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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 생생한 사진과 깊고 넓은 해석으로 경험하는 고구려 역사 현장 다큐멘터리
윤명철 지음, 윤명도 사진 / 참글세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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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남편은 고구려새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고구려새"라고 부른다. 얼마나 고구려의 옛땅을 돌아 다녔는지, "날개뼈에 금이 가도 날아다니다가 뚝 부러져버렸습니다. / 기부스통 속에서 날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얼마나 그의 고구려 사랑이 광기에 가까웠으면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서 '고구려새'라는 시를 지었겠는가? 그의 아내로서는 속상할 수도 있지만, 윤명철과 같은 학자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행운이라 생각한다. 고구려에 미쳐서, 고구려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고구려새' 윤명철이 말하는 고구려의 역사를 만나보자.
                                        

1.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이 책은 다른 역사책과 달리 저자의 감상이 많이 묻어난다. 마치 자신이 살았던 아름다운 고향을 기억하며 떠나버린 사람과 퇴락해버린 오늘을 못내 아쉬워하하며 발길을 돌리는 고향떠난 이의 아픔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의 감상은 장군총과 고구려 산성을 보면서 느낀 소감을 표현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고구려 사랑이 남다르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남다르다. 그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바라보고 있다.

  고구려는 어느 나라를 계승한 나라일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부여를 계승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윤명철은 고구려는 원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말한다. '다물'이라는 고구려말 자체가 원조선의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구려의 원조선(고조선) 계승의식을 주장하는 윤명철의 주장에는 자못 결기가 느껴진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을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고 국민을 가르쳤던 시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원조선의 역사를 삼국시대와 단절해서 서술하는 한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을 서술하고나서, 고조선의 역사적 경험은 깡그리 무시되고, 다시 군장국가에서 연맹왕국으로 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윤명철의 지적은 아쉽게도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일맥상통하도록 서술하지 못하고 단절적으로 서술하는 배경에서는, 고조선을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는 고루한 자들의 인식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조선을 실체적 국가로 보고, 한나라와 당당히 맞섰던 강력한 국가로 보면, '재야사학자' 혹은 '유사사학자'라 매도하는 현실에서 어찌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누적적으로 발전한 우리역사로 서술하겠는가?  

  그러나 윤명철은 다른다. 그는 '삼국유사' 왕력편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기록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전률이 느껴졌다. 그는 동천왕 28년조 '왕검선인의 예터'라는 기록을 인용하며 평양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외교적 중요성을 지적한다. 고구려가 원조선을 계승했다는 그의 주장을 읽어가며, 고구려가 평양성을 중요시하고, 장수왕시기에 평양천도를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삼국사가기 동천왕 28년조에 편양을 왕검선인의 옛터 라고 서술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이는 삼국사기를 서술한 김부식조차도 고구려의 원조선 계승의식을 모두 없애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천 1호분 벽화에 신단수 아래의 곰이 그려져있다. 또한 각저총에는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있기도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인들이 단군신화에 대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윤명철!! 그는 우리 역사를 단절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누적적! 발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구려를 중심에 둔 역사 인식은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일부 빼앗김으로써 동아지중해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중핵조정역할 또한 빼앗겨버렸다. 만주 지역은 우리 민족사에서 멀어졌으며, 우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거란 선비 말갈들으이 종족들은 그 후에 오히려 우리를 압박하는 존재로 변했다. 한편 일본 열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신라계도 참여한 '일본'이라는 국가가 670년에 탄생했다. 싸우고 갈라진 형제는 남보다 못한 법이다."313쪽

 

   남한의 많은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평가하기 위해서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삼한일통'이라는 개념도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 주장한다. 삼국이 통일 되었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나타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조선과 삼국을 계승적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단절적으로 이해하는 그들에게는 삼국은 같은 동류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기보다는 서로 다른 각각의 국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서구의 '민족'이라는 잣대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려하니,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서구와 동남아시아는 1민족 1국가라는 개념이 근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라는 비좁은 곳에서 오랜 동안 살아오면서 일찍부터 동류의식이 싹텄다. 우리에게 동류의식과 같은 맹아적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과연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무조건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삼국통일을 하고 신라의 영토는 3배로 늘어났는가? 통일전의 신라의 영토와 통일 후의 신라의 영토를 비교하면 신라의 영토는 3배로 늘지 않았다.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 땅의 일부를 흡수한 것 뿐이다. 한반도 북부와 광활한 만주벌판을 중국에게 내어주고, 그속에 살았던 고구려인도 넘겨주었다. '통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삼국의 땅과 백성을 모두 통합했어야했다. 통일이라고 보기에도 부족하며, 그로 인해서 '중핵조정역할'을 비롯한 너무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싸우고 갈라진 형제는 남보다 못한 법이다."라는 윤명철의 말이 뼈를 때린다.

  고구려를 중심에 둔 역사서술은 발해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조선은 고구려에 '반역'한 나라로 평가한다. 이러한 조선의 한계를 깨닫고 고구려를 다시 환생시킨 사람들이 있다. 윤명철은 그들을 '독립군들'이라 지적한다. 독립군을 가르칠 정신교육 교재를 집필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고구려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단재신채호 선생을 비롯해서, 발해사를 연구한 장도빈 선생은 독립군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주목했다. 대종교 또한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역사에 관심을 갖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때!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때 고구려는 힘을 주었다. 고구려는 사라진 역사가 아니었다. 우리와 호흡하며,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우리곁에 살아 있다.

 

2. 돋보이는 윤명철의 역사관!!

  역사책을 읽다보면, 비슷한 역사관과 개성없는 서술에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런데 윤명철이 바라보는 역사는 달랐다.

  '동아지중해 중핵 역할'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보통의 학자들이 고구려를 철갑기병을 앞세워 땅을 넓힌 나라라고 바라본다. 육로교통보다 수로교통이 발달한 우리의 역사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육지를 중심으로한 역사인식을 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윤명철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육지와 연결시켜 '해륙사관'을 완성했다. 땟목을 타고 고구려가 항해했을 바닷길을 탐험하기도 했다. '해륙사관'은 바다 뿐만 아니라 '강'에도 주목한다. 윤명철은 만주일대를 '수륙적 시스템'으로 바라보았다. 배가 다닐 수 있는 60여개의 강에 주목하며, 육군이 출동할 때, 강상 수군이 강을 이용해서 보급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모든 강들을 자국이 계획하고 건설할 교통망 속에 편재했다 주장한다. 국내성을 비롯해서, 평양성, 한성은 항구도시라 지적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사료의 틀에 갖히지 않고, 실제 고구려의 땅을 밟으며 고구려의 역사를 찾으려 노력한 그였기에 남들이 보지 못한 고구려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남다른 그의 눈은 여타 학자들이 애써 무시하는 기록에도 주목한다. 5대 모본왕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습격기사를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덕일의 지적에 의하면 강단 사학자들은 고구려 본기의 이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측 기록에도 나오는 이러한 기록을 믿지 않는 강단사학자들을 이덕일은 '식민사학자'라 말하며 비판한다. 그런데, 윤명철은 이덕일의 비판을 빗겨가며, '기마군단' 즉 기병을 중심으로한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해당 기록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걸어다니는 농경민족의 시각에서, 면을 중심으로 한 지배에 익숙한 기존사학자들의 해석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구려는 점과 선의 지배를 했으며, 빠른 기마전술을 구사했던 나라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조선 세종 시기에 4군 6진을 개척하면서도 너무도 고난을 겪어야했는데, 4군 6진보다 몇십배는 많은 영토를 광개토태왕시기 단시일 내에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면을 지배하기 보다는 선과 점을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고구려의 점령방식 때문이 아닐까?

  연개소문을 당신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상당수의 학자들이 연개소문을 독재자로 평가한다. 그의 대당 강경책으로 인해서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윤명철의 평가는 어떠할까?

 

  "시대의 흐름과 고구려인들의 자유로운 기질이 연개소문이라는 인물과 그가 지향하는 적극적인 항전을 택한 것이다." 294쪽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연개소문 개인에게 돌리는 단순한 역사인식에서 벗어난 그의 시각이 다시한번 돋보인다. 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은 고구려 1급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지도 '봉역도'를 당에게 바쳤으며,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허물어뜨리고, 당나라 진대덕이 고구려를 정탐하도록 했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건무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과 중국중심의 세계관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고개를 숙인다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삼국이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인 역사를 뼈아프게 생각한다. 만약 삼국통일이 이뤄졌더라면,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된 중국 대륙의 당나라와 분열된 한반도의 고구려의 싸움에서 당나라가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윤명철은 지적하고 있다.

  윤명철!! 그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몇안되는 역사학자이다. 윤명철은 중국의 시각! 서양의 시각! 미국의 시각! 심지어는 일본의 시각!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자들과 차원이 다른 학자이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자취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이 그들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만,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던 것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우리 역사학계의 태두인 두계 이병도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를 '진정한 역사학자는 이러해야하는구나'라는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학자들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3. 윤명철이 던져준 화두들!!

  '지식인이란 당연한 것에 시비거는 자'라는 말이 있다. 윤명철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일들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적혀있지 않은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한 것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증거라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대학시절 서영수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노교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 훗날, 누군가 의도적으로 내다버린 글귀를 찾아내 우리 역사 속에 살려낸 것이다." 302쪽

 

  이 글귀를 읽으며, '열하일기', '동국통감'에 적혀있는 글귀를 믿지 않은 이유가 과연 정당하지를 생각했다.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기존의 모든 서적들을 살펴보지는 못한다. 모든 비석들을 살펴보지는 못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모든 역사책을 보았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생각이었다. 김부식이 당시에 있었던 삼국의 기록 모두를 '삼국사기'에 담지도 않았다. 윤명철의 지적은 나의 안일한 기존 관념에 비수를 꽃았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광개토태왕'이라 하지 않고, 왜? '광개토대왕'이라 하지요?" 어느 학생의 질문이었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분명, '태왕'이라 적혀있지 않은가? 국사편찬 위원회에 질문을 했더니,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왕명을 적고 있습니다."라는 답년이 왔다. '삼국사기'보다 더 가치가 있고 정확한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아니던가?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라 교과서를 서술해야하지 않을까? 윤명철은 '광개토대왕'이라 적지 않고 '광개토태왕'이라 적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한 왕족 '고안승'을 '안승'이라고 서술한 현행교과서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윤명철은 '고안승'을 '안승'이라고 기록한 것은 '성을 뺀 하칭으로 기록'한 것이라 한탄한다.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고안승'을 '안승'이라 적고 있다. 교사의 설명이 없다면, 안승의 성이 '안'씨로 착각하기에 딱 좋다. 일부 EBS 강사는 안승이 백제 땅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며 신기하다는 듯이 설명하기도 한다. 고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한 사실을 알지 못하니, 엉뚱한 설명을 하는 일도 벌어진다.

  공자의 '정명'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에서 정확한 명칭을 사용해야한다는 상식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광개토태왕'과 '고안승'에게 어울리는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지 물어본다.

  윤명철은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와 이정기에 대해서도 눈길을 돌린다. 헝가리 출신의 역사학자 오렐 스타인이 '카르타고의 '한니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뛰어 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고선지를 평가했다. 탈라스 전투의 영웅 '고선지'를 기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망국의 후예로서 누명을 쓰고 죽는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진다. 윤명철은 질문을 던진다. "그의 삶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대학에서 동양사 개론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선지는 중국인이다."라고 단정하는 노교수의 말은 매정한 느낌마져 들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현종에게 충성'을 간직한채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덕일의 '장군과 제왕'이라는 책이 더오른다. 이덕일은 고선지와 이정기를 묶에서 '장군과 제왕'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1권에서는 고선지를 2권에서는 이정기 일가를 다뤘다. 고선지가 당 현종의 장군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정기를 고구려의 후예로서 당 조정과 맞서며 독립왕국을 건설했다. 이덕일의 탁월한 필력이 빛난 책이었다. 그렇다면, 고선지와 이정기는 자신이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윤명철의 지적대로 그들은 고구려와 옷을 얼마나 입어보았을까? 한국계 미국인 골퍼가 LPGA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열광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시키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한국인 2세 3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고선지에 대해서 씁쓸한 생각이든다. 고선지 보다는 이정기 일가에게서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4.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

  윤명철이라는 탁월한 역사가의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운 점이 몇개 발견됐다. 그중에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몇가지를 살펴보자.

  윤명철은 장군총을 동명왕릉이라 주장한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현실에서 윤명철의 주장은 다소 쌩뚱맞았다. 그는 평양천도 후에, 기존 기득권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국내성에 장수왕이 자신의 무덤을 만들리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단군신화와 주몽신화의 논리가 담긴 건축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윤명철의 주장에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가장 왕벽하고, 태왕릉보다 정교하게 건설된 장군총은 동명왕릉일 수 없다고 본다. 동명왕릉은 태왕릉보다 앞서 건설되었다고 본다면, 태왕릉 보다 건립시기가 늦을 것으로 추청되는 장군총은 동명왕릉일리 없다. 태왕릉 이후에 건설된 큰 규모의 무덤은 장수왕릉일 수밖에 없다. 그가 평양으로 천도하였지만, 이미 살아 있을때, 능을 건설했을 것으로 본다면, 죽어서 국내성에 묻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국내성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는 국내성에 묻혀야했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무덤에는 벽화가 없을까? 물론 신라에는 벽화가 없다. 그러나 백제의 무덤에는 벽화가 있었다. 공주 송산리 제6호분에는 사신도가 있으며,  능신리 동하총 석실분에는 사신도와 연화와 구름이 그려져있다. 비록 많이 훼손되어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백제와 신라 조차도 무덤안에 그림을 그려 놓지는 않았다.(242쪽)"는 윤명철의 지적을 명백한 오류이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 대립만했을까? 윤명철은 "비록 유민들의 피눈물 바다에서 발해라는 새나라가 태어났으나, 그들은 신라와는 영원히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신라와 발해는 교류를 했다고 적혀있다. 그 대표적인 근거가 '신라도'이다. 발해와 신라 사이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두나라가 교류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어찌 옥의 티가 없는 책이 있겠는가? 윤명철의 주장에 일부는 동의하지 않고, 일부는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자의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때,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후, 과연 우리는 고구려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고 있을까? 한때의 관심이 일시에 지나가고 다시 고구려를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걱정이된다. 이러한 시기에 윤명철의 책을 읽는 것은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는 길이된다. 기억하자! 잊지 말자! 영화 '암살'에서 영화속 주인공들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암살'의 주인공들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했던 애원은 고구려인들이 우리에게 하는 절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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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본 발해고 - 최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 번역한 4권본
유득공 지음, 김종복 옮김 / 책과함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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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는 우리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도 없다. 발해의 역사를 생동감 있게 설명하고 싶은데, 읽고 참고할 수 있는 변변한 참고서적이 없다. 발해의 역사를 알고 싶은 열망에 유득공의 '발해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조선후기를 살았던 그도 발해의 역사를 알고 싶었으리라. 그는 우리보다도 발해의 역사를 더 알고 싶었으나, 변변한 역사서를 구할 수 없었기에 여러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서 '발해고'를 편찬했다. 유득공의 핏땀이 아로 새겨져 있는 발해고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발해고'는 3차에 걸쳐 수정되었다.

  한국사 시간에 '유득고 '발해고''를 외우도록한다. 발해사와 조선 후기 실학에 관한 문제가 출제될때, 유득공의 '발해고' 서문은 자주 출제되어왔다. 전문용어로 '일타쌍피'라 한다. 발해사와 조선 후기 실학이라는 두개의 주제에 겹치는 부분은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 이렇게 중요한 유득공의 '발해고'가 3차에 걸쳐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왜? '정본'이라는 수식어를 김종복 교수가 붙였는지 납득된다. 워낙 사료가 부족하다보니,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초고를 작성했으나, 여러 서적을 틈틈히 살펴보면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발해사의 파편들을 발견한 유득공은 '발해고'를 수정한다.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고, 발해의 역사서를 저술하려 했으나, 워낙 자료가 부족하여 '발해사'라 이름 붙이지 못하고, '발해고'라 이름붙였다. 3차에 걸치 수정은 유득공이 얼마나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복원하고 싶었는지를 알려주는 단서이다.

 

2. 오류가 많은 '발해고'

  실학자! 조선후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다양한 개혁안을 내놓고, 국어와 국사, 우리 지리에 관한 주체적 인식을 통해서 수 많은 저술을 남겼다고 우린 배웠다. 철저히 우리역사를 탐구해서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얻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발해고'에는 오류가 있었다. 특히 발해의 지리를 고찰한 '지리고'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유득공이 참조했던 '요사' 지리지는 급하게 저술되는 바람에 오류가 많다. 이러한 사료의 오류뿐만 아니라, '동국여지승람'에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의 위치를 평안도 성천으로 보았는데, 서경 압록부 소속의 신주, 환주, 풍주, 정주 등을 압록강 이남 지역에 비정하는 오류를 범했다.

  하늘 아래 어찌 완벽한 것이 있으랴! 유득공에게 완벽한 발해사를 요구했다면, 그것이 너무도 가혹한 요구였으리라. 사료의 한계 시대적 한계가 뒤엉켜 크고 작은 실수가 있을 수 있다.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하였기에 그나마 발해 역사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하나가 더 추가 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3. 조선 후기 지명에 대한 단상

  '발해고'를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64~65쪽의 '오경도'이다. 사서에 자주 나왔던 '살수'와 '패수'의 위치가 지도에 표시되었으며, '태백산'과 '토문강'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삼국유사의 '태백산 신단수'가 명확히 백두산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이를 '장백산'이라 부른다는 기록까지 있었다. '장백산'과 '백두산'은 다른 살이라는 일부의 주장이 설득력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토문강'이 '두만강'이라 표시되어 있다. '토문강'은 어떠한 강인가? 백두산 정계비에 '서위압록 동위토문'이라는 글귀로 유명해지지 않았던가! 백두사 정계비의 '토문강'을 중국은 '두만강'으로 비정하고, 우리는 '송화강의 지류'로 비정한다. 따라서 간도는 우리의 땅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발해고'에는 '토문강'을 '두만강'에 비정하고 있다. 나의 머리가 멍해졌다. 혼란스러웠다. 최소한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 보았다. 물론, 더 많은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결론을 내려야한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 불어닥친 혼란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발해고'는 너무도 얇은 책이다. 2~3일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책의 분량은 적었다. 더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주었다. 그리고 백두산 정계비를 비롯한 '간도'문제에 대해서 더 많은 탐구를 해야겠다는 과제도 안겨주었다. 고려와 조선에서 돌보지 않았던 '발해'의 역사를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자신의 열정으로 되살리려했다. '발해'를 사랑한 그의 열정의 일부남아 우리가 우리 역사에 갖는다면, 동북공정의 위기 속에서 '발해사'를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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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제왕 2 - 중원의 고구려, 제왕 이정기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이덕일의 주요 글쓰기 소재는 웅장한 한민족과 비운의 죽음을 이룬자들에 대한 장송곡이다. 그의 글을 읽으며 비통함과 웅대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기획한 '장군과 제왕 1,2'도 이러한 그의 글쓰기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구려계 당나라 사람으로 살았던 고선지 장군의 비운의 죽음을 소재로 1편을 썼으며, 그에 이어 고구려계 당나라 사람이기를 거부하며, 당당히 고구려의 부활을 꿈꿨던 이정기의 치청왕국을 소재로 2권을 썼다. 1권에 비해서 2권에서는 이정기와 그의 치청왕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어, 이정기 없는 이정기 평전의 비극을 모면하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휘달렸던 고구려후예들의 웅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 이정기는 진정 고구려인이었을까?

  이덕일은 '장국과 제왕2'의 곳곳에서 이정기를 고구려를 부활시키려는 웅대한 의지가 있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고선지가 당나라 사람이 되려 했으며, 당나라 현종의 부당한 죽음의 명령도 달게 받는 당나라의 충신으로 그려진 반면, 이정기는 장군의 길을 걷지 않고 제왕의 길을 걷는다. 웅대한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는 이정기와 그를 따르는 20만 여명의 고구려의 후예들은 치청제국을 세운다. 여기에서 더 나가서, 발해의 피지배층이 말갈족이라면, 치청제국의 피지배층은 한족이라고 말한다. 치청제국과 발해의 공통점은 지배층이 고구려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과연 이정기는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여러대에 걸치면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 재미교포 2세 골프선수 중에서도 스스로를 미국인으로 생각하는 행동과 말을해서 신문지상에서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는데, 더구나 나라마져 망해버린 고구려의 유민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었을까?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나라이름을 '고구려'가 아닌, '대제'로 정하지 않았던가? 이정기 스스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힌 글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스스로를 고구려인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고구려계 당나라 사람으로 생각했는지는 전적으로 상상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가 고구려인으로서의 뜨거운 피를 느끼고 있었으리라 믿게 된다.

 

2. 역사속에서 배우는 교훈

  역사를 배우다 보면, 많은 교훈을 얻게 된다. 이 책 또한 나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첫번째 교훈은 외세를 끌어들이면 그 댓가를 톡톡히 보게 된다는 점이다. 당나라 숙종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위구르군을 끌어들인다. 그 댓가로 위구르군이 철저히 장안을 약탈하도록 허용한다. 외세를 끌어들인 댓가를 무능한 지배층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당의 백성들이 겪어야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를 끌어들였다가, 명군의 횡포에 조선 백성이 약탈과 살육을 당해야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역사로 부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부의 일에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인다면, 참혹한 댓가가 뒤따른다는 점을 지금의 수구세력들을 알아야할 것이다. P집회에 나갈때마다 성조기도 모자라서 이스라엘 국기까지 가지고 나가는 불쌍한 수구들은 언제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까?

  일을 이루려면 속도전에서 승리해야한다. 머리에 먹물을 들인 선비들하고는 일을 같이할 수 없다고 유응부가 말했던가?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고 죽음을 맞이해야했던 유응부의 이 한탄스러운 말은 일을 결정하고 그 일을 이루는데 얼마나 속도가 중요한지를 알려준다. 당나라와 이정기 왕국과의 대결에서 당나라는 내부의 반란으로 스스로 몰락할 수 있었다. 주차가 당나라 덕종에게 반기를 들어 대진을 건국했다. 수도를 버리고 도망치는 덕종을 재빠르게 추격했다면 당나라는 멸망하고, 대진의 생명도 연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에 취해서 때를 놓치고, 결국 반격을 허용하게 된다. 마치 안녹산이 당나라의 수도를 목전에 두고, 눈병으로 인해서 당현종 추격 명령을 제대로 내리지 못해서, 아들의 손에 죽는 비운을 당한 것도 어쩌면 눈병으로 인해서 속도에서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명이 주어졌을때, 이를 실행해자. 천명의 때를 잃어버린다면, 그화가 다시 자신에게로 향한다고 역사는 가르쳐주고 있다.

 

3. 아쉬운점.

  이덕일은 다작을하고 있다. 그의 역사 서술에서 너무도 뻔한 그의 스토리 전개가 읽혀져서 박진감보다는 식상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는 그의 다작이 불러온 역효과일 것이다. 이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등장인물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중국사에 대한 지식이 한국사보다 일천한 나에게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중에서 너무도 많은 인물들이 이를 힘들게 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역사를, 그것도 당나라 현종을 중심으로한 당나라 덕종까지의 역사를 이렇게 세세하게 알게 된 점은 의미있는 일이었다.

 

  팟캐스트 '역사를 찾아서'에서 이정기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때문에 이정기에 대해서 왼만큼은 잘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이정기에 대한 지식은 얼마나 일천한 것이었는지를 새삼깨달았다. 망국의 한을 안은 고구려의 후예들이 겪어야 했을 비애를 생각하며 이 책을 덮는다. 한사람은 장군의 길을 걸으면서 당나라인으로 인정받으려 했다. 그리고는 비참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서 자신이 당나라인임을 인정받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사람은 당나라에 굽신거리며 살기를 거부했다. 당당히 독립왕국을 건설하여 제왕의 길을 걸으려했다. 그리고 4대 60여년이라는 시간 동안 당당히 하나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배신과 음모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정기 왕국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 그와함께 고구려 후예의 자취도 사라진다. 장군의 길을 걸었던 고선지와 제왕의 길을 걸었던 이정기의 역사는 해외교포들이 걸어야할 길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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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제왕 1 - 대륙의 별, 장군 고선지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이덕일'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탁월한 필력'이 떠오른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조차도 그의 탁월한 글재주는 인정한다. 기자들이 이덕일과 인터뷰를하면서도 이덕일에게 좋은 글을 쓰는 비결을 묻기도 한다. 그만큼 이덕일의 탁월한 글재주는 역사의 대중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새우깡에 소주를 먹을 돈만 있어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역사를 공부했다는 이덕일은 일약 스타 역사 작가가 되었다. 나도 그의 글재주를 배우고 싶다. 내가 이덕일에 비해서 못한 것이 무엇일까? 역사에 대한 열정? 역사에 대한 지식? 여러가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덕일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글재주가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한다. 그의 책을 20여권을 탐독하며 그의 글재주를 배우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덕일! 그의 글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탁월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책!

  '장군과 제왕'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별로 쌕시해보이지 않는 제목이라는 생각을 했다. '칼날위의 역사'와 같은 제목 도발적인 제목에 비해서 대중을 끌어당기는 힘이 약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프롤로그를 읽으며 뒤집혀 버렸다. 포롤로그에서 고선지 장군은 당제국의 장군으로 삶을 마칠지, 당을 버리고 제왕이 되어, 잃어버린 고구려부흥운동의 길을 떠나는 제왕의 길을 갈지를 선택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프롤로그는 마무리되고 '1장 당현종의 고구려인 동지 왕모중'이야기로 넘어간다. 얼마나 극적 구성인가! 이 프롤로그 하나로 왜? 제목이 '장군과 제왕'이어야하는지! 왜? 고선지 장군과 이정기 장군의 이야기가 한데 묶여 두권으로 출간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프롤로그에서 느껴지는 생생하고 현장감 넘치는 문체와 현지를 답사하고 관련 사진을 첨부하여 현장감을 높였다. 이 책의 가장 강렬한 문장들로 프롤로그가 꽉채워져 있다. 이덕일은 영화를 만들듯이 역사책을 구성하고 글을 쓰고 있다.

  이덕일의 탁월한 필력은 책 구석구석에서 돋보였다. 적절히 사료를 제시하여 역사적 사실성을 높이고, 적절한 역사적 상상력을 덧입혔다. 역사적 상상력과 사료 제시의 균형을 절묘하게 잡았다. 덕욱이 탄탄한 현장 답사를 통해서 생동감 있게 사건을 묘사했다. 특히 고선지 장군이 사막의 모래 돌풍을 뚫고 진군하는 모습을 마치 당시 현장을 직접 보는듯했다. 이덕일이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책을 서술하면서 그의 서술에 커다른 사실성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이덕일이 역사적 인물의 행동이유, 당시적 정치적 역학구도 파악이 탁월하다는 점도 있다. 측천무후, 당현종, 왕모중, 양국충, 이림보 등의 인물들의 역학구도를 내밀하게 분석하고 이를 책에 녹여낸 이덕일의 필력은 과히 역사가가 가질 수 있는 통찰력에 극치를 보는 듯했다.

  이덕일은 한장의 호흡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다음장에 전개될 이야기를 암시하여,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도록한다. 나도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2. 고선지 없는 고선지 평전

  이 책의 주인공은 고선지 장군이다. 이책을 고선지 평전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고선지 장군의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온 부분은 프롤로그와 4장 '고선지시대가 열리다.',  6장 '장군 고선지의 길'이다. 시작과 끝부분을 제외하고는 고선지 장군 보다는 당나라의 역사가 상세히 펼쳐져 있다. 당나라의 역사를 드라마틱한 소재를 중심으로 엮으며 고선지가 활약하던 시기 이전과 당시대의 중국과 비단길 주변의 광대한 나라에 대한 소개로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고선지 평전이 아니라, 당나라 현종의 역사라 해도 별 무리가 없는 책이다. 닭튀김에 닭살은 없고, 밀가루만 듬뿍 입혀 튀긴 '닭튀김' 같았다. 고선지의 등장을 갈망하면서 이책을 읽으며 지루함을 여러차례 느꼈다.

 

3. 3천 궁녀는 중국에 있었다.!!

  3천 궁녀!! 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당연히 '백제 의자왕'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3천 궁녀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백제 멸망의 원인을 마지막왕인 의자왕에게 떠넘겨, 후세왕들에게 교훈을 주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중국에는 3천 궁녀가 있었다. 당현종은 황후 외에 귀비, 숙비, 덕비, 협비의 4부인을 둘 수 있었고, 소의, 소용, 소원, 수의 등 9명의 빈이 있엇다. 여기에 첩여, 미인, 재인이 각각 9명, 그 아래 보림, 어녀, 채녀가 각각 27명이었다. 이렇게 법적으로 규정된 121명의 후궁이외에, 통칭 3천명이라 불리던 궁녀들이 있엇다. 그리고 30황자와 29명의 공주를 생산했으며, 당황제 30명 중에서 가장 많은 생산력을 자랑했다. 역시 중국은 스케일이 크다. 우리의 기준으로 분다면, 왕조가 항상 망해야하지만,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은 그정도는 애교였다.

  딸같은 어머니를 보았는가? 중국에는 딸같은 어머니를 둔 경우가 존재한다. 안녹산은 양귀비를 어머니로 모셨다. 양귀비가 29살, 안녹산이 45살!! 딸 같은 어머니를 둔 것이다. 심지어는 양귀비가 아이(안녹산)을 목욕시키는 놀이를 했으며, 당현종은 이를 보고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권력을 위해서는 자신의 자존심도 버리는 모습을 보며 권력이란 것이 그리도 좋은가?라는 반문을 해본다. 그렇게 안녹산이 지키려했던 권력도 양국충에 의해서 허물어져 버리고, 그는 반란을 일으킨다. 권력은 손으로 움켜쥔 바닷물과 같은 것이다. 쥐려할 수록,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더 큰 권력을 쥐려할 수록 더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조차 잃어버린다.

 

  이덕일의 여타 책에 비해서 그의 문장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그러나 고선지 없는 고선지 평전의 한계가 너무도 켰기에 이 책에서 느껴지는 실망감도 너무도 켰다. 고선지 장군에 관한 사료가 너무도 적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해보려하지만, 밀려드는 실망감은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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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 우리 역사 바로잡기 2
이덕일.김병기.박찬규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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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에 대한 책을 몇권읽어보았다. 이덕일의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라는 집어들었을 때, 별로 새로운 내용들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을 살펴보면서, 나의 예상은 산산히 부서졌다. 500여페이지에 달하는 장대한 책의 무게를 이겨내며 한장 넘기면서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1.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비롯해서 백제, 신라가 고구려를 계승하려는 의도도 없었고, 그러한 나라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역사를 단절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과학적인 연구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덕일은 우리역사를 단절적으로 보지않고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사료들을 모아,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임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역사를 단절적으로 인식하고, 우리 민족이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하며, 서양의 민족주의를 무비판적으로 한국사에 대입하려는 학자들에 비해서 이덕일은 우리 역사를 사료에 근거해서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2. 탁월한 고구려에 대한 설명

  이 책에서는 예맥족에 대한설명을 비롯해서 그동안 혼동을 일으켰던 여러 고구려에 대한 설명들을 명확하게 이덕일만의 시선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한 우리 역사의 시야를 동아시아로 확대하여 북위의 역사속에 살아숨쉬는 고구려인의 모습을 복원해내는데 성공하였다. 어디 이 뿐인가! 만주를 직접답사를 하며 내몽골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을 찾아보면서 우리 역사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고구려의 역사를 찾아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해서, 이 책을 더욱 의미있는 책으로 만들고 있다.

 

  한국의 강단사학계의 학자들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가슴한구석에 답답하다는 생각이든다. 대학에서 만리장성이 지금의 평야까지 이어졌다고 주장했던, 서** 수는 국정 한국사교과서를 집필하기도했다. 어쩌면 일제 식민사학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지금의 잘못된 역사를 만들어내는데 일조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덕일의 표현대로, '구각'에서 벗어나자! 그러면 고구려의 모습이 올바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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