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크인 이야기 - 흉노.돌궐.위구르.셀주크.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타산지석 21
이희철 지음 / 리수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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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국이 있다. 기록도 주변국에 의해서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 그런 제국도 있다. 바로 유목민족들이 세운 제국이 기록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린 신기루와 같은 제국들이다. 그래서 이희철의 '튀르크인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이 책에는 흉노 제국에서부터 돌궐제국, 위구르 제국, 셀주크 제국,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광대한 역사를 서술했다. 흉노, 돌궐, 위구르, 셀주크 제국은 한국사와 동아시아사, 세계사 교과서에서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제국이다. 그러하기에 이들 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 보고 싶었다. 그들은 어찌하여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고서는 홀연히 사라졌을까?

 


  초원의 최강자 흉노 제국은 중국을 괴롭히며 세력을 과시한다. 중국 한나라는 화평을 위해서 공주를 흉노 선우의 아내로 바친다. 그녀들을 화번공주라한다. 매년 비단을 비롯한 수많은 물품이 한나라에서 흉노로 바쳐진다. 이러한 모습은 돌궐제국과 위구르제국으로 이어진다. 

  강대한 제국도 내부에서 시작된 균열에 의해서 순식간에 무너진다. 흉노제국은 한무제의 공격으로 지쳐가기 시작했다. 서흉노와 동흉노로 분열되더니, 동흉노는 다시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었다. 

  흉노의 뒤를 이어 제국을 건설한 돌궐제국도 제1 돌궐제국의 경우 서돌궐과 동돌궐로 분열하고 내부 부족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물론, 수나라 장손성이 돌궐의 내부 분열을 획책한 면이 있다. 제2 돌궐 제국도 중국의 이간책과 유목부족의 이탈과 반란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결국은 멸망의 길을 걷는다. 

  위구르 제국 또한 지배 씨족 간의 갈등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다. 한번 제국이 세워지면 5백년 동안 지속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일반적인 모습인데 반해서 튀르크 계열의 유목제국은 흉노 제국을 제외하고서는 우리처럼 장기간 국가를 유지한 경우가 드물다. 물론 중국의 내부 분열책이 작동하기도 했지만, 외부의 분열책에 너무도 쉽게 분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목제국의 태생적 한계로 때문으로 보인다. 

  유목제국의 태생적 한계란 무엇일까? 유목민이 세운 제국이기에 이동할 수밖에 없다. 잦은 이동은 문화를 축적하기가 농경민족보다 어렵다. 더욱이 유목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민족적 자각을 이루기가 너무도 힘들다. 부족단위로 이동하며 생활하기에 민족의식보다는 부족의식이 강하고, 국가의 이익보다는 부족의 이익이 더 중요시된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가 중국의 분열책에 쉽게 균열되는 이유이다. 

  그래서일까? 튀르크 계열의 유목민들은 돌궐문자와 위구르문제를 만들며 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하기도했다. 특히, 위구르족은 정착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위구르 제국은 멸망했다.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셀주크 제국도 짧은 대제국 시기를 지나서 여러 셀주크국으로 분열한다. 

  이러한 유목제국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며 600년 대제국이 건설된다. 바로 오스만 제국이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가 당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돌궐계 유목민의 도움 때문이다. 탈라스전투의 승리로 이슬람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아아시아 내류으로 전파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고, 튀르크 세계에 이슬람교가 퍼진다. 슬람교를 받아들인 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 시기에 화려한 제국의 꽃을 피운다. 서아시아에 정착한 튀르크족은 티무르제국의 공격으로 한때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이를 극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슬람교로 제국을 하나로 묶고, 탁월한 그들의 전투력으로 서아시아를 비롯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유럽을 위협한다. 

  강대한 세계 제국 오스만이 쇠퇴한 원인은 무엇일까? 학자마다 다양한 원인을 제시하겠지만, 나는 제국의 전성기에 쇠퇴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말하고 싶다. 그 쇠퇴의 씨앗은 무엇일까?

  첫째, 제국의 강력한 군대 예니체리가 쇠퇴의 씨앗이었다. 씨앗을 뿌리면서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날지 알 수 없다. 햇빛과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며 탐스런 꽃을 피울 수도 있지만, 폭풍우와 가뭄에 꽃을 피울 수 없을 수도 있다. 더욱 심각한 일은 그 씨앗이 내가 원하는 꽃을 피울 수 없고 독초로 자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니체리라는 군대를 만들었을 때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청소년들을 개종시켜 술탄의 충실한 군대가 되길 기대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제국의 팽창이 중지되자 전리품이 사라지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보수만으로는 살 수 없어 부업을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마다 보수를 올려받기를 원했고 풍부한 보너스를 바랬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술탄을 죽이고 마음에 드는 새로운 술탄을 앉히기도했다. 예니체리라는 씨앗이 제국의 독초로자랄지 누가 알았겠는가!

  둘째, 오스만제국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대제의 황후 휘렘 술탄이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휘렘 술탄은 자신의 아들을 술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총리 이브라힘파샤를 처형하고 차기 술탄으로 지목된 무스타파를 죽였다. 아무리 탁월한 군주라할지라도 자신의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그는 탁월한 군주라할 수 없다.

  조선의 세종과 정조를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서로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종과 정조의 가장 큰 차이는 세종 이후에 조선은 계속해서 발전하였지만, 정조 사후 조선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왕권에 걸림돌을 미리 제거한 태종이 세종에게 있었으나, 정조에게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할아버지 영조가 있을 뿐이다. 영조는 정조에게 정치적 족쇄를 채워 놓았고, 정조는 그 족쇄를 벗어 던지기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리고 조선은 쇠퇴해갔다. 

  술레이만대제는 앞선 탁월한 술탄의 기반위에 나라를 운영하며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제국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면 후계자를 잘 세웠어야했다. 그는 그러지 못했고 제국은 쇠약해져갔다. 

  셋째, 무리한 원정으로 제국의 피로도가 높아졌다. 술레이만대제시기 제국은 최대 판도를 자랑했다. 급속한 팽창과 이로인한 피로도는 싸여만 갔다. 제국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내부 산업을 활성화시켜야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이를 외부에서 수입했다. 서구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내부의 산업을 발전시키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그러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제국의 팽창과 이렇게 얻은 부를 외국에서 필요한 물품을 수입해서 해결했다. 

  그리고 제국의 팽창이 멈추자 제국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재정이 악화 되었다. 예니체리에게 충분한 급료와 보너스를 줄 수 없었다. 무리한 원정에서 오는 피로도를 낮추면서 경제적 내실을 다지는 전략을 선택했다면 오스만 제국의 쇠퇴는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팽창에서 오는 이익을 생각하며 앞만 보며 달려온 제국은 팽창이 멈추자 쇠퇴의 길을 걷는다.

 


  "북방 유라시아의 주인공은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남긴 '튀르크'족과 '몽골족'이었다. 튀르크족으로 북방 유라시아에서 최초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것은 흉노였다."(21쪽)


  몽골 다문화학생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그 학생은 나에게 몽골에서는 흉노의 역사를 몽골의 역사로 배운다며 그것이 맞는지 물어보았다. 나로서는 몽골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남긴 역사기록이 없기에 흉노를 몽골의 역사라 단언할 수 없었다. 이희철 자자의 '튀르크인 이야기'에서는 흉노의 역사를 튀르키예의 역사로 규정하며 역사서술을 하고있다. 그리고 현재 '예니 튀르크예 전략 연구원'에서는 튀르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역사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역사를 흉노 제국과 돌궐제국으로 확장하며 자신의 뿌리를 재조명하고 있다. 어쩌면 흉노의 역사는 몽골의 역사이기도하면서 튀르키예의 역사일수도 있다. 튀르키예와 몽골의 흉노 역사에 대한 치열한 뿌리찾기를 바라보며, 역사는 기록하는자, 기억하는자의 것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실감난다. 기록되지 않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바라보며  우리는 어떠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올바른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새로 정립하는 것은 제국 발전의 기초임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ps. 좋은 책이지만 옥의 티가 있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E.H카의 말"(8쪽)

   =>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은 크로체가한 말이다. 수정해주길 바란다. 

   책에 지도한장 없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도가 수반되어야한다. 힘들겠지만, 튀르크인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지도를 첨부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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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월왕의 머리가 이미 한 왕조 복궐에 걸렸다. 선우가 한 왕조와전쟁을 하겠다면 한 나라의 천자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변경까지 출병하여 기다릴 것이다. 선우가 만약 전쟁을 원치 않는다면 응당 한왕조에 신하로 복속해야 할 것이다. 어찌 멀고 먼 곳까지 도망쳐 막북 추운 곳에 숨어 있는가?-무제가 흉노에게 전한 말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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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 - 대사가 바라본 튀르키예의 과거와 현재
조윤수 지음 / 대부등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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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의 나라 튀르키예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튀르키예의 역사에 관한 책을 몇권 읽어 보았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지나치게 학술적인면에 치우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학술적인 깊이가 없는 책도 있었다. 대사가 바라본 튀르키예의 모습은 어떠할까? 너무 학술적이지도 않으면서도 재미와 깊이를 안겨줄 수 있을까?


  이 책은 두장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장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이라는 제목으로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600년 오스만 제국의 빛나는 영광과 유럽의 병자로 쇠락해가는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11개 주제로 구성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복자 메흐메트 2세와 셀림 1세의 잔혹성이다. 유교의 왕도정치를 강조하는 우리의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은 너무도 잔혹하다. 술탄이 된자는 형제를 죽였다. 심지어는 조카까지 죽인자들도 있다. 세조가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되었고, 사육신 사건 이후에 단종을 죽인 것을 두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유교적 왕도정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있어서는 있어서는 안될 폐륜적 행태가 계유정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역사 속의 비극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폐륜에 비하면 애교수준이다.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는 아버지 베아지드 2세를 내쫓고 아버지 베아지드 2세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낙향하는 길에 죽었다. 아마도 셀림 1세의 명령으로 독살된 것으로 추청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내쫓고, 독살로 생을 마감하게한다는 것은 유교적 관점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폐륜중에서도 아주 극악한 폐륜이다. 

  유교가 망해야 조선이 산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나도 한때 그러한 생각을 했다. 완고한 노인들이 자신의 보수성을 유교로 합리화했다. 그런데, 세계의 역사를 살피면서 우리의 역사가 타국에 비해서 잔혹하지 않은 이유는 유교의 역할이 컸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폭군이 등극했다할지라도 신하들은 백성을 하늘로 여겨야한다며 군주에게 간언했다. 연산군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한 내시 김처선은 연산군에 의해서 액사했다. 예전에는 문약한 붓의 문화를 가진 조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바라보며, 강한 칼 문화의 잔혹성을 보면서 부드러운 붓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두번째 장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자화상이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에르도안이라는 두명의 정치인을 통해서 튀르키예 공화국를 바라보고 있다. 저자 조윤수가 대사 출신이다보니, 튀르키예의 과거 역사보다는 현재의 역사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오스만 제국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서 탄생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라질뻔한 오스만 제국을 그가 살려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설했다. 이슬람교와 현실 정치를 분리시키고 서구화 개혁을 추진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서아시아 지역에서 그래도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국가 튀르키예를 건설했다. 튀르키예 사람들이 그를 가슴 깊이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역사에 비유한다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쳐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건설해 놓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치인이 등장했다. 에르도안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최고 권력에 오른 것은 이명박과 비슷하다. 이명박은 서울시를 하느님에게 봉헌한다는 말을 하여 빈축을 산적이 있다.(이명박 시장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그리고 그의 대통령 재임 시기에 다스 실소유주 논란을 시작으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자원외교 비리 등등 수많은 구설수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는 정권에서 물러나고 몇년 후에 감옥에 갔다. 

  에르도안은 이명박보다 더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총리가 되어 튀르키예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의원내각제에서 대통령제로 정체체제를 바꾸었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다. 20여년이라는 장기간 권력을 장악한 그를 보며 이명박 보다는 성공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에르도안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만들어 놓은 튀르키예 공화국를 뒤집어 엎기 시작했다. 우선, 아타튀르크가 중요시한 정교분리에 손을 데기 시작했다.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다시 강화시키고, 박물관으로 쓰이던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꾸어 이슬람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아타튀르크의 서구중심 외교에서 탈피해서 이란과 러시아에 무게 중심을 둔 외교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에르도안의 행보를 보면 그는 술탄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한다. 이승만, 박정희와 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에르도안이 현명한 처신을 하길 바란다. 


  과거의 화려한 역사에 매몰된다면 역사를 발전할 수없다.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역사를 부활하려는 에르도안! 그러나 그는 정교일치의 오스만 제국의로 돌아간다면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튀르키예 공화국은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가 오늘의 튀르키예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면 오스만 제국이 600년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핵심적 이유를 제대로 파악해야한다. 능력 있는 자가 술탄이 되었으며, 종교적 관용정책을 실시하여 탁월한 인재를 선발했다는 오스만 제국의 장점을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에 적용할 방법을 찾아야할 것이다.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튀르키예 사회를 옥죄로한다면 영광의 오스만 역사를 재현하기 보다는 유럽의 병자를 부활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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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01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튀르키예의 미래 발전 열쇠를 에르도안에게 맡긴 국민들은 과연 만족하고 있을까요?

강나루 2023-10-08 10:32   좋아요 0 | URL
윤통에게 미래를 맡긴 우리와 비슷하겠죠.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0-01 0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말씀 해주신 오스만제국의 역사를 보면서 모든게 일장일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2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16
조르주 루 지음, 김유기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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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출현 이후의 서아시아사(중동)에 관한 역사책들을 비교적 많이 출판되어 있는 반면에, 무지의 시기라 불리우는 이슬람 출현 이전의 역사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단편적인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 서아시아의 역사 전체를 알고 싶은 마음에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읽었다. 이 책에 대한 칭찬으로 인터넷이 도배되어 있지만, '무지의 시기'에 대해서 지식이 일천한 나에게는 칭찬할 수없는 책이다. 지도와 연표가 본문 서술과 분리되어 책의 맨뒷페이지에 제시된 점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없는 출판사의 출판편의주의에 분노하게 만든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되어 독자의 이해를 유기적으로 돕는 편집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책들 중에서 무지의 시기를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기에 불편한 마음을 꾹참고 읽어 내려갔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저부조작품에 대한 설명이었다.(168쪽) 조르주 루는 "군사들이 지여엥서 쉬면서 말을 돌보고 짐승을 도살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하프와 탬버린에 맞춰춤을 춘다."라고 묘사하며 "그것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역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병사들의 고닮픔과 희노애락을 표현한 저부조작품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풍겨나온다. 잔혹한 아시리아 군대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병사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살인마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저부조 작품을 바라보면 그들도 원치않는 전쟁에 끌려나온 우리의 이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왕과 귀족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이름없는 평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아시리아의 영광도 있었다. 저자 조르주 루가 감탄했던, 그 저부조 작품을 사진으로 첨부해주었다면, 나도 조르주 루가 느꼈던 감동을 느겼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까마득하게 먼 오래전의 서아시아의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사를 가르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나에게 하는 질문이다. 우리 역사도 아니고 멀고 먼 서아시아의 역사를, 그것도 아주 오래전의 역사를 배워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자 조르주 루의 말을 빌어 말한다면,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뉴턴에 자신이 멀리 볼 수 있는 이유는 거인의 어깨위에 서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는 거인이 닦아 놓은 토대 위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서양 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로마 문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유럽 문명은 활짝 만개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비롯한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서구세력이 주도한 근현대사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면 배울 수록, 역사 앞에 겸손해진다. 오늘의 문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아시아의 역사를 들어다 본다. 

  오늘의 문명이 성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왜 단절되었을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정치는 격변하더라도 이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단절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 시기에 기록하기 쉽고 배우기 쉬운 아람어가 보급되었다. 이로인해서 아카드어와 수메르어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언어를 잃은 민족은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저자 조르주 루는 "자기 언어를 잊은 민족은 동시에 자기 과거를 잊고 머지 않아 자기정체성을 잃는다."(245쪽)고 말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철저한 파괴에 의해서 문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를 잃어버림으로써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사라진 것이다. 그후,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강줄기가 변경되면서, 강주변에 있었던 도시들은 쇠락해졌으며, 강주변의 수로 관리 또한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번성했던 도시들은 하나, 둘 모래속에 파묻혀버렸다. 그러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도 역사속에 파묻혀 버렸다.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다시 모래 속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들은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 조차도 자신의 조상들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 멀리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을 찾아가 입장료를 내고 유물을 보아야한다. 그런데, 더욱 슬픈 사실은 걸프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사건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유적들이 파괴되고 있다. 저자 조르주 루는 "현대 무기가 이 위대하고 매력적인 문명의 마지막 증거를 없애지 못하도록 신께 기도하자."라고 책을 끝맺고 있다. 이슬람 사람들이 많이하는 말이 있다. "인샬라"! 신의 뜻대로라 뜻의 말이다. 찬란한 고대 문명을 이룩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더 이상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기를 신께 기도한다. 인샬라~~


ps.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기록들을 참고로 기록해둔다. 


<히타이트군대의 바빌론 공격>

  삼수-디타나의 시대에 하티인들이 아카드 지방을 향해 진군해 왔다. 그러고 나서 그(무르실리스)는 바빌론으로 가서 바빌론을 파괴하고 후리인들을 무찌르고 사람과 물건을 바빌론에서 하투샤로 끌어갔다.(31쪽)-바빌로니아 연대기


<키루스의 움만-만다(메디아인) 정복>

  네가 말하는 이 움만-만다와 그들의 나라, 그리고 그들과 동맹을 맺은 모든 왕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셋째 해에 마르두크가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안샨의 왕이며 자신의 젊은 종인 키루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키루스)는 수많은 움만-만다 사람을 적은 수의 군대로 물리쳤다. 그리고 움만-만다의 왕 이슈투메구(아스티아게스)를 포로ㅗ 작아 끌어와 자기 나라에 가두었다.-211쪽


  이슈투메구 왕은 군대를 동원해 안샨의 왕 키루스를 잡기 위해 진군했다. (중략) 이슈투메구의 군대가 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포로가 되었다. 군대는 왕을 사슬에 묶어 키루스에게 넘겨주엇다. -211쪽 '나보니두스의 연대기'


<키루스의 바빌로 점령>

  타슈리투 월(9~10월)에 키루스가 티그리스 강변 우파(오피스)에 있는 아카드의 군대를 공격하자 아카드인들은 퇴각했다. 그는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 제14일에 시파르는 전투 없이 점령 당했다. 나보니두스는 달아났다. (중략)

  제16일에 구티움의 총독인 우그바루와 키루스의 군대가 전투 없이 바빌론에 들어갔다. 그 후 나보니두스가 돌아와서 사로잡혔다. 월말까지 구티인의 방패병들이 에사길의 문을 포위했지만 에사길이나 (다른) 신전에서 (의식)의 중단은 전혀 없었다.(중략)

  아라흐삼누 월(10~11월)3일에 키루스가 바빌론에 들어갔다. (도로가?) 그의 앞에서 가득 채워졌다. 키루스는 바빌론 전체에 인사했고 바빌론에는 평화가 깃들었다.-214쪽, '나보니두스의 연대기'


  비빌론의 모든 주민과 수메르와 아카드 모든 지방의 주민은 그 군주들과 총독들과 더불어 그(키루스)의 앞에 몸을 굽히고 그의 발에 입을 맞추면서 그가 왕위를 얻은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그 눈부신 얼굴에 기쁨으로 경의를 표했다.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고 손해와 재난을 피하게 해 준 주인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이름을 그렸다. -214쪽


<다리우스의 바빌론 점령>

  나는 그에게 말했다. '가거라!' 나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힌 이 바빌로니아의 군대와 싸워라!' 빈다파르나는 (페르시아) 군대를 거느리고 바빌론을 향해 진군했다. 아후라마즈다는 나를 위해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빈다파르나는 아후라마즈다의 뜻에 따라 바빌로니아인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마가자나 달의 22일이 흐른 후 그는 아라카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나는 명령을 내렸다. '이 아라카와 그의 주요 지지자인 귀족들을 바빌론에서 말뚝에 박아 처형할 것이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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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의 역사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15
조르주 루 지음, 김유기 옮김 / 한국문화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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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사 교과서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대해서 설명이 나와 있지만, 제대로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교양을 쌓고자 선택한 책이 바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이다.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글들은 '최고의 책'이라는 감탄들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나로서는 쉬운 책만은 아니다. 물론, 메소포타미아의 역사1만 읽고 무리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쉽지 않은 책이다. 

이 책에 쉽지 않은 책일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은 나에게 있다.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이책에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유적지와 지명들의 위치를 나로서는 알 수없다. 적어도 독자를 배려한다면, 해당 쳅터에 등장하는 지명을 지도에 표시하서 삽화와 함께 제공해야하지 않을까? 처음듣는 지명들의 홍수로 나의 머리속은 홍수에 떠밀려가는 나룻배의 모습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이책에는 왕조 계보도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미리 살펴보니,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의 말미에 연표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잘게 쪼개서 해당 쳅터에 배치했다면, 책을 읽는 것이 무척 수월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나온 역사책들에는 도표와 계보도가 잘 나와 있다. 이러한 배려를 타국의 저자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은 무엇때문일까?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재미있는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다. 카슈시대(기원전 15세기)에 쓰인 바빌로니아 연대기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에라-이미티 왕은 엔릴-바니라고 하는 정원사를 대리왕으로 자기 왕위에 앉히고 그의 머리 위에 왕권을 씌웠다. 에라-이미티가 너무 뜨거운 죽을 삼키다가 궁전에서 죽자 엔릴-바니는 왕위를 차지하고는 돌려주려 하지 않았고, 이리하여 군주가 되었다.-245쪽


불길한 징조가 있어서 왕이 신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정원사를 대리왕으로 세웠는데, 왕이 갑자기 죽음으로서 정원사가 왕의 직책을 내려놓지 않고 실질적 왕이 되었다는 읍픈일이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있었다.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보겠다는 도전을 연기서 멈출수는 없다. 이제 '메소포타미아의 역사2'를 도전해 보자.


ps. 기록들을 첨부한다. 

<수메르의 종교 사상>

깊은 꿈 가운데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의 키는 하늘에 이르렀고 그의 키는 땅에 닿았다. .... 그의 오른쪽과 그의 왼쪽에는 사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는 나더러 자기를 위해 신전을 지으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심장(=바람)을 이해하지 못하했다. .....갑자기 한 여자가 나타났다. 이 여자는 누가 아닌가? 이여자는 누구인가? .... 그 여자는 손에 빛나는 금속으로 만든 갈대를 쥐고 있었다. 하늘의 아름다운 글씨가 쓰인 토판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220쪽

<고대 왕조 시대-수메르>

모든 나라의 왕 엔릴이 루갈자게시에게 이 나라의 왕권을 주고, 이 나라 앞에서 그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모든 나라가 그를 섬기게 하고,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나라가 그의 법에 복종하게 했다. 그때 그(엔릴)는 아래 바다(아랍-페르시아 만)에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지나 위 바다(지중해)까지 그(루갈자게시)에게 안전한 길을 허락했다. 나라들은 평화롭게 살았고 백성은 즐거운 가운데 밭에 물을 댔으며 수메르의 모든 왕조와 모든 나라의 군주가 우르크에서 그의 주권의 법에 복종했다. -1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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