늘로 치솟을 수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떠나보내고 홀로 서려는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바치는 장송곡이다. 무척이나 김수영을 사랑한 강신주는 어떻게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낼까?


1. 강신주 다시 태어나다.

  항상 대중 앞에서 강해보이는 강신주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찌질했다. 가난한 가정에 코를 질질 흘리며, 소매로 흘러내리는 코를 열심히 닦아서 소매가 맨질맨질 윤이날 정도였다. 이러한 강신주는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찌질한 강신주!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글쓰기 실력이다. 책상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좋은 느낌을 풀어쓴 글이 상일 타게 되었다. 이로인해서 강신주를 괴롭히던 선생님과 강신주를 왕따시키던 학생들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신주는 알게 되었다. 글을 통해서 찌질한 강신주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강신주로 다시 태어난다.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두번째는 김수영과의 만남이다. 강신주는 자신이 평생의 삶의 맨토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강신주는 괴로울 때마다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김수영을 통해서 배운 그의 삶의 신념은 강신주의 나침반이 되었다. 

  철학 판매 분야에서 10여년 동안 독보적 1위를 차지하는 강신주는 어린시절 글솜씨와 김수영 철학의 세례를 받으며 거리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강신주의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은 강신주에게 어떠한 철학적 세례를 주었을까?


2. 단독성의 발견

 우리는 "모난돌이 정맞는다.", "튀지마라, 잘할 것도 없다. 중간만 가라."라는 말을 자주듣는다. 자신만의 삶을 살기 보다는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며,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기 보다는 타인이 하는 일반적인 말을 하며 안전하게 살도록 우리는 교육받았다. 부모로부터, 군대에서, 학교에서.....

  김수영의 시에서 강신주는 "단독성"을 발견한다. 일반적인 시가 아닌, "단독성"을 가진 시를 김수영을 썼다. 누구나 쓸 수있는 시가 아닌, 유일한 시를 김수영은 쓰고 있다.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라는 삼위일체가 이뤄지면서 김수영의 시는 단독적인 시로 우리에게 우뚝서게 된다.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는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하며 "내가 어렸을 적 영화공부를 할때 마음 깊이 새긴 말이 있다."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건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다."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세계적 감독 봉준호가 가슴에 새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강신주가 김수영에서 보았던 "단독성"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 "단독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며,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싶었던 강신주는 봉준호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서 보았던 "단독성"을 김수영에게서 보았다. "단독성"은 이렇게 거장들에게는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하지 않을까?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하듯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한다. 인구 통계상의 숫자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유일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3. 단독적인 시

  강신주가 소개한 김수영의 시는 너무도 "단독적"이다. 참신하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리고 보편적이다. 너무도 단독적인 김수영의 시 두편의 일부를 읽어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70쪽,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단독적이지 않은가?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는 납짝 엎드려 순종하다가, 만만한 선생님 앞에서는 기고만장하게 대드는 학생 처럼, 강대한 거악에는 순종하는 강아지 처럼 꼬리를 흔들다가, 힘없는 약자에게는 군림하려든다. 김수영의 부끄러운 모습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했던 우리의 진면목이다. 독재정권에는 순종하던 언론이,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정권 위에 군림하려고 자본과 기존 기득권세력과 야합하고 있다.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위대해 보이는 것은 김수영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 가장 창조적이었으며, 보편적이면서도 참신하기 때문이다. 그 어는 상상력 많은 시인의 시보다 많은 상상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수영은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한다. 진정 자신의 나약함과 직면할 수 잇는 용기가 김수영에게 있다. 그렇기에 김수영은 위대하다. 나약한 나 자신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강한척, 용감한 척하는 우리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아마도 강신주도 나와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찌질한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지 못하는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김수영이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두번째 시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너무도 충격적이다. 


  "'김OO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18쪽, 김수영, <김일성 만세>-


  2021년 지금 읽어도 너무도 충격적이고, 못내 불편함을 느끼게하는 시이다. 이러한 시를 발표하고 군사정권에서 김수영이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행히도 김수영은 이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수영이 2021년 다시 발표해도 그는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이다. 이 땅의 기레기들이 김수영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시를 인용하면서도 '김OO 만세'라고 적어 놓은 것은, 나 자신도 분단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기에는 대한민국의 땅은 너무도 척박하다.

  과거 독재로부터 압살당하던 언론은,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자본권력은 물론이고 적폐세력과 손을 잡고 민주정권을 물어 뜯고 있다. 자신에게 썩은 고기라도 던져주는 기득권들에게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충견임을 입증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수영은 분단만 넘어서면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분단을 넘어선다할지라도 기자들이 자본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 언론은 기레기들의 천국일 수 밖에 없다. 김수영이 살았을 때보다 어쩌면, 우리 언론의 현실은 더욱 비참해 보인다. 그럴수록,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단독성은 더욱 빛이 난다. 



  강신주는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을 통해서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치유했다. 그리고 단독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했다. 강신주의 어린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흡사했다. 가난한 가정과 코피를 잘 흘리는 아이, 가난하기에 새옷을 해입고 다니지 못하는 아이였다. 같은 옷을 매일 입고 다녔기에 반아이들은 나를 싫어했다. 강신주가 왕따만을 당했다면, 나는 구타도 당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없는 시간에 여러번 당하는 구타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때 나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는 행복했다. 강신주가 김수영을 발견했듯이, 나도 강신주를 발견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의 삶이 옳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방향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강신주가 생각하는 세상은 어떠해야하는 것일까?  갖가지 꽃들이 자신의 단독성을 드러내며 장엄하게 핀세상, 바로 "화엄"의 세상이 아닐까? 치과에 걸려진 TV로 박근혜 탄핵을 보던 아주머니가 '박근혜 불쌍하네'라는 말을 했다. 그때 나는 '박근혜를 동정하기 보다는 박근혜를 뽑은 우리가 반성해야한다.'라고 강변했다. 그 아주머니가 곧이어한 말은 "그럼 누구를 뽑아야해?"라고 노예처럼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 제대로된 대표를 뽑지 못하는 노예였다. "각 개인들의 철저한 국민의식, 다시 말해 메시아를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가 되고 결단과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타인에 이해서 주입된 신념과 이념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강신주가  "공통된 중심이 없어야 다양한 팽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돌 수 있는 법"이라 말했듯이, 강요되고 주입된 거짓들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의 단독성을 마음것 발현한다면 "사회는 이런 다양한 소리들로 빚어낸 교향곡"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화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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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
간호윤 지음 / 한국경제신문i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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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책을 선택할때는 수많은 비법을 기대하며 책을 고른다. 글을 잘쓰고 싶은 욕망이 글쓰기 책으로 나를 인도한다. 다산과 연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들이 쓴 책과 그들이 읽은 책들은 우리에게 큰 문화적 자산이다. 그들의 글솜씨의 일부나마 배우고 싶어 책을 펼쳤다.


1. 책읽기

"진신서불여무서(盡信書則不如無書)"라는 '맹자'의 글이 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라는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글귀는 '맹자'의 말이다. 책속의 글을 모두 믿는다면 글 없음만 못하다라는 이글귀는 나의 뇌리에 꽃혀 깊은 감동을 주었다. 비판적 글읽기를 할 수 없다면, 나의 눈으로 책을 바라볼 수 없다면, 나는 책의 노예가 될뿐이다. '창조적 오독'을 하며 나의 눈으로 책을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한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미 2천년 전에 맹자가 비판적 글읽기의 중요성을 말했다. 책에 지배당하지 말고, 책을 부릴 수 있는 지혜를 갖자!


2. 글쓰기

'다산처럼 읽고 연암처럼 써라'라는 책을 쓴 간호윤은 글을 잘썼는가? 간호윤의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기에 그의 글을 평할 수 없다. 그러나, 이책만을 놓고 평하자면, 좋은 평을 할 수없다.

첫째,  책을 '논'과  '해'로 나눠서 집필했다. 이로인해서 책읽기가 힘들었다. '논'은 어려운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고, '해'는 평이한 내용으로 꾸며져있다. '논'과 '해'를 하나로 녹여 서술했다면, 독자들이 책을 읽기 쉬웠을 것이다. '논'과 '해'가 분리되어 있기에 '논'과 '해'가 따로 논다. 논문을 읽듯이 본문과 주석을 읽어야하는 번거로움은 책의 이해를 어럽게했다.

둘째, 간호윤의 글은 고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잘쓰지 않는 글들을 가져다 표현한 점은 우리글을 살리고, 간호윤의 어휘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특히 '논'을 읽고 이해하는데 힘이들었다. 

간호윤의 글은 적어도 나에게는 잘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글쓰기 책들을 읽기 전에는 책속에 엄청난 글쓰기 비법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갖는다. 책을 다읽고 나서는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는 내용이 없음을 깨닫고 실망한다. 부지런히 책읽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반드시 퇴고해라! 당연한 글쓰기 비법을 알기 위해서 수많은 글쓰기 책을 읽은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 글쓰기에 어찌 특별한 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부지런히 책일고, 부지런히 글쓰고, 부지런히 퇴고하자! 이것이 글쓰기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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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생쥐가 한 번도 생각 못 한 것들
전김해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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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시절, 교과서에 '사자와 생쥐' 동화가 실려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읽었던 아련한 기억이 '사자와 생쥐가 한번도 생각 못한 것들'을 친근하게 만들었다. 사자가 생쥐에게 친구가 될 것을 청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곳곳에 숨어 있는 삽화들도 이 책에 대한 친근감을 더해준다.

 

'사자와 생쥐'이야기를 확장시켜 모험을 떠나는 설정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다사자를 친구로 만나고, '선녀와 나뭇꾼'을 만난다. 서양의 '사자와 생쥐' 이야기가 우리의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로 이어지는 설정은 더욱 흥미롭다.

 

그러나,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는 미투운동 이후, 나뭇꾼을 혼인을 빙자해서 여성을 납치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에 마음 한구석이 못내 불편했다. 암튼, 선녀도 나뭇꾼을 사랑했기에 '선녀와 나뭇꾼' 이야기에 대한 시비는 넘어가자.

 

하늘 나라 옥황상제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라. 이 경험은 너에게 연민, 겸손, 배려, 용서, 뉘우침, 인내, 절제와 같은 진귀한 보물들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지니고 오너라. 그 사랑은 목숨마저 아낌없이 줄 수 있는 희생이니라. 이 우주를 통틀어서 희생보다 더 귀하고 숭고한 가치는 없단다."

 

여성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한생명을 품고 낳아 기르는 것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일이다. N번방 사건, 정준영 사건 등으로 세상이 험악해지는 요즘. 여성을 왜? 범죄로 부터 보호해야하는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하는 구절이다. 한여성은 이 사회의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보호를 받아야한다.

 

어른인 내가 읽었지만, 우리집 아이들이 흥미있어했다.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자와 생쥐', '선녀와 나뭇꾼'이야기이다보니, 더욱 친근한가 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이뤄지는 요즘,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은 어른과 학생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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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6 0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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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는 경계인의 예민한 눈으로 한국사회를 들여다본다. 그 매서운 눈길에 때로는 감탄을 하고, 때로는 강한 반발을 하기도한다. 2002년 월드컵때 붉은 악마들에게 파시즘의 모습이 보인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으며, 안중근 의사를 인종주의에 매몰된 인물처럼 쓴 글을 보면서 강한 반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박노자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우물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서 밖의 드넓은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경계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그의 글이 필요했다. 인간 박노자의 생각을 탐구해보기 위해서 '박노자의 만감일기'를 꺼내들었다. 경계인인 그의 내면속에는 어떻한 생각들이 펼쳐질까?

 

1. 여린 마음을 가진 박노자.

  한국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쓰디쓴 독설을 내뱉는 박노자의 글들을 보면서, 그는 강한 투쟁정신으로 무장한 투사의 이미지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읽기를 읽노라면, 그가 얼마나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년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소련과 독일이 싸운 '조국전쟁'을 소재로 만든 영화영화를 보면서 느낀 소감은 그의 여린 마음을 알기에 충분하다. 박노자는 소련군 남성이 독일군 중년 여성을 죽이는 클라이막스를 보며 '뿔쌍하게 죽은 여성'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보통의 남성들이 힘에 대한 숭배, 화려한 전투씬에 대한 감탄을 하는 것과 너무도 대조적이다. 섬세하면서도 여린 그의 심성이 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했다. 나아가 수많은 폭력에 대한 가열찬 저항을 하게 했다.

  그는 군대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폭력과 권위주의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가지고 있다. 군대, 폭력, 권위주의는 전체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만, 개인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저항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나키스트의 모습이 보여진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단체인 의열단에 의해서 이뤄진 의열 투쟁에 대해서 박노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적의 총알받이가 된 이국의 최하급 관리를 폭사시키는 것보다 그들에게 이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여 계급운동으로 이끄는 것이 도덕적인 차원이든 운동 논리의 차원이든 훨씬 낫지 않았을까."-162쪽

 

  개인을 억압하는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아나키스트 단체 의열단에 대한 그의 평가는 너무도 박하다. 박노자는 '일제 군대의 시베리아 출병 때 고려인 공산주의자들이 선전 선동을 펼쳐 큰 성과를 얻은 경우'도 있음을 근거로 폭력에 의한 투쟁보다 일본인들에 대한 '세계의 실상을 설명'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이러한 박노자의 주장을 읽으면서 그가 완벽한 '낭만주의자'임을 확신했다. '김산의 아리랑'의 주인공 장지락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도, 3.1운동 시기 일제의 총칼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나약한 기독교 인들에 대한 모습을 보고 난 이후부터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일제를 설득시키려했으나 그들은 무참히도 총칼을 휘둘렀다. 독립은 감상적인 행동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만국공법에 따라서 포로 수용소에 적군포로를 가두든지, 아니면 풀어주어야한다는 원칙을 지켰던 안중근이 결국은 자신이 풀어준 포로의 밀고에 의해서 처절한 패배를 맞이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박노자의 평화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독립운동의 방법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평화주의적 방법이 항일 투쟁의 일부분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나 이를 항일투쟁 전체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박노자는 의열투쟁보다 공산주의 투쟁을 더욱 효율적이라고 본다.

 

  "폭력을 주된 도구로 하는 '소수 영웅들'의 투쟁인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중성이 확보된 공산주의적 투쟁, 즉 노조와 당 건설, 파업 주도 등은, 이에 비해서 훨씬 덜 폭력적이면서도 더 효율적이었다."-164쪽

 

  의열투쟁보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이뤄진 투쟁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박노자의 주장도 동의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을 건설하고 노조를 결성해서 일제에 투쟁하려했으나, 그들의 분파 투쟁으로 인해서 당은 제대로 된 생명력을 갖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분파를 위해서 상대 분파를 해치는 일도 있었다. 그들에 의해서 이뤄진 파업도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박노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편애가 역사를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듯하다. 그의 여린 마음이 감상적 항일투쟁이 효과적이라는 편견을 만들었다.

 

2. 그가 불교를 사랑한 이유

  박노자의 글을 읽다보면, 외국인이 이해하기 힘든 불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박노자는 어려서 '법구경'과 '수타니파타' 초역본을 읽으며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나는 고교시절에 "법구경"과 "수타니파타"의 초역본을 읽고서야 자기 내면의 분노와, 그 원천인 탐욕 아집 어리석음을 없애고 자기와 남을 동일시하는 것이야말로 '남성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남을 칼로 찌를 생각과 능력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덕분이었다."-48쪽

 

  폭력이 여린 소년 박노자를 괴롭혔고, 그 번뇌에서 불교가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하나를 좋아하면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의 모든 것을 합리화하려한다. 박노자는 그러하지 않다. 그는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의문을 던지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불교를 매섭게 비판한다.

 

"'이단인'과 종교 전쟁을 하지 않는 등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승불교든 상좌부 불교든 국가의 폭력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국가를 보호자로 삼는 것은 불교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사실이다. (중략) 신라말기부터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승병 동원 등은 어떤가?"-278쪽

 

  박노자의 철저한 비폭력주의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임진왜란 시기 승병이 목탁을 집어던지지 않았다면 평화가 지켜졌을까? 일본군의 칼날 앞에 도륙되는 조선의 민초를 살리기 위해서 칼을 들 수밖에 없는 조선의 승병들을 박노자는 이해하지 못하는가? 집안에 강도가 들어 가족을 위협하는 상화에서도 박노자 당신은 몽둥이를 들고 대항하지 않을 것인가? 자신의 가족이 눈앞에서 유린당한다해도???

  박노자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해 우리 보두에게 "나는 살인기술을 배우지 않겠다"고 외칠 용기가 생기기를' 기원했다. 군대에가서 살인 기술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세상의 모든 악이 사멸되는 시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 때가 도래하기를 바래본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이 살아가야하는 현실은 이상사회가 될 수 없다. 단지 이상사회에 다가가려 노력할 뿐이다.

 

3. 박노자는 한국을 사랑하는가?

  박노자는 '한국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권력과 지배, 돈이라는 일차적인 맥락을 무시한 '한국 전체에 대한 사랑'은 아마도 성립이 될 수 없는 개념인 듯하다."-213쪽

 

  박노자는 한국이 안고 있는 폭력성과 순치되고 있는 노예성등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철학자 강신주가 한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아픔까지도 사랑해야한다고 말했다. 박노자가 한국을 사랑하려면 한국의 아픈 곳까지 사랑해야한다.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폭력성과 순치되고 있는 노예성도 보듬어야 그 아픔을 딛고 나아갈 수 있다. 폭력성과 노예성을 긍정하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폭력성을 줄이고 노예들을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보듬고 치유하려해야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부분만 사랑하려는 박노자의 모습은 한국을 바라보는 삐뚤어진 시선으로 옮겨진다.

 

"북한 대중을 아예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통치자간의 야합을 '통일'로 생각하는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지만, 노무현 정권으로서야 백낙청과 같은 현대판 '산림'의 협력은 하늘로부터의 선물일 테다. (중략) (강만길 선생이) 이름뿐인 '친일 청산'의 수장 역할을 맡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중략) '민족'까지 잘 모르지만, 개인의 '정기'를 바로잡자면 학교에서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고 키스를 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쪽이 더 빠르지 않은가 싶다."-126쪽

 

"노무현 정부는 남한이든 북한이든 이 한반도의 민초들을 자본의 영원한 예속민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231쪽

 

  소년시절을 소련에서 자란 박노자에게 어린시절 공산 소련사회는 추억의 장소이다. 그 추억의 장소는 빵배급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는 사회이지만, 공동체 사회가 해체되지 않은 안식의 장소였다. 박노자는 그 안식의 장소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공산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절대 좋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박노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없다. 거대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미시적 악도 제거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알고 있을까? 친일 청산을 위해서 '친일 인명사전'을 편찬하고, 북한과 화해 협력을 이뤄내려는 일련의 노력이 없이는 북한 주민들의 억압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알지 못하는가?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남북통일을 위한 노무현정부의 일련의 노력을 '자본의 영원한 예속'으로 비춰진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나의 오만일까?

  한국사회가 일제강점기 아픔을 지금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순을 없애지 않는다면 불의가 승리하는 추악한 역사를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박노자는 알지 못한다. 한국근현대사의 아푼 역사를 어루만지는 사랑이 없다면 햇볕 정책도 친일 청산 노력도 부질 없는 것이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아픔까지 사랑한다면 우리의 노력을 이렇게 매몰차게 비판할 수 없다.

 

4.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민족'인가?

박노자는 '민족'과 '국가'를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박노자에게 '민족'과 '국가'는 폭력의 대상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천여년 동안을 나라없는 민족으로 유랑해야했다. '국가'는 그들을 학살하거나 차별했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민족이라는 단어를 꺼낼 수 없었던 스탈린 시대가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기라는 역설이 벌어졌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대한민국에 귀화하면서 더 강력하게 '민족'과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우리에게는 그의 글이 신선함으로 다가왔지만, 그에게는 생명이 위협받는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한국사회의 진정한 문제점은 '민족'이 아니라, '마을'이라고 토로한다.

 

  "가족이든 동창이든 친한 지인이든 정말 '관계'가 있는 사이라면 한국인만큼 잘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완전한 타인들이 익명으로 서로 접촉하는 인터넷이라면 바로 정반대가 된다. (중략) '마을의식'이라 할가? 자기 마을 안에서는 예의범절을 다 챙기지만, 바같에 나가면 속을 풀대로 푸는 전근대적 '소속 소집단 중심의 사회적 연대'인 셈이다. 글쎄, 나 같은 사람들은 '민족주의' 등의 거대담론들을 자꾸 문제 삼지만,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범주는 사실 무슨 '민족' 보다도 이 '마을(가족, 동창집단, 친구들 등 가가운 사람들)'인 듯하다."-110족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혈연과 지연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박노자는 이를 '마을의식'이라 표현했다. 일제 식민지배와 6.25, 산업화를 거치면서 커지는 불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와줄 끈이 필요했다. 그 끈을 혈연과 지연으로 대표되는 '마을의식'에서 찾았다. 이러한 '마을 의식'은 부정과 부패, 불합리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박노자의 말대로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마을의식'일지도 모른다. 이 마을 의식이 인터넷과 만나면 악성 댓글로 표출된다. 그 악성 댓글에 목숨을 끊는 연애인이 발생하기도한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찾는 우리의 모습을 언제쯤 찾아볼 수 있을까?

 

 

박노자의 글을 언제나 새로운 화두를 던져준다. 소련붕괴 직후의 러시아에가서 점령군 행세를 하는 한국의 유학생들과 목사들의 모습에서 통일 북한 지역에서 벌어질 통일 남한 사람들의 점령군 모습을 본다는 박노자의 견해와, 현실 정치에 관심없는 일본대중의 모습에서 일본의 평화와 안전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의문이라는 그의 견해는 나에게 많은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었다. 때로는 통쾌하기도 하지만, 박노자의 글은 항상 불편하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글과 불편하지만 동의하지 않을 없는 글들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노자의 글을 읽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사회를 덮고 있는 껍질을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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