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구려, 역사에서 미래로 - 생생한 사진과 깊고 넓은 해석으로 경험하는 고구려 역사 현장 다큐멘터리
윤명철 지음, 윤명도 사진 / 참글세상 / 2013년 5월
평점 :
"내 남편은 고구려새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고구려새"라고 부른다. 얼마나 고구려의 옛땅을 돌아 다녔는지, "날개뼈에 금이 가도 날아다니다가 뚝 부러져버렸습니다. / 기부스통 속에서 날개는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얼마나 그의 고구려 사랑이 광기에 가까웠으면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서 '고구려새'라는 시를 지었겠는가? 그의 아내로서는 속상할 수도 있지만, 윤명철과 같은 학자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행운이라 생각한다. 고구려에 미쳐서, 고구려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고구려새' 윤명철이 말하는 고구려의 역사를 만나보자.
1.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다.
이 책은 다른 역사책과 달리 저자의 감상이 많이 묻어난다. 마치 자신이 살았던 아름다운 고향을 기억하며 떠나버린 사람과 퇴락해버린 오늘을 못내 아쉬워하하며 발길을 돌리는 고향떠난 이의 아픔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의 감상은 장군총과 고구려 산성을 보면서 느낀 소감을 표현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고구려 사랑이 남다르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남다르다. 그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바라보고 있다.
고구려는 어느 나라를 계승한 나라일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부여를 계승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윤명철은 고구려는 원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나라라고 말한다. '다물'이라는 고구려말 자체가 원조선의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고구려의 원조선(고조선) 계승의식을 주장하는 윤명철의 주장에는 자못 결기가 느껴진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을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고 국민을 가르쳤던 시대'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원조선의 역사를 삼국시대와 단절해서 서술하는 한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을 서술하고나서, 고조선의 역사적 경험은 깡그리 무시되고, 다시 군장국가에서 연맹왕국으로 연맹왕국을 거쳐 중앙집권 국가로 성장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윤명철의 지적은 아쉽게도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일맥상통하도록 서술하지 못하고 단절적으로 서술하는 배경에서는, 고조선을 당당한 국가로 인정하지 못하는 고루한 자들의 인식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조선을 실체적 국가로 보고, 한나라와 당당히 맞섰던 강력한 국가로 보면, '재야사학자' 혹은 '유사사학자'라 매도하는 현실에서 어찌 고조선과 삼국의 역사를 누적적으로 발전한 우리역사로 서술하겠는가?
그러나 윤명철은 다른다. 그는 '삼국유사' 왕력편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기록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임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그의 글을 읽으며, 전률이 느껴졌다. 그는 동천왕 28년조 '왕검선인의 예터'라는 기록을 인용하며 평양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외교적 중요성을 지적한다. 고구려가 원조선을 계승했다는 그의 주장을 읽어가며, 고구려가 평양성을 중요시하고, 장수왕시기에 평양천도를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삼국사가기 동천왕 28년조에 편양을 왕검선인의 옛터 라고 서술한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이는 삼국사기를 서술한 김부식조차도 고구려의 원조선 계승의식을 모두 없애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장천 1호분 벽화에 신단수 아래의 곰이 그려져있다. 또한 각저총에는 곰과 호랑이가 그려져있기도하다. 이러한 사실들은 고구려인들이 단군신화에 대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윤명철!! 그는 우리 역사를 단절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누적적! 발전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고구려를 중심에 둔 역사 인식은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이어졌다.
"우리 민족은 대륙을 상실하고, 해양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주도권을 일부 빼앗김으로써 동아지중해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중핵조정역할 또한 빼앗겨버렸다. 만주 지역은 우리 민족사에서 멀어졌으며, 우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거란 선비 말갈들으이 종족들은 그 후에 오히려 우리를 압박하는 존재로 변했다. 한편 일본 열도에서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과 신라계도 참여한 '일본'이라는 국가가 670년에 탄생했다. 싸우고 갈라진 형제는 남보다 못한 법이다."313쪽
남한의 많은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평가하기 위해서 당시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삼한일통'이라는 개념도 후대에 만들어진 개념이라 주장한다. 삼국이 통일 되었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나타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조선과 삼국을 계승적 관계로 이해하지 않고 단절적으로 이해하는 그들에게는 삼국은 같은 동류의식을 가진 존재로 보기보다는 서로 다른 각각의 국가로 보일 수밖에 없다. 서구의 '민족'이라는 잣대로 우리 역사를 재단하려하니,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서구와 동남아시아는 1민족 1국가라는 개념이 근대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한반도라는 비좁은 곳에서 오랜 동안 살아오면서 일찍부터 동류의식이 싹텄다. 우리에게 동류의식과 같은 맹아적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과연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 자발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무조건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삼국통일을 하고 신라의 영토는 3배로 늘어났는가? 통일전의 신라의 영토와 통일 후의 신라의 영토를 비교하면 신라의 영토는 3배로 늘지 않았다.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 땅의 일부를 흡수한 것 뿐이다. 한반도 북부와 광활한 만주벌판을 중국에게 내어주고, 그속에 살았던 고구려인도 넘겨주었다. '통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면 삼국의 땅과 백성을 모두 통합했어야했다. 통일이라고 보기에도 부족하며, 그로 인해서 '중핵조정역할'을 비롯한 너무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싸우고 갈라진 형제는 남보다 못한 법이다."라는 윤명철의 말이 뼈를 때린다.
고구려를 중심에 둔 역사서술은 발해를 거쳐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진다. 발해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며, 조선은 고구려에 '반역'한 나라로 평가한다. 이러한 조선의 한계를 깨닫고 고구려를 다시 환생시킨 사람들이 있다. 윤명철은 그들을 '독립군들'이라 지적한다. 독립군을 가르칠 정신교육 교재를 집필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은 고구려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단재신채호 선생을 비롯해서, 발해사를 연구한 장도빈 선생은 독립군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에 주목했다. 대종교 또한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역사에 관심을 갖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때!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그때 고구려는 힘을 주었다. 고구려는 사라진 역사가 아니었다. 우리와 호흡하며, 우리에게 힘이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우리곁에 살아 있다.
2. 돋보이는 윤명철의 역사관!!
역사책을 읽다보면, 비슷한 역사관과 개성없는 서술에 실망할 때가 많다. 그런데 윤명철이 바라보는 역사는 달랐다.
'동아지중해 중핵 역할'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보통의 학자들이 고구려를 철갑기병을 앞세워 땅을 넓힌 나라라고 바라본다. 육로교통보다 수로교통이 발달한 우리의 역사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육지를 중심으로한 역사인식을 하고 있는 학자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데, 윤명철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육지와 연결시켜 '해륙사관'을 완성했다. 땟목을 타고 고구려가 항해했을 바닷길을 탐험하기도 했다. '해륙사관'은 바다 뿐만 아니라 '강'에도 주목한다. 윤명철은 만주일대를 '수륙적 시스템'으로 바라보았다. 배가 다닐 수 있는 60여개의 강에 주목하며, 육군이 출동할 때, 강상 수군이 강을 이용해서 보급을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고구려는 모든 강들을 자국이 계획하고 건설할 교통망 속에 편재했다 주장한다. 국내성을 비롯해서, 평양성, 한성은 항구도시라 지적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사료의 틀에 갖히지 않고, 실제 고구려의 땅을 밟으며 고구려의 역사를 찾으려 노력한 그였기에 남들이 보지 못한 고구려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남다른 그의 눈은 여타 학자들이 애써 무시하는 기록에도 주목한다. 5대 모본왕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 습격기사를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이덕일의 지적에 의하면 강단 사학자들은 고구려 본기의 이 기록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중국측 기록에도 나오는 이러한 기록을 믿지 않는 강단사학자들을 이덕일은 '식민사학자'라 말하며 비판한다. 그런데, 윤명철은 이덕일의 비판을 빗겨가며, '기마군단' 즉 기병을 중심으로한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해당 기록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걸어다니는 농경민족의 시각에서, 면을 중심으로 한 지배에 익숙한 기존사학자들의 해석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구려는 점과 선의 지배를 했으며, 빠른 기마전술을 구사했던 나라이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조선 세종 시기에 4군 6진을 개척하면서도 너무도 고난을 겪어야했는데, 4군 6진보다 몇십배는 많은 영토를 광개토태왕시기 단시일 내에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면을 지배하기 보다는 선과 점을 중심으로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고구려의 점령방식 때문이 아닐까?
연개소문을 당신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상당수의 학자들이 연개소문을 독재자로 평가한다. 그의 대당 강경책으로 인해서 고구려가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윤명철의 평가는 어떠할까?
"시대의 흐름과 고구려인들의 자유로운 기질이 연개소문이라는 인물과 그가 지향하는 적극적인 항전을 택한 것이다." 294쪽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연개소문 개인에게 돌리는 단순한 역사인식에서 벗어난 그의 시각이 다시한번 돋보인다. 연개소문이 죽인 영류왕은 고구려 1급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고구려의 지도 '봉역도'를 당에게 바쳤으며, 전승기념물인 '경관'을 허물어뜨리고, 당나라 진대덕이 고구려를 정탐하도록 했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고건무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실망스러운 모습이었다.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과 중국중심의 세계관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고개를 숙인다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삼국이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외부의 적을 끌어들인 역사를 뼈아프게 생각한다. 만약 삼국통일이 이뤄졌더라면,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된 중국 대륙의 당나라와 분열된 한반도의 고구려의 싸움에서 당나라가 유리한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이러한 현실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음을 윤명철은 지적하고 있다.
윤명철!! 그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몇안되는 역사학자이다. 윤명철은 중국의 시각! 서양의 시각! 미국의 시각! 심지어는 일본의 시각!으로 우리역사를 바라보는 자들과 차원이 다른 학자이다. 그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자취에도 관심을 두고 있다.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이 그들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만,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에 대해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던 것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우리 역사학계의 태두인 두계 이병도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그를 '진정한 역사학자는 이러해야하는구나'라는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고 찬양하는 학자들과 너무도 차이가 난다.
3. 윤명철이 던져준 화두들!!
'지식인이란 당연한 것에 시비거는 자'라는 말이 있다. 윤명철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지나쳤던 일들에 질문을 던진다. 그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적혀있지 않은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한 것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증거라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대학시절 서영수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노교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먼 훗날, 누군가 의도적으로 내다버린 글귀를 찾아내 우리 역사 속에 살려낸 것이다." 302쪽
이 글귀를 읽으며, '열하일기', '동국통감'에 적혀있는 글귀를 믿지 않은 이유가 과연 정당하지를 생각했다. 역사책을 편찬하면서 기존의 모든 서적들을 살펴보지는 못한다. 모든 비석들을 살펴보지는 못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모든 역사책을 보았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생각이었다. 김부식이 당시에 있었던 삼국의 기록 모두를 '삼국사기'에 담지도 않았다. 윤명철의 지적은 나의 안일한 기존 관념에 비수를 꽃았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광개토태왕'이라 하지 않고, 왜? '광개토대왕'이라 하지요?" 어느 학생의 질문이었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분명, '태왕'이라 적혀있지 않은가? 국사편찬 위원회에 질문을 했더니,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왕명을 적고 있습니다."라는 답년이 왔다. '삼국사기'보다 더 가치가 있고 정확한 광개토태왕에 대한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아니던가? 그렇다면 '광개토태왕'이라 교과서를 서술해야하지 않을까? 윤명철은 '광개토대왕'이라 적지 않고 '광개토태왕'이라 적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주도한 왕족 '고안승'을 '안승'이라고 서술한 현행교과서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윤명철은 '고안승'을 '안승'이라고 기록한 것은 '성을 뺀 하칭으로 기록'한 것이라 한탄한다. 지금도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고안승'을 '안승'이라 적고 있다. 교사의 설명이 없다면, 안승의 성이 '안'씨로 착각하기에 딱 좋다. 일부 EBS 강사는 안승이 백제 땅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며 신기하다는 듯이 설명하기도 한다. 고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한 사실을 알지 못하니, 엉뚱한 설명을 하는 일도 벌어진다.
공자의 '정명'사상을 말하지 않더라도, 역사에서 정확한 명칭을 사용해야한다는 상식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광개토태왕'과 '고안승'에게 어울리는 정확한 이름을 불러주고 있는지 물어본다.
윤명철은 고구려의 후예인 고선지와 이정기에 대해서도 눈길을 돌린다. 헝가리 출신의 역사학자 오렐 스타인이 '카르타고의 '한니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뛰어 넘는 위대한 군인으로 고선지를 평가했다. 탈라스 전투의 영웅 '고선지'를 기억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한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망국의 후예로서 누명을 쓰고 죽는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던진다. 윤명철은 질문을 던진다. "그의 삶속에서 고구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대학에서 동양사 개론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고선지는 중국인이다."라고 단정하는 노교수의 말은 매정한 느낌마져 들지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는 '현종에게 충성'을 간직한채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덕일의 '장군과 제왕'이라는 책이 더오른다. 이덕일은 고선지와 이정기를 묶에서 '장군과 제왕'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1권에서는 고선지를 2권에서는 이정기 일가를 다뤘다. 고선지가 당 현종의 장군으로서 억울한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면, 이정기를 고구려의 후예로서 당 조정과 맞서며 독립왕국을 건설했다. 이덕일의 탁월한 필력이 빛난 책이었다. 그렇다면, 고선지와 이정기는 자신이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을까? 윤명철의 지적대로 그들은 고구려와 옷을 얼마나 입어보았을까? 한국계 미국인 골퍼가 LPGA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열광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시키겠다고 언론에 밝혔다. 한국인 2세 3세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고선지에 대해서 씁쓸한 생각이든다. 고선지 보다는 이정기 일가에게서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4. 동의하지 못하는 것들
윤명철이라는 탁월한 역사가의 책을 읽으면서 못내 아쉬운 점이 몇개 발견됐다. 그중에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몇가지를 살펴보자.
윤명철은 장군총을 동명왕릉이라 주장한다. 장군총은 장수왕릉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는 현실에서 윤명철의 주장은 다소 쌩뚱맞았다. 그는 평양천도 후에, 기존 기득권세력이 강력하게 자리잡은 국내성에 장수왕이 자신의 무덤을 만들리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단군신화와 주몽신화의 논리가 담긴 건축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윤명철의 주장에 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가장 왕벽하고, 태왕릉보다 정교하게 건설된 장군총은 동명왕릉일 수 없다고 본다. 동명왕릉은 태왕릉보다 앞서 건설되었다고 본다면, 태왕릉 보다 건립시기가 늦을 것으로 추청되는 장군총은 동명왕릉일리 없다. 태왕릉 이후에 건설된 큰 규모의 무덤은 장수왕릉일 수밖에 없다. 그가 평양으로 천도하였지만, 이미 살아 있을때, 능을 건설했을 것으로 본다면, 죽어서 국내성에 묻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더욱이 국내성 세력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그는 국내성에 묻혀야했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의 무덤에는 벽화가 없을까? 물론 신라에는 벽화가 없다. 그러나 백제의 무덤에는 벽화가 있었다. 공주 송산리 제6호분에는 사신도가 있으며, 능신리 동하총 석실분에는 사신도와 연화와 구름이 그려져있다. 비록 많이 훼손되어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백제와 신라 조차도 무덤안에 그림을 그려 놓지는 않았다.(242쪽)"는 윤명철의 지적을 명백한 오류이다.
신라와 발해는 서로 대립만했을까? 윤명철은 "비록 유민들의 피눈물 바다에서 발해라는 새나라가 태어났으나, 그들은 신라와는 영원히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신라와 발해는 교류를 했다고 적혀있다. 그 대표적인 근거가 '신라도'이다. 발해와 신라 사이에 길이 있었다는 사실은 두나라가 교류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어찌 옥의 티가 없는 책이 있겠는가? 윤명철의 주장에 일부는 동의하지 않고, 일부는 오류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은 나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자의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맹위를 떨치고 있을때,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 후, 과연 우리는 고구려에 대해서 얼마나 더 알고 있을까? 한때의 관심이 일시에 지나가고 다시 고구려를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걱정이된다. 이러한 시기에 윤명철의 책을 읽는 것은 고구려를 다시 기억하는 길이된다. 기억하자! 잊지 말자! 영화 '암살'에서 영화속 주인공들은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암살'의 주인공들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했던 애원은 고구려인들이 우리에게 하는 절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