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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김호기.박태균 지음 /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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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만큼 쟁점이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좌우익의 극한 대립속에서 근대화와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수행한 대한민국은 그 내부에 갈등과 대립이 많을 수밖에 없다. '논쟁으로 읽는 한국현대사'의 40꼭지가 한국현대사의 모든 쟁점을 살핀 것은 아니다. 사회학을 전공한 김호기와 역사를 전공한 박태균의 조합으로 한국사회의 정치사적 쟁점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쟁점을 두루 살폈다. 

  다양한 쟁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를 폭넓게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책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다양한 주제를 살펴볼 수는 있었지만, 깊이있는 성찰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깊이있는 성찰을 하려면 해당 주제의 책들을 읽던가, '논쟁으로 읽는 한국현대사'라는 책이 태백산맥 정도의 권수와 분량으로 늘어나야할 것이다. 해당 분야를 전공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두꺼운 책 읽기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머리를 식힐겸 꺼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한국 현대사의 쟁점을 쉽게 정리하면서 새롭게 읽을 책과 관심가는 분야를 찾기에 좋은 책이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정독해볼 것을 추천한다. 300쪽 분량의 얇은 책이지만 절대 내용은 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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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 우리가 몰랐던 해방·미군정·정부 수립·한국전쟁의 기록
김택곤 지음 / 맥스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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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미국 국립 문서고에 가야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독재자들은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한세대가 지나야 역사로 연구할 수 있다며 당대의 역사를 연구하지도 기록하지도 않았다. 결국,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 우리를 바로알기 위해서 남의 나라 문서고를 뒤져야만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 한조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역사학자들은 남의 나라 문서고를 뒤진다. 이책은 저널리스트 김택곤이 역사학자들이 해야할 작업을 대신했다. 우리에게 우리현대사의 조각난 진실을 찾아 책으로 묶어 냈다. 김택곤은 새로운 진실의 조각을 우리에게 던지며 생각의 파도를 일으켰다. 


  1. 하지 사령관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역사학자들은 하지를 군사적인 능력은 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인 능력은 없는 존재라 평가한다. 타지역에 보내진 장군들은 해당지역에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능력까지 가졌다. 그러나, 하지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는 친일파와 지주가 많이 있는 한민당인사들이 요직을 장악하도록 했다.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승만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들이 정권을 잡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재미있는 것은 하지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밀었던 이승만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1948년 1월 허스트그룹 신문회장인 윌리엄 R. 허스트에게 하지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물론, 하지는 그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편지를 보낼 용기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암튼, 허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아집이 세고 돈을 사랑하며 친일파와 밀착해 있다고 실날하게 비판한다. "그에게 완전 독립 국가로서의 한국에 대한 고려는 없었습니다."(302쪽)라는 말과 함께 이승만은 '신콤플렉스에 사로잡혀있다고까지 표현한다.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밀었던 그가, 왜?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을까? 이승만이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는 이승만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제서야 하지는 이승만의 실체를 깨달았다. 하지 그가 친일파를 등용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던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돌고 물신 양면으로 노력한 것도 그가 아닌가? 순진한 군인 하지는 노련한 이승만의 실체를 진정 몰랐단 말인가? 

  이렇게 무능한 하지를 저자 김택곤은 "한국인을 이해하고 도우려했던 우리의 친구였지 않았을까?"(455쪽)라고 평가한다. 미군범죄를 단속하려했고, 한국인을 무시하거나 인종차별하지 말것을 미군에게 당부했던 그의 모습만 본다면 그의 마음이 악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뉴욕 타임스>, <시카고 트리뷴> 기사에 10명의 미국 흑인 병사가한국 여성을 석유 저장고에 가둬 놓고 밤마다 성폭행했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소녀가 탈출해서 이 사건을 오빠에게 알렸기에 이사건에 세상에 알려졌다. 물론 미군은 한국인 여성들을 창녀로서 자발적으로 군부대에 왔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했다.(410쪽) 전형적인 축소 수사의 냄새가 난다. 이렇게 미군에 의한 범죄가 사회문제였던 당시에 한국인을 존중하고, 미군범죄를 단속하려했던 하지의 노력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치명적 단점은 정치적으로 무능했다는 것이다. 프로이센 군사 격언에 가장 나쁜 지휘관을 무능하면서 부지런한 자라고 했다. 그러한자는 반드시 제거해야한다는 당부도 프로이센 군사 격언은 잊지 않는다. 열심히 친일파를 등용하고 이승만을 물신양면으로 등용했던 그는 부지런하면서도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반도의 운명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2. 지청천 장군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항일무장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이다.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군용지도와 작전교범을 가지고 일본군을 탈출해서 신흥무관학교에 간 그는 독립군을 양성한다. 1930년대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을 이끌었으며, 1940년에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삶이 우리 항일 무장 투쟁사의 역사였다. 사선을 넘나들며 조국 광복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던 그에 대한 평가가 상반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동일한 인물이 그를 상반되게 평가하고 있다. 

  OSS 이글팀의 실무책임자 싸전트 대위는 지청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광복후 지청천에 대해서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왜일까? 싸전트 대위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지청천 장군이 변한 것일까?

  그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한 것이었다. 독립운동가 지청천은 광복후 극우파로서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극우 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며 분단을 지지 혹은 방관했다. 저자 김택곤의 글을 읽으며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내가 존경했던 인물의 안타까운 이면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님을 떠나보는 듯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고포스 일병이 하지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고포스 일병은 한국의 운명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했다. 


"한국인 스스로 그들의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미국-소련 양국 군대가 동시에 철수하면 남북간 내전이 틀림없이 발발할 것입니다."(414쪽)


  일개 일병조차도 한반도의 내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분단은 곧 내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백범 김구가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북한에 가서 남북협상을 한 것 아닌가? 분단을 막고, 동족 상잔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백범이 인생의 마지막 모험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백범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지청천 장군을 어찌 분단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던가!

  철기 이범석 장군도 항일 무장 투쟁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시다. 청산리 대첩의 영웅이며, 한국 광복군 제2지대를 이끌었던 영웅이다. 그러나 그도 광복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며 극우파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청천과 이범석은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항일 영웅 김좌진 장군이 안타깝게 암살된 것을 지켜보며 공산주의자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광복 후, 그들에게 가장 큰 적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군인이지만, 현명한 정치가이지는 못했다. 어디 티없는 옥구슬이 있으랴? 옥구슬의 티마져도 우리가 보듬고 끌어안아야만하지 않을까?


3. 연합국의 지위를 얻기 위한 임시정부의 처절한 투쟁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연합국의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한편으로는 보다 치열하게 노력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가?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때가 많다. 그러나, 저자 김택곤이 소개한 임시정부의 처절한 투쟁을 읽으며 그분들도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무모한 이글 프로잭트를 추진했다. 김택곤은 "김구 주석의 마음에는 또 다른 수십명의 윤봉길 의사들이 있었을지 모른다."(101쪽)라고 표현했다. 무슨 뜻일까?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에 입장권도 없이 갔다. 윤봉길 의사의 기지로 기념식장에 입장했고, 의거에 성공하고는 저세상으로 갓다. 국내 진공작전 즉, 이글 프로잭트도 이와같았다. 국내에 국내 정진군에 호응할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구체적인 작전계획도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젊은이들을 무리하게 국내로 보낸다는 것은 죽음의 제단에 그들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라도 값진 피를 흘려 연합국의 지위를 얻으려했다. 심지어 광복 직전에는 광복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기는 것을 제안하기도했다. 그렇게해서라도 연합국의 지위를 얻으려했다. 

  둘째, 1945년 8월 18일 국내 진공작전을 추진했다. 광복군 선발대는 미군 C-47 수송기로 미군과 함께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항복 예비 접수' 명목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중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셋째, 김구 주석이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문을 보냈다. 김구 주석은 도너반 장군에게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건의했으며, 루즈벨트 대통령이 죽자, 트루먼 대통령에게 임시정부 승인 전문요구 전문을 보냈다. 도너반 장군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건의한 임시정부 승인 요구를 읽으면 감동과 깊은 상념이 든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게 되면 일본과의대결에서 달성하게 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한국혁명(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한국 국내외에서 대일 파괴 활동과 게릴라전 등 갖가지 대일항전을 벌여왔습니다. 때문에 세계의 다른 어느국가들과 달리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조직은 혁명과 파괴 활동에 대한 경험과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도너반장군의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임정승인 요구) - P107

 

  만약, 루즈벨트 대통령이 3년만 더 살았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아니, 루즈벨트 대통령이 살았을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단 말인가!


  책은 두껍지만 관련 사진과 큰 활자를 고려한다면 두껍다고 겁낼 필요가 없는 책이다. 술술 잘읽히고 새로운 사실을 안다는 점에서 큰 재미를 주는 책이다. 책을 덮고서 나의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프롤로그에 일본계 미국인이 남긴 위안부 보고서였다. 


"위안부는 창녀 이거나 혹은 병사들의 편의를 위해 일본군에 부속되어 부대를 졸졸 따르는 존재일뿐 그 이상은 아닙니다. 위안부라는 단어는 일본인 특유의 것입니다." 37쪽

"낯선 사람 앞에서는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실은 여자만의 제주를 부릴줄 압니다."37쪽


  알렉스 요리치라는 일본계 미국인의 심문 기록은 그도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탄식을 자아낸다. 일본을 위한 변명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가 진하게 묻어난다. 미군의 기록이 제3자의 객관적 기록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 남겨진 수많은 기록은 미국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서 남겨진 하나의 기록이다. 그 프리즘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다른면을 바라볼 수있다. 진실의 퍼즐을 맞추며 새로운 감동과 깊은 안타까움이 밀려오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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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 우리가 몰랐던 해방·미군정·정부 수립·한국전쟁의 기록
김택곤 지음 / 맥스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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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트 대위와 김구면담)
비밀 보고, 1945년 4월 3일
1945년 4월 3일 아침, 본인은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주석과 약 30분간 면담했습니다. 이 면담은 본인이 전혀 요청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얼마 전 본인이 군사 관련 업무로 임시정부 본부를 방문했을 때제의를 했었는데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면담은 응접 - P46

김구 주석과 대담하는 동안 한국광복군 이청천 총사령관, 광복군 2지대장 이범석 장군, 최근 조직되어 안휘성 부양에서 주둔 중인 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소장 그리고 통역 정한범이 배석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평범한 중국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응접실에들어왔으며 몸이 불편해 잠시 쉬고 있었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구 주석은 외모나 몸가짐에서 건강하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품격 있어 보였고 절제와 점잖음을 갖춘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가 25년 동안 애국적 자객이 - P47

자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대담은 대부분 덕담을 나누는 수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 주석은 미국의 관심에 감사한다고 말하고(제가 이범석 장군과 관계를 이어온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어 전면적인 협력을 할 의향이 있으며특히 최근 안휘성 부양에서 막 도착한 37명의 한국인을 포함해(광복군)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은 일반적인 동맹국 간 공유하는 가치와는 다르게 한국과의사이에서는 보다 각별한 가치를 공유해야만 한국-미국 공조를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대담하는 가운데 김구 주석은 두개의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습니다.
1. 김구 주석은 이범석 장군과 본인 사이에 발전되어온 관계에 대해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양인과의 관계에서 싹튼 모든것을 승인했다고 말했습니다.
2. 그는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섬에 진격할 때 필리핀 대통령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동행했는데 이는 필리핀 국민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솟아나는 협력 정신으로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을 공격하는 미군을 돕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합군이한국에 진격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과 동행한다면 한국 민중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이와 같은 조치는 한국 민중들로 하여금 기꺼이 일본에 저항해 일어서게 하여 한국 내 미국의 작전을 지원하게 될 것으로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 P48

비밀 전문 수신, 1945년 3월 30일발산: 곤명 헬리웰 대령수신: 중경 버드 중령싸전트 대위와 이범석이 토요일(31일) 중경에 도착한다.
뒤에 언급된 인물은 이글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니, 모든 예우 - P51

를 다해 정중하게 맞아줄 것을요망한다. 이글프로젝트는 4월15일경 시작될 것이며 첩보 활동은 바로 그 뒤 절차대로 착수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 P52

본인은 안휘에서 온 37명의 광복군 병사들로부터 강력한 인상을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지적이었으며 눈이 초롱초롱하고 열정에넘쳐 있었습니다. 군인 집단으로서 이들은 본인이 본 어떤 집단보다 지적 수준이 높아 보였고, 자질 역시 미국의 어떤 청년 장교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대학 졸업자이고 몇몇은 소통 가능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중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인은 이들 전원을 이글프로젝트에 투입해줄 것을 이범석 장군에게 요청했습니다.
(싸전트 대위 보고서) - P52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의 보좌역인 정한범 박사가 오늘 아침 나를 방문해,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사령관, 조소앙 외교부 장관 3인이 웨드마이어 사령관을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를요청해왔습니다. 이들 모두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최고위 당국자들이며 워싱턴 주재 임시정부 대표가 보내온 전보를 받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전보에 따르면 웨드마이어 장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인을 활용하는 문제를 워싱턴에 있는 한국 관계자들과 논의했다는 것입니다. 언제가 괜찮을지 알려주면 본관이적절한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oss중국전구 부책임자 윌리스버드 중령이 미군사령부 윌리엄 맥아피 소령을통해전달) - P56

현재 우리가 교육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요원 개개인에게는 많은정보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 미국 기간 요원들은 이들로부터 첩보를 얻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요원 가운데 50명은 지난해 한국또는 일본 점령지역 곳곳에서 제각기 다른 시간대에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 65퍼센트는 일본군에서 탈출했습니다. 이들이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전략적 · 전술적 정보의 가치는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이들로부터 끌어내려면 현재의 제한된 미군의 인력으로는 매우 더딜 것입니다.
(싸전트 대위보고서) - P61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게 되면 일본과의대결에서 달성하게 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한국혁명(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한국 국내외에서 대일 파괴 활동과 게릴라전 등 갖가지 대일항전을 벌여왔습니다. 때문에 세계의 다른 어느국가들과 달리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조직은 혁명과 파괴 활동에 대한 경험과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도너반장군의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임정승인 요구) - P107

수산: 러치 부인, 제국호텔, 도쿄
발산: 이승만, 워싱턴 DC. 1946년 12월 14일
이 전문을 러치 장군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직접 문병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장군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저희는 장군의 계획을 지지합니다. 입법의원을 지명한 것은 실책입니다. 한국 국민은 그들을 직접 선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 사령관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겠다고 고집하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좌익 입법의원들은 입법을 방해하고국민을 분열시킬 것이며 그 결과는 비참할 것입니다. 하지 사령관에게 제발 좌우합작 노력 중단을 명령하라고 조언하십시오. - P224

하지 사령관은 미국 점령지역인 남한에서 온건우파와 온건좌파의정당 간 합작을 구축하고 과도입법회의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 자치정부 수립의 기반을 갖추게 됩니다. 한국 국민의 다수는 현실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좌우합작은 지난해 10월 초 발표되었으며 지난 12월 과도입법의원 구성을 위한 선거가 치뤄졌습니다.
-1947.1.3. CIG 가 트루만에게 제출한 한곡의 실태 보고서 - P229

경찰이 정치에 개입해 선호하는 한 편을 지원하고 다른 편을 가해한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한국 경찰들이 목전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못 본 척하고, 실제 테러를 저지르지 않고 있다며 테러단체들을 묵인하고 있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불안과 미군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좌우합작위원회의 계획도실현될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한국 경제는 친일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친일파 처리에 관한 법이 법제화되어 시행되지 않는 한 조국을 위해헌신할 애국적인 한국인은 없을 것입니다. 또다시 말씀드리지만경찰 개혁이 이루어진 후에야 공정한 선거를 치를 수 있습니다.
-미군정 정치고문 로버트 키니의 정책 보고서 - P258

동아일보 1960. 2.17.
청천벽력의 비보에 전 국민은 경악
꿈속에 사라진 지도자, 야릇한 운명만을 원망또 한 사람의 자유수호자가 이 땅에서 사라졌다. 민주당 대통령입후보자 유석 조병옥 박사의 급서를 알리는 외전은 자유와 민주를 갈망하던 이 땅의 백성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대 비보였다. 하늘이 무너진 듯 땅이 꺼진 듯한 이 비보를 들은 국민들은 4년 전 해공 신익희 선생의 부보에 접했던 놀라움보다 더 큰경악과 실망을 맛본 듯했다. 수술을 받고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고 - P554

국에 돌아오면 민주투쟁에 감연히 나서 옥쇄도 불사하겠다던 조박사. (중략) 그를 이 나라 유일의 민주주의 수호자로 아끼고 우러렀던 학자 그리고 이름 없는 시정인(人)에 이르기까지, 기구한나라와 백성의 운명을 그의 급서 비보에 여며 그지없이 슬퍼했다. - P555

2018년 1월 16일 <연합뉴스>
강북구청, 제주 4.3 민간인 학살책임 조병옥 흉상 건립 철회
서울 강북구청이 추진하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16위 흉상 건립사업에서 제주 4.3 민간인 학살 주요 책임자로 알려진 조병옥을제외하기로 했다. 제주 4.3 희생자유족회와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강북구청이 각계와 내부 의견 수렴을 거쳐 이같이 결정·통보해왔다고 16일 밝혔다.
제주 4.3 단체들은 조병옥 흉상 건립을 제외해달라고 그간 성명을 냈고 지난 10일에는 박겸수 강북구청장을 만나 해당 사업에서조병옥 흉상 건립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강북구청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명예를 선양하고 역사의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여운형, 신익희, 손병희, 이준 등의 흉상을 건립하기로 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병옥은 1947년 3·1절 기념 대회 도중 발생한 민간인 대상 발포사건으로 시작된 대규모 학살 당시 경찰 지휘 책임자 중 1명이다.
고성식 기자(제주 <연합뉴스>> - P556

여순사건이 발생한 사흘 뒤인 1948년 10월 22일 미군정 G-2정보보고는 그날 오전 10시부터 11시 15분까지 실시한 항공 정찰 내용을 기록했다.

5명에서 10명 규모로 그룹을 이룬 사람들이 여수 시내 곳곳을 오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여수항에는 약 200명의 군중이 모여 집회를 갖고 있고 건물 위에는 적기가 걸려 있습니다. 여수 시내 번화가에서 각각 10명과 12명으로 보이는 두 그룹의 반란군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었으며 교룡리에서 흰옷을 입고 북한기를 들고 있는 50명의 사람들이 마을을 벗어나 남쪽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순천 시내에서는 파란 제복을 입은 청년 150명이 - P576

번화가에 집결해 있으며 5명의 무장한 군인들 두 팀이 제각기 1열로 행진하고 있습니다.
순천역에 4개 소대로 짐작되는 약 200명의 전원 무장한 반란군들이 집결해 있습니다. 또 다른 200명의 병력들이 역과 철로 사이에 앉아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객차 8량을 단 기차가 보이는데 기관차 2량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순천 시내 건물 곳곳에 북한기가 날리고 있고 어떤 집 마당에는 모두 흰옷 차림의 시체 5구가 목격되었습니다. 구례에서는 정부에 충성하는 국군 병력를 태운 차량 행렬이 막 남원 방향에서 구례에 도착했고, 구례 시내는조용합니다. - P578

10월 27일 오후 2시경 1,5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3개의 그룹으로 분리되어 각각 국방경비대의 경계 아래 억류되어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들은 반란군을 도운 혐의를 받는자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국방경비대의 감시를 받으며 붙잡혀 있는 사람 중에는 반란군들에게 도움을 준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된 것으로보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관련조차 안 되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붙잡혀 있는 1,500에서 2,000명이 반란군 포로들이라는 것은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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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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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희망찼다. 1945년 8월 15일 민중은 광복이 찾아온줄 몰랐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접촉하며 광복을 준비한 여운형은 8월 16일 서대문감옥 문을 열고 독립투사들이 새시대의 빛을 보았다. 환희에 찬 민중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는데도 만세를 불렀다. 건국 준비위원 안재홍은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라디오 연설을 했다. 광복의 기쁨을 용솟음치게하는데 여운형과 건국 준비위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8월 17일 전국에서 해방경축식이 열렸다. 일제의 패망을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칼자루는 우리 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미군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칼자루를 쥔 미군은 1945년을 광복의 환희에 찬 해에서 뒤틀리고 비틀린 한국사의 시작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여운형이 총독부와의 협상을 통해서 행정권을 이양받았고,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묻혀있었다. 여운형이 일제강점기에 건국동맹을 만들어 광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치안협조를 여운형에게 요청했고 그 협상장에서 여운형은 5개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광복이 다가오자 민중의 열망을 등에 업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환희에 찬 광복의 물결은 여운형이 준비하고 대비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순간에도 총독부는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치안유지를 위한 협조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자 곳곳에서 공작을 시작했다. 우리 교과서에 적혀있지 않지만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는 조선은행에서 돈을 찍어내어 비자금을 만들었다. 미군은 이를 경제적 사보타주라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만들었고, 정치적으로는 친일파를 위한 공작을 초래했다. 친일파 김계조, 한치진, 박석윤 등에게 제공된 이들 돈은 공작금으로 활용되었다.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공작이 지속되면서 광복의 그날에도 총독부는 현실이 자신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악마의 칼날을 휘둘렀다. 일제는 광복된 그날에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았다!!

  9월 6일 미군이 한반도에 왔다. 미24군단이 남한에 진주하고 군사적으로는 유능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하지가 한국운명을 결정하는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는 한국어를 할줄 몰랐다. 인종적 편견에 빠진 그는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이해하려하지도 않았다. 결국, 영어를 할줄 아는 한민당과 연희전문학교 출신, 기독교인들을 가까이하려했다. 미군 통역을 맡으면서 문고리 권력을 쥔 이묘묵이 대표적이다. 광복후에도 나가사키 유조의 지시를 받아 공작활동을 한 그가 친미파가 되어 항일투자 여운형을 친일파,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미영타도, 귀축영미"를 열성적으로 외치던 친일파가 문고리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무능하다 못해서 어리석은 하지가 강력한 미4군단을 이끌고 한국의 정치을 마음대로하려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군사 격언에는 유능한데 게으른 지휘관을 최상으로 쳤으며 무능한데 근면한 지휘관을 반드시 사라져야할 인물로 꼽았다. 하지는 무능한데 근면한 지휘관이었다. 

  결국 무능하면서도 근면한 하지는 친일 반공집단 한민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법조, 경찰, 학무, 도지사등 거의 모든 요직을 한민당 혹은 한민당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다. 소위 미군의 자문위원회를 한민당 인사들이 장악했고 그들에 의해서 엽관행위가 벌어졌다. 한민당은 초기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외쳤으나 이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레토릭이었을 뿐이다.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고 자신들이 모든 권력을 쥐려했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한민당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 대통령이 되자 한민당을 팽시켰다. 기독교를 믿으며 외국 유학을 갔다온 친일파 출신의 인사들이 미군정에게 사탕발림말을 하여 권력쥔 우리의 해방직후사는 너무도 슬프면서도 우습다. 

  놀라운 일은 한민당에 친일파들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항일변호사 이인, 한국 사법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병로, 사도법관 김홍섭은 1946년 한민당 사람이었다. 버치중위 같이 하지의 최측근 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그들은 이승만과 한민당을 위해서 부자들을 사법적으로 협박해서 강제로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항일투사가 친일파가 득실대는 한민당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행위는 민족분단과 친일파의 권력장악, 나아가서 이승만 독재의 길을 터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일 투사였던 그들에게 광복된 순간부터 친일은 트집잡을 꺼리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여운형,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을 미군정도 지지했다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러나, 미군정의 속내는 그러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극우 이승만보다 중도우파 김규식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길 바랬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병준 교수는 그것이 우리의 착각임을 미군정이 이들에게 보낸 정치자금 액수를 통해서 증명했다. 미군정을 이승만에게는 +1,000만원을, 김규식에게는 +300만원을, 김구와 여운형에게는 0원을, 그리고 박헌영에게는 -240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과 김규식 지지는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의 속내는 이승만과 한민당 절대지지였다. 교과서에서 드러나지 않은 미군정의 검은 손길이 얼마나 더 클까를 생각하며 소름이 돋는다.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하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을 절대지지했다. 불법을 저질러가면서 이승만에게 =1,0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자신의 간과 쓸개를 모두 이승만에게 바쳤으니 이승만의 절대 신임을 얻었을 것이라 그는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9단 이승만은 하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는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어리석은 하지는 현실 정치의 매서움을 맞닥드리고는 깊은 좌절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회고록 한장 남기지 않은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광복이라는 환희의 순간을 민족의 자주독립으로 이끌려했던 여운형은 극우파 한지근의 총탄에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 하지는 떠나고 이승만은 절대권력을 쥐었다. 우리의 비틀리고 뒤틀린 역사를 이제는 바로잡아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죽은 이승만을 소환하며 친일 발언을 쏟아내는 뉴라이트 인사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1945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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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8.15 해방 직전인 8월 10일경이었다. 장소는 혜화동의 남상일(南相) 씨 자택이었다. 그는 당시어느 통신사의 사장이었는데, 몽양과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거기서 조동호를 위시해 이강국, 최용달 등건국동맹의 대물급이 출입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몽양이 신뢰하는 아지트임을 알았다. 나에게 말한 것은 "인간관계를 정리해보게"라는것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각계각층 인명의 정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방 후에 등장 배치될 인명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단 무엇보다 친일파는 배제하고 유능하고 청결한 (흠결이 없는), 우선 중앙부터, 이어서 전국에 달하는 독립운동에 공로가 있는 인물의 명부를만드는 것이었다. (...) 몽양이 알고 있는 것은 1923~1929년까지로당시 서대문감옥에 빽빽이 들어차 있던 제1, 제2, 제3(ML당), 그리고 신간회의 광주학생대회사건, 간도공산당의 폭동에 관련되어 연행되었던 무리 등의 인명과 그 인품을 내가 점검하는 것이 목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천추 8월 10일경 건준 활동 시작 - P57

A우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조선에무정부상태가 이어질 것을 걱정했는데, 민중의 안녕질서를 어떻게지킬 것인가가 제1의 목적이었다. 나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의 정황과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독립의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 해방된 기쁨과 동반해 흥분하게 되면 무질서한 폭동도 일어날 우려가 다분했기에, 날짜는 분명히 기억할 수 없으나 확실히 13일에 경무국장을 중심으로 최고재판소의 검사장, 헌병대장등 치안 관계자의 회의를 소집해 그 대책을 토의했다. 거기서 당시조선 민중 사이에 명망이 높고, 과거 독립운동의 경력으로도, 그리고나도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고, 내가 평소 씨의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여운형 씨에게 치안 문제를 위탁하게 되었다. 그래서 8월 15일에 씨를 총독부에 초빙해, 정치범을 석방하는 것과 동시에 치안 문제에 대해 책임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원등유작 - P60

해방 직전 당시 여운형은 분망해서, 때때로 엔도 류사쿠(조선총독부정무총감)로부터 호출이 있으면 회합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8월15일 아침, 또한 엔도로부터 전화가 있어서 몽양은 엔도의 관사에 갔다. 그날 정오에 일본 천황의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방송을 나는 남상일의 자택에서 들었다. 때는 왔다. 나는 준비를 완료해서, 후에 몽양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계동의 임용상의 옛 저택(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의 작은 서양식 건물로 출근했다.
-이천추 - P61

조선 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선 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응락을 하였다. 즉(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만치 식량이 제일 문제이니 8월, 9월, 10월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 훈련과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
-8월16일 휘문중에서 여운형 연설 - P72

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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