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권을 읽고 난후, 2권을 집어들었다. 정조가 없는 암흑의 시대! 정조라는 성군을 만났기에 화성을 건설하고,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없는 세상은 해가 없는 하늘이고 달이 없는 밤이었다.

  이 암흑의 시대를 정약용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채웠다.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바로 그의 18년 유배생활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학의 최고봉이자, 조선 500년 역사 최고의 학자로 남겨질 수 있었다. 이러한 유배를 그에게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 까? 아니면 불행이라고 생각해야할까? 아마도 불행을 정약용이 행운으로 바꾸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정조가 없는 암흑의 시대를 학문이라는 등불로 밝혀나가고자했던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에 대한 노론 벽파의 공격은 천주교를 트집잡아 시작한다. 그는 천주교를 배격하였으나, 노론 벽파에게는 이 사실보다는 그를 죽이겠다는 표독한 집념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 많은 인재가 죽어갔다.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 부터 시작해서 수 많은 남인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그의 형, 정약종도 그 수많은 사람중에 한사람이었다. 단지 정약용 그와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정도였다. 피바람의 시대,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책은 유배시절의 그의 많은 저서와 민초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우고 있다. 때로는 너무도 어려운 '주역'이라는 책을 정약용의 저서를 길게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주역'의 '주'자도 모르는 나에게 너무도 이해하기 난해했다. 정약용 그가 '왕필'을 능가하는 '주역'의 대가라는 것 밖에는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이덕일이 밉기가지 했다.

  유배지에서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과 그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의 완성, 탁월한 스님 혜장 선사를 유학자로 만든 일화 등이 정약용의 유학자로서의 탁월함과 그의 형재들의 재주가 사장된 사실에 대한 안타가움을 더했다. 국가의 안보보다는 정권의 안보만을 위하는 노론 벽파의 모습이 치가 덜리기도 했다. 18년 동안의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에 안착한 그에게 서용보가 측은히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정약용을 위하면서 조정에서는 정약용을 배척했다. 노론벽파의 광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익종이 죽기 직전에 그를 불러 치료하게 해서, 치료를 하지 않아도 죽고, 치료해도 죽게 만든다. 정약용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또다시 유배를 가거나,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

 광란의 시대! 암흑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며 시대를 달관했던 정약용! 18년동안 정조의 곁에 있었고, 18년 동안 유배를 갔고,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돌아와 초야에 묻혀 살아야했다. 너무나도탁월한 그의 재능이 현실에서 너무도 짧게 쓰여진 것이 안타깝다. 언제나 인재는 있지만, 그 인재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에 그 인재는 땅에 묻힌 구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노론 벽파! 그들의 광란이 우리의 역사발전을 가로 막았고, 그리고 근대화를 막았으며, 일제 강점의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닐가? 그리고 오늘은 과연 그렇하지 안는지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선 최대 갑부 역관 표정있는 역사 1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조선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보면서 농민과 천민에 감정이입하기 하기보다는 양반과 왕들에게 감정이입한다. 분명 조선전기 양반은 기껏해야 2~3%밖에 되지 않았으며, 16세기 노비의 비율은 60%에 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양반의 후예이기 보다는 노비의 후예일 가능성이 더 많다. 자신을 고귀한 신분의 후예로 만들고 싶어하는 대중들의 바램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을의 입장에서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이 현실을 떠나 사극에서나마 갑이어야 괴로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양반이라는 지배층의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고 농민과 노비의 삶을 다루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역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역관의 삶을 들여다보자.

 

1. 공무역과 사무역의 최전선에 역관이 서다.

  '나랏말쌈이 중괵에 다라'라는 세종대왕의 말씀처럼, 중국과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역관은 중국과 우리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역관은 단순한 가교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두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했다. 역관의 활약은 조선에서 두드러졌다. 고려와는 달리 사농공상의 직업관을 가진 조선에서 역관을 사대부에 비해서 낯춰보았지만, 역관은 그러한 천대에 굴하지 않고 사무역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덕일은 책의 시작을 허생전에서 시작한다. 허생에게 차용증도 쓰지 않고 1만냥을 단숨에 빌려준 '변승업'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8포 무역으로 대표되는 역관들의 무역은 많은 이익을 통해서 역관들은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8포무역이 매번 큰이익을 준것은 아니다. 중국 채류기간이 정해져 있는 약점을 알고 있는 중국상인의 농간으로 많은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새로운 경쟁자로 상인이 등장하기도 했다. 많이들 알고 있듯이,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은 중국상인들의 담합을 깨부수고, 인삼무역에서 10배의 이익을 얻었다. 역관과 상인들의 눈부신 활약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아닌,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상업은 규제의 대상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직교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청과 일본 간의 중개무역의 이점이 사라진다. 그로인해서 일본 은의 조선 유입이 차단된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조선의 지배층은 강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업을 규제하려고만했다. 세계 정세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좁은 한반도에 갖혀서 구시대적인 방책만을 강구하는 조선의 지배층을 바라보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일찍부터 세계의 흐름에 눈뜬 일본과, 세계 정세에 깜깜했던 조선의 모습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반문해본다. 과연 우리는 그 때의 조선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2. 조선이 염초를 수입해야했던 이유는?

  우리는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했다고 배웠다. 화약만드는 기술은 조선세종시기를 전후해서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조선은 화약만드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다시 총력을 기울인다. 더 나아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중국에서 수입하려 필사의 노력을 한다. 어찌된 일일까? 최무선이 이원엑 배운 염초제조 방법인 '자초법'을 200년의 평화시기가 도래하자 조선은 잊어버린다. 1급 군사기밀을 평화시기가 도래한다고 잃어버리다니! 말이되는가? 그러나 사실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문약해졌다. 성리학적 논쟁에는 탁월했을지라도, 나라를 지키는데는 무능했다.

  잃어버린 자초법을 다시 알아내기 위해서 역관들이 필사의 노력을 한다. 서천군보 임몽이 해상 자취법을 알아냈다. 그런데, '선조실록'을 쓴 사관은 임몽에게 동반실직을 하사한 것을 비난한다.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으나 천만 사람의 마음을 저하시켰'다고 비판한다. 한사람은 해상 자취법을 알아낸 임몽이고, 천만 사람은 옹졸한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웠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어야함을 그들의 옹졸함은 용납하지 않았다.

 

3. 중인은 신분적 한계 때문에 조선왕조에 등을 돌렸다?

  '혈의 누'를 쓴 이인직은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러일전쟁시기 일본인 통역관이었으며, 이완용의 비서이기도 했다. 중인들은 신분적 한계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고, 때로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조선왕조 몰락에 기여했다는 설명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과연 중인들 모두가 그러했을까?

  그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반지배층들이 무능한 모습을 보일때, 앞장서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했다. 청의 사신 목극등이 백두산의 경계를 정할대, 박권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백두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다. 박권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백두산에 올랐어야했다. 그러나 박권은 오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역관 김지남과 아들 김경문 부자는 박권을 대신해서 조선의 이익을 지키려 노력했다. 문약한 조선의 사대부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금지 못하지만, 사대부의 문약함을 조선의 역관이 대신 매우고 있는 모습이 흐믓함을 느낀다.

  여관들은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지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유년필독'으로 유명한 사학자 현채가 역관출신이었다. 일제에 아부하며 일제의 작위를 받고 은사금을 받은 일부 양반들에 비하면, 역관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존의 이덕일이 써왔던 책들과는 다른 서술형태를 띄고 있다. 즉, 평전형식 혹은 역사평설 형식의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에 논문을 대중을 위해서 풀어써 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반의 그늘에 가리어 제대로 조명 못한 들의 삶이 이 책을 통해서 빛나 보인다. 소설을 읽는 듯한 박진감을 선보이는 이덕일의 평전형식의 책들에 비한다면, 책을 읽는 박진감을 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우리가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우리 조선의 다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숨겨져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왕조 건강실록 - 역사 선생님도 가르쳐주지 않는
고대원 외 지음 / 트로이목마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종합학문이다.'라는 말을 대학 선배에게 들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학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치학, 경제학을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경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의학에 대한 지식이 필요함을 깨닫은 책이 있다.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이 바로 그 문제작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더 이상 역사학 만으로는 진실에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성왕조 건강실록'을 꺼내들었다.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우리에게 역사를 어떻게 달리보는 방법을 제공해줄까?

 

1.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 사건'에 대적하다.

  조선시대 전공 학자들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책이 있다. 바로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 사건'이라는 두권짜리 책이다. 조선왕조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강연에서 "어떤 학자는 조선의 왕들 모두가 독살된 것처럼 쓴 책이 있다."라고 비꼬곤했다. 마치, 현대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브르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발발과 기원'이라는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모습을 이덕일의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과 '조선왕조 건강실록'의 차이점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두책은 대비점이 많다. 이덕일은 '조선왕조 실록'을 근거로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반면,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조선왕조 실록'보다 자세하고, 보다 진실에 한걸음 더 다가간 '승정원 일기'에 근거해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덕일이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다양한 사료들을 근거로 자신만의 논리를 전개했다면, 방성해 원장을 비롯한 9명의 한의학자분들은 한의학이라는 의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승정원 일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한의학에 전문가라는 점에서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탁월한 필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역사관을 전개하는 이덕일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덕일이 '조선왕 독살 사건'에서 독살당한 인물로 지목한 '소현세자'와 '효종'은 독살당하지 않았다고 황지혜와 박주영 한의사는 주장한다. 특히, 소현세자의 경우, 소현세자의 병명은 학질이 아니라, '혈액순환 장애로 인한 혈관염'이 그의 병이라 주장한다. 소현세자는 이형익에 의해서 독살된 것이 아니라, '혈액순환 장애로 인한 혈관염'으로 죽은 것이라 한다. 타국에서 고대 인질 생활에서 얻은 고통과 질명이 '혈액순환 쟁애로 인한 혈관염이라는 병을 가져왔고 그를 저 세상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효종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덕일은 효종이 앞으로 1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스스로 말했으며, 관우가 휘두르는 청룡언월도를 휘두른 강건한 왕이 신가귀의 침을 맞고 출혈과다로 쇼크사한 것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박주영 한의사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효종은 건강한 왕이 아니었음을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말한다. 당료병을 앓고 있었던 효종은 혈관이 얇아 졌으며, 출혈이 있을 경우, 피가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이를 알지 못하고 신가귀가 침으로 종기를 다스렸고, '당뇨병성 미세혈관병증'으로 인한 출혈과다로 효종은 죽었다. 일종의 의료사고였다.

  이 책에는 한편의 글을 쓰고 그 근거가 되는 다양한 참고문헌이 적혀있다. 이미 승정원일기를 근거로 조선시대 왕들의 사인을 밝혀보려는 다양한 논문이 있었다는 점에 무척놀라웠다. 하나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야한다. 만약, 이덕일의 책만 보았다면, 조선의 왕들이 모두 독살되었다는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승정원 일기'라는 새로운 자료를 근거로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그래서 역사는 종합학문이다.  

 

2. 산자를 위한 '예', 죽은자를 위한 '예'

  만인지상의 지존의 자리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존재, 조선의 왕!! 그러나 그러한 왕들도 한낫 병마와 싸우는 나약한 왕들이었다. 조선후기 왕들중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많은 여인들을 울렸고, 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거두어 들였던 '숙종'도 병마와 싸우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숙종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해수병, 위장병, 통풍 등등 참으로 많은 병들이 숙종을 괴롭혔다. 말년에는 앞이 보이지 않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 까지 했다. 그의 아버지 현종 또한 병약한 왕으로 집권시기 내내 병마와 싸워야했다. 어디 그뿐이랴! 숙종의 아들 영조는 자신의 대머리에 검은 머리카락이 돋아난다고 기뻐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들도 병마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왕들이 유독 병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최고의 의료혜택을 받으며, 좋은 음식을 먹은 그들이 이렇게 병약하다는 사실은 너무도 아이러니하다. 나는 그 이유를 성리학에서 찾고 싶다. 성리학국가인 조선은 조선의 왕들에게 무예보다는 학문을 공부하고 토론하도록 강요했다. 조선전기 세종이 강조하던 '강무'를 조선후기에는 실시하지 않았다. '강무'는 일종의 군사훈련이다.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서,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을 했다. 그러나 성리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신하들은 '강무'를 행하는 조선의 왕들을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강무'로 인해서 백성이 괴롭고, 왕이 공부는 하지 않고 사냥이나 한다고 매도했다. 그결과, 조선의 왕들은 운동부족에 시달렸다. 이러한 운동부족은 인조 이전, 평균 자셔의 수가 12명에서 인조이후, 6명으로 추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이 책의 저자 하동림은 조선의 출산율 저하원인을 운동부족하나만을 꼽지 않는다. 왕비의 출산력 저하, 유교적 종법질서가 굳어지면서 처첩관념이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서 후궁수가 감소, 제례기간이 길어짐으로써, 왕의 금욕기간이 길어짐, 잦은 출산으로 왕비의 건강이 악화되고 이에 따라 자녀의 건강이 나빠져 유아사망률이 높어졌다. 등등.... 다양한 원인을 조선 후기 출산율 저하원인으로 꼽는다. 그중에서 유교적 종법질서가 굳어지면서 처첩관념이 심화되어 후궁수가 감소한 것과, 제례 기간에 왕의 금욕 기간이 길어진 것은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나타난 조선후기만의 모습이다. 또한, 조선의 왕들 중에서 문종과 인종의 경우, 부모의 상례를 극진히 치르다가 병이 악화되었다. 공자도 즐겁데 음란하지 말며,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樂而不淫 哀而不傷)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을 위한 예절이 오히려 산사람을 죽게 만드는 모습이 조선 후기에 많이 보인다. 조선 후기 성리학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예는 죽은자를 위한 예가 되어서 조선 왕실을 몰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3. 인조와 영조, 가족을 죽음으로 내몰다.

  무능한 인물 혹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물이 지존의 자리에 있다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는 그러한 일을 이미 겪었다. 503호에 계신 그분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들중에서도 무능하거나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임금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휘두른 칼날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다.

  조선의 왕들을 통털어 가장 용렬한 왕을 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조를 꼽는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는 조선을 이끌 능력도 없었으며,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의 앞길을 밝힐 혜안도 없었다. 저자 김동율 한의사는 인조를 '정신질환자'라고 진단한다. 단순히 인조를 비판하기 위해서 한말이 아니다.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나서, 그는 '심신증'을 앓고 있었다. 피해망상을 비롯한 다양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그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지존의 자리에 앉아 수많은 백성들이 여진족의 말밝굽 아래 신음하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다.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의 가족을 죽여버렸다. 못난 자가,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도 상처를 입어야했다. 더더욱 황당했던 것은 50대의 나이에 10대의 아내를 맞이하고 나서는 첫날밤만 보내고 다시는 '장렬왕후'를 찾지 않았다. '장렬왕후'는 얼마나 큰 고통과 외로움에 시달렸을까?

  능력은 있었지만,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왕 때문에 가족이 상처를 받은 경우도 있다. 바로 '영조'이다. 영조도 자신의 부인을 첫날밤에 소박 놓았다. 영조가 정성왕후에게 "손이 참 곱다."며 칭찬을 했는데, 정성왕후가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유였다. 무술이의 아들이 자신을 비하했다고 영조는 오해한 것이다. 무술이의 딸이라는 컴플랙스에 휩싸여 평생 주변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받았던 영조였다. 결국, 정성왕후는 66세의 나이로 '검은 피를 한 요강이나 토하면서'사망했다. 이를 지켜본 혜경궁 홍씨는 "어려서부터 쌓인 것이 다 나온 것 같다."고 말한다. 한평생 가슴 속 응어리가 피로 쏟아져나온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영조는 자신의 아들을 직접 죽였다. 영조!!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행은 잘못된 자식사랑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했던 이유는 뚱뚱해서였다.!"라고 적혀있다. 글쎄??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뚱뚱해도 예뻐보인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한 이유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자신의 '아바타'가 되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무인 기질이 강한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면서, 문인 기질이 강하지 않은 것에 화를 냈다. 자식의 긍정적인 부분을 긍정적으로 보았더라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아들상을 만들고 아들이 그 틀에 맞지 않다고 미워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스카이케슬'은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다. 조선의 왕조차도 자신의 아들이 자신이 만든 틀대로 자라지 않자, 이를 못견뎌했다. 참새에게 독수리가 되라고 요구하는 못난 영조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길 바란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인간이 강력한 권력을 갖는다면, 너무도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안겨준다. 영조와 인조는 우리에게 권력자가 이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반면교사이다.

 

5. 만약, 그랬다면, 장희빈은 살았을까?

  "이때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장희빈처럼 다시 옛날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무리한 방법을 써서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힘없는 궁녀보다는 훨씬 높은 정1품 희빈의 자리에 만족하면서 남은 인생을 자식과 함께 편안히 살 것인가?"- 160쪽 (방성혜)

 

  한의사이자, 여인으로서 장희빈의 삶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는 글귀가 애절하다. 장희빈이 정1품의 자리에 만족하였더라면, 비참하게 죽지 않고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라는 방성혜 원장의 주장에 과연 동의할 수 있었을까? 한의사로서 탁월한 한의학적 지식으로 역사를 분석했지만, 역사학과 권력의 냉혹함을 바라보기에는 한계가 있어보인다. 권력은 냉혹하다. 숙종은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휘둘린 것이 아니라, 왕권강화를 위해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다. 인현왕후의 뒤에는 서인이 있었고, 장희빈 뒤에는 남인이 있었다. 남인이 몰락한 후, 더 이상 그녀를 지켜줄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도 자신의 목숨과 세자라는 지위를 지키기에도 힘이 부족했다. 이때,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해서 장희빈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해서 무녀를 궁궐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은 하나의 핑게꺼리에 지나지 않았다. 왕비를 저주한 일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던 일이다. 왕비를 저주했다고 목숨까지 거두는 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더라면 이뤄질 수 없었던 일이다. 더욱이 그녀는 세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장희빈의 선택을 묻기 전에, 그녀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야 역사적 판단을 올바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숙종도 노론세력도 장희빈이 살아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권력은 피도 눈물도 없다.

 

  비아그라가 개발되고 나서 한의사들이 힘들어졌다는 말이 있다. 양의학과 중의학이 하나로 융합된 중국에 비해서, 한국에는 한의학과 양의학이 서로 대립하며 평행선을 긋고 있다. 한의학에 대한 신뢰를 갖지 않는 사람도 꾀있다. 특히 양의사들은 한의학을 미신 취급을 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한의학을 무시하는 의대생을 보기도 했다.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자, 동의보감에 있는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소개하며, 동의보감은 무신을 모아놓은 종합 서적인 것처럼 비난히기도 했다. 그러나, 한의학은 양의학이 못하는 일을 해내기도 했다. 개똥에서 말라리아 치료제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한의학 덕분이었다. 독일에서는 21세기 신약을 한의학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너무 멀리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아내가 임신했을 때, 아기를 잘낳게 해주는 한약이 있다는 말에 무척 놀랐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달생산, 불수산, 궁귀탕이 바로 그것이다. 궁중에서 왕족들이 효험을 보았던 한약들을 우리는 무지로 인해서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산업 분야들이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면 단 한 분야, 의학은 예외이다. 중국 의학의 기본을 잘 적용하면서도 중국보다 훨씬 우수한 수준에 도달했다. 중국의 북경에서도 꼬레의 의학서적이 인쇄되는데 꼬레에서도 가장 유명한 '동의보감'이다."

 

  1874년 '꼬레의 교회 역사'에 기록한 달레 신분의 지적을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능가하는 책을 만들겠다.!' 이덕일의 포부가 담겨져있는 말이다. 그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한 수많은 역사책을 저술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하나같이 재미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의 역사책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대하드라마였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조차도 이덕일의 글재주는 인정한다. 탁월한 필력을 자랑하는 이덕일의 야심작 '조선왕조실록1' 태조편을 펼쳤다. 그만의 박진감 넘치면서도 가슴을 울리게 만드는 글재주를 다시한번 느껴보자.

 

1.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조선왕조 실록

  이덕일의 역사책들은 한편의 영화와 같은 서술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독자들을 책속으로 빨아들인다. '조선왕조실록1'도 처음부터가 극적이다. 하날에서 불길한 징조가 조정에 보고된다.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으리라, 천하가 임금을 바꾸리라'라는 점사가 보고된다. 바로 이때, 변방의 한 장수가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가 바로 태조 이성계였다. 이 얼마나 이성계의 등장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인가! 007 스리즈를 비롯한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영화 초반부에 대규모 액션씬을 보여주어, 관객을 영화에 빨려들어오게한 다음,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사구조와 너무도 흡사하다.

  이덕일은 고려말 조선초의 사건들을 시기순대로 서술하다가 갑자기 시기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현재로 오는 '플래쉬 백'을 사용하고 있다. 자칫 민밋한 서술로 따분함을 줄 수 있는 역사서술을 '플래쉬 백'을 사용하여 독자가 손에 땀을 쥐며 책에 몰입하도록 구성한다. 타 역사책들과는 달리 이덕일은 독자들을 철저히 분석하고 그들이 따분해할 즈음에, 강력하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배치했다. 이것은 이덕일 이기에 가능한 역사 서술이다.

 

2.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역사책

  이덕일을 '단재 신채호를 계승한 역사학자'라고 평가한다. 이덕일 스스로가 자신을 '단재에게 사사받았다.'라고 말한다.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학맥을 잇고 있다는 생각이 물신 배어난다. 한예로, 고려의 강역에 대한 주장 자체가 기존 교과서와는 달랐다. 중국'명사'를 근거로 명나라 철령위의 위치를 요동에 비정한다. 주원장이 화주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했는데, 난데 없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던차에, 이덕일의 설명은 나의 의문점을 말끔히 해소해주었다.

  이덕일은 요동정벌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으로 보았다. 특히, 정도전에 의해서 준비되었던 요동정벌의 경우, 중국 명나라의 정세를 본다면 충부히 승산이 있다고 평가한다. 정도전의 북벌이 이덕일 처럼 비중있게 서술한 역사서는 드물다. 타인이 관심 없어하고, 실현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며 버려버린 역사를 이덕일은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 이덕일의 시선으로 새롭게 서술했다. 이덕일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피가 끓고 결정적인 순간에 북벌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에 땅을 치고 통곡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덕일의 힘이다.

 

3. 입체적으로 역사를 복원하는 이덕일

  기본의 역사책들이 널리 알려진 정사류의 책들을 이용해서 서술되었다면, 이덕일은 '화동인물총기' 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책들을 발굴하여, 그 동안 아무런 발언권이 없었던, 역사의 패배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한다.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씌여진 고려 말의 역사가 아닌, 고려왕조를 대변할 수 있는 사서를 준비하는 그의 노력에 절로 감탄이 난다.

  이덕일은 사료를 발굴해서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에서 더 나아가서, 이덕일만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서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되살려낸다. 앞에서는 손을 잡고 뒤에서는 공격하는 이성계 특유의 전략을 잘 분석해낸 것도 이덕일의 책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또한 압록강 건너 원세력을 몰아낸 인당장군의 목을 베서 원나라에 보낸 공민왕의 모습을 그릴 때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민왕의 마키아벨리스트적 모습을 그려내기도 했다. 날카로운 이덕일의 분석력으로 정도전과 이성계를 분석하고 그들의 장점과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역시 이덕일이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냈다.

 

  이덕일의 글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잉된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는 면도 있고, 이색의 죽음을 적으면서, 그가 이성계 일파가 보낸 술을 마시고 독살되었다는 내용의 기록은 싣지 않고 있다는 점은 그의 책의 한계이기도하다. 특히, 이덕일의 민족주의는 그를 돋보이게하면서도 그의 한계를 도드라지게하는 양날의 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덕일이 동북항일 연군을 전공하고서는 왜? 고대사와 조선시대를 기웃거리냐고 비웃을 수록, 이덕일에 대한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박사학위를 받은 분야만 전문가이고, 그외의 곳은 아무리 연구를 할지라도 비 전문가라는 그들의 우수운 논리에 대한 반발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덕일이 시작한 조선왕조실록 편찬 프로잭트가 부디 좋은 결실을 맺길 기대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18-12-1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강나루 2018-12-19 21:1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서재달인이시죠
항상 많이 배우고 있어요
새해에도 즐거운 이웃 되자구요^^
 
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광해군!! 그 처럼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많은 임금도 드물 것이다. 광해군을 소재로한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는 탁월한 비운의 군주로 그려졌다. 광해군과 고 노무현 대통령을 오버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했다. 한반도 균형자론을 주장하면서 강대국들 틈바구니 속에서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발휘하려 노력했던 고 노무현대통령!! 임진왜란과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중립외교정책을 펼치면서 부던히도 노력했던 비운의 광해군!! 두사람의 비극적 죽음은 우리에게 더욱 많은 그리움을 남긴다. 학생들에게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추천해주면서도 정작 나는 '광해군'이라는 책을 읽지 않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광해군이라는 책을 단숨에 읽기 시작했다.

 

1. 광해군은 폭군인가?

  오항녕을 비롯한 노론중심의 사관을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광해군을 폭군으로, 혹은 혼군으로 묘사한다. 물론, 오항년의 책은 읽지 않았지만, 그가 기고한 글들을 읽으면서, 그의 노론중심의 역사관에 자못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광해군이 무척이나 백성들을 쥐어짰으며, 그가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병자호란의 비극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의 단편적이 기고글들을 읽으면서, 노론 중심의 역사관에 찌들어 있는 모습에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과연 광해군은 백성을 괴롭힌 폭군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다른 왕자들의 집은 불탔지만 광해군의 집은 멀쩡했다. 또한 송유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임금이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동궁에게 왕위를 넘겨주도록 종용"하겠다는 그들 주장은 참으로 신선했다. 광해군이 군주로서 가져야할 탁월한 자질과 역량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광해군은 백성들로 부터 탁월한 군주가 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왕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광해군을 비판하는 자들은 '조선왕조 실록'의 사료적 가치를 주장하며, 승리자의 기록인 '광해군 일기'의 기록을 근거로 광해군을 혼군으로 배척한다. 그러나, 광해군의 눈부신 분조활동을 기록흐나 유대조의 상소문이 정족산본 '광해군 일기'에는 없다. 의도적으로 광해군의 좋은 기록을 말살하려한 증거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러한 사례 말고서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광해군의 업적을 기록한 기록들이 사라졌을까? 이것을 생각해본다면, '광해군 일기'를 근거로 광해군을 비난하는 것에는 일정한 경계를 해야할 것이다.

  광해군 시기를 병자호란을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무위로 만든 시기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광해군이 궁궐 조영에만 힘쓸 뿐이지, 후금을 막을 만한 군사력 증강에는 노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기민한 외교전략으로 명과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후금의 주요 진격로상에 방비를 강화하고, 기마병이 장점이 그들을 대항하기 위해서 화포를 배치하는 노력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다. 광해군이 그토록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노력한 역사를 외면한다. 그래야 진정한 혼군인 인조와 서인정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2. 광해는 왜? 궁궐 공사와 왕권에 집착했는가?

  임진왜란이라는 7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휩쓸고 가자, 많은 사람들이 도가나 운수에 빠져들게 된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 목숨보자 못한 취급을 받는 비극적인 시대상황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피난처는 도가와 운수였을지도 모른다. 광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의 시대상황뿐만 아니라, 후궁 소생의 왕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그를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광해군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못난 아버지, 선조는 그를 박대하며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선위파동을 수시로 일으켜 자신의 왕권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입지가 약화된 광해군! 세자에서 폐위된다면 잔혹한 정치권력의 속성상, 자신의 목숨조차도 보존할 수 없었다. 그는 왕위에 더욱 집착했다. 큰 궁궐을 지어 왕의 위엄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싶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서 으리으리한 궁궐을 짓기 보다는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며, 백성들의 지지를 국정과제 추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한다는 진리를 그는 몰랐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로'에서 시민에게 사랑을 받는 군주는 성을 높이 쌓지 않는다고 했다. 시민들의 군주의 성채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에게는 좋은 신하를 얻는 복도 없었다. 그를 지지했던, 대북들은 정치적 감각이 너무도 미숙했다. 적을 살려주어 은전을 베푸는 길이 권력을 강화시키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폐모살제의 어리석음은 서인과 남인들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북인들이 독점한 권력이 강해보이지만, 독점된 권력은 모래성과 같다. 강한 강철일 수록, 충격에 깨지기 쉽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가장 강한 것은 강철이 아니라, 유약해보이는 물과 같은 부드러움을 지닌자이다. 정치적 감각이 미숙한 북인들과 권력을 지켜야했던 광해군!! 북인은 광해군을 지켜주지 못했다.

 

3. 광해군, 그는 왜? 몰락했는가?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라는 한명기의 말처럼,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적 성과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정에서 반정의 명분을 제공했다. 광해군은 외교의 성과를 내부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대내협상'을 했어야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속에서 다수 사림들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실패했다. 심하전투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데도, 사림들은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며 광해군을 비난한다. 백성은 백성대로, 사림은 사림대로 불만이 쌓여갔다. 광해군은 백성의 지지를 끌어내어 이를 통해서 국내 정치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야했다. 그러나 광해는 그러지 못했다.

  1622년 광해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폐모살제를 부추긴 북인 정권에 진절머리가 난듯하다. 북인에 의해서 내쳐졌던, 서인과 남인 중진들을 다시 벼슬길에 나서도록 배려한다. 그러나 이때 풀려난, 최명길과 이귀는 1년 후에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적을 끌어 안지 않은 것이 광해군의 실수라기 보다는, 끌어 안아야할 적과 내쳐야할 적을 구분못한 것이 광해군의 패착이었다. 물론, 그 구분선이 참으로 불분명하다.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광해군을 이용하려했던 북인들과, 현실을 모르고 명분만을 주장하는 서인과 남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광해군은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바닷가에서나 살며 여생을 마치고 싶다'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는 지쳐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판에서 진절머리가 난 광해군! 인저반정이 일어나고도 19년을 더 살아, 삼전도의 치욕을 보며 세상을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도 집착했던 왕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홀가분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4. 광해와 노무현!! 그리고 문재인

  한명기는 '광해군'이라는 책 곳곳에서 오늘과 광해군이 살았던 당시를 비교하며,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을 당부한다. 재조지은을 배풜었다며, 후금을 공격할 것을 종용하면서도, 조선에게 염초제조법을 알려주지 않는 명나라와,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도 한국의 미사일 사정거리를 180km로 묶어 놓는 미국을 비교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냉혹한 국제관계의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보게 된다. 중립외교정책을 추진하며, 조선이 살길은 '재조지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일임을 강조한 사람이 광해군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과 대화하며 강대국들 속에서 균형자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퇴임할 무렵, 외국언론에서는 중진국 지도자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며 그의 리더십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림들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 명나라에 사대를하며, 재조지은을 지켜야한다는 꼴통들에게 광해군의 현명한 외교전략은 '배은망덕'한 말일 뿐이었다. 북한과는 대화할 수 없으며, 미국의 주장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종미주의자'들에게는 노무현은 이상주의자이고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타의에 의해서, 또한 사람은 임기가 끝나서 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그리고 광해군은 19년 동안을 모진 고통속에서도 세상을 달관하며 살았고, 노무현은 정치적 보복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광해군은 미국에서 중국으로 세계의 패권이 옮겨가는 시기에 다시 부활했고, 노무현은 이명박근혜정권을 거치면서 국민들에 의해서 다시 소환되었다. 우리는 광해와 노무현과 같은 리더를 필요로하고 있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탁월한 외교전략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광핸군이 다시 환생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에게서 문재인 정권은 교훈을 얻어야한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다.' 아무리 외교를 잘한다해도 내정을 못한다면 정권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운전자론'이라는 자주적 외교는 국내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고, 수구세력에게 다시 정권을 내놓아야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엄한 정치 현실이다.

 

  우리는 광해군과 노무현을 끊임없이 소환하고 있다. 그들의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기득권을 가진자와 그 후손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광해를 무덤에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노무현과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다. 그들 수구세력에서 광해와 노무현을 떠올리는 문재인이라는 정치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일까??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명청 교체기라는 격변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겪은 고통을, 미국에게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잊지 말아야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07-03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0 | URL
감사^^ 감사^^

레삭매냐 2018-07-03 15: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조선시대 유삼(노산군-연산군-광해군)한
세 명의 군주 중의 하나로, 인조반정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 군주가 아닌
가 싶습니다.

동아시아 질서가 바뀌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친명배금 정책을 고수하다
망국으로 나라를 이끈 서인세력이 반성을
했던가요? 아니죠.

503호를 앞세워 호가호위하던 정치세력
과 어찌나 그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강나루 2018-07-03 18: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당시의 시대상과 오늘날이 자꾸 오버랩되었어요

야상곡(夜想曲) 2018-07-03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금의 헬조선에선 조조나 손권,제갈량,관중,왕맹,유기,강희제같은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의 헬조선에선 더더욱 왕맹의 리더쉽이 매우 많이 필요하다.(지금의 중국은 절대 한족들만의 중국이 아닌 북방과 서방의 힘으로 거대해진 대륙의 집합체로서 다민족국가의 장점으로 운영되는 나라이다)

만화애니비평 2018-08-10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향녕 교수의 그런 시점은 기축옥사 관련 도서입니다. 상당히 어이 없는 글입니다.
임진왜란의 불씨가 기축옥사와 관련 있는 이유가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동인(북인)들이 위주이고, 그 중에 정인홍이나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들 점에서 많은 여파가 나옵니다.
군권에서도 동인(남인) 세력은 이순신을 지원하고, 서인은 원균을 지지하죠....
광해군이 집권하자 원균의 집에 내려준 녹봉을 없애버리는데, 인조반정 이후 다시 원균의 집안에게 녹봉을 하사합니다. 그런 겁니다..허허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