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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지음 / 금강초롱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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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궤'반환, 문정왕후 어보 반환, 응답하라 오바마 프로젝트 성공 ...... 하나의 문화재를 반환 받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는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이땅에 다시 모셔왔다. 그리고,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라는 책은 문화재 반환을 위한 그의 노력과 결실, 실패와 좌절, 산적한 과제를 그의 호소력있는 필체로 써내려갔다. 팟케스트를 통해서 그의 강의를 많이 들었지만,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흘러 넘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가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자신의 모든 것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쏟아붓고 있는 것일까??


  혜문스님이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혜문스님이 어느 비구니 스님의 개인차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흥국사 지장전에 있어야할 탱화 두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혜문 스님은 그 탱화가 밀반출된 탱화임을 알았고, 그 탱화를 회수했다. 그런데, 여론은 옳은 일을 한 혜문 스님을 칭찬하지 않았다. '문중 어른의 약점을 캐내 까발린 하극상'이라며 여론은 그를 매몰차게 나무랐다.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오히려 몰매를 맞는 억울한 일이 벌어졌다. 정의가 힘을 갖지 못해 비열한자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것보다 서글픈일이 없다. 혜문 스님은 그 서글품을 안고 도망치듯이 일본에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만났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을 되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다. 

  어떤이는 시련에 용기를 잃고 좌절한다. 어떤이는 시련을 딛고 일어선다. 혜문 스님은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오히려 그 시련이 그를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이라는 숭고한 가시밭기를 가도록했다. 우리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시련에 좌절하기 보다는 그 시련이 나를 더 크게 만들수 있다. 그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그 시련으로 부터 교훈을 얻어 삶의 밑거름으로 삼는다면 말이다. 

  문정왕후 어보를 환수한 혜문 스님은 대한제국 국새를 반환하는 작업을 추진한다. 그런데, 반환 받기로 한 국새를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가져오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작전명 '응답하라 오바바'이다. 어짜피 반환받을 것이면 형식이 뭐가 중하겠는가! 굳이 오바마 대통령을 자극할 필요가있을까? 이러한 회의 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대해서 혜문 스님은 강대국들에게 짓밟힌 민족적 자존심, 상처받은 민족혼을 치유하기 위해사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문화제 반환운동사에서 세계사적 사례를 만듦으로해서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큰 뜻을 밝히다. 역시, 혜문 스님은 달랐다. 단순히 우리 것을 되찾겠다는 일차원적 생각에서 머무르지 않고, 상처받은 민족의 역사를 보듬고, 강대국의 군화발에 위축된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하고 있다. 그가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하면서 가지고 있는 사명감에 다시금 감탄을 한다. 

  그의 문화재 반환 운동은 반드시 성공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쿠라 컬렉션 반환 소송에서 그는 승리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법정에서 이겨야만 이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라며 강단있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자신의 노력이 뒷날 누군가의 길이 될 것이라 믿으며 묵묵히 문화재 반환 소송을 진행했다. 이러한 노력은 지금 당장 결실을 맺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혜문 스님의 뒤를 따르는 뜻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추진하는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혜문 스님의 모든 주장에 동의할 수만은 없다. 혜문 스님은 명성황후를 살혜한 히젠도를 환수하려하고 잇다. 히젠도 환수 위원회 발대식 사진에는 "국치의 상징, 히젠도를 즉가 폐기하라."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히젠도가 본래 우리것이라면 '환수'라는 단어를 쓸 수 있다. 그러나 히젠도는 우리것이 아니기에 '환수'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부적합하다. 

  또한, '즉각 폐기'하라는 글귀도 이해할 수 없다. , '국치의 상징'이기에 '즉각 폐기'해야할까? 오히려 히젠도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증거이기에 폐기 보다는 보존하면서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학습교재로 사용해야하지 않을까? 



  혜문 스님은 이 시대의 안용복이 되어 우리의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서 고분분투하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청하여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불만 가득한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대 이모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토히로부미가 대출해간 규장각도서를 반환하기 위해서 서울대에서 한일이 없다고 따가운 질문을 기자가 했다. 이에 대해서 이모 교수는 '한일 협정'과 예산 타령을 하며 민간은 '감정적'이라고 질타했다. 나태한 소위 명문대 교수들의 인터뷰를 읽으며 무엇무엇 '때문에'할 수 없다는 말보다 무엇무엇 '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옳기에 우리는 간다는 시민 단체의 뜨거운 감정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혜문 스님은 그 뜨거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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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읽는 통섭의 한국사 - 명작 밖으로 나온 한국사, 한국사 속으로 들어온 명작
이동연 지음 / 북오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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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작으로 읽는 통섭의 한국사'!! 책 제목이 참으로 멋있다. 한국사를 명작들과 같이 읽는다는 기획 자체는 참으로 산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상은 크지만 그 이상을 실현할 능력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가이다. 저자 이동연은 풍부한 문학작품을 읽고 이를 한국사에 녹여내려 노력했다. 문학만 공부하는데도 벅찰텐데 역사까지 공부해야하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동연의 노력과 시도 자체에 일단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이동연 이상은 높지만,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왜 그럴까? 이동연이 빅뱅에서 부터 역사를 서술하면서 '어린왕자'를 먼저 언급했다. "우리가 서로 길든다면, (중략) 가령 4시에 만나기로 했다면 내 가슴은 벌써 3시부터 설레기 시작하리라"-14쪽 라는 문장을 제시한 것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역사를 서술하면서 이렇게 아름답게 서장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동연의 이러한 시도를 실생활에서 사용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명작으로 읽는 통섭의 한국사'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기대는 거기까지 였다. 

  이동연은 '환단고기'에 근거하여 역사를 설명했다. 역사 학계에서 위서로 결론난 책을 근거로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서술하는 자체가 나로서는 불편했다. 저자의 역사에 대한 전문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책에 서술된 내용 중에서 내가 보지 못한 사료에서 근거해서 서술된 내용이 있겠지만, 혹시 작가의 상상력과 '환단고기'와 같은 조작된 사료를 근거로 주장하는 내용이 있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기에 역사책을 서술하면서 당연히 오류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애교수준으로 믿고 책을 편히 읽어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이동연의 책은 나에게 불신을 안겨주었다. 

 책을 다읽고, 생각에 잠겼다. 이상은 높지만, 이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자는 이상을 이루려 도전하는 것이 부적절할까? '논어'에 문지기가 '당신은 누구의 제자요?'라고 묻자, 자로는 '나의 스승은 공자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문지기는 '아! 그 안되는 걸 알면서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말이요.'라고 답했다. 역사에 대한 해박하면서도 정확한 지식을 갖았다고 보기 힘든 이동연이 명작과 한국사를 통섭시키려한 노력은 참으로 놀랍다. 지금은 그 결과물이 초라하다할지라도, 이러한 노력이 쌓인다면 뒤에서 오는 작가에게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동연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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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3-09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사를 전공한 사람으로
환단고기는 정말...

별 한 개가 빤짜거립니다.

강나루 2022-03-09 17:11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도 역사전공이군요^^

mini74 2022-03-09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환단고기를 근거로 하는 책이라니 헉. 강나루님 속상하셨겠어요 ㅠㅠ

강나루 2022-03-09 17:22   좋아요 1 | URL
답답했지요. ㅠㅠ
 
왕과 나 - 왕을 만든 사람들 그들을 읽는 열한 가지 코드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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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일의 책을 많이 보아왔다 10여권이 넘는 이덕일의 책들을 읽으면서, 강한 흡입력을 가진 그만의 문체를 배워보고 싶었다. 역사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덕일의 역사관이 이책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물론 이책을 읽기 전에 나는 '조선의 왕을 논하다'라는 이덕일의 책을 읽었다. 이덕일의 사각으로 조선의 왕을 논한 점이 무척신선했다. 그와 대비되는 책이 바로 이 책 '왕과 나'였다. 왕을 만든 사람들의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신선한 구성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참모의 모습을 관통하는 코드였다. 11개의 코드로 각 참모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젠다, 헌신, 시야, 사상, 시운, 정책, 기상, 악역, 실력, 맹목, 역린' 이들 참모의 모습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주군을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족함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는 격언을 지키지 않고 역린을 건드린 결과 울분속에서 삶을 마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과거의 지금의 시대는 바뀌었다. 조기 대선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 과연 '킹'을 만들기 위한 '킹메이커'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야할까? 이덕일이 제시한 11개의 코드는 지금도 유효한 코드들이지만, 반드시 유효하지는 않다. 만인지상에 자신의 주군을 올려 놓고, 그 다음에 다시 자신이 만인지상에 오를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다. 5년 마다 푸른색 기와집의 주인이 바뀌는 지금! 참모였던 사람이 푸른 기와집의 주인에 도전하고 있다. 지방의 작은 기와집의 주인 둘이서 그 뒤를 쫓으며 서울의 큰 푸른색 기와집의 주인이 되려는 자도 있다. 세사람중에 한사람은 푸른색 기와집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경선이 끝나고 선거일이 되면, 이들 중에는 대표주자의 참모가 되어 경쟁자를 주군으로 모실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5년 후에 다시 푸른색 기와집의 주인이 되려할 것이다. 그들에게 이 책의 코드를 들려주고 싶다. 새시대의 어젠다를 제시했는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자신의 사상을 담은 정책을 실력있는 참모들을 모아 실현할 수 있는가? 때로는 이 나라의 개혁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맹목적이기까지한 악역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국민에게 헌신한다면 시운에 따라 푸른색 기와집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기상을 펼치는 그런 리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 기억하고 잊지 않아야할까?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높은 파고를 넘기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일 것이다. 지난 잃어버린 9년을 딛고 새로운 100년을 설계하기 위해서 지금의 주자들은 이 책을 읽어봐야한다.

 

ps. 이 책을 읽으며 대동법 실시가 얼마나 힘들었으며, 백성들이 얼마나 시행을 바랬는지를 알 수 있었다. 관련 사료를 보자.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 관청의 방납인에게 막혀, 한 물건의 값이 서너 배에서 수십, 수백 배까지 되니 그 폐해가 이미 고질이 되었는데 경기도가 특히 심합니다. 지금 마땅히 따로 하나의 관처을 설치해서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농지 1결 당 두번에 8말을 거두어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그때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후하게 산정해서 거두어들인 쌀을 방납인에게 주어서 필요한 때에 물건을 사들이게 해서 간사한 꾀로 물가가 오르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광해군일기, 즉위년, 5월 7일

 

호서에 대동법을 실시하기로 처음 정했다. 우리나라의 공법은 심하게 무너져서 서울의 호활한 무리들이 경주인이라고 칭하면서 여러 도에서 바치는 공물을 못 바치게 막고는 그 값을 본읍에서 배로 징수했다. 그 물품 값이 단지 1필이나 1두에 불과하지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심지어 수십 필, 수십 석까지 이르렀다. 탐관오리들과 연줄을 타서 이익을 꾀하는데, 마치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큰 구멍 같아서 그 폐단이 점점 불어났다.-효종실록, 2년 8월 24일

 

이러한 대동법은 조선왕조를 보존하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관련 사료를 보면,

 

대소 사민이 서로 "우리가 비록 신해년(현종 12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 대동법 이전에는 농지 1결에 살을 60두씩 바쳐도 부족했지만 대동법 이후에는 1결에 10두씩 만 내어도 남습니다. 만약 대동법을 혁파한다면 백성이 굶주리고 흩어져도 구할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승정원일기, 현정 1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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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의 얼을 찾아서
김갑동 지음 / 서경문화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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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에서 낳고 자랐지만 충청에 대해서 제로 알고있지 못했다 이런 갈증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던중 이책을 교수님께 선물받았다 바쁘다는 핑게로 제때 읽지못하다가 책장을 넘겨갔다
초반은 지루했다 그러나 선사시대를 지나자 책의 재미가 무척 커지기 시작했다. 너무도 친근하고 너무도 가까이 있기에 충청의 역사를 잘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된 충청의 역사는 새롭고 박진감이 넘치는 역사였다.

 

특히 나의고향인 연기 대첩이 원나라에 항복이후에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 새로웠다. 원세조가 "당태종도 물리친 그대의 나라가, 그런 애송이 하나 제압하지 못해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무슨일인가?"라는 조롱어린 말을 할때, 이를 듣고 있어야했던 고려의 사신을 얼마나 비통한 마음이었을까? 원나라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세력이 고려에 쳐들어왔을때, 이들을 연기에서 크게 물리친 것은 그 때의 상처난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치료해주었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대전의 인물 송시열과 김장생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되었다. 비상한 머리로 조선의 사상계를 이끈 송시열과 김장생의 흔적이 대전에는 잘 남아있다. 이를 저자는 자세히 설명해주며, 추청의 얼을 되새기게해주었다.  그러나 조선의 노론세력이 우리역사에 미친해독을 생각하면 지나친 미화인것같기도하다. 향토사의 문제점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애향심을 드높이려다 보니,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삐뚤어진 애향심만을 고취시키는 것은 아닌지 약간 걱정이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나름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낳고 자라온 땅에 서려있는 역사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충청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자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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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 - 맥락이 보이는 한국사 60장면
남경태 지음 / 산천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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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태식 역사 읽기의 이해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고

 

남경태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종횡무진 세계사』와 『종횡무진 동양사』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세계사를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수업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 세계사 대중 서적들을 뒤적이다 발견한 이책들은 나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물론, 역사전공자가 아니기에 일정한 한계는 있었으나, 상당한 내공의 역사서적을 집필했다는 것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충분했다. 그리고 남경태의 또 다른 책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를 읽게 되었다 .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에 다시 한번 빠져보았다.

 

1. 냉철한 비판과 다른 시선

남경태식의 역사읽기의 한가지 특징은, 너무도 냉철한 비판적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한국의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과 사랑에서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물론,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친일 독재의 시선으로 한국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은 예외이다.)

남경태의 이러한 냉혹한 시선은 ‘진경시대’에 대한 비판에서 더욱 혹독하다. 청나라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조선이 택할 길은 말뿐인 ‘북벌론’과 ‘소중화 의식’이었다. 한때, ‘북벌론’은 마치 자주적인 운동인양 배워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소중화 의식’이 있었기에 우리 산천에 대해서 재발견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진경시대’가 출현하였다. 이 시대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남경태는 이를 ‘우물안의 개구리’로 표현한다. 비록 진경산수화로 대표되는 위대한 문화 유산이 탄생하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지만, 냉혹하게 본다면 ‘진경시대’는 우물안의 개구리가 자신을 기형적으로 자각하면서 탄생한 것이다.

남경태는 ‘권지국사’라는 표현도 냉혹하게 지적한다. 중국이라는 강국에 인접했기에 외교상에 중국의 책봉을 받아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고려와 조선의 초기 지배층들의 모습을 냉혹하게 ‘자주’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어찌보면, 자주적인 국가로서 너무도 치욕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러한 남경태의 냉혹한 시선은 때로는 독자를 불편하게도 한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사랑으로만 보아서 일까.....

 

2. 남경태식의 한국사 맥락

이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남경태 식의 한국사를 바라보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대’, ‘중화사상’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

남경태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삼국통일을 ‘굴욕적인 삼국통일’로 평가한다. 단순히 ‘불완전한 삼국 통일’을 넘어 ‘굴욕적인 삼국통일’이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사실은 신라가 중국의 한 지방과 같은 입장이었고, 스스로도 그런 관계를 원했다는 점, 나아가 당시 동양의 국제 질서가 그랬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역사를 중국과 독립적이고 상당 부분 자주적인 것으로 보는 ‘현대적’관점은 과거 우리 역사의 본 모습을 오히려 감추고 있는 것이다. (중략)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1천 300년간 한반도는 중국과 대등한 관계에 있어본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한게 아니라 중국이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중국 중심의 고대적 국제질서를 확립한 사건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한 이해일 것이다.

 

삼국통일에 대한 남경태식의 새로운 관점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점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역사학계의 견해와는 달리, 사대주의 역사관으로 평가하며, ‘조선’과 ‘화령’이라는 국명중에서 ‘조선’이 근세 조선의 국명으로 낙점된 것을 지적하며, 조선왕조의 국호 조차도 사대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서양인이 조선에 오지 않은 이유가 당시 서양인들은 조선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굳이 조선에 까지 올 필요가 없었고, 조선도 스스로 중국의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고 여겼기에 굳이 별도로 서양인과 접촉할 통로를 열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다. 일본을 ‘왜’로 낮춰부른 것도 중국을 본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사대주의를 떨쳐 버리고 일어선 것은 동학 농민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이다.

이러한 한국사를 보는 남경태식의 관점이 한편으로는 새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에 대한 지나친 비약적 폄하로 읽혀지기도 한다. 내치에서는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군사와 외교는 중국에 맡겼다는 남경태의 비약적인 지적은 동의할 수 없다. 분명, 고려는 ‘내제외왕체체’라 하여, 안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밖으로 중국과 외교를 할 때만 왕을 칭하였다. 그래서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황상’, ‘황도’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고려의 왕의 곤룡포 색깔이 황제의 색인 ‘황색’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또한, 조선도 대외 평화를 위한 목적으로 명에 사대를 했다.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실력으로 맞서려고 까지 했다. 단지 조선 후기에 와서 ‘재조지은’이라 하여 명을 부모의 나라로 받드는 모습들이 나왔을 뿐이다.

 

3. 옥의 티

남경태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출신의 저술가가 아니다. 더욱이 이책은 저술된지 꽤 오래된 책이다. 그러기에 한국사 교과서와 다른 서술, 혹은 최근의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류를 범한 흔적이 있다.

첫째, ‘중국의 영향을 일직 받은 고조선은 곧 청동기 문화로 접어들었’다는 표현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동조하는 표현으로 읽혀진다. 특히 최근의 중국 고고학계에서 요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과는 다른 별개의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한국사학계에서는 이를 고조선으로 비정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식 동검과 한국의 세형동검이 제작방식이 다르고 별개의 청동기 문화라는 것은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분명이 적혀있다.

둘째, 대한제국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제국이라고 지적한 것은 어이가 없다. 대한제국은 분명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셋째, 선덕여왕이 처녀의 몸이었으니 아들은 커녕 딸도 있을리 없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왕력 - 선덕여왕 기사에 “이름은 덕만이다. ……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하였다.

넷째, 발해가 당이나 일본과는 교류하였는데, 건국한 뒤 100년 동안이나 통일신라와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사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를 무시한 서술이다. 교류의 증거가 많은데, 그중에서 ‘신라도’라는 길이 있을 정도로 신라와 발해는 교류하였다. 이는 한국사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발해와 신라, 고려는 동질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서술도 학계와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다섯째, 고구려와 백제를 제거하고 200여 년 동안 한반도의 단독 정권을 통일신라가 유지했다는 서술도 오류이다. 통일신라 북쪽 즉, 대동강 북쪽에는 엄연히 발해가 있었다.

여섯째, 이승만 정권에서 추진한, 농지개혁의 결과 ‘지주-소작 관계가 그대로 온존’ 되었다는 서술도 한국사 교과서 서술과 배치된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농지개혁이 되었고, 그래서 농민들이 북한에 동조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며, 농지대금으로 받은 지가증권을 지주가 6.25 전쟁 중에 헐값에 팔아버렸고, 이 때문에 지주가 산업자본화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사 전공자에게는 상식이다.

이책이 보다 더 좋은 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오류는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더욱이 한국의 독자가 읽어야 하니까....

 

역사에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고, 이러한 관점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역사관을 정립한다. 이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대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만 제시되던 한가지 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남경태의 열려라 한국사’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때로는 당혹스럽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이것이 우리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면, 한번쯤은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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