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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을 읽고 난후, 2권을 집어들었다. 정조가 없는 암흑의 시대! 정조라는 성군을 만났기에 화성을 건설하고,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없는 세상은 해가 없는 하늘이고 달이 없는 밤이었다.

  이 암흑의 시대를 정약용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채웠다. 실학을 집대성하고 500여권의 저서를 남긴 것은 바로 그의 18년 유배생활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실학의 최고봉이자, 조선 500년 역사 최고의 학자로 남겨질 수 있었다. 이러한 유배를 그에게는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할 까? 아니면 불행이라고 생각해야할까? 아마도 불행을 정약용이 행운으로 바꾸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정조가 없는 암흑의 시대를 학문이라는 등불로 밝혀나가고자했던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에 대한 노론 벽파의 공격은 천주교를 트집잡아 시작한다. 그는 천주교를 배격하였으나, 노론 벽파에게는 이 사실보다는 그를 죽이겠다는 표독한 집념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 많은 인재가 죽어갔다.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 부터 시작해서 수 많은 남인들이 죽어갔다. 그리고 그의 형, 정약종도 그 수많은 사람중에 한사람이었다. 단지 정약용 그와 그의 형 정약전이 유배되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할 정도였다. 피바람의 시대, 야만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책은 유배시절의 그의 많은 저서와 민초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우고 있다. 때로는 너무도 어려운 '주역'이라는 책을 정약용의 저서를 길게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주역'의 '주'자도 모르는 나에게 너무도 이해하기 난해했다. 정약용 그가 '왕필'을 능가하는 '주역'의 대가라는 것 밖에는 머릿속에 남지 않는다. 이덕일이 밉기가지 했다.

  유배지에서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과 그의 형 정약전의 '자산어보'의 완성, 탁월한 스님 혜장 선사를 유학자로 만든 일화 등이 정약용의 유학자로서의 탁월함과 그의 형재들의 재주가 사장된 사실에 대한 안타가움을 더했다. 국가의 안보보다는 정권의 안보만을 위하는 노론 벽파의 모습이 치가 덜리기도 했다. 18년 동안의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에 안착한 그에게 서용보가 측은히 안부를 묻는다. 그러나 그는 겉으로는 정약용을 위하면서 조정에서는 정약용을 배척했다. 노론벽파의 광란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익종이 죽기 직전에 그를 불러 치료하게 해서, 치료를 하지 않아도 죽고, 치료해도 죽게 만든다. 정약용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그는 또다시 유배를 가거나,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다.

 광란의 시대! 암흑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며 시대를 달관했던 정약용! 18년동안 정조의 곁에 있었고, 18년 동안 유배를 갔고, 18년 동안 유배지에서 돌아와 초야에 묻혀 살아야했다. 너무나도탁월한 그의 재능이 현실에서 너무도 짧게 쓰여진 것이 안타깝다. 언제나 인재는 있지만, 그 인재를 쓸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에 그 인재는 땅에 묻힌 구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노론 벽파! 그들의 광란이 우리의 역사발전을 가로 막았고, 그리고 근대화를 막았으며, 일제 강점의 토대를 만든 것이 아닐가? 그리고 오늘은 과연 그렇하지 안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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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라면 정조처럼 -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 코드 5049
김준혁 지음 / 더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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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되었는가? 이 질문에 독살 되었다고 말하면 주류의 역사학자들에게 뭇매를 맞게 된다. 이덕일이 책을 많이 팔아 먹기위해서 주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는다는 비난을 받기에 딱좋다. 이덕일의 책을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덕일을 변호하면서도 굳이 정조 독살설을 비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문재인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칭 정조변호라라고 말하는 김준혁 교수의 책이기에 그를 통해서 정조를 새롭게 만나고 싶었다. 시중의 자기 개발서의 냄새를 풍기는 책제목을 보며, 과연 인간 정조의 모습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할지 궁금하다.

 

1. 정조의 개혁과 문재인의 개혁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말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이 너무도 처참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보유국"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근혜 정권 시기 메르스 사태와 같은 대처를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했다면 너무도 비참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정조의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경제개혁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한다.

  신혜통공을 실시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발달을 도모하는 경제 개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용한다는 전교를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대돌리며 반대했다. 마치, 조국을 비롯한 추미애, 박범계 법무장관을 임명하려하자, 야당이 무척이나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 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경우에는 검찰청이 상상을 초월한 고강도 압수수색을 했다. 검찰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것을 관철했듯이, 조국을 법무장관에 앉혔으며, 추다르크라 불리는 추미애와 판사출신의 박범계를 법무부 장관에 앉히며 개혁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마치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강팀들을 상대할 때, 계투 작전을 방불케하는 용인술이다. 조국과 마찬가지로 추미애와 박범계도 사소한 일들을 침소봉대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른 추악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신혜통공을 추진했던 채제공도 마찬가지이다. 시정잡배들이 채제공의 집에 와서 야유를 하는 무례한 짖들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모든 고난을 극복해야만 개혁은 완성된다. 문재인 정권도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혜통공을 반포하여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켰듯이, 검찰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리의 검탈이 국민의 검찰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라는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이 부족하다고 하자, 대통령은 "저는 반드시 기자회견만이 국민들과의 소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통의 한 방법이죠."라고 일갈한다. 기자들의 얕은 생각으로는 자신들과의 소통이 국민들과의 소통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기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낮아졌다. 박근혜에게 질문한번 제대로 못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자들은 질문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러면서 기레기라는 말들이 시민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정권에서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을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런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통의 방법이 '국민청원'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국민청원'에 올리면 20만의 시민이 동의하면 청와대가 답변한다. 청와대가 해결할 수 없는 요청도 올라온다. 억울한 시민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청와대가 해결은 못해도 들어주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정조가 화성행차를 하면서 수많은 격쟁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문재인 정권의 국민청원은 현대판 경쟁이요. 상언이다. 일본의 경우, 격쟁을 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다이묘에게 격쟁을 하면 다이묘는 농민의 억울함을 듣고서 그 농민을 죽여버렸다. 말그대로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조대왕은 수많은 격쟁을 받아들이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했다. 왕의 행차를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가로막고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행위는 관점에 따라서는 무례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소통의 한방법으로 정조는 활용한 것이다. 정조의 이런 소통의 방식은 맥이 끈기지 않았다. 정조의 '격쟁'은 문재인 정권에서 '국민청원'으로 부활하여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 이를 기레기들만 모르고 있다.

  김준혁 교수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김준혁 교수는 '하마석'이라 말한다. 양반이 말을 탈때, 양반은 노비를 밟고 말을 탄다. 인간이 인간을 밟는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정조는 하마석을 설치하여 양반이 노비를 밟고 말을 타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없애려했다. 만백성을 아끼는 애민군주 정조의 모습이 빛나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애민정치는 어디에서 부터 시작해야할까? 코로나 19 펜데믹을 극복하고 있는 오늘을 생각해보자.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을 극복하는데 많은 의료인력들의 노고가 가장 크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인력의 노고만으로는 지금의 K-방역이 성공할 수 없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비대면 사회에서 택배 노동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K-방역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연이어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요즘, 택배 노동자에 대한 노동 상황을 개선하는데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아울러, 코로나 19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그늘진 노동현장을 들여다보고 개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애민군주 정조의 리더십을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배워야할 가장 큰 덕목이지 않을까?

 

2. 정조는 독살되었을까? 

정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정조는 왜? 죽었는가?"이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정조 독살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조 독살설을 대중에게 퍼뜨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이덕일'이다. 역사관련 서적 분야에서 이덕일은 엄청난 베스트 셀러를 연이어서 내놓고 있다. 억울하고 원통해하는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이덕일의 역사관은 한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강한 흡입력을 불러 일으킨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정조가 왕이되어 개혁정치를 추진하지만, 정순왕후로 대표되는 노론세력의 반발로 독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의 공전의 히트는 많은 강단 사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노론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전공자들은 이덕일을 열심히 비판했다. TV에 자주나오는 신00 교수는 독살설에 대해서 '조선이 그정도로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역사관련 연수를 갔을 때, 충남대학교 모교수는 '어느 작가는 조선의 모든 왕들이 독살되었다는 듯이 서술한 사람도 있다.'라며 비꼬기도 했다. 정조 독살설은 이덕일을 비판하는데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이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한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믿지 않지만, 세사람이 말하면 호랑이가 시장에 나타났다는 말을 믿는다. 나도 정조 독살설을 믿지 않았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가 겹쳐서 죽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사 겹쳐 죽었다는 기존입장이 왜?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바뀌었을까? 정조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정조 독살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정조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에게 입적시킨다. 그런데, 효장세자가 죽은 이유를 아는가?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효장세자는 '화흉(和兇)'으로 죽었다. 무신난 이후,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대를 끊어 놓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뼈를 가루내어 효장세자의 밥에 넣고 궁궐주변에 묻어두었다. 이러한 죽음은 효장세자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가 3번이나 청혼한 끝에 결혼한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았다. 문효세자의 죽음은 홍역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문효세자가 죽은 후 2년 뒤 밝혀진 사실은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문효세자의 어머니이 의빈  성씨도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구선복은 누구인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을 때,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자이다. 이를 12살의 정조는 똑똑히 보았다. 그럼에도 왕이 되어 구선복을 죽이지 않았건만, 구선복은 정조가 사랑하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 정조 주변에는 노론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조를 노리고 있었다. '명의록'에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한나라의 왕세손이 자객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사흘만에 자객이 궁궐에 난입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조 주변에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았고, 정조 주변의 소중한 인물들이 독살되었다.

  정조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약을 잘못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정순왕후가 기력이 좋아지고 있는 정조의 방에 들어와서 신하들로하여금 무러나게한다. 얼마후 곡소리가 난다. 정조는 "수정전"을 외쳤다. 수정전은 정순왕후를 뜻한다. 기력이 회복되고 있는 정조를 여성이 독대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조사후, 권력을 잡은 것은 정순왕후이다. 정조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정순왕후이다. 그렇다면 정순왕후를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결정적 증거가 없기에 노론 세력에 의해서 정조가 독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조와 정조를 둘러싼 사람들의 죽음은 '정조 독살설'을 허무 맹랑한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정조는 무명옷만 입었으며, 옷이 해지거나 버선이 구멍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꿰매 입었다. 침전 영춘전이 하도 낡아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어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모두 누리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리면 백성의 삶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너무도 검소해서 방안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도 알았을텐데 말이다.

  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을 낮추며 몸으로 낮은 곳에 임하는 삶을 살았던 정조 대왕! 그의 삶을 통해서 나도 한가지를 배웠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하려고 하지 말라!"

 

  탁월한 리더일 수록 아랫사람의 일처리가 미숙해보인다. 내가 리더에 있을지라도 절대 완벽을 요구하지 말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리더인 내가 채워주자! 리더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아랫사람은 입을 다문다. 아랫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말자. 이것이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통해서 배운 정조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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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참 우리 고전 5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돌베개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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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이 혁명보다 힘들다."라는 말이 있다. 혁명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이라면, 변혁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하기 때문이다. '초정'이라는 박제가의 호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제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처럼 왕에게 나라를 변혁할 방안을 제시하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 했다. 굴원에게 어리석은 회왕이 있었다면, 박제가에게는 명철한 정조라는 군주가 있었다. 어찌보면 서얼 출신인 그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될 수 있었던 것도 정조라는 성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농업을 권장하고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을 내리자, 박제가는 자신의 『북학의』를 다듬어 정조에게 바쳤다(1798년). 중국을 모델로 조선을 변혁시키려했던 혁명가 박제가는 얼마나 가슴이 부풀어 올랐을까? 철인군주 정조에 의해서 조선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으니라 기대했을 것이다. 박제가가 만들고자했던 새로운 조선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1.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

박제가의 『북학의』에 그려진 조선의 모습은 너무도 참담하다. 굳이 중국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조선의 현실은 너무도 궁벽했다.

 

"중국의 백성들은 대개가 비단옷을 입고 담요에서 잠을 자며, 침상이나 탁자를 구비해 놓고 산다. 농사를 짓는 자조차도 옷을 벗지 않고 가죽신을 신으며, 정강이에 전대를 차고서 밭에서 소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 시골의 농부들은 한해에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난 이래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그 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기른다. 아이들은 10세 전후가 될 때까지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벌거숭이로 다닌다. 그러니 이 천지 사이에 가죽신이니 보선이니 하는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한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농잠총론」, 265쪽

 

풍족한 삶을 사는 중국의 백성에 비해서 조선의 백성은 너무도 헐벗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박제가는 궁핍한 조선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 중국의 기술을 배울 것을 강조한다. 박제가가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강조한 것이 '수레'의 사용이다. 조선은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가마를 사용한다. 말을 이용하기 보다는 인력을 사용한다. 기껏해야 나귀를 기른다고 하더라도 나귀를 위해서 사람이 먹는 음식의 배를 나귀에게 먹여야하며, 주인이 외출하는 곳이 없으면 나귀의 힘을 이용하지도 못한다. 박제가는 이를 "짐승을 데려다가 사람을 먹이는 꼴"이라 지적한다.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걸쳐서 우리에게는 강력한 기병이 있었다. 수레를 사용하고 말을 타고 다녔다. 그런데, 조선왕조에 들어서서 말과 수레가 사라지고 가마가 등장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조선왕조의 퇴행은 수레와 말에서만 한정되지 않는다.

중국이 벽돌로 다리를 만드는데 비해서 조선은 나무로 다리를 만들었다. 다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할 까봐 백성들이 물속에 들어가 다리기둥을 잡고 서 있었야 했으며, 실제로 다리가 무너져 사람과 말이 시대에 나뒹굴기도 했다. 분명 고구려에서는 평양의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검약을 미덕으로 숭상하는 성리학을 국교로 삼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많은 것이 뒷걸음질쳤다. 상공업을 말업이라며 천시한 조선왕조에서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할 수 없었다. 지배자들의 잘못된 선택은 조선왕조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석굴암을 만들고, 세계 최초 금속활자를 만든 우리 민족의 과학기술은 제대로 된 다리 하나 만들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박제가는 조선의 상업과 과학기술, 백성의 생활모습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우리나라 사람은 배움은 과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견문은 조선의 강역을 넘어보지 못하였다. (중략) 그래서 점차 세련되고 우와한 문명세계로부터 자신을 차단시켜버린다."-「골동품과 서화」, 128쪽

 

활발한 대외 교류를 하기 보다는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얕잡아보면서 우물안 개구리로 전락한 조선은 좁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결국, 조선의 발전은 더딜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우리의 울타리를 넓히거나, 과감하게 울타리를 뛰어 넘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큰 세계를 보지 못하다. 날로 새로워지고 나 자신의 시야를 확대하려는 끊임 없는 노력이 있을 때만이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다. 18세기 조선을 살았던 박제가는 울부짖고 있었다. 시야를 넓혀라, 날로 새로워져야한다고 말이다.

 

2. 변혁의 열망이 지나쳐, 우리의 장점을 못보다.

박제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있다며, 서얼인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다. 그리고 그 울분은 적서의 차별이 없는 중국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진다. 중국의 문물이 조선보다 앞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의 문물 못지 않게 우리 것의 장점이 있다. 박제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한국사 수업을 통해서, 우리가 금속활자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좋은 먹과 '천년지'라고 불리는 조선의 종이, 그리고 훌륭한 활자 제조술이라는 3박자가 맞았기 때문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박제가는 조선의 종이는 그림과 글시 쓰기에 부적당하며, 조선의 먹은 한해가 지나면 광택이 없어지고, 다시 한해가 지나면 갈 수도 없다고 비판한다. 이에 비해서 중국의 먹은 오래 쓸수록 더욱 가치가 있고, 중국의 종이는 규격이 일정하여 낭비가 없고 그림과 글씨를 쓰기에 좋다고 평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맥궁'이라 부르는 우리의 자랑인 '활'은 사정거리가 200보에 이른다. 이에 비해서 중국 활은 사정거리가 60~70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박제가는 우리의 활은 비가 오면 사용할 수 없는 반면에 중국의 활은 건조하거나 습기가 있어도 변형이 없다며 중국활이 훌륭하다고 평한다. 이렇게 박제가는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의 특산품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중국 물건의 훌륭함을 아낌없이 칭찬한다.

박제가의 중국에 대한 지나친 찬양은 '중국어 전용론'으로 까지 발전한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가깝게 접경하고 있고 글자의 소리가 중국의 그것과 대략 같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고 해도 불가할 이치는 없다. 이렇게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 다음에야 오랑캐라는 모욕적인 글자로 부리는 신세를 면할 수가 있다. 그리고 수천리 동국이 저절로 주 · 한 · 당 · 송의 풍기가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이 어찌 크게 상쾌한 일이 아닌가?" -「한어」, 107쪽

 

중국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동경이 우리의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과거에 논쟁이 되었던 "영어 전용론"을 연상케하는 주장이다. 박제가의 주장을 따른다면, 세계의 패권이 미국에게 있는 지금은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세계의 패권이 다시 중국으로 간다면 모국어를 "중국어"로 바꿔야할 것이다. 그리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민족을 말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과도한 중국에 대한 동경이 우리를 문화적 종속국으로 만들자는 주장으로 발전한 셈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는 방도는 없을까? 그 해답을 '화성'에서 찾을 수 있다.

박제가는 벽돌의 장점을 설명하면서, 우리도 벽돌을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특히 우리의 성은 돌로 만든 석성이 대부분이며, 해자도 없고, 토성의 경우 높이가 빈약하다고 비판한다. 반면에 중국의 성은 벽돌로 만들어 일정한 규격으로, 원하는 성을 손쉽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각 나라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건축물을 만든다. 진흙이 많은 중국은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탑과 집과 성을 만든다. 반면, 우리는 화강암을 쪼아서 성을 만들고 탑을 만든다. 진흙을 구하기가 중국보다 힘든 조선이 벽돌을 굽는다면 그 많은 나무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조선 후기 온돌이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조선의 산에서 서서히 나무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만약 벽돌을 구워 성을 만들고 집을 짓는다면 조선의 산림파괴는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이 딜레마를 정조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석성은 강하지만 돌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붕괴할 수 있다. 반면 벽돌은 돌에 비해 약하지만, 벽돌 일부가 파괴되었다고 성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는다. 벽돌과 돌의 장단점을 잘 살려 쌓은 성이 바로 정조가 정약용에게 설계하도록한 '화성'이다. 중국의 문물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중국의 문물과 우리의 문물의 장점과 단점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그 장점을 살려서 "화성"을 쌓았다. 박제가에게는 정조와 같은 식견이 필요했다. 거센 바람에 휘둘리기 보다는 그 바람을 타고 자유로이 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이 박제가에게는 필요했다.

 

3. 변혁은 지금도 필요하다.

박제가가 중국에 다녀온 후, 많은 조선 선비들이 박제가에게 중국에 대해서 물었다. 박제가는 그가 본 중국 문물의 우수성을 침이 마르도록 말한다. 박제가의 말을 들은 조선 선비들은 "모두 망연자실하여" 박제가의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이 듣고 싶었던 것은 '청 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라는 비판과 경멸의 말들이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조선은 '정신 승리'를 도모한다. 그 '정신 승리'가 조선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일정부분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신 승리'가 조선을 중국보다 발전시키지는 못한다. 어디 까지나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조선 선비들의 현실도피의 방법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듣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조선 선비의 "확증편향"은 너무도 뿌리 깊었다.

박제가는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丙午所懷)"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조에게 올린다. 조선을 변혁시킬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했다. 박제가의 개혁안을 받아줄 군주가 있으니, 조선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현재 천하는, 동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서장, 남쪽으로는 과왜, 북쪽으로는 할하에 이르기까지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백년입니다. 이것은 지난 역사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힘을 다하여 국력을 키우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라도 발생할 때 우리도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208쪽

 

편안한 때, 위태한 때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환란을 당할 수밖에 없다.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당한다는 박제가의 경고를 정조는 받아들였을까? 정조는 "여러 조목으로 진술한 내용을 보고서 네 식견과 취향을 볼 수 있었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그가 제시한 개혁안은 참으로 혁명적이다. 청렴결백한 선비를 고결한 선비라 칭찬하는 조선사회에서 박제가는 놀고 먹는 사족들을 처리할 방법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밑천을 빌려주어서라도 장사를 하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는 반드시 검소함으로 인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에는 비단을 짜는 베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소비를 통해서 생산을 늘리자고 과감히 주장한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조선 사회의 관념에 정면 대결을 하는 발상이었다. 그는 조선 사회에 혁명적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서 조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고 싶었다.

박제가의 사상이 시대를 앞서 갔다는 사실은 서양 선교사를 초빙하자는 주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중국의 흠천감에서 역서를 만드는 서양 사람들은 모두 기하학에 밝고 이용후생의 학문과 기술에 정통하다고 들었습니다. 국가에서 관상감의 한 부서의 비용으로 그 사람들을 초빙하여 관상감에 근무하게 하고, 나라의 우수한 인재를 그들에게 보내 천문 과 그 운행 (중략) 방법을 학습하도록 조치하십시오." 202쪽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은 개화파 지식인들이 주장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지식인이 등장하기 이전에 조선의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에 의해서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서 그들의 기술을 배우자고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조선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주장을 박제가가 왕에게 제시했지만, 정조는 박제가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다. 조선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정조조차도 그러했다. 시인 한유가 말했듯이, 천리마는 언제나 있다. 단지 천리마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에 천리마는 보통 말들 사이에서 늙어갈 뿐이다. 박제가라는 천리마는 그렇게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를까? 청을 오랑캐라 부르며 얕잡아 보았던 조선 지식인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볼 수 있다. G2로 도약하며 '대국굴기'를 외치는 지금의 중국을 아직도 싸구려 물건을 만드는 나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은 달에 우주선을 보내고, 달 뒷면을 탐사하게까지 했다. 핀테크를 비롯해서 안면인식 기술, 첨단 무기, 5G 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이미 올랐다. 싸구려 물건을 만드는 나라에서 최첨단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로 도약하고 있다. 중국은 더 이상 우리가 가르쳐주어야하는 미개한 나라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중국에게서 배워야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어디 중국뿐이랴!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기술 강자는 존재할 수 없다. 항상 주위를 살펴보며, 나보다 좋은 점이 있다면 배울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춰야한다. 태평한 시기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박제가의 경고를 기억하며, 날마다 새로워져야한다.

 

1778년 연경에서 돌아온 후, 3개월 만에 경기도 바닷가 마을에서 박제가는 『북학의』를 완성한다. 당시 그의 날이 29세였다. 그후, 그는 이 책을 수정하고 보완하면서 조선을 새롭게 변혁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시대는 그의 변혁을 용납하지 않았다. 초나라 굴원이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해 돌을 끌어안고 호수에 몸을 던졌듯이, 박제가도 사돈인 윤가기의 옥사에 연류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국경지대인 종성에 유배된다. 함경도의 이원을 지나며 박제가는 정조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시한수를 짓는다.

 

선왕께서 개혁에 뜻을 두고 / 폐습 씻어 기강을 회복하려 하셨건만 / 퍼지던 향기 중도에 끊어졌으니 / 고통에 허덕이는 백성을 누가 소생시키나? / 신을 불러 왕안석에 비유하신 / 그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하구나! -「이원에서」, 281쪽

 

박제가는 실생활에 필요한 작은 것부터 중국을 본받아 개혁하려했다. 그러나, 명철한 군주 정조도 그의 개혁을 받아주지 못했다. 송나라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쓸쓸히 생을 마쳤던 왕안석에 박제가를 비유하며 아직은 때가 아니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무르익었을 때, 정조는 박제가의 곁을 떠난다. 정조가 사라진 조선은 세도정치라는 암흑 속으로 빨려든다. 정조는 박제가에게는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정조가 사라지자,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던 인재들이 하나 둘 제거되기 시작했다. '위항도인'이라는 그의 또 다른 호처럼, 정조사후, 그는 ‘갈대로 만든 나룻배를 탄 도인’ 처럼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박제가는 모진 고문 끝에 종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돌아왔지만, 그 이듬해 그도 정조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난다. 박제가는 떠났지만, 박제가가 던진 화두는 아직도 유효하다. 끊임 없이 새로워지고 끊임 없이 변혁하지 않는다면, 박제가 사후 조선이 망국의 길에 접어들었듯이, 불행한 역사는 반복되리라는 진리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조선시대 성리학에 경도된 어리석은 선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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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멋진 신세계 - 반복되는 억압에서 조선이 찾아 헤맨 유토피아 연대 역사서당 1
김양식 외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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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멋진 신세계'!! 얼마나 아름다운가! 7가지 주제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꿈꾸면서 추구했던 이상세게에 대해서 6명의 학자들이 자신만의 필치로 책을 써내려갔다. 조선의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냈으리라 생각했던 선입관은 무너지고, 조선의 민중들이 이상세계를 건설하려했던 치열한 노력들이 한땀한땀 펼쳐졌다. 조선의 민중들은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했을까?

 

1. 활빈당!!

  홍길동이 만든 활빈당에서 이름을 차용한 '활빈당'!! 활빈당이 활약했던 시기는 조선말기에서 대한제국기이다. 국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세의 경제 침탈은 가속화된다. 고통받는 민초들이 스스로 활빈당을 만들어 새시대를 열려했다. 홍길동처럼 부자집을 털어서 가난한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했고, 때로는 약탈자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적의 수준에 그쳤다. 새로운 세상을 열수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그러나 고통받는 민초들이 스스로 새세상을 희무하며 때로는 의병에 가담하고, 때로는 못된 부자들을 혼내주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려했던 열혈남아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측은하면서도 안타깝다는 느낌이 활빈당에게서 느껴진다.

 

2. 동학과 동학농민운동

  1894년 뜨거웠던 그 해에, 밥과 사람이 하늘이 세상을 만들고자 그들이 일어섰다. 무능한 지배층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하고 있던 그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일어섰다. 전봉준은 대원군과 손잡고 기존질서를 변혁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했다면, 김개남은 남쪽에서 새로운 나라를 열겠다는 열정으로 일어섰다. 이 시대를 변혁할 것인가? 혁명할 것인가? 혁명보다 변혁이 힘들다. 전봉준은 변혁을 선택했고, 김개남은 혁명을 선택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그해, 두사람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그 안타까움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로 응축된다.

  동학농민군들이 '토지를 평균하여 분작한다.'라는 주장을 했을까?라며 의문을 표현하는 학자들이 있다. 일부 한국사 교과서에서도 동학농민운동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싣지 않는 교과서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오지영의 '동학사'의 '토지균등조항'이 허구가 아님을 주장한다. 첫째, 토지개혁론이 있는 '경세유표'를 전라남도 강진의 윤세현등이 전봉준에게 전달했다는 '강진읍지'의 기록을 든다. 둘째, 윤세현의 출신지가 다산초당과 20킬로미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셋째, 윤세현이 농민군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일이다. 토지 개혁을 주장한 농민들의 뜨거운 함성이 사실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더 많은 후속연구가 행해지기를 바란다.

  아울러, 전봉준이 생각했던 개혁방향을 알려주는 사료를 첨부한다.

 

  일본병을 쓸렁버리고 간악한 관리들을 쫓아내어 임금의 측근들을 깨끗이 제거한 뒤 몇 명 주석의 사를 세워 정치를 잡게 하며 우리들은 곧 시골로 돌아가 상직인 농업에 종사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먼저 국사를 모두 일인의 세력가에게 위임하는 것이 큰 폐해임을 알기 대문에 수인의 명사에게 협합하여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장악하도록 하는 생각을 했다. -1895년 3월 6일 "도쿄아사히신문"기사-

 

3. 정감록과 미륵신앙

  '정감록'은 정도령이 계룡산 밑에서 새로운 정씨 왕조를 세운다는 내용의 예언서이다. 이 책을 믿고 혹은 특정 신인의 말에 현혹되어 반란을 모의한자들이 있다. 그중에는 일명 잘나가는 집안 똑똑한 사람들도 있다. 잘나가는 집안에서 정감록과 같은 책을 믿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글쓴이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현대에도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 재산을 바치고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사람 중에는 똑똑하고 잘나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진실을 판별하는 능력은 아이큐와는 상관없다. 인간의 원초적 약점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약탈했을 뿐이다.

  정감록은 미륵신앙과 습합하기도 했다. 변산은 정감록의 10승지 중에 하나이다. 변산이 10승지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륵신앙과 관계 있기 때문이다. 미륵신앙은 시기에 따라 다양한 사상과 종교들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해갔다. 아니, 민중들이 미륵신앙과 정감록을 비롯한 다양한 사상들을 흡수하며 새로운 세계를 희구하고 있었다.

 

4. 천주교

  신분제가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꾼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천주교의 평등 사회를 경험하고는 죽음도 이겨내는 힘을 갖게된다. 백정 황일광은 신앙 공동체에서 '천당'을 미리 체험한다. 이것이 모진 고문에서도 배교하지 않는 힘이된다. 많은 이들이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 그 꿈은 죽음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원했던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근혜 정권시기 교육부에 있었던 행정관은 신분제가 부활되어야한다는 내용의 말을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신분제를 다시 부활하기를 고대하는 기득권세력이 있다. 그들은 수많은 이들을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 주어 자신들의 행복을 만들려하는자들이다. 새로운 신분제 즉, 금권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계급질서를 붕괴시킬 방법은 없을까?

 

5. 다산 정약용

  새로운 사상을 소개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오직 마지막장만이 한인물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 사람의 이름은 정약용이다. 그는 곡산부사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목민관이 백성을 편안히 하기 위해서 어찌해야하는지를 집대성한 '목민심서'를 탄생시킨다. 목민은 이상이 아닌 실천이다. 그는 앉아서 탁상행정만을 하지 않고, 직접현장으로 갔다. 세금이나 환곡을 거두거나 나눠줄 때 현장에서 향리들의 부정을 막았다. 정약용의 탈월함과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이 어우러져 바람직한 목민관의 모습이 탄생했다. 다산 정약용과 같은 관리가 등용되어 더 많은 백성들이 그 혜택을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그는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조선의 불행중에 하나이다. 아니, 조선 백성들의 불행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찾아 헤멘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말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토피아를 찾아 헤메기 보다는 실제로 가능성이 있는 대안을 찾기 위한 '유토피스틱스'를 해야할 것이다. 우리의 이상을 현실에 펼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는 일을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유토피아를 찾아 헤메지 않아도 된다. 존재하지 않는 옥토를 찾아 헤메기 보다는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 방법을 찾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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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seuk 2019-07-1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평대군, 몽유도견도, 전봉준, 김옥균, 임꺽정?????
 
조선 최대 갑부 역관 표정있는 역사 1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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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조선을 배경으로한 사극을 보면서 농민과 천민에 감정이입하기 하기보다는 양반과 왕들에게 감정이입한다. 분명 조선전기 양반은 기껏해야 2~3%밖에 되지 않았으며, 16세기 노비의 비율은 60%에 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우리 대부분은 양반의 후예이기 보다는 노비의 후예일 가능성이 더 많다. 자신을 고귀한 신분의 후예로 만들고 싶어하는 대중들의 바램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을의 입장에서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이 현실을 떠나 사극에서나마 갑이어야 괴로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양반이라는 지배층의 역사를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고 농민과 노비의 삶을 다루지도 않는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서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역관의 삶을 다루고 있다. 역관의 삶을 들여다보자.

 

1. 공무역과 사무역의 최전선에 역관이 서다.

  '나랏말쌈이 중괵에 다라'라는 세종대왕의 말씀처럼, 중국과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역관은 중국과 우리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했다. 역관은 단순한 가교역할만 한 것이 아니다. 두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했다. 역관의 활약은 조선에서 두드러졌다. 고려와는 달리 사농공상의 직업관을 가진 조선에서 역관을 사대부에 비해서 낯춰보았지만, 역관은 그러한 천대에 굴하지 않고 사무역의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덕일은 책의 시작을 허생전에서 시작한다. 허생에게 차용증도 쓰지 않고 1만냥을 단숨에 빌려준 '변승업'은 실존했던 인물이다. 8포 무역으로 대표되는 역관들의 무역은 많은 이익을 통해서 역관들은 많은 이익을 남겼다. 그러나, 8포무역이 매번 큰이익을 준것은 아니다. 중국 채류기간이 정해져 있는 약점을 알고 있는 중국상인의 농간으로 많은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새로운 경쟁자로 상인이 등장하기도 했다. 많이들 알고 있듯이,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은 중국상인들의 담합을 깨부수고, 인삼무역에서 10배의 이익을 얻었다. 역관과 상인들의 눈부신 활약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아닌,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상업은 규제의 대상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이 직교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은 청과 일본 간의 중개무역의 이점이 사라진다. 그로인해서 일본 은의 조선 유입이 차단된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조선의 지배층은 강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업을 규제하려고만했다. 세계 정세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좁은 한반도에 갖혀서 구시대적인 방책만을 강구하는 조선의 지배층을 바라보면,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일찍부터 세계의 흐름에 눈뜬 일본과, 세계 정세에 깜깜했던 조선의 모습에 그 근본적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반문해본다. 과연 우리는 그 때의 조선과 얼마나 달라졌는가?

 

2. 조선이 염초를 수입해야했던 이유는?

  우리는 최무선이 화약을 개발했다고 배웠다. 화약만드는 기술은 조선세종시기를 전후해서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조선은 화약만드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다시 총력을 기울인다. 더 나아가 화약의 원료인 염초를 중국에서 수입하려 필사의 노력을 한다. 어찌된 일일까? 최무선이 이원엑 배운 염초제조 방법인 '자초법'을 200년의 평화시기가 도래하자 조선은 잊어버린다. 1급 군사기밀을 평화시기가 도래한다고 잃어버리다니! 말이되는가? 그러나 사실이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문약해졌다. 성리학적 논쟁에는 탁월했을지라도, 나라를 지키는데는 무능했다.

  잃어버린 자초법을 다시 알아내기 위해서 역관들이 필사의 노력을 한다. 서천군보 임몽이 해상 자취법을 알아냈다. 그런데, '선조실록'을 쓴 사관은 임몽에게 동반실직을 하사한 것을 비난한다. '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었으나 천만 사람의 마음을 저하시켰'다고 비판한다. 한사람은 해상 자취법을 알아낸 임몽이고, 천만 사람은 옹졸한 조선의 사대부들이다. 나라를 위해서 공을 세웠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상을 주어야함을 그들의 옹졸함은 용납하지 않았다.

 

3. 중인은 신분적 한계 때문에 조선왕조에 등을 돌렸다?

  '혈의 누'를 쓴 이인직은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러일전쟁시기 일본인 통역관이었으며, 이완용의 비서이기도 했다. 중인들은 신분적 한계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고, 때로는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조선왕조 몰락에 기여했다는 설명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과연 중인들 모두가 그러했을까?

  그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반지배층들이 무능한 모습을 보일때, 앞장서서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했다. 청의 사신 목극등이 백두산의 경계를 정할대, 박권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백두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다. 박권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백두산에 올랐어야했다. 그러나 박권은 오르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역관 김지남과 아들 김경문 부자는 박권을 대신해서 조선의 이익을 지키려 노력했다. 문약한 조선의 사대부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함을 금지 못하지만, 사대부의 문약함을 조선의 역관이 대신 매우고 있는 모습이 흐믓함을 느낀다.

  여관들은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지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유년필독'으로 유명한 사학자 현채가 역관출신이었다. 일제에 아부하며 일제의 작위를 받고 은사금을 받은 일부 양반들에 비하면, 역관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존의 이덕일이 써왔던 책들과는 다른 서술형태를 띄고 있다. 즉, 평전형식 혹은 역사평설 형식의 책이라기 보다는 일종에 논문을 대중을 위해서 풀어써 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양반의 그늘에 가리어 제대로 조명 못한 들의 삶이 이 책을 통해서 빛나 보인다. 소설을 읽는 듯한 박진감을 선보이는 이덕일의 평전형식의 책들에 비한다면, 책을 읽는 박진감을 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우리가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우리 조선의 다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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